“역겨운 당신 피를 물려받은 애라서 걔가 내 배 속에 있으니까 구역질이 나더라. 너랑 함께했던 내 과거가 너무 후회스러워,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난 그냥 당신이랑은 모르는 사람으로 사는 걸 택할 거야.”박진성도 조금 아파봤으면 해서 한 말인데 민여진의 바람대로 박진성은 가슴이 찢기는 듯한 느낌과 함께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차오름을 느꼈다.제가 없으면 죽을 사람처럼 굴며 모든 사랑을 내어주던 민여진이 이젠 울부짖으며 저한테 역겹다고 하는 건 눈으로 보고도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박진성은 이 모든 게 방현수 때문인 것 같았다.“민여진,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뭐 정말 착한 사람 같아 보여?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시 상기시켜줘야겠네.”박진성은 민여진의 턱을 잡아 올리며 이를 갈았다.“네가 방금 한 말이 진심이든 아니든, 내가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줄게.”말을 마친 그가 문을 세게 열며 나가버리자 민여진은 가빠오는 숨에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그런데 박진성의 마지막 한마디 때문에 그녀는 좀처럼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화가 나면 제 눈에 거슬리는 사람은 모조리 치워버리는 게 박진성이었기에 그녀는 혹시라도 방현수가 위험해질까 봐 당장 이불을 걷어내고 맨발 바람으로 뛰쳐나가 다른 사람에게 핸드폰을 빌려보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사람들의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저기 문채연이다! 차로 사람을 치어서 죽인 살인범이야!”“십 년형 받았다고 하지 않았어? 형 적게 받으려고 얼굴까지 망가뜨린 거 좀 봐, 사람 죽인 년이 자기는 살겠다고 병원엘 와? 더러운 년!”“이제야 얼굴이랑 마음이 좀 같아 보이네, 똑같이 못생겼잖아. 얼른 찍어서 저 못생긴 얼굴로 인터넷에 뿌려버려, 감옥에서는 대체 어떻게 빠져나온 거야?”저에게로 달려오는 사람들의 인파가 점점 몰려 앞이 보이지 않았던 민여진은 속수무책으로 그들에게 밟힐 수밖에 없었다.옆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를 부축하기는커녕 오히려 비웃고만 있었다.“이게 살인범이 받아야 할 벌
하지만 방현수는 그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민여진의 얼굴을 더 깊숙이 밀어 넣으며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그건 잘 모르겠지만 당신들이 병원에 들어와서 이런 식으로 촬영하는 게 불법이라는 건 알아요. 나갈 거니까 다들 비키세요.”“둘 다 똑같은 연놈들이네!”그때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치자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주먹을 들고 달려들기 시작했다.수액 걸이로 민여진의 등을 내려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걸 본 방현수가 빠르게 그녀를 잡아당겼지만 민여진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상처를 입고 말았다.“여진아! 괜찮아? 어디 다쳤어? 봐봐!”“나 괜찮아요.”“거짓말 말고!”“얼른 가요, 나 찾아온 사람들이니까 현수 씨는 이런데 엮이지 말고 빨리 가라고요. 현수 씨가 나 대신 다치는 거 싫어요.”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민여진에 방현수는 그녀를 더욱더 꼭 껴안았다.“널 혼자 두고 가는 그런 나약한 남자 아니야 나.”그때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온 박진성은 방현수와 민여진이 서로를 꼭 안고 있는 걸 보자 또 혈압이 치솟았다.순식간에 표정을 굳힌 그가 바로 달려가 그 둘을 떼어놓으려 하자 문채연이 나서서 박진성을 말렸다.“진성 씨, 당신이 민여진이랑 어떤 사이였는지 잊었어요? 지금 저기 끼어들면 대영그룹 전체에 악영향을 미칠 거예요. 저 사람들 다 반쯤 돌아있는데 당신까지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요!”아무리 화가 나도 이성이 남아있는 이상 박진성이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는 또 주먹으로 벽을 내려쳤다.“대체 누가 저 사람들을 불러온 거야? 얼굴도 다 망가져 버렸는데 어떻게 알고 온 거지?”“큰 죄를 지었으니까 병원에서 알아본 사람이 있었겠죠.”분노를 삭이던 박진성은 바로 경호원들을 불러 사람들을 보내고 다른 사람을 시켜 방현수와 민여진을 뒷문 쪽으로 불러내게 했다.모든 일이 해결되고 민여진과 방현수가 제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박진성은 이를 갈며 곧바로 민여진을 품에 안았다.“뭐 하는 짓입니까!”방현수가 이번에도 박진성을 향해 주먹을
“진성 씨!”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문채연이 초조한 얼굴로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만큼 주먹을 꽉 쥐며 다가왔다.“기자들이 왔어요. 빨리 나가야 해요! 병원에 있는 거 걸리면 큰일난다고요!”그 소리를 들은 박진성의 눈빛에 짜증스럽게 변했다.‘대체 어떻게 알고 기자들까지 찾아온 거야...’다급해진 그는 시선을 민여진에게로 향했다.“민여진, 지금이라도 나랑 가자. 아직 늦지 않았어.”“박진성 씨의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방현수는 온몸이 아프고 등이 욱신거렸지만, 전혀 상관없다는 듯 민여진을 품에 끌어안았고, 박진성을 바라보는 눈빛 또한 날카롭게 빛났다.“여진이는 내가 지킵니다. 박진성 씨가 신경 쓸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방현수 씨가 뭔데, 지금 감히 나한테 도발하는 겁니까?”순간 박진성의 분노가 폭발했다.그때, 대포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후문까지 몰려와 출입구를 틀어막기 시작했다.그의 전처에 관련된 소식은 언제나 뜨거운 화젯거리였다.문채연은 불안하게 박진성의 소매를 잡아당겼고 박진성은 마지막으로 경고하듯 말했다.“민여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줄게! 지금 나를 따라가면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어!”박진성은 자기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최대로 양보한듯해 보였지만, 민여진에게는 그저 또 한 번의 상처가 됐을 뿐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박진성은 한마디 덧붙였다.“민여진, 네가 원하는 게 이런 거 아니야?”하지만 박진성을 바라보는 민여진의 동공에는 아무런 기대도 없는 공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진성 씨, 제발 가요! 대영 그룹을 위해서라도 가야 해요! 그리고 저를 위해서도요... 기자들 앞에서 제 얼굴이 알려지면 어떡하라고요?”그녀는 얼마 전 얼굴을 성형한 참이었다.박진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고, 뒤이어 민여진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 하지만 민여진은 그를 보는 체조차도 않았다.“민여진, 넌 결국 무릎 꿇고 나한테 빌게 될 거야.”그 말을 남기고 박진성은 문채연과 함께 떠났다.보이지는 않았지만,
아직 어린 듯 앳된 목소리였지만 무슨 일인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민여진은 순간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했다.“누구신데 그러세요?”“누구냐고요? 그걸 물어볼 자격은 있다고 생각해요?”갑자기 나타난 낯선 여자는 윤소정이었고 그녀는 불꽃 같은 눈빛으로 민여진을 바라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민여진 씨 같은 눈먼 여자 하나 때문에 현수 오빠가 인생을 통째로 쳤다는 거 알아요?”민여진의 손이 옷자락을 단단히 쥐었다.“현수 씨가... 어떻게 됐는데요?”“어떻게 됐냐고?”윤소정의 목소리가 떨렸다.“현수 오빠는 민여진 씨를 지키려다 얼굴 하나 제대로 팔렸죠! 사진이 인터넷에 퍼졌고 사진 아래에는 전부 오빠를 향한 비난뿐이에요! 오빠는 환자를 살려야 하는 의사인데 그쪽 때문에 병원에는 발도 못 붙이게 생겼다고요!”윤소정은 숨을 몰아쉬며 이어갔다.“그리고 민여진 씨의 전남편이 박진성이라면서요? 그사람은 지금 방씨 가문을 완전히 몰락시키려고 작정했어요! 모든 계약을 해지한 것도 모자라, 누구도 방씨 가문과 손잡지 못하게 막아버렸어요. 방씨 가문과 거래하면 대영 그룹을 적으로 돌리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선포했다고요!”윤소정은 이를 악물며 외쳤다.“민여진 씨! 민여진 씨는 진짜 재앙이나 다름없어요! 본인은 얼굴 하나 안 드러내놓고, 민여진 씨를 지키려던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쳐버렸다고요!”민여진은 온몸이 굳은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세상에 버림받은 듯한 차가운 절망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현수 씨... 현수 씨는 지금 어디 있나요? 제가 만날 수 있을까요?”“절대 안 돼요!”윤소정은 눈물을 참으려는 듯 고개를 젓더니 이를 악물었다.“또 만나면 무슨 말을 하려고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이제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요. 방씨 가문에서 데려갔거든요. 애초에 방씨 가문에서 인정받지 못한 사생아였던 오빠인데... 방씨 가문에서 가만둘 리가 없잖아요!”민여진은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고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윤소정은 잠시 울
방 안에서 들려오는 무심한 목소리에 민여진은 자신도 모르게 한 차례 몸을 떨었다.이는 틀림없이 경험에서 나온 두려움이었다.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문을 밀어 열었다.박진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듯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시선이 민여진의 여행 가방을 스치자, 검은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그는 의자 팔걸이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더니 비아냥대기 시작했다.“짐까지 챙겼네? 방현수가 다치지만 않았으면 둘이 함께 도망이라도 갈 참이었어?”민여진은 무의식적으로 여행 가방을 뒤로 보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대답 대신 조용히 물었다.“현수 씨를... 놓아줄 수는 없어?”“현수 씨?”그 호칭에 박진성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손가락으로 애꿎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천천히 비틀었다. 그리고 눈동자에 분노가 불길처럼 번졌다.“내가 왜 그 자식을 봐줘야 하지? 감히 나에게 도발하는 걸 보고 대단한 놈이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고작 방씨 가문에서 내다 버린 자식이었더라고! 그딴 놈이 네 눈에는 그리도 멋져 보였어?”박진성의 비아냥에 민여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더니, 대뜸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자 박진성의 눈빛이 흔들렸다.“진성 씨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 원하는 대로 내가 무릎꿇고 빌게... 그러니까 제발 그만해. 현수 씨를 놔줘...”말이 끝나자, 그녀는 머리를 숙였고, 곧이어 이마가 바닥에 닿는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그 모습에 박진성은 의자 팔걸이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민여진, 네 꼴을 좀 봐. 정말 비굴해 보여...”“맞아. 네 말이 다 맞아. 그러니까... 제발 현수 씨만은 살려줘. 하라는 대로 뭐든 할게...”박진성의 얼굴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번지고 있었다. 그녀가 앞을 보지 못하는 게 다행일 정도였다.“뭐? 뭐든 할 수 있다고?”박진성은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자세를 바꿔 몸을 기대며 민여진을 내려다봤다.“그렇다면... 벗어 봐.”순간, 민여진의 표정이 굳었다.박진성은 담배에
“왜?못하겠어?”박진성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민여진을 쏘아보며 의자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방현수를 위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릴 수 있으면서... 내 앞에서는 끼 부리는 건 거부한다고? 나는 남자도 아니라는 건가? 이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기회인 줄이나 알아? 얼마나 많은 여자가 너 대신 이 자리에 있고 싶어 하는지 너는 알기나 할까?’박진성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뭐야? 이제 와서 순결한 척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예전엔 내 곁에 껌딱지처럼 붙어서 한시라도 떨어지기 싫다고 하지 않았었나?”민여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이 얼굴을 보고 역겹지도 않아? 무릎을 꿇으라면 꿇겠어. 하지만 왜... 이런 방법으로까지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건데?”‘왜냐고?’박진성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사실 그가 이런 요구를 한 이유는 단순했다. 그녀의 몸에 방현수의 흔적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게다가 그는 민여진의 얼굴이 역겹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날 그녀가 보여준 강인한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머릿속에서 그녀와 함께했던 밤들이 스쳐 지나갔다.민여진은 그에게 있어 잊을 수 없는 치명적인 존재였지만 그는 결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더욱 차가운 비웃음으로 대답했다.“너를 괴롭히는 건 나한테 흥미로운 일이거든. 네가 괴로워할수록 나는 기분이 좋아...”‘내 고통이 너에겐 즐거움이란 거네...’민여진은 쓸쓸히 눈을 감았고 더 이상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이리 와.”박진성이 또 한 번 명령하듯 말했다.민여진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주먹을 꽉 쥔 채 한 걸음씩 다가갔다.박진성은 그녀의 손을 거칠게 잡아당겨 무릎 위로 끌어앉혔다. 얼떨결에 그녀의 손이 그의 가슴에 닿았고 얇은 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에 민여진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현수 씨를... 놓아주겠다고 약속해.”민여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 순간에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방현수뿐이었다는 것에 배신감을
민여진은 조용히 리셉션 직원에게 감사 인사를 건넨 뒤 물었다.“죄송한데... 근처에 가까운 약국이 어디에 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리셉션 직원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었다.민여진은 지팡이를 짚으며 약국으로 향했다.약국에 도착한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피임약 주세요.”낮은 목소리였지만 주변 사람들을 집중시켰다.“저렇게 흉한 얼굴을 하고 피임약이 필요할 수도 있나?”“누가 쳐다나 보겠어? 피임약이 왜 필요해...”근처에서 어슬렁거리던 젊은 남자들이 피식거리며 비웃었지만, 민여진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약을 받은 그녀는 약국 문을 나서자마자 포장을 뜯어 물 없이 약을 삼켰다.‘박진성이 네게 남겼던 흔적 같은 건... 두 번 다시는 없어야 해.’그녀는 또다시 아이를 가질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1%의 확률이라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 피임약을 복용했다. 악마 같은 박진성의 아이는 절대 다시 가지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리셉션 직원은 멀리서 그녀가 약을 먹고 약봉지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걸 보았다. 그리고 민여진이 택시에 타고 떠나자, 쓰레기통 속 약봉지를 다시 확인했다.‘피임약?’직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세상에... 얼마나 많은 여자가 박 대표님 아이를 가지려고 혈안이 돼 있는데, 이 여자는 일부러 피임약을 먹었다고?’그녀는 이 쇼킹한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탕비실로 뛰어갔다. 그리고 친한 동료에게 속삭이듯 말했다.“너 방금 그 여자가 뭘 했는지 알아? 얼굴은 엉망이지만 그 분위기만큼은 재벌가 따님 부럽지 않더라니까. 박 대표님하고 관계까지 했으면서... 약국에서 피임약을 사 먹더라니까!”“뭐?”동료는 깜짝 놀라 물었다.“피임약을 왜?”“다른 사람들은 박 대표님의 아이를 가지려 혈안이 됐는데, 일부러 피임약을 삼켰다니까!”“대체 무슨... 대표님의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야?”“그런데 말이야...”갑자기 탕비실 문이 열리며 냉기가 흘러들었다.“누가 내 아이를
박진성은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이를 악물고 말했다.“민여진, 어디야?”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이내 통화가 ‘뚝’하고 끊겼다.민여진은 대답 대신 전화를 끊어버렸다.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유는 전화를 걸어온 상대가 박진성이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했던 것이었다.‘현수 씨는 대체 어디 있는 거지...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불안이 밀려왔지만, 방씨 가문처럼 알려진 가문이라면 그 주소 정도는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녀는 택시 기사에게 수소문해 방씨 가문의 저택으로 향했다.저택 앞에 도착한 민여진은 문 앞에 설치된 초인종을 더듬어 눌렀다.조금 후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무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디서 굴러먹다 온 미친년이 이 시간에 감히 방씨 가문의 초인종을 누르고 있어!”“죄송합니다...”민여진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혹시... 방현수 씨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전화를 받지 않아서...”“뭐라고? 방현수?”하인은 여전히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이 집에서 내쳐진 사생아 따위가 방씨 가문에 얼마나 큰 폐를 끼쳤는지 알기나 해? 당연히 가훈에 따라 처리했겠지. 지금쯤 별채 창고에서 기절해 있을지도 모르겠네. 방현수를 찾으러 왔다면 시신을 수습하러 늦게나마 다시 오는 게 나을 거야.”‘뭐라고요? 시신을 수습해요?’민여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박진성은 분명 모든 게 끝났다고 했는데... 거짓말이었어?’민여진은 절망감에 몸이 떨렸다. 그녀는 두 손으로 철문을 붙잡고 간절히 외쳤다.“부탁이에요! 제발... 제발 현수 씨를 보게 해주세요! 박진성이... 박진성이 모든 걸 끝내겠다고 약속했어요!”하인은 박진성의 이름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민여진이 가까이 다가온 것을 보고 흠칫 놀라 욕설을 내뱉었다.“이런 미친년을 보았나! 도대체 왜 이렇게 흉측하게 생긴 거야? 간 떨어질 뻔했네!”철문이 덜컥 열렸다.민여진은 안도의 숨을 쉬며 들어가려는 순간, 가슴팍에 무언가가 세게
“누가 널 무시했다고 그래?”박진성의 말에 민여진은 덤덤하게 웃었다.“그래? 그럼 현수 씨처럼 나를 당당히 데리고 나가서 사람들 앞에서 내 진짜 이름을 소개할 수 있어?”박진성은 순간 할 말을 잃었고 민여진은 그의 침묵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못하잖아.”그녀는 앞을 볼 수 없었지만 표정은 마치 그를 비웃는 듯했다.박진성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운전대를 움켜잡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외쳤다.“나를... 그 하찮은 녀석이랑 비교하는 거야? 내가 그놈보다 못하다고 생각해? 네가 정말 우리 둘의 차이를 몰라서 그러는 거야? 그놈이 나만큼의 힘과 재력이 있다 해도 너 같은 시각장애인을 당당히 데리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아? 그놈이 널 자기 여자라고 인정할 배짱이나 있을 것 같아?”박진성의 독설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민여진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시각장애인이라니...’결국 그에게도 자신은 어둠 속에 갇힌 한낱 장애인일 뿐이었다. 민여진은 씁쓸하게 웃으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그래. 나 같은 시각장애인을 위해 방씨 가문에 따라가 주느라 얼마나 고생스러웠겠어.”민여진의 냉소 섞인 말에 박진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민여진! 네가 지금 나한테 비꼬는 거냐? 네 처지가 어떤지 너 스스로 몰라? 너 같은 여자를 내 여자로 인정해 준 것만 해도 네겐 큰 영광이라고! 네가 나한테 이렇게 따질 처지가 아니란 말이야!”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졌고 무자비한 말들이 민여진을 전부 짓눌렀다.“너 손이라도 있잖아! 그냥 앉아서 아무것도 못 하는 쓰레기는 아니잖아! 그런데도 불평을 해? 다 네 탓이야! 네가 내 말을 들었다면 이런 꼴이 되진 않았어!”그의 억지스러운 우월감과 차가운 비난은 계속 이어졌다.“처음부터 네가 내 말을 들었다면 이 지경이 되진 않았을 거야! 네 팔자를 네가 꼰 거라고!”민여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스며 나왔지만, 고통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그래... 이 사람에게 나는 그저 이 정도의 존재였어.’박진성이
박진성은 사납게 눈빛을 번뜩이며 살기를 내뿜었다.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처럼 그의 분노가 공기를 짓누르고 있었다.“방현수, 이미 한 번 봐줬을 텐데! 네가 감히 경고를 무시하고 내 여자를 데리고 도망을 가려고 해?”박진성이 또 한 번 주먹을 휘둘렀다.방현수는 얼굴을 한 대 맞고도 기죽지 않았고 피를 닦으며 비웃음을 흘렸다.“네 여자? 네 여자가 다른 사람을 대신해 죗값을 치르고 네 장난감처럼 버려질 때는 네 여자라고 부르지 않았잖아. 박진성의 여자가 된다는 건 정말 비참한 일이네.”“죽고 싶냐?”박진성의 붉어진 눈동자가 번뜩이며 다시 주먹을 날렸고, 이내 두 사람은 서로 주먹을 주고받으며 격렬하게 맞붙었다.그러자 방씨 가문의 사람들이 놀라며 주위를 둘러섰다.민여진은 주먹이 오가는 살벌한 소리를 듣고 공포에 질렸다. 두 사람이 계속 싸운다면 박진성은 방현수는 다시는 의사로 살 수 없게 만들지도 몰랐다.“그만해! 제발 그만 싸워!”민여진은 두 눈이 보이지 않기에 소리만 쫓아 주먹질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순간, 두 사람 중 누군가를 향해 날아오던 주먹이 그녀의 얼굴을 세게 스쳤다.“아!”강렬한 통증과 함께 귀가 멍해지고 얼굴이 바닥으로 내리꽂히더니 뺨이 금세 부어오르며 호흡조차 가빠졌다.“여진 씨!”방현수의 눈가가 붉게 물들며 그녀 쪽으로 달려갔지만 박진성은 그를 밀쳐내고 민여진을 품에 안았다.그의 얼굴은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방씨 가문은 추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박진성의 시선이 방씨 가문의 사람들을 훑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울렸다.“아무리 버려진 사생아라지만, 기본적인 예의는 가르쳐야 하는 거 아닌가요? 방씨 가문은 도련님은 교육을 더 받아야 할 것 같네요.”그 말을 남기고 그는 민여진을 품에 안고 걸어 나갔다.민여진은 귀가 먹먹해졌지만 방씨 가문을 나서는 순간에 방지혁이 분노하며 꾸짖는 소리가 들려 몸을 움츠렸다.“현수 씨는... 현수 씨를 병원으로...”차에 태운 박진성은 민여진을
방 안은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운 공기가 가득 찼다.박진성이 ‘내 여자’라고 선언하자 방지혁을 포함한 방씨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충격에 휩싸였다.만약 민여진이 절세미인이었다면 모를까, 흉터투성이의 얼굴을 한 여자를 박진성이 지키겠다고 나섰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방지혁은 순간적으로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민여진의 체격과 분위기를 살피던 그는 그동안 화제가 되었던 ‘실검’ 속 인물이 그녀임을 깨달았다.‘그래서 현수가 이 여자 하나 때문에 박진성을 건드리고, 자기가 가진 모든 걸 걸었단 말이야? 고작 이런 여자 때문에?’방지혁의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이 불효자 녀석... 여자한테 홀려도 그럴 만한 여자를 골랐어야지... 방씨 가문을 파멸 위기로 몰아넣고도 후회는커녕....’그는 하인에게 몇 마디 지시를 내리고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두 분은 잠시 앉아서 차라도 한잔하시죠. 곧 현수를 데려오겠습니다.”박진성은 여유롭게 자리에 앉았고 민여진도 몸을 움츠리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두 손은 본능적으로 떨리고 있었고 차를 마시기는커녕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민여진은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방현수도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그녀를 발견했다. 그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가 이내 박진성을 발견하곤 울부짖었다.“박진성 씨! 또 무슨 수작을 부린 겁니까! 대체 뭐로 여진이를 협박한 거냐고요! 네가 그러고도 남자냐!”“이 개 같은 놈이!”방지혁이 몇 걸음 다가가 방현수의 뺨을 후려쳤다. 큰 소리와 함께 방현수는 옆으로 휘청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방지혁은 곧바로 박진성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굽신거렸다.“이 불효자는 어릴 때부터 가문에서 내쳐져 자라다 보니 워낙 버릇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제가 따끔히 훈계하겠습니다. 대표님께서 불쾌해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박진성은 차를 홀짝이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지만 민여진은 바짝 긴장한 채 몸이 떨
박진성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그는 치욕과 분노가 섞인 이 감정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방현수가 너한테 그렇게 중요해? 그 자식 없으면 죽기라도 하려고?”민여진은 두 손을 꽉 쥐었다.하인의 말투와 방현수가 방씨 가문에서 받는 취급을 보니 그가 얼마나 심하게 다쳤을지 짐작이 갔다. 그런데도 박진성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마치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하찮은 벌레처럼 취급한다고 생각했다.“그래! 현수 씨 없으면 난 죽어!”민여진의 목소리는 울분으로 떨렸다.“그런데 넌? 네가 약속했던 건 지켰어?”“민여진!”박진성은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기분으로 그녀의 양팔을 거칠게 움켜잡았다.“너 지금 일부러 날 화나게 하는 거지? 믿어봐! 내 한마디면 방씨 가문도 방현수 그 자식도 이 도시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 수 있어!”박진성의 말에 민여진은 그 자리에서 흥분을 가라앉혔다.‘맞아. 박진성이 가진 힘을 난 너무 잘 알아. 내가 감히 대적할 수는 없어....’그녀는 방현수를 위해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박진성은 이를 꽉 깨물었다. 그는 민여진이 더 이상 방현수와 얽히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이대로 두면, 그녀의 마음속에 그가 들어설 자리는 영원히 없을 터였다.그는 손아귀에 힘을 주며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나랑 집에 가자.”‘집? 나한테 아직 집이란 게 남아 있었나?’민여진은 저항하지 않았지만 발걸음을 따라가지도 않았다.“난... 현수 씨를 봐야겠어.”모든 건 그녀로 인해 시작되었으니,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눈을 감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안 돼!”박진성은 짜증스러워졌다. 그는 절대로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다.“내 말 들어. 나랑 같이 가.”하지만 민여진은 그 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결국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억지로 한 걸음 끌어냈다.하지만 그녀는 힘겨운 발걸음 속에서 입술을 깨물며 울먹였다.“부탁이야... 단 한 번... 단 한 번만 보게 해 줘. 그다음엔 네가 원하
박진성은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이를 악물고 말했다.“민여진, 어디야?”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이내 통화가 ‘뚝’하고 끊겼다.민여진은 대답 대신 전화를 끊어버렸다.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유는 전화를 걸어온 상대가 박진성이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했던 것이었다.‘현수 씨는 대체 어디 있는 거지...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불안이 밀려왔지만, 방씨 가문처럼 알려진 가문이라면 그 주소 정도는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녀는 택시 기사에게 수소문해 방씨 가문의 저택으로 향했다.저택 앞에 도착한 민여진은 문 앞에 설치된 초인종을 더듬어 눌렀다.조금 후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무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디서 굴러먹다 온 미친년이 이 시간에 감히 방씨 가문의 초인종을 누르고 있어!”“죄송합니다...”민여진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혹시... 방현수 씨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전화를 받지 않아서...”“뭐라고? 방현수?”하인은 여전히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이 집에서 내쳐진 사생아 따위가 방씨 가문에 얼마나 큰 폐를 끼쳤는지 알기나 해? 당연히 가훈에 따라 처리했겠지. 지금쯤 별채 창고에서 기절해 있을지도 모르겠네. 방현수를 찾으러 왔다면 시신을 수습하러 늦게나마 다시 오는 게 나을 거야.”‘뭐라고요? 시신을 수습해요?’민여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박진성은 분명 모든 게 끝났다고 했는데... 거짓말이었어?’민여진은 절망감에 몸이 떨렸다. 그녀는 두 손으로 철문을 붙잡고 간절히 외쳤다.“부탁이에요! 제발... 제발 현수 씨를 보게 해주세요! 박진성이... 박진성이 모든 걸 끝내겠다고 약속했어요!”하인은 박진성의 이름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민여진이 가까이 다가온 것을 보고 흠칫 놀라 욕설을 내뱉었다.“이런 미친년을 보았나! 도대체 왜 이렇게 흉측하게 생긴 거야? 간 떨어질 뻔했네!”철문이 덜컥 열렸다.민여진은 안도의 숨을 쉬며 들어가려는 순간, 가슴팍에 무언가가 세게
민여진은 조용히 리셉션 직원에게 감사 인사를 건넨 뒤 물었다.“죄송한데... 근처에 가까운 약국이 어디에 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리셉션 직원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었다.민여진은 지팡이를 짚으며 약국으로 향했다.약국에 도착한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피임약 주세요.”낮은 목소리였지만 주변 사람들을 집중시켰다.“저렇게 흉한 얼굴을 하고 피임약이 필요할 수도 있나?”“누가 쳐다나 보겠어? 피임약이 왜 필요해...”근처에서 어슬렁거리던 젊은 남자들이 피식거리며 비웃었지만, 민여진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약을 받은 그녀는 약국 문을 나서자마자 포장을 뜯어 물 없이 약을 삼켰다.‘박진성이 네게 남겼던 흔적 같은 건... 두 번 다시는 없어야 해.’그녀는 또다시 아이를 가질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1%의 확률이라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 피임약을 복용했다. 악마 같은 박진성의 아이는 절대 다시 가지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리셉션 직원은 멀리서 그녀가 약을 먹고 약봉지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걸 보았다. 그리고 민여진이 택시에 타고 떠나자, 쓰레기통 속 약봉지를 다시 확인했다.‘피임약?’직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세상에... 얼마나 많은 여자가 박 대표님 아이를 가지려고 혈안이 돼 있는데, 이 여자는 일부러 피임약을 먹었다고?’그녀는 이 쇼킹한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탕비실로 뛰어갔다. 그리고 친한 동료에게 속삭이듯 말했다.“너 방금 그 여자가 뭘 했는지 알아? 얼굴은 엉망이지만 그 분위기만큼은 재벌가 따님 부럽지 않더라니까. 박 대표님하고 관계까지 했으면서... 약국에서 피임약을 사 먹더라니까!”“뭐?”동료는 깜짝 놀라 물었다.“피임약을 왜?”“다른 사람들은 박 대표님의 아이를 가지려 혈안이 됐는데, 일부러 피임약을 삼켰다니까!”“대체 무슨... 대표님의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야?”“그런데 말이야...”갑자기 탕비실 문이 열리며 냉기가 흘러들었다.“누가 내 아이를
“왜?못하겠어?”박진성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민여진을 쏘아보며 의자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방현수를 위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릴 수 있으면서... 내 앞에서는 끼 부리는 건 거부한다고? 나는 남자도 아니라는 건가? 이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기회인 줄이나 알아? 얼마나 많은 여자가 너 대신 이 자리에 있고 싶어 하는지 너는 알기나 할까?’박진성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뭐야? 이제 와서 순결한 척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예전엔 내 곁에 껌딱지처럼 붙어서 한시라도 떨어지기 싫다고 하지 않았었나?”민여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이 얼굴을 보고 역겹지도 않아? 무릎을 꿇으라면 꿇겠어. 하지만 왜... 이런 방법으로까지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건데?”‘왜냐고?’박진성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사실 그가 이런 요구를 한 이유는 단순했다. 그녀의 몸에 방현수의 흔적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게다가 그는 민여진의 얼굴이 역겹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날 그녀가 보여준 강인한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머릿속에서 그녀와 함께했던 밤들이 스쳐 지나갔다.민여진은 그에게 있어 잊을 수 없는 치명적인 존재였지만 그는 결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더욱 차가운 비웃음으로 대답했다.“너를 괴롭히는 건 나한테 흥미로운 일이거든. 네가 괴로워할수록 나는 기분이 좋아...”‘내 고통이 너에겐 즐거움이란 거네...’민여진은 쓸쓸히 눈을 감았고 더 이상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이리 와.”박진성이 또 한 번 명령하듯 말했다.민여진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주먹을 꽉 쥔 채 한 걸음씩 다가갔다.박진성은 그녀의 손을 거칠게 잡아당겨 무릎 위로 끌어앉혔다. 얼떨결에 그녀의 손이 그의 가슴에 닿았고 얇은 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에 민여진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현수 씨를... 놓아주겠다고 약속해.”민여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 순간에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방현수뿐이었다는 것에 배신감을
방 안에서 들려오는 무심한 목소리에 민여진은 자신도 모르게 한 차례 몸을 떨었다.이는 틀림없이 경험에서 나온 두려움이었다.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문을 밀어 열었다.박진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듯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시선이 민여진의 여행 가방을 스치자, 검은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그는 의자 팔걸이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더니 비아냥대기 시작했다.“짐까지 챙겼네? 방현수가 다치지만 않았으면 둘이 함께 도망이라도 갈 참이었어?”민여진은 무의식적으로 여행 가방을 뒤로 보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대답 대신 조용히 물었다.“현수 씨를... 놓아줄 수는 없어?”“현수 씨?”그 호칭에 박진성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손가락으로 애꿎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천천히 비틀었다. 그리고 눈동자에 분노가 불길처럼 번졌다.“내가 왜 그 자식을 봐줘야 하지? 감히 나에게 도발하는 걸 보고 대단한 놈이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고작 방씨 가문에서 내다 버린 자식이었더라고! 그딴 놈이 네 눈에는 그리도 멋져 보였어?”박진성의 비아냥에 민여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더니, 대뜸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자 박진성의 눈빛이 흔들렸다.“진성 씨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 원하는 대로 내가 무릎꿇고 빌게... 그러니까 제발 그만해. 현수 씨를 놔줘...”말이 끝나자, 그녀는 머리를 숙였고, 곧이어 이마가 바닥에 닿는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그 모습에 박진성은 의자 팔걸이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민여진, 네 꼴을 좀 봐. 정말 비굴해 보여...”“맞아. 네 말이 다 맞아. 그러니까... 제발 현수 씨만은 살려줘. 하라는 대로 뭐든 할게...”박진성의 얼굴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번지고 있었다. 그녀가 앞을 보지 못하는 게 다행일 정도였다.“뭐? 뭐든 할 수 있다고?”박진성은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자세를 바꿔 몸을 기대며 민여진을 내려다봤다.“그렇다면... 벗어 봐.”순간, 민여진의 표정이 굳었다.박진성은 담배에
아직 어린 듯 앳된 목소리였지만 무슨 일인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민여진은 순간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했다.“누구신데 그러세요?”“누구냐고요? 그걸 물어볼 자격은 있다고 생각해요?”갑자기 나타난 낯선 여자는 윤소정이었고 그녀는 불꽃 같은 눈빛으로 민여진을 바라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민여진 씨 같은 눈먼 여자 하나 때문에 현수 오빠가 인생을 통째로 쳤다는 거 알아요?”민여진의 손이 옷자락을 단단히 쥐었다.“현수 씨가... 어떻게 됐는데요?”“어떻게 됐냐고?”윤소정의 목소리가 떨렸다.“현수 오빠는 민여진 씨를 지키려다 얼굴 하나 제대로 팔렸죠! 사진이 인터넷에 퍼졌고 사진 아래에는 전부 오빠를 향한 비난뿐이에요! 오빠는 환자를 살려야 하는 의사인데 그쪽 때문에 병원에는 발도 못 붙이게 생겼다고요!”윤소정은 숨을 몰아쉬며 이어갔다.“그리고 민여진 씨의 전남편이 박진성이라면서요? 그사람은 지금 방씨 가문을 완전히 몰락시키려고 작정했어요! 모든 계약을 해지한 것도 모자라, 누구도 방씨 가문과 손잡지 못하게 막아버렸어요. 방씨 가문과 거래하면 대영 그룹을 적으로 돌리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선포했다고요!”윤소정은 이를 악물며 외쳤다.“민여진 씨! 민여진 씨는 진짜 재앙이나 다름없어요! 본인은 얼굴 하나 안 드러내놓고, 민여진 씨를 지키려던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쳐버렸다고요!”민여진은 온몸이 굳은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세상에 버림받은 듯한 차가운 절망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현수 씨... 현수 씨는 지금 어디 있나요? 제가 만날 수 있을까요?”“절대 안 돼요!”윤소정은 눈물을 참으려는 듯 고개를 젓더니 이를 악물었다.“또 만나면 무슨 말을 하려고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이제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요. 방씨 가문에서 데려갔거든요. 애초에 방씨 가문에서 인정받지 못한 사생아였던 오빠인데... 방씨 가문에서 가만둘 리가 없잖아요!”민여진은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고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윤소정은 잠시 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