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은 유건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이건 컵라면이에요, 익기를 기다리고 있고요.”‘도대체 무슨 말이지?’‘이 여자, 일부러 내 기분 나쁘게 하려는 건가?’유건은 불쾌함을 참았다. ‘우리 둘의 사이는 비록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 여자도 전에 날 크게 도왔으니까. 편의점에서 컵라면이나 먹는 이 여자를 이대로 두고 갈 수도 없는데...’‘내가 이 여자한테 분명히 카드를 주었는데도, 왜 일자리를 찾고, 심지어 여기에서 컵라면을 먹을까?’‘일단 눈앞의 문제부터 해결하자.’“그만 먹어! 라면이 뭐가 맛있어? 내가 다른 거 사 줄게.”“됐어요, 저...”그러나 유건은 곧장 시연을 끌고 식품코너로 갔다.“뭐 먹고 싶어?”시연은 냉담하게 쳐다보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말 안 해?” 유건은 잘 생긴 짙은 눈썹을 비틀며 말했다.“그럼 내가 정하지.”유건은 진열대에서 연어초밥, 생우유, 그리고 계란찜을 가져왔다.그는 곧장 계산을 하고 돌아서서 시연에게 먹으라고 건네주었다.“먹어 봐.”시연은 입을 꾹 다물고 대답도 하지 않고 음식을 받지도 않았다.갑자기 그녀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길 건너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이 순간, 시연은 심장 박동이 갑자기 빨라져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비록 뒷모습, 뒤통수만 보았지만, 그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노은범이었어!’그렇다. 이때 노은범의 곁에는 다른 친구 두 명과 함께 있는데, 서로 웃고 떠들며 걸어가면서 점점 멀어졌다.‘그 사람이 돌아왔네!’시연은 갑자기 유건을 밀치며 외쳤다.“좀 비켜주세요!”유건이 산 그 음식들이 갑자기 온 바닥에 흩어졌다.유건의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마치 금방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았다!‘이런 배은망덕한 계집애!’“지시연!”시연은 그를 무시하고 편의점을 뛰쳐나와 다급히 그를 쫓아갔다. “은이야, 은이야...”‘은이야?'시연이 곧바로 뛰어나갔지만 노은범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어디 갔지?’그녀
“맞습니다.”안색이 아주 어두워진 유건의 얼굴을 보고 의사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다만, 아직 임신 초기입니다. 3주밖에 안 됐어요. 산모가 저혈당으로 쓰러져서 임신이 확인된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시점에서는 확인이 어려웠을 겁니다.”“허.”유건은 냉담한 눈빛으로 음험하고 차갑게 웃었고, 갑자기 몸을 돌려 커튼을 확 열어젖혔다.“지시연, 다 들었어?”시연은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이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유건은 침을 삼키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하게 물었다.“저는...”시연은 자신의 옷깃을 움켜잡고 한동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사실, 지금 시연이 스스로도 매우 놀랐다. ‘임신이라니!’‘로얄호텔에서 그날 밤!’‘그날 밤, 내가 너무 긴장해서 전혀 그 남자가 피임 조치를 했는지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어... 돌이켜 보면, 아무 준비도 없었던 것 같아...’‘내가 그래도 의사인데 이런 초보적이고,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르다니!’시연이 오랫동안 말이 없자, 유건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고, 소리 없는 조롱이 눈가에 번졌다.“이 아이를 낳겠다고 말할 건 아니지?”‘설령 나와 지시연이 계약 결혼 관계이고 아무리 명목상의 부부일 뿐이지만... 설령 지시연 어머니가 우리 할아버지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었더라도... 지시연이 내 아내 자리를 차지하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것까지 받아들일 수는 없어!’‘우리 둘이 이혼하지 않는 한 지시연의 출산은 절대 불가능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유건은 시연이 당장 자신과 이혼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차렸다.그리하여 자기 할아버지 고상훈의 체면을 봐서도, 시연이 전에 도와준 것을 봐서, 시연이 원하는 대로 이혼 얘기를 나중에 다시 상의하자고 동의했다. 그러나 이번에 만약에 시연이 감히 뱃속에 그 아이를 낳겠다고 하면 유건은 즉시 시연을 끌고 이혼 수속을 할 생각이었다!한편, 시연의 머릿속도 매우 혼란스러웠지만, 이 아이를
시연은 요즘 임신으로 인한 걱정이 많아서 무엇을 해도 힘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심지어는 인터넷으로 아르바이트도 찾지 않았다. 혼자 있으면 자꾸 잡념에 빠지기 쉬웠기 때문에 지시연은 대부분의 시간을 임진아의 곁에서 보냈다. 진아가 돌아오자, 시연이 중얼거렸다.“드디어 왔네! 배고파 죽을 뻔했잖아.”“보자.”진아가 빙그레 웃으며 시연의 가슴을 어루만졌다.“야, 큰일이네, 배가 엄청 고파서 여기도 작아졌잖아!” “하하...”시연이 웃으며 뒹굴었다.“임진아, 너 자꾸 장난칠래?”“빨리 일어나, 나가서 밥 먹자!”“좋아.”두 사람은 강울대 뒤편의 거리로 향했는데, 이곳은 밤이 되면 시끌벅적해졌으며, 작은 것부터 길거리 통닭, 포장마차 음식, 그리고 미슐랭급 식당까지 있는 곳이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던 두 사람의 어깨를 누군가가 두드렸다. “임진아, 지시연, 이런 우연도 있네?”그 사람은 두 사람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대학 동창인 우찬이었다. 시연은 미소를 지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아가 우찬을 힐끗 보았다.“우연? 강울대 학생 중에 여기에 와서 밥을 안 먹는 사람도 있던가?” 진아가 또 우찬을 부추겼다.“이렇게 수준 낮은 대화를 걸다니... 왜, 우리한테 밥이라도 사려는 거야?” 상대방이 놀라서 물러날 거라는 진아의 예상과 달리, 우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살게! 가자!”진아와 시연이 서로를 마주 봤다.‘이게 웬 횡재야?’ “분명히 너한테 반한 거야!” 진아가 작은 소리로 시연에게 말했다.“물론 나한테 반한 걸 수도 있지. 됐어, 그건 신경 쓰지 말자. 어쨌든 공짜로 먹는 밥이잖아? 내가 공짜를 무척 좋아하긴 하지만, 우찬이가 우리를 해치려고 한다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야! 일단 가보자!” 진아에게 끌려가던 시연은 거절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우찬은 두 사람을 데리고 새로 개업한 식당으로 들어갔는데, 아래층은 홀이고 위층은 룸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그는 두 사람을 데리고
시연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진아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뚫린 입이면 다인 줄 알아?!”우찬이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와, 이게 뚫린 입이냐는 이야기까지 나올 일이야? 사실일 뿐이잖아. 그때 전교생이 두 사람을 질투할 정도였는데?”“닥쳐! 그만하지 못해?”“싫은데?”우찬이 일부러 또 물었다.“두 사람, 왜 헤어진 거야? 우리는 너희 사이가 너무 좋아서 너희가 끝까지 갈 수 있을 줄 알았어. 연애에서 결혼까지!” “그건 시연한테 물어봐야지.” 줄곧 말하지 않던 은범이 입을 열며 시연을 바라보았다. “시연이가 결정한 거지, 뭐. 쟤가 먼저 나한테 헤어지자고 했거든.” 툭!갈비 한 조각을 뜯고 있던 시연이 그대로 탁자 위에 갈비를 떨어뜨렸다. ‘너무 방심했어.’ ‘노은범, 대체 뭐라는 거야?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다니... 허, 말은 그럴싸하네.’“그래?”우찬은 시연을 잡고 꼬치꼬치 물었다.“시연아, 왜 그랬어? 우리 은범이 어디가 부족해서?” 시연의 마음속에는 떫은 슬픔이 만연했다. 시연이 나른하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도 안 나네. 내 아침밥을 사주지 않아서 그랬나?” 결국, 대답을 얼버무린 셈이었다. 진아도 조차도 이 대답을 듣고 멍해졌다.“하긴.”우찬이 은범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여자는 원래 사소한 일로 화를 내는 법이잖아. 은범아, 시연이 말에서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어. 지금 여자 친구한테는 더 세심하고 자상하게 해주란 말이지.” 국물을 먹던 시연이 또 한 번 멈칫했다. ‘여, 여자 친구가 생긴 건가?’“은범 씨!”그녀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밝은 목소리의 여자가 은범의 이름을 외치며 이쪽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왔어?”은범이 의자를 끌어 그 여자를 앉혔다.“네.”웃으며 은범에게 기대어 앉는 여자의 모습은 작은 새의 모습과 같았다. 그녀가 은범에게 애교를 부렸다.“나 저거 먹을래요! 그리고 국도요! 아 국부터 한
강울대 뒷거리의 포장마차는 밤에 가장 시끌벅적했다.“사장님, 김치볶음밥 2인분 주세요!” 진아가 한 손으로 시연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배를 비비며 불평했다. “다 우찬이 때문이야. 그 녀석 때문에 내가 밥을 먹는 시간이 지체된 거라고!” 시연도 배가 고파서 침을 삼켰다.“진아야, 나는 호두과자가 먹고 싶어.” “그래! 조금 있다가 가서 먹자.”입에서 나오는 대로 승낙한 진아는 갑자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의심스럽다는 듯 시연을 훑어보았다. “요즘 먹는 양이 부쩍 많아진 것 같다? 한밤중에도 많이 먹는 것 같던데... 살찔까 봐 무섭지는 않아?”시연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란함을 느꼈다. ‘그래, 내가 많이 먹기 시작했다는 걸 나도 느끼던 참이었어. 아마... 배 속에 있는 작은 녀석 때문이겠지?’ “볶음밥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진아가 핸드폰을 꺼내 결제하려 했다. 시연이 급히 말했다.“얼마예요? 제가 입금해 드릴게요.” “됐어...”“내가 입금할 거야!”겨우 1초도 티격태격하지 않았는데, 옆에서 낮고 온화한 목소리로 끼어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제가 계산할게요.” “누구지?”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마주한 두 사람은 즉각 멍해졌다. 빛과 그림자가 드리워진 노은범의 출중한 옆태는 마치 신처럼 보였다. 시연은 무의식적으로 그를 저지하는 반응을 보였다.“안 돼! 하지 마...” 하지만 결제 완료 알림은 은범이 이미 지불에 성공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은범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들을 마주했고, 핸드폰을 보이며 말했다.“이미 했어.”하지만 인상을 찌푸린 시연은 별로 기뻐하지 않는 것 같았다. “밥 한 끼일 뿐이잖아?” 은범은 마음속의 두근거림과 불안을 억지로 눌렀다.“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작은 호의를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또 거절하면 본인을 지나치게 신경 쓴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그래, 고마워.”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상을 조금 풀
실시간 검색어 1위, 가장 끝에 적힌 붉은색의‘화제’라는 글자가 눈에 띄게 두드러져 있었다. 서버가 아주 느린 탓에, 지시연은 한참 기다리고서야 그 기사를 클릭할 수 있었다. 한 단락의 문장 뒤에는 영상까지 첨부되어 있었다.그것은 한식당‘맛나리’의 입구에서 찍힌 것이었는데, CCTV 카메라 각도는 정확하지 않았다. 고유건이 입구를 나오자, ‘맛나리’의 발렛 파킹 직원이 그를 대신하여 문을 열어주는 듯하더니 갑자기 그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2초 동안 멍하니 있던 고유건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듯했는데, 이윽고 순식간에 그 발렛 파킹 직원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말았다. 영상은 이렇게 끝이 났는데, 시연의 마음을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휴게실에 있던 사람들이 분분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엄청 가볍게 찔렀어!”“역시 재벌 집안은 복잡하다니까?!”“고유건이 어느 병원으로 옮겨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아주 멋있다고 들었는데...” 수간호사가 갑자기 문 앞에 서서 손뼉을 쳤다.“자, 다 먹었어요? 다 먹었으면 어서 움직입시다!” 모두 바삐 가십을 멈추었다. 시연도 일어나서 도시락을 치웠다. “지 선생님.”수간호사가 그녀를 부르며 말했다.“119에서 전화가 왔었는데, 칼에 찔린 환자를 보낼 테니까 진찰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칼에 찔린 환자?’‘설마, 고유건?’“하지만...”시연이 머뭇거렸다.“양석현 교수님께서는 아직 수술실에 계세요. 교통사고로 다친 환자의 수술이 아직 끝나지 않았거든요.” “알아요.”수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내가 이미 수술실에 연락해 봤는데, 양 교수님께서 지 선생님께 진료를 부탁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수간호사가 시연을 향해 격려가 서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너무 긴장할 거 없어요. 양 교수님이 진찰하라고 하신 건, 지 선생님을 믿는다는 거니까요. 물론 우리도 마찬가지고요.”‘말은 그렇지만...’“알겠습니다.”시연은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재빨리 방호복으로 갈아입은 지시연이 응급
유건이 시연을 힐끗 보았다.“상관없어! 나는 너여야만 한다고!” 손을 놓지 않는 유건은 약간의 억울함이 있는 것 같았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 어린애처럼 고집을 부리는 거지?’ 시연은 그를 지우주라고 여기며 어르고 달랬다.“양 교수님은 저의 선생님이세요. 그분은 전국적인 의학계의 권위자이시고요...” “그 사람이 누구든! 나는 그 사람 못 믿어.”무표정한 유건은 대단히 매서워 보였다. ‘말이 안 통하잖아?’ 시연이 어찌할 바를 모르던 찰나, 지한이 들어왔다. 지한이 그녀에게 말했다.“지시연 씨, 부탁 좀 드릴게요. 요즘 형님께서는 계속 기괴한 일에 시달리셔서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에요.”“그런데...”시연은 이해하지 못했다.“왜 저는 믿으시려는 거예요?” ‘나를 아주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흥.”유건은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으나, 여전히 높고 매서운 말투로 말했다. “너를 믿는다는 게 아니야! 너 하나 죽이는 것쯤은 개미를 죽이는 것처럼 간단하다고!” “...”‘그냥 내버려두고 싶어.’하지만 사람을 구하는 것이 의사의 임무였기에 시연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그래요.” ...수술실 안.유건은 이미 마취제를 맞고 깊은 잠에 빠졌다. 수술복으로 갈아입은 시연이 수술대에 오르기 전에 간호사에게 물었다.“양 교수님의 수술은 끝났나요?”“아직이요.”“양 교수님께서 지금 긴급한 상황이라고 하시면서 지 선생님의 실력을 믿는다고 하셨어요. 제게는 선생님께서 안심하고 수술할 수 있도록 도우라고 하셨고요. 양 교수님은 지 선생님의 선생님이시잖아요. 혹시라도 무슨 문제가 있으면 양 교수님께서 책임지실 거예요.”간호사가 말했다. 마음이 따뜻해진 시연은 걱정이 놓이는 듯했다. 유건의 창백하고 잘생긴 얼굴을 마주한 그녀가 넌지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별문제 없을 거예요.” “수술, 잘 끝날 거예요.” ...날이 밝자, 시연은 회진하러 왔다. “지시연 씨.”지한이
시연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장소미를 응시하며 말없이 있었다. ‘장소미는 고유건의 여자 친구야. 조만간 만나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시연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소미 역시 마음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어젯밤, 소미도 실시간 검색어를 보았는데, 그때 곧바로 병원에 오려고 했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지한은 상황이 여의찮다며 기다리라고 할 뿐이었다. 결국 소미는 밤새워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소식을 들을 수 없었고,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아침부터 그녀 홀로 달려온 것이었다. 그러나 고유건이 아닌 지시연을 먼저 만나고 말았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던가. 소미는 크게 겁을 먹었다.그녀가 억지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병실 입구의 환자 명패를 훑어보았다.‘유건 씨의 병실이 맞잖아!’ ‘그런데 지시연이 왜 여기서 나오는 거지?’ 소미가 조금은 허무한 목소리로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 눈을 가늘게 뜬 시연은 잠이 부족해 나른해 보였다. “의사가 병원에 있는 게 뭐 어때서? 너야말로, 앓고 있는 정신병을 진찰받으러 온 거야?” “지시연, 말이면 다인 줄 알아?!” 눈살을 찌푸린 소미는 눈 밑의 혐오감을 감출 수 없었다. 소미는 어려서부터 시연의 뼛속 깊은 곳까지 배어 있는 그 도도함을 싫어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집이랑 아버지까지 모두 나한테 빼앗긴 주제에, 뭐가 저렇게 기세등등한 거야?’ 그러나 오히려 지금 마음이 불안하고 조급한 것은 바로 소미였다. “남자 친구를 보러 온 거야.”“아.”시연이 문득 뒤를 가리켰다.“고유건 대표님? 저 사람이 네 남자 친구구나.”시연이 길을 터주며 말했다.“그럼 들어가 봐.”이 말을 마친 그녀는 걸음을 내디뎠다.소미는 시연의 뒷모습을 보고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지시연이 이미 유건 씨를 만난 거 같지? 하긴, 의사와 환자가 만나는 건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지.’ ‘하지만... 두 사람
유건은 결국 함정에 빠졌다. 재빨리 걸음을 멈추고 시연을 놓아주었다.“배가 어떻게 아파? 심한...”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시연은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지시연!”유건은 당황하며 몇 걸음에 따라잡아 그녀를 끌어안았다.시연은 눈을 크게 뜨고 온몸이 얼어붙었다. 뭔가 반응할 새도 없이, 유건의 넓고 따뜻한 손이 여자의 눈을 가렸다.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보지 마.”“뭐를요...?”시연은 놀라며 남자의 손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왜 이러는 건데요? 안 가려도 돼요...”‘안 가리면 어떡하라고?!’유건은 앞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노은범이 하진주에게 자기 재킷을 벗어 걸쳐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이걸 시연이가 본다면 얼마나 상처받을까?’“유건 씨!”시연이 저항하자, 유건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너, 으음...”시연이 놀라서 입을 열려는 순간, 유건이 그녀를 덮치듯 입을 맞췄다.‘뭐야?!’시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놔... 윽...”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유건은 더욱 거칠게 여자의 입술을 탐했다.남자의 키스는 점점 깊어졌고, 점점 더 강렬해졌다.시연은 필사적으로 유건의 가슴을 두드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라 손을 번쩍 들었다.찰싹!깨끗한 타격음이 울리며 유건의 뺨이 돌아갔다.유건은 순간 멍해졌다.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며 충격받은 표정으로 시연을 바라보았다.“미안해, 나는...”그는 단지 시연이 은범을 보지 못하게 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키스하고 나서 이성을 잃어버렸다.그녀를 원했고, 가까이하고 싶었으며, 심지어 그녀를 독차지하고 싶었다.시연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마치 혐오스러운 존재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너무나 속상하다는 듯 말했다.“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우리... 그래도 예전에는 부부였고, 이 사람의 포옹과 키스를 받아들일 이유라도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이제 우리는 이혼을 앞둔 상태잖아!
연회장으로 돌아온 유건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그는 소미를 한 번 바라보고 나직이 말했다.“가자, 별로 재미없어.”소미는 아무런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건의 표정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무슨 일 있어요?”“아니.”유건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너무 늦게 자면 두 사람한테 안 좋잖아.”“네.”소미는 미소를 띠었지만 속으로 불안했다.‘어떡하지? 이 사람, 아이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지금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나중에 크게 곤란해질지도 몰라.’“왜 그래?”유건은 소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눈을 가늘게 떴다.“몸이 안 좋아?”“아니에요.”소미는 웃으며 얼버무렸다.“그냥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같이 가자.”“괜찮아요...”“아니.”유건은 단호했다. 그녀가 지금 상태에서 혼자 다니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니 말이다.그는 결국 화장실 입구까지 소미를 데려다주었다.“천천히 다녀와.”“네.”소미는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이 남자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이렇게 다정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겠어?’유건은 조금 떨어진 흡연 구역으로 이동했다.담배를 꺼내 들었지만, 불을 붙이기도 전에 시연이 책가방을 메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았다.‘시연이? 여기 온 이유는 뭘까?시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뭐 찾는 거야?”“네?”시연이 놀라 돌아보았다.유건을 보자, 그녀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여기 B동 6층 맞나요?”유건은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6층은 맞는데, 여긴 B동이 아니라 C동이야.”“아.”시연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두드렸다.“아, 진짜! 또 길을 잘못 들었네요.”“또?”유건은 그녀의 찡그린 얼굴을 보며 무심코 물었다.“길을 자주 잃어버려?”시연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사실, 자주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방향 감각이 떨
[알겠습니다, 형님.]전화를 끊자, 소미가 방으로 들어왔다.“유건 씨.”유건은 담배를 비벼 끄고 손을 저었다.“먼저 들어가 있어. 여기 담배 냄새 나.”담배는 임신한 여자에게 좋지 않으니까.“아, 네.”연기가 가라앉은 후, 유건은 문을 열고 들어가 소미가 건넨 물을 받았다.“좀 괜찮아요?”소미가 다정하게 물었다.“네.”유건은 물을 마시고 소파에 기대었다.“너무 많이 마셨나 봐.” 그는 관자놀이를 가볍게 눌렀다.“머리가 좀 아프네. 그래도 잠깐 앉아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제가 마사지해 드릴까요?”소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건의 곁에 앉으며 소매를 걷었다.남자가 거부할 틈도 없이, 그녀는 말했다.“눈 감아요. 우리 아빠가 술 마셨을 때 자주 해드렸어요.”여자의 손끝이 관자놀이를 누르자, 유건은 거부하지 않았다.“고마워.”소미가 잔잔히 웃었다.“저한테 뭘 그렇게 고마워하세요? 제가 유건 씨를 도로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우린, 앞으로 평생 함께할 사이잖아요.”‘그래, 앞으로도 함께할 사람이지.’유건은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익숙해져야 했다.소미의 손길이 생각보다 편안해서 그는 점점 나른해졌다.“유건 씨?”그녀가 속삭이듯 부르자, 유건은 반쯤 감긴 눈으로 대답했다.“응...”소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가슴이 뛰었다.‘이건 기회야!’‘내 임신은 거짓말이잖아... 시간을 더 끌면 고유건은 의심할 거고, 배를 감출 수도 없을 거야.’‘그 전에 내가 확실히 해야 해. 이 사람과 더욱 가까워지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그녀는 숨을 죽이고 목에서 어깨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유건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남자의 입술과 단 한 뼘도 남지 않은 거리.하지만, 소미는 남자의 입술이 닿기 직전, 유건의 눈이 번쩍 뜨였다.여자가 너무 가까이 있는 걸 깨닫고, 순간 멈칫했다.“소미 씨?”“유건 씨.”소미는 포기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키스해 줘요.”유건은 말이 막혔고, 본능적으로 미간이 좁혀졌다
유건은 회의를 마치고 대표실로 돌아왔다.비서가 다가와 보고했다.“대표님, 장소미 씨가 도착하신 지 좀 되었습니다.”오늘 밤, 유건은 한 연회에 참석해야 했고, 이번엔 소미가 파트너였다.“유건 씨.”소미가 환하게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그냥 앉아 있어.”유건은 손을 살짝 흔들며 무심하게 말했다.“조애린 씨한테 들었는데, 일을 계속할 생각이야?”“네, 그래요.”소미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설명했다.“양 감독님의 작품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게다가, 이미 절반 정도 촬영했거든요. 광고를 비롯한 일정이 과하게 많은 것도 아니고요. 저는 가만히 있는 게 더 싫어요.”잠시 생각하던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미의 배를 힐끗 바라보았다.“몸에 이상 없으면 소미 씨 뜻대로 해. 다만, 배가...”언젠가는 드러날 것이었다.“아, 아직 문제없어요. 사극이라 의상 때문에 티도 안 나고요.”소미는 오늘 넉넉한 원피스를 입고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평평한 신발까지 신은 것을 떠올렸다.유건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양 감독님께 소미 씨 촬영 분량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달라고 이야기해.”“네, 유건 씨 말대로 할게요.”시간이 늦어서 유건은 휴게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소미와 함께 대표실을 나섰다....연회는 해성 호텔에서 열렸다.주차장에서, 노은범이 먼저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고마워.”진주가 미소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은범은 담담히 말했다.“별일 아니야.”그가 어색해하는 모습을 본 하진주는 웃으며 말했다.“너무 긴장하지 마. 우리 약속했잖아? 친구처럼 지내기로.”“알아.”은범은 살짝 찡그렸다.“하지만, 네가 나 때문에 불편해질 수도 있잖아.”“괜찮아.”진주는 고개를 저었다.“이건 너만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엄마도 연관되어 있으니까.”그녀는 남자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았다.“그냥 편하게 가자. 시간이 지나면 부모님들도 우리가 진짜 안 될 거라고 깨달으시겠지.”은범은 한결 편안해졌다.‘나보다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하진주를 힐끗 바라보았다.“내가 보기엔 진주가 참 괜찮은 것 같은데, 정말 아쉬워. 우리 은범이 복이 없는 탓이지, 뭐.”진주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이모, 그런 말씀 마세요. 과찬이세요.”“진주야.”강수희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진주의 손을 잡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지난번에 은범이랑 같이 연극 봤다면서? 그 후로는 어떻게 된 거야? 솔직히 말해 봐. 은범이의 뭐가 마음에 안들었니?”“그게...”진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할까?’지난번에 은범과 미리 조율한 대로, 진주는 연극을 본 후 자기 부모님께 자신이 은범을 향한 마음이 없다고 전했다. 이는 진주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거였고, 은범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강수희가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진주는 은범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모, 은범이는 괜찮은 사람이에요. 다만, 저희는 서로를 잘 모르잖아요...”이 말이 강수희에게 희망을 주고 말았다.“그럼, 좀 더 만나보고 알아가면 되잖아? 제발, 은범이에게 기회를 줘 봐, 응?”“어머니!”은범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다가왔다.그는 먼저 방혜령에게 인사를 건넸다.“이모, 오랜만이네요.”그리고 곧바로 어머니를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어머니, 이모는 어머니를 뵈러 오신 거잖아요.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내가 이러는 건...”“괜찮아.”방혜령이 손을 흔들며 부드럽게 웃으면서 시선을 은범에게 두었다.“이제 많이 컸네? 그런데 너희 엄마 말도 틀린 건 아닌 것 같아.”그녀는 딸을 한번 흘긋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너희, 한 번 본 걸로 판단하기엔 너무 성급하지 않아? 좀 더 만나면서 알아가는 게 맞지 않나?”강수희가 기뻐하며 맞장구쳤다.“내 말이! 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어머니!”“엄마!”은범과 진주가 동시에 소리쳤다.그 모습을 보고, 방혜령과 강수희는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과장실 문 앞에서, 시연은 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형수님.]“지한 씨.”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유건 씨와 잠깐 통화할 수 있을까요?”[당연하죠. 형님도 여기 계세요.]잠시 후, 수화기 너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나야.]유건의 무심한 어조.“심폐 프로젝트팀에 내가 들어가게 된 거, 당신이 한 일이에요?”질문은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개입했다면, 바로 이해할 터였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남자의 답이 돌아왔다.[그래.]전혀 놀랍지 않았다. 시연은 눈을 감았지만, 당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여자의 침묵에, 유건은 비웃듯 말했다.[설마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벌인 일이라는 이유만으로?]시연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멍청하긴...]유건이 낮게 욕했다.[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간다는 게 너한테 어떤 의미인지, 내가 설명해야 하냐?]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팀에 들어가면 분명 시연의 수입도 늘어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경험과 기술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돈 때문이라면 이렇게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지시연.]유건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나와 관계를 끊는 게 중요해? 아니면 네 미래가 더 중요해?]책망과 걱정이 섞인 목소리.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시연도 알고 있었다.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결정을 내렸다.“고마워요, 유건 씨.”유건은 핸드폰을 쥔 채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동시에, 안도감이 밀려왔다.‘다행이네. 이 여자, 결국 받아들였어!’하지만 시연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유건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그리고 그녀는 덧붙였다.“예전엔 내가 잘못했어요. 항상 미안하게 생각해요. 앞으로는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이 잘되길 바랄게요. 그리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유건은 한참 동안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원래라면, 저 여자, 부와 명예를 누려야 마땅해. 하지만 지금은...’...차에 돌아온 지한은 유건이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즉, 유건의 온몸에서 스며 나오는 묵직한 어둠과 슬픔을 느낀 것.‘설마, 또 형수님한테 혼난 건가? 그게 아니면, 이번엔 진짜로 맞기라도 한 건가?’“형님...”“지한아.”유건의 시선이 멍하니 허공을 가로질렀다.“방법을 좀 찾아봐. 시연이가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내가 돈을 건네면, 시연이는 절대 받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연이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지 못하는 건 아닐 거야.’ ‘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시연이가 돈과 명예를 탐하는 여자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지? 정말 한심해!’...시연은 임진아 집으로 돌아온 뒤, 저녁에 양석현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교수님.”[시연아, 내일 오전에 내 사무실로 와. 할 말이 있어.]“네, 교수님.”양석현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다음 날 아침, 시연은 교대 근무도 마치지 못한 채 서둘러 외과로 향했다.양석현은 회진을 마친 후에야 시간을 냈고, 시연을 과장실로 데려갔다.“일찍 왔구나. 앉아.”시연은 긴장한 채 자리에 앉았다.“교수님, 무슨 일이신가요?”‘혹시 내가 1학년 실험 수업을 하는 데에 문제가 생긴 걸까?’“뭘 그렇게 긴장해?”양석현은 일부러 뜸을 들이다가도, 결국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은 소식이야.”그는 서랍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내 시연에게 건넸다.“이걸 작성하면, 너는 공식적으로 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가게 될 거거든.”시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교수님, 이게... 정말 규정에 맞는 건가요?”“규정대로라면, 맞지 않지.”양석현이 웃었다.“원래는 네가 대학원에 합격하면 팀에 넣을 생각이었어. 그 자체도 예외적인 거지만 말이야.” 그런데 아직 대학원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가능하게 된 걸까?양석현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말했
차가 시연 앞에 멈췄다.창문이 내려가더니, 지한이 고개를 내밀고 미소를 지었다. “형수님, 어디 가세요? 타세요, 제가 모시고 갈게요.”시연은 유건을 흘낏 보았다.‘이상하네, 왜 조수석에 앉아 있지?’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또 유건의 차를 타면 점점 엮이게 될 것 같았다.“형수님, 얼른 타세요.” 지한은 차를 움직일 기색도 없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내려서 직접 문 열어드려야 합니까?”“아니에요...”시연은 거절하려 했지만, 정류장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불만을 터뜨렸다.“뭐야, 버스 정류장에 세우면 안 되는 거 몰라?”“그러니까! 버스가 못 지나가잖아.”“빨리 가라고!”“벤틀리네, 저런 차를 태워준다는데 안 탄다고?”“재수 없어.”점점 더 듣기 거북한 말들이 오갔다.어쩔 수 없이, 시연은 차 문을 열고 탔다.“형수님, 어디로 가면 됩니까?”차에 타자마자, 지한이 물었다.시연은 대답 대신 조수석에 앉아 있는 유건을 바라보았다.‘이거 완전 악연 아니야? 왜 자꾸 마주치는 거지?’“형수님.” 지한이 웃으며 유건을 가리켰다. “마침 형님이 차에 계시긴 하지만, 너무 신경 쓰진 마세요. 그냥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셔도 돼요. 어차피 아무 말도 안 할 거니까요.” 시연은 당황했다. ‘이 둘 뭐 하는 거야?’“이제 목적지 말해주실래요?”지한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형수님, 실은 우리도 친구라고 할 수 있잖아요. 제가 그저 한 번 모시고 가는 걸로 부담 갖는 건 아니시죠?”지한의 말에 시연은 결국 마지못해 답했다.“산신당으로 갈 거예요.”지한은 잠시 멈칫하더니, 본능적으로 조수석의 유건을 바라보았다.“거기서 볼일 있으세요?”“네.”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좀 살 게 있어서요.”‘거기서 뭘 사려는 거지?’산신당은 G시보다 더 오래된 곳일지도 모른다. 사찰뿐만 아니라 재래시장도 있어, 평범한 서민들이 주로 찾는 곳이었으니 말이다.분명 번잡하고 활기차지만, 고급스
시연은 믿을 수 없었다.‘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는 우리한테 단 한 번도 아버지 역할을 해주지 않던 사람이,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한다고?’지동성은 딸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다시 한번 말하마. 우주를 ‘웰스’로 보내는 돈은 이 아빠가 다 낼게.” 시연은 멍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닌데, 이해할 수 없었다.“왜요?”지동성은 한숨을 쉬며 난감한 듯 말했다.“아버지가 자식한테 돈을 주는 데에도 이유가 필요하니?”‘이유가 필요하냐고? 그럼 그때 우주의 치료비를 끊고,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건 누구였더라?’‘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진 당신이 그 중심에 있던 거 아니었나?’ 시연은 믿을 수 없었다. 곧이어, 지동성이 말을 이었다.“시연아, 곧 다가올 아빠의 생일에 네가 꼭 와줬으면 좋겠구나.”시연은 또다시 얼어붙었다.‘오늘따라 무슨 일이 이렇게 많아?’무심결에 튀어나왔다.“무슨 뜻이에요? 도대체 뭘 하려는 거죠?”“흠.”지동성이 가볍게 기침했다.“아빠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앞으로 몇 번이나 생일을 맞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단다. 가족끼리 모여서 밥 한 끼라도 같이 먹고 싶어.” ‘뭐 이런 헛소리가 다 있어?’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냉소를 흘렸다.“아내도 있고 딸도 있잖아요. 가족이랑 매일매일 함께하잖아요?”“시연아.”지동성이 딸의 말을 끊고, 불만스럽게 고개를 저었다.“너와 우주도 아빠의 자식이야.”그는 모델 조립에 열중하고 있는 우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아빠의 생일에 와준다면, 네가 나를 아버지로 인정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게. 그때가 되면 우주의 치료비는 얼마가 되든 내가 책임지마.” ‘우주를 빌미로 협박하는 거야?’시연은 본능적으로 떠올렸다.‘로얄호텔에서의 그때도...’그녀는 경계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예요?”딸의 반응을 본 지동성도 깨달은 듯했다. 잠시 스치는 후회의 눈빛.“아빠가 뭘 할 수 있겠니? 그냥 생일을 함께 보내고 싶은 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