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여름은 전신 검은색 의상에 캡모자를 눌러쓰고 완전히 무장한 채 밖으로 나섰다.결국 그 팔찌와 목걸이는 착용하지 않았다. 양혁수가 보면 더 화를 낼까 봐 두려웠다.건물 아래에 도착한 그녀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섰다.휴대폰에는 그가 보낸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사무실 층수를 알려주고 그녀가 어디까지 왔는지 물었다.이런 평화로운 대화는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나았고 그녀는 타이핑하는 것조차 버거웠다.엘리베이터가 높이 올라갈수록 그녀는 마스크를 더욱 깊숙이 올렸다.36층에 도착하자 엘리베이터가 멈췄고 문이 열리자 어둠이 주변을 뒤덮고 있었다.그녀는 밝은 엘리베이터에서 재빨리 나와 밖에서 들어오는 밤의 빛을 따라 그의 사무실 쪽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양혁수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사무실 위치를 알려주었다.“찾았어요.”변여름이 말했다.양혁수는 잠시 멈칫했다.“응. 들어와.”변여름은 심호흡을 하고 휴대폰을 내려놓고 문으로 걸어갔다.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자 그의 사무실 커튼이 쳐져 있었고 실내는 밖보다 더 어두워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문을 닫자 이전에 주차장에서와 다를 바 없었다.변여름의 심장은 북처럼 쿵쾅거렸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오빠?”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그녀는 약간 당황했고 양혁수가 곧 불을 켜서 이 절대적인 사냥의 승리를 끝낼까 봐 두려웠다.“계속 앞으로 걸어가서 소파를 만지면 왼쪽으로 돌아. 10미터쯤 가면 테이블이 있어.”옆에서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변여름은 깜짝 놀랐다.어둠 속에서 팅 하는 소리와 함께 비싼 금속 라이터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변여름의 신경은 순간 긴장되었고 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소리를 듣고 그가 소파 맞은편 책상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목적지로 가기 위해 그의 앞을 지나쳐야 했다.그녀는 그가 갑자기 라이터를 켤까 봐 두려웠다.하지만 양혁수는 라이터를 켜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양혁수는 느긋하게 마치 인내심 있는 사냥꾼처럼 그녀의 발소
주변이 아무리 어두워도 모자가 벗겨지자 변여름은 얼굴을 가리려고 손을 올렸다.“오빠.”양혁수는 손을 거두지 않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불도 안 켰는데 뭐가 그렇게 두려워?”변여름은 결국 손을 내리고 모자가 벗겨지자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뒤에서 받쳐 주었다.“마스크 썼어?”“네...”그녀가 겨우 대답하기도 전에 그의 손가락이 끈 사이로 들어가 귀에서 가볍게 떼어내자 마스크도 벗겨졌다.양혁수는 그녀의 보호막을 하나하나 없애며 얼굴을 어둠 속에 드러냈다. 두 볼이 차가워지고 변여름이 얼굴을 돌리면 그의 시선과 마주칠 수 있었다. 그가 분명히 잘 보이지 않지만 변여름은 마치 자신이 벗겨진 것 같은 시선을 느끼며 온몸이 불편해졌다.양혁수는 일부러 그렇게 했고 변여름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그녀가 스스로 함정에 빠진 이상 양혁수가 어떻게 사냥감을 다루든 그의 권한이었다.“물 마실래?”그가 물었다.변여름은 정말 목이 말랐다. 어차피 심리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그녀는 모든 방어를 해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조금 목말라요.”“기다려.”양혁수는 냉장고 쪽으로 갔고 변여름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오빠, 포도 주스 주세요.”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포도 주스라니. 하하 여우처럼 교활하네.’그는 불만스럽게 생각하며 입으로 대답했다.“여기 없어.”“그럼 망고 주스 주세요.”“그것도 없어.”변여름은 잠시 멈칫했다.“...그럼 뭐 있어요?”“생수.”양혁수의 말투는 무심했다.‘네.’그녀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실내는 조용해졌고 냉장고가 열릴 때의 빛마저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피하지 않았다.양혁수는 한 번 쳐다보려 했지만 중간에 멈췄다.그는 어차피 곧 자세히 볼 수 있을 테니 급해할 것 없다고 생각했다.변여름은 그가 물을 따르는 소리를 들으며 양혁수가 진정제를 넣었을 거로 생각했다.사실 이런 것도 필요 없었다.양혁수가 불을 켜도 그녀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그는 물을 들고 돌아와 컵을 그녀 앞에 놓
변여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허예나의 신분과는 상관없이 그녀가 양혁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그녀에게 특별한 존재였고 늘 다정했다.“오빠, 나한테 잘해줘서 고마워요.”그녀가 불쑥 감사를 전하자 마치 마지막 인사를 남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양혁수의 감정이 요동쳤다. 마치 그녀가 그가 오늘 밤 무엇을 하려는지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어둠과 마주한 채 더욱 불쾌해졌다.변여름은 이런 날이 올 것을 이미 알고 여러 번 마음을 다잡았지만 막상 현실이 닥치자 스스로 이렇게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녀의 손에는 땀이 맺혔고 온몸이 서늘해졌다. 변여름은 그를 속여 이토록 가까이 다가가게 만든 것을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곧 자신을 싫어하는 눈빛으로 바라볼까 두려웠다.그 생각이 스치자 코끝이 찡해졌고 언제부터인지 뜨거운 액체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믿기지 않아 손을 올려 얼굴을 닦았고 그것이 눈물임을 깨달았다.이 감정은 복잡했다. 누군가로 인해 가슴이 저미고 눈물을 흘리게 된다니 마치 감정이 없던 기계가 자신의 마음을 처음으로 자각한 듯한 기분이었다.그제야 변여름은 당황하기 시작했다.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올라와 본능적으로 의자를 짚고 일어서려 했다.그 순간 그녀의 코끝이 먹먹해지는 소리를 들은 양혁수가 무언가를 깨닫고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어디 가?”변여름은 숨이 턱 막혔다. 눈을 감고 빠르게 감정을 다잡았다.“아니에요. 그냥... 오래 앉아 있으려니 불편해서요.”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의자가 끌려가며 그녀는 양혁수와 정면으로 마주 서게 되었다.그는 단숨에 그녀를 무릎 위에 앉혔고 변여름은 당황해 숨이 멎을 듯했다.“오빠.”양혁수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그녀의 턱을 감싸고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을 조용히 닦아주었다.변여름은 그의 뜨거운 시선을 온몸으로 느꼈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고 무의식적으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양혁수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그
변여름은 심장이 평소와는 다르게 빠르게 뛰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양혁수가 그녀를 소파에 내려놓자 그녀는 옆으로 누워 겨우 눈을 뜨고 감각에 의존해 그의 방향을 바라보았다.양혁수는 소파 옆에 서서 위에서 아래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변여름은 눈을 감고 결심을 내린 뒤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양혁수는 그녀가 간청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녀는 그의 손을 이용해 몸을 일으킨 후 그의 주머니에서 일부러 그녀를 겁주기 위해 사용한 라이터를 빼냈다.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닫자 피해자인 그조차도 알 수 없는 긴장감에 휩싸였다.‘이 여자는 도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그녀가 손을 뺄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온도를 느끼며 마음이 더 아파왔지만 그녀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고 그가 준 부드러움의 일부를 더 이상 훔칠 용기가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반드시 큰 화를 낼 것이었다.시선이 교차하며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정상적인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혁수 오빠.”가볍고도 무게감 있는 몇 마디가 양혁수의 귀에 들어갔다.그는 잠시 놀란 듯이 멈췄고 그다음에는 몸이 굳어버렸다.변여름은 마음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조여진 손에서 어렵게 손목을 빼내려 했다. 그 과정에서 양혁수는 변여름의 손목 위에 흉터를 확실히 느꼈다.얼마 전의 평범한 대화가 양혁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이건 어떻게 된 거야?”‘몇 년 전 오빠와 함께 공장에서 일할 때 제품의 일부가 폭발해서 조각이 날아왔어요.’변여름의 차분하고 여유 있는 목소리와 조금 전의 호칭이 완벽하게 겹쳤다.양혁수는 마치 누군가 뒤에서 강하게 가격을 당한 듯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가슴이 답답해져서 그는 믿을 수 없는 시선으로 어둠 속의 그녀를 바라보았다.‘불가능해. 절대 불가능해.’그는 최근의 친밀함을 떠올렸다. 조금 전 그는 그녀를 무릎에
양혁수는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렸지만 그중 변여름과 연결된 시나리오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그는 꿈에서라도 어린 시절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아이, 이제는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소녀이자 친구의 여동생인 그녀가 그를 이렇게 바보처럼 속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변여름이 오기 전 그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다. 최근의 시간과 노력이 수포가 되었다고, 결국 비정한 상업 세계에서 또 한 번의 대가를 치렀다고 체념하려 했다. 하지만 누가 감히 자신을 속였든 그 대가를 치르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가게 두지는 않을 생각이었다.그런데 지금 그의 앞에서 힘없이 소파에 앉아 있는 건 변백호의 여동생 변여름이었다.‘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양혁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게 마치 벽에 머리를 부딪히고 싶은 심정이었다.굴욕과 답답함이 온몸을 뒤덮었고 그 감정들이 서로 뒤엉켜 마치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화산이 터져버린 듯했다. 피가 뜨겁게 끓어올랐고 숨은 거칠게 몰아쉬어졌고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일이 터지면 양혁수가 분명 분노할 것이라고 변여름은 예상했다.하지만 막상 그의 눈에서 거부감과 격렬한 분노가 차오르는 것을 보자 그녀의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고 힘이 빠진 손에서 라이터가 미끄러져 떨어졌다.불꽃이 꺼지고 다시 어둠이 내려앉았다.하지만 양혁수의 날카로운 시선은 여전히 그녀를 꿰뚫고 있었다.변여름은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고 두려움 때문인지 약물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그녀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사지는 점점 감각을 잃어가는 것 같았다.그때 갑자기 맞은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어둠 속에서도 그의 움직임은 거칠고 빠르게 이어졌다. 순식간에 의자가 날아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그 소리를 듣고 변여름은 양혁수가 진짜로 화가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변여름은 입을 열고 사과하려 했지만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혁수 오빠...”양혁수는 들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는 만
“변여름의 몸에 칩이 이식되어 있어. 내가 여기서 여름의 모든 수치를 모니터링할 수 있어. 방금 여름의 심박수와 혈압이 모두 비정상이었어. 여름이랑 같이 있지? 병원에 데려가 줘. 여름이는 그 약을 먹어본 적이 없는데 아마 알레르기 반응일 거야.”변백호는 말을 한꺼번에 쏟아내며 양혁수를 당황하게 했다.양혁수가 변백호의 말의 진의를 판단하려 할 때 변백호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지금 네 기분이나 변여름이 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여름이가 너와 잠자리를 가졌더라도 즉시 병원에 데려가. 변여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쾅!변백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그를 가로막았다.“양혁수? 양혁수!”주차장에서 양혁수는 얼굴이 어두운 채 급히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는 마음속으로 상황이 엉망이라고 생각하며 욕설을 퍼붓고 있었지만 변백호가 한 말이 여전히 귀에 맴돌았다.조금 전 변여름이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거의 들리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며 온몸에 끓어오르던 분노가 마치 얼음물에 담갔듯이 사라졌다.그는 마치 얼음 지옥에 빠진 듯한 기분이었다.약물 알레르기가 빠르게 나타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욱 급하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미친 듯이 눌렀다.겨우 위층에 도착했을 때 여전히 어둠 속이었다. 그는 급히 휴대폰을 꺼내며 길을 가다가 물건에 부딪혔다.사무실에 도착하자 머리가 멍해졌다. 정전 사태를 떠올리며 문이 열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순간적인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다행히 문은 무사히 열렸다.양혁수는 가까운 불을 켜고 소파 쪽을 바라보았다. 순간 시선은 소파 옆에서 쓰러져 있는 변여름에게 고정되었고 그의 마음은 깊은 구렁텅이로 떨어졌다.양혁수는 변여름을 들고 그녀의 상태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곧장 계단을 내려갔다.엘리베이터에서 막 나온 순간 검은색 코트를 입은 두 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 변여름을 보고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양혁수는 그들이 변씨 가문에서 보낸 사람인
“여름이가 너를 좋아해.”쾅!양혁수는 마치 정면으로 총에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변여름과 나눈 애매한 대화들과 그녀와 나눈 친밀한 접촉들이 순식간에 총알로 변해 양혁수에게 날아오는 것만 같았다.그는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고 끊임없이 담배를 피우며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변백호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고 바로 이어서 말했다.“여름이는 오래전부터 너를 좋아했어. 내가 말렸지만 듣지 않더라고.”“너희 집은 아이 교육을 입으로만 하는 거야? 말을 안 들으면 다른 방법은 없어?”“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여름이를 가두기라도 해야 했을까?”변백호가 되물었다.“가두지 않으면 내게 와서 엉뚱한 짓을 하게 놔두는 거야? 내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더라면 좀 더 시간이 지나면...”그 말을 하다가 양혁수는 마치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말이 막혔다.‘젠장.’그는 힘껏 담배를 빨아들였지만 손에 든 담배는 이미 다 타버렸다.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온통 짜증스러운 감정들이 가득했고 오직 변백호가 지금 그의 앞에 나타나서 그를 죽도록 때려주어야만 겨우 화가 풀릴 것 같았다.“어쨌든 오늘 밤 변여름을 잘 돌봐줘. 여름에게 아무 일도 없으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줘.”변백호가 말했다.양혁수는 침묵했다.“...”‘뭐든 다 해줘? 여름이가 원하는 것을 내가 감히 줄 수 있을까?’“나는 변여름을 신경 쓰지 않아. 네 여동생은 네가 감당하지 못하면서 왜 나한테 책임을 떠넘기는 거야? 변여름이 살아 있다면 나는 바로 떠날 거고 너희 가문 사람들한테 변여름을 지켜보게 하고 회복되면 다시 집에 데려다줘.”변백호가 말했다.“데려갈 수 없어.”“...”“여름이가 회복된 후 이렇게 전해줘. 네가 돌아오고 싶다면 네 운이 좋은 거고 돌아오기 싫다면 네가 알아서 해. 정말 안 되겠으면 2년 정도 숨어 있어.”양혁수는 어이없었다.‘???’‘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어.’그는 역시 남매는 닮는다고 변씨 가문에는
뉴성에서 변백호는 휴대폰을 내려놓자마자 초롱초롱한 커다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그는 가죽 소파에 앉아 있었고 앞에는 검은색 책상이 놓여 있었다. 노지혜는 스트랩리스 드레스만 입고 곧고 하얀 다리를 드러낸 채 부드러운 발을 그의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아이고. 변 선생님, 삐뚤게 발랐어요.”그녀는 발가락을 움직이며 투덜거렸다.변백호는 노지혜를 한번 쳐다보았고 얼굴은 예전처럼 도도했다. 그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매니큐어를 내려놓으며 차갑게 말했다.“내가 바르는 게 맘에 안 들면 네가 직접 발라.”노지혜는 햇살처럼 빛나는 금발을 하고 있었고 웃을 때 눈은 마법처럼 반짝였다.변백호의 성격에 익숙해진 노지혜는 책상에서 뛰어내려 그의 다리 위에 앉아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나쁜 사람이네요. 변여름 씨가 괜찮은데도 혁수 오빠를 놀리다니요.”변백호는 고개를 숙여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왜 혁수가 너에게 오빠가 되는 거야?”노지혜는 눈을 깜빡이며 일부러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오빠 아니에요?”“내려가.”‘절대 안 내려갈 거야.’그녀는 아예 허리를 흔들며 더 아래로 내려갔다.변백호는 그녀 때문에 배가 긴장되어 인상을 찌푸렸고 큰 손으로 그녀의 허리 아래를 세게 쳤다.“얌전히 있어.”그 말이 떨어지자 그의 몸에 달라붙은 노지혜는 오히려 더 심해졌다. 두 다리를 꽉 조이고 그를 보며 웃을 뿐만 아니라 그의 손을 잡아 자기 몸에 갖다 대고 스스로 그의 손에 몸을 맡겼다.변백호는 침묵했다.“...”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노지혜는 큰 눈을 뜨고 입술을 깨물며 순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는 2초 동안 멈칫하다가 마주 보는 자세를 유지한 채 그녀를 품에 안아 들었다.‘혼쭐을 내줘야겠어.’...변백호 쪽은 봄처럼 행복했지만 양혁수 쪽은 3일 동안 제대로 잠을 못 잤다.변여름은 그날 밤 바로 괜찮아졌다. 의사는 약물 부작용이 심했을 뿐이고 다행히 알레르기는 아니라고 했다.양혁수는 안도하며
“도대체 무슨 일이야? 회사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양지원은 모르는 척했다.양혁수가 양지원을 바라보자 그녀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양혁수는 콧방귀를 뀌었다.“...쳇.”양지원은 어이없었다.“...”‘이 녀석.’그녀는 혀를 차더니 휴지를 던져 그의 어깨를 툭 쳤다.‘누구한테 감히 쳇이야?’양혁수는 차갑게 말했다.“변백호, 그 입이 가벼운 놈이 또 다 말했죠?”양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꽤 영리하네.’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더 이상 숨기지 않고 구경이라도 하듯 미소를 지었다.“왜? 변여름한테 당해서 마음 아파 집에 틀어박힌 거야?”양혁수는 인정하지 않았다.“대표는 연차 써서 그냥 쉬고 싶을 때 쉬는 거예요.”‘아무 이유도 없어.’양지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변여름과는 무관해?”“꼬맹이 하나 때문에 내가 진지할 이유 없어요.”“그래.”양지원은 가방에서 초대장을 꺼내 그의 얼굴 옆에 툭 내려놓았다.양혁수는 흘끗 보았다.“뭐예요?”“변씨 가문의 둘째 아들 결혼식이야. 한 번 가봐.”양혁수의 머릿속을 변여름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별다른 고민 없이 거절했다.“안 갈 거예요.”“왜?”“귀찮아요.”“우리 두 집안이 가까운 사이인데 네가 안 가면 보기 좋지 않아.”양지원은 느긋하게 말하다가 문득 말투를 바꿨다.“아니면 변여름을 마주칠까 봐 가기 싫은 거야?”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입을 열려고 했지만 양지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아니지. 꼬맹이가 장난을 친 것뿐이야. 너는 어른이잖아. 그렇게 옹졸하게 굴지 마. 한번 가서 축하도 해주고 그 아이가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안심시켜.”“말이 쉽죠.”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반박했다.양지원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쳐다보았다.양혁수는 잠시 멈칫하며 이마에 주름이 더 깊어졌다.양지원은 그가 이렇게 답답해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고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내가 틀린 말 했어? 별일 아니잖아. 아니면...”그녀는 갑자기 비웃는 듯한 말
양혁수는 변여름에게 조금의 체면도 남겨주지 않았지만 변여름은 끝내 그에게 손목시계를 선물로 남겼다.그녀가 변씨 가문의 군수 공장을 떠나기 전에 직접 만든 시계였다. 정교한 내부 구조를 갖추었으며 변씨 가문의 안전망과 연결되어 있어 자기방어는 물론 위급 시 언제든지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양혁수는 시계와 봉투를 받아들었지만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채 서재 서랍에 넣고 잠갔다.사실 봉투 안에는 다른 것이 없었고 오직 시계 사용 설명서만 들어 있었다.변여름은 언제나 양혁수가 쉽게 속고 더 철저한 보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떠났지만 변여름은 그가 평안하길 바랐다.이 뜻밖의 재앙은 갑자기 찾아왔다가 또 흔적 없이 사라졌다. 양혁수는 두 달 동안 무료 점심을 얻어먹었지만 대가는 포장이 조금만 단순해도 불편함을 느끼고 입맛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그는 10일 넘게 집에서 식사를 거르며 끝없는 술자리 속에서 양식을 지겨워서 토할 것 같을 때까지 먹었다.제대로 먹지 못하니 잠도 오지 않았고 기분은 더욱 나빠졌다.그렇게 양씨 도련님은 서른네 살의 나이에 다시 어린아이처럼 변덕을 부리기 시작했다.보름을 버티던 그는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회사도 가지 않으며 집에서 있었다.이를 심각하게 여긴 집사는 조용히 양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양지원은 정확한 사정을 알지는 못했지만 변여름이 갑자기 떠났다는 이야기에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그녀는 양혁수에게 직접 연락하지 않고 곧장 변백호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물었다.형제끼리 숨기고 싶은 창피한 일일 텐데 과연 변백호가 솔직히 털어놓을까 싶었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양지원은 10분 동안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속으로 연애는 역시 젊은 사람들이 해야 하는 그것으로 생각하며 변여름에게 손뼉을 쳤다.그녀는 망설임 없이 바쁜 양석진을 뒤로하고 사랑의 상처에 빠진 불쌍한 양혁수를 만나러 한강시로 향했다.한낮이었지만 양혁수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양지원은 가볍게 문을 두드렸지만
“할 말은 네 오빠가 이미 다 했어.”양혁수는 여지를 남기지 않고 계속 말했다.“몸이 나았으니 멕하든으로 돌아가. 내가 준비해 줄게.”변여름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나직이 말했다.“오빠 집을 나와 기숙사로 돌아갈 수 있어요.”“지도 교수와 팀은 내가 다 준비해서 함께 보내줄게. 집에서도 공부할 수 있어.”변여름은 침묵했다.그는 이미 그녀의 의도를 짐작하고 대비책도 마련해 두었다. 마치 그녀를 쫓아내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사람처럼 보였다.그녀는 손을 들어 살며시 피로한 눈을 비볐다.“...알았어요.”변여름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자세히 들으면 흐느끼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양혁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쨌든 변여름은 그가 지켜보며 자란 아이였고 만약 그녀가 조금만 덜 장난스러웠다면 아무리 말썽꾸러기라도 하늘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감싸주었을 것이다.하지만 변여름은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될 양혁수의 금기를 어겼다.“내일 갈 수 있겠어?”그가 다시 물었다.변여름의 어깨가 저도 모르게 축 처졌다. 사실 그녀는 그를 다시 한번 보고 싶었고 적어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는 전하고 싶었다.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런 말을 꺼내는 건 그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목이 메어 어렵게 침을 삼켰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갈 수 있어요.”양혁수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그녀가 먼저 속삭였다.“혼자 갈 수 있어요. 오빠가 나를 위해 따로 준비해 줄 필요 없어요.”‘오히려 잘 된 거야.’“비행기 타기 전에 알려줘.”변여름은 짧게 대답했다. 그는 그녀가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 하는 것을 알아챘다. 목이 불편한 상태로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날 정말 감기 걸린 거였어요?”양혁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멈칫했지만 그녀가 그런 사소한 일을 떠올릴 줄은 몰랐다.“아니.”그저 기침이 나서 그녀를 속이려고 조금 과장했을 뿐이었다.반대편에서 잠시 침묵하더니 변여름이 말했다.“다행이네요.”양혁수는 입안이 씁쓸해
뉴성에서 변백호는 휴대폰을 내려놓자마자 초롱초롱한 커다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그는 가죽 소파에 앉아 있었고 앞에는 검은색 책상이 놓여 있었다. 노지혜는 스트랩리스 드레스만 입고 곧고 하얀 다리를 드러낸 채 부드러운 발을 그의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아이고. 변 선생님, 삐뚤게 발랐어요.”그녀는 발가락을 움직이며 투덜거렸다.변백호는 노지혜를 한번 쳐다보았고 얼굴은 예전처럼 도도했다. 그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매니큐어를 내려놓으며 차갑게 말했다.“내가 바르는 게 맘에 안 들면 네가 직접 발라.”노지혜는 햇살처럼 빛나는 금발을 하고 있었고 웃을 때 눈은 마법처럼 반짝였다.변백호의 성격에 익숙해진 노지혜는 책상에서 뛰어내려 그의 다리 위에 앉아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나쁜 사람이네요. 변여름 씨가 괜찮은데도 혁수 오빠를 놀리다니요.”변백호는 고개를 숙여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왜 혁수가 너에게 오빠가 되는 거야?”노지혜는 눈을 깜빡이며 일부러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오빠 아니에요?”“내려가.”‘절대 안 내려갈 거야.’그녀는 아예 허리를 흔들며 더 아래로 내려갔다.변백호는 그녀 때문에 배가 긴장되어 인상을 찌푸렸고 큰 손으로 그녀의 허리 아래를 세게 쳤다.“얌전히 있어.”그 말이 떨어지자 그의 몸에 달라붙은 노지혜는 오히려 더 심해졌다. 두 다리를 꽉 조이고 그를 보며 웃을 뿐만 아니라 그의 손을 잡아 자기 몸에 갖다 대고 스스로 그의 손에 몸을 맡겼다.변백호는 침묵했다.“...”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노지혜는 큰 눈을 뜨고 입술을 깨물며 순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는 2초 동안 멈칫하다가 마주 보는 자세를 유지한 채 그녀를 품에 안아 들었다.‘혼쭐을 내줘야겠어.’...변백호 쪽은 봄처럼 행복했지만 양혁수 쪽은 3일 동안 제대로 잠을 못 잤다.변여름은 그날 밤 바로 괜찮아졌다. 의사는 약물 부작용이 심했을 뿐이고 다행히 알레르기는 아니라고 했다.양혁수는 안도하며
“여름이가 너를 좋아해.”쾅!양혁수는 마치 정면으로 총에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변여름과 나눈 애매한 대화들과 그녀와 나눈 친밀한 접촉들이 순식간에 총알로 변해 양혁수에게 날아오는 것만 같았다.그는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고 끊임없이 담배를 피우며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변백호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고 바로 이어서 말했다.“여름이는 오래전부터 너를 좋아했어. 내가 말렸지만 듣지 않더라고.”“너희 집은 아이 교육을 입으로만 하는 거야? 말을 안 들으면 다른 방법은 없어?”“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여름이를 가두기라도 해야 했을까?”변백호가 되물었다.“가두지 않으면 내게 와서 엉뚱한 짓을 하게 놔두는 거야? 내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더라면 좀 더 시간이 지나면...”그 말을 하다가 양혁수는 마치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말이 막혔다.‘젠장.’그는 힘껏 담배를 빨아들였지만 손에 든 담배는 이미 다 타버렸다.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온통 짜증스러운 감정들이 가득했고 오직 변백호가 지금 그의 앞에 나타나서 그를 죽도록 때려주어야만 겨우 화가 풀릴 것 같았다.“어쨌든 오늘 밤 변여름을 잘 돌봐줘. 여름에게 아무 일도 없으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줘.”변백호가 말했다.양혁수는 침묵했다.“...”‘뭐든 다 해줘? 여름이가 원하는 것을 내가 감히 줄 수 있을까?’“나는 변여름을 신경 쓰지 않아. 네 여동생은 네가 감당하지 못하면서 왜 나한테 책임을 떠넘기는 거야? 변여름이 살아 있다면 나는 바로 떠날 거고 너희 가문 사람들한테 변여름을 지켜보게 하고 회복되면 다시 집에 데려다줘.”변백호가 말했다.“데려갈 수 없어.”“...”“여름이가 회복된 후 이렇게 전해줘. 네가 돌아오고 싶다면 네 운이 좋은 거고 돌아오기 싫다면 네가 알아서 해. 정말 안 되겠으면 2년 정도 숨어 있어.”양혁수는 어이없었다.‘???’‘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어.’그는 역시 남매는 닮는다고 변씨 가문에는
“변여름의 몸에 칩이 이식되어 있어. 내가 여기서 여름의 모든 수치를 모니터링할 수 있어. 방금 여름의 심박수와 혈압이 모두 비정상이었어. 여름이랑 같이 있지? 병원에 데려가 줘. 여름이는 그 약을 먹어본 적이 없는데 아마 알레르기 반응일 거야.”변백호는 말을 한꺼번에 쏟아내며 양혁수를 당황하게 했다.양혁수가 변백호의 말의 진의를 판단하려 할 때 변백호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지금 네 기분이나 변여름이 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여름이가 너와 잠자리를 가졌더라도 즉시 병원에 데려가. 변여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쾅!변백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그를 가로막았다.“양혁수? 양혁수!”주차장에서 양혁수는 얼굴이 어두운 채 급히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는 마음속으로 상황이 엉망이라고 생각하며 욕설을 퍼붓고 있었지만 변백호가 한 말이 여전히 귀에 맴돌았다.조금 전 변여름이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거의 들리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며 온몸에 끓어오르던 분노가 마치 얼음물에 담갔듯이 사라졌다.그는 마치 얼음 지옥에 빠진 듯한 기분이었다.약물 알레르기가 빠르게 나타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욱 급하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미친 듯이 눌렀다.겨우 위층에 도착했을 때 여전히 어둠 속이었다. 그는 급히 휴대폰을 꺼내며 길을 가다가 물건에 부딪혔다.사무실에 도착하자 머리가 멍해졌다. 정전 사태를 떠올리며 문이 열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순간적인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다행히 문은 무사히 열렸다.양혁수는 가까운 불을 켜고 소파 쪽을 바라보았다. 순간 시선은 소파 옆에서 쓰러져 있는 변여름에게 고정되었고 그의 마음은 깊은 구렁텅이로 떨어졌다.양혁수는 변여름을 들고 그녀의 상태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곧장 계단을 내려갔다.엘리베이터에서 막 나온 순간 검은색 코트를 입은 두 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 변여름을 보고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양혁수는 그들이 변씨 가문에서 보낸 사람인
양혁수는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렸지만 그중 변여름과 연결된 시나리오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그는 꿈에서라도 어린 시절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아이, 이제는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소녀이자 친구의 여동생인 그녀가 그를 이렇게 바보처럼 속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변여름이 오기 전 그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다. 최근의 시간과 노력이 수포가 되었다고, 결국 비정한 상업 세계에서 또 한 번의 대가를 치렀다고 체념하려 했다. 하지만 누가 감히 자신을 속였든 그 대가를 치르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가게 두지는 않을 생각이었다.그런데 지금 그의 앞에서 힘없이 소파에 앉아 있는 건 변백호의 여동생 변여름이었다.‘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양혁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게 마치 벽에 머리를 부딪히고 싶은 심정이었다.굴욕과 답답함이 온몸을 뒤덮었고 그 감정들이 서로 뒤엉켜 마치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화산이 터져버린 듯했다. 피가 뜨겁게 끓어올랐고 숨은 거칠게 몰아쉬어졌고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일이 터지면 양혁수가 분명 분노할 것이라고 변여름은 예상했다.하지만 막상 그의 눈에서 거부감과 격렬한 분노가 차오르는 것을 보자 그녀의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고 힘이 빠진 손에서 라이터가 미끄러져 떨어졌다.불꽃이 꺼지고 다시 어둠이 내려앉았다.하지만 양혁수의 날카로운 시선은 여전히 그녀를 꿰뚫고 있었다.변여름은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고 두려움 때문인지 약물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그녀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사지는 점점 감각을 잃어가는 것 같았다.그때 갑자기 맞은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어둠 속에서도 그의 움직임은 거칠고 빠르게 이어졌다. 순식간에 의자가 날아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그 소리를 듣고 변여름은 양혁수가 진짜로 화가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변여름은 입을 열고 사과하려 했지만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혁수 오빠...”양혁수는 들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는 만
변여름은 심장이 평소와는 다르게 빠르게 뛰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양혁수가 그녀를 소파에 내려놓자 그녀는 옆으로 누워 겨우 눈을 뜨고 감각에 의존해 그의 방향을 바라보았다.양혁수는 소파 옆에 서서 위에서 아래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변여름은 눈을 감고 결심을 내린 뒤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양혁수는 그녀가 간청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녀는 그의 손을 이용해 몸을 일으킨 후 그의 주머니에서 일부러 그녀를 겁주기 위해 사용한 라이터를 빼냈다.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닫자 피해자인 그조차도 알 수 없는 긴장감에 휩싸였다.‘이 여자는 도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그녀가 손을 뺄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온도를 느끼며 마음이 더 아파왔지만 그녀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고 그가 준 부드러움의 일부를 더 이상 훔칠 용기가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반드시 큰 화를 낼 것이었다.시선이 교차하며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정상적인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혁수 오빠.”가볍고도 무게감 있는 몇 마디가 양혁수의 귀에 들어갔다.그는 잠시 놀란 듯이 멈췄고 그다음에는 몸이 굳어버렸다.변여름은 마음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조여진 손에서 어렵게 손목을 빼내려 했다. 그 과정에서 양혁수는 변여름의 손목 위에 흉터를 확실히 느꼈다.얼마 전의 평범한 대화가 양혁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이건 어떻게 된 거야?”‘몇 년 전 오빠와 함께 공장에서 일할 때 제품의 일부가 폭발해서 조각이 날아왔어요.’변여름의 차분하고 여유 있는 목소리와 조금 전의 호칭이 완벽하게 겹쳤다.양혁수는 마치 누군가 뒤에서 강하게 가격을 당한 듯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가슴이 답답해져서 그는 믿을 수 없는 시선으로 어둠 속의 그녀를 바라보았다.‘불가능해. 절대 불가능해.’그는 최근의 친밀함을 떠올렸다. 조금 전 그는 그녀를 무릎에
변여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허예나의 신분과는 상관없이 그녀가 양혁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그녀에게 특별한 존재였고 늘 다정했다.“오빠, 나한테 잘해줘서 고마워요.”그녀가 불쑥 감사를 전하자 마치 마지막 인사를 남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양혁수의 감정이 요동쳤다. 마치 그녀가 그가 오늘 밤 무엇을 하려는지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어둠과 마주한 채 더욱 불쾌해졌다.변여름은 이런 날이 올 것을 이미 알고 여러 번 마음을 다잡았지만 막상 현실이 닥치자 스스로 이렇게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녀의 손에는 땀이 맺혔고 온몸이 서늘해졌다. 변여름은 그를 속여 이토록 가까이 다가가게 만든 것을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곧 자신을 싫어하는 눈빛으로 바라볼까 두려웠다.그 생각이 스치자 코끝이 찡해졌고 언제부터인지 뜨거운 액체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믿기지 않아 손을 올려 얼굴을 닦았고 그것이 눈물임을 깨달았다.이 감정은 복잡했다. 누군가로 인해 가슴이 저미고 눈물을 흘리게 된다니 마치 감정이 없던 기계가 자신의 마음을 처음으로 자각한 듯한 기분이었다.그제야 변여름은 당황하기 시작했다.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올라와 본능적으로 의자를 짚고 일어서려 했다.그 순간 그녀의 코끝이 먹먹해지는 소리를 들은 양혁수가 무언가를 깨닫고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어디 가?”변여름은 숨이 턱 막혔다. 눈을 감고 빠르게 감정을 다잡았다.“아니에요. 그냥... 오래 앉아 있으려니 불편해서요.”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의자가 끌려가며 그녀는 양혁수와 정면으로 마주 서게 되었다.그는 단숨에 그녀를 무릎 위에 앉혔고 변여름은 당황해 숨이 멎을 듯했다.“오빠.”양혁수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그녀의 턱을 감싸고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을 조용히 닦아주었다.변여름은 그의 뜨거운 시선을 온몸으로 느꼈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고 무의식적으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양혁수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