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감싼 채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여진은 그 자리에 굳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눈은 물론 이제는 귀까지 먹어버린 듯 오장육부가 제 자리를 잃고 뒤틀리는 것 같은 고통에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그토록 익숙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계속 그녀의 곁에 있어 주며 이름을 불러주던 그 목소리가 지금 다른 여자아이에게 생명과도 같은 존재라고 말하고 있었다.“정말이야? 정말 날 버린 게 아니야? 그럼 그동안 왜 연락이 안 됐던 건데? 저기 안에 있는 장님 새끼는 왜 엄마한테 엄마라고 하고 있는 거냐고? 고작 40밖에 안 된 나이에 저렇게 큰딸이 어디서 나온 거냐고.”“그건...”정수향이 망설이며 말끝을 흐렸다.한수영은 흥분한 채 문 쪽을 흘끗거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그건 뭐냐고! 빨리 말해! 설명 안 해주면, 앞으로 난 엄마 없는 아이로 살 거야.”“그러지 마! 수영아, 그러지 마...”정수향이 절망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얘기해줄게, 내가 다 설명할게. 저 여자 엄마는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대. 그런데 내 목소리가 죽은 엄마랑 너무 비슷해서, 잠깐 엄마 역할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그리고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이었고. 곧 떠나려고 했어...”쿠궁!민여진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머릿속은 이미 새하얘져 귓가에 이명이 들려왔다.지금 민여진이 어디에 서 있는지도 잊은 채 심장과 폐가 바짝 조여왔다. 마치 누군가가 마음먹고 짓이겨 놓기라도 한 듯 가슴이 아파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황당한 상황에 눈물도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민여진, 날 미워하지 마.”희미한 기억 속에서 박진성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남자의 차갑고 무심한 표정, 모든 것을 자신의 발밑에 두고 사는 그 안하무인의 표정이 다시 선명하게 떠올랐다.그의 입에서 자주 나왔던 그 속죄라는 단어의 뜻, 미워하지 말라던 그의 말이 전부 이 사실을 덮기 위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엄마의 죽음을 자신에게서
정수향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너 손은 어떻게 된 거야!”그녀는 다급히 의사와 간호사를 호출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때, 뒤늦게 정신을 차린 민여진이 다른 손으로 얼른 상처를 가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괜... 괜찮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뭐가 괜찮아? 지금 붕대가 피투성이인데! 왜 이렇게 칠칠맞아! 오늘 나까지 돌아가면, 넌 대체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정수향은 걱정과 화가 뒤섞인 표정으로 말을 쏟아냈다. 의사가 안으로 들어와 민여진의 손을 확인하더니 상처가 벌어져 재봉합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의사가 꽤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대표님이 제일 걱정하셨던 게 흉터였는데, 이렇게 재봉합을 하면 흉터는 무조건 남습니다. 아프실 거예요. 뭐라도 물고 계세요.”하지만 민여진은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상태였다. 상처를 다시 꿰매는 도안 고통에 이마는 이미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비명 하나 내지르지 않았고 그저 눈가만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정수향은 그저 민여진이 고통을 참고 있는 줄로만 여기고 있었다. 의사가 병실을 나서자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며 민여진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너무 아프면, 참지 말고 소리 질러도 돼. 그냥 울어도 괜찮고. 엄마 여기 있잖아.”민여진은 순간적으로 정수향의 옷자락을 꽉 움켜잡고 억눌려 있던 것을 토해내듯 울음을 터뜨렸다. 참을 수 없는 비참함을 토로해내는 울음소리였다. 그 소리에 정수향의 마음도 덩달아 아파왔다.“안 아파, 이제 안 아파. 우리 여진이 이제 안 아프다.”정수향은 민여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몸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풍겼고, 목소리는 따뜻하고 다정했다. 정말 민여진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친엄마와 겹치는 것 같았다.매일 아이처럼 혼란스러워하며 세월을 보내던 민영미가 가끔씩 제정신일 때마다 민여진에게 말했다.“여진아, 미안해. 엄마 병 때문에, 너만 고생하네.”민여진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 순간, 민여진은 간절히 바랐다.
정수향이 고개를 숙여 시간을 확인하더니 미간을 구기며 대답했다.“아홉 시 좀 넘었는데...”“열 사면, 가는 거죠? 맞죠?”정수향도 아쉽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녀는 민여진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민여진의 친엄마가 아니었고, 자신의 친딸은 자신을 필요로 했다.“응.”정수향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그래도 치료하러 가는 거잖아. 좋은 일이지, 뭐. 다음에 또 네 어릴 적 얘기 시작했을 때 기억 못 하면 곤란하지 않겠어?”민여진은 뒤늦게 입꼬리를 다시 올리며 눈을 감고 조용히 말했다.“엄마, 다시 한 번만... 여진아라고 불러줄 수 있어요?”정수향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불렀다.“여진아?”민여진은 눈꼬리에 눈물을 매단 채 대답했다.“고마워요.”정수향은 갑자기 보이는 민여진의 눈물에 당황한 듯 손을 뻗어 닦아주었다.그렇게 정수향은 떠났다.민여진은 굳이 배웅해주지 않았다. 그 장면을 도저히 마주할 수 없었다.진실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잠시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굳게 믿어왔다. 더 좋은 다음 만남을 위한 희망이 담긴 이별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뜨거운 눈물을 머금어 왔다.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이건 이별이 아니라 영원한 작별이었다.민여진은 멍한 표정으로 창가에 앉아 있었다. 얼굴은 차가운 바람을 맞아 무감각해졌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 그 순간, 문이 갑자기 열렸다. 박진성이 병실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민여진 홀로 창가에 있는 모습을 보자 박진성은 불만스럽다는 듯 외투를 벗었다.“환자가 창문을 열어두고 있으면 어떡해? 춥지도 않아?”박진성은 벗어둔 외투를 민여진의 몸에 둘러주며 자신의 체온으로 그녀를 녹여주었다. 이윽고 열려있던 창문이 다시 닫혔다.민여진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에 있었지만 사실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손목시계를 한 번 확인한 박진성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아주머님 열 시 비행기라던데, 왜 공항 배웅 안 갔어?”그는 민여진
민여진은 아무 대답 없이 그저 자신이 할 말만 이어나갔다.“넌 우리 엄마가 살던 집을 뺏었고, 이름도 없는 이상한 정신병원으로 보내버렸지. 그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우리 엄마 그때 고작 마흔이었거든. 거기서 냄새나는 음식을 억지로 먹고, 구타당하고, 짓밟혔어. 네가 너무 잔인하게 굴어서 어쩔 수 없이 굴복했던 거야...”박진성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리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잠깐만!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맞아. 네 말대로 집을 빼앗긴 했어. 그런데 정신병원으로 보내진 않았어. 난 절대 그런 적이 없어. 네가 뭘 착각한 거 아니야?”“착각했다고?”민여진의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1년 전에 목격했던 그 장면은 민여진이 악몽 속에서 수도 없이 되새겼던 기억이었다. 자존심 하나로 살던 엄마가 민여진 때문에 병든 몸으로 알 수 없는 병원 안에서 짐승 취급을 받고 있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하는 한 마디가 겨우 착각이라니... 그 말 한마디면 이미 벌어진 일을 다시 수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모든 걸 되돌릴 수 있는 줄 아는 걸까?’민여진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울먹이며 말했다.“그래. 내가 착각했나 봐. 내가 어떻게 기억하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너는 안하무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니,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겠지.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네 기억에 없는 건 당연해.”“민여진!”박진성이 참다못해 소리쳤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갑자기 변해버린 민여진의 모든 말투,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갑자기 무슨 짓이야? 내가 안 했다잖아. 안 했다면 안 한 거지, 왜 못 믿어?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왜 하는데? 난 정신병원이고 뭐고 무슨 상황인지 도저히 모른다고!”“그럼 우리 엄마 지켜주겠다고 했던 건 뭐야?”민여진이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고개를 홱 돌리자 눈물로 범벅이 돼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표정은 고통과 절망에 찌들어 있었다.“네가 그
민여진은 웃으면서도 눈물을 흘렸다.“박진성, 넌 나를 완전히 바보 천치로 만들었어. 어땠어? 재밌었어? 네가 해주는 그 따뜻한 말 한마디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서툰 그 거짓말에 사정없이 휘둘리는 날 보면서 진짜 우스웠겠다?”“어제 오후에 말이야...”민여진의 목소리는 이미 잔뜩 갈라져 있었다.“너한텐 이제 나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어? 그때도 조롱이었지? 난 그 한 마디만 믿고 얼마나 감동 받았는데. 정말 바보처럼...”“아니야!”박진성은 고통으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급히 반박했다. 배에 힘이 들어가자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와 뜨거운 피가 손바닥을 흠뻑 적셨다.그는 두려웠다. 자신이 과다출혈도 죽는 것보다 민여진이 이대로 무너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그 말들은 전부 진심이었어... 여진아... 미안해...”이 순간, 박진성이 할 수 있는 말은 미안하다는 말뿐이었다.이대로 죽으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그에겐 누군가를 되살릴 능력 따윈 없었다복부에서는 피가 미친 듯이 흘러나왔지만 그 고통은 박진성의 이성까지 앗아가지 못했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했다.“내가 잘못했어. 전부 다... 미안해. 나도 일이 이렇게 틀어질 줄은 몰랐어. 내가 다 보상해줄게. 내가 다 책임지도 원하는 거 다 해줄게. 뭐든지, 정말이야. 응?”민여진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박진성을 바라보다가 다시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박진성, 그거 알아? 네가 나한테 보여줬던 그 온기들 말이야. 난 거기에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알아? 한편으로는 넘어갈까 봐 두려운데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런데 너는 다 알고 있었잖아. 네 다정함 밑에 숨겨져 있던 게 우리 엄마 죽음이었어. 이제 널 보면 그냥 역겨울뿐이야.”웃고 있던 민여진의 눈에서 증오가 타올랐다.“다시는 너 안 믿어. 넌 살인자야.”민여진은 박진성을 힘껏 밀쳤다. 차마 버티지 못한 박진성은 바닥에 힘없이 꿇어앉았다. 피가 천천히 흘러나와 땅바닥에 고였다.민여진은 광기 어린 눈빛으로 주위를 샅샅이
서원은 박진성의 뒤를 따라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숨이 멎었다.차가운 눈빛의 민여진, 그리고 입술이 창백해진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복부를 감싸고 있는 박진성이 보였다.게다가 박진성의 손 사이로 붉은 피가 끊임없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대표님!”서원은 다급히 뛰어갔다.그러나 그 순간 민여진이 손에 쥔 과일칼을 다시 치켜들며 박진성을 향해 돌진했다.“박진성, 넌 이제 지옥 가서 죗값이나 치러!”“민여진 씨!”서원이 외치며 재빨리 그녀를 저지했다. 손에 힘을 주어 칼을 쳐내자 그것이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민여진을 바라보았다.“대체 뭘 하려는 겁니까!”“뭘 하냐고요?”민여진은 고개를 젖히고 그를 올려다보았는데 얼굴에 증오와 눈물이 뒤섞여 있었다.“우리 엄마 대신 복수하는 거예요!”“진정하세요...”서원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다급히 박진성의 상태를 확인했다. 상처는 깊었고 흰 셔츠의 반이 피로 물들어 있는 데다가 그의 얼굴이 창백했다. 서원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119에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박진성은 이미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고 침대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리고 눈에 핏발이 선 채 울고 있는 민여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녀가 두 번째로 칼을 휘두를 때, 박진성은 그녀가 자신을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는 것을 확신했다.박진성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민여진, 미안해. 내가... 아주머니를 지켜주지 못했어.”민여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눈물이 끝없이 쏟아졌지만 가슴은 오히려 무감각했다. 다만 후회가 온몸을 감쌌다.그녀는 두 눈을 감고 말했다.“박진성... 왜 내가 너와 엮였을까? 왜 하필 네 아내가 되어야 했을까... 난 내 인생만 망친 게 아니야. 우리 엄마까지 죽게 만들었어...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도망쳤을 거야. 다시는... 널 만나지 않을 거야!”그녀의 단호한 말은 박진성의 가슴을 찔렀고 칼에 베인 상처보다 더 깊은 고통이 밀려왔다.
그 말이 떨어지자 서원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살인 미수라니요?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경찰은 눈살을 찌푸렸다.“이 심각한 피 냄새를 맡고도 오해라고 하십니까? 그리고 밖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입까지 막을 수 있겠어요? 경고합니다. 경찰 수사를 방해하지 마세요. 민여진 씨는 범죄 혐의자이기 때문에 경찰서로 가서 조사를 받으셔야 합니다!”그렇게 말하며 경찰은 바닥에 앉아 있는 민여진을 바라보았는데, 그녀의 얼굴에 생긴 심각한 흉터를 보니 신고자의 진술과 일치했다. 그래서 더 이상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민여진 씨, 저희와 함께 가주시죠.”경찰들이 움직이려 하자 서원이 다급히 앞으로 나섰다.“경찰관님, 오해입니다! 정말 오해예요! 여기서 다친 사람이 있긴 하지만 절대 살인 미수 같은 건 아닙니다. 다친 분은 저 여성분의 남편이에요! 두 분은 부부 사이인데 어떻게 그게 살인 미수가 될 수 있겠어요? 믿기 어려우시면 대표님께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직접 설명을 들으시는 게 어떨까요?”하지만 경찰은 짜증이 난 듯 냉랭하게 말했다.“부부 사이에서도 살인 사건이 수없이 많이 발생합니다. 게다가 신고가 접수된 이상 조사를 해야 합니다.”서원이 다시 설명하려는 순간 민여진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맞아요. 제가 찔렀어요. 데려가 주세요.”“민여진 씨!”서원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박진성이 아직도 응급 수술을 받고 있는데 그녀가 경찰서로 가 버리면 거기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알 수 없었다.그러나 민여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사람을 찔렀다면 죗값을 치러야죠. 안 그래요?”경찰은 그녀를 연행했고 서원은 도무지 어쩔 도리가 없었다.박진성과 연락을 시도하고 싶었지만 그는 여전히 수술 중이었다. 그래서 서원은 불에 던져진 개미처럼 안절부절못했다.그때 소식을 들은 박진성의 어머니가 병원에 도착했다.심장이 약한 이정화는 이미 두 번이나 실신했었는데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녀는 떨리는 손으
이정화는 분노로 얼굴이 새파래졌고 서원의 말을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사람을 죽였으면 목숨으로 갚고 빚을 졌으면 돈으로 갚는 거야!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저 여자가 칼을 휘둘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럼 당연히 벌을 받아야지! 내 휴대폰 가져와!”...얼음장 같은 물이 쏟아지자 민여진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유치장 한쪽에 웅크리고 있었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주변에는 각종 범죄로 끌려온 사람들이 있었고 맞은편에는 차가운 얼굴의 경찰이 앉아 있었다.“민여진, 나와!”그녀는 경찰을 따라 나섰다. 곧바로 딱딱한 책상 위에 얼굴이 짓눌렸고 손목에 채워진 수갑이 찰랑거렸다. 머리 위에서 무겁고도 위압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네가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알고 있어? 형법 제232조, 고의적 살인은 사형, 무기징역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해진다. 사안이 가벼운 경우에도 최소 3년 이상의 형을 받아. 지금 솔직하게 답변하면 감형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네 인생의 대부분을 여기서 썩히게 될 거야!”경찰은 강압과 회유를 섞어 가며 취조했다. 그러나 민여진은 흔들림 없이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심문이 끝나고 연행되어 나가는 순간 그녀는 담담하게 물었다.“저 감옥에 얼마나 있어야 하나요?”경찰은 코웃음을 쳤다.“이제 와서 무섭냐? 그럼 애초에 그런 짓은 왜 했어? 이번 사건은 심각해. 게다가 박진성 측에서 최고급 변호사팀을 꾸려 소송을 진행하고 있어. 최소 8년은 각오해야 할 거야.”‘8년...’그녀는 순간 멍해졌다.박씨 가문에서 자신을 처벌하는 데 그렇게까지 열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박진성은 실망하게 될 것이다. 3년이든 8년이든 감옥에 갇히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바로 어머니의 원한을 갚는 것이다.“제가 어떤 죄를 뒤집어쓰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1년 전에 있었던 한 사건을 다시 조사해 주세요.”경찰은 그녀
‘1106호? 이건 임재윤의 병실이잖아? 어떻게 박진성의 병실이 될 수 있는 거지? 분명 임재윤이였는데? 내가 방금까지 그곳에 있었는데? 만약...’얼굴이 하얗게 질린 민여진은 공포에 눈동자가 확장되며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만약 임재윤과 박진성이 같은 사람이라면?’민여진은 넋을 잃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에게 이건 너무나도 숨 막히는 가정이었다.하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일도 아니었다. 임재윤은 처음 나타난 순간부터 계속 벙어리 행세를 해왔고 그녀는 앞을 볼 수 없었다.결국 박진성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두 가지 조건이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그렇다면 그는 얼마든지 완벽하게 낯선 사람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알레르기 사건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박진성의 짓일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박진성이 입원했다는 뉴스가 나오자마자 임재윤도 바로 입원했고 마침 또 같은 병원에 입원했다.민여진은 이 모든 걸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벙벙하게 서 있었다. 고통보다 더 큰 건 속임수에 대한 슬픔이었다.‘임재윤은 가짜였고 그의 다정함도 가짜였구나.’민여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는 벽을 짚고 눈물을 참으며 밖으로 나갔다.‘도망쳐야 해!’머릿속에 남은 유일한 생각이었다. 가능한 한 멀리 이곳에서 떠나야 했다. 박진성만 없다면 어디든 상관없었다.“민여진 씨?”하필이면 휴식을 마치고 돌아온 진시우와 마주쳤다. 그는 민여진한테 다가오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민여진 씨, 여기서 뭐 하세요? 아까 문 앞에서 우연히 보고 잘못 본 줄 알았어요. 어딜 가시려고요?”진시우의 친절하고 따뜻한 태도에 오히려 오싹함을 느낀 그녀는 그를 무시한 채 이를 악물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민여진 씨?”민여진의 태도에 당황스러워진 진시우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 하자, 민여진은 바로 뿌리치며 공포에
‘지켜준다고?’박진성을 만난다면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민여진도 잘 알고 있었다.민여진한테 박진성은 기분이 좋으면 웃어주고 기분이 나쁘면 어떻게든 망가뜨리는, 그야말로 자기 마음대로 날뛰는 미친놈이었다. 그런 그를 상대로 자신을 지켜준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런데 왜 하필 임재윤과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거야?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지?’민여진은 손바닥을 꽉 움켜쥔 채 몇 번이고 숨을 들이마신 뒤에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문지르며 담담하게 말했다.“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 그냥 조금 피곤해서요. 어제 차에서 잘 못 잤거든요.”그녀의 말에 임재윤은 다시 휴대전화를 두드렸다.“진시우가 깨면, 쉴 곳에 데려다주라고 할게요.”“네.”이 기회를 틈타 민여진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박진성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싶었고 그러려면 지금 당장은 박진성이 어느 층, 어느 병실에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민여진은 더듬더듬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걸어갔다.그녀의 안색을 살피던 간호사 한 명이 환자인 줄 알고 질문했다.“눈이 안 보여서 약을 못 받으시는 건가요?”“아니요.”민여진이 설명했다.“저는 환자가 아니에요.”간호사는 잠시 멈칫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그럼 무슨 일로 오셨나요?”“그게...”민여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박진성 씨가 어느 병실에 계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민여진의 말이 끝나자, 간호사는 그녀를 출세하기 위해 능력 있는 남자에게 아첨하는 여자로 단정 짓고 표정을 확 바꾸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죄송하지만, 환자분의 프라이버시 문제라 가족이 아니라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가족이라. 사망한 전 부인도 포함하나요?’민여진은 이렇게 말했다가는 미친 사람 취급받을 거란 걸 알고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물어보는 거예요. 직접 찾아가서 방해하진 않을 거예요.”“찾아가지 않으신다 해도 답변해 드릴 수 없습니다.
“네가 일부러 우리를 걱정하게 한 건 아니란 걸 알아. 다만 이럴 때 내가 네 곁에 없어서 더 유감스러울 뿐이야.”조현준은 피로가 섞인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그런데 임재윤은 누구야?”민여진은 잠시 멈칫하다 임재윤에게 잠시 나가야 한다고 설명한 뒤, 더듬더듬 문을 닫고 나와서 대답했다.“막 알게 된 친구예요.”“그 사람은 나에게 큰 거부감을 보이는 것 같더라.”조현준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어딘가 진지했다.“내가 네 곁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민여진이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입을 열려는 찰나, 지나가던 사람들의 흥분에 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거 알아? 양성의 박진성이 우리 병원에 있대!”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린 민여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쪽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결혼도 안 했다고 하던데. 소문대로 멋지고 품위 있다면 한번 보고 싶다.”“꿈 깨.”옆에 있던 사람이 놀렸다.“결혼은 안 했어도 곧 할 거 아니야. 약혼한다는 소문 몰라? 여자 친구가 엄청 예쁘고 명문가의 규수라고 하던데.”“약혼이 결혼은 아니잖아. 나 같은 스타일을 좋아할 수도 있지.”“됐어. 그것보다.”여자가 물었다.“박진성은 왜 우리 병원에 온 거래? 여기서 양성까지 차로 두 시간은 걸리는데?”“몰라. 들리는 말로는 양성 병원에 기자들이 너무 많이 몰려서 불편하다나 봐. 그래서 여기서 요양 중이래.”목소리는 점점 멀어졌지만, 민여진은 한바탕 찬물을 뒤집어쓴 듯 몸이 떨렸고 머릿속이 하얘졌다.‘박진성이 이 병원에 있다고?’민여진은 박진성의 소유욕과 냉혹함 그리고 입버릇처럼 다시 시작하자고 말하던 모습이 떠오르자, 이가 덜덜 떨리며 몸서리가 쳐졌다.‘만약 박진성이 내가 살아있는 걸 알게 된다면? 그것도 이 병원에 있단 걸 안다면...’공포와 두려움이 그녀의 이성을 거의 삼켜버릴 무렵, 조현준의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돌려놓았다.“여진아? 무슨 일이야?”민여진은 두 다리가 얼어붙은 듯 움직일
민여진이 당황하며 주머니 속 휴대전화를 찾아보니, 정말로 반응이 없었다. 배터리가 다 닳은 모양이었다.그녀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저한테 주세요.”휴대전화를 받아 든 민여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통화를 이었다.“여보세요. 이모.”“얘가 정말!”조인화는 울 것 같은 목소리였다.“걱정돼서 죽을 뻔했잖아! 왜 전화도 안 받아! 하룻밤을 찾아다녔어! 눈에 파묻힌 줄 알았잖아!”“미안해요...”민여진은 코를 훌쩍였다. 임재윤이 너무 걱정되어 조인화에게 연락할 생각을 못 했다.“하.”조인화가 한숨을 쉬었다.“너만 무사하면 됐어. 괜찮아서 다행이야. 지금 어디야?”어딘지 민여진도 정확히는 몰라 솔직하게 말했다.“임재윤 씨가 그날 나를 도와주다가 병에 걸려서 입원했어요. 진시우 씨를 따라 병원까지 왔는데, 안진 마을에서 꽤 멀어요.”“그랬구나. 안 추워? 가는 버스에 옷이라도 좀 보내줄까?”“괜찮아요.”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임재윤 씨는 이미 깨어났어요. 병원에서 괜찮다는 말만 듣고 바로 돌아갈게요.”“그래.”조인화는 무언가 떠올라 급하게 말을 이었다.“근데 내가 너무 급해서 현준이한테도 전화했어. 걔가 안진 마을 사람들한테 연락해서 너를 찾고 있더라. 아마 밤새 잠도 못 잤을 거야. 별일 없었으면 비행기 타고 바로 왔을 텐데 매우 바쁜가 봐. 일단 현준이한테 네가 무사하다는 말을 전해야겠다.”“네.”전화를 끊은 민여진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 것 같아 송구스러웠다.휴대전화를 임재윤에게 돌려주자, 그가 물었다.“무슨 일이에요? 이모가 많이 걱정했대요?”“네.”민여진은 너무 미안했다.“점심때 집에서 나온 뒤로, 온 밤 연락도 못 드렸으니 걱정할 만하죠.”“점심때부터 기다린 거예요?”민여진은 고개를 끄덕이다 급하게 말했다.“할 일도 없고 심심해서 그랬어요. 교회 휴게실은 따뜻하기도 하고. 아, 맞다.”그녀는 주머니에서 약이 든 봉투를 꺼냈다.“이것도 가져왔는데, 병원에 계시니 필요 없겠네요.”화제를 돌리려던 참
“임... 재윤 씨?”임재윤의 얼굴은 고통과 피로로 일그러져 있었지만, 민여진을 알아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에 글을 썼다.[괜찮아요.]민여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임재윤이 다시 글을 썼다.[미안해요.]“뭐가 미안해요?”민여진은 멍해졌다.[오래 기다리게 해서.]민여진은 순식간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터져 나올 것 같은 감정을 억눌렀다.“제가 더 미안해요. 전부 나 때문이에요. 그날 제가 옷을 사려고 하지 않았다면, 재윤 씨가 우리를 마을까지 데려다주는 일도 없었을 거고, 그랬더라면 눈 때문에 돌아가지 못할 일도 없었겠죠. 그리고 내가 무리하게 따라 나가지만 않았어도 옷을 벗어 나한테 줄 필요도 없었을 테고, 또...”임재윤은 그만하라는 듯 그녀의 손가락을 가볍게 누르더니 주변을 둘러보며 휴대전화를 찾았다.“만약 아픈 사람이 민여진 씨였다면, 나는 더 괴로웠을 거예요.”임재윤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있던 민여진은 언제 왔을지도 모를 진시우의 기침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제가 왠지 불청객이 된 것 같네요. 두 분의 애정 표현을 방해해서 미안해요.”민여진은 즉시 한 발짝 물러서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임재윤은 진시우를 노려보며 불만을 표시했다.진시우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나도 눈치껏 그냥 가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어. 민여진 씨가 온종일 밥도 안 먹은 것 같고 게다가 밤새 차를 타고 오느라 힘들었을 거잖아. 뭐라도 좀 챙겨야지.”진시우의 말에 임재윤은 얼굴을 찌푸리며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밥 안 먹었어요?”민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어제 점심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임재윤에 대한 걱정이 커서인지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다.임재윤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이렇게 먼 곳까지 왜 와요. 힘들잖아요.”“임재윤 씨가 저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어떻게 안 와요.”민여진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자신이 그를 얼마
“그렇군요...”민여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험한 길을 혼자 달려오시느라 정말 고생 많았겠어요. 미안해요.”민여진의 말에 잠깐 당황하던 진시우는 곧 뜻을 알아차리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임재윤이 지금까지 여자에게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민여진 씨만 예외였던 이유를 알 것 같네요. 민여진 씨가 이렇게 착한 사람이라 그랬나 봐요. 저도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반했을 것 같네요.”민여진은 임재윤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대화 주제를 돌렸다.“진시우 씨는 사랑하는 분이 계세요?”“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아직이에요. 그녀는 아직 저와 함께할 마음이 없거든요.”“그런가요?”민여진의 놀란 표정에 진시우는 웃으며 말했다.“왜요? 제가 솔로라는 게 그렇게 믿기지 않나요?”민여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진시우 씨는 너무 훌륭하신 분이잖아요. 능력도 있으시고 말도 잘하시니, 사랑하는 사람이 계신다면 당연히 잘될 거로 생각했어요.”진시우는 앞을 응시하며 말했다.“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순간 누군가의 생각에 멍해 있던 진시우는 이내 다시 웃으며 농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아마도 이런 걸 천재의 시련이라고 하나 봐요. 제가 너무 뛰어나고 일도 잘 풀리니까, 하늘이 사랑만은 좀 힘들게 해보라고 이러는 거겠죠.”민여진은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진시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좀 더 쉬세요. 날이 밝으면 도착할 거예요.”“네.”눈을 감은 민여진은 차의 흔들림에 이끌려 어느새 잠에 빠져들었다.한참 뒤, 진시우의 부름 소리에 민여진은 눈을 비비며 깨어났다.“도착했어요?”“네.”민여진이 더듬더듬 차에서 내리자, 진시우는 그녀에게 자신의 팔을 잡으라고 한 뒤 병원 건물 안으로 안내했다.마침, 간호사 한 분이 지나가자, 진시우가 물었다.“1106호 환자분은 아직 깨어나지 못했나요?”“네. 아직이요.”간호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환자분 친구세요?”민여진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조여왔다. 진시우가 고개를 끄덕였
진시우는 말을 이어가며 웃음을 터뜨렸다.“두 사람 정말 하나같이 고집이 세네요. 한 사람은 어떻게든 가겠다고 하고, 한 사람은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으니. 목숨이 무슨 장난인 줄 아세요?”민여진은 낮에 들은 소식이 머릿속을 맴돌았다.박진성이 쓰러져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것과 임재윤의 연락 두절이 너무나도 우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내 그런 생각을 부정했다.두 남자는 성격부터 행동 방식까지 완전히 달랐다. 박진성은 독선적인 태도로 모든 것을 강제하던 인물이었고, 임재윤은 온화하며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주는 사람이었다.만약 그녀가 조현준에게 전화하는 것을 박진성이 목격했다면, 그는 폭력적으로 핸드폰을 빼앗은 뒤 모욕적인 말을 쏟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임재윤은 그러지 않았다.기분이 상했을지라도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거리를 두며 자신의 기분을 추슬렀다.어쩌면 임재윤은 정말로 어제 전기 배전함을 수리하다 감기에 걸린 것일 수도 있었다.그래서 연락을 할 수 없었던 거였고 깨어나자마자 민여진이 생각나 안진 마을로 오려 했다는 점에서, 그의 진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있던 민여진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물었다.“임재윤 씨는 괜찮아요?”“별로 좋지는 않아요.”진시우는 숨길 이유가 없다는 듯 진지하게 말했다.“임재윤은 원래 몸이 약해서 병원 신세를 자주 졌어요. 게다가 고열에 쓰러지기까지 했으니, 상태가 더 나빠 진 거죠. 오늘 쓰러지지 않았다면 여기 온 사람은 제가 아니라 임재윤이였겠죠.”진시우의 말에 민여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녀는 주저 없이 옷을 벗어 자신에게 걸쳐주던 임재윤의 모습이 떠올랐다.그 추운 날, 눈보라를 맞으며 추위를 버텼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여진 씨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제때 왔으니 다행이지. 이 추운 날씨에 계속 밖에 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말 안 해도 알죠?”진시우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제가 집에 데려다줄 테니...”“진시우 씨
민여진은 임재윤이 비록 자신의 전화번호를 몰랐다고는 하지만, 마을 이장이나 주민들에게 전화할 수도 있었고 진시우의 인맥을 생각하면 연락처를 못 구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런 게 아니라면, 오는 길에 눈 때문에 길이 막혀 늦어지는 거로 생각하며 민여진은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마음먹었다.잠시 후 휴게실 문이 열렸다. 민여진이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들자, 들어온 건 마을 사람이었다.“여진아, 9시야.”“늦게까지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민여진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 채 약봉지를 들고 나섰다.밖에는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고 발목까지 차오를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다.마을 사람이 말했다.“같은 길이니 내가 데려다줄게. 이런 날씨에 혼자 가기 힘들 거야.”민여진은 잠시 망설이다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괜찮아요, 먼저 가세요.”“너 설마 더 기다릴 생각인 거야?”마을 사람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너 오후 1시부터 9시까지 기다렸어. 오겠다고 했던 사람이 안 오면 그건 분명히 바람맞힌 거야. 아무리 날씨가 이렇다고는 해도, 계속 기다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온다고 했으니 꼭 올 거예요. 그 사람은 빈말하는 사람이 아니에요.”민여진은 임재윤이 했던 행동들을 떠올리며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그녀는 추운 날 옷까지 벗어준 그 사람을 위해 조금 더 기다리는 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안 오는 줄 알고 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면 어떡해?’민여진은 이런 추운 날에 임재윤이 헛걸음이라 할까 봐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알겠어.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눈이 점점 더 심하게 오고 있고 날도 추우니까 길어도 30분만 더 기다려. 그 이상은 위험해.”“네. 걱정하지 마세요. 10분만, 정말 10분만 더 기다릴게요.”마을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떠났다.민여진은 문 앞에 웅크려 앉았다. 처마가 눈은 많이 막아주었지만, 차가운 기운이 온몸으로 전해져 그녀는 고개를 가슴에 묻고 있었다.‘조금만 더, 조
“아이고.”조인화가 죽을 마시며 의아한 듯 말했다.“저렇게 대단한 사람이 다쳤다고? 무슨 일이야? 저런 사람들은 항상 경호원들이 붙어 다니지 않나? 설마 암 같은 건 아니겠지?”민여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아파져 오는 마음에 그녀는 자신을 스스로 비웃으며 고개를 숙인 채 죽을 마셨다.이 화제는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로 덮어졌고 조인화는 오락프로에 빠져 웃음꽃을 피웠다.아침 식사를 마친 민여진은 얼굴을 씻은 뒤 도구를 들고 말했다.“마당에 잠깐 다녀올게요.”눈이 내린 마당에는 정리할 게 별로 없을 터였지만, 민지연은 그냥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무언가에 몰두해야만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멈출 수 있을 것 같았다.그녀의 이런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조인화는 만류하지 못하고 그저 안전에 유의하라고 재삼 당부했다.“정말 할 일이 없으면 이내 들어와. 밖이 너무 추워서 오래 있으면 감기 걸려. 오늘 일기예보 보니까 하루 종일 눈 온다던데.”“네, 조심할게요.”민여진은 특히 조심하며 마당으로 나갔다. 먼저 쌓인 눈을 치우고, 마당에 놓인 물건들을 가능한 한 모두 집 안으로 들여놓았다.일을 하다 보니 정말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차츰 몸에서 땀이 나기까지 했다.점심을 먹고 난 후, 민여진은 조인화가 준비해 준 약을 가지고 교회로 향했다.교회 안에는 마을 사람들만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사람을 설득해 휴게실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소파에 앉아 두 시간을 기다리다 몸이 찌뿌둥해 일어나서 스트레칭하고 다시 앉아 기다렸다.그러던 중 누군가 문을 열고 물었다.“여진아, 누구 기다리니? 진시우 씨 일행은 눈 오는 날엔 오지 않아.”민여진은 어색해하며 말했다.“알아요.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거예요.”“다른 사람?”마을 사람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너무 오래 기다리지 마. 우리도 저녁이면 문 닫고 가야 해.”“네, 너무 늦지는 않을 거예요.”민여진은 임재윤이 말한 오후는 어쩌면 네시나 다섯 시일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