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울대 뒷거리의 포장마차는 밤에 가장 시끌벅적했다.“사장님, 김치볶음밥 2인분 주세요!” 진아가 한 손으로 시연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배를 비비며 불평했다. “다 우찬이 때문이야. 그 녀석 때문에 내가 밥을 먹는 시간이 지체된 거라고!” 시연도 배가 고파서 침을 삼켰다.“진아야, 나는 호두과자가 먹고 싶어.” “그래! 조금 있다가 가서 먹자.”입에서 나오는 대로 승낙한 진아는 갑자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의심스럽다는 듯 시연을 훑어보았다. “요즘 먹는 양이 부쩍 많아진 것 같다? 한밤중에도 많이 먹는 것 같던데... 살찔까 봐 무섭지는 않아?”시연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란함을 느꼈다. ‘그래, 내가 많이 먹기 시작했다는 걸 나도 느끼던 참이었어. 아마... 배 속에 있는 작은 녀석 때문이겠지?’ “볶음밥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진아가 핸드폰을 꺼내 결제하려 했다. 시연이 급히 말했다.“얼마예요? 제가 입금해 드릴게요.” “됐어...”“내가 입금할 거야!”겨우 1초도 티격태격하지 않았는데, 옆에서 낮고 온화한 목소리로 끼어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제가 계산할게요.” “누구지?”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마주한 두 사람은 즉각 멍해졌다. 빛과 그림자가 드리워진 노은범의 출중한 옆태는 마치 신처럼 보였다. 시연은 무의식적으로 그를 저지하는 반응을 보였다.“안 돼! 하지 마...” 하지만 결제 완료 알림은 은범이 이미 지불에 성공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은범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들을 마주했고, 핸드폰을 보이며 말했다.“이미 했어.”하지만 인상을 찌푸린 시연은 별로 기뻐하지 않는 것 같았다. “밥 한 끼일 뿐이잖아?” 은범은 마음속의 두근거림과 불안을 억지로 눌렀다.“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작은 호의를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또 거절하면 본인을 지나치게 신경 쓴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그래, 고마워.”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상을 조금 풀
실시간 검색어 1위, 가장 끝에 적힌 붉은색의‘화제’라는 글자가 눈에 띄게 두드러져 있었다. 서버가 아주 느린 탓에, 지시연은 한참 기다리고서야 그 기사를 클릭할 수 있었다. 한 단락의 문장 뒤에는 영상까지 첨부되어 있었다.그것은 한식당‘맛나리’의 입구에서 찍힌 것이었는데, CCTV 카메라 각도는 정확하지 않았다. 고유건이 입구를 나오자, ‘맛나리’의 발렛 파킹 직원이 그를 대신하여 문을 열어주는 듯하더니 갑자기 그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2초 동안 멍하니 있던 고유건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듯했는데, 이윽고 순식간에 그 발렛 파킹 직원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말았다. 영상은 이렇게 끝이 났는데, 시연의 마음을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휴게실에 있던 사람들이 분분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엄청 가볍게 찔렀어!”“역시 재벌 집안은 복잡하다니까?!”“고유건이 어느 병원으로 옮겨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아주 멋있다고 들었는데...” 수간호사가 갑자기 문 앞에 서서 손뼉을 쳤다.“자, 다 먹었어요? 다 먹었으면 어서 움직입시다!” 모두 바삐 가십을 멈추었다. 시연도 일어나서 도시락을 치웠다. “지 선생님.”수간호사가 그녀를 부르며 말했다.“119에서 전화가 왔었는데, 칼에 찔린 환자를 보낼 테니까 진찰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칼에 찔린 환자?’‘설마, 고유건?’“하지만...”시연이 머뭇거렸다.“양석현 교수님께서는 아직 수술실에 계세요. 교통사고로 다친 환자의 수술이 아직 끝나지 않았거든요.” “알아요.”수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내가 이미 수술실에 연락해 봤는데, 양 교수님께서 지 선생님께 진료를 부탁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수간호사가 시연을 향해 격려가 서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너무 긴장할 거 없어요. 양 교수님이 진찰하라고 하신 건, 지 선생님을 믿는다는 거니까요. 물론 우리도 마찬가지고요.”‘말은 그렇지만...’“알겠습니다.”시연은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재빨리 방호복으로 갈아입은 지시연이 응급
유건이 시연을 힐끗 보았다.“상관없어! 나는 너여야만 한다고!” 손을 놓지 않는 유건은 약간의 억울함이 있는 것 같았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 어린애처럼 고집을 부리는 거지?’ 시연은 그를 지우주라고 여기며 어르고 달랬다.“양 교수님은 저의 선생님이세요. 그분은 전국적인 의학계의 권위자이시고요...” “그 사람이 누구든! 나는 그 사람 못 믿어.”무표정한 유건은 대단히 매서워 보였다. ‘말이 안 통하잖아?’ 시연이 어찌할 바를 모르던 찰나, 지한이 들어왔다. 지한이 그녀에게 말했다.“지시연 씨, 부탁 좀 드릴게요. 요즘 형님께서는 계속 기괴한 일에 시달리셔서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에요.”“그런데...”시연은 이해하지 못했다.“왜 저는 믿으시려는 거예요?” ‘나를 아주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흥.”유건은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으나, 여전히 높고 매서운 말투로 말했다. “너를 믿는다는 게 아니야! 너 하나 죽이는 것쯤은 개미를 죽이는 것처럼 간단하다고!” “...”‘그냥 내버려두고 싶어.’하지만 사람을 구하는 것이 의사의 임무였기에 시연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그래요.” ...수술실 안.유건은 이미 마취제를 맞고 깊은 잠에 빠졌다. 수술복으로 갈아입은 시연이 수술대에 오르기 전에 간호사에게 물었다.“양 교수님의 수술은 끝났나요?”“아직이요.”“양 교수님께서 지금 긴급한 상황이라고 하시면서 지 선생님의 실력을 믿는다고 하셨어요. 제게는 선생님께서 안심하고 수술할 수 있도록 도우라고 하셨고요. 양 교수님은 지 선생님의 선생님이시잖아요. 혹시라도 무슨 문제가 있으면 양 교수님께서 책임지실 거예요.”간호사가 말했다. 마음이 따뜻해진 시연은 걱정이 놓이는 듯했다. 유건의 창백하고 잘생긴 얼굴을 마주한 그녀가 넌지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별문제 없을 거예요.” “수술, 잘 끝날 거예요.” ...날이 밝자, 시연은 회진하러 왔다. “지시연 씨.”지한이
시연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장소미를 응시하며 말없이 있었다. ‘장소미는 고유건의 여자 친구야. 조만간 만나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시연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소미 역시 마음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어젯밤, 소미도 실시간 검색어를 보았는데, 그때 곧바로 병원에 오려고 했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지한은 상황이 여의찮다며 기다리라고 할 뿐이었다. 결국 소미는 밤새워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소식을 들을 수 없었고,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아침부터 그녀 홀로 달려온 것이었다. 그러나 고유건이 아닌 지시연을 먼저 만나고 말았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던가. 소미는 크게 겁을 먹었다.그녀가 억지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병실 입구의 환자 명패를 훑어보았다.‘유건 씨의 병실이 맞잖아!’ ‘그런데 지시연이 왜 여기서 나오는 거지?’ 소미가 조금은 허무한 목소리로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 눈을 가늘게 뜬 시연은 잠이 부족해 나른해 보였다. “의사가 병원에 있는 게 뭐 어때서? 너야말로, 앓고 있는 정신병을 진찰받으러 온 거야?” “지시연, 말이면 다인 줄 알아?!” 눈살을 찌푸린 소미는 눈 밑의 혐오감을 감출 수 없었다. 소미는 어려서부터 시연의 뼛속 깊은 곳까지 배어 있는 그 도도함을 싫어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집이랑 아버지까지 모두 나한테 빼앗긴 주제에, 뭐가 저렇게 기세등등한 거야?’ 그러나 오히려 지금 마음이 불안하고 조급한 것은 바로 소미였다. “남자 친구를 보러 온 거야.”“아.”시연이 문득 뒤를 가리켰다.“고유건 대표님? 저 사람이 네 남자 친구구나.”시연이 길을 터주며 말했다.“그럼 들어가 봐.”이 말을 마친 그녀는 걸음을 내디뎠다.소미는 시연의 뒷모습을 보고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지시연이 이미 유건 씨를 만난 거 같지? 하긴, 의사와 환자가 만나는 건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지.’ ‘하지만... 두 사람
지금 유건은 상의가 반쯤 벗겨져 있는 상태로 여인을 품에 안고 있었다. 정말 아찔한 장면이었다.다만, 유건의 신분 때문에 누구도 감히 뭐라고 할 수 없었다.모두가 아무 일도 없는 듯이 행동하며 각자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시연은 특히 침착하게, 교대할 의사에게 유건의 상태를 설명했다.“칼에 찔려 부상을 당한 환자입니다. 복부 3.2센티미터 깊이로 칼이 들어갔지만, 장기 손상은 없습니다...”시연이 무슨 말을 하든 유건은 신경 쓰지 않았다.소미를 부축하면서 그는 온몸의 신경이 바짝 곤두서는 것 같았고, 심지어 약간의 죄책감까지 느끼면서 시연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비록 그가 처음부터 결혼 상대가 있다고 말했지만, 시연에게 소미를 들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기분이 뭔가 묘했다.마치 바람피우다 아내에게 딱 걸린 찌질한 남자가 된 기분이었다.“고유건 님, 푹 쉬세요.”교대가 끝나자 의료진은 하나둘씩 바뀌었다.유건은 처음 병원에 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시연이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유건 씨.”그가 꼼짝도 하지 않고 입구를 주시하는 것을 보고 소미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어디 불편해요? 다친 데가 많이 아파요? 의사 부를까요?”유건의 신경이 다시 곤두섰고, 안색이 변했다.“아니, 괜찮아요.”유건은 단지 스스로에게 놀랐을 뿐만 아니라 화가 났다. ‘왜 이렇게 양심에 찔리지?’‘허울뿐인 부부 사이인데, 누구를 만나든 외도는 아니지.’소미는 오전에 촬영 일정이 있었다. 어렵게 캐스팅된 유명한 감독 양호천의 영화라 빠질 수 없었다.주지한이 오고 나서야 소미는 아쉬워하며 떠났다.“그럼 푹 쉬어요, 시간 날 때 다시 올게요.”“그래요, 가봐요.”이와 동시에 지한을 따라온 두 젊은 남자들이 있었다. 둘은 매우 닮았고, 모두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었다.“형님.”지한이 설명했다.“이런 일이 생길까 싶어 민환과 기환을 불러들였습니다. 이들이 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시연은 치료에만 집중하고 유건을 전혀 보지 않았다.유건이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너 지금 나한테 화났어?”“예?”시연은 치료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화났느냐고요? 제가요? 고유건 씨에게? 그럴 게 있나요?”유건은 목소리가 담담하고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니면 다행이고.”“아.”시연은 여전히 유건이 질문한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고 허리를 굽혀 상처에 삽입한 튜브를 짰다.유건이 물었다.“이 튜브는 언제 빼나? 매우 불편한데.”“그렇게 금방은 안돼요.”“쉽게 말하면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다 배출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복막염으로 더 위험해질 수 있어요.”이 말을 끝으로 시연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이 여자가 왜 이렇게 조용해?’유건은 반쯤 눈을 감고 말했다.“나에게 할 말 없나?”“네?”시연이 당황해서 대답하려는 순간 유건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치료 이야기는 그만 해.”유건의 말에 지시연은 깜짝 놀라서, 긴 속눈썹을 떨며 웃기 시작했다.“한마디 하자면, 여자 친구가 아주 예쁘더라고요.”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유건은 지시연을 조롱했다.“위선적이네.”“그래요.”시연은 손을 들며 유건의 말을 인정했다.“진심은 아니었어요. 사실, 제가 더 예쁘잖아요.”유건은 눈빛이 미묘하게 변하며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이었다.“참 뻔뻔한 사람이네, 이렇게 자신을 칭찬하는 법도 있나?”이 말에 큰 의미가 있지는 않았지만 시연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제가 뻔뻔스러운 거, 벌써 알고 있었잖아요?”시연의 답답한 태도에 유건은 화낼 기분도 사라져버렸다.“그렇게 쳐다보지 마요.”시연은 고개를 숙이고 약을 갈아주면서 마스크 너머로 말했다.“우리 결혼이 계약 결혼인 거 나도 알아요. 고유건 씨가 누구와 만나는지 간섭할 권리도 없고요. 사랑하고 싶은 사람 계속 사랑하시고, 만나고 싶은 사람 계속 만나세요.”그녀는 원래 고유건과의 결혼을 간절히 원하던 장소미를 혼내주고 싶었을 뿐,
점심시간에 시연은 구내식당에서 식사 후 돌아오다가 복도에서 유건이 정기철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걷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나쁘지 않네요.”시연은 환자를 격려하듯 유건을 칭찬하며 말했다.“몸 상태가 정말 좋네요, 벌써 일어나 걸을 수 있다니. 이렇게 잘 움직이면 회복이 더 빠르겠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요.”“예, 선생님.” 정기철이 아주 진지하게 대답했다.시연이 막 가려고 하는데 유건이 불러세웠다.“잠깐만.”“무슨 일 있어요?” 지시연이 몸을 돌렸다.“너...” 유건은 뜻밖에도 좀 쑥스러워했다.“뭐 좋아해?”“네?”밑도 끝도 없는 고유건의 질문에 시연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의 큰 눈을 깜박이자 속눈썹이 살랑거렸다.“갑자기 못 알아듣는 척은.”유건이 불만스럽게 말했다.“고맙다는 말 못 들었다며? 한 회장님 일까지 다 빠뜨리지 않고 너에게 감사표시 할게.”시연은 이제야 고유건의 말을 이해했다.“감사 표시요?”그녀도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특별할 것 없어요. 나도 다른 여자들이 좋아하는 걸 좋아해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핸드폰이 울렸다.그녀는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네, 네. 이미 번역은 다 마쳤어요. 점심시간이니까 바로 보내 드릴게요. 네, 네.”전화를 끊었는데 유건이 아직 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또 무슨 일 있어요?”“뭐가 그렇게 바빠?” 유건은 대답 대신 도리어 다른 질문을 했다.시연이 대답했다.“통번역 아르바이트를 찾았는데 말할 시간 없어요. 빨리 보내야 해요.”말을 마치고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로 들어갔다.혼자 남겨진 유건은 상처를 가볍게 누르며 머릿속에 물음표를 가득 채웠다‘아르바이트?’‘BLUE에서 하던 아르바이트를 계속 방해하니까 다른 아르바이트를 찾느라 바빴는데, 정말 찾은 건가?’‘번역?’‘그래서, 열심히 돈을 벌고 있는 거야?’‘도대체 왜?’‘돈 많은 남자를 찾는 거 아니었나?’‘지금까지 있었던 일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
[시연아! 흑흑.]“무슨 일이야?” 시연은 어쩔 수 없이 실소를 터뜨렸다.“너 요즘 울음 연기 성의가 점점 부족하네.”성빈은 즉시 가짜 울음을 거두었다.[나 지금 너무 급해. 소개팅 중이야, 빨리 와서 나 좀 구해줘!]시연은 눈을 굴리며 말했다.“이번에는 진아 차례 아니야?”[진아가 지금 통화가 안 돼. 이 오빠한테는 지금 너밖에 없다! 제발 나 좀 살려줘, 기다릴게!]“여보세요?”상대편은 이미 전화를 끊은 상태였다.시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성빈의 집안에서는 뭐가 그리 급한지 아직 어린 성빈에게 1년 내내 맞선을 주선해 왔다.그러나 성빈은 전혀 원하지 않았다. 매번 시연이나 진아에게 자기 여자친구인 척 해달라고 해서 소개팅을 망치곤 했다.시연은 가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가야 했다.핸드폰이 울렸다. 성빈이 보낸 현재 위치를 알리는 메시지였다.‘나도 모르겠다, 일단 가자. 친구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바로 퇴근 시간이라 길이 막혀서 시연의 도착시간이 상당히 늦어졌다.핸드폰에서 성빈이 재촉하는 메시지가 내내 멈추지 않았다.약속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시연은 숨을 한번 깊이 들이마시고 가방에서 안약을 꺼내 두 눈에 각각 한 방울씩 떨어뜨렸다.레스토랑에 들어가서 둘러보며 성빈이 어디 있는지 확인했다.시연은 곧장 성빈에게 달려갔다. 그의 맞은편에는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청순한 외모를 가진 그녀는 어느 곳을 보든 부잣집 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숨을 깊이 들이마신 시연은 두세 걸음 앞으로 다가가 테이블 위의 물잔을 집어들고 성빈에게 확 부어버렸다.“젠장, 누구야?”머리와 얼굴이 흠뻑 젖은 성빈은 본능적으로 소리쳤다.“감히 누가 나에게 물을 끼얹어?!”“으흑흑...”시연의 연기는 서툴렀지만 다행히 적절한 타이밍에 안약의 도움으로 눈물을 흘렸다.그 여자를 가리키며 울먹이며 말했다.“진성빈! 똑똑히 설명해봐, 이 여자는 누구야?”“아이고.”성빈은 갑자기 싱글벙글 웃으며 시연을 와락 끌어안았다
시연보다 일찍 도착한 유건 일행은 이미 말을 타기 위한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주정빈과 유강석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고, 유건은 시연을 주시하며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를 본 부지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왜 갑자기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말을 타자고 하나 했더니, 알고 보니 여기 우리 고 대표님의 아내가 계시네.” 유건은 지하의 농담에 신경 쓰지 않고,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다 멈췄다. 지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래? 아내가 방이 없어서 곤란해하는 거 보고도 안 도와줄 거야?” ‘도와주라고?’ 유건의 입술에 미소가 살짝 번졌지만, 곧 자리를 떴다. ‘내가 도와주고 싶은데... 옆에 딴 남자가 이미 있지.’ “시연아.” 그때, 은범이 차를 주차하고 시연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시연은 입을 삐죽 내밀며 방을 예약하지 못한 일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걱정하지 마. 작은 문제야.” 은범은 우주를 그녀에게 맡기고 말했다. “내가 해결할게. 걱정하지 마.” 그가 나서자마자, 문제는 금세 해결되었다. 은범은 두 장의 방 키를 들고 시연에게 흔들며 말했다. “다 됐어.” 그는 짐을 들고 설명했다. “내가 VIP 카드가 있어서 사전 예약 없이도 가능해.” 시연이 여전히 입을 삐죽 내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은범은 부드럽게 말했다. “왜 화가 나 있어?” 시연은 투덜거리며 말했다. “성빈이도 못 오게 됐어...” 알고 보니 그 일 때문에 화가 난 거였다. “괜찮아.” 은범은 미소 지으며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우리는 우주를 위해 온 거잖아. 우주가 기뻐하는 게 가장 중요해. 나머지는 사소한 문제야.” 시연은 그의 말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미소를 지었다. “응.”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분위기가 훈훈했다. “우주 손 잘 잡고, 방에 짐부터 놓으러 가자.” “그래.” 이 광경을 목격한 지하는 깜짝 놀라며 유건을 쳐
며칠 후, 노은범은 GP그룹에 갔다. HUA테크는 GP그룹의 요구에 따라 절차를 밟았고, 오늘은 고유건을 만나러 온 날이었다. 유건의 비서가 은범을 작은 회의실로 안내했고, 은범이 막 자리에 앉자 유건이 도착했다. 은범은 일어나 인사했다. “고 대표님.” “노 사장님.” 유건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악수했다. “앉으세요.” 두 사람은 짧은 인사 후 바로 협력에 대해 자세히 논의했다. 유건은 은범의 능력에 매우 만족했고, 바로 계약을 결정했다. “협력하게 되어 기쁩니다.” “저야말로 고 대표님께서 저희를 선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협력 잘 부탁드립니다.” 관례에 따라 저녁에는 식사 자리가 마련되었다. 유건이 초대했다. “노 사장님, 저녁 식사 같이하시죠?” 은범은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고 대표님의 초대에 감사드립니다만, 잠시 후에 일정이 있어서 오늘 저녁엔 G시에 있지 않습니다. 죄송하지만, 다음에 제가 장소를 정해서 고 대표님을 초대하겠습니다.”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은범이 떠나자마자, 유건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늘은 금요일인데, 노은범이 저녁에 G시에 없다고? ‘CLOUD’는 G시 밖에 있는 곳이야. 시연도 오늘 저녁에 떠난다고 말했는데... 그러니까 이 여자는, 노은범과 함께 놀러 가는 거야?!!!’ 핸드폰이 울리자 유건은 짜증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빨리 말해!” 부지하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렇게 거칠게 나올 것까진 없잖아! 누가 너 건드렸어? 저녁에 우리랑 같이 안 갈 거야?] 유건은 불쾌한 기분에 답했다. “너희들이랑 술 마시고 카드 게임하는 게 그렇게 재밌겠냐?” 지하는 웃으며 물었다. [그럼, 고 대표님. 뭐가 재밌는지 말씀해 보시죠?]유건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휴가 가자. CLOUD가 좋겠군.” ... 은범은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뭐?” 강석은 갑작스럽게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누가 연애 경험이 많다고? 나에게 그런 딱지 붙이지 마! 그 여자들은 다 내 여자 친구가 아니라 그냥 친한 여사진들이라고!” 나머지 세 사람은 가차 없이 눈을 굴리며 그를 향해 빈정거렸다. “헤헤.” 강석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개의치 않는 듯 웃었다. “애 있는 여자는 한 번도 만난 적 없지...” “하하!” 정빈이 강석을 비웃으며 말했다. “그건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거지. 우리 강석 도련님이 만약 마음에 들었다면, 애가 있든 없든 상관없지. 그렇지?”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두 사람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강석은 웃으며 말했다. “그게 뭐 어때서? 요즘 같은 시대에 애 하나 때문에 평생을 묶어두겠어?” “네 말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해.” 그동안 조용히 있던 지하가 끼어들며 말했다. “지금 시대가 어떻든, 옛날에 많은 나라들은 왕의 어머니도 딱 한 번 결혼해서 아이를 낳기도 했지만, 결국 또 다른 군주와 결혼해 많은 자식을 낳았잖아.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고.” 지하는 유건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진짜 사랑한다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유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깊은 눈빛 속에 뭔가를 감추고 있었다. 마음이 복잡해진 유건은 이내 흥미를 잃고, 밤 10시도 되기 전에 자리를 떠났다. 본가로 가는 길에 그는 문득 생각했다. ‘시연은 퇴근했을까?' 그때, 그는 우연히 버스에서 내리는 시연을 보았다. 이곳에서 집까지는 거리가 꽤 있었고, 버스가 다니지 않는 길이었다. 유건은 아무 말 없이 차를 그녀 가까이로 몰고, 창문을 내렸다. “타.” 시연은 남자가 유건인 것을 보고는, 거절하지 않고 차에 올랐다. “정말 우연이네요.” 차에 앉자마자 시연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녀는 메시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유건은 그녀를 슬쩍 바라보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유건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눈빛이 어두워졌다. “맞아. 왜?” “감사해요.” 시연은 그를 바라보며 매우 진지하게 말했다. “정말, 감사해요. 어릴 때부터 저에게 잘해준 사람은 거의 없었거든요.” 유건은 가슴속이 찌릿하게 울리며, 그 느낌이 온몸에 퍼졌고, 겨우 입꼬리를 억누르며 말했다. “흥, 그래.” “그런데...” 시연이 무언가 더 말하려 했으나,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 “현진아? 내 친구 외투가 너에게 있다고? 알았어... 아, 그리고 아직 너한테 고맙단 말도 못 했네. 그날 밤, 내 친구를 위해 침대를 양보해 줘서 고마워. 너무 늦었고, 비까지 쏟아져서 호텔을 못 잡았거든. 너 주사실에서 자느라 아주 피곤했지? 나중에 밥 한번 살게.” 시연은 통화하면서 유건에게 지하철역을 가리키며 자신이 바쁘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고는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뛰어 들어갔다. “천천히 가!” 유건은 그녀가 그 말을 들었는지 확신하지 못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의 입꼬리는 결국 올라가고 말았다. ‘이 여자가 결국 나한테 고마워하고, 내 마음을 알고 있었네!’ 게다가, 방금 시연이 전화에서 말한 내용을 유건도 아주 분명히 들었다. ‘그날 밤, 비가 쏟아지던 날, 그건 바로 노은범이 왔던 날이 아닌가?’ ‘이 여자는 노은범과 같은 방에서 자지 않았어!’ ‘이게 뭘 의미하는 거지? 그러니까 노은범은 지시연을 버렸었고, 두 사람은 아직 화해하지 않은 상태이야! 흥!’ 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마음속 깊이 감추고 있는 생각을 들키지 않으려 했다. 아무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 태산요양병원. 은범과 시연은 문 앞에서 서 있었다. 방 안에서는 CA국에서 온 전문가들이 우주를 검사하고 있었다. 시연은 불안한 마음으로 손을 꼭 쥔 채 떨고 있었다. “시연아.” 은범은 시연의 옆에 서서, 그녀를 꼭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
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힘차게 두근거리는 심장은 그녀의 진심을 속일 수 없었다. 전혀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에게 잘해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얼마 되지 않는 만큼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누군가 시연에게 친절을 베풀면, 그 작은 호의조차도 그녀는 감사하게 여기며 마음에 새겼다. 그리고 남이 자신에게 베푼 작은 호의를 열 배로 갚으려 했다. ... 강울대학교병원을 나선 시연은 고씨 가문의 본가로 돌아갔다. 고상훈은 매우 기뻐하며 곧바로 유건에게 전화를 걸었고, 시연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며칠 동안 네가 없어서 그런지, 우리 유건이도 뭘 그렇게 바쁜지 하루 종일 얼굴을 못 봤어. 마침 잘 됐어, 저녁에 같이 밥을 먹자.” 그러나 전화를 걸자, 유건은 말했다. [할아버지, 저 바빠서 못 돌아갑니다.] “뭐가 그렇게 바빠?” 고상훈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을 것 아니냐? 더군다나 시연이가 출장 갔다가 일주일 만에 돌아왔는데...” [할아버지, 회의가 있어서 이만 끊을게요.]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고상훈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이런 고얀 것! 정말 무례하군!” “할아버지.” 시연은 속으로 알고 있었다. 유건이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화내지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오늘 저녁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할아버지랑 밥도 먹고, 같이 바둑도 두고, 불경도 읽어드릴게요. 괜찮죠?” “좋지, 좋지.” 순식간에 고상훈은 미소를 지으며 기뻐했다. 그날 저녁, 유건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시연은 소파에서 눈을 떴다. 그때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고유건이 돌아왔나?’ ‘침대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니, 아마 아침에 돌아온 것 같네.’ 물소리가 멈추고, 유건은 욕실에서 나와 곧바로 옷방으로 들어갔다. 마치 그녀를 보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정
GP그룹 회의실. 주지한은 서류 폴더 하나를 펼쳐 유건 앞에 놓았다. 최근 GP그룹에서 추진 중인 프로젝트에 기술 협력 파트너가 필요한데, 현재까지 적합한 후보가 없는 상태였다. 이번에 제출된 것은 두 번째 후보군이었다. 유건은 한눈에 서류를 훑었다. [HUA테크, CEO 겸 총괄 엔지니어, 노은범]유건의 손가락이 ‘노은범’이라는 세 글자를 톡톡 두드렸다. 지한이 말했다. “형님, 노은범은 비록 최근에 귀국했지만, 해외 유학 시절 뛰어난 성과를 냈고, 여러 번 과학 기술상을 수상한 인재입니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노은범은 매우 드문 전문가였다. 유건은 사업가이자 남자였다. 사업상의 문제를 감정과 잘 분리했고, 또한 사적인 감정으로 인해 일을 그르치지 않았다. “좋아, HUA테크와 절차를 진행해.” 저녁에 유건은 부지하 등과 술자리 약속이 있었다. 유건은 노은범에 관해 이야기하며 물었다.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게 있어?” “노씨 가문의 도련님 말이지.” 주정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그거 못 들어봤어? 사람들이 G시 제일 미남이라고 평가했잖아.” 유건의 머릿속에 노은범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유건조차도 은범이 그 ‘칭찬’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지시연은 노은범의 외모에 반한 거야?!’ 유건은 무의식적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답답한 숨을 내쉬었고, 웅얼거리듯 말했다. “너 여자냐? 누가 외모 얘기를 물었어?” “그럼 뭘 묻는 건데?” 유강석은 웃으며 말했다. “은범 도련님은 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았고, 별다른 나쁜 습관도 없어. 너처럼 남녀 관계도 깨끗하고...” 하지만, 그도 말을 돌려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너는 예전 얘기고, 지금은 본처와 첩을 두 손에 잡고 있는 상태잖아!” 유건은 침묵했다. ‘결국 노은범이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었던 거야?’ ‘좋네.’ ‘지시연도 눈이 멀진 않았고, 원하
문이 열리자, 노은범의 부드럽고 우아한 얼굴이 드러났다. 방금 샤워를 마친 그는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고, 상체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서 있었다. 하체는 시연이 방금 김현진에게서 빌린 널찍한 운동복 바지만 입고 있었다. 유건은 그를 가만히 응시하며,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 대표님.” 은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오신 걸 보니, 시연이 찾으러 오셨나 봅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공기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은범은 말했다. “시연이 지금 욕실에 있어요.” 그는 이 말에 오해의 여지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남자의 직감으로, 은범도 유건이 시연에게 남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고유건은 단순히 시연의 환자가 아니었어...’ 유건의 얼굴은 무표정하고 차가웠다. 지금 이 상황은 그를 화나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유건은 억누르고 있었다. 그는 그저 낮게 말했다. “시연이 어디 있지? 직접 만나야겠어.” “은범아, 누구야?” 바로 그때, 시연이 나와 은범의 어깨 너머로 이쪽을 보며 걸어왔다. 유건은 은범을 무시하고, 시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고유건 씨?” 시연은 놀라며 물었다. “여긴 왜 왔어요?” ‘이 남자는 조금 전까지도 장소미와 함께 있던 게 아닌가? 두 사람이 끌어안고 있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따라와.” 유건은 시연의 손목을 잡고 이끌려 했다. 그러나 은범이 유건을 막아섰다. “고 대표님, 이 손 놓으세요.” 그 순간, 팽팽한 긴장감이 퍼져나갔다. 유건은 비웃으며 가볍게 콧방귀를 뀌고, 시연에게 물었다. “나랑 갈 거야, 말 거야?” 시연은 갈등을 피하기 위해 말했다. “은범아, 고 대표님과 몇 마디만 하고 올게. 걱정하지 마.” 시연이 이렇게 말하자, 은범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놓아주며 당부했다. “만약에 너를 괴롭히면 바로 소리 질러.” “알았어..
“설마 우리 우주를 위해서?” 시연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물론이지.] 은범은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너와 약속한 일은 반드시 지킬 거야.] 시연은 이 일이 우주에 관한 것인 만큼 더는 따지지 않았다. “그럼 도착하면 전화해.” [알겠어.]전화를 끊고, 은범은 미소를 지었다. 비록 시연이 우주 때문에 연락을 받았을 뿐이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시연이 자신을 의지하게 만들고, 결국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 비는 점점 더 굵어졌다. 진아는 문 앞에 서 있는 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비가 쏟아지네.” 그러더니 진아도 궁금한 듯 물었다. “누구 기다리는 거야? 너 정말 남편 기다리는 망부석처럼 보이는데...”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시연이 뒤돌아보며 대답했다. “나 좀 나갔다 올게.” 시연은 1층 공터로 내려갔고, 그곳에서는 은범이 차를 세우고 문을 열고 나오는 중이었다. 시연은 그를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됐어?” 은범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젖어 있었고, 얼굴과 옷에는 진흙이 잔뜩 묻은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은범은 웃으며 대답했다. “오는 길에 타이어가 터져서 타이어를 갈아 끼우느라 이렇게 됐어.” 시연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 내 잘못이야.” “그렇게 말하지 마.” 은범은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진 걸 보고 말렸다. “내가 창우면에 오지 않았다 해도 타이어는 터졌을 거야.” 그는 시연의 뒤를 힐끗 보며 말했다. “나 안으로 들어가도 돼?” “아, 맞다!” 시연은 그를 손짓해 재촉하며 말했다. “어서 들어와!” “그래.” 시연은 그를 따라 2층으로 데려갔다. “여기는 병원 직원 숙소야. 좀 낡고 허름하지만, 화장실이 있으니까 샤워는 할 수 있어.” 말을 나누며 두 사람은 시연의 방에 도착했다. 시연은 문을 열며 말했다. “나랑 진아는 한방을 써.”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면서, 유건은 시연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유건의 전화를 전혀 받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하자, 시연은 의료팀과 함께 물품을 정리하고, 차에 싣고 출발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원래 그녀는 마지막 차로 떠나려 했으나, 이제 그럴 필요도 없었다. 시연의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 유건의 이름을 보자, 시연은 아무 말 없이 핸드폰을 ‘비행기 모드’로 바꿨다. 그 순간, 유건은 차를 몰고 병원으로 들어왔지만, 이미 첫 번째 의료 차량이 출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여기 주차하시면 안 됩니다. 중앙 주차장으로 가세요.” 유건은 어쩔 수 없이 차를 돌려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서둘러 응급실로 향하며 물었다. “지시연 선생님 계신가요?” 접수대의 간호사는 시연과 친분이 있었다. “지 선생님이요? 방금 의료지원 차량과 함께 떠났어요.” “떠났다고요? 언제요?” “저기요!” 간호사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방금 출발한 저 차요...” 간호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건은 벌써 달려 나갔다. “시연아! 지시연!” 막 출발한 차량은 병원 문을 막 나섰고, 차의 속도는 아직 빠르지 않았다. 차 안에서는 누군가가 차를 쫓아오는 것을 발견했다. “어? 저 사람 우리 차를 쫓아오는 거야?” “당연하지! 엄청나게 빨리 달리잖아!” “오, 키가 크네. 최소 190cm는 되겠어. 정말 잘생겼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다들 한 번 봐봐. 저 사람은 누구를 쫓아오는 거야?” “맞아, 맞아. 일단 모두 일어나서 누굴 쫓는지 알아보자고. 뭔가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차 안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운전기사도 일부러 속도를 늦췄다. 하지만 시연만은 차에 오르자마자 음악을 틀고 이어폰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는 차 안의 소란을 전혀 알지 못했다. 차가 병원을 빠져나가 큰길로 들어서려 할 때, 운전기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