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테이블 위에 누워있었는데 마침 주인을 기다리는 정교한 선물 같았다.연정훈이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안고는 달콤한 입술을 맛보면서 다른 한 손으로 여자가 입고 있던 가운의 끈을 풀었다.뜨거운 손바닥이 그녀의 가는 허리에 달라붙어 이리저리 누비고 있었다.사실 아까 병풍을 사이 두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부터 그는 그녀의 가는 허리를 탐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때 안시연은 전민준에게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연정훈은 목덜미를 물어뜯자, 안시연은 온몸에 전율이 퍼지는 것 같았다.점점 거칠어지는 남자의 숨소리와 손길, 그리고 자연스럽게 버클을 푸는 남자를 보며 안시연은 얼굴이 빨개져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어두운 불빛 아래 뭔가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젖은 눈을 크게 뜨고는 빛이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것의 형체를 똑똑히 보려고 했다.연정훈 손에 낀 반지였다.그것도 약지에 끼어 있었다.순간 뜨겁게 달아오르던 안시연의 몸이 차갑게 식어버렸다.대충 세어보니 연정훈도 거의 서른 되는 나이였다.명문 가문의 후계자라면 이 나이에 진작 결혼했을 텐데 말이다.“집중해.”남자는 여자의 귓불을 깨물며 뜨거운 숨결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다리를 꽉 잡아 벌리려고 하자 안시연이 갑자기 몸을 뒤로 빼며 남자를 밀어냈다.“안 돼요!”연정훈의 새까만 눈동자는 욕망으로 타올랐다.그는 안시연이 그에게 도움을 부탁할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이 조건을 내세울 좋은 타이밍은 아니었다.그는 여자의 발목을 잡았다. 물론 상처 난 부위를 피해 잡았다.그리고 그녀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고는 힘으로 제압했다.안시연이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그의 입술을 피했다.연정훈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숨을 헐떡이고는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왜 그래?”“결혼하셨잖아요!”안시연이 당황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주지혁이 바람피워서 마음고생한 그녀는 누구보다도 ‘내연녀’라는 존재를 싫어했다. 그래서 절대 다른 사람의 결혼에 끼어들 생
호텔 로비에서.연정훈이 내려왔을 때는 이미 샤워를 마쳤고 다른 양복으로 갈아입은 후였다.김세연이 잡지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임유정이 앉아있었는데 그녀는 잡지 속의 주얼리를 가리키며 김세연과 얘기를 나눴다.연정훈이 걸어오자, 임유정은 바로 그를 발견했다.“정훈 씨.”그 말에 김세연도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아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바로 샤워한 사실을 알아차렸다.하지만 아들이 체면도 지켜줘야 했으니, 김세연은 굳이 까발리지 않았다.“왜 이제야 내려와? 나랑 유정이가 너 거의 한 시간째 기다리고 있어.”연정훈이 덤덤한 얼굴로 소파 위에 앉고는 말했다.“데스크에서 약혼녀가 왔다고 하던데요. 약혼녀와의 첫 만남이니까 제대로 꾸미고 내려와야죠.”김세연이 의아한 얼굴을 보이고는 임유정에게 고개를 돌려다.임유정의 얼굴에 홍조가 띠더니 그녀는 미간을 구기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약혼녀? 데스크가 그래? 난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김세연은 그녀의 연기를 간파하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연정훈을 보며 말했다.“데스크에서도 너랑 유정이가 선남선녀로 보여서 그렇게 생각했나 보다. 이런데도 기회 안 잡고 뭐 해?”임유정의 얼굴이 더 빨개지더니 그녀는 김세연의 팔을 끌어안고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어머님.”김세연이 그녀의 팔을 툭툭 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연정훈을 흘겨봤다.연정훈은 기분이 좋았는데도 임유정이 연기하는 꼴을 참을 수 없었다.그는 김세연을 보며 물었다.“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너 집에 안 들어온 지 몇 달이나 됐잖아. 전화해도 계속 건성건성 대답하고. 유정이랑 밥 먹다가 네가 이곳에 묵고 있다는 걸 알았어. 아니면 엄마가 아들 얼굴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즘 바빠서요.”“핑계는.”김세연은 아들 얼굴 본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사적으로 할 얘기가 있어 임유정을 보며 말했다.“오늘 너도 피곤할 텐데 일찍 들어가서 쉬어. 대신 네 엄마에게 안부도 물어
안시연은 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주지혁에게 준 집 열쇠를 아직 돌려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탁’ 소리와 함께 불이 켜졌다.멀지 않은 곳에 양복과 구두로 번듯하게 차려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다름 아닌 주지혁이었다.남자는 천생 배우라더니 주지혁도 다를 것 없었다.잘생긴 그는 평소 안시연에게 무척 따뜻하게 대해줬다. 하지만 지금 음침한 얼굴빛을 드러내 안시연은 등골이 서늘해졌다.안시연이 그를 쫓아내기도 전에 그가 먼저 물었다.“전민준 만나러 갔어요?”그는 분명 단톡방 내용을 봤을 것이다.안시연이 숨을 길게 내쉬고는 그와 더 얘기하지 않으려 했다.“누굴 만나든 당신과 상관없으니 이제 우리 집에서 나가죠? 열쇠는 여기 두고요.”불같이 화를 내는 안시연을 보더니 주지혁은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자기에게도 이렇게 모질게 구는데 전민준 같은 인간에게 자존심을 굽혔을 리가 있을까?“시연 씨 일이니까 당연히 신경 써야죠.”안시연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바로 휴대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다.주지혁이 한발 앞서 그녀의 휴대폰을 빼앗아 한쪽을 버리고는 여세를 몰아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이거 놔요!”안시연이 소리를 질렀다.주지혁은 강세로 그녀를 밀어붙이며 소파에 눕혔다.“출국하는 거, 고민해 봤어요?”안시연이 발버둥 치더니 분노의 목소리로 말했다.“꿈도 꾸지 마요!”주지혁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는데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빨갛게 물든 그녀의 입술을 발견해 이내 안색이 어두워졌다.“다른 사람과 키스했어요?”안시연이 멈칫했다.곧이어 복수했다는 쾌감이 들어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인정했다.“네, 키스했을 뿐만 아니라 잠자리도 가졌죠.”주지혁은 이성의 끈을 놓을 뻔했다.하지만 고집스러운 안시연의 얼굴을 보며 그는 그럴 리가 없다며 자신을 설득했다.‘나의 시연 씨는 절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어.’자신의 추측에 힘을 실으려고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안시연에게 키스를 퍼부었다.안시연은
안시연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고 얼굴에는 잿빛이 감돌았다. 그렇게 하룻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후, 다음 날 다시 출근했다. 더 이상의 선택지가 없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셈이었다. 왜냐하면 외할머니의 수술을 더는 미룰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졸업하자마자 주지혁의 회사에 입사했던 안시연은 주지혁이 정한 ‘사내 연애 금지' 규정을 어기지 않기 위해 주지혁의 제안대로 비밀 연애를 승낙했다. 하지만 안시연은 오로지 자기 능력으로 재무팀 주임 자리를 꿰찼다.다시 회사에 돌아왔더니, 주지혁이 일부러 그녀를 재무팀 주임 자리에서 끌어내렸고 재무팀 보조직으로 발령 냈다.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동료들은 모두 그녀가 주지혁에게 미움을 샀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 때문에 주지혁이 대놓고 괴롭히지는 못하고 몰래 트집을 잡아 끌어내렸을 것이라고 짐작했다.사흘이 지나자, 안시연은 이미 피곤함에 찌들대로 찌들었다.업무에 시달리다가 이제 막 한숨 돌리려던 때, 사무실 입구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힐끔 보고는 이내 외면했다. 다름 아닌 조이현이 회사로 방문한 것이었다.안시연은 기회를 노리다가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이현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저기요, 이리 좀 와보실래요?”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안시연은 밖에 있던 주지혁의 뒷모습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나서 감정을 억누르며 앞으로 나섰다.“네, 조이현 씨.”그러자 조이현이 다짜고짜 물었다.“혹시 그쪽이 안시연 씨인가요?”“네, 그렇습니다.”조이현은 안시연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짐 챙겨서 나오세요. 주 대표님과 저를 따라 외근 좀 다녀오셔야겠어요.”말을 마친 조이현은 안시연이 거절할 틈을 주지 않고 곧장 사무실을 나섰다.이 상황을 지켜보던 같은 사무실 동료들은 각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안시연은 어쩔 수 없이 따라 나갔다.클라이언트와 통화를 마치고 뒤돌아선 주지혁은 안시연이 조이현을 따라 나
안시연은 자기가 너무 예민한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연 대표라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그 남자가 떠올랐다.몇 분 지나지 않아 경기장에 있던 사람들이 하프타임으로 들어왔는데, 맨 앞에 선 남자는 바로 연정훈이었다.테니스복 차림의 연정훈은 이승우의 차림새와 다를 바 없었지만, 정장을 입었을 때보다 훨씬 더 젊어 보였다.가뜩이나 더운 날씨라 얼굴이 붉어졌던 안시연은 연정훈을 보자, 얼굴이 더 화끈거렸다.자꾸 떠오르는 그때의 기억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정훈 오빠!”연정훈이 가까이 다가오자, 조이현은 바로 다가가 인사했고 겸사겸사 주지혁을 소개했다.안시연은 뒤에 서서 주지혁이 순간 벙찌더니 온몸이 굳어진 것을 보고 바로 알아차렸다.얼마 전 주지혁과 성진대학교 동문 모임에 참가했을 때, 연정훈도 자리에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주지혁은 연정훈이 두 사람의 관계를 폭로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것이었다.안시연은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못 본 듯, 테니스 라켓을 한쪽에 맡기고 물병을 따면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연정훈이 경기장에서 돌아오자, 모든 관심이 그에게로 집중됐다.부승원이 물었다.“마지막 공은 어떻게 된 거야?”연정훈이 담담하게 말했다.“실수지 뭐.”이승우가 피식 웃으며 짓궂게 말했다.“실수? 에이, 설마 우리 쪽에서 미녀가 온 걸 보고 잠깐 정신 팔린 거 아니겠지?”연정훈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안시연을 한 번 보았다.안시연은 갑자기 연정훈과 눈을 마주치자,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그사이, 조이현이 안시연을 대신해서 그녀를 소개하고 있었다.“정훈 오빠, 안시연 씨에요. 지혁 씨 회사 직원이에요.”연정훈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물병을 내려놓고, 이승우에게 말했다.“내가 졌어, 기량이 남보다 못한 걸 인정해. 경기에서 진 이유가 장외 풍경이 예뻤던 탓이라고 할 순 없지.”장외 풍경이 예뻤던 탓? 안시연이 예쁘다는 걸 인정하는 건가?연정훈의 최측근이었던 사람들은 모두
번외 경기가 시작되었고, 장외에서 이승우 등이 관전했다. 조이현은 조금 더 가까이에서 관전했고, 남자들은 뒤에서 앉아 있었다.부승원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무심코 입을 열었다.“주 대표님은 소프트웨어 개발 관련 사업을 하시는 건가요?”주지혁은 부승원이 소프트웨어 개발에 관심을 보이는 줄 알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부승원이 몸을 뒤로 기대고 조이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이현이 같은 여자친구를 뒀으니, 앞으로 주 대표님 사업은 승승장구 할수 있겠네요.”이승우도 두 사람의 대화에 흥미를 느낀 듯 눈썹을 들썩이며 끼어들었다.“예를 들면 어떻게 승승장구할 것 같다는 거지?”“당연히 인맥으로겠지...”이승우가 피식 웃었다.‘풉, 인맥은 무슨, 뇌물 공세겠지...’우연히 만난 척하는 것도 모자라, 예쁜 비서까지 데리고 온 건 다른 뜻이 있어서가 틀림없다는 것을 두 사람도 진작에 알아챘다. 기회를 틈타 예쁜 비서를 그들에게 넘기려는 속셈을 말이다.주지혁의 입꼬리가 약간 굳어졌다. 그는 물론 부승원의 비아냥거리는 어조를 알아들었다. 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속으로 이렇게 우스운 상황을 만든 조이현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밖에...경기장에서 몇십 번의 라운드가 계속됐지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탁!”라켓에 공이 부딪히는 소리가 굉장하게 들려왔다. 안시연이 위험한 공을 되받아친 소리였다.장외에서 이승우가 박수갈채를 보냈다.“나이스 샷!”연정훈도 그녀를 바라보고 찬사를 보냈다. 그러다 시선이 안시연의 가슴에 꽂히자, 덤덤한 척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백핸드로 정면 타를 날렸다.구력이 너무 센 데다가 구속도 너무 빨랐기 때문에 어느 각도에서도 받아치기 어려웠다. 한우빈과 그의 파트너, 두 사람 모두 수비에 실패했다.첫 라운드는 안시연과 연정훈의 승리로 끝났다.안시연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점심 식사를 간단하게 했던 안시연은 격렬하게 운동하고 나니 당이 떨어진 듯 무기력해졌다.다음 라운드가 다시 시작될 줄 알고 숨을
말이 나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안시연 쪽으로 쏠렸다. 다만 연정훈은 관심 없다는 듯이 생수병 마개를 비틀고 물 한 모금 마셨다.안시연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녀가 연정훈을 오해했던 것이었다.“안시연 씨?”한우빈의 파트너가 다시 한번 부르자, 안시연은 무의식중에 입을 열었다.“... 아니요.”안시연과 주지혁은 진작에 헤어졌으니, 주지혁은 그녀의 남자친구가 아니었다.안시연의 대답을 듣고 나서 주지혁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정훈의 앞에서 안시연이 자기와의 관계를 부인하고 자기에게 등을 돌리는 것은 주지혁이 원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안시연의 거침없는 말투에 주지혁의 눈빛은 다시 어두워졌다.“남자친구도 없는데 왜 우리 연 대표님을 보는 척도 안 해요?”이승우가 짓궂게 말했다.“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는 거예요?”안시연은 뜸을 들이다가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주지혁의 눈빛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예전엔 주지혁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고 있었다면, 지금의 안시연은 주지혁이라는 사람을 철저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고상하고 도도한 그의 얼굴 뒤에 숨겨진 자격지심을 잘 알고 있었다.‘지금 부인하면 오히려 주지혁의 자격지심을 건드릴 수 있어. 할머니 일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으니...’쩔쩔매며 망설이는 안시연의 모습은 마치 묵인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주지혁의 눈빛도 많이 누그러졌다.이승우는 그제야 곁에 있던 연정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어휴, 이번엔 물 건너갔네...”연정훈은 손에 든 생수를 탁자 위에 올려놓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의 작은 행동에도 안시연은 가슴이 뜨끔했다.이때, 연정훈이 씁쓸하게 말했다.“상대가 일편단심이라면 어쩔 수 없지 뭐.”연정훈은 말을 마치고 나서는 두 번 다시 안시연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이승우와 부승원이 경기하러 경기장으로 나가자, 자리에는 몇 사람만 남게 되었다. 안시연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땀이 많이 나서 잠시 샤워만 하고 오겠다며 조이현에게 양해를
주지혁이 돈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자, 안시연은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기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한발 한발 헤쳐 나갈 수밖에 없었다.안시연은 샤워하고 나온 후부터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웠다. 샤워장에서 나온 후 생수 한 병을 사서 복도에 앉아 있었다.“안시연 씨?”어디선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승우와 부승원이었다.“이승우 씨, 변호사님!”안시연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창백한 것을 보고 이승우가 먼저 물었다.“어디 아프세요? 테니스 경기 때 무리했던 거 아니에요?”안시연은 지금 컨디션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랐다.“더위 먹은 것일지도 모르겠네요.”“더위? 더위 먹은 거라고 해도 방심하지 마세요.”이승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건네주었다.“이거 가지고 3층 A1 라운지로 올라가시면 제가 의사를 불러올게요.”“아닙니다.”안시연이 괜찮다고 했음에도 이승우는 카드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우리 사이에 뭘 사양해요. 한번 친구는 평생 친구죠.”“...”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부승원도 입을 열었다.“A1 라운지는 개인 라운지가 아니고 프라이빗한 공간도 아닙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니, 거기서 푹 쉬고 나오세요. 카드는 프런트에 반납하면 돼요.”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얼굴을 보니 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게다가 지칠 대로 지쳤던 안시연은 개인 라운지가 아니라면 마음 놓고 쉬다가 내려와도 된다는 생각에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고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이승우는 손사래 치며 말했다.“어서 가서 쉬세요.”안시연은 한숨을 내쉬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다.그런데 안시연이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자마자 이승우가 부승원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우리 부승원 변호사님, 멀쩡한 얼굴로 진지하게 헛소리하면 되나요?”부승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어깨에 놓인 이승우의 손을 아래로 내려놨지만, 이승우는 또다시 올려놓으
양시연은 무슨 일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어 순간 얼어붙었다.연정훈은 너무 세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만약 그녀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잊었다면 아예 품속에 파묻어 버릴 듯한 기세였다.정신을 차린 양시연은 무의식적으로 까치발을 들고 손을 뻗어 그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무슨 일이에요?”‘설마 밖에서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온 건가?'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단단히 품에 안고 있었다.그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자 양시연은 바로 물어보지 않고 조용히 손을 그의 등에 올려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잠시 후 연정훈은 그녀를 조금 놓아주었고 양시연은 그의 턱에 입술을 가볍게 닿게 한 뒤 조용히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어요?”연정훈은 얼굴을 돌려 깊은 눈빛으로 양시연을 바라보았다.너무 가까워서 연정훈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고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건물 안은 에어컨이 세게 틀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급히 달려왔다 해도 이렇게까지 땀을 흘릴 리 없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너무 조급했던 것일 것이다.양시연은 다시 한번 가볍게 입술을 맞추고 아무 말 없이 연정훈의 손을 잡아 책상 쪽으로 데려갔다.그리고 티슈를 꺼내 그의 이마를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이렇게까지 급해하는데 도대체 무슨 큰일인가요?”연정훈은 여전히 양시연을 깊게 바라보았고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양시연은 살짝 놀랐다.‘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마치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이런 거야?’양시연이 묻기도 전에 연정훈은 그녀를 자기 가슴과 책상 사이로 끌어당겼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고 이마를 양시연의 이마에 맞대며 다행이라는 듯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안도감과 기쁨이 느껴졌어. 다행히도 하늘은 내 편이었던 거야.’양시연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지 못했지만 연정훈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감쌌다.“뭔데 그래요? 나한테 말해 줘요. 이렇게 말 안 하면 나도 초조해진단 말이에요.”연정훈은 천천히 눈을 뜨고 그녀
“사무실로 올라갈게.”연정훈은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양시연은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분위기가 마치 따지러 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살짝 웃으며 다시 서류를 살펴보았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양시연은 당연히 연정훈일 거로 생각하며 그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그러나 돌아보니 문을 연 사람은 몇몇 임원들이었다.회의가 끝난 직후라 개별적으로 이야기할 일이 있을 법도 했지만 양시연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앞장선 사람은 익숙한 인물 권준호였다.예전에 주지혁 남매에게 몰려 궁지에 빠졌던 그녀는 원칙을 저버리고 연정훈을 찾아가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그에게 키스를 했는데 사무실에는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주지혁 부부 외에 그중 한 명이 바로 권준호였다.몇 년이 흐르고 권준호는 해외 파견을 마치고 돌아왔으며 그사이 양시연은 그의 대표 부인이 되어 있었다.권준호는 사람을 잘 다루는 사람이라 그때의 일은 언급하지 않았고 양시연에게는 늘 공손했다. 덕분에 양시연도 그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이야기를 나누던 양시연은 연정훈이 곧 도착할 거로 생각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임원들은 소파에 앉아 있었고 누군가 일어나 문을 열려 하자 양시연이 손짓으로 제지했다.“앉아계세요. 제가 열게요.”그녀는 이미 연정훈을 기다리고 있었고 문을 열자 급하게 걸어오던 연정훈이 숨을 헐떡이며 다가왔다. 양시연이 갑자기 시야에 나타나자 환한 미소로 그를 마주했다.짧은 순간 연정훈의 마음은 복잡한 감정으로 휘둘렸고 인연이 정말 신기하다고 느꼈다. 사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이미 얽혀 있었고 누군가가 방해하려 해도 결국 연정훈은 양시연을 다시 만나 그녀의 손을 잡을 운명이었다.양시연과 함께할 운명이라 믿어지는 그 순간 그의 마음은 벅찬 감동으로 가득 찼고 온몸이 그 감정을 받아들였다.마침 사무실엔 아무도 없었기에 그는 이 감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양시연이 말할 틈도 없이 고개를 숙여 입술
양시연은 회의 중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연정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고 부승원이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잠시 침묵했다.“...”‘하아. 연 교수님 정말 기막힌 타이밍이네.’양시연은 침을 삼키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신경도 덜 쓰일 거로 생각하며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한편 연정훈은 흥분이 가라앉기도 전에 무의식적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뜻밖에도 연결되지 않았다.잠시 화면을 응시하던 연정훈은 다시 두 번 더 전화를 걸었으나 여전히 받지 않았다.양시연에게 당장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 마음이 순식간에 초조함으로 바뀌었다.연달아 네 번이나 전화했으니 아무리 바쁘더라도 한 번쯤 받을 법한데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그렇게 고민하던 순간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고 이번엔 마침내 연결되었다!“시연아!”“대체 무슨 일이에요?”양시연이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나 지금 회의 중이에요. 부승원 씨가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고요.”“할 말이 있어.”“알았어요. 그러니까 얼른 말해봐요.”연정훈은 입을 뗐지만 정작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자 양시연이 답답한 듯 다그쳤다.“빨리 말해요.”“나...”“됐어요. 그렇게 급한 거 아니면 집에 가서 이야기해요. 나 먼저 끊을게요. 안에서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시연.”양시연이 전화를 뚝 끊어버리자 연정훈은 어이가 없었다.“...”그는 눈을 감고 잠시 말없이 숨을 골랐다.밖에서는 연정훈을 기다리고 있어 자리를 비울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양시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 수도 없었고 마음은 공처럼 이리저리 튕겨 다니며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도련님?”임성원의 목소리인 것을 확인한 연정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뭐 하러 들어왔어?”“도련님 혹시 배탈 나신 건 아니죠?”연정훈은 황당했다.“...”“나 괜찮아.”“정말 괜찮으세요? 약이라도 챙겨드릴까요?”연정훈은 입꼬리를 살짝 움직이며 단
연씨 가문과 마씨 가문은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두 가문의 노인들은 오랜 파트너였다. 그러나 연호민이 서울로 자리를 옮기고 마씨 가문의 노인이 지방에 남게 되면서 두 가문은 점차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얼마 후 마봉식은 경기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했고 이 시점에서 두 가문이 만나는 이유를 연정훈은 잘 알고 있었다.연정훈은 원래 많은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지만 차에서 내리기 전 그 이메일들이 그의 머리에 쌓여서 머릿속은 혼란스럽고 마음속은 뒤집혔다. 그는 상황을 빨리 파악하고 싶었지만 연재혁을 화나게 할까 봐 휴대폰을 보지 않기로 했다.거실에 들어서자 마봉식이 차를 끓이고 있었고 그가 그들이 도착한 것을 보고 자리를 안내했다.연정훈이 마봉식에게 아버님이라고 부르며 인사하자 마봉식은 무척 기뻐하며 활짝 웃으며 말했다.“결혼식 날 바빠서 현장에 가지 못했었는데 언제 한번 네 아내를 데리고 와서 꼭 만나게 해줘.”“기회가 되면 꼭 같이 인사드리겠습니다.”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양측은 미묘하게 탐색을 끝내고 그제야 천천히 본론으로 들어갔다.원래라면 마봉식이 물러나고 연재혁이 그의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컸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은 확실하지 않았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몰랐다.“이 시점에서 너의 아버지의 발목을 잡힐 실수를 하면 안된다.”마봉식이 그렇게 말하자 연정훈은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했다.조이현의 고소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마봉식은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그가 말한 것은 연정훈에게 중요한 사람들을 간과하지 말라는 조언이었다.실제로 이런 일들을 다루는 것은 연재혁과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연정훈은 아직 그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는 그저 옆에서 듣고 가끔 자신의 의견을 내놓을 뿐이었다.연정훈의 마음속은 여전히 이메일을 모두 읽어보고 진짜 상황을 파악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중도에 마봉식이 그에게 물었다.“네 장인어른 몸 상태는 어떠냐?”양석진과 양지원의 결혼은 그들 사이에서 비밀이
연재혁이 연정훈에게 시간을 비우라 한 건 마봉식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약속 시간까지 여유가 있던 연정훈은 길가에 차를 세우고 다시 양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양시연은 의아해하며 물었다.“문씨 가문에 간 거 아니었어요? 나한테 전화할 시간이 있어요?”“아직 아버지를 만나기 전이라 그냥 너랑 얘기나 좀 하려고.”연정훈의 목소리에는 다정함과 부드러움이 묻어났고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펜을 살며시 내려놓았다.“오늘 밤엔 술 마실 일 없죠?”“안 마셔도 돼. 그 자리에 계신 분들은 차만 마시거든.”“그 말 들으니 안심되네요.”양시연은 웃으며 말했다.“난 이런 자리 자주 가는 거 별로 걱정 안 해요.”연정훈이 답했다.“나도 자주 가고 싶진 않아. 약속만 없었으면 지금쯤 집에서 널 안고 있었을 텐데.”“정말 한심해요.”양시연은 핀잔을 주며 말했다.“집 생각 그만하고 일에 집중해요.”“집중이 안 돼. 지금 당장 유턴해서 집에 가고 싶어.”양시연은 웃으며 말했다.“그러다 당신 아버지께 혼나면 어쩌려고요?”연정훈은 눈을 감고 양시연의 목소리를 들으며 속까지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고 창문에 톡톡 빗방울이 맺히더니 이내 빗소리가 퍼졌다.양시연은 우산 꼭 챙기라며 몇 번이고 당부했지만 연정훈에게 그 잔소리는 하나도 귀찮지 않았다.그녀가 부승원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며 통화를 끝내야겠다고 했을 때 연정훈은 괜히 기분이 상했다.“부승원이 요즘 연애한다면서 어쩜 그렇게 야근까지 열심히 해?”양시연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런 얘기 제발 하지 마세요. 지금은 의지로 버티면서 일하고 있어요. 그런 말이라도 들으면 진짜 손 털고 나갈지도 몰라요. 그러면 제가 죽어나겠죠.”"정 안 되면 내가 양원의 일을 그만두고 네 회사로 가서 일해줄게."“어떻게 감히 당신한테 일을 시키겠어요.”양시연은 볼이 발그레해지며 사람이 없을 때를 틈타 휴대폰 화면에 입맞춤을 가볍게 흉내 냈다.“알겠어. 밤에 집에 가서 얘기하자. 나 이제 일해야 해.”연
양시연은 몰래 엿보다가 순간 멍해졌고 부승원에게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보였다.반면 반우희는 아이스크림을 절반이나 먹었음에도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며 부승원 옆에 꼬리처럼 붙어 있었다.양시연이 보기엔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면 반우희는 아마 부승원에게 달라붙어 키링처럼 매달렸을 것이다.양시연이 일부러 헛기침하자 반우희는 곧바로 양시연 쪽을 힐끗 보더니 티가 나지 않게 어색하게 부승원에게서 약간 떨어져 고개를 숙이고 아이스크림의 과자 부분을 먹기 시작했다.부승원은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자기 일을 계속했다.잠시 후 그는 양시연의 맞은편에 앉아 최근 계획을 이야기하며 현 상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이 정도 사소한 일로 연씨 가문이 흔들릴 정도라면 그 집안은 진작에 망했을 겁니다.”양시연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성장 환경이 다르면 사고방식도 달랐다. 양시연은 소현주가 죽었다는 사실에 사람이 죽은 이상 그 일을 잘 이용하면 큰 사건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정훈이나 부승원은 별로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그러던 부승원이 갑자기 말했다.“그래도 불안하면 외출할 때 조심해요.”“안전 문제인가요?”부승원은 짧게 대답했다.“네.”“연씨 가문 같은 대가문은 큰일이 벌어지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고가 없으리란 보장은 없어요.”양시연은 곧바로 평화로운 시기를 떠올리며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간 연서명을 떠올렸다. 물론 그 후에 조씨 가문은 사실상 몰락해 미래가 없어졌지만 연정훈의 가족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양시연은 배를 어루만지며 이 말을 마음에 새겼다.오후엔 바빴지만 저녁이 되자 양시연은 연정훈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 처리 결과를 물었다.연정훈은 가볍게 이미 다 처리했다고 말하며 저녁엔 경인의 현직 고위 임원을 만나야 해서 그녀를 데리러 가지 못한다고 했다.“괜찮아요. 저 혼자 집에 갈 수 있어요.”양시연이 말했다.“우리 애아기 오늘 착했어? 발길질 안 했어?”양시연은 부드럽고 차분
소현주는 그렇게 쉽게 죽지 않을 거라고 양시연은 이미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누군가 지방에 한 통의 고소장을 보냈고 고소장에는 두 부부가 권력을 이용해서 한 멀쩡한 사람을 미치게 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적혀 있었다.사실 소현주의 사망 원인을 조사하던 사람들은 이미 영상 자료를 통해 소현주가 죽기 전에 양시연을 만났고 양시연이 험악한 경호원들을 데리고 갔으며 대화 중 몇 차례 소현주를 제압하려 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다른 사람 같았으면 최소한 조사를 위해 경찰서에 불려 갔을 일이었지만 양시연의 신분 덕분에 아무도 이 문제에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그런데 고소장이 접수되자 연재혁은 분노한 나머지 연정훈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조사팀에 응답하라고 했다.아침 일찍 양시연은 연정훈이 밖에서 전화를 받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하고 담담했다.양시연은 문 쪽으로 걸어가다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문제없겠죠? 누가 고소했는지 알아요?”연정훈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그녀를 소파에 앉히며 말했다.“익숙한 사람이긴 한데 네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야.”“누군데요?”“조이현.”양시연은 정말로 뜻밖의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깊은숨을 내쉬며 말했다.“조이현 씨가 아직도 저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네요.”‘정말 정신 나갔구나.’“만약 조이현 씨 혼자 한 짓이라면 오히려 별일 아닐 거야.”연정훈은 담담하게 말했다.“문제는 누군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누구라고 생각해요?”“굳이 의심할 필요 없어. 곧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그는 언제나 상황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예전엔 그의 이런 태도가 오만해 보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든든했다.그날도 두 사람은 평소처럼 각자의 일터로 출근했고 스트레스받을 일도 많았지만 재미있는 일도 적지 않았다.양시연은 회사로 돌아온 뒤 사무실 분위기가 이전보다 훨씬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
“정말 죽었어요.”연정훈의 단호한 대답에 표세연은 겉으로는 무표정했지만 속으로는 이 사실에 은근히 안도하는 듯했다.아마도 공휘 사건이 그녀에게 남긴 충격이 꽤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연정훈은 소현주에 관한 이야기를 더 꺼내고 싶지 않았다. 괜히 양시연의 마음에 불필요한 부담을 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하필 표세연이 먼저 그 이야기를 꺼냈고 양시연도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소현주 씨에게 가족이 있나요?”“잘 모르겠어.”양시연은 그의 대답이 성의 없다고 느꼈는지 이번엔 더 직설적으로 물었다.“소현주 씨가 갑자기 죽었는데 장례는 어떻게 치르죠?”표세연 역시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그래. 누가 소현주의 일을 마무리해 주는 거야?”연정훈은 무심한 어조로 답했다.“전국에서 매년 이름 모를 시신이 얼마나 많은데 꼭 누군가가 수습해 줘야만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연정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양시연에게 말했다.“내가 욕조에 물 받아 놓을 테니까 넌 아래층에 잠시 나가서 산책하고 있어. 내가 데리러 갈 때까지 기다려.”양시연은 미소 지으며 물었다.“몇 걸음이나 된다고 굳이 데리러 와요?”연정훈은 그녀와 논의할 생각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기다려.”“알겠어요.”양시연은 순순히 응했고 연정훈은 위층으로 올라갔다. 연정훈이 자리를 뜨자 표세연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기분이 상했나 보네.”양시연은 고기를 한 입 더 먹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표세연은 그녀가 괜히 마음 쓰지 않도록 차분히 다독였다.“걱정하지 마. 연정훈은 단순히 소현주를 잊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소현주 얘기를 듣는 것 자체가 싫은 거야.”양시연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장난스러운 어조로 물었다.“혹시 마음에 미련이 남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그럴 리가 있나.”표세연은 비웃듯 말했다.“소현주가 저지른 짓들을 생각하면 연정훈은 소현주를 역겹게 생각하는 것도 모자랄걸.”표세연은 혀를
날씨가 점점 더워졌고 양시연이 비행기에서 내릴 때 하늘은 더욱 우중충했다.연정훈은 그녀를 데리러 공항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두 사람은 바로 본가로 향했다.표세연은 무슨 소식을 들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아들이 보고 싶었던 건지 일부러 두 사람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차 안에서 연정훈은 양시연을 끌어안으며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그런 일들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고 했잖아. 정말 말 안 듣는다니까.”양시연은 연정훈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걱정을 털어놨다.“누가 우리를 함정에 빠뜨려서 당신에게 해를 끼칠까 봐 무서워요.”“괜한 걱정이야.”연정훈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그렇게 쉽게 당했으면 벌써 몇백 번은 죽었을 거야. 경인에서는 물론 경인 밖에서도 나한테 시비 걸 사람 몇이나 되겠어.”“말은 그렇지만...”“말이 그런 게 아니라 사실이 그래.”양시연은 그의 단호한 말에 살짝 안심하며 그의 품에 기대 눈을 감았다.집에 도착하자 연재혁은 없었고 표세연은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표세연은 임신한 양시연을 보자 아들보다 더 반가운 표정으로 맞으며 자리에 앉아 음식을 권했다.“음식들 맛 좀 봐봐. 입맛에 안 맞으면 내가 말해서 새로 차리게 할게.”양시연은 식탁 위에 놓인 각 지역의 신선한 음식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충분합니다. 그만하시고 어머님도 앉으세요.”표세연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모자는 양시연에게 음식을 챙기는 데만 집중하며 한동안 대화가 거의 없었다.양시연이 거의 다 먹고 나서야 표세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너의 아버지 건강은 좀 어떠니?”양시연은 연정훈을 힐끔 바라봤고 연정훈은 그녀의 눈빛을 이해한 듯 표세연에게 물었다.“어떻게 아셨어요?”“네 아빠가 알려줬어.”양시연은 잠시 침묵하며 속으로 생각에 잠겼다.양지원의 태도로 보아 이번 양석진의 건강 문제는 비밀리에 처리되고 있을 터였다. 연재혁이 높은 위치에 있긴 하지만 양석진의 측근도 아닌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