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테이블 위에 누워있었는데 마침 주인을 기다리는 정교한 선물 같았다.연정훈이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안고는 달콤한 입술을 맛보면서 다른 한 손으로 여자가 입고 있던 가운의 끈을 풀었다.뜨거운 손바닥이 그녀의 가는 허리에 달라붙어 이리저리 누비고 있었다.사실 아까 병풍을 사이 두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부터 그는 그녀의 가는 허리를 탐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때 안시연은 전민준에게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연정훈은 목덜미를 물어뜯자, 안시연은 온몸에 전율이 퍼지는 것 같았다.점점 거칠어지는 남자의 숨소리와 손길, 그리고 자연스럽게 버클을 푸는 남자를 보며 안시연은 얼굴이 빨개져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어두운 불빛 아래 뭔가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젖은 눈을 크게 뜨고는 빛이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것의 형체를 똑똑히 보려고 했다.연정훈 손에 낀 반지였다.그것도 약지에 끼어 있었다.순간 뜨겁게 달아오르던 안시연의 몸이 차갑게 식어버렸다.대충 세어보니 연정훈도 거의 서른 되는 나이였다.명문 가문의 후계자라면 이 나이에 진작 결혼했을 텐데 말이다.“집중해.”남자는 여자의 귓불을 깨물며 뜨거운 숨결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다리를 꽉 잡아 벌리려고 하자 안시연이 갑자기 몸을 뒤로 빼며 남자를 밀어냈다.“안 돼요!”연정훈의 새까만 눈동자는 욕망으로 타올랐다.그는 안시연이 그에게 도움을 부탁할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이 조건을 내세울 좋은 타이밍은 아니었다.그는 여자의 발목을 잡았다. 물론 상처 난 부위를 피해 잡았다.그리고 그녀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고는 힘으로 제압했다.안시연이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그의 입술을 피했다.연정훈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숨을 헐떡이고는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왜 그래?”“결혼하셨잖아요!”안시연이 당황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주지혁이 바람피워서 마음고생한 그녀는 누구보다도 ‘내연녀’라는 존재를 싫어했다. 그래서 절대 다른 사람의 결혼에 끼어들 생
호텔 로비에서.연정훈이 내려왔을 때는 이미 샤워를 마쳤고 다른 양복으로 갈아입은 후였다.김세연이 잡지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임유정이 앉아있었는데 그녀는 잡지 속의 주얼리를 가리키며 김세연과 얘기를 나눴다.연정훈이 걸어오자, 임유정은 바로 그를 발견했다.“정훈 씨.”그 말에 김세연도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아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바로 샤워한 사실을 알아차렸다.하지만 아들이 체면도 지켜줘야 했으니, 김세연은 굳이 까발리지 않았다.“왜 이제야 내려와? 나랑 유정이가 너 거의 한 시간째 기다리고 있어.”연정훈이 덤덤한 얼굴로 소파 위에 앉고는 말했다.“데스크에서 약혼녀가 왔다고 하던데요. 약혼녀와의 첫 만남이니까 제대로 꾸미고 내려와야죠.”김세연이 의아한 얼굴을 보이고는 임유정에게 고개를 돌려다.임유정의 얼굴에 홍조가 띠더니 그녀는 미간을 구기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약혼녀? 데스크가 그래? 난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김세연은 그녀의 연기를 간파하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연정훈을 보며 말했다.“데스크에서도 너랑 유정이가 선남선녀로 보여서 그렇게 생각했나 보다. 이런데도 기회 안 잡고 뭐 해?”임유정의 얼굴이 더 빨개지더니 그녀는 김세연의 팔을 끌어안고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어머님.”김세연이 그녀의 팔을 툭툭 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연정훈을 흘겨봤다.연정훈은 기분이 좋았는데도 임유정이 연기하는 꼴을 참을 수 없었다.그는 김세연을 보며 물었다.“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너 집에 안 들어온 지 몇 달이나 됐잖아. 전화해도 계속 건성건성 대답하고. 유정이랑 밥 먹다가 네가 이곳에 묵고 있다는 걸 알았어. 아니면 엄마가 아들 얼굴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즘 바빠서요.”“핑계는.”김세연은 아들 얼굴 본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사적으로 할 얘기가 있어 임유정을 보며 말했다.“오늘 너도 피곤할 텐데 일찍 들어가서 쉬어. 대신 네 엄마에게 안부도 물어
안시연은 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주지혁에게 준 집 열쇠를 아직 돌려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탁’ 소리와 함께 불이 켜졌다.멀지 않은 곳에 양복과 구두로 번듯하게 차려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다름 아닌 주지혁이었다.남자는 천생 배우라더니 주지혁도 다를 것 없었다.잘생긴 그는 평소 안시연에게 무척 따뜻하게 대해줬다. 하지만 지금 음침한 얼굴빛을 드러내 안시연은 등골이 서늘해졌다.안시연이 그를 쫓아내기도 전에 그가 먼저 물었다.“전민준 만나러 갔어요?”그는 분명 단톡방 내용을 봤을 것이다.안시연이 숨을 길게 내쉬고는 그와 더 얘기하지 않으려 했다.“누굴 만나든 당신과 상관없으니 이제 우리 집에서 나가죠? 열쇠는 여기 두고요.”불같이 화를 내는 안시연을 보더니 주지혁은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자기에게도 이렇게 모질게 구는데 전민준 같은 인간에게 자존심을 굽혔을 리가 있을까?“시연 씨 일이니까 당연히 신경 써야죠.”안시연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바로 휴대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다.주지혁이 한발 앞서 그녀의 휴대폰을 빼앗아 한쪽을 버리고는 여세를 몰아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이거 놔요!”안시연이 소리를 질렀다.주지혁은 강세로 그녀를 밀어붙이며 소파에 눕혔다.“출국하는 거, 고민해 봤어요?”안시연이 발버둥 치더니 분노의 목소리로 말했다.“꿈도 꾸지 마요!”주지혁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는데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빨갛게 물든 그녀의 입술을 발견해 이내 안색이 어두워졌다.“다른 사람과 키스했어요?”안시연이 멈칫했다.곧이어 복수했다는 쾌감이 들어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인정했다.“네, 키스했을 뿐만 아니라 잠자리도 가졌죠.”주지혁은 이성의 끈을 놓을 뻔했다.하지만 고집스러운 안시연의 얼굴을 보며 그는 그럴 리가 없다며 자신을 설득했다.‘나의 시연 씨는 절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어.’자신의 추측에 힘을 실으려고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안시연에게 키스를 퍼부었다.안시연은
안시연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고 얼굴에는 잿빛이 감돌았다. 그렇게 하룻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후, 다음 날 다시 출근했다. 더 이상의 선택지가 없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셈이었다. 왜냐하면 외할머니의 수술을 더는 미룰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졸업하자마자 주지혁의 회사에 입사했던 안시연은 주지혁이 정한 ‘사내 연애 금지' 규정을 어기지 않기 위해 주지혁의 제안대로 비밀 연애를 승낙했다. 하지만 안시연은 오로지 자기 능력으로 재무팀 주임 자리를 꿰찼다.다시 회사에 돌아왔더니, 주지혁이 일부러 그녀를 재무팀 주임 자리에서 끌어내렸고 재무팀 보조직으로 발령 냈다.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동료들은 모두 그녀가 주지혁에게 미움을 샀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 때문에 주지혁이 대놓고 괴롭히지는 못하고 몰래 트집을 잡아 끌어내렸을 것이라고 짐작했다.사흘이 지나자, 안시연은 이미 피곤함에 찌들대로 찌들었다.업무에 시달리다가 이제 막 한숨 돌리려던 때, 사무실 입구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힐끔 보고는 이내 외면했다. 다름 아닌 조이현이 회사로 방문한 것이었다.안시연은 기회를 노리다가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이현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저기요, 이리 좀 와보실래요?”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안시연은 밖에 있던 주지혁의 뒷모습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나서 감정을 억누르며 앞으로 나섰다.“네, 조이현 씨.”그러자 조이현이 다짜고짜 물었다.“혹시 그쪽이 안시연 씨인가요?”“네, 그렇습니다.”조이현은 안시연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짐 챙겨서 나오세요. 주 대표님과 저를 따라 외근 좀 다녀오셔야겠어요.”말을 마친 조이현은 안시연이 거절할 틈을 주지 않고 곧장 사무실을 나섰다.이 상황을 지켜보던 같은 사무실 동료들은 각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안시연은 어쩔 수 없이 따라 나갔다.클라이언트와 통화를 마치고 뒤돌아선 주지혁은 안시연이 조이현을 따라 나
안시연은 자기가 너무 예민한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연 대표라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그 남자가 떠올랐다.몇 분 지나지 않아 경기장에 있던 사람들이 하프타임으로 들어왔는데, 맨 앞에 선 남자는 바로 연정훈이었다.테니스복 차림의 연정훈은 이승우의 차림새와 다를 바 없었지만, 정장을 입었을 때보다 훨씬 더 젊어 보였다.가뜩이나 더운 날씨라 얼굴이 붉어졌던 안시연은 연정훈을 보자, 얼굴이 더 화끈거렸다.자꾸 떠오르는 그때의 기억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정훈 오빠!”연정훈이 가까이 다가오자, 조이현은 바로 다가가 인사했고 겸사겸사 주지혁을 소개했다.안시연은 뒤에 서서 주지혁이 순간 벙찌더니 온몸이 굳어진 것을 보고 바로 알아차렸다.얼마 전 주지혁과 성진대학교 동문 모임에 참가했을 때, 연정훈도 자리에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주지혁은 연정훈이 두 사람의 관계를 폭로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것이었다.안시연은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못 본 듯, 테니스 라켓을 한쪽에 맡기고 물병을 따면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연정훈이 경기장에서 돌아오자, 모든 관심이 그에게로 집중됐다.부승원이 물었다.“마지막 공은 어떻게 된 거야?”연정훈이 담담하게 말했다.“실수지 뭐.”이승우가 피식 웃으며 짓궂게 말했다.“실수? 에이, 설마 우리 쪽에서 미녀가 온 걸 보고 잠깐 정신 팔린 거 아니겠지?”연정훈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안시연을 한 번 보았다.안시연은 갑자기 연정훈과 눈을 마주치자,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그사이, 조이현이 안시연을 대신해서 그녀를 소개하고 있었다.“정훈 오빠, 안시연 씨에요. 지혁 씨 회사 직원이에요.”연정훈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물병을 내려놓고, 이승우에게 말했다.“내가 졌어, 기량이 남보다 못한 걸 인정해. 경기에서 진 이유가 장외 풍경이 예뻤던 탓이라고 할 순 없지.”장외 풍경이 예뻤던 탓? 안시연이 예쁘다는 걸 인정하는 건가?연정훈의 최측근이었던 사람들은 모두
번외 경기가 시작되었고, 장외에서 이승우 등이 관전했다. 조이현은 조금 더 가까이에서 관전했고, 남자들은 뒤에서 앉아 있었다.부승원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무심코 입을 열었다.“주 대표님은 소프트웨어 개발 관련 사업을 하시는 건가요?”주지혁은 부승원이 소프트웨어 개발에 관심을 보이는 줄 알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부승원이 몸을 뒤로 기대고 조이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이현이 같은 여자친구를 뒀으니, 앞으로 주 대표님 사업은 승승장구 할수 있겠네요.”이승우도 두 사람의 대화에 흥미를 느낀 듯 눈썹을 들썩이며 끼어들었다.“예를 들면 어떻게 승승장구할 것 같다는 거지?”“당연히 인맥으로겠지...”이승우가 피식 웃었다.‘풉, 인맥은 무슨, 뇌물 공세겠지...’우연히 만난 척하는 것도 모자라, 예쁜 비서까지 데리고 온 건 다른 뜻이 있어서가 틀림없다는 것을 두 사람도 진작에 알아챘다. 기회를 틈타 예쁜 비서를 그들에게 넘기려는 속셈을 말이다.주지혁의 입꼬리가 약간 굳어졌다. 그는 물론 부승원의 비아냥거리는 어조를 알아들었다. 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속으로 이렇게 우스운 상황을 만든 조이현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밖에...경기장에서 몇십 번의 라운드가 계속됐지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탁!”라켓에 공이 부딪히는 소리가 굉장하게 들려왔다. 안시연이 위험한 공을 되받아친 소리였다.장외에서 이승우가 박수갈채를 보냈다.“나이스 샷!”연정훈도 그녀를 바라보고 찬사를 보냈다. 그러다 시선이 안시연의 가슴에 꽂히자, 덤덤한 척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백핸드로 정면 타를 날렸다.구력이 너무 센 데다가 구속도 너무 빨랐기 때문에 어느 각도에서도 받아치기 어려웠다. 한우빈과 그의 파트너, 두 사람 모두 수비에 실패했다.첫 라운드는 안시연과 연정훈의 승리로 끝났다.안시연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점심 식사를 간단하게 했던 안시연은 격렬하게 운동하고 나니 당이 떨어진 듯 무기력해졌다.다음 라운드가 다시 시작될 줄 알고 숨을
말이 나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안시연 쪽으로 쏠렸다. 다만 연정훈은 관심 없다는 듯이 생수병 마개를 비틀고 물 한 모금 마셨다.안시연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녀가 연정훈을 오해했던 것이었다.“안시연 씨?”한우빈의 파트너가 다시 한번 부르자, 안시연은 무의식중에 입을 열었다.“... 아니요.”안시연과 주지혁은 진작에 헤어졌으니, 주지혁은 그녀의 남자친구가 아니었다.안시연의 대답을 듣고 나서 주지혁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정훈의 앞에서 안시연이 자기와의 관계를 부인하고 자기에게 등을 돌리는 것은 주지혁이 원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안시연의 거침없는 말투에 주지혁의 눈빛은 다시 어두워졌다.“남자친구도 없는데 왜 우리 연 대표님을 보는 척도 안 해요?”이승우가 짓궂게 말했다.“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는 거예요?”안시연은 뜸을 들이다가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주지혁의 눈빛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예전엔 주지혁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고 있었다면, 지금의 안시연은 주지혁이라는 사람을 철저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고상하고 도도한 그의 얼굴 뒤에 숨겨진 자격지심을 잘 알고 있었다.‘지금 부인하면 오히려 주지혁의 자격지심을 건드릴 수 있어. 할머니 일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으니...’쩔쩔매며 망설이는 안시연의 모습은 마치 묵인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주지혁의 눈빛도 많이 누그러졌다.이승우는 그제야 곁에 있던 연정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어휴, 이번엔 물 건너갔네...”연정훈은 손에 든 생수를 탁자 위에 올려놓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의 작은 행동에도 안시연은 가슴이 뜨끔했다.이때, 연정훈이 씁쓸하게 말했다.“상대가 일편단심이라면 어쩔 수 없지 뭐.”연정훈은 말을 마치고 나서는 두 번 다시 안시연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이승우와 부승원이 경기하러 경기장으로 나가자, 자리에는 몇 사람만 남게 되었다. 안시연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땀이 많이 나서 잠시 샤워만 하고 오겠다며 조이현에게 양해를
주지혁이 돈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자, 안시연은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기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한발 한발 헤쳐 나갈 수밖에 없었다.안시연은 샤워하고 나온 후부터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웠다. 샤워장에서 나온 후 생수 한 병을 사서 복도에 앉아 있었다.“안시연 씨?”어디선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승우와 부승원이었다.“이승우 씨, 변호사님!”안시연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창백한 것을 보고 이승우가 먼저 물었다.“어디 아프세요? 테니스 경기 때 무리했던 거 아니에요?”안시연은 지금 컨디션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랐다.“더위 먹은 것일지도 모르겠네요.”“더위? 더위 먹은 거라고 해도 방심하지 마세요.”이승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건네주었다.“이거 가지고 3층 A1 라운지로 올라가시면 제가 의사를 불러올게요.”“아닙니다.”안시연이 괜찮다고 했음에도 이승우는 카드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우리 사이에 뭘 사양해요. 한번 친구는 평생 친구죠.”“...”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부승원도 입을 열었다.“A1 라운지는 개인 라운지가 아니고 프라이빗한 공간도 아닙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니, 거기서 푹 쉬고 나오세요. 카드는 프런트에 반납하면 돼요.”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얼굴을 보니 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게다가 지칠 대로 지쳤던 안시연은 개인 라운지가 아니라면 마음 놓고 쉬다가 내려와도 된다는 생각에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고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이승우는 손사래 치며 말했다.“어서 가서 쉬세요.”안시연은 한숨을 내쉬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다.그런데 안시연이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자마자 이승우가 부승원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우리 부승원 변호사님, 멀쩡한 얼굴로 진지하게 헛소리하면 되나요?”부승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어깨에 놓인 이승우의 손을 아래로 내려놨지만, 이승우는 또다시 올려놓으
양혁수는 숟가락에 닿는 걸 느끼며 조심스레 입에 넣었다.그러나 국물 맛은 여전했으며 짭짤한 새우젓의 맛만 추가되었을 뿐이었다.말없이 입안의 것을 씹고 있는데 변여름이 물었다.“입에는 맞아요?”“그래...”변여름은 다행이라며 중얼거렸고 자연스럽게 양혁수의 숟가락 위로 반찬을 집어주었다. 양혁수는 본인이 우연히 반찬을 집은 건지 아니면 반찬이 밥에 잘 섞여 있던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지만 애써 무덤덤하게 입에 넣고 국물도 한술 떴다.양혁수는 본인의 의지대로 스스로 밥을 먹었고 변여름도 자신이 먹여주겠다고 떼를 쓰지 않고 몰래 집어주고 있으니 두 사람 분위기도 차츰 풀렸다.하지만 몰래 반찬을 집어주는 것도 사실 먹여주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양혁수가 이를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고 변여름은 어느새 깨끗하게 씻은 딸기를 양혁수 입가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아...”그러나 양혁수는 입을 벌리지 않고 손으로 받으려 했다.“오빠는 손도 안 씻었잖아요.”“...”겨우 딸기 하나라는 생각에 양혁수는 못 이기는 척 입을 벌렸다.그렇게 물꼬를 트고 나니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일이 번졌다.딸기에 이어 변여름은 손수 치킨을 한입 크기로 잘라 양혁수에게 건넸다.그렇게 한입씩 먹여주며 변여름이 말했다.“오빠가 자고 있을 때 연락이 네 통 정도 걸려 왔는데 하나는 지원 이모이고 다른 전화는 회사 사람인 것 같아요.”입을 꾹 다물고 있던 양혁수는 핸드폰을 건네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변여름이 건네온 치킨에 말문이 막혔다.“오빠, 이 집 치킨 맛있으니까 많이 먹어요.”양혁수는 입 안 가득 찬 치킨에 말을 잇지 못했으나 변여름은 양혁수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알아서 핸드폰을 건넸다.그러다 보니 양혁수는 지금 변여름이 자신을 ‘먹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고 아주 자연스레 변여름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변여름이 질문을 이었다.“조원희라는 사람이 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는데 다시 걸까요?”두 번이나 걸었다는 건 필시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을 설명했
“오빠, 다른 사람이 오빠를 돌보는 건 내가 못 믿겠어서 그래요.”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네가 날 돌보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일이야.’변여름은 그런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듯 아무 말없이 손을 잡아 화장실로 이끌었다. 문을 열고 세면대 근처까지 안내한 뒤 침착하게 설명했다.“오빠, 화장실 공간이 좀 작아요. 왼쪽으로 1미터 가면 변기이고 난 바로 밖에 있을 테니까 끝나면 불러요.”말을 마치자마자 변여름은 조용히 문을 닫고 얌전히 문 앞에서 기다렸다.양혁수는 더 이상 변여름과 말다툼할 여력이 없었다. 지금 당장 급한 일을 해결하지 않으면 정말 큰 일이었다.“변여름.”“네. 저 여기 있어요.”“멀리 떨어져.”“아...”잠시 뒤, 문밖에서 변여름이 침대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변여름은 두 손 검지손가락을 귀에 쏙 집어넣고는 친절하게 외쳤다.“오빠, 나 귀도 막았어요!”“...”얼마 후, 양혁수가 화장실에서 나왔다.변여름은 어느새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창문을 등지고 앉은 양혁수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수다를 들었다. 어제 결혼식 이야기를 하는데 그 누구도 두려운 기색은 없었으며 오히려 웃음소리까지 섞여 있었다.이 집안 사람들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친구들까지도 정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이 근처 1km 반경 안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인 인간은 자기 혼자뿐인 것 같았다.양혁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가만 생각해 보니 그동안 양혁수는 안일하고 평온한 일상에 익숙해졌고 이번 일은 꽤나 오랜만에 겪는 황당한 사건이었다.옆에서 변여름은 뜨거운 국밥을 숟가락으로 저으며 온도를 식히고 있었다. 그러다 양혁수의 작은 움직임에도 관심을 보였다.“너희 가문에는 이런 일이 자주 있는 거야?”“아니요.”변여름은 침착하게 답했다.“우리도 오랜만에 겪는 일이에요. 이번 일은 그냥 사업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벌인 짓이래요.”양혁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변씨 가문 사업에 사고가 안 나는
“그럼 뭐라고 말해야 하나요?”“무조건 괜찮다고 말하세요. 만약 문제 생기면 본인의 눈을 대신 주겠다고 말이에요!”양혁수가 눈을 뜨기도 전에, 먼저 들려온 건 노지혜가 의사를 윽박지르는 소리였다.양혁수는 천천히 몸의 감각을 확인했다. 팔다리는 멀쩡했고, 감각도 정상이었다. 다만 눈앞이 온통 어두웠지만 실명한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병실 문이 열렸고 들어온 사람은 변여름이었다. 변여름은 들어오자마자 노지혜와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의사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아무 문제없습니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제 눈을 바치겠습니다!”“...”이제 변여름이 대답할 차례였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대신 종이를 넘기는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렸다.한참 후에야 변여름이 입을 열었다.“됐어요. 이제 가보셔도 돼요. 여긴 제가 있을게요.”“네네! 알겠습니다!”의사는 마치 해방이라는 듯 밝게 대답하고 황급히 병실을 나갔다.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변여름.”그 순간, 변여름이 얼마나 빠르게 다가왔는지 침대 옆으로 바람이 일렁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오빠! 깨어났어요?”“응.”양혁수는 변여름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지금 내 상태는 어때?”“눈꺼풀이 유리 파편에 긁혔지만 안구는 문제없대요.”그 말을 듣자 양혁수는 안심하며 긴 숨을 내쉬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행여나 걱정할까 봐 말을 덧붙였다.“지금 눈이 안 보이는 건 눈을 뜨지 못하게 고정 장치랑 붕대를 감아둬서 그런 거예요. 잠시 휴식하고 붕대를 풀면 정상적으로 돌아올 거예요.”“다른 건?”“미약한 뇌진탕이랑 등에 충격으로 인한 타박상이 있어요.”양혁수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봤고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앞이 보이지 않는 게 꽤 불안했다.“다른 사람들은?”“부상자는 있지만, 사망자는 없어요.”그건 그나마 다행이었다.변여름은 붕대로 가려진 양혁수의 눈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오빠, 미안해요. 내가 판단을 잘못해서... 그 길로
양혁수가 변여름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지만 그 이후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자신을 계속해서 훔쳐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심스럽지만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시선이었다.그때 음악이 울려 퍼지며 결혼식이 시작되었다.양혁수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어디에서 차를 탈 거냐는 비서의 질문에 답장을 보냈다.식장은 축복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신부가 드디어 신랑 앞에 마주했고, 주례는 뻔한 멘트를 읊기 시작했다.양혁수는 시큰둥했다. 아침부터 그 쌍둥이들한테 시달려서인지 아직도 정신이 혼미했다.미간을 지그시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변여름이 양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어설프게 각도를 조절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충 봐도, 자기랑 같이 찍히려고 하는 것 같았다.휴대폰 화면에 뭐가 찍혔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변여름이 잠깐 동작을 멈춘 걸 보니, 마침 양혁수가 쳐다보는 순간이 찍힌 모양이었다.스크린 속에서 서로의 시선이 맞닿는 묘한 순간 변여름이 망설이지 않고 셔터를 눌렀다.찰칵!양혁수는 변여름의 뻔뻔한 태도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피식 나갔다.그렇게 두 사람은 말없이 몇 초간 시선을 마주했다.그런데 그때.콰과광!귀청이 찢어질 듯한 폭발음이 식장을 뒤흔들었다.순간적으로 엄청난 충격이 몰아쳤고, 사방에서 날아온 파편들이 양혁수를 비롯한 주변의 하객들을 노렸다.그리고 비명과 구조 요청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폭탄이야!”정신을 차린 양혁수는 힘겹게 몸을 지탱하며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아직 경호원들이 도착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오빠! 이쪽으로 가요!”변여름이었다.지금은 시시비비를 따질 때가 아니었고 양혁수는 곧장 변여름을 따라 움직였다.하객들은 모두 호텔 밖으로 도망치고 있었지만 변여름은 반대로 움직였다. 양혁수를 데리고 호텔 내부로 들어가, 가장 외진 길을 선택해 빠르게 이동했다.그리고 무선 장비를 이용해 가족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전원이 무사하다는 걸
와이너리.노지혜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위층을 확인하더니 여유롭게 머리카락 한 올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두 사람 떠났어.”변여름은 테이블에 엎드린 채로 노트북을 조작했고 영상을 앞으로 당겨 양혁수와 변백호가 투덕거리는 장면을 되돌아봤다.노지혜도 관심을 보이더니 콕 집어 이렇게 말했다.“백호 오빠가 이겼네.”변여름은 노지혜를 힐끗 쳐다보았고 노지혜는 미소를 지었다.그러자 변여름은 안 보여줄 거라는 듯이 아예 노트북을 옆으로 밀어버렸다.“...”“아, 근데 말이야. 네가 고백했을 때 혁수 씨 반응 어땠어?”변여름은 턱을 괴고 다시 영상의 타임라인을 조정했다. 이번엔 양혁수가 카메라를 쳐다보던 순간을 되돌려보았다.“우리한테 들킨 거 알고 있었네.”“어쩐지 네가 심하게 오글거리더라.”변여름은 아무렇지 않은 듯 굴었지만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그러게 왜 날 그렇게 매몰차게 밀어낸 거야.’‘난 그냥 고백만 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것도 못 하게 하고. 흥’노지혜가 다시 다가와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근데 이제 두 사람 모두 자리 비웠는데 약 정말 줘?”“음... 일단 지혜 씨가 갖고 있어요.”노지혜는 단번에 눈치챘고 변여름의 어깨를 감싸안더니, 귀에 대고 더 위험한 계획을 속삭였다.변여름은 순진한 얼굴로 연신 손을 휘저으며 거부 의사를 표했지만 눈이 반짝거렸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일부러 그랬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질질 끌지 않고 고백 같은 건 아예 못 하게 단칼에 잘라, 최대한 빨리 집에 돌려보냈다.하지만 변여름은 꼭 끝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그래서 할 수 없이 양혁수는 변여름을 애써 모른 척했다. 평소처럼 행동하면서 결혼식이 끝나는 대로 곧장 떠날 계획을 세웠고 앞으로 엮일 일은 절대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그런데, 밤에 혼자 있으면 자꾸 변여름 생각이 났다.‘대체 내 어디가 좋다는 거야?’‘몇 년 동안 얼굴도 자주 못 봤고... 그때는 완전 어린애였는데?’어린아이의 짝사랑이니 그렇지 상
변백호는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양혁수는 이런 변백호를 옆에 꼭 잡아 두고 계속 타자를 했다.[그러니까. 너한테 그런 재주가 있을 리가 없지.]“...”변백호는 길게 한숨을 내뱉고 핸드폰을 빼앗아 들더니 토독토독 타자를 했다.[대단한 실력자이신 네가 그럼 우리 가문 유전자 개량에 힘 좀 써보지 그래?][그러니까 내 매부가 되어줘.]그리고 서늘한 미소를 짓는 이모티콘까지 덧붙였다.양혁수는 코웃음을 치며 휴대폰을 되찾아왔고 아래층에서 여전히 소녀들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난 엄마가 하도 눈치를 줘서 도운 것뿐이에요.”“엄마가 그러는데 오빠가 지혜 씨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으니 나더러 오빠가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어 주라고 했단 말이에요.”양혁수는 옆에 앉아 있는 변백호를 향해 시선을 돌렸고 눈빛엔 장난기가 스쳤다.변백호는 무표정하게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노지혜는 집요하게 변여름을 부추겼다.“바로 그거야! 어쩌면 혁수 씨도 그런 구실이 필요할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내 말 대로 먼저 혁수 씨 마음을 잡고 다시 내 방법대로 해.”“거절할게요.”“왜?”“내가 오빠를 많이 좋아하니까요.”소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며 그냥 사실을 말하는 듯했지만, 그 안엔 단단한 확신이 배어 있었다.“난 오빠가 정말 좋아요.”변여름이 한 번 더 강조하자 노지혜는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재미없어.”“좋아하면 그냥 덮쳐야지.”“싫어요. 혁수 오빠가 싫어할 거예요.”“너 진짜 재미없다.”노지혜의 한숨 섞인 투정과 함께 순간 침묵이 흘렀다.조금 전까지 변백호를 놀리던 양혁수는, 예상치 못한 변여름의 고백에 바짝 굳어버려 변백호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변백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미소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표정을 지으며 양혁수를 바라보았다. 아까 자신이 당한 걸 그대로 돌려주는 듯한 얼굴이었다.그리고 휴대폰을 꺼내는 것도 귀찮았는지 변백호는 다시 양혁수의 폰을 빼앗았으며 잠금 해제를 하고 재
변여름은 정말 집에 없었고 양혁수는 도착한 지 하루가 다 지나도록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변씨 가문에는 가족 인수가 많아 평소에는 모이기 힘들었지만 이번에는 온 가족이 모두 모였다.양혁수는 예전에 해외에 있을 때 변씨 가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성격이 잘 맞아 변백호의 어머니는 그를 아들처럼 여겼고 양혁수는 자신을 낯선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고 변씨 가문에 오면 자유롭게 행동했다.이번에는 달랐다. 변여름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양혁수는 함부로 돌아다니지 않았다. 그는 가장 한적한 방을 요구했고 결혼식 전까지는 운동하고 식사하는 것 외에는 혼자 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변씨 가문 사람들을 최대한 피했다.결혼식 전날 저녁 양혁수는 야외 수영을 마친 뒤 식당을 지나가다가 가까운 가정부에게 식사를 방으로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나오는 길에 마침 변여름과 마주쳤다.그는 흰색 긴 잠옷을 입고 간단한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머리는 축축하게 젖어 물이 뚝뚝 떨어졌다.변여름은 긴팔 옷과 긴 바지를 입고 책가방을 메고 있었으며 품에 책을 안고 있었다.두 사람이 마주치자 잠시 멈칫했다.양혁수는 변백호의 말을 듣지 말고 호텔에 머물러야 했다고 후회했다.그는 입술을 꽉 깨물며 어른다운 품위를 지키려 애쓰며 먼저 말을 걸려고 했다.그런데 변여름은 아무 말 없이 그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인사를 한 후 빠르게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양혁수는 그 자리에 서서 앞으로 떨어지는 두 장의 나뭇잎을 바라보았다. 어이없다는 생각이 최고조에 달했다.‘칙.’불쾌한 표정을 짓고 그는 병뚜껑을 열어 물을 반 컵 마시며 얼굴을 찌푸린 채 위층으로 올라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변백호가 그를 술자리에 초대했다.양혁수는 짜증이 났지만 두 잔 정도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변씨 가문의 와인 저장고는 엄청나게 컸다. 안팎으로 세 겹으로 되어 있었고 마치 도서관 같았다.두 사람은 직접 내려가 와인을 고른 뒤 양혁수는 가장 비싼 와인만 골랐다.와인을 들고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
양혁수는 결국 변씨 가문에 가기로 결심했다. 양지원의 역지사지 전략 때문도 아니었고 변여름 때문도 아니었으며 변백호 때문이었다.그는 친구가 많지 않았고 그중에서도 변백호는 높은 위치에 있었다.10년 넘게 쌓아온 우정이 변여름의 장난 때문에 틀어질 이유는 없었다.그는 변씨 가문에 머물지 않으면 아마 변여름을 만날 일도 없을 것이고 단지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뿐이었다. 11월이 되자 날씨가 적당해졌다.그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변백호가 직접 그를 마중 나왔다.변백호를 만나자마자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양혁수는 짐 가방을 변백호에게 던지고 마치 대장처럼 앞장서서 걸어갔다.변백호는 이미 익숙했다. 예전에도 그의 건방진 태도를 참아냈고 이번에는 여동생이 사고를 쳐서 약간 찔리는 부분이 있었지만 짐을 들어주는 정도는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공항을 나서자 양혁수는 뒷좌석으로 향했다.그때 두 명의 인형 같은 아이들이 나타났다.“안녕하세요.”달콤한 목소리로 동시에 인사를 건넸다.양혁수는 전혀 배려하지 않고 쾅 소리와 함께 차 문을 닫고 조수석으로 향하며 차에 탄 변백호에게 불쾌한 시선을 보냈다.변백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꼭 따라와야 한다고 해서 달래도 소용없었어.”양혁수는 말이 없었다.노지혜가 낳은 이 두 아이는 마치 악마의 화신 같았다.지금은 여섯 살이지만 몇 년 전에 아주 어렸을 때 알록달록한 큰 거미를 들고 변백호의 베개 밑에 숨겨 놓았다. 한밤중에 변백호 거의 기절할 뻔했다.양혁수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내내 졸면서도 신경은 예민했다.이상하게도 이 두 아이는 내내 조용했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변백호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두 아이는 각자 카메라를 들고 양혁수를 계속 찍고 있었다.“너희 뭐 하는 거야?”작은 여자아이 하니가 먼저 대답했다. 목소리는 달콤하고 순수하며 설탕을 입힌 사과 같았다.“마크가 영상을 찍으면 고모랑 뭐든 바꿔줄 수 있다고 했어요.”작은 남자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양혁수가 움직이지 않는 틈을 타 그의
“도대체 무슨 일이야? 회사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양지원은 모르는 척했다.양혁수가 양지원을 바라보자 그녀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양혁수는 콧방귀를 뀌었다.“...쳇.”양지원은 어이없었다.“...”‘이 녀석.’그녀는 혀를 차더니 휴지를 던져 그의 어깨를 툭 쳤다.‘누구한테 감히 쳇이야?’양혁수는 차갑게 말했다.“변백호, 그 입이 가벼운 놈이 또 다 말했죠?”양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꽤 영리하네.’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더 이상 숨기지 않고 구경이라도 하듯 미소를 지었다.“왜? 변여름한테 당해서 마음 아파 집에 틀어박힌 거야?”양혁수는 인정하지 않았다.“대표는 연차 써서 그냥 쉬고 싶을 때 쉬는 거예요.”‘아무 이유도 없어.’양지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변여름과는 무관해?”“꼬맹이 하나 때문에 내가 진지할 이유 없어요.”“그래.”양지원은 가방에서 초대장을 꺼내 그의 얼굴 옆에 툭 내려놓았다.양혁수는 흘끗 보았다.“뭐예요?”“변씨 가문의 둘째 아들 결혼식이야. 한 번 가봐.”양혁수의 머릿속을 변여름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별다른 고민 없이 거절했다.“안 갈 거예요.”“왜?”“귀찮아요.”“우리 두 집안이 가까운 사이인데 네가 안 가면 보기 좋지 않아.”양지원은 느긋하게 말하다가 문득 말투를 바꿨다.“아니면 변여름을 마주칠까 봐 가기 싫은 거야?”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입을 열려고 했지만 양지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아니지. 꼬맹이가 장난을 친 것뿐이야. 너는 어른이잖아. 그렇게 옹졸하게 굴지 마. 한번 가서 축하도 해주고 그 아이가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안심시켜.”“말이 쉽죠.”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반박했다.양지원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쳐다보았다.양혁수는 잠시 멈칫하며 이마에 주름이 더 깊어졌다.양지원은 그가 이렇게 답답해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고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내가 틀린 말 했어? 별일 아니잖아. 아니면...”그녀는 갑자기 비웃는 듯한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