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경기가 시작되었고, 장외에서 이승우 등이 관전했다. 조이현은 조금 더 가까이에서 관전했고, 남자들은 뒤에서 앉아 있었다.부승원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무심코 입을 열었다.“주 대표님은 소프트웨어 개발 관련 사업을 하시는 건가요?”주지혁은 부승원이 소프트웨어 개발에 관심을 보이는 줄 알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부승원이 몸을 뒤로 기대고 조이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이현이 같은 여자친구를 뒀으니, 앞으로 주 대표님 사업은 승승장구 할수 있겠네요.”이승우도 두 사람의 대화에 흥미를 느낀 듯 눈썹을 들썩이며 끼어들었다.“예를 들면 어떻게 승승장구할 것 같다는 거지?”“당연히 인맥으로겠지...”이승우가 피식 웃었다.‘풉, 인맥은 무슨, 뇌물 공세겠지...’우연히 만난 척하는 것도 모자라, 예쁜 비서까지 데리고 온 건 다른 뜻이 있어서가 틀림없다는 것을 두 사람도 진작에 알아챘다. 기회를 틈타 예쁜 비서를 그들에게 넘기려는 속셈을 말이다.주지혁의 입꼬리가 약간 굳어졌다. 그는 물론 부승원의 비아냥거리는 어조를 알아들었다. 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속으로 이렇게 우스운 상황을 만든 조이현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밖에...경기장에서 몇십 번의 라운드가 계속됐지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탁!”라켓에 공이 부딪히는 소리가 굉장하게 들려왔다. 안시연이 위험한 공을 되받아친 소리였다.장외에서 이승우가 박수갈채를 보냈다.“나이스 샷!”연정훈도 그녀를 바라보고 찬사를 보냈다. 그러다 시선이 안시연의 가슴에 꽂히자, 덤덤한 척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백핸드로 정면 타를 날렸다.구력이 너무 센 데다가 구속도 너무 빨랐기 때문에 어느 각도에서도 받아치기 어려웠다. 한우빈과 그의 파트너, 두 사람 모두 수비에 실패했다.첫 라운드는 안시연과 연정훈의 승리로 끝났다.안시연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점심 식사를 간단하게 했던 안시연은 격렬하게 운동하고 나니 당이 떨어진 듯 무기력해졌다.다음 라운드가 다시 시작될 줄 알고 숨을
말이 나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안시연 쪽으로 쏠렸다. 다만 연정훈은 관심 없다는 듯이 생수병 마개를 비틀고 물 한 모금 마셨다.안시연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녀가 연정훈을 오해했던 것이었다.“안시연 씨?”한우빈의 파트너가 다시 한번 부르자, 안시연은 무의식중에 입을 열었다.“... 아니요.”안시연과 주지혁은 진작에 헤어졌으니, 주지혁은 그녀의 남자친구가 아니었다.안시연의 대답을 듣고 나서 주지혁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정훈의 앞에서 안시연이 자기와의 관계를 부인하고 자기에게 등을 돌리는 것은 주지혁이 원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안시연의 거침없는 말투에 주지혁의 눈빛은 다시 어두워졌다.“남자친구도 없는데 왜 우리 연 대표님을 보는 척도 안 해요?”이승우가 짓궂게 말했다.“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는 거예요?”안시연은 뜸을 들이다가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주지혁의 눈빛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예전엔 주지혁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고 있었다면, 지금의 안시연은 주지혁이라는 사람을 철저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고상하고 도도한 그의 얼굴 뒤에 숨겨진 자격지심을 잘 알고 있었다.‘지금 부인하면 오히려 주지혁의 자격지심을 건드릴 수 있어. 할머니 일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으니...’쩔쩔매며 망설이는 안시연의 모습은 마치 묵인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주지혁의 눈빛도 많이 누그러졌다.이승우는 그제야 곁에 있던 연정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어휴, 이번엔 물 건너갔네...”연정훈은 손에 든 생수를 탁자 위에 올려놓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의 작은 행동에도 안시연은 가슴이 뜨끔했다.이때, 연정훈이 씁쓸하게 말했다.“상대가 일편단심이라면 어쩔 수 없지 뭐.”연정훈은 말을 마치고 나서는 두 번 다시 안시연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이승우와 부승원이 경기하러 경기장으로 나가자, 자리에는 몇 사람만 남게 되었다. 안시연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땀이 많이 나서 잠시 샤워만 하고 오겠다며 조이현에게 양해를
주지혁이 돈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자, 안시연은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기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한발 한발 헤쳐 나갈 수밖에 없었다.안시연은 샤워하고 나온 후부터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웠다. 샤워장에서 나온 후 생수 한 병을 사서 복도에 앉아 있었다.“안시연 씨?”어디선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승우와 부승원이었다.“이승우 씨, 변호사님!”안시연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창백한 것을 보고 이승우가 먼저 물었다.“어디 아프세요? 테니스 경기 때 무리했던 거 아니에요?”안시연은 지금 컨디션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랐다.“더위 먹은 것일지도 모르겠네요.”“더위? 더위 먹은 거라고 해도 방심하지 마세요.”이승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건네주었다.“이거 가지고 3층 A1 라운지로 올라가시면 제가 의사를 불러올게요.”“아닙니다.”안시연이 괜찮다고 했음에도 이승우는 카드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우리 사이에 뭘 사양해요. 한번 친구는 평생 친구죠.”“...”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부승원도 입을 열었다.“A1 라운지는 개인 라운지가 아니고 프라이빗한 공간도 아닙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니, 거기서 푹 쉬고 나오세요. 카드는 프런트에 반납하면 돼요.”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얼굴을 보니 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게다가 지칠 대로 지쳤던 안시연은 개인 라운지가 아니라면 마음 놓고 쉬다가 내려와도 된다는 생각에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고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이승우는 손사래 치며 말했다.“어서 가서 쉬세요.”안시연은 한숨을 내쉬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다.그런데 안시연이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자마자 이승우가 부승원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우리 부승원 변호사님, 멀쩡한 얼굴로 진지하게 헛소리하면 되나요?”부승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어깨에 놓인 이승우의 손을 아래로 내려놨지만, 이승우는 또다시 올려놓으
연정훈이 말을 잇기도 전에 주지혁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연 교수님?”연정훈은 고개를 숙이고 빨갛게 달아오른 안시연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무슨 일인데요?”“아까 너무 바빠서 미처 감사하다고 인사를 못 한 것 같아서요. 지난번 성진대학교 동문회에서 교수님 덕분에 조 교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안시연은 조금 놀라웠다. 주지혁이 먼저 연정훈에게 동문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대체 뭘 어쩌려고 그러는 걸까?’안시연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연정훈이 스위치를 누르고 나서 아까보다 더 가까이 밀착했다. 안시연은 고개를 들면 연정훈과 닿을 것 같았다.연정훈은 주지혁에게 대답하지 않았고 기분이 언짢아진 것 같았다.주지혁은 대답을 들으려고 기다리지 않았고 할 말을 이어갔다.“바쁘신 분이라 잊으셨나 봐요. 지난번에 제가 후배와 함께 인사드렸었는데, 혹시 기억하세요?”안시연이 눈을 감았다. 그녀는 그제야 주지혁의 의도가 이해됐다. 주지혁은 연정훈의 태도를 떠보려고 온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연정훈이 그들의 관계를 폭로할까 봐 두려워했다.‘후배? 정말 웃기지도 않네... 이렇게 선을 긋는 건가?’연정훈도 주지혁의 말을 듣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시선은 안시연의 빨간 입술 위에 떨어졌다. 연정훈은 다시 한번 반복했다.“후배?”안시연은 그 두 글자를 듣고 조롱받는 기분이 들었다.연정훈이 말을 이었다.“그날 워낙 많은 사람을 만나서 기억이 잘 안 나네요.”연정훈이 이렇게 말하자, 주지혁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렇게 말한 것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연정훈이 기억 안 난다고 말했다는 건 그들의 일에 관여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이어서 두 사람은 본론으로 들어가 잠깐 대화를 나눴다. 안시연은 두 사람의 대화에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통화가 끝나자, 방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연정훈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지만, 안시연은 그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연정훈은 마지막 한 마디만 내던지고 돌아서서 안방으로 들어갔다.안시연은 약간 넋을 잃고 라운지에서 걸어 나왔다. 부끄럽고 민망한 상황 때문에 현기증마저 사라졌다.30분 전까지 건물 아래에서 바람피운 전 남자친구와 서로 애틋하게 마음을 표현하더니, 30분 후엔 그의 방에 무턱대고 나타나다니... 안시연의 입장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었다.연정훈이 안시연에게 양다리를 걸친다고 비아냥거린다고 해도, 그녀는 아니라고 설명하기 어려웠다.안시연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가 아무 데나 으슥한 곳을 찾았다. 그녀는 잠시도 더 있고 싶지 않았지만, 주지혁이 입금하기를 기다려야 했다.아이러니하게도 안시연은 분명히 자기 돈으로 외할머니의 병원비를 납부하는 것이었지만, 이렇게 알랑거리며 머리를 숙여야 했다.막 자리에 앉으려는데 멀리서 낯익은 그림자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얼마 전, 바로 이 사람, 유태호가 안시연에게 나쁜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주효진도 잔꾀를 부렸던 것이었다. 만약 그날 밤 도망가서 연정훈을 만나지 못했다면, 안시연은 아마 이미 이 남자의 노리개로 됐을 것이다.안시연은 더이상 순순히 수모를 당하지 않았다. 유태호가 가까이 다가오자, 안시연은 기다리지 않고 돌아서서 가버렸다.“안시연 씨?”유태호가 뒤에서 그녀를 불렀지만, 안시연은 고개도 돌아보지 않았다.조이현이 아래로 내려와 주지혁을 찾다가 마침 멀지 않은 곳에서 안시연이 황급히 걸어가는 모습이 보았다. 그리고 그 뒤로 뚱뚱한 늑대 같은 남자가 따라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조이현도 유태호를 잘 알고 있었다. 출신은 별로지만, 장사에 이골이 나 벌여놓은 일은 꽤 된다고 소문이 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 됨됨이가 덜됐다고 악명이 높았다.‘이렇게 되면 안시연은...’오늘 조이현이 안시연을 데리고 나온 것은 그녀를 연정훈의 품에 안겨주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연정훈은 욕정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성공할 거라고 희망을 품지 않았다. 심지어 조이현은 차라리 미녀
폐쇄된 공간은 안시연의 절망적인 마음을 더욱 어둡게 했다.안시연은 손에 휴대전화를 꽉 움켜쥔 채 최대한 몸을 떨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유태호는 안시연의 눈가가 촉촉한 것을 보고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며 위로하는 척 한마디 했다.“두려워할 거 없어요. 금방 끝나니까. 그건 기분을 좋게 해주는 향수일 뿐이에요.”안시연은 자기를 어루만지는 뜨거운 남자의 손길에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지만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다.“저... 저 숨이 안 쉬어져요.”“숨이 안 쉬어진다고요?”“가슴이 너무 답답해요...”유태호는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안시연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의 두 볼은 확실히 심상치 않게 빨갰다.안시연이 애원하는 듯 유태호를 보며 물었다.“창문 좀 열어주시겠어요?”창문 좀 여는 건 큰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주위에 지나가는 차도 별로 없었으니까... 조금 이따 안시연과 더 좋은 시간을 보내려면 그녀의 말을 어느 정도 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유태호는 얼굴에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그래요. 열어드릴게요.”운전기사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안시연이 앉아 있는 쪽의 도어를 열었다.순간 스치는 뜨거운 바람에 안시연은 심장이 더 빨리 뛰는 것 같았다. 재빨리 주위를 탐색한 그녀는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틈을 타 주위 차량에 도움을 청하려 했다.하지만 주변 환경이 워낙 조용한 데다 지나가는 차들도 적어 연속 두 개의 교차로를 지났지만 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태호는 절대 이 창문을 계속 열지 않을 것이다.이제 막 다음 교차로에 다다르려 할 때 가장 가까운 한 차로에 대형 화물차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운전기사가 앉아 있는 위치가 너무 높아 도와달라고 말하기 어려웠다.“괜찮아요?”유태호는 귀찮은 듯한 얼굴로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바로 그의 절박함을 알아챈 안시연은 지금 도망가지 않으면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 최대한 정신을 차리고 차창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이제 막 밖으로 손을 내밀어 화
순간 안시연의 머릿속에는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난날 주지혁과 함께했던 소소한 추억, 주지혁에게 배신당해 버림받았을 때 느꼈던 절망, 그리고 외할머니와 함께 살아온 힘들었던 시간들...안시연은 분명 그 누구에게도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었지만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 괴롭히고 있는 것 같았다.큰 절망에 빠진 안시연의 눈물은 두 볼을 타고 소리 없이 흘러내렸고 귓가에는 윙윙거리는 이명까지 들렸다.그때 밝은 빛이 차 안에 비치더니 뜨거운 바람이 차 안으로 불어들었다.순간 안시연은 고통스러운 몸부림을 멈췄다. 두려움에 온몸을 덜덜 떨고 있던 그녀는 옆에 있는 유태호의 깜짝 놀라는 목소리를 들었다.“연... 연 대표님.”연정훈?어쩌면 여기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안시연은 눈을 번쩍 떴다.조금 전, 질식해 죽을 것 같았던 속의 울렁거림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안시연은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지만 열리는 차 문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불빛이 나뭇잎 사이로 비춰들어 그녀의 시선을 어지럽게 했다.차 밖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굵직한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내려.”그 말에 안시연은 유체이탈했던 영혼이 다시 자기 몸으로 돌아온 듯 온몸이 저려났지만 이내 긴 숨을 몰아쉬고는 차 밖으로 다리를 뻗었다.하지만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안시연은 저도 모르게 다리가 풀려 바로 앞으로 넘어졌다. 그러나 앞으로 고꾸라져 다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지난번 식당에서처럼 연정훈이 넘어지려는 그녀를 잡아줬다.정면으로 연정훈의 품에 안긴 안시연은 순간 그의 몸에서 나는 은은하고 상쾌한 향수 냄새를 맡았다. 이 냄새는 그녀가 얼마 전에도 그에게서 맡았던 그 독특한 향이었다.“걸을 수 있겠어?”나지막한 연정훈의 목소리였지만 마치 가슴을 뚫고 귓가에 전해지는 것 같았다. “걸을 수 있어요...”안시연은 겨우 한 마디 내뱉었다.그녀는 천천히 몸을 가누며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다리가 풀린 그녀
말이 입가에 맴돌았지만 안시연은 그대로 말하지 못했다. 대신 처음에는 횡설수설했고 한참이나 지나서야 생각했던 말을 겨우 꺼냈다.“외할머니가 아파서 수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돈이 많이 필요해요. 그런데 제 돈은 주지혁 씨가 공동계좌에 묶어놔서 그 사람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어요.”안시연은 말을 하면서도 연정훈의 눈치를 살폈다.연정훈이 아무 대꾸가 없자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결혼하신 줄 알고 그때... 제가 실례했습니다.”연정훈은 계속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굳이 말하자면 안시연이 무례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저 좀 태도가 차가웠을 뿐이었다.“내가 반지에 대해 설명했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연정훈은 계속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말투는 조금 전보다 덜 차가웠다.안시연은 연속 고개를 끄덕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저를 속이는 줄 알았어요.”“내가 여학생이나 속이는 그런 쓰레기처럼 보이나?”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안시연은 연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아닙니다.”몇 초 동안의 정적이 흐른 후, 연정훈이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안시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습니다.”안시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연정훈의 눈을 바라보았다.“잘 모르는 사람에 대해 오해할 수 있잖아요. 마치... 마치 저보고 착하다고 하셨지만 또 생각도 많다고 하셨던 것처럼요.”하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안시연의 목소리는 점점 더 기어들어 갔고 고개도 점차 아래로 숙여졌다. 연정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낮은 소리로 콧방귀를 뀌었다.“억지도 유분수지.”말문이 막힌 안시연은 그저 입술만 깨물며 두 주먹을 꼭 쥐었다.그때 갑자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잠깐 멈칫한 안시연은 위에서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게 하기 위해 숨을 참아 보려 했다. 하지만 오후 내내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라 위가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꼬르륵. 꼬르륵. 조용한 방안에서 그녀의 ‘꼬르륵’ 소리는 유
양지원이 전화를 받지 않자 양시연은 어쩔 수 없이 무거운 웨딩드레스를 움켜쥐고 급히 걷다가 발을 헛디딜 뻔했다.코너를 돌자마자 연정훈을 마주쳤다.연정훈은 양시연의 다급한 표정과 웨딩드레스를 움켜쥔 모습에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어디 가는 거야?”“저...”말끝이 채 맺히기도 전에 양시연의 휴대폰이 울렸다.양시연은 휴대폰 화면에 뜬 발신자를 확인하였고 그것이 양혁수였다!그녀는 얼굴이 밝아지며 급히 전화를 받았다.연정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여보세요?”“응...”양혁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연은 연정훈과 눈을 마주친 후 옆으로 밀고는 물었다.“괜찮아? 부하가 너 비행기 사고를 당했다고 해서...!”그녀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며 이어갔다.연정훈은 옆에서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시선을 돌렸다.양혁수는 가벼운 어조로 답했다. “그 친구가 좀 과장했나 봐.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약간 흔들렸는데 내가 안전벨트를 안 매고 있어서 허리를 살짝 부딪혔어.”“정말 괜찮은 거지?”“응. 멀쩡해. 그냥 검진받고 이따가 협력사랑 식사 약속도 있어.”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다행이다. 네가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머니가 얼마나 걱정하셨겠어.”“알았어. 알았어. 그 정도로 뭘 그렇게 호들갑이야.”“...”“끊을게. 검진받아야 하거든.”“그래. 검사 다 끝나고 아무 이상 없으면 나랑 어머니한테 안부 꼭 전해.”“알았어.”양혁수는 그렇게 말하며 먼저 전화를 끊었다.양시연은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연정훈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는 걸 알아차리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방금 양혁수가 비행기 사고를 당했다고 해서 깜짝 놀랐는데 다행히 아무 일 없대요.”‘다행히 아무 일 없다. 하지만 방금 일이 있었으면 양시연은 결혼식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려 했던 걸까?’연정훈은 목이 마른 듯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별일 아니어서 다행이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돌아서려다 갑자기 물었다.
“세상에!”조용해진 대기실에서 이승우가 또 갑자기 작지 않은 소리로 호들갑을 떨었다.다른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려왔다.참다못한 부승원이 화를 내려는데 이승우가 부승원을 막아서고 핸드폰을 연정훈에게 내밀었다.“정훈아, 네 형님한테 사고가 생겼다는데?”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린 채로 핸드폰을 건네받았다.이승우가 보여준 건 누군가가 보내온 사진이었는데 아마 양혁수와 친분이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사진에는 한 사람이 구급차에 실려 가는 게 찍혀 있었다.문자 내용은 비행기가 뜨자마자 추락했다는 것이었다.이승우가 그다음으로 보낸 문자는 사진 속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이었고 상대는 양혁수라 답했다.다른 사람들이 당황해할 때 이승우가 연정훈에게 물었다.“사람을 시켜 양시연 씨한테 물어볼까? 양시연 씨가 알면 오늘 결혼식 제대로 진행될 수 있겠어?”연정훈이 표정을 구겼다. 잠시 고민하던 연정훈이 핸드폰을 이승우에게 돌려주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그런데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진수빈이 안으로 들어왔다.“연 대표님, 방금 신부 측에서 웨딩드레스에 문제가 생겨 결혼식을 두 시간 미루고 싶다고 합니다.”대기실은 조용해졌다.이상한 점을 눈치챈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상황을 지켜봤다.이승우는 속으로 큰일이 났음을 외치고 있었다.‘어떡하지! 정말 큰 일이야!’연정훈은 그 자리에 멈춰서 침착하게 진수빈에게 말했다.“시연이 말대로 결혼식 시간을 미뤄.”그리고 모든 사람을 뒤로하고 빠르게 신부 대기실로 향했다.보는 사람이 없자 연정훈은 발걸음을 더 재촉했다.신부 대기실에서.양시연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움직이다가 실수로 밟아 올이 나가버렸다.“너무 급해 마세요. 빨리 해결할 수 있어요.”스태프의 말에 양시연이 말했다.“정말 감사해요.”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쿵쿵대는 것이 왠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그때, 문밖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뭐예요?”문이 열리고 여 아주머니가 들어와 사과했다.“제가 실수로 컵을 깨버렸
양석진의 평생에 누구에게 가장 미안하냐 묻는다면, 그 답은 의심할 필요 없이 양시연이었다.양석진의 보배 딸 양시연.양석진과 양지원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 가장 불쌍한 사람은 아이였다.그래서 과거에 좀 더 신중할걸, 양지원이랑 좀 더 많이 대화해 볼 걸, 미리 양시연의 존재를 알아차릴걸, 하는 후회를 멈출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아봤더라도 양시연이 그렇게 고생하지는 않았을 텐데.하지만 양시연은 너무 착하고 순했다.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단 한 번도 원망한 적이 없었고, 양지원과 양석진에게 늘 감동과 따뜻함을 안겨줬다.양석진은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창가의 작은 머리가 보였다.양시연은 모르겠지만 양석진이 피곤을 무릅쓰고 집으로 돌아오는 건 양지원뿐만이 아니라, 창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양시연이 보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었다.마음이 척척 맞는 부녀는 말 몇 마디에 사이가 퍽 가까워졌다.눈앞에 보이는 여러 웨딩드레스에 양석진이 물었다.“어느 드레스로 했어?”양시연이 손으로 가리켰다.양석진의 시선이 그 드레스로 한참 머물렀다.“사실 여기 있는 드레스를 모두 샀어요!”양석진이 의아해하자 양시연이 바로 말을 이었다.“이제 엄마랑 아빠랑 결혼할 때 여기에서 골라서 입으시면 돼요.”양석진이 조금 얼어붙었다.“엄마랑 결혼하실 건가요?”양시연의 질문에 문 앞까지 걸어가던 양석진이 자리에 멈춰서서 몸을 돌렸다.“어느 날 엄마 기분이 아주 좋은 날이면 연락을 해줘. 그럼 빨리 돌아와 설득해 볼게. 그러면 성공할지도 모르잖아.”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서 양손을 등 뒤로 배배 꼬며 말했다.“좋아요! 제가 꼭 연락드릴게요.”양석진도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렇게 말했다.“너만 믿는다.”“당연하죠. 저만 믿으세요.”양시연은 과거 회상에 잠겨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어느새 12시가 지나고 있었다.결혼식은 2시로 예정되어 있었고 드디어 조금씩 긴장한 마음이 들었다.여러 스태프가 양시연을 둘러싸고 메이크업과 웨딩드레스를 체크했
양지원은 양시연의 앞에서 양석진을 ‘아버지’라 칭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고 이것저것 재고 싶지 않았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고 잔뜩 기대되는 듯 눈을 반짝였다.결혼 이틀 전은 양시연이 양씨 저택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잠이 든 시간까지도 창가에서 양석진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양석진은 새벽 늦게 돌아왔는데 손에는 두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하나는 두리안 케이크고, 다른 하나는 과일 케이크였다.두리안 케이크는 당연히 양지원의 것이었다.양시연은 모둠 과일 케이크를 받아쥐고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내가 무슨 과일을 좋아하는지 몰라 이것저것 다 들어있는 거 사신 거죠?”양석진은 양지원의 맞은편에 앉아 그 농담을 받았다.“이걸로 만족해. 원래 네 엄마 입맛대로 둘 다 두리안 케이크로 사려고 했어. 그런데 창수 삼촌이 네가 이틀 뒤 결혼한다고 잘 챙겨주라고 하더라고.”양시연은 입을 삐죽였다.“자. 내가 잘라줄게.”양석진이 살짝 몸을 기울여 양시연의 손에서 케이크 나이프를 뺏어갔다.양시연은 옆자리에 얌전히 앉아 기다렸다.“네 엄마는 이 가게 케이크를 참 좋아해.”“오래된 가게잖아요.”양석진은 큼지막하게 케이크를 잘랐고 모든 딸기를 양시연 몫의 위로 올렸다.양시연은 두 손으로 케이크를 받았다. 마치 어린 시절 높은 시험 점수를 받고 외할머니에게 칭찬을 바라는 기분과 같았다.양석진은 케이크를 먹지 않았다. 대신 의자에 몸을 기대고 편히 앉아 양시연을 바라봤다.“천천히 먹어.”양시연은 한 입 크게 입에 넣다가 머쓱해졌다.양석진이 다정하게 물었다.“저녁 적게 먹은 거야?”“엄마가 요즘 다이어트 중이라서요.”“너도 같이하게?”양시연이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너무 열심히 다이어트해서 옆에 있는 나도 밥이 잘 넘어가지 않더라고요.”양석진이 입꼬리를 올렸다.그렇게 부녀는 작은 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세운시에서 경인시까지 거리도 먼데 매일 이렇게 오가면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겠어요?
이목구비로 보았을 때 모연준의 시원시원한 인상은 유럽 쪽의 혈통이 아닌지 의심이 갔다.부승희는 모연준에 팔짱을 끼고 방 안의 사람들을 일일이 소개했다.양시연과 반우희는 저도 모르게 모연준과 이승우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외모와 가문을 놓고 보면 모연준은 이승우와 큰 차이가 없었다.그러나 양시연에게 ‘결혼 축하’ 인사를 하는 모연준은 아주 차가웠고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그러자 방 안의 온도마저 내려갔다.직전에 방을 찾은 이승우는 선물도 주고 짧은 인사를 나누는 내내 옆자리의 직원들까지 하하호호 웃게 만들었다.부승희의 취향 변화가 참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난 먼저 나가 있을게요. 내가 필요하면 불러요.”부승희가 고개를 끄덕였다.스태프는 부승희와 안면이 있는지 농담 섞인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승희 씨는 성격이 활발하고 남자 친구분은 진중한 성격이라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겠네요.”부승희는 스태프를 덤덤하게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그런 셈이죠. 연준 씨랑 있으면 이상하게 침착해지더라고요.”옆자리의 다른 사람이 말을 걸었다.“당연하지. 네 나이를 생각해 봐. 다행히 연준 씨를 만나고 드디어 좀 차분해졌네.”“그렇네요.”양시연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지난번 만남에서도 부승희는 비슷한 말을 했었다.아무리 뜨거운 사랑도 결국 결말은 똑같다.양시연은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런데 핸드폰이 갑자기 진동했다.연정훈이 문자를 보내왔다.[준비는 다 되어가?][네. 순리롭게 진행되고 있어요.][사람을 시켜 먹을 것 좀 보냈어.]양시연이 빠르게 문자를 했다.[여기에도 음식 많아요. 따로 보낼 필요 없어요.][네가 긴장할까 봐 그래. 뭐라도 먹으면 긴장이 덜 되지 않겠어?]양시연은 마음이 따뜻해졌다.[정훈 씨 집에서 직접 만든 블루베리 시럽이 그렇게 맛있다면서요? 우리 엄마가 계속 말하던데.][보내줄게.][그럼 있다가 먹어볼게요.][그래.]연정훈이 한참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배고프면 꼭 먹어. 화장실 다녀오
양시연은 솔직하게 말했다.[해외에 볼일이 있어서 우리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대요.]연정훈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이 말을 하는 양시연은 실망한 건지 아니면 정말 덤덤한 건지 추측했다.양시연과 양혁수가 해외에서 찍혔던 영상은 이미 모두 지웠지만 한번 본 것만으로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그래서 양시연에게 두 사람이 정말 사귀었던 건 아닌지, 아니면 양혁수에게 한 번이라도 마음이 흔들린 적이 있는지 묻고 싶었다.그러나 입가까지 올라온 말을 또 꾸역꾸역 삼켰다.어차피 양시연의 미래는 자신과 함께였으니 과거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다.[아쉽게 됐네.]연정훈이 답장을 했다.하지만 양시연은 양혁수가 핑계를 대고 서로를 위해 참석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양시연이 농담으로 이렇게 문자 보냈다.[다행히 결혼식 절차를 많이 생략했기 망정이지 오빠 자리가 빈다고 배우라도 찾아 앉힐 뻔했네요.]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말투에 연정훈은 긴장하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그래서 계속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말했다.[우리 시연이 한 수 앞을 내다보네.]양시연이 피식 웃으며 겸손을 떨었다.[과찬이네요.]결혼식의 세부적인 사항을 결정하고 양시연은 짬짬이 시간을 내어 연정훈에게 자선 사업에 대한 정보를 구했다.연정훈은 이러한 정보를 양시연에게 알릴 때만큼만 주도권을 가지는 기분이 들었다.아래층으로 내려온 연정훈은 영준을 찾아 간식을 먹였다.마침 핸드폰 너머의 양시연도 정보를 찾아보며 나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그렇게 간만에 두 사람은 평화롭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연정훈은 진심을 다해 가르치고 양시연은 열심히 듣고 있었다.저녁 11시가 되고 양시연이 크게 기지개를 켰다.“오늘은 이만하고 이제 쉬어.”양시연이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요즘 들어 양시연은 자꾸 몸이 피곤하고 저녁 11시만 되면 잠이 쏟아졌다.영상 통화 배경은 어느새 안방으로 변하고 양시연은 몇 초 만에 파자마로 갈아입고 다시 화면에 나타났다.연정훈은 소파에 앉아
양시연과 연정훈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뒤로 양혁수는 자주 집을 비웠다. 차라리 사무실에서 잠을 자거나 출장을 다녔다.양지원을 비롯한 다른 가족 성원들도 무슨 이유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모르는 척 넘어가 주었다.하지만 양시연은 그 뒤로 양혁수와 제대로 대화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그러나 결혼을 앞두고 양혁수가 자신을 찾아올 줄은 몰랐다.문밖의 양혁수는 반팔에 롱 팬츠를 매치했고 아주 편한 옷차림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양혁수가 물었다.“웨딩드레스 고르는 거야?”양시연은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맞아...”“이미 골랐어?”“응.”그리고 몸을 돌려 중간의 웨딩드레스를 가리켰다.양혁수의 시선이 새하얗고 화려한 웨딩드레스에 멈춰 섰다. 시선을 돌린 양혁수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쁘지 않네.”양시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짧은 침묵이 찾아오고 양혁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해외 지사에 문제가 생겨서 직접 다녀와야 할 것 같아. 그래서 결혼식은 아마 참석하지 못할 것 같아.”양시연은 마음이 복잡했다.양혁수와 진정한 가족이 되고 싶었지만, 결혼식에 양혁수가 온다면 왠지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양혁수가 자진해서 참석하지 않는다고 말해주는 건 어쩌면 좋은 일일 수도 있었다.“얼마나 걸리는지 엄마한테는 말했어?”“뭘 그런 것까지 말하겠어.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난 너랑 다르게 해외에서도 한몫 톡톡히 하고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넌 하나도 걱정되지 않지만 엄마가 걱정돼서 그래. 네가 인사도 없이 떠나면 엄마가 보고 싶어 할 거야.”“그건 일리가 있네.”양혁수가 혀를 '쯧' 하고 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조금 있다가 얘기 잘할게.”“그래...”대화가 중단되고 양혁수는 양시연를 안아주고 싶어 망설였다.그때.쨍그랑 소리가 들려왔다.유리컵이 바닥에 떨어져 부서지는 소리가 양시연의 뒤로 들려왔다.몸을 돌려 확인했으나 등 뒤로 사람이 없었고 패드의 화면을 확인한
양지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왔다.“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우리가 제 흉을 보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양지원의 농담 섞인 말투에 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아마도 웨딩드레스가 마음에 드는지 물어보려고 하는 것 같아요.”“그래. 그럼 천천히 얘기 나누고 있어. 엄마는 아래층에 내려가 있을게.”“네.”양지원이 떠나고 핸드폰 배터리가 바닥난 양시연은 패드로 바꿔 보이스 톡을 진행했다.그리고 소리를 키우고 도우미를 불러 웨딩드레스를 벗으며 대화를 이어갔다.연정훈이 물었다.“마음에 드는 드레스는 있어?”“네. 있어요.”양시연이 말을 이었다.“그럼 정훈 씨는 결정했어요?”“나야 뭐 기본 정장이지.”“신경 쓸 게 많지 않아 좋겠네요.”“그래. 너만 예쁘면 돼.”두 사람은 왠지 노부부같이 심심한 대화를 이어갔다.도우미들이 바쁘게 움직였다.드디어 웨딩드레스를 벗은 양시연은 편하게 자리에 앉아 국수를 한 입 넣으며 연정훈과 대화를 이어갔다.“배고파? 뭘 그렇게 급하게 먹는 거야?”양시연이 참지 못하고 톡 쐈다.“웨딩드레스 환복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아요? 거의 갑옷이 따로 없어요. 얼마나 무거운지 여러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절대 시도도 못 해요.”연정훈이 입꼬리를 올렸다.“그래?”“네! 정장만 고르면 되는 정훈 씨가 참 부럽네요. 뭘 입어도 잘 어울릴 테니까요. 그냥 전날 밤 잠만 푹 자면 컨디션 최상이 되고 헤어만 손질하면 완성이잖아요.”양시연은 갑자기 연정훈의 칭찬을 늘려놨고 연정훈은 기분이 퍽 좋아졌다.“이건 어쩔 수가 없어. 내가 대신해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드레스를 포기할 수도 없잖아.”“에이 됐어요. 어떻게 힘든 일은 하나도 손에 대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몇십억이 되는 웨딩드레스인데 한 번만 참아보죠.”양시연은 농담으로 한 소리였는데 연정훈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몇십억이라고?”“네...”“왜 그렇게 싼 걸 골랐어?”“...”연정훈은 생각보다도 더 진심이었다.“클래
혼인 신고를 마쳤다고 해도 양시연과 연정훈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연정훈은 불만이 가득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결혼 준비는 계속 이어지고 초반에는 양시연도 무리 없이 출근과 결혼 준비를 같이 준비했지만, 후반에는 신경 쓸 게 너무 많아 모든 정신을 결혼 준비에 쏟았다.결혼식은 아주 심플한 야외 결혼식을 선택했다. 거기에 양가 부모님의 말씀 같은 모든 절차는 생략되었다.“양가 부모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말씀을 듣는 과정에서 정훈 씨 할머니를 뵈어야 하는데 한 번뿐인 결혼식에서 기분을 잡치고 싶지 않아요.”양시연의 말에 양지원은 당연히 동의했다.웨딩드레스는 빠르게 경인시로 배송이 되었다. 맞춤 제작은 1년 6개월이 넘는 시간이 소요되었고 기다리고 싶지 않았던 양시연은 차라리 작지 않은 금액의 드레스를 선택해 자신의 몸에 맞도록 2차 수선을 하기로 했다.이번 결혼식의 묘미는 식전까지 신랑은 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만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처음 보는 신랑의 벅찬 마음을 위한 이벤트라 할 수 있었다.그래서 웨딩드레스는 양씨 저택으로 배송을 받았다.양시연은 디자인이 꽤 마음에 들었다.양지원은 여러 드레스 모델을 직접 살피고 있었다. 양시연보다 디테일에 더 신경을 쓰는 양지원도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정훈이가 신경 많이 썼나 보네. 짧은 시간 안으로 이렇게 좋은 퀄리티 드레스를 찾은 걸 보면.”양시연은 창가에 자리를 잡고 메이크업을 받을 준비를 했다.솔직히 말한다면 양시연도 조금 감동을 받았다.연정훈이 결혼 준비에 많은 신경을 쏟은 게 곳곳에서 티가 났다. 많은 디테일은 양시연의 상상을 초월했다.사실 그동안 양시연은 우리가 결혼하게 된다면 정말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연정훈을 향한 마음은 예전처럼 불타오르지 않는데 연정훈은 아직도 뜨거운 사랑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현재 연정훈의 정성을 보면 조금 불만이 동반되기도 했다. 왠지 몇 년 전에 소홀했던 부분을 채워주려 노력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