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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병실에 들어선 시연은 침대 옆에 앉았다.

고상훈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시연아,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니? 짐은 다 챙긴 게야?”

‘준비? 짐을 챙긴다는 건 또 무슨 말씀이시지?’

시연은 정신이 멍해져서 대답할 수 없었다.

곧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고상훈이 말했다.

“설마 유건이가 너한테 말을 하지 않은 게야? 이 자식이! 이럴 줄 알았어, 성의 없이 한 대답일 줄 알았다고!”

사실, 조만간 고상훈의 오랜 친구가 생일을 쇨 예정이었는데, 그는 직접 갈 수 없어서 고유건에게 지시연과 함께 가라고 한 것이었다.

이는 고상훈이 좋은 뜻을 가지고 한 말이었다.

이 나이까지 살아온 그가 어떻게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모든 방법을 강구하여 유건과 시연을 붙여 놓으려 했다.

“시연아, 이 할아비의 말을 좀 듣거라.”

고상훈은 두 젊은이 때문에 마음을 졸였다.

“유건이가 다른 사람한테 지시를 받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이미 결혼한 이상, 감정을 잘 가다듬고 살아가야 하지 않겠니?”

“네.”

지시연은 반박할 수 없어서 순순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착한 아이구나.”

고상훈이 흐뭇하게 웃었다.

“시연아, 유건이는 너한테 맡기마.”

병실에서 나온 지시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실습이 중단된 일을 겪은 그녀는 유건을 조금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고상훈의 뜻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

시연은 어려서부터 그 누구의 귀여움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고상훈은 늘 시연에게 잘해주었고, 그녀는 이를 감사하고 소중히 여겼다.

‘그래, 다녀오자. 다 어르신을 위한 일이잖아.’

‘어차피 이미 실습을 정지당했기 때문에 휴가를 낼 필요도 없어. 하지만... 생신을 축하하는 자리면 선물은 준비해야겠지?’

‘돈이 없어서 비싼 걸 살 수는 없으니까, 마음을 담은 선물을 준비하자.’

마침 시간이 있었던 시연은 천음사로 향하는데...

그녀는 저녁에 기숙사에 돌아와 짐을 싸고 유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고상훈이 시연에게 주소를 주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튿날 아침에 버스를 타고 출발하여 명리산으로 향할 수 있었다.

시연이 명리산으로 향하던 때,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졌다.

시연이 소리를 들었을 때는 이미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상황이었다. 차에서 내린 그녀가 또 한 번 유건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에 앉은 유건가 손에 쥔 핸드폰을 힐끗 쳐다보았다.

“허!”

그는 이 한 글자로 경멸의 의미를 남김없이 표현했고, 핸드폰을 뒤집으며 보고도 못 본 척했다.

...

명리산 기슭.

이곳에는 개인차량이 올라갈 수 없었기에, 오로지 산 위에서 보낸 차량으로 갈아타야만 했다.

요 며칠 명리산은 한씨 집안이 전세를 냈기 때문에, 파견될 수 있는 차량의 숫자도 제한되어 있었다.

그래서 시연은 산기슭에서 기다릴 뿐, 아무 데도 갈 수 없었다.

벤틀리 뮬산이 멈추자, 유건의 뒤를 따라 지한이 내렸다.

“고유건 씨.”

시연이 바삐 쫓아갔다.

비가 세차게 내렸기에, 지한은 검은 우산을 쓴 채 유건 뒤에 서 있었다.

유건이 눈꺼풀을 살짝 내리고 평온한 어투로 말했다.

“비켜.”

“할아버지께서 저도 가라고 하셨어요, 고유건 씨와 함께요.”

시연은 일찍이 유건의 태도를 예상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어버렸으니, 그와 잘 지내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으며, 개의치도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응시하며 약 2초 동안 침묵했다.

고상훈은 유건에게 시연과 함께 가라고 말했는데, 유건은 대답만 했을 뿐, 뒤돌아서자마자 고상훈의 말을 잊어버렸다.

‘할아버지께서 또 지시연을 찾으시다니!’

‘그런데 이 여자는 또 여길 찾아왔잖아?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야?’

유건이 얇은 입술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너한테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그는 이 말을 끝으로 시연을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얼핏 보기에도 유건이 시연을 대단히 싫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시연은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는데, 이곳에 온 것은 순전히 고상훈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말없이 유건과 지한의 뒤를 따랐다.

“고 대표님, 오셨군요. 어서 타시죠.”

한씨 집안에서 보낸 운전기사가 그를 맞이하며 말했다. 유건을 고개를 끄덕이며 주지한과 함께 차에 올랐다.

시연 역시 그들을 따라 차에 오르려고 했으나, 유건은 ‘쾅’ 소리를 내며 차 문을 닫았다.

그가 운전기사에게 분부했다.

“출발하세요.”

“예, 고 대표님.”

차가 갑자기 출발하자, 도로에 있는 물이 튀어 시연의 온몸을 덮치려 했다.

시연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는데, 비가 오는 날이라 땅이 미끄러워 실수로 넘어지고 말았다.

이를 본 지한이 놀라며 말했다.

“형님.”

유건이 백미러를 힐끗 쳐다보았다. 백미러에 비친 시연은 빗길에 넘어져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채 아주 불쌍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저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인상을 찌푸린 유건이 기사를 향해 차갑게 분부했다.

“어서 가세요.”

몸을 일으킨 시연은 멀어져가는 차를 바라보며 얼굴에 묻은 빗물을 닦았다.

그녀는 비록 차는 없었지만 다리가 있었기 때문에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다만, 비가 오는 날이라 길을 걷기 어려운 데다가, 명리산의 높이도 낮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시연은 족히 30분이 걸려서야 산장에 도착했다.

산장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것으로, 모두 단층 주택 설계를 따른 것이었다.

시연은 프론트 데스크에 물어본 후에야 유건이 묵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도착했을 때, 유건은 그곳에 없었다.

‘친구를 만나러 간 건가?’

그녀는 방 카드키가 없어서 방 입구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약간의 추위를 느낀 시연은 손을 비비기 시작했고, 밀려오는 피로감을 느낀 그녀는 문에 기대어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깨웠다.

“지시연 씨, 정신 차리세요.”

“음...”

천천히 눈을 뜬 시연은 먼저 지한을 보았으나, 그의 뒤로 유건의 모습도 보였다.

“오셨네요.”

몸을 일으키던 시연이 눈살을 찌푸린 채 무릎을 어루만졌다.

“아, 아파.”

‘아프다고? 멀쩡해 보이는데 아프긴 뭐가 아파? 설마 나의 관심을 끌려는 거야? 헛된 꿈이라도 꾸는 거냐고!’

얼굴이 저승사자처럼 굳어진 유건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시연, 그런 수법은 나한테 안 통해. 꺼져!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그는 이 말을 마치고 문을 밀고 들어갔다.

반 박자 늦은 시연은 문밖에 선 채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배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 먹었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시연이 가방에서 말라비틀어진 빵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

그녀는 지금 그 빵만 먹을 수 있었는데, 아르바이트 자리를 잃어서 생활비가 빠듯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돈을 한 푼이라도 아껴야 했기 때문에 시연은 돈을 절반으로 나눠서 쓰고 싶을 지경이었다.

빵에 목이 멘 시연은 허둥지둥 소리를 내며 간신히 삼키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그녀의 앞에 물 한 병을 놓아주었다.

“주지한 씨.”

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병을 받아서 들었다.

“감사합니다.”

지한이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천만에요.”

그가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형님께는 좋은 감정으로 만나고 있는 여자 친구가 있으세요.”

‘좋은 감정?’

시연이 고개를 숙인 채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고유건이 이혼을 할 수 없으니... 장미리 모녀는 단단히 화가 났겠는데?’

‘그거면 됐어.’

‘고유건의 미움을 사서 겪은 고생이 헛되이 되지 않은 셈이야.’

“제가 보기에 지시연 씨는 아주 현명한 사람이에요. 즉, 형님께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단 말이죠.”

이 말은 지한이 좋은 뜻에서 한 말이었다.

시연이 감격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고유건 씨에게 어떤 시도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건 아니에요. 그냥...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어요.”

그녀는 더 많은 것을 지한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요.”

주지한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럼 저는 일이 많아서 이만.”

깊은 밤, 비바람이 멈추지 않았다.

시연은 결국 문에 기대어 어렴풋이 하룻밤을 보냈다.

이튿날 아침, 시연은 주지한이 다시 방에 올 때까지 눈살을 찌푸린 채 불안정한 잠을 자고 있었다.

‘여기서 하룻밤을 보낸 거야?’

‘여자는 천성적으로 몸이 약한 법이잖아. 이러다가는 병이 날지도 몰라.’

지한은 안타까운 마음에 허리를 굽혀 한 손은 시연의 겨드랑이 아래로, 다른 한 손은 무릎 뒤쪽으로 넣어 그녀를 안아 일으키려고 했다.

바로 그때, 문이 열렸다.

유건은 차가운 눈으로 친형제처럼 지내고 있는 지한이 자신의 아내인 지시연을 안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바로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매서운 번개가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유건의 낯빛은 그 번개보다 더욱 음침하고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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