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요! 진성 씨, 제발 하지 마요!”“싫다고? 이 와중에도 밀당을 하겠다는 건가? 진짜 너답다.”민여진의 애원은 박진성에게 그저 거슬리는 울음소리일 뿐이었다.“진성 씨, 아이가 위험해져요!”“우리 아이잖아요...”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려대던 민여진이 애원하자 박진성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우리 아이? 걔는 그냥 인정도 못 받는 혼종일뿐이야.”말을 마친 박진성의 눈빛은 아까보다 더 차가워졌다.이건 그가 감히 제게 반항한 민여진에게 내리는 벌이기도 했고 또 아이를 죽이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진성 씨...”하지만 민여진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발버둥 쳤고 하늘이 그녀를 돕듯 누군가가 박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양경호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박진성은 스피커 핸드폰으로 돌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대표님, 문채연 씨가 깨어나셨습니다!”...박진성은 전화를 받자마자 1분 만에 뛰쳐나가 운전대를 잡았다.더 이상 그 역겨운 여자와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되고 드디어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를 품에 안을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그는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고민 없이 운전대를 잡았다.한편 혼자 남은 민여진은 벗겨진 옷을 주섬주섬 껴입으며 멀어져가는 박진성의 모습을 바라보았다.그의 모습이 눈에서 사라질수록 마음이 차갑게 식어갔고 온몸이 찌릿찌릿하며 아파 났다.6년 전, 기부금을 받을 때 박진성을 처음 본 뒤로 민여진은 그에게 첫눈에 반해버렸었다.그리고 그들이 두 번째로 만날 때, 박진성은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다.민여진이 생명의 위협도 무릅쓰고 그를 구해 나올 때 꼭 다시 찾아오겠다고, 너를 아내로 맞이해서 평생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다짐하던 게 박진성이었는데 그는 민여진을 문채연 대용품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대타 노릇도 이제 그만할 때가 된 것 같았다.진짜가 돌아왔으니 가짜는 더 이상 필요 없겠지....눈물을 머금은 채로 잠들었던 민여진은 이튿날 아침,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민여진은 화상을 입은 손보다도 마음이 더 아파왔다.울먹이는 문채연은 다정하게 달래주면서 다친 민여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 게 박진성이었다.민여진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박진성은 우는 여자를 싫어하는 게 아니란 걸. 그는 그저 우는 민여진을 유독 싫어할 뿐이었다.“그런 거 아니에요...”억울함에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 민여진이 부어오른 손을 박진성에 들어 보였지만 그는 오히려 화를 내며 그녀의 상처를 매정하게 쳐냈다.“그 손 안 치워?!”민여진은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고통을 참아냈지만 박진성은 그걸 연기라고만 생각하며 치를 떨어댔다.“어디서 변명이야, 너한테 물이 튄 걸 다행으로 알아야지. 만약 다친 게 채연이였다면 너도 무사하지 못했을 거야. 당장 나가!”박진성의 말에 걸음을 옮기던 민여진은 그만 문채연의 득의양양한 표정을 봐버렸다.“진성 씨, 그만 해요. 여진 씨도 진성 씨 사랑해서 그러는 거잖아요. 2년 동안 부부로 지내서 쌓인 정도 있을 텐데 나 때문에 싸우지 마요.”“정?”박진성은 코웃음을 치며 그녀의 말에 답했다.“나랑 쟤 사이에 정 따위는 없어. 네가 깨어났으니까 쟨 이제 가야지. 본가에서 너랑 결혼하는 걸 반대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쟤랑 결혼할 일은 없었어. 쟤가 박씨 집안 사모님 행세를 할 일은 더더욱 없었겠지.”닫혀버린 문 때문에 뒤에 이어지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이미 들은 말로도 민여진은 가슴이 아파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눈앞이 새까매질 정도로 어지러워 바닥에 쭈그려 앉은 채 눈물을 흘렸다.그렇게 겨우겨우 1층으로 내려온 그녀가 소파에 앉아있은 지 한참 지나자 마침내 박진성이 아래로 내려왔다.“사인해.”그런데 그와 함께 제 앞에 놓은 이혼 합의서에 민여진은 고개를 들어 조심스레 물었다.“오늘은... 이혼 안 한다고 했잖아요.”“안 하면 네가 계속 채연이 해치는 거 보고만 있을까? 빨리 사인하고 나가. 그래야 내가 채연이랑 다시 시작하지.”짜증 가득한 투로 말하는 박진성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을 흘리던 민여진은 이를 악물며 힘겹게 현관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때 문이 열리더니 박진성이 안으로 들어왔다.“진성 씨?”그를 본 민여진 눈을 반짝이며 걸음을 재촉했다.“진성 씨, 내 말 좀...”“입 다물고 따라 나와.”평소와는 다른 농도의 한기를 뿜어내는 그에 민여진은 당황하며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채연이가 차를 몰고 나갔다가 사람을 죽인 것 같아. 그리고 사라졌어.”“그럼 당장 자수를 하라고 해야지 나는 왜...”목이 말라온 민여진이 말도 채 맺지 못하고 박진성을 바라봤는데 그는 차가운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네가 대신 감옥에 가줘야겠어.”“싫어요!”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박진성에 민여진은 두 눈을 크게 뜨며 울부짖었다.“내가 왜요? 사람은 죽인 건 문채연인데 왜 걔 대신 나를 감옥에 보내냐고요!”“네가 채연이 자리에서 2년 동안이나 누릴 거 다 누렸잖아.”박진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채연이 도망가는 것도 CCTV에 이미 다 찍혔어. 둘이 얼굴이 똑같으니까 다들 널 의심할 텐데 네가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그럼 진실을 말하면 되잖아요, 나랑 문채연 씨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라고!”민여진은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그리고 내가 채연 씨 대신 누릴 걸 누렸다니요? 그건 원래 6년 전부터 내가 누렸어야 할 생활이었어요. 진성 씨를 그때 불구덩이에서 구한 건 바로 나였다고요!”이 말을 들으면 박진성이 놀랄 줄 알았는데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미간조차도 찌푸리지 않았다.“역시 채연이 말이 맞네.”오히려 그의 얼굴에 드리운 혐오의 감정이 더 짙어질 뿐이었다.“채연이가 6년 전날 화재에서 구해준 걸 너도 알았다며. 그래서 바로 자기가 그 자리를 뺏으러들 거라고 하더니, 넌 진짜 어쩜 그렇게 염치가 없어?”“... 뭐라고요?”“정말 6년 전에 날 구한 게 너라면 네 성격으로 2년을 참을 수나 있었겠어? 당장이라도 모두한테 알렸겠지.”그 말을 들은 민
그제야 민여진이 대신 감옥에 가는 일을 얘길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린 박진성은 바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욕을 하고 억압해도 제 아이만은 포기하지 않던 여자가 이제 와서 모든 걸 버리고 떠나겠다니 박진성은 당연히 믿지 않았지만 제 입으로 대신 감옥에 가겠다고 말하는 그녀에 말투를 한껏 누그러뜨렸다.“걱정 마, 네가 채연이 죄 대신 뒤집어쓰겠다고만 약속하면 나도 너 죽게 안 내버려 둬. 많아도 5개월이야. 그동안 버티면 너도 바로 빼줄게. 그리고 네 엄마도 원래대로 바로 데려올 거야.”그의 말이 끝나도 대꾸를 안 하는 상대방에 인내심이 다 한 박진성은 빠르게 본인 할 말을 마무리했다.“빨리 경찰서 가서 자수해. 나 회의 있어서 다른 용건 없으면 이만 끊을게.”“박진성 씨.”그가 전화를 끊으려 할 때, 슬픔을 간신히 참아내는 듯한 민여진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우리 다신 보지 말아요.”울음 섞인 그녀의 말에 잠시 멍해 있던 박진성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화가 이미 끊겨버린 뒤였다.결의에 찬 듯한 말투가 민여진의 입에서 흘러나오니 낯설기도 했고 묘하게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대신 감옥에 보냈다고 저에 대한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사람처럼 구는 게 2년 동안이나 저를 졸졸 따라다니던 그녀답지 않아서 박진성은 이번에도 민여진이 그저 불쌍한 척하는 거라고만 생각했다.그리고 만약 정말 그녀가 말한 대로 다시 보지 않으면 좋아할 쪽은 오히려 박진성이었기에 그는 더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대표님.”옆에 있던 양경호가 회의를 진행해야 한다는 신호를 주자 박진성도 민여진을 빠르게 잊고 회의실로 들어갔다....한편 통화를 끝낸 민여진은 그길로 경찰서로 향했다.“제가 문채연입니다. 오늘 차로 사람을 치어서 죽였어요. 벌 받을까 봐 도망갔는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이제라도 자수하려고요.”공허한 눈동자로 자수를 하러 온 그녀를 보자마자 유가족들이 달려들었다.그들에게 모진 욕을 들으면서도, 갖은 폭행을 당하면서도 민여진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배
민여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들은 하나둘씩 민여진의 팔과 다리를 잡아 왔다.“뭐 하는 짓이에요! 이거 놔요! 놔달라고요!”민여진이 아무리 울어도 돌아오는 건 여자들의 욕설뿐이었다.“얘도 끈질기네, 어떻게 아직도 살아있어? 두 달이나 지났는데 진작 죽었어야지.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직접 움직일 일도 없잖아. 재수가 없으려니까 진짜!”그녀들의 말을 다 들은 민여진은 바로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땅에 박기 시작했다.“제발 아이만은 살려주세요, 애는 아무 잘못이 없잖아요!”“애는 잘못이 없어도 네가 잘못이 있잖아. 그러게 왜 박 대표님을 두고 그딴 생각을 해, 다 네 업보야. 박 대표님은 네가 하루빨리 죽길 바라셔, 그래서 애도 절대 남기지 말라고 우리한테 지시하셨으니까 어차피 넌 그냥 당할 운명이야.”그들 중 하나가 민여진을 발로 차 넘어뜨리자 나머지 여자들이 그녀의 팔다리를 압박해왔다.하지만 육신의 고통보다 아까 들은 말이 더 의아했던 민여진은 울부짖으며 소리쳤다.“박진성 씨가 아이는 지킬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어요!”어쩐지 두 달 동안 저가 그렇게 당하는데도 교도관이 지독하게 무시하더라니, 민여진은 그제야 이 모든 게 박진성의 지시였다는 걸 알아챘다.문채연을 위해 죄까지 다 뒤집어써 줬는데 왜 아직도 저에게만은 이토록 가혹한지, 정말 제가 그 정도로 혐오스러운지 민여진은 도무지 박진성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아!”그때 한창 고통에 몸부림치던 민여진이 미친 사람처럼 눈물을 흘려대며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발버둥 치자 여자들은 깜짝 놀라며 대화를 주고받았다.“빨리 잡아서 약부터 먹이자, 얘 곧 미치겠어.”그녀들은 민여진의 상태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억지로 그녀의 입을 벌려 알약 하나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하지만 민여진이 삼키려 하지 않자 그녀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여자는 민여진의 배를 계속해서 걷어차며 그녀가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억지로 약을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아, 맞다.”여자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또
초점을 잃은 두 눈은 앞에서 아무리 손을 휘저어봐도 움직이질 않았다.얼굴도 망가져 버린 채 온몸에 상처를 매달고 있는 민여진이 안쓰러웠던 여의사는 입술을 깨문 채 말을 잇지 못했다.“선생님, 아직 계세요?”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들리는 대답이 없자 민여진도 무언가를 알아차렸는지 그녀는 팔을 뻗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불... 스위치 어딨어요? 여기 너무 어두워요. 불 켜주세요... 불 켤래요!”이불을 들추고 뛰어내리던 민여진은 침대 옆 트롤리에 있던 물건들을 쓰러뜨리며 본인도 바닥으로 고꾸라졌다.“조심해요!”“여기 트롤리 있어서 그쪽으로 가면 안 돼요.”“약이요? 어디 있는데요?”민여진은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선생님, 왜 저는 안 보이죠? 제 눈앞은 그저 캄캄하기만 해요! 정전인 거죠? 불 들어오면 저도 보이는 거 맞죠?”그런 민여진을 보며 눈시울이 빨개진 여의사는 애써 그녀를 위로하기 시작했다.“일단 진정하시고 제가 눈 다시 검사해드릴게요. 지나친 압박으로 일시적인 실명이 왔을 수도 있어요. 그런 건 치료만 잘하면 금방 회복하니까 너무 무서워 말아요.”의사의 말을 들은 민여진은 아랫입술을 짓이기며 몸을 떨었다.무서워하지 말라니, 어떻게 무서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감옥에 수감된 지 두 달 만에 아이를 잃고 실명까지 했는데...민여진은 절망스러운 제 처지에 목이 터져라 소리치며 울부짖었다.“제발요... 제발 제 눈 좀 고쳐주세요! 이제 저한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단 말이에요!”여의사도 최선을 다해 검사했지만 지금의 의료조건으로는 치료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제가 신청서 올려볼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꼭 나가서 치료받게 도와드릴게요!”여의사가 민여진의 어깨를 다독이며 밖으로 나가자 홀로 남은 민여진은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여기서 숨 쉬고 있던 작은 생명이 제 아버지는 박진성 때문에 결국 사라져버리고 말았다.살아서는 안 될 아이였지만 아직 세상 빛도 못 본 아이의 생명이
...출소 전 마지막 서류에 사인을 하던 민여진은 경찰을 보며 물었다.“죄송한데 전화 한 번만 해주실 수 있을까요?”“전화번호.”민여진이 불러준 번호로 전화를 걸던 경찰은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없는 번호라는데, 누구한테 전화할 거야?”“민영미 씨요. 제... 엄마 친구분이세요.”“엄마 친구?”이상하게 익숙한 이름에 옆에 놓인 사망보고서를 본 경찰은 거기에도 떡하니 적혀있는 민영미라는 이름을 보고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경찰의 침묵에 되려 긴장한 민여진은 조심스레 물었다.“그분은 아직 잘 계세요? 핸드폰을 바꿔서 연락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주소라도 알 수 있을까요?”여전히 침묵을 유지 중인 경찰을 향해 민여진은 또 말했다.“새 주소만 알려주시면 제가 알아서 가볼게요.”민여진이 경찰의 안내에 따라 서동구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는데 그녀가 차에 타자마자 주위 사람들의 수군대는 말소리가 들려왔다.그 말들이 귀에 거슬릴 법도 했지만 민여진은 엄마를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은 채 그들의 말을 애써 무시했다.박진성이 말한 5개월보다는 석 달 늦어진 8개월 만에 출소했지만 민여진은 엄마만 살아있다면 모든 걸 다 잊고 떠날 준비가 되어있었다.하지만 차에서 내린 그녀는 멀어버린 눈 때문에 오로지 감각에만 의존하여 더듬거릴 수밖에 없었다.그러다가 옆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길을 물으려고 손을 뻗었는데 돌아오는 건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과 차가운 손길이었다.“저기, 혹시...”“아! 얼굴이 왜 저래? 저리 비켜요!”처참하게 바닥으로 내던져진 민여진은 손으로 상처뿐인 얼굴을 매만지더니 이를 악물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죄송해요, 그런데 놀래키려는 게 아니라 물어볼게...”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마자 여자는 또 소리를 질렀고 같이 있던 남자는 되려 그녀를 발로 차기까지 했다.“미친년이 어디서 사람을 놀래켜! 당장 안 꺼져?! 또 따라오면 죽여버린다.”주먹을 들어 올리던 남자가 여자의 허리를 감싸며 자리를 뜨자 민여진은 또 다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여자한테만은 한없이 다정했다.“너 몸도 약하고 머리 아프다고 매일 그러잖아. 1년이 지나도 제대로 회복되지 않으니까 여기까지 온 거지. 여기가 곳은 이래도 실력 있는 의사가 있다니까 너 꼭 낫게 해줄 거야.”“이런 작은 진료소에 그런 의사가 있다고요?”반신반의하며 묻던 문채연은 아까보다 어두워진 박진성의 표정에 바로 그의 팔짱을 끼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나는 당신이 사기꾼한테 속아서 돈도 버리고 시간도 낭비할까 봐 그러죠. 가뜩이나 일로 바쁜 당신이 나 때문에 그러면 내가 얼마나 미안해요...”“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 마.”팔짱을 껴오는 문채연에 박진성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네 몸보다 더 중요한 건 없어, 나을 가능성이 1%라도 있다면 난 뭐든 다 해볼 거야.”“날 그 정도로 생각해줘서 고마워요.”얼굴을 붉히며 하는 문채연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섰는데 방현수의 사무실을 물어 가려던 찰나, 한 아이의 목소리가 박진성의 귀에 들려왔다.“여진 누나, 나 그네 탈래요!”거리가 너무 멀어 소리는 제대로 듣지 못했던 박진성이 정원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인영이 눈앞을 스쳐 갔다.그 모습이 민여진 같긴 했지만 그녀는 지금쯤 해외에서 아이를 낳고 잘살고 있어야 했기에 박진성은 빠르게 부인했다.만약 귀국을 했다 하더라도 민여진은 저를 가장 먼저 찾아올 사람이지 이런 허름한 진료소에 틀어박혀 있을 사람이 아니라서 박진성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진성 씨, 왜 그래요?”하지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그 이름에 박진성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문채연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아무것도 아니야. 들어가자.”결국 아닐 거라고 단정 지은 박진성은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을 풀고는 문채연과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방현수는 이내 문채연의 맥을 짚어보며 그녀에게 주의할 것들을 일러주었는데 옆에 있던 박진성은 자연스레 익숙한 황산철 화분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민여진이 저와 결
이정화는 분노로 얼굴이 새파래졌고 서원의 말을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사람을 죽였으면 목숨으로 갚고 빚을 졌으면 돈으로 갚는 거야!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저 여자가 칼을 휘둘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럼 당연히 벌을 받아야지! 내 휴대폰 가져와!”...얼음장 같은 물이 쏟아지자 민여진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유치장 한쪽에 웅크리고 있었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주변에는 각종 범죄로 끌려온 사람들이 있었고 맞은편에는 차가운 얼굴의 경찰이 앉아 있었다.“민여진, 나와!”그녀는 경찰을 따라 나섰다. 곧바로 딱딱한 책상 위에 얼굴이 짓눌렸고 손목에 채워진 수갑이 찰랑거렸다. 머리 위에서 무겁고도 위압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네가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알고 있어? 형법 제232조, 고의적 살인은 사형, 무기징역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해진다. 사안이 가벼운 경우에도 최소 3년 이상의 형을 받아. 지금 솔직하게 답변하면 감형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네 인생의 대부분을 여기서 썩히게 될 거야!”경찰은 강압과 회유를 섞어 가며 취조했다. 그러나 민여진은 흔들림 없이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심문이 끝나고 연행되어 나가는 순간 그녀는 담담하게 물었다.“저 감옥에 얼마나 있어야 하나요?”경찰은 코웃음을 쳤다.“이제 와서 무섭냐? 그럼 애초에 그런 짓은 왜 했어? 이번 사건은 심각해. 게다가 박진성 측에서 최고급 변호사팀을 꾸려 소송을 진행하고 있어. 최소 8년은 각오해야 할 거야.”‘8년...’그녀는 순간 멍해졌다.박씨 가문에서 자신을 처벌하는 데 그렇게까지 열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박진성은 실망하게 될 것이다. 3년이든 8년이든 감옥에 갇히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바로 어머니의 원한을 갚는 것이다.“제가 어떤 죄를 뒤집어쓰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1년 전에 있었던 한 사건을 다시 조사해 주세요.”경찰은 그녀
그 말이 떨어지자 서원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살인 미수라니요?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경찰은 눈살을 찌푸렸다.“이 심각한 피 냄새를 맡고도 오해라고 하십니까? 그리고 밖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입까지 막을 수 있겠어요? 경고합니다. 경찰 수사를 방해하지 마세요. 민여진 씨는 범죄 혐의자이기 때문에 경찰서로 가서 조사를 받으셔야 합니다!”그렇게 말하며 경찰은 바닥에 앉아 있는 민여진을 바라보았는데, 그녀의 얼굴에 생긴 심각한 흉터를 보니 신고자의 진술과 일치했다. 그래서 더 이상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민여진 씨, 저희와 함께 가주시죠.”경찰들이 움직이려 하자 서원이 다급히 앞으로 나섰다.“경찰관님, 오해입니다! 정말 오해예요! 여기서 다친 사람이 있긴 하지만 절대 살인 미수 같은 건 아닙니다. 다친 분은 저 여성분의 남편이에요! 두 분은 부부 사이인데 어떻게 그게 살인 미수가 될 수 있겠어요? 믿기 어려우시면 대표님께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직접 설명을 들으시는 게 어떨까요?”하지만 경찰은 짜증이 난 듯 냉랭하게 말했다.“부부 사이에서도 살인 사건이 수없이 많이 발생합니다. 게다가 신고가 접수된 이상 조사를 해야 합니다.”서원이 다시 설명하려는 순간 민여진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맞아요. 제가 찔렀어요. 데려가 주세요.”“민여진 씨!”서원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박진성이 아직도 응급 수술을 받고 있는데 그녀가 경찰서로 가 버리면 거기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알 수 없었다.그러나 민여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사람을 찔렀다면 죗값을 치러야죠. 안 그래요?”경찰은 그녀를 연행했고 서원은 도무지 어쩔 도리가 없었다.박진성과 연락을 시도하고 싶었지만 그는 여전히 수술 중이었다. 그래서 서원은 불에 던져진 개미처럼 안절부절못했다.그때 소식을 들은 박진성의 어머니가 병원에 도착했다.심장이 약한 이정화는 이미 두 번이나 실신했었는데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녀는 떨리는 손으
서원은 박진성의 뒤를 따라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숨이 멎었다.차가운 눈빛의 민여진, 그리고 입술이 창백해진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복부를 감싸고 있는 박진성이 보였다.게다가 박진성의 손 사이로 붉은 피가 끊임없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대표님!”서원은 다급히 뛰어갔다.그러나 그 순간 민여진이 손에 쥔 과일칼을 다시 치켜들며 박진성을 향해 돌진했다.“박진성, 넌 이제 지옥 가서 죗값이나 치러!”“민여진 씨!”서원이 외치며 재빨리 그녀를 저지했다. 손에 힘을 주어 칼을 쳐내자 그것이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민여진을 바라보았다.“대체 뭘 하려는 겁니까!”“뭘 하냐고요?”민여진은 고개를 젖히고 그를 올려다보았는데 얼굴에 증오와 눈물이 뒤섞여 있었다.“우리 엄마 대신 복수하는 거예요!”“진정하세요...”서원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다급히 박진성의 상태를 확인했다. 상처는 깊었고 흰 셔츠의 반이 피로 물들어 있는 데다가 그의 얼굴이 창백했다. 서원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119에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박진성은 이미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고 침대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리고 눈에 핏발이 선 채 울고 있는 민여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녀가 두 번째로 칼을 휘두를 때, 박진성은 그녀가 자신을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는 것을 확신했다.박진성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민여진, 미안해. 내가... 아주머니를 지켜주지 못했어.”민여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눈물이 끝없이 쏟아졌지만 가슴은 오히려 무감각했다. 다만 후회가 온몸을 감쌌다.그녀는 두 눈을 감고 말했다.“박진성... 왜 내가 너와 엮였을까? 왜 하필 네 아내가 되어야 했을까... 난 내 인생만 망친 게 아니야. 우리 엄마까지 죽게 만들었어...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도망쳤을 거야. 다시는... 널 만나지 않을 거야!”그녀의 단호한 말은 박진성의 가슴을 찔렀고 칼에 베인 상처보다 더 깊은 고통이 밀려왔다.
민여진은 웃으면서도 눈물을 흘렸다.“박진성, 넌 나를 완전히 바보 천치로 만들었어. 어땠어? 재밌었어? 네가 해주는 그 따뜻한 말 한마디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서툰 그 거짓말에 사정없이 휘둘리는 날 보면서 진짜 우스웠겠다?”“어제 오후에 말이야...”민여진의 목소리는 이미 잔뜩 갈라져 있었다.“너한텐 이제 나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어? 그때도 조롱이었지? 난 그 한 마디만 믿고 얼마나 감동 받았는데. 정말 바보처럼...”“아니야!”박진성은 고통으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급히 반박했다. 배에 힘이 들어가자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와 뜨거운 피가 손바닥을 흠뻑 적셨다.그는 두려웠다. 자신이 과다출혈도 죽는 것보다 민여진이 이대로 무너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그 말들은 전부 진심이었어... 여진아... 미안해...”이 순간, 박진성이 할 수 있는 말은 미안하다는 말뿐이었다.이대로 죽으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그에겐 누군가를 되살릴 능력 따윈 없었다복부에서는 피가 미친 듯이 흘러나왔지만 그 고통은 박진성의 이성까지 앗아가지 못했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했다.“내가 잘못했어. 전부 다... 미안해. 나도 일이 이렇게 틀어질 줄은 몰랐어. 내가 다 보상해줄게. 내가 다 책임지도 원하는 거 다 해줄게. 뭐든지, 정말이야. 응?”민여진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박진성을 바라보다가 다시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박진성, 그거 알아? 네가 나한테 보여줬던 그 온기들 말이야. 난 거기에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알아? 한편으로는 넘어갈까 봐 두려운데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런데 너는 다 알고 있었잖아. 네 다정함 밑에 숨겨져 있던 게 우리 엄마 죽음이었어. 이제 널 보면 그냥 역겨울뿐이야.”웃고 있던 민여진의 눈에서 증오가 타올랐다.“다시는 너 안 믿어. 넌 살인자야.”민여진은 박진성을 힘껏 밀쳤다. 차마 버티지 못한 박진성은 바닥에 힘없이 꿇어앉았다. 피가 천천히 흘러나와 땅바닥에 고였다.민여진은 광기 어린 눈빛으로 주위를 샅샅이
민여진은 아무 대답 없이 그저 자신이 할 말만 이어나갔다.“넌 우리 엄마가 살던 집을 뺏었고, 이름도 없는 이상한 정신병원으로 보내버렸지. 그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우리 엄마 그때 고작 마흔이었거든. 거기서 냄새나는 음식을 억지로 먹고, 구타당하고, 짓밟혔어. 네가 너무 잔인하게 굴어서 어쩔 수 없이 굴복했던 거야...”박진성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리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잠깐만!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맞아. 네 말대로 집을 빼앗긴 했어. 그런데 정신병원으로 보내진 않았어. 난 절대 그런 적이 없어. 네가 뭘 착각한 거 아니야?”“착각했다고?”민여진의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1년 전에 목격했던 그 장면은 민여진이 악몽 속에서 수도 없이 되새겼던 기억이었다. 자존심 하나로 살던 엄마가 민여진 때문에 병든 몸으로 알 수 없는 병원 안에서 짐승 취급을 받고 있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하는 한 마디가 겨우 착각이라니... 그 말 한마디면 이미 벌어진 일을 다시 수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모든 걸 되돌릴 수 있는 줄 아는 걸까?’민여진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울먹이며 말했다.“그래. 내가 착각했나 봐. 내가 어떻게 기억하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너는 안하무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니,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겠지.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네 기억에 없는 건 당연해.”“민여진!”박진성이 참다못해 소리쳤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갑자기 변해버린 민여진의 모든 말투,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갑자기 무슨 짓이야? 내가 안 했다잖아. 안 했다면 안 한 거지, 왜 못 믿어?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왜 하는데? 난 정신병원이고 뭐고 무슨 상황인지 도저히 모른다고!”“그럼 우리 엄마 지켜주겠다고 했던 건 뭐야?”민여진이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고개를 홱 돌리자 눈물로 범벅이 돼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표정은 고통과 절망에 찌들어 있었다.“네가 그
정수향이 고개를 숙여 시간을 확인하더니 미간을 구기며 대답했다.“아홉 시 좀 넘었는데...”“열 사면, 가는 거죠? 맞죠?”정수향도 아쉽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녀는 민여진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민여진의 친엄마가 아니었고, 자신의 친딸은 자신을 필요로 했다.“응.”정수향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그래도 치료하러 가는 거잖아. 좋은 일이지, 뭐. 다음에 또 네 어릴 적 얘기 시작했을 때 기억 못 하면 곤란하지 않겠어?”민여진은 뒤늦게 입꼬리를 다시 올리며 눈을 감고 조용히 말했다.“엄마, 다시 한 번만... 여진아라고 불러줄 수 있어요?”정수향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불렀다.“여진아?”민여진은 눈꼬리에 눈물을 매단 채 대답했다.“고마워요.”정수향은 갑자기 보이는 민여진의 눈물에 당황한 듯 손을 뻗어 닦아주었다.그렇게 정수향은 떠났다.민여진은 굳이 배웅해주지 않았다. 그 장면을 도저히 마주할 수 없었다.진실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잠시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굳게 믿어왔다. 더 좋은 다음 만남을 위한 희망이 담긴 이별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뜨거운 눈물을 머금어 왔다.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이건 이별이 아니라 영원한 작별이었다.민여진은 멍한 표정으로 창가에 앉아 있었다. 얼굴은 차가운 바람을 맞아 무감각해졌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 그 순간, 문이 갑자기 열렸다. 박진성이 병실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민여진 홀로 창가에 있는 모습을 보자 박진성은 불만스럽다는 듯 외투를 벗었다.“환자가 창문을 열어두고 있으면 어떡해? 춥지도 않아?”박진성은 벗어둔 외투를 민여진의 몸에 둘러주며 자신의 체온으로 그녀를 녹여주었다. 이윽고 열려있던 창문이 다시 닫혔다.민여진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에 있었지만 사실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손목시계를 한 번 확인한 박진성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아주머님 열 시 비행기라던데, 왜 공항 배웅 안 갔어?”그는 민여진
정수향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너 손은 어떻게 된 거야!”그녀는 다급히 의사와 간호사를 호출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때, 뒤늦게 정신을 차린 민여진이 다른 손으로 얼른 상처를 가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괜... 괜찮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뭐가 괜찮아? 지금 붕대가 피투성이인데! 왜 이렇게 칠칠맞아! 오늘 나까지 돌아가면, 넌 대체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정수향은 걱정과 화가 뒤섞인 표정으로 말을 쏟아냈다. 의사가 안으로 들어와 민여진의 손을 확인하더니 상처가 벌어져 재봉합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의사가 꽤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대표님이 제일 걱정하셨던 게 흉터였는데, 이렇게 재봉합을 하면 흉터는 무조건 남습니다. 아프실 거예요. 뭐라도 물고 계세요.”하지만 민여진은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상태였다. 상처를 다시 꿰매는 도안 고통에 이마는 이미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비명 하나 내지르지 않았고 그저 눈가만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정수향은 그저 민여진이 고통을 참고 있는 줄로만 여기고 있었다. 의사가 병실을 나서자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며 민여진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너무 아프면, 참지 말고 소리 질러도 돼. 그냥 울어도 괜찮고. 엄마 여기 있잖아.”민여진은 순간적으로 정수향의 옷자락을 꽉 움켜잡고 억눌려 있던 것을 토해내듯 울음을 터뜨렸다. 참을 수 없는 비참함을 토로해내는 울음소리였다. 그 소리에 정수향의 마음도 덩달아 아파왔다.“안 아파, 이제 안 아파. 우리 여진이 이제 안 아프다.”정수향은 민여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몸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풍겼고, 목소리는 따뜻하고 다정했다. 정말 민여진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친엄마와 겹치는 것 같았다.매일 아이처럼 혼란스러워하며 세월을 보내던 민영미가 가끔씩 제정신일 때마다 민여진에게 말했다.“여진아, 미안해. 엄마 병 때문에, 너만 고생하네.”민여진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 순간, 민여진은 간절히 바랐다.
얼굴을 감싼 채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여진은 그 자리에 굳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눈은 물론 이제는 귀까지 먹어버린 듯 오장육부가 제 자리를 잃고 뒤틀리는 것 같은 고통에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그토록 익숙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계속 그녀의 곁에 있어 주며 이름을 불러주던 그 목소리가 지금 다른 여자아이에게 생명과도 같은 존재라고 말하고 있었다.“정말이야? 정말 날 버린 게 아니야? 그럼 그동안 왜 연락이 안 됐던 건데? 저기 안에 있는 장님 새끼는 왜 엄마한테 엄마라고 하고 있는 거냐고? 고작 40밖에 안 된 나이에 저렇게 큰딸이 어디서 나온 거냐고.”“그건...”정수향이 망설이며 말끝을 흐렸다.한수영은 흥분한 채 문 쪽을 흘끗거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그건 뭐냐고! 빨리 말해! 설명 안 해주면, 앞으로 난 엄마 없는 아이로 살 거야.”“그러지 마! 수영아, 그러지 마...”정수향이 절망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얘기해줄게, 내가 다 설명할게. 저 여자 엄마는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대. 그런데 내 목소리가 죽은 엄마랑 너무 비슷해서, 잠깐 엄마 역할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그리고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이었고. 곧 떠나려고 했어...”쿠궁!민여진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머릿속은 이미 새하얘져 귓가에 이명이 들려왔다.지금 민여진이 어디에 서 있는지도 잊은 채 심장과 폐가 바짝 조여왔다. 마치 누군가가 마음먹고 짓이겨 놓기라도 한 듯 가슴이 아파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황당한 상황에 눈물도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민여진, 날 미워하지 마.”희미한 기억 속에서 박진성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남자의 차갑고 무심한 표정, 모든 것을 자신의 발밑에 두고 사는 그 안하무인의 표정이 다시 선명하게 떠올랐다.그의 입에서 자주 나왔던 그 속죄라는 단어의 뜻, 미워하지 말라던 그의 말이 전부 이 사실을 덮기 위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엄마의 죽음을 자신에게서
좁디좁은 병원 침대가 순식간에 넓어진 것 같았다. 민여진은 이마를 부여잡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지금이 몇 시일까? 박진성은 언제 나간 걸까?민여진은 어딘가 아쉬워졌다. 잠들기 전에 박진성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만약 그가 깨어난다면 박진성이 잠결에 한 그 미워하지 말아 달라는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묻고 싶었다.그 순간, 병실 문이 열렸다. 민영미인 줄 알았던 민여진이 고개를 들어 환히 웃으며 말했다.“엄마? 지금 몇 시예요? 혹시 아침이에요? 이렇게 일찍...”“엄마? 설마 지금 부르는 사람이 정수향이야?”비웃는 듯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이 어려 있던 민여진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그녀는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병실 문 쪽을 바라보았다.“문채연, 네가 여긴 왜 왔어!”“여진 씨, 왜 이렇게 예민해요? 난 그냥 네가 꼭두각시처럼 놀아나는 게 안쓰러워서 좋은 마음으로 진실을 말해주려고 온 건데.”“좋은 마음에? 내가 네 수작이 뭔지 모를 것 같아?”민여진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녀의 한 손은 무의식적으로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좋은 마음이라는 말로 나한테 온갖 지저분한 짓 한 게 한두 번이야? 한 번은 속아도 두 번은 절대 안 당해! 당장 꺼져!”“정말 날 그렇게까지 밀어내고 싶어요?”문채연의 말투가 순식간에 억울한 듯 움츠러들었다.“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나도 인정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인은 아니에요. 여진 씨 엄마는 이미 투신자살로 비참하게 죽어버렸는데, 그렇게 불쌍하게 죽어버린 엄마를 두고 다른 여자한테 엄마엄마 하고 있잖아요. 이게 말이 돼요? 죽은 엄마가 불쌍해서 찾아온 거예요.”“닥쳐!”민여진의 이마에는 핏줄까지 불거졌다. 가슴에서 엄청난 고통이 밀려와 숨이 거칠게 떨려왔다.“우리 엄마는 잘 살아있어! 다시 나 속이려고 들지 마. 당장 나가. 안 꺼지면 간호사 부를 거야.”민여진이 호출 벨로 손을 뻗자 문채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민여진, 나랑 어디 좀 가지 않을래?”“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