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6호? 이건 임재윤의 병실이잖아? 어떻게 박진성의 병실이 될 수 있는 거지? 분명 임재윤이였는데? 내가 방금까지 그곳에 있었는데? 만약...’얼굴이 하얗게 질린 민여진은 공포에 눈동자가 확장되며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만약 임재윤과 박진성이 같은 사람이라면?’민여진은 넋을 잃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에게 이건 너무나도 숨 막히는 가정이었다.하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일도 아니었다. 임재윤은 처음 나타난 순간부터 계속 벙어리 행세를 해왔고 그녀는 앞을 볼 수 없었다.결국 박진성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두 가지 조건이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그렇다면 그는 얼마든지 완벽하게 낯선 사람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알레르기 사건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박진성의 짓일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박진성이 입원했다는 뉴스가 나오자마자 임재윤도 바로 입원했고 마침 또 같은 병원에 입원했다.민여진은 이 모든 걸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벙벙하게 서 있었다. 고통보다 더 큰 건 속임수에 대한 슬픔이었다.‘임재윤은 가짜였고 그의 다정함도 가짜였구나.’민여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는 벽을 짚고 눈물을 참으며 밖으로 나갔다.‘도망쳐야 해!’머릿속에 남은 유일한 생각이었다. 가능한 한 멀리 이곳에서 떠나야 했다. 박진성만 없다면 어디든 상관없었다.“민여진 씨?”하필이면 휴식을 마치고 돌아온 진시우와 마주쳤다. 그는 민여진한테 다가오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민여진 씨, 여기서 뭐 하세요? 아까 문 앞에서 우연히 보고 잘못 본 줄 알았어요. 어딜 가시려고요?”진시우의 친절하고 따뜻한 태도에 오히려 오싹함을 느낀 그녀는 그를 무시한 채 이를 악물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민여진 씨?”민여진의 태도에 당황스러워진 진시우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 하자, 민여진은 바로 뿌리치며 공포에
“축하드려요, 임신 4주 차예요.”의사의 축하에도 민여진은 전혀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다시 한번 물었다.“검사가 잘 못 된 건 아닌가요..? 임신일 리가 없는데... 한 번만 다시 검사해주세요.”“혹시 한 달 전에 관계를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있긴 한데...”“피임조치를 했다거나 약을 드신 적은 있으세요?”비가 오던 날, 박진성과 보냈던 뜨거운 밤을 떠올리던 민여진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그러자 의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검사 다시 할 필요도 없잖아요. 관계도 하고 약도 안 먹었으면 원래도 임신 가능성이 높은데 결과가 잘못됐을 리는 없어요.”의사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던 민여진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그럼 진단서만 좀 고쳐주시면 안 될까요? 임신 아니라고 적어주세요 제발... 돈은 얼마든지 드릴게요.”“민여진 씨, 여긴 합법적인 병원입니다. 환자들의 진단서를 마음대로 고치는 건 불법이에요, 다른 용건 없으시면 이만 나가주세요.”“다음 환자분!”미간을 찌푸리며 축객령을 내리는 의사에 민여진은 진단서를 손에 꼭 쥔 채 비틀대며 진료실을 빠져나왔다.소란스러운 거리 한복판에 서 있던 민여진은 도무지 발을 뗄 수가 없었다.저를 받아들인 것도 박진성으로서는 많이 양보한 건데 아이까지 가졌다는 걸 알게 되면 당장 지우라고 할 게 뻔했기에 민여진은 이 진단서를 들고 그를 마주하기가 두려웠다.민여진이 배 속의 아이를 지킬 궁리를 하고 있을 때 박진성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전화를 받자 박진성의 낮은 음성이 귀에 내려꽂혔다.“검사 끝났으면 빨리 집으로 와.”박진성은 인내심이 그리 깊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민여진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30분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렇게 불안한 마음으로 차에 타서 별장에 도착한 그녀는 마침 3층 금지구역에서 내려오는 박진성을 보게 되었다.실크 잠옷의 윗단추를 두어 개 풀어헤친 탓에 남자의 탄탄한 근육이 그대로 민
그 말을 들은 민여진은 선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전화를 할 때부터 이미 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때는 아무 말 않다가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할 때가 돼서야 잔인하게 아이를 지우라는 말을 하는 그가 민여진은 너무나 야속했다.하지만 저의 우는 모습을 싫어하는 박진성을 알기에 민여진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어 자신을 진정시키고는 말했다.“진성 씨, 나 앞으로 말도 잘 들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아이만은 지키게 해주면 안 돼요? 절대 진성 씨 귀찮게 안 하고 문채연 씨 깨어나면 바로 애 데리고 나갈게요. 이 세상에 없는 아이처럼 키울게요.”하지만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는 박진성의 동정은커녕 오히려 비웃음만 샀다.“민여진, 착각하는 것 같아서 알려주는 건데 네 그 얼굴이 아니었으면 넌 박씨 집안 사모님 자격으로 지금처럼 누리고 살지도 못해. 가끔 선 넘는 거야 그렇다 쳐도 내 아이는 안돼. 나를 위해 아이를 낳을 여자는 채연이뿐이야. 너한테는 그럴 자격 없어.”자격이 없다는 그 말은 채찍이 되어 곧바로 민여진의 가슴에 깊은 생채기를 내었다.그녀가 박진성의 무정함을 원망하고 있을 때 현관 쪽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양경호가 안으로 들어섰다.“얘 좀 은밀한 병원으로 데려가서 수술시켜, 아무 소리도 새어나가지 않게 신경 쓰고.”배 속의 아이한테는 아버지인 사람이 저토록 매정하니 민여진은 오장육부가 베이는 것처럼 아파왔다.“진성 씨...제발요... 안돼요!”하지만 박진성이 그 애원도 무시한 채 양경호를 향해 눈짓하자 민여진은 바닥에 꿇어앉아 버렸다.“진성 씨... 제발요, 나한테 무슨 짓을 시켜도 좋으니까 제발 아이만은 지키게 해줘요. 낳기만 하면 바로 보낼게요, 제발 살려만 줘요...”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애원한 탓에 민여진의 이마는 온통 피투성이였고 그걸 본 박진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민여진, 넌 진짜 그 얼굴을 가지지 말았어야 했어. 채연이는 너처럼 비굴하진 않을 거야.”문채연이야 머리를 박지 않아도 박씨 집안 후계자 박진성의 사랑을
...문채연이 무사한 걸 확인하고서야 아래로 내려온 박진성은 사라져버린 민여진에 미간을 찌푸리며 양경호를 바라보았다.“민여진은?”그 질문에 양경호도 어리둥절해 할 때, 박진성은 본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진성아, 넌 이렇게 기쁜 소식을 왜 이제야 전해? 채연이 임신했대, 얼른 집으로 와.”본가에 도착한 박진성은 소파에 앉아 음식을 먹는 민여진을 보자마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민여진도 자신이 잘못한 건 아는지 박진성을 보자마자 고개를 푹 떨구고는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하, 대단하네 진짜.”가엾은 토끼처럼 굴던 애가 이런 식으로 반항할 줄 몰랐기에 그 분노가 배가 되는 것 같았다.박진성의 분노를 마주한 민여진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이정화가 나서서 박진성을 나무랐다.“뭐가 대단하다는 거야, 넌 무슨 애가 말을 그렇게 하니? 채연이가 임신했다는 데 안 기뻐?”박진성은 이를 악문 채 민여진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아주 기뻐서 날아갈 것만 같은데요 뭘.”“그래야지, 이게 얼마나 기쁜 일이니. 결혼한 지 2년 만에 드디어 아기가 생겼으니, 딸이든 아들이든 다 박씨 집안의 경사지. 넌 채연이 잘 좀 챙겨. 혹시라도 애한테 문제 생기면 너한테 따질 거니까.”말을 하던 이정화를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어머, 주방에서 국 끓이고 있는데, 난 가서 좀 봐야겠다.”“어머님, 저도 같이 가요!”“거기 서.”하지만 민여진은 사냥감을 노리듯 번뜩이는 눈으로 한기를 뿜어내며 말하는 박진성 때문에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넌 나랑 얘기 좀 해야지.”이정화는 둘이 사랑싸움을 하는 줄로만 알고 민여진의 손을 꼭 잡으며 웃어 보였다.“채연아, 긴장할 필요 없어. 쟤가 겉으로는 차가워 보여도 속으로는 네가 자기 애 가졌다고 엄청 기뻐할 거야. 진성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둘이 얘기 나누고 있어 그럼.”사랑? 그래, 박진성이 문채연을 사랑하는 건 맞지.
“싫어요! 진성 씨, 제발 하지 마요!”“싫다고? 이 와중에도 밀당을 하겠다는 건가? 진짜 너답다.”민여진의 애원은 박진성에게 그저 거슬리는 울음소리일 뿐이었다.“진성 씨, 아이가 위험해져요!”“우리 아이잖아요...”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려대던 민여진이 애원하자 박진성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우리 아이? 걔는 그냥 인정도 못 받는 혼종일뿐이야.”말을 마친 박진성의 눈빛은 아까보다 더 차가워졌다.이건 그가 감히 제게 반항한 민여진에게 내리는 벌이기도 했고 또 아이를 죽이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진성 씨...”하지만 민여진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발버둥 쳤고 하늘이 그녀를 돕듯 누군가가 박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양경호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박진성은 스피커 핸드폰으로 돌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대표님, 문채연 씨가 깨어나셨습니다!”...박진성은 전화를 받자마자 1분 만에 뛰쳐나가 운전대를 잡았다.더 이상 그 역겨운 여자와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되고 드디어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를 품에 안을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그는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고민 없이 운전대를 잡았다.한편 혼자 남은 민여진은 벗겨진 옷을 주섬주섬 껴입으며 멀어져가는 박진성의 모습을 바라보았다.그의 모습이 눈에서 사라질수록 마음이 차갑게 식어갔고 온몸이 찌릿찌릿하며 아파 났다.6년 전, 기부금을 받을 때 박진성을 처음 본 뒤로 민여진은 그에게 첫눈에 반해버렸었다.그리고 그들이 두 번째로 만날 때, 박진성은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다.민여진이 생명의 위협도 무릅쓰고 그를 구해 나올 때 꼭 다시 찾아오겠다고, 너를 아내로 맞이해서 평생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다짐하던 게 박진성이었는데 그는 민여진을 문채연 대용품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대타 노릇도 이제 그만할 때가 된 것 같았다.진짜가 돌아왔으니 가짜는 더 이상 필요 없겠지....눈물을 머금은 채로 잠들었던 민여진은 이튿날 아침,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민여진은 화상을 입은 손보다도 마음이 더 아파왔다.울먹이는 문채연은 다정하게 달래주면서 다친 민여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 게 박진성이었다.민여진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박진성은 우는 여자를 싫어하는 게 아니란 걸. 그는 그저 우는 민여진을 유독 싫어할 뿐이었다.“그런 거 아니에요...”억울함에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 민여진이 부어오른 손을 박진성에 들어 보였지만 그는 오히려 화를 내며 그녀의 상처를 매정하게 쳐냈다.“그 손 안 치워?!”민여진은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고통을 참아냈지만 박진성은 그걸 연기라고만 생각하며 치를 떨어댔다.“어디서 변명이야, 너한테 물이 튄 걸 다행으로 알아야지. 만약 다친 게 채연이였다면 너도 무사하지 못했을 거야. 당장 나가!”박진성의 말에 걸음을 옮기던 민여진은 그만 문채연의 득의양양한 표정을 봐버렸다.“진성 씨, 그만 해요. 여진 씨도 진성 씨 사랑해서 그러는 거잖아요. 2년 동안 부부로 지내서 쌓인 정도 있을 텐데 나 때문에 싸우지 마요.”“정?”박진성은 코웃음을 치며 그녀의 말에 답했다.“나랑 쟤 사이에 정 따위는 없어. 네가 깨어났으니까 쟨 이제 가야지. 본가에서 너랑 결혼하는 걸 반대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쟤랑 결혼할 일은 없었어. 쟤가 박씨 집안 사모님 행세를 할 일은 더더욱 없었겠지.”닫혀버린 문 때문에 뒤에 이어지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이미 들은 말로도 민여진은 가슴이 아파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눈앞이 새까매질 정도로 어지러워 바닥에 쭈그려 앉은 채 눈물을 흘렸다.그렇게 겨우겨우 1층으로 내려온 그녀가 소파에 앉아있은 지 한참 지나자 마침내 박진성이 아래로 내려왔다.“사인해.”그런데 그와 함께 제 앞에 놓은 이혼 합의서에 민여진은 고개를 들어 조심스레 물었다.“오늘은... 이혼 안 한다고 했잖아요.”“안 하면 네가 계속 채연이 해치는 거 보고만 있을까? 빨리 사인하고 나가. 그래야 내가 채연이랑 다시 시작하지.”짜증 가득한 투로 말하는 박진성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을 흘리던 민여진은 이를 악물며 힘겹게 현관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때 문이 열리더니 박진성이 안으로 들어왔다.“진성 씨?”그를 본 민여진 눈을 반짝이며 걸음을 재촉했다.“진성 씨, 내 말 좀...”“입 다물고 따라 나와.”평소와는 다른 농도의 한기를 뿜어내는 그에 민여진은 당황하며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채연이가 차를 몰고 나갔다가 사람을 죽인 것 같아. 그리고 사라졌어.”“그럼 당장 자수를 하라고 해야지 나는 왜...”목이 말라온 민여진이 말도 채 맺지 못하고 박진성을 바라봤는데 그는 차가운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네가 대신 감옥에 가줘야겠어.”“싫어요!”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박진성에 민여진은 두 눈을 크게 뜨며 울부짖었다.“내가 왜요? 사람은 죽인 건 문채연인데 왜 걔 대신 나를 감옥에 보내냐고요!”“네가 채연이 자리에서 2년 동안이나 누릴 거 다 누렸잖아.”박진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채연이 도망가는 것도 CCTV에 이미 다 찍혔어. 둘이 얼굴이 똑같으니까 다들 널 의심할 텐데 네가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그럼 진실을 말하면 되잖아요, 나랑 문채연 씨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라고!”민여진은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그리고 내가 채연 씨 대신 누릴 걸 누렸다니요? 그건 원래 6년 전부터 내가 누렸어야 할 생활이었어요. 진성 씨를 그때 불구덩이에서 구한 건 바로 나였다고요!”이 말을 들으면 박진성이 놀랄 줄 알았는데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미간조차도 찌푸리지 않았다.“역시 채연이 말이 맞네.”오히려 그의 얼굴에 드리운 혐오의 감정이 더 짙어질 뿐이었다.“채연이가 6년 전날 화재에서 구해준 걸 너도 알았다며. 그래서 바로 자기가 그 자리를 뺏으러들 거라고 하더니, 넌 진짜 어쩜 그렇게 염치가 없어?”“... 뭐라고요?”“정말 6년 전에 날 구한 게 너라면 네 성격으로 2년을 참을 수나 있었겠어? 당장이라도 모두한테 알렸겠지.”그 말을 들은 민
그제야 민여진이 대신 감옥에 가는 일을 얘길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린 박진성은 바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욕을 하고 억압해도 제 아이만은 포기하지 않던 여자가 이제 와서 모든 걸 버리고 떠나겠다니 박진성은 당연히 믿지 않았지만 제 입으로 대신 감옥에 가겠다고 말하는 그녀에 말투를 한껏 누그러뜨렸다.“걱정 마, 네가 채연이 죄 대신 뒤집어쓰겠다고만 약속하면 나도 너 죽게 안 내버려 둬. 많아도 5개월이야. 그동안 버티면 너도 바로 빼줄게. 그리고 네 엄마도 원래대로 바로 데려올 거야.”그의 말이 끝나도 대꾸를 안 하는 상대방에 인내심이 다 한 박진성은 빠르게 본인 할 말을 마무리했다.“빨리 경찰서 가서 자수해. 나 회의 있어서 다른 용건 없으면 이만 끊을게.”“박진성 씨.”그가 전화를 끊으려 할 때, 슬픔을 간신히 참아내는 듯한 민여진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우리 다신 보지 말아요.”울음 섞인 그녀의 말에 잠시 멍해 있던 박진성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화가 이미 끊겨버린 뒤였다.결의에 찬 듯한 말투가 민여진의 입에서 흘러나오니 낯설기도 했고 묘하게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대신 감옥에 보냈다고 저에 대한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사람처럼 구는 게 2년 동안이나 저를 졸졸 따라다니던 그녀답지 않아서 박진성은 이번에도 민여진이 그저 불쌍한 척하는 거라고만 생각했다.그리고 만약 정말 그녀가 말한 대로 다시 보지 않으면 좋아할 쪽은 오히려 박진성이었기에 그는 더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대표님.”옆에 있던 양경호가 회의를 진행해야 한다는 신호를 주자 박진성도 민여진을 빠르게 잊고 회의실로 들어갔다....한편 통화를 끝낸 민여진은 그길로 경찰서로 향했다.“제가 문채연입니다. 오늘 차로 사람을 치어서 죽였어요. 벌 받을까 봐 도망갔는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이제라도 자수하려고요.”공허한 눈동자로 자수를 하러 온 그녀를 보자마자 유가족들이 달려들었다.그들에게 모진 욕을 들으면서도, 갖은 폭행을 당하면서도 민여진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배
‘1106호? 이건 임재윤의 병실이잖아? 어떻게 박진성의 병실이 될 수 있는 거지? 분명 임재윤이였는데? 내가 방금까지 그곳에 있었는데? 만약...’얼굴이 하얗게 질린 민여진은 공포에 눈동자가 확장되며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만약 임재윤과 박진성이 같은 사람이라면?’민여진은 넋을 잃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에게 이건 너무나도 숨 막히는 가정이었다.하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일도 아니었다. 임재윤은 처음 나타난 순간부터 계속 벙어리 행세를 해왔고 그녀는 앞을 볼 수 없었다.결국 박진성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두 가지 조건이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그렇다면 그는 얼마든지 완벽하게 낯선 사람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알레르기 사건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박진성의 짓일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박진성이 입원했다는 뉴스가 나오자마자 임재윤도 바로 입원했고 마침 또 같은 병원에 입원했다.민여진은 이 모든 걸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벙벙하게 서 있었다. 고통보다 더 큰 건 속임수에 대한 슬픔이었다.‘임재윤은 가짜였고 그의 다정함도 가짜였구나.’민여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는 벽을 짚고 눈물을 참으며 밖으로 나갔다.‘도망쳐야 해!’머릿속에 남은 유일한 생각이었다. 가능한 한 멀리 이곳에서 떠나야 했다. 박진성만 없다면 어디든 상관없었다.“민여진 씨?”하필이면 휴식을 마치고 돌아온 진시우와 마주쳤다. 그는 민여진한테 다가오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민여진 씨, 여기서 뭐 하세요? 아까 문 앞에서 우연히 보고 잘못 본 줄 알았어요. 어딜 가시려고요?”진시우의 친절하고 따뜻한 태도에 오히려 오싹함을 느낀 그녀는 그를 무시한 채 이를 악물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민여진 씨?”민여진의 태도에 당황스러워진 진시우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 하자, 민여진은 바로 뿌리치며 공포에
‘지켜준다고?’박진성을 만난다면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민여진도 잘 알고 있었다.민여진한테 박진성은 기분이 좋으면 웃어주고 기분이 나쁘면 어떻게든 망가뜨리는, 그야말로 자기 마음대로 날뛰는 미친놈이었다. 그런 그를 상대로 자신을 지켜준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런데 왜 하필 임재윤과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거야?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지?’민여진은 손바닥을 꽉 움켜쥔 채 몇 번이고 숨을 들이마신 뒤에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문지르며 담담하게 말했다.“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 그냥 조금 피곤해서요. 어제 차에서 잘 못 잤거든요.”그녀의 말에 임재윤은 다시 휴대전화를 두드렸다.“진시우가 깨면, 쉴 곳에 데려다주라고 할게요.”“네.”이 기회를 틈타 민여진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박진성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싶었고 그러려면 지금 당장은 박진성이 어느 층, 어느 병실에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민여진은 더듬더듬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걸어갔다.그녀의 안색을 살피던 간호사 한 명이 환자인 줄 알고 질문했다.“눈이 안 보여서 약을 못 받으시는 건가요?”“아니요.”민여진이 설명했다.“저는 환자가 아니에요.”간호사는 잠시 멈칫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그럼 무슨 일로 오셨나요?”“그게...”민여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박진성 씨가 어느 병실에 계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민여진의 말이 끝나자, 간호사는 그녀를 출세하기 위해 능력 있는 남자에게 아첨하는 여자로 단정 짓고 표정을 확 바꾸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죄송하지만, 환자분의 프라이버시 문제라 가족이 아니라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가족이라. 사망한 전 부인도 포함하나요?’민여진은 이렇게 말했다가는 미친 사람 취급받을 거란 걸 알고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물어보는 거예요. 직접 찾아가서 방해하진 않을 거예요.”“찾아가지 않으신다 해도 답변해 드릴 수 없습니다.
“네가 일부러 우리를 걱정하게 한 건 아니란 걸 알아. 다만 이럴 때 내가 네 곁에 없어서 더 유감스러울 뿐이야.”조현준은 피로가 섞인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그런데 임재윤은 누구야?”민여진은 잠시 멈칫하다 임재윤에게 잠시 나가야 한다고 설명한 뒤, 더듬더듬 문을 닫고 나와서 대답했다.“막 알게 된 친구예요.”“그 사람은 나에게 큰 거부감을 보이는 것 같더라.”조현준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어딘가 진지했다.“내가 네 곁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민여진이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입을 열려는 찰나, 지나가던 사람들의 흥분에 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거 알아? 양성의 박진성이 우리 병원에 있대!”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린 민여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쪽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결혼도 안 했다고 하던데. 소문대로 멋지고 품위 있다면 한번 보고 싶다.”“꿈 깨.”옆에 있던 사람이 놀렸다.“결혼은 안 했어도 곧 할 거 아니야. 약혼한다는 소문 몰라? 여자 친구가 엄청 예쁘고 명문가의 규수라고 하던데.”“약혼이 결혼은 아니잖아. 나 같은 스타일을 좋아할 수도 있지.”“됐어. 그것보다.”여자가 물었다.“박진성은 왜 우리 병원에 온 거래? 여기서 양성까지 차로 두 시간은 걸리는데?”“몰라. 들리는 말로는 양성 병원에 기자들이 너무 많이 몰려서 불편하다나 봐. 그래서 여기서 요양 중이래.”목소리는 점점 멀어졌지만, 민여진은 한바탕 찬물을 뒤집어쓴 듯 몸이 떨렸고 머릿속이 하얘졌다.‘박진성이 이 병원에 있다고?’민여진은 박진성의 소유욕과 냉혹함 그리고 입버릇처럼 다시 시작하자고 말하던 모습이 떠오르자, 이가 덜덜 떨리며 몸서리가 쳐졌다.‘만약 박진성이 내가 살아있는 걸 알게 된다면? 그것도 이 병원에 있단 걸 안다면...’공포와 두려움이 그녀의 이성을 거의 삼켜버릴 무렵, 조현준의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돌려놓았다.“여진아? 무슨 일이야?”민여진은 두 다리가 얼어붙은 듯 움직일
민여진이 당황하며 주머니 속 휴대전화를 찾아보니, 정말로 반응이 없었다. 배터리가 다 닳은 모양이었다.그녀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저한테 주세요.”휴대전화를 받아 든 민여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통화를 이었다.“여보세요. 이모.”“얘가 정말!”조인화는 울 것 같은 목소리였다.“걱정돼서 죽을 뻔했잖아! 왜 전화도 안 받아! 하룻밤을 찾아다녔어! 눈에 파묻힌 줄 알았잖아!”“미안해요...”민여진은 코를 훌쩍였다. 임재윤이 너무 걱정되어 조인화에게 연락할 생각을 못 했다.“하.”조인화가 한숨을 쉬었다.“너만 무사하면 됐어. 괜찮아서 다행이야. 지금 어디야?”어딘지 민여진도 정확히는 몰라 솔직하게 말했다.“임재윤 씨가 그날 나를 도와주다가 병에 걸려서 입원했어요. 진시우 씨를 따라 병원까지 왔는데, 안진 마을에서 꽤 멀어요.”“그랬구나. 안 추워? 가는 버스에 옷이라도 좀 보내줄까?”“괜찮아요.”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임재윤 씨는 이미 깨어났어요. 병원에서 괜찮다는 말만 듣고 바로 돌아갈게요.”“그래.”조인화는 무언가 떠올라 급하게 말을 이었다.“근데 내가 너무 급해서 현준이한테도 전화했어. 걔가 안진 마을 사람들한테 연락해서 너를 찾고 있더라. 아마 밤새 잠도 못 잤을 거야. 별일 없었으면 비행기 타고 바로 왔을 텐데 매우 바쁜가 봐. 일단 현준이한테 네가 무사하다는 말을 전해야겠다.”“네.”전화를 끊은 민여진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 것 같아 송구스러웠다.휴대전화를 임재윤에게 돌려주자, 그가 물었다.“무슨 일이에요? 이모가 많이 걱정했대요?”“네.”민여진은 너무 미안했다.“점심때 집에서 나온 뒤로, 온 밤 연락도 못 드렸으니 걱정할 만하죠.”“점심때부터 기다린 거예요?”민여진은 고개를 끄덕이다 급하게 말했다.“할 일도 없고 심심해서 그랬어요. 교회 휴게실은 따뜻하기도 하고. 아, 맞다.”그녀는 주머니에서 약이 든 봉투를 꺼냈다.“이것도 가져왔는데, 병원에 계시니 필요 없겠네요.”화제를 돌리려던 참
“임... 재윤 씨?”임재윤의 얼굴은 고통과 피로로 일그러져 있었지만, 민여진을 알아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에 글을 썼다.[괜찮아요.]민여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임재윤이 다시 글을 썼다.[미안해요.]“뭐가 미안해요?”민여진은 멍해졌다.[오래 기다리게 해서.]민여진은 순식간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터져 나올 것 같은 감정을 억눌렀다.“제가 더 미안해요. 전부 나 때문이에요. 그날 제가 옷을 사려고 하지 않았다면, 재윤 씨가 우리를 마을까지 데려다주는 일도 없었을 거고, 그랬더라면 눈 때문에 돌아가지 못할 일도 없었겠죠. 그리고 내가 무리하게 따라 나가지만 않았어도 옷을 벗어 나한테 줄 필요도 없었을 테고, 또...”임재윤은 그만하라는 듯 그녀의 손가락을 가볍게 누르더니 주변을 둘러보며 휴대전화를 찾았다.“만약 아픈 사람이 민여진 씨였다면, 나는 더 괴로웠을 거예요.”임재윤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있던 민여진은 언제 왔을지도 모를 진시우의 기침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제가 왠지 불청객이 된 것 같네요. 두 분의 애정 표현을 방해해서 미안해요.”민여진은 즉시 한 발짝 물러서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임재윤은 진시우를 노려보며 불만을 표시했다.진시우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나도 눈치껏 그냥 가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어. 민여진 씨가 온종일 밥도 안 먹은 것 같고 게다가 밤새 차를 타고 오느라 힘들었을 거잖아. 뭐라도 좀 챙겨야지.”진시우의 말에 임재윤은 얼굴을 찌푸리며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밥 안 먹었어요?”민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어제 점심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임재윤에 대한 걱정이 커서인지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다.임재윤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이렇게 먼 곳까지 왜 와요. 힘들잖아요.”“임재윤 씨가 저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어떻게 안 와요.”민여진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자신이 그를 얼마
“그렇군요...”민여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험한 길을 혼자 달려오시느라 정말 고생 많았겠어요. 미안해요.”민여진의 말에 잠깐 당황하던 진시우는 곧 뜻을 알아차리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임재윤이 지금까지 여자에게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민여진 씨만 예외였던 이유를 알 것 같네요. 민여진 씨가 이렇게 착한 사람이라 그랬나 봐요. 저도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반했을 것 같네요.”민여진은 임재윤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대화 주제를 돌렸다.“진시우 씨는 사랑하는 분이 계세요?”“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아직이에요. 그녀는 아직 저와 함께할 마음이 없거든요.”“그런가요?”민여진의 놀란 표정에 진시우는 웃으며 말했다.“왜요? 제가 솔로라는 게 그렇게 믿기지 않나요?”민여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진시우 씨는 너무 훌륭하신 분이잖아요. 능력도 있으시고 말도 잘하시니, 사랑하는 사람이 계신다면 당연히 잘될 거로 생각했어요.”진시우는 앞을 응시하며 말했다.“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순간 누군가의 생각에 멍해 있던 진시우는 이내 다시 웃으며 농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아마도 이런 걸 천재의 시련이라고 하나 봐요. 제가 너무 뛰어나고 일도 잘 풀리니까, 하늘이 사랑만은 좀 힘들게 해보라고 이러는 거겠죠.”민여진은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진시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좀 더 쉬세요. 날이 밝으면 도착할 거예요.”“네.”눈을 감은 민여진은 차의 흔들림에 이끌려 어느새 잠에 빠져들었다.한참 뒤, 진시우의 부름 소리에 민여진은 눈을 비비며 깨어났다.“도착했어요?”“네.”민여진이 더듬더듬 차에서 내리자, 진시우는 그녀에게 자신의 팔을 잡으라고 한 뒤 병원 건물 안으로 안내했다.마침, 간호사 한 분이 지나가자, 진시우가 물었다.“1106호 환자분은 아직 깨어나지 못했나요?”“네. 아직이요.”간호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환자분 친구세요?”민여진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조여왔다. 진시우가 고개를 끄덕였
진시우는 말을 이어가며 웃음을 터뜨렸다.“두 사람 정말 하나같이 고집이 세네요. 한 사람은 어떻게든 가겠다고 하고, 한 사람은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으니. 목숨이 무슨 장난인 줄 아세요?”민여진은 낮에 들은 소식이 머릿속을 맴돌았다.박진성이 쓰러져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것과 임재윤의 연락 두절이 너무나도 우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내 그런 생각을 부정했다.두 남자는 성격부터 행동 방식까지 완전히 달랐다. 박진성은 독선적인 태도로 모든 것을 강제하던 인물이었고, 임재윤은 온화하며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주는 사람이었다.만약 그녀가 조현준에게 전화하는 것을 박진성이 목격했다면, 그는 폭력적으로 핸드폰을 빼앗은 뒤 모욕적인 말을 쏟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임재윤은 그러지 않았다.기분이 상했을지라도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거리를 두며 자신의 기분을 추슬렀다.어쩌면 임재윤은 정말로 어제 전기 배전함을 수리하다 감기에 걸린 것일 수도 있었다.그래서 연락을 할 수 없었던 거였고 깨어나자마자 민여진이 생각나 안진 마을로 오려 했다는 점에서, 그의 진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있던 민여진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물었다.“임재윤 씨는 괜찮아요?”“별로 좋지는 않아요.”진시우는 숨길 이유가 없다는 듯 진지하게 말했다.“임재윤은 원래 몸이 약해서 병원 신세를 자주 졌어요. 게다가 고열에 쓰러지기까지 했으니, 상태가 더 나빠 진 거죠. 오늘 쓰러지지 않았다면 여기 온 사람은 제가 아니라 임재윤이였겠죠.”진시우의 말에 민여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녀는 주저 없이 옷을 벗어 자신에게 걸쳐주던 임재윤의 모습이 떠올랐다.그 추운 날, 눈보라를 맞으며 추위를 버텼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여진 씨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제때 왔으니 다행이지. 이 추운 날씨에 계속 밖에 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말 안 해도 알죠?”진시우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제가 집에 데려다줄 테니...”“진시우 씨
민여진은 임재윤이 비록 자신의 전화번호를 몰랐다고는 하지만, 마을 이장이나 주민들에게 전화할 수도 있었고 진시우의 인맥을 생각하면 연락처를 못 구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런 게 아니라면, 오는 길에 눈 때문에 길이 막혀 늦어지는 거로 생각하며 민여진은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마음먹었다.잠시 후 휴게실 문이 열렸다. 민여진이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들자, 들어온 건 마을 사람이었다.“여진아, 9시야.”“늦게까지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민여진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 채 약봉지를 들고 나섰다.밖에는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고 발목까지 차오를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다.마을 사람이 말했다.“같은 길이니 내가 데려다줄게. 이런 날씨에 혼자 가기 힘들 거야.”민여진은 잠시 망설이다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괜찮아요, 먼저 가세요.”“너 설마 더 기다릴 생각인 거야?”마을 사람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너 오후 1시부터 9시까지 기다렸어. 오겠다고 했던 사람이 안 오면 그건 분명히 바람맞힌 거야. 아무리 날씨가 이렇다고는 해도, 계속 기다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온다고 했으니 꼭 올 거예요. 그 사람은 빈말하는 사람이 아니에요.”민여진은 임재윤이 했던 행동들을 떠올리며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그녀는 추운 날 옷까지 벗어준 그 사람을 위해 조금 더 기다리는 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안 오는 줄 알고 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면 어떡해?’민여진은 이런 추운 날에 임재윤이 헛걸음이라 할까 봐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알겠어.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눈이 점점 더 심하게 오고 있고 날도 추우니까 길어도 30분만 더 기다려. 그 이상은 위험해.”“네. 걱정하지 마세요. 10분만, 정말 10분만 더 기다릴게요.”마을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떠났다.민여진은 문 앞에 웅크려 앉았다. 처마가 눈은 많이 막아주었지만, 차가운 기운이 온몸으로 전해져 그녀는 고개를 가슴에 묻고 있었다.‘조금만 더, 조
“아이고.”조인화가 죽을 마시며 의아한 듯 말했다.“저렇게 대단한 사람이 다쳤다고? 무슨 일이야? 저런 사람들은 항상 경호원들이 붙어 다니지 않나? 설마 암 같은 건 아니겠지?”민여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아파져 오는 마음에 그녀는 자신을 스스로 비웃으며 고개를 숙인 채 죽을 마셨다.이 화제는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로 덮어졌고 조인화는 오락프로에 빠져 웃음꽃을 피웠다.아침 식사를 마친 민여진은 얼굴을 씻은 뒤 도구를 들고 말했다.“마당에 잠깐 다녀올게요.”눈이 내린 마당에는 정리할 게 별로 없을 터였지만, 민지연은 그냥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무언가에 몰두해야만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멈출 수 있을 것 같았다.그녀의 이런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조인화는 만류하지 못하고 그저 안전에 유의하라고 재삼 당부했다.“정말 할 일이 없으면 이내 들어와. 밖이 너무 추워서 오래 있으면 감기 걸려. 오늘 일기예보 보니까 하루 종일 눈 온다던데.”“네, 조심할게요.”민여진은 특히 조심하며 마당으로 나갔다. 먼저 쌓인 눈을 치우고, 마당에 놓인 물건들을 가능한 한 모두 집 안으로 들여놓았다.일을 하다 보니 정말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차츰 몸에서 땀이 나기까지 했다.점심을 먹고 난 후, 민여진은 조인화가 준비해 준 약을 가지고 교회로 향했다.교회 안에는 마을 사람들만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사람을 설득해 휴게실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소파에 앉아 두 시간을 기다리다 몸이 찌뿌둥해 일어나서 스트레칭하고 다시 앉아 기다렸다.그러던 중 누군가 문을 열고 물었다.“여진아, 누구 기다리니? 진시우 씨 일행은 눈 오는 날엔 오지 않아.”민여진은 어색해하며 말했다.“알아요.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거예요.”“다른 사람?”마을 사람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너무 오래 기다리지 마. 우리도 저녁이면 문 닫고 가야 해.”“네, 너무 늦지는 않을 거예요.”민여진은 임재윤이 말한 오후는 어쩌면 네시나 다섯 시일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