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경기가 시작되었고, 장외에서 이승우 등이 관전했다. 조이현은 조금 더 가까이에서 관전했고, 남자들은 뒤에서 앉아 있었다.부승원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무심코 입을 열었다.“주 대표님은 소프트웨어 개발 관련 사업을 하시는 건가요?”주지혁은 부승원이 소프트웨어 개발에 관심을 보이는 줄 알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부승원이 몸을 뒤로 기대고 조이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이현이 같은 여자친구를 뒀으니, 앞으로 주 대표님 사업은 승승장구 할수 있겠네요.”이승우도 두 사람의 대화에 흥미를 느낀 듯 눈썹을 들썩이며 끼어들었다.“예를 들면 어떻게 승승장구할 것 같다는 거지?”“당연히 인맥으로겠지...”이승우가 피식 웃었다.‘풉, 인맥은 무슨, 뇌물 공세겠지...’우연히 만난 척하는 것도 모자라, 예쁜 비서까지 데리고 온 건 다른 뜻이 있어서가 틀림없다는 것을 두 사람도 진작에 알아챘다. 기회를 틈타 예쁜 비서를 그들에게 넘기려는 속셈을 말이다.주지혁의 입꼬리가 약간 굳어졌다. 그는 물론 부승원의 비아냥거리는 어조를 알아들었다. 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속으로 이렇게 우스운 상황을 만든 조이현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밖에...경기장에서 몇십 번의 라운드가 계속됐지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탁!”라켓에 공이 부딪히는 소리가 굉장하게 들려왔다. 안시연이 위험한 공을 되받아친 소리였다.장외에서 이승우가 박수갈채를 보냈다.“나이스 샷!”연정훈도 그녀를 바라보고 찬사를 보냈다. 그러다 시선이 안시연의 가슴에 꽂히자, 덤덤한 척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백핸드로 정면 타를 날렸다.구력이 너무 센 데다가 구속도 너무 빨랐기 때문에 어느 각도에서도 받아치기 어려웠다. 한우빈과 그의 파트너, 두 사람 모두 수비에 실패했다.첫 라운드는 안시연과 연정훈의 승리로 끝났다.안시연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점심 식사를 간단하게 했던 안시연은 격렬하게 운동하고 나니 당이 떨어진 듯 무기력해졌다.다음 라운드가 다시 시작될 줄 알고 숨을
말이 나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안시연 쪽으로 쏠렸다. 다만 연정훈은 관심 없다는 듯이 생수병 마개를 비틀고 물 한 모금 마셨다.안시연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녀가 연정훈을 오해했던 것이었다.“안시연 씨?”한우빈의 파트너가 다시 한번 부르자, 안시연은 무의식중에 입을 열었다.“... 아니요.”안시연과 주지혁은 진작에 헤어졌으니, 주지혁은 그녀의 남자친구가 아니었다.안시연의 대답을 듣고 나서 주지혁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정훈의 앞에서 안시연이 자기와의 관계를 부인하고 자기에게 등을 돌리는 것은 주지혁이 원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안시연의 거침없는 말투에 주지혁의 눈빛은 다시 어두워졌다.“남자친구도 없는데 왜 우리 연 대표님을 보는 척도 안 해요?”이승우가 짓궂게 말했다.“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는 거예요?”안시연은 뜸을 들이다가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주지혁의 눈빛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예전엔 주지혁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고 있었다면, 지금의 안시연은 주지혁이라는 사람을 철저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고상하고 도도한 그의 얼굴 뒤에 숨겨진 자격지심을 잘 알고 있었다.‘지금 부인하면 오히려 주지혁의 자격지심을 건드릴 수 있어. 할머니 일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으니...’쩔쩔매며 망설이는 안시연의 모습은 마치 묵인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주지혁의 눈빛도 많이 누그러졌다.이승우는 그제야 곁에 있던 연정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어휴, 이번엔 물 건너갔네...”연정훈은 손에 든 생수를 탁자 위에 올려놓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의 작은 행동에도 안시연은 가슴이 뜨끔했다.이때, 연정훈이 씁쓸하게 말했다.“상대가 일편단심이라면 어쩔 수 없지 뭐.”연정훈은 말을 마치고 나서는 두 번 다시 안시연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이승우와 부승원이 경기하러 경기장으로 나가자, 자리에는 몇 사람만 남게 되었다. 안시연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땀이 많이 나서 잠시 샤워만 하고 오겠다며 조이현에게 양해를
주지혁이 돈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자, 안시연은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기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한발 한발 헤쳐 나갈 수밖에 없었다.안시연은 샤워하고 나온 후부터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웠다. 샤워장에서 나온 후 생수 한 병을 사서 복도에 앉아 있었다.“안시연 씨?”어디선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승우와 부승원이었다.“이승우 씨, 변호사님!”안시연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창백한 것을 보고 이승우가 먼저 물었다.“어디 아프세요? 테니스 경기 때 무리했던 거 아니에요?”안시연은 지금 컨디션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랐다.“더위 먹은 것일지도 모르겠네요.”“더위? 더위 먹은 거라고 해도 방심하지 마세요.”이승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건네주었다.“이거 가지고 3층 A1 라운지로 올라가시면 제가 의사를 불러올게요.”“아닙니다.”안시연이 괜찮다고 했음에도 이승우는 카드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우리 사이에 뭘 사양해요. 한번 친구는 평생 친구죠.”“...”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부승원도 입을 열었다.“A1 라운지는 개인 라운지가 아니고 프라이빗한 공간도 아닙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니, 거기서 푹 쉬고 나오세요. 카드는 프런트에 반납하면 돼요.”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얼굴을 보니 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게다가 지칠 대로 지쳤던 안시연은 개인 라운지가 아니라면 마음 놓고 쉬다가 내려와도 된다는 생각에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고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이승우는 손사래 치며 말했다.“어서 가서 쉬세요.”안시연은 한숨을 내쉬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다.그런데 안시연이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자마자 이승우가 부승원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우리 부승원 변호사님, 멀쩡한 얼굴로 진지하게 헛소리하면 되나요?”부승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어깨에 놓인 이승우의 손을 아래로 내려놨지만, 이승우는 또다시 올려놓으
연정훈이 말을 잇기도 전에 주지혁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연 교수님?”연정훈은 고개를 숙이고 빨갛게 달아오른 안시연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무슨 일인데요?”“아까 너무 바빠서 미처 감사하다고 인사를 못 한 것 같아서요. 지난번 성진대학교 동문회에서 교수님 덕분에 조 교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안시연은 조금 놀라웠다. 주지혁이 먼저 연정훈에게 동문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대체 뭘 어쩌려고 그러는 걸까?’안시연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연정훈이 스위치를 누르고 나서 아까보다 더 가까이 밀착했다. 안시연은 고개를 들면 연정훈과 닿을 것 같았다.연정훈은 주지혁에게 대답하지 않았고 기분이 언짢아진 것 같았다.주지혁은 대답을 들으려고 기다리지 않았고 할 말을 이어갔다.“바쁘신 분이라 잊으셨나 봐요. 지난번에 제가 후배와 함께 인사드렸었는데, 혹시 기억하세요?”안시연이 눈을 감았다. 그녀는 그제야 주지혁의 의도가 이해됐다. 주지혁은 연정훈의 태도를 떠보려고 온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연정훈이 그들의 관계를 폭로할까 봐 두려워했다.‘후배? 정말 웃기지도 않네... 이렇게 선을 긋는 건가?’연정훈도 주지혁의 말을 듣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시선은 안시연의 빨간 입술 위에 떨어졌다. 연정훈은 다시 한번 반복했다.“후배?”안시연은 그 두 글자를 듣고 조롱받는 기분이 들었다.연정훈이 말을 이었다.“그날 워낙 많은 사람을 만나서 기억이 잘 안 나네요.”연정훈이 이렇게 말하자, 주지혁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렇게 말한 것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연정훈이 기억 안 난다고 말했다는 건 그들의 일에 관여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이어서 두 사람은 본론으로 들어가 잠깐 대화를 나눴다. 안시연은 두 사람의 대화에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통화가 끝나자, 방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연정훈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지만, 안시연은 그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연정훈은 마지막 한 마디만 내던지고 돌아서서 안방으로 들어갔다.안시연은 약간 넋을 잃고 라운지에서 걸어 나왔다. 부끄럽고 민망한 상황 때문에 현기증마저 사라졌다.30분 전까지 건물 아래에서 바람피운 전 남자친구와 서로 애틋하게 마음을 표현하더니, 30분 후엔 그의 방에 무턱대고 나타나다니... 안시연의 입장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었다.연정훈이 안시연에게 양다리를 걸친다고 비아냥거린다고 해도, 그녀는 아니라고 설명하기 어려웠다.안시연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가 아무 데나 으슥한 곳을 찾았다. 그녀는 잠시도 더 있고 싶지 않았지만, 주지혁이 입금하기를 기다려야 했다.아이러니하게도 안시연은 분명히 자기 돈으로 외할머니의 병원비를 납부하는 것이었지만, 이렇게 알랑거리며 머리를 숙여야 했다.막 자리에 앉으려는데 멀리서 낯익은 그림자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얼마 전, 바로 이 사람, 유태호가 안시연에게 나쁜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주효진도 잔꾀를 부렸던 것이었다. 만약 그날 밤 도망가서 연정훈을 만나지 못했다면, 안시연은 아마 이미 이 남자의 노리개로 됐을 것이다.안시연은 더이상 순순히 수모를 당하지 않았다. 유태호가 가까이 다가오자, 안시연은 기다리지 않고 돌아서서 가버렸다.“안시연 씨?”유태호가 뒤에서 그녀를 불렀지만, 안시연은 고개도 돌아보지 않았다.조이현이 아래로 내려와 주지혁을 찾다가 마침 멀지 않은 곳에서 안시연이 황급히 걸어가는 모습이 보았다. 그리고 그 뒤로 뚱뚱한 늑대 같은 남자가 따라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조이현도 유태호를 잘 알고 있었다. 출신은 별로지만, 장사에 이골이 나 벌여놓은 일은 꽤 된다고 소문이 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 됨됨이가 덜됐다고 악명이 높았다.‘이렇게 되면 안시연은...’오늘 조이현이 안시연을 데리고 나온 것은 그녀를 연정훈의 품에 안겨주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연정훈은 욕정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성공할 거라고 희망을 품지 않았다. 심지어 조이현은 차라리 미녀
폐쇄된 공간은 안시연의 절망적인 마음을 더욱 어둡게 했다.안시연은 손에 휴대전화를 꽉 움켜쥔 채 최대한 몸을 떨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유태호는 안시연의 눈가가 촉촉한 것을 보고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며 위로하는 척 한마디 했다.“두려워할 거 없어요. 금방 끝나니까. 그건 기분을 좋게 해주는 향수일 뿐이에요.”안시연은 자기를 어루만지는 뜨거운 남자의 손길에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지만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다.“저... 저 숨이 안 쉬어져요.”“숨이 안 쉬어진다고요?”“가슴이 너무 답답해요...”유태호는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안시연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의 두 볼은 확실히 심상치 않게 빨갰다.안시연이 애원하는 듯 유태호를 보며 물었다.“창문 좀 열어주시겠어요?”창문 좀 여는 건 큰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주위에 지나가는 차도 별로 없었으니까... 조금 이따 안시연과 더 좋은 시간을 보내려면 그녀의 말을 어느 정도 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유태호는 얼굴에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그래요. 열어드릴게요.”운전기사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안시연이 앉아 있는 쪽의 도어를 열었다.순간 스치는 뜨거운 바람에 안시연은 심장이 더 빨리 뛰는 것 같았다. 재빨리 주위를 탐색한 그녀는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틈을 타 주위 차량에 도움을 청하려 했다.하지만 주변 환경이 워낙 조용한 데다 지나가는 차들도 적어 연속 두 개의 교차로를 지났지만 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태호는 절대 이 창문을 계속 열지 않을 것이다.이제 막 다음 교차로에 다다르려 할 때 가장 가까운 한 차로에 대형 화물차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운전기사가 앉아 있는 위치가 너무 높아 도와달라고 말하기 어려웠다.“괜찮아요?”유태호는 귀찮은 듯한 얼굴로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바로 그의 절박함을 알아챈 안시연은 지금 도망가지 않으면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 최대한 정신을 차리고 차창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이제 막 밖으로 손을 내밀어 화
순간 안시연의 머릿속에는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난날 주지혁과 함께했던 소소한 추억, 주지혁에게 배신당해 버림받았을 때 느꼈던 절망, 그리고 외할머니와 함께 살아온 힘들었던 시간들...안시연은 분명 그 누구에게도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었지만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 괴롭히고 있는 것 같았다.큰 절망에 빠진 안시연의 눈물은 두 볼을 타고 소리 없이 흘러내렸고 귓가에는 윙윙거리는 이명까지 들렸다.그때 밝은 빛이 차 안에 비치더니 뜨거운 바람이 차 안으로 불어들었다.순간 안시연은 고통스러운 몸부림을 멈췄다. 두려움에 온몸을 덜덜 떨고 있던 그녀는 옆에 있는 유태호의 깜짝 놀라는 목소리를 들었다.“연... 연 대표님.”연정훈?어쩌면 여기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안시연은 눈을 번쩍 떴다.조금 전, 질식해 죽을 것 같았던 속의 울렁거림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안시연은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지만 열리는 차 문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불빛이 나뭇잎 사이로 비춰들어 그녀의 시선을 어지럽게 했다.차 밖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굵직한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내려.”그 말에 안시연은 유체이탈했던 영혼이 다시 자기 몸으로 돌아온 듯 온몸이 저려났지만 이내 긴 숨을 몰아쉬고는 차 밖으로 다리를 뻗었다.하지만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안시연은 저도 모르게 다리가 풀려 바로 앞으로 넘어졌다. 그러나 앞으로 고꾸라져 다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지난번 식당에서처럼 연정훈이 넘어지려는 그녀를 잡아줬다.정면으로 연정훈의 품에 안긴 안시연은 순간 그의 몸에서 나는 은은하고 상쾌한 향수 냄새를 맡았다. 이 냄새는 그녀가 얼마 전에도 그에게서 맡았던 그 독특한 향이었다.“걸을 수 있겠어?”나지막한 연정훈의 목소리였지만 마치 가슴을 뚫고 귓가에 전해지는 것 같았다. “걸을 수 있어요...”안시연은 겨우 한 마디 내뱉었다.그녀는 천천히 몸을 가누며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다리가 풀린 그녀
말이 입가에 맴돌았지만 안시연은 그대로 말하지 못했다. 대신 처음에는 횡설수설했고 한참이나 지나서야 생각했던 말을 겨우 꺼냈다.“외할머니가 아파서 수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돈이 많이 필요해요. 그런데 제 돈은 주지혁 씨가 공동계좌에 묶어놔서 그 사람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어요.”안시연은 말을 하면서도 연정훈의 눈치를 살폈다.연정훈이 아무 대꾸가 없자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결혼하신 줄 알고 그때... 제가 실례했습니다.”연정훈은 계속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굳이 말하자면 안시연이 무례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저 좀 태도가 차가웠을 뿐이었다.“내가 반지에 대해 설명했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연정훈은 계속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말투는 조금 전보다 덜 차가웠다.안시연은 연속 고개를 끄덕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저를 속이는 줄 알았어요.”“내가 여학생이나 속이는 그런 쓰레기처럼 보이나?”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안시연은 연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아닙니다.”몇 초 동안의 정적이 흐른 후, 연정훈이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안시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습니다.”안시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연정훈의 눈을 바라보았다.“잘 모르는 사람에 대해 오해할 수 있잖아요. 마치... 마치 저보고 착하다고 하셨지만 또 생각도 많다고 하셨던 것처럼요.”하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안시연의 목소리는 점점 더 기어들어 갔고 고개도 점차 아래로 숙여졌다. 연정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낮은 소리로 콧방귀를 뀌었다.“억지도 유분수지.”말문이 막힌 안시연은 그저 입술만 깨물며 두 주먹을 꼭 쥐었다.그때 갑자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잠깐 멈칫한 안시연은 위에서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게 하기 위해 숨을 참아 보려 했다. 하지만 오후 내내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라 위가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꼬르륵. 꼬르륵. 조용한 방안에서 그녀의 ‘꼬르륵’ 소리는 유
큼지막해서 소파로 사용해도 거뜬한 곰 인형,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음성 로봇, 특별 제작된 체육복, 색이 바랜 가방 고리, 그리고 여러 브랜드 사 한정템까지...방안을 가득 장식한 ‘쓰레기’에 다른 사람이라면 질겁하며 치우라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서랍을 열어 과거 마라톤 번호까지 남아 있는 걸 본 부승희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이게 벌써 몇 년 전이냐...’이승우는 부승희를 자신의 옆자리에 끌어 앉히며 어릴 적 같이 두었던 체스를 꺼냈다.“자. 오랜만에 해야지.”“하긴 뭘 한다고.”“퀸도 없는데.”“어? 너도 기억하고 있네?”부승희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오빠가 자꾸 반칙하니까 괘씸해서 내가 버린 거잖아!”“내가 반칙했다고? 승희야, 말은 바른대로 해야지.”“오빠!”“너 거짓말하지 마! 그날 내가 홍하나랑 붙어 다닌다고 질투해서 버린 거잖아.”“말이 되는 소리를 해!”이승우는 농담 섞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야, 너 그때 몇 살이었냐? 어린 녀석이 벌써 짝사랑이나 하고.”부승희는 옷을 걷어붙이며 한번 크게 붙을 기세로 달려들었다.방안에는 많은 물건이 자리 잡았지만 모든 게 새것처럼 깨끗했고 누군가 정성스레 닦고 이 방에 두었다는 게 느껴졌다.과거와 거의 일치한 물건 배치에 부승희는 설마 이승우가 직접 짐을 옮긴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두 사람은 테이블에서 투덕대다가 결국 카펫으로 자리를 옮겼다.한편에 놓인 수정 구슬에 로봇이 비쳤다.이승우는 책장에 몸을 기댄 채로 그 수정 구슬을 바라보며 과거에 대해 입을 열었다.부승희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이승우를 바라보며 추억에 잠시 잠겼다.그런데 갑자기 이승우가 눈시울을 붉히더니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왜, 왜 그래?”부승희는 깜짝 놀라버렸고 이승우는 훌쩍이다가 눈가를 꾹꾹 찍어 닦았다.‘젠장.’부승희는 서둘러 티슈를 꺼내 이승우에게 건넸다.“고생은 내가 했는데 울긴 왜 오빠가 울어?”이승우는 더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우리 더 빨리 행복해질 수
이승우는 부승희의 얼굴에 진하게 뽀뽀했다.뜨거운 이승우의 온도를 느끼며 한 소리 하려는데 턱을 움켜쥔 이승우는 바로 키스를 쏟아부었다.옅은 알코올 향과 달콤한 과일 향이 섞여 있었다.이승우 취향대로 과일 담금주를 마신 모양이었다.이승우는 부승희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몸을 돌리게 하여 정면으로 마주한 채로 키스를 이어갔다.급하게 몰아붙이는 이승우에 부승희는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고 부승희가 뒷걸음을 치면 이승우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어쩔 수 없이 부승희는 자꾸 뒤로 물러섰다.이승우는 계획대로 부승희를 소파 부근까지 데려갔고 자연스레 부승희를 소파에 눕히고 본인은 그 위를 올라탔다.사방은 온통 깜깜하고 주변에는 뜨거운 숨이 느껴졌다.부승희는 침을 꿀꺽 삼켰고 온몸에서 전해지는 자극을 느꼈다. 이승우는 부승희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다시 입을 맞춰왔다.서로의 호흡이 엉켜지고 조용한 별장 안에는 두 사람의 거친 호흡 소리만 들려왔으며 부승희는 저도 모르게 발가락을 오므렸다.그러다가 입술이 쓰라려진 부승희가 살짝 이승우의 입술을 깨물었다.이승우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떨어졌고 이번엔 코를 비벼댔다. 그리고 낮지만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난 네가 올 거라고 확신했어.”어둠 속에 적응한 부승희는 이승우의 반짝이는 눈과 한껏 올라간 입꼬리가 바라보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안 오면? 오빠가 신혼집에 구토라도 했으면 나 정말 못 참아!”이승우는 씩 웃더니 부승희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 체향을 느꼈다.“왜 그렇게 무섭게 말해. 자꾸 뭘 못 참는다고 그래?”부승희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무서워? 무서우면 우리 결혼하지 말까?”“그건 안돼.”이승우는 부승희를 꼭 껴안으며 두 눈을 감았다.“네가 날 집어삼킨다고 해도 난 결혼 꼭 할 거야.”“풉. 내가 왜 오빠를 집어삼켜?”“난 집어삼키려고 해도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잖아.”그 말의 은유적인 의미를 알아차린 부승희는 손을 뻗어 이승우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이승우는 오랜만에 과음했다. 부승희가 보내온 부예지의 사진을 보며 창가 자리에서 바람을 쐬며 술기운을 가셨다.그런데 사진을 보면 볼수록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학창 시절, 나무처럼 딱딱하던 부승원이 평생 결혼은커녕 연애도 못 할 거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결혼도, 아이도 부승원은 척척 해냈다.가끔 누군가 이승우에게 왜 경인으로 돌아오지 않는지, 전주에 무슨 꿀이라도 발라놓았는지 물어봤었다.이승우는 전주가 왜 좋은지 진심으로 생각해 봤다.여긴 이승우와 부승희가 다시 시작한 장소였고, 두 사람이 함께 땀을 흘리며 일궈온 사업이 있었으며 함께 나아갈 미래가 있는 곳이었다.다시 술기운이 올라온 이승우는 부승희에게 문자를 보냈다.[어디야? 보고 싶어.]부승희는 바로 전화를 걸어왔고 이승우는 1초 만에 연락을 받았다.“여보세요?”평소보다 낮아진 목소리에 부승희는 바로 눈치를 챘다.“술 마신 거야?”“응, 아주 조금.”“조금은 무슨. 아주 뻗을 정도로 마셨나 보네!”이승우는 아주 자연스럽게 사과했다.“미안. 다음부턴 자제할게.”“다음?”부승희는 농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결혼 축하 파티를 또 할 일이 있다는 거야?”“다음번 파티는 태어날 우리 아기를 위한 파티일 거야.”부승희는 부예지를 품에 안고 달래주다가 그 말을 듣고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승희야.”이승우의 중저음 목소리가 들려왔고 부승희는 눈을 깜빡이다가 대답했다.“왜?”“이따가 우리 집에서 볼까? 오늘 네 얼굴 못 봤잖아.”부승희 품 안의 부예지는 또 슬슬 보채기 시작했다. 부승희가 너무 꽉 안은 탓에 불편하다고 옹알거리는 것이었다.어쩔 수 없이 부승희는 아이를 아주머니에게 넘겨주고 구석 자리로 옮겨 전화를 받았다.그리고 저도 모르게 손을 배배 꼬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내일 아침 같이 먹으면 되지.”“난 네가 너무 보고 싶은걸?”“보고 싶긴 무슨.”부승희는 투덜거리긴 해도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얌전하게 집으로 돌아가. 아주머니한테 해장국 미리 부탁해
부예지의 돌잔치 날, 부승희는 이승우에게 팔짱을 낀 채로 식장에 나타나 아이의 선물을 건넸다. 꼭 붙어 등장한 두 사람을 보며 사람들은 드디어 좋은 소식이 들려오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기저귀 차던 시절부터 알고 지낸 두 사람이 이렇게 먼 길을 돌아오기까지 정말 쉽지 않았다. 몇 해 동안 이승우와 부승희는 공식 석상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전주 목장에 모든 정성을 쏟아부었으며 그곳에 뿌리를 박을 생각처럼 보였다.부승희는 집으로 돌아가 슬쩍 소식을 흘렸고 채애정은 드디어 그날이 왔구나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른 한편, 이승우네 집은 너무 좋아 잔치를 벌일 지경이었다.부승원의 결혼은 온 세상이 떠들썩했던 것과는 달리, 늘 화려한 것을 쫓던 두 사람의 결혼 준비는 되려 차분하고 검소했다.두 사람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 결혼 의사를 밝히고 상견례를 했으며 예식장까지 예약을 마치고 모든 절차를 두 사람이 스스로 해나갔다. 이건 부승희의 제안이었는데 결혼 준비도 여행처럼 두 사람이 정말 어울리는 사람이 맞는지 최종으로 알아볼 수 있는 테스트이기 때문이었다.이승우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돼지 농사도 기꺼이 하는데 직접 결혼 준비를 하는 게 뭐가 어렵겠는가?두 사람은 경인과 전주를 바삐 돌아다녔고 가끔 해외로 출장도 다녀왔었다. 그러다가 두 사람 모두 여유가 생기면 사무실에 모여 차근차근 결혼 준비를 했다.대부분 상황에서 부승희는 펜 끝을 질근질근 물며 준비해야 할 리스트를 체크했고, 이승우는 다리를 꼰 채로 여유롭게 태블릿에 식장 설계를 했다.그러다가 배가 고파진 부승희는 간식장에서 소시지 두 개를 꺼내 하나는 입에 물고 하나는 이승우에게 휙 던졌다.“이거만 먹으면 아쉽잖아.”“음료수라도 시킬까?”이승우는 핸드폰을 꺼내고 익숙하게 부승희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소시지를 질근질근 씹으며 배달 앱을 같이 확인했다.두 사람은 천천히, 또 차근차근 준비했고 드디어 늦가을에 청첩장을 완성해 지인들에게 보냈다.결혼식장은 현재 개발 중인 경인 목장
승가 농목도 벌써 4년 차가 되었고 부승희의 사업은 승승장구를 해 최고점을 찍었다.그리고 부승희가 서른둘, 이승우가 서른넷이던 해에 배여진이 청첩장을 보내왔다.배여진의 재혼 결심에 부승희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해 줬다.2년 동안 배여진은 공부도 하고 자기 계발도 했으며 선기현을 떠나며 모든 액운을 털어버린 건지 손을 대는 것마다 성공했다.재혼 상대는 한독 혼혈이었고 가정 배경과 성격 모두 배여진에게 걸맞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배여진보다 세 살이나 어렸다.결혼식은 해외에서 진행되었고 부승희는 초대장을 들고 직접 그곳으로 향했다.결혼식에서 배여진은 누구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배여진은 자주 부승희에게 손 편지와 이메일을 보냈고 편지와 이메일에 담긴 사진과 정성에 부승희는 배여진의 소식을 늘 기다려졌다.그리고 늦여름의 어느 날, 창가 자리에서 배여진의 편지를 읽고 있었는데 그 편지엔 선기현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었다.배여진이 재혼 준비를 할 때, 선기현은 배여진을 붙잡았었다고 한다. 그 개자식은 과거처럼 또 한 번 배여진을 결혼식에서 도망치게 하려고 했고 마치 배여진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고 했다.배여진은 선기현을 몰래 바셀라로 불렀고 어둡고 추운 날 밤, 사람을 시켜 된통 때리게 했다고 전했다.[개자식, 뻔뻔하게 여기가 어디라고 온 거야? 참 나 급에 맞아야 놀아주지.][젠장. 과거의 난 정말 눈이 어떻게 됐나 봐!]부승희는 그 문장을 읽으며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그리고 그 다음으로 이어진 문장은 부승희와 이승우의 근황을 궁금해하는 내용이었다.부승희는 고개를 돌려 목장을 슬쩍 둘러봤고 이승우는 도망친 어린 소를 잡으려 허겁지겁 달려가고 있었다. 바람에 머리는 마음대로 흩날리고 있었고 급하게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빨리 잡아!”“...”이젠 부승희가 답장을 쓸 차례였다. 일단 선기현에 대한 욕부터 늘여놓고 차차 본인의 사업에 대한 근황을 적었다.이메일을 보낸 지 얼마되지 않아 배여진이 짤막하게 답장을 보내왔
“뭐 하는 거야?”“너 기다리고 있지.”부승희는 등 뒤로 손을 모으고 불어오는 밤바람을 느꼈다.“왜 날 기다리고 있었는데?”“같이 전주로 돌아가려고.”부승희는 다시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아까 말했잖아. 안 갈 거라고.”“가자.”이승우가 한 발 더 다가갔고 두 손을 모은 채로 간절하게 비는 시늉을 했다.“나 너무 집에 돌아가고 싶어.”‘풉.’부승희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고 괜스레 모르는 척 먼저 앞장을 서서 걸었다.부승희는 저녁 연회에 기장이 짧은 까만 드레스를 입었고 뒤로 긴 나비매듭이 있었다. 동준은 이 긴 나비매듭을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다.이승우가 빠른 걸음으로 부승희의 뒤를 따랐다.“우리 지금 돌아가면 내일 아침밥도 같이 먹을 수 있어.”“누가 먹고 싶대?”“우리 동네 경비원 아저씨 손자가 태어났다고 선물도 준대.”“선물 못 받아봤어?”“그래도 좋은 의미가 담긴 선물이잖아.”“좀 저리 떨어져.”“같이 가자.”“싫어. 싫어.”“승희야...”두 사람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홀에서 사라졌다.창밖은 아주 조용하고 운치 좋은 밤경치가 보였다.부승희가 이승우와 함께 전주로 돌아간 지 얼마되지 않아 반우희가 갑자기 나타났다.신혼 생활 한 달 차인 반우희는 얼굴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그런데 정장 차림의 반우희는 왠지 어색해하며 부승희와 이승우에게 말을 걸었다.“저기... 그게 제가 사법 고시 통과했는데 혹시 여기 법률 자문 필요하지 않아요?”“...”부승희는 반우희를 의아하다는 표정을 살피다가 제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왜 옆에 끼고 있지 않는 거야?”부승원은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아직 많이 서툴러 실수도 자주 하는데 내가 옆에서 혼내고 싶지 않아서 그래.”부승희는 표정이 차게 식었다.“그래서 우리한테 사고 치라고 보낸 거야?”“너희 쪽엔 크게 문제도 없고 팀도 있는데 무슨 일 있겠어?”부승희는 길게 심호흡했다.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난감해하는데 부승원은 벌써 통화를 종
부승원은 평소 과시욕이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반우희와의 결혼식에는 디테일 하나하나 신경을 썼고 돈을 쏟아부어 준비했다.경인에 이름 좀 날린 사람이라면 모두 결혼식에 초대를 받았고 양석진도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주례는 부승원의 할아버지와 연정훈의 아버지 두 사람이 맡았다.부승원은 반우희에게 가장 최고로 준비해 줬고 반 우희는 물론 다른 사람들도 그게 느껴졌다. 부승원은 오직 반우희에게만 사랑을 쏟아부었고 이 세상 무엇보다도 반우희가 소중하다는 것을 온 세상에 알리고 있었다.그러니 반우희는 부승원의 옆에서 행복할 일만 남았다.부승희는 양시연의 옆자리에 앉아 처음 반우희를 만났던 시절을 떠올렸다.“그때, 오빠랑 우희 씨는 어떤 사이였을까요?”양시연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잘 몰라도 아예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제 느낌상으로는.”양시연이 말을 한 마디 더 보탰고 부승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제 직감도 그래요.”요즘 들어 얼굴이 더 펴진 양시연을 보며 부승희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정훈 오빠랑은 잘 지내는 거죠?”양시연은 어젯밤에도 꼭 붙어 지냈던 기억이 떠올라 순식간에 얼굴이 뜨거워졌다.“뭐예요?”“왜 아직도 부끄러워하는 거예요?”양시연은 부승희의 장난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서둘러 질문을 돌렸다.“그럼 승희 씨는 승우 씨랑 진도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요?”“그냥 그래요.”“뭐가 그냥인데요?”“돼지 키우고, 소도 키우고, 양도 키우고 있죠 뭐.”양시연이 말을 한 마디 더 보탰다.“승우 씨도 키우고?”부승희는 팔짱을 척 끼며 굳이 대답하지는 않았다.이에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어느새 모두 자리에 착석하고 예식이 시작되었다.예식이 끝나고 부승원과 반우희가 자리로 인사를 드리러 왔다.부승희와 이승우가 앉은 테이블은 거리가 꽤 있었다.부승희는 그쪽을 힐끔거리다가 이승우가 술잔을 받아 들고 가짜로 마시는 척만 하고 바닥에 슬쩍 흘리는 걸 목격했다.부승희는 절대 놓치지 않
예비부부 주변으로 종이 폭죽이 터지고 예쁜 컨페티와 꽃송이가 사방에 떨어졌다.양시연은 한편으로 물러서서 두 사람의 행복한 순간을 함께 했다.미션은 어영부영 끝이 났고 부승희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옆으로 물러섰다.반우희는 예쁘게 꾸민 장미꽃 사이에 앉았고 웨딩 베일에 가려진 얼굴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웠다.부승원은 침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직접 구두를 신겨줬다.그리고 두 사람이 눈을 마주했다.부승원은 조금 가슴이 먹먹했으나 반우희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이에 주변 사람들도 웃음이 터졌다.부승원은 잠시 행동을 멈추더니 농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이 상황에서 눈물 두 방울은 흘려줘야 하는 거 아니야?”반우희는 두 눈을 비비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글쎄요. 눈물이 나지 않는걸요?”‘이렇게 좋은 날에 왜 울지?’사람들은 평소 반우희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고 이게 정말 반우희다운 모습이라 생각했다.드디어 구두까지 착용하고 이제 차를 타고 예식장을 옮겨 가야 했다.누나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기원하며 승주가 반우희를 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승주는 1년 사이에 또 키가 껑충 껐고 아직도 어린 소년티가 났지만 반우희를 업는 건 무리가 아니었다.그런데 눈가가 조금 빨개진 승주를 보며 반우희가 이렇게 중얼거렸다.“너 정말 누나 안 떨어뜨릴 자신 있어?”“나 50킬로는 끄떡없어. 누나 50킬로 넘어?”“아니!”“그런데 왠지 요즘 살이 더 붙은 것 같은데?”“말이 되는 소리를 해!”남매가 작게 투덕거렸으나 말은 그렇게 해도 승주는 아주 든든하게 반우희를 안아 들었고 반우희 역시 행여나 승주가 다칠까 전전긍긍했다.그렇게 또 폭죽과 꽃잎이 흩날리는 축복을 받으며 승주는 반우희를 업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이번 결혼식을 위해 부승원은 전체 동네를 예쁘게 꾸몄고 주민들을 한 명 한 명 찾아가 그동안 반우희와 동생들을 챙겨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결혼식 당일 소란에 미리 양해를 구했다.주변에는 예쁜 꽃잎과 컨
놀랍게도 연정훈의 예상은 아주 정확했다.부승원이 신랑 들러리와 함께 집을 올라가는데 반우희가 침대 앉아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신랑 들러리들은 모두 반우희에게 집중을 기울였고 혹시나 해서 한 사람이 전담으로 반우희를 잡아두기도 했다.신부 들러리들은 모두 방문을 지키려 문 앞으로 모였고 양시연도 그 틈에 꼈으며 양승윤은 반우희에게 잠시 맡겨뒀다.준비한 대로 문밖 거실에서 부승희가 신랑 들러리들에게 어려운 퀴즈를 내고 있었다.반우희가 입을 벙긋거리자 눈만 깜빡이던 양승윤이 바로 입을 덥석 막았다.부승원은 어렵게 질문의 대답을 찾았고 드디어 방으로 움직이려는데 두 번째 미션도 이어졌다.양시연은 양승윤을 데리고 한쪽에 자리를 잡았고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예요?”“나야.”연정훈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양시연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양승윤도 제 아빠의 목소리를 알아채고 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부승희는 문에 몸을 기댄 채로 다른 신부 들러리들과 시선을 주고받았다.“정훈 오빠는 무슨 일로 왔어요?”“난 신랑 들러리가 아니라 승윤이 데리러 왔어.”반우희는 예쁜 드레스를 입은 채로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그래요. 승윤이가 많이 따분해하는 것 같은데 얼른 승윤이 데리고 가세요.”부승희는 반우희를 힐끗 노려보며 말했다.“정훈 오빠, 우릴 바보로 보는 거예요? 미션도 없이 신부 만나시려는 거죠?”“난 정말 승윤이 찾으러 온 거야.”“정훈 씨 괜찮아요!”양시연이 적당한 타이밍에 끼어들었다.“내가 승윤이 잘 보살피고 있어요!”양승윤은 작게 종알거렸다.“읍!”양시연은 양승윤에게 뽀뽀하며 아이의 입을 막았다.“미션 완성 못 하시면 신부 못 만나요! 이런 꾀를 쓰지 말고 얌전히 미션 완성하세요!”그러자 신랑 들러리들의 작은 탄식이 이어졌다.부승희는 양시연을 향해 엄지척했다.부승희는 이어서 또 어려운 문제를 투척했고 오답을 말한 자는 작은 벌칙도 있었다.그때, 연정훈이 또 문을 똑똑 두드렸다.“시연아.”“정훈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