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은 치료에만 집중하고 유건을 전혀 보지 않았다.유건이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너 지금 나한테 화났어?”“예?”시연은 치료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화났느냐고요? 제가요? 고유건 씨에게? 그럴 게 있나요?”유건은 목소리가 담담하고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니면 다행이고.”“아.”시연은 여전히 유건이 질문한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고 허리를 굽혀 상처에 삽입한 튜브를 짰다.유건이 물었다.“이 튜브는 언제 빼나? 매우 불편한데.”“그렇게 금방은 안돼요.”“쉽게 말하면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다 배출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복막염으로 더 위험해질 수 있어요.”이 말을 끝으로 시연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이 여자가 왜 이렇게 조용해?’유건은 반쯤 눈을 감고 말했다.“나에게 할 말 없나?”“네?”시연이 당황해서 대답하려는 순간 유건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치료 이야기는 그만 해.”유건의 말에 지시연은 깜짝 놀라서, 긴 속눈썹을 떨며 웃기 시작했다.“한마디 하자면, 여자 친구가 아주 예쁘더라고요.”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유건은 지시연을 조롱했다.“위선적이네.”“그래요.”시연은 손을 들며 유건의 말을 인정했다.“진심은 아니었어요. 사실, 제가 더 예쁘잖아요.”유건은 눈빛이 미묘하게 변하며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이었다.“참 뻔뻔한 사람이네, 이렇게 자신을 칭찬하는 법도 있나?”이 말에 큰 의미가 있지는 않았지만 시연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제가 뻔뻔스러운 거, 벌써 알고 있었잖아요?”시연의 답답한 태도에 유건은 화낼 기분도 사라져버렸다.“그렇게 쳐다보지 마요.”시연은 고개를 숙이고 약을 갈아주면서 마스크 너머로 말했다.“우리 결혼이 계약 결혼인 거 나도 알아요. 고유건 씨가 누구와 만나는지 간섭할 권리도 없고요. 사랑하고 싶은 사람 계속 사랑하시고, 만나고 싶은 사람 계속 만나세요.”그녀는 원래 고유건과의 결혼을 간절히 원하던 장소미를 혼내주고 싶었을 뿐,
점심시간에 시연은 구내식당에서 식사 후 돌아오다가 복도에서 유건이 정기철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걷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나쁘지 않네요.”시연은 환자를 격려하듯 유건을 칭찬하며 말했다.“몸 상태가 정말 좋네요, 벌써 일어나 걸을 수 있다니. 이렇게 잘 움직이면 회복이 더 빠르겠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요.”“예, 선생님.” 정기철이 아주 진지하게 대답했다.시연이 막 가려고 하는데 유건이 불러세웠다.“잠깐만.”“무슨 일 있어요?” 지시연이 몸을 돌렸다.“너...” 유건은 뜻밖에도 좀 쑥스러워했다.“뭐 좋아해?”“네?”밑도 끝도 없는 고유건의 질문에 시연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의 큰 눈을 깜박이자 속눈썹이 살랑거렸다.“갑자기 못 알아듣는 척은.”유건이 불만스럽게 말했다.“고맙다는 말 못 들었다며? 한 회장님 일까지 다 빠뜨리지 않고 너에게 감사표시 할게.”시연은 이제야 고유건의 말을 이해했다.“감사 표시요?”그녀도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특별할 것 없어요. 나도 다른 여자들이 좋아하는 걸 좋아해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핸드폰이 울렸다.그녀는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네, 네. 이미 번역은 다 마쳤어요. 점심시간이니까 바로 보내 드릴게요. 네, 네.”전화를 끊었는데 유건이 아직 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또 무슨 일 있어요?”“뭐가 그렇게 바빠?” 유건은 대답 대신 도리어 다른 질문을 했다.시연이 대답했다.“통번역 아르바이트를 찾았는데 말할 시간 없어요. 빨리 보내야 해요.”말을 마치고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로 들어갔다.혼자 남겨진 유건은 상처를 가볍게 누르며 머릿속에 물음표를 가득 채웠다‘아르바이트?’‘BLUE에서 하던 아르바이트를 계속 방해하니까 다른 아르바이트를 찾느라 바빴는데, 정말 찾은 건가?’‘번역?’‘그래서, 열심히 돈을 벌고 있는 거야?’‘도대체 왜?’‘돈 많은 남자를 찾는 거 아니었나?’‘지금까지 있었던 일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
[시연아! 흑흑.]“무슨 일이야?” 시연은 어쩔 수 없이 실소를 터뜨렸다.“너 요즘 울음 연기 성의가 점점 부족하네.”성빈은 즉시 가짜 울음을 거두었다.[나 지금 너무 급해. 소개팅 중이야, 빨리 와서 나 좀 구해줘!]시연은 눈을 굴리며 말했다.“이번에는 진아 차례 아니야?”[진아가 지금 통화가 안 돼. 이 오빠한테는 지금 너밖에 없다! 제발 나 좀 살려줘, 기다릴게!]“여보세요?”상대편은 이미 전화를 끊은 상태였다.시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성빈의 집안에서는 뭐가 그리 급한지 아직 어린 성빈에게 1년 내내 맞선을 주선해 왔다.그러나 성빈은 전혀 원하지 않았다. 매번 시연이나 진아에게 자기 여자친구인 척 해달라고 해서 소개팅을 망치곤 했다.시연은 가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가야 했다.핸드폰이 울렸다. 성빈이 보낸 현재 위치를 알리는 메시지였다.‘나도 모르겠다, 일단 가자. 친구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바로 퇴근 시간이라 길이 막혀서 시연의 도착시간이 상당히 늦어졌다.핸드폰에서 성빈이 재촉하는 메시지가 내내 멈추지 않았다.약속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시연은 숨을 한번 깊이 들이마시고 가방에서 안약을 꺼내 두 눈에 각각 한 방울씩 떨어뜨렸다.레스토랑에 들어가서 둘러보며 성빈이 어디 있는지 확인했다.시연은 곧장 성빈에게 달려갔다. 그의 맞은편에는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청순한 외모를 가진 그녀는 어느 곳을 보든 부잣집 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숨을 깊이 들이마신 시연은 두세 걸음 앞으로 다가가 테이블 위의 물잔을 집어들고 성빈에게 확 부어버렸다.“젠장, 누구야?”머리와 얼굴이 흠뻑 젖은 성빈은 본능적으로 소리쳤다.“감히 누가 나에게 물을 끼얹어?!”“으흑흑...”시연의 연기는 서툴렀지만 다행히 적절한 타이밍에 안약의 도움으로 눈물을 흘렸다.그 여자를 가리키며 울먹이며 말했다.“진성빈! 똑똑히 설명해봐, 이 여자는 누구야?”“아이고.”성빈은 갑자기 싱글벙글 웃으며 시연을 와락 끌어안았다
시연은 성빈의 품에 안겨 그의 가슴에 기대고 흐느껴 울었다.“성빈아, 저 여자 진짜 사납잖아, 너무 무서워!”“무서워하지 마, 내가 있잖아.” 성빈은 시연과 호흡이 척척 맞았다.“남자나 꼬시는 여우 같은 X! 이 쓰레기 같은 X아!”여자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시연을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찰싹'하고 뺨을 한 대 때렸는데, 성빈의 얼굴에 대신 맞았다. 여자는 성빈의 행동에 경악하며 말했다. “이렇게까지 그 여자를 감싸주는 거예요?”성빈은 시연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어두워진 얼굴로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었다.“내 여자니까 당연히 보호해야지! 누가 감히 내 여자에게 손을 대? 당장 꺼져!”“좋아! 진성빈, 너 정말 잘났네!”여자는 울면서 레스토랑 밖으로 뛰쳐나갔다.시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울음을 멈추며 성빈을 노려보았다.“이 정도면 됐어?”시연이 얼마나 양심에 찔려 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헤헤.” 성빈은 히죽거리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말했다.“화 안 났지? 이 오빠가 맛있는 거 사 줄게.”“나한테 맨날 이런 못된 짓만 시키다니! 나 랍스터 회 먹을 거야!”“사 줄게!”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안으로 들어갔다.멀리 이 광경을 전부 지켜보던 유건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결코 화내지 않고 담담하게 웃기만 했다.‘생각해보면 지시연의 뱃속에 있는 아이의 아버지는 진성빈이겠지’.‘허.’ 유건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저 여자, 도대체 안목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저 여자 눈에 보이는 건 돈뿐이군!’‘오늘 이 상황에서는 지시연이 완전히 승리한 꼴이네. 그래서, 이제 결혼까지 성사시키려는 건가?’‘진성빈의 주변에는 여자들이 워낙 많은데… 과연 지시연에게 잘해 줄 수 있을까? 오늘 그 여자의 결말이 바로 지시연의 미래일 텐데.’“형님.”한참 동안 유건이 움직이지 않고 자리에 서 있자 지한이 조용히 일깨웠다.유건은 시연을 향한 시선을 거두고 냉담하게 말했다.“가자.”‘왜 이렇게 저 여자
소미의 등장에 유건의 상처를 보던 시연이 고개를 들었다. ‘아, 정말 아름다운 여자가 막 목욕을 마치고 나오는 모습을 다 보다니.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장소미도 젊은 여자인데, 막 샤워를 마치고 나왔고... 유건의 상처도 다시 터졌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가네.'‘이 두 사람, 어젯밤이었거나 아니면 조금 전에 뭔가 즐거운 일이 있었던 것 같아...’ “선생님은 회진을 돌고 있네요.” 소미는 가슴 위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순간, 시연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천만에요.” 시연은 침착하게 유건의 상처가 벌어진 부분을 확인한 후 다시 몇 바늘 꿰매면서 유건과 소미의 모습에 의사로서 직설적인 충고를 했다. “두 분, 환자분의 현재 상태로는 부부 생활이 적합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녀는 잠시 멈춘 뒤 덧붙였다. “여자분 쪽이 먼저 다가왔다 하더라도 적합하지 않아요.” “상처가 다시 터지면 상황이 악화할 겁니다. 복강에 농양이 생기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어요. 잠깐의 즐거움이와 생명,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요? 그러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그 말을 끝으로 장갑을 벗고 그녀는 방을 나갔다. “저, 저 선생님...” 소미는 충격에 말을 더듬으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유건은 입술을 살짝 당기며 말했다. “소미 씨, 촬영장에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늦었으니 옷 갈아입고 빨리 가요.” “네, 알았어요.” 소미는 탈의실로 들어가고, 유건은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선물로 준비한 작은 상자를 바닥에 던졌다.유건은 갑자기 온몸에 열이 나는 것처럼 화가 불타올랐다.‘지시연이 생각하기에, 내 상처는 장소미와 무언가 해서 생긴 것이라 생각한 것일까?’ ‘허, 본인이 남녀 관계에 대하여 그렇게 무분별하니, 다른 사람들도 다 본인과 똑같다고 생각하는 건가?’ ‘내가 정말 미쳤
“아...” 성빈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들어 놀라고 억울한 눈빛으로 유건을 쳐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유건의 권력과 지위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는 어쨌든 진씨 가문의 도련님이었다! “고유건, 너 미쳤어? 나랑 아무 원한도 없는데, 나를 때리는 이유가 뭐야?” 성빈도 말하면서 일어나서는 금방이라도 유건에게 덤빌 듯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민환과 기환이 재빠르게 유건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성빈 도련님, 우리를 먼저 이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두 형제는 딱 봐도 군인 출신, 게다가 특수부대 출신일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성빈은 애당초 자신이 싸움으로는 그들을 이길 수 없다는 계산이 섰다. “젠장!” 성빈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경찰 불러! 이렇게 억울한 꼴을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어!” “억울해?” 지금까지 침묵하던 유건이 차갑게 웃으며 비웃는 말투로 말했다. “네가 가지고 노는 여자보다 더 억울한 사람이 있을까?” 이 말에 성빈은 할 말을 잃었다. 성빈은 여러 여자와 교제해 왔고, 늘 세상과 가볍게 게임을 하듯이 살아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로 합의 하에 이루어진 일이었고, 그는 여자를 가지고 논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억울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내가 누구를 가지고 놀았다는 거야? 말해봐! 내가 네 여자를 가지고 놀았냐?” 그 순간 유건은 거의 이렇게 말할 뻔했다. ‘너는 내 아내를 가지고 놀았어!'‘어제 지시연은 이놈을 위해 다른 여자와 싸웠는데, 오늘 이 자식은 다른 여자를 껴안고 애정을 과시하고 있었네!!’ 하지만 지금 다행히도 유건의 이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그는 천천히 말꼬리를 물었다. “지, 시, 연!” ‘뭐?’ 성빈과 진아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했다. ‘시연? 내가 시연이를 가지고 놀았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저기...” 진아가 나서서 말했다. “이
시연은 말하면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단지 고맙다고 말하려고 했어요. 저를 위해 화내줘서 고마워요.” 유건은 잠시 멍해졌다. ‘내가 잘못 들은 걸까?’갑자기 그는 상처 부위를 부여잡으며 통증을 느꼈다. “고유건 씨?” 시연은 긴장한 채로 허리를 굽혀 그의 복부에 손을 얹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유건을 바라볼 때, 시연의 눈은 마치 하얀 수은 속에 검은 수은이 담겨 있는 것처럼 반짝였고, 그 눈동자 속에는 오로지 유건만이 존재했다. 시연의 눈동자 속에 자기 모습을 본 굳게 빗장을 걸었던 유건의 마음이 순간 풀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졌다. 시연이 갑자기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유건 씨! 제가 격렬하게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런데도 싸우다니! 정말 다시 수술받고 싶어서 그래요?” ‘이 여자의 태세 전환은 정말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더 빠르네. 조금 전까지도 나한테 고맙다고 하지 않았나?’ 유건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투덜거렸다. “내가 이렇게 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귀찮으면 신경 쓰지 마.” ‘고유건이 지금 또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건가?’시연은 기가 찼다.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좀 다급했어요. 저 귀찮지 않아요, 일단 검사하고 상태를 볼게요.” 유건은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검사를 받았다. 그의 건강 상태는 다행히 나쁘지 않았고, 상처도 다시 터졌지만 심각한 문제는 없었다. 시연은 안도의 숨을 쉬며 그를 병실로 다시 데리고 갔다. “어젯밤 일을 당신이 봤을 줄은 전혀 몰랐어요. 그런데 다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예요.” 그녀는 설명했다. “성빈이와 진아와 저 이렇게 셋은 오랜 친구예요. 성빈이는 집안에서 정해준 맞선을 피하려고 저희에게 도움을 요청한 거예요.” ‘아, 그런 일이었구나.’ 유건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마치 가슴에 있던 커다란 돌덩이가 사라진 것처럼, 호흡이 한결 편해졌다.
“으아악!!” 시연은 갑자기 정신이 들자 비명을 지르고, 얼굴을 감싸 쥔 채 급히 욕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세상에!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침착하자, 침착하자. 난 의사야... 의사가 남자를 본 게 뭐가 그렇게 놀랄 일이야?’ ‘그래, 그거야.’ 시연은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천천히 차분해졌다. 유건은 아직 욕실에 나오지 않았다. 시연은 계속 그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고, 아까 했던 실수를 떠올리며, 더 이상 아무 데나 돌아다니거나 무작정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스탠드 테이블 위로 향했다. 거기에는 열려 있는 보석 상자가 있었고, 안에는 플래티넘 다이아몬드 팔찌가 담겨 있었다. 시연은 혼잣말로 말했다. “정말 예쁘네요.” 갑자기 유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에 들어?” 그는 나와서 시연에게 다가와 침대 끝에 앉았다. “네?” 시연은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며 조금 부끄러워졌다. “뭐라고요?” “맘에 드냐고 묻잖아.” 유건은 그 팔찌를 들고 물었다. 이 팔찌는 아까 주지한이 가져온 것이다. ‘근데 이 남자가 왜 나에게 그런 걸 묻지?’ 시연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고,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예쁘네요.” “그러면 당신에게 선물할게.” 유건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지시연은 이걸 좋아하는 것 같아.’ “예?” 시연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걸 나한테 준다고?’ “아니, 아니에요, 됐어요.” 그녀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 “전 받을 수 없어요. 그리고 왜 제가 이걸 받아야 하죠?” 유건의 표정은 금세 불쾌해졌다. “말했잖아, 너에게 주는 감사 선물이라고.” 시연은 여전히 거절했다. “그럼 더 받을 수 없어요. 저는 의사예요. 환자를 돕는 건 당연한 일인데, 이걸 받으면 뇌물을 받는 거나 다름없잖아요...” “그만해.” 유건은 시연의 말을 더 들어줄 수 없다는 듯이 거칠게
유건은 결국 함정에 빠졌다. 재빨리 걸음을 멈추고 시연을 놓아주었다.“배가 어떻게 아파? 심한...”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시연은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지시연!”유건은 당황하며 몇 걸음에 따라잡아 그녀를 끌어안았다.시연은 눈을 크게 뜨고 온몸이 얼어붙었다. 뭔가 반응할 새도 없이, 유건의 넓고 따뜻한 손이 여자의 눈을 가렸다.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보지 마.”“뭐를요...?”시연은 놀라며 남자의 손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왜 이러는 건데요? 안 가려도 돼요...”‘안 가리면 어떡하라고?!’유건은 앞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노은범이 하진주에게 자기 재킷을 벗어 걸쳐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이걸 시연이가 본다면 얼마나 상처받을까?’“유건 씨!”시연이 저항하자, 유건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너, 으음...”시연이 놀라서 입을 열려는 순간, 유건이 그녀를 덮치듯 입을 맞췄다.‘뭐야?!’시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놔... 윽...”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유건은 더욱 거칠게 여자의 입술을 탐했다.남자의 키스는 점점 깊어졌고, 점점 더 강렬해졌다.시연은 필사적으로 유건의 가슴을 두드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라 손을 번쩍 들었다.찰싹!깨끗한 타격음이 울리며 유건의 뺨이 돌아갔다.유건은 순간 멍해졌다.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며 충격받은 표정으로 시연을 바라보았다.“미안해, 나는...”그는 단지 시연이 은범을 보지 못하게 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키스하고 나서 이성을 잃어버렸다.그녀를 원했고, 가까이하고 싶었으며, 심지어 그녀를 독차지하고 싶었다.시연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마치 혐오스러운 존재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너무나 속상하다는 듯 말했다.“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우리... 그래도 예전에는 부부였고, 이 사람의 포옹과 키스를 받아들일 이유라도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이제 우리는 이혼을 앞둔 상태잖아!
연회장으로 돌아온 유건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그는 소미를 한 번 바라보고 나직이 말했다.“가자, 별로 재미없어.”소미는 아무런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건의 표정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무슨 일 있어요?”“아니.”유건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너무 늦게 자면 두 사람한테 안 좋잖아.”“네.”소미는 미소를 띠었지만 속으로 불안했다.‘어떡하지? 이 사람, 아이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지금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나중에 크게 곤란해질지도 몰라.’“왜 그래?”유건은 소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눈을 가늘게 떴다.“몸이 안 좋아?”“아니에요.”소미는 웃으며 얼버무렸다.“그냥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같이 가자.”“괜찮아요...”“아니.”유건은 단호했다. 그녀가 지금 상태에서 혼자 다니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니 말이다.그는 결국 화장실 입구까지 소미를 데려다주었다.“천천히 다녀와.”“네.”소미는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이 남자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이렇게 다정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겠어?’유건은 조금 떨어진 흡연 구역으로 이동했다.담배를 꺼내 들었지만, 불을 붙이기도 전에 시연이 책가방을 메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았다.‘시연이? 여기 온 이유는 뭘까?시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뭐 찾는 거야?”“네?”시연이 놀라 돌아보았다.유건을 보자, 그녀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여기 B동 6층 맞나요?”유건은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6층은 맞는데, 여긴 B동이 아니라 C동이야.”“아.”시연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두드렸다.“아, 진짜! 또 길을 잘못 들었네요.”“또?”유건은 그녀의 찡그린 얼굴을 보며 무심코 물었다.“길을 자주 잃어버려?”시연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사실, 자주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방향 감각이 떨
[알겠습니다, 형님.]전화를 끊자, 소미가 방으로 들어왔다.“유건 씨.”유건은 담배를 비벼 끄고 손을 저었다.“먼저 들어가 있어. 여기 담배 냄새 나.”담배는 임신한 여자에게 좋지 않으니까.“아, 네.”연기가 가라앉은 후, 유건은 문을 열고 들어가 소미가 건넨 물을 받았다.“좀 괜찮아요?”소미가 다정하게 물었다.“네.”유건은 물을 마시고 소파에 기대었다.“너무 많이 마셨나 봐.” 그는 관자놀이를 가볍게 눌렀다.“머리가 좀 아프네. 그래도 잠깐 앉아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제가 마사지해 드릴까요?”소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건의 곁에 앉으며 소매를 걷었다.남자가 거부할 틈도 없이, 그녀는 말했다.“눈 감아요. 우리 아빠가 술 마셨을 때 자주 해드렸어요.”여자의 손끝이 관자놀이를 누르자, 유건은 거부하지 않았다.“고마워.”소미가 잔잔히 웃었다.“저한테 뭘 그렇게 고마워하세요? 제가 유건 씨를 도로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우린, 앞으로 평생 함께할 사이잖아요.”‘그래, 앞으로도 함께할 사람이지.’유건은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익숙해져야 했다.소미의 손길이 생각보다 편안해서 그는 점점 나른해졌다.“유건 씨?”그녀가 속삭이듯 부르자, 유건은 반쯤 감긴 눈으로 대답했다.“응...”소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가슴이 뛰었다.‘이건 기회야!’‘내 임신은 거짓말이잖아... 시간을 더 끌면 고유건은 의심할 거고, 배를 감출 수도 없을 거야.’‘그 전에 내가 확실히 해야 해. 이 사람과 더욱 가까워지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그녀는 숨을 죽이고 목에서 어깨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유건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남자의 입술과 단 한 뼘도 남지 않은 거리.하지만, 소미는 남자의 입술이 닿기 직전, 유건의 눈이 번쩍 뜨였다.여자가 너무 가까이 있는 걸 깨닫고, 순간 멈칫했다.“소미 씨?”“유건 씨.”소미는 포기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키스해 줘요.”유건은 말이 막혔고, 본능적으로 미간이 좁혀졌다
유건은 회의를 마치고 대표실로 돌아왔다.비서가 다가와 보고했다.“대표님, 장소미 씨가 도착하신 지 좀 되었습니다.”오늘 밤, 유건은 한 연회에 참석해야 했고, 이번엔 소미가 파트너였다.“유건 씨.”소미가 환하게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그냥 앉아 있어.”유건은 손을 살짝 흔들며 무심하게 말했다.“조애린 씨한테 들었는데, 일을 계속할 생각이야?”“네, 그래요.”소미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설명했다.“양 감독님의 작품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게다가, 이미 절반 정도 촬영했거든요. 광고를 비롯한 일정이 과하게 많은 것도 아니고요. 저는 가만히 있는 게 더 싫어요.”잠시 생각하던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미의 배를 힐끗 바라보았다.“몸에 이상 없으면 소미 씨 뜻대로 해. 다만, 배가...”언젠가는 드러날 것이었다.“아, 아직 문제없어요. 사극이라 의상 때문에 티도 안 나고요.”소미는 오늘 넉넉한 원피스를 입고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평평한 신발까지 신은 것을 떠올렸다.유건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양 감독님께 소미 씨 촬영 분량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달라고 이야기해.”“네, 유건 씨 말대로 할게요.”시간이 늦어서 유건은 휴게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소미와 함께 대표실을 나섰다....연회는 해성 호텔에서 열렸다.주차장에서, 노은범이 먼저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고마워.”진주가 미소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은범은 담담히 말했다.“별일 아니야.”그가 어색해하는 모습을 본 하진주는 웃으며 말했다.“너무 긴장하지 마. 우리 약속했잖아? 친구처럼 지내기로.”“알아.”은범은 살짝 찡그렸다.“하지만, 네가 나 때문에 불편해질 수도 있잖아.”“괜찮아.”진주는 고개를 저었다.“이건 너만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엄마도 연관되어 있으니까.”그녀는 남자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았다.“그냥 편하게 가자. 시간이 지나면 부모님들도 우리가 진짜 안 될 거라고 깨달으시겠지.”은범은 한결 편안해졌다.‘나보다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하진주를 힐끗 바라보았다.“내가 보기엔 진주가 참 괜찮은 것 같은데, 정말 아쉬워. 우리 은범이 복이 없는 탓이지, 뭐.”진주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이모, 그런 말씀 마세요. 과찬이세요.”“진주야.”강수희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진주의 손을 잡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지난번에 은범이랑 같이 연극 봤다면서? 그 후로는 어떻게 된 거야? 솔직히 말해 봐. 은범이의 뭐가 마음에 안들었니?”“그게...”진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할까?’지난번에 은범과 미리 조율한 대로, 진주는 연극을 본 후 자기 부모님께 자신이 은범을 향한 마음이 없다고 전했다. 이는 진주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거였고, 은범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강수희가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진주는 은범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모, 은범이는 괜찮은 사람이에요. 다만, 저희는 서로를 잘 모르잖아요...”이 말이 강수희에게 희망을 주고 말았다.“그럼, 좀 더 만나보고 알아가면 되잖아? 제발, 은범이에게 기회를 줘 봐, 응?”“어머니!”은범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다가왔다.그는 먼저 방혜령에게 인사를 건넸다.“이모, 오랜만이네요.”그리고 곧바로 어머니를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어머니, 이모는 어머니를 뵈러 오신 거잖아요.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내가 이러는 건...”“괜찮아.”방혜령이 손을 흔들며 부드럽게 웃으면서 시선을 은범에게 두었다.“이제 많이 컸네? 그런데 너희 엄마 말도 틀린 건 아닌 것 같아.”그녀는 딸을 한번 흘긋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너희, 한 번 본 걸로 판단하기엔 너무 성급하지 않아? 좀 더 만나면서 알아가는 게 맞지 않나?”강수희가 기뻐하며 맞장구쳤다.“내 말이! 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어머니!”“엄마!”은범과 진주가 동시에 소리쳤다.그 모습을 보고, 방혜령과 강수희는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과장실 문 앞에서, 시연은 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형수님.]“지한 씨.”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유건 씨와 잠깐 통화할 수 있을까요?”[당연하죠. 형님도 여기 계세요.]잠시 후, 수화기 너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나야.]유건의 무심한 어조.“심폐 프로젝트팀에 내가 들어가게 된 거, 당신이 한 일이에요?”질문은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개입했다면, 바로 이해할 터였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남자의 답이 돌아왔다.[그래.]전혀 놀랍지 않았다. 시연은 눈을 감았지만, 당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여자의 침묵에, 유건은 비웃듯 말했다.[설마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벌인 일이라는 이유만으로?]시연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멍청하긴...]유건이 낮게 욕했다.[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간다는 게 너한테 어떤 의미인지, 내가 설명해야 하냐?]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팀에 들어가면 분명 시연의 수입도 늘어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경험과 기술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돈 때문이라면 이렇게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지시연.]유건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나와 관계를 끊는 게 중요해? 아니면 네 미래가 더 중요해?]책망과 걱정이 섞인 목소리.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시연도 알고 있었다.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결정을 내렸다.“고마워요, 유건 씨.”유건은 핸드폰을 쥔 채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동시에, 안도감이 밀려왔다.‘다행이네. 이 여자, 결국 받아들였어!’하지만 시연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유건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그리고 그녀는 덧붙였다.“예전엔 내가 잘못했어요. 항상 미안하게 생각해요. 앞으로는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이 잘되길 바랄게요. 그리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유건은 한참 동안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원래라면, 저 여자, 부와 명예를 누려야 마땅해. 하지만 지금은...’...차에 돌아온 지한은 유건이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즉, 유건의 온몸에서 스며 나오는 묵직한 어둠과 슬픔을 느낀 것.‘설마, 또 형수님한테 혼난 건가? 그게 아니면, 이번엔 진짜로 맞기라도 한 건가?’“형님...”“지한아.”유건의 시선이 멍하니 허공을 가로질렀다.“방법을 좀 찾아봐. 시연이가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내가 돈을 건네면, 시연이는 절대 받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연이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지 못하는 건 아닐 거야.’ ‘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시연이가 돈과 명예를 탐하는 여자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지? 정말 한심해!’...시연은 임진아 집으로 돌아온 뒤, 저녁에 양석현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교수님.”[시연아, 내일 오전에 내 사무실로 와. 할 말이 있어.]“네, 교수님.”양석현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다음 날 아침, 시연은 교대 근무도 마치지 못한 채 서둘러 외과로 향했다.양석현은 회진을 마친 후에야 시간을 냈고, 시연을 과장실로 데려갔다.“일찍 왔구나. 앉아.”시연은 긴장한 채 자리에 앉았다.“교수님, 무슨 일이신가요?”‘혹시 내가 1학년 실험 수업을 하는 데에 문제가 생긴 걸까?’“뭘 그렇게 긴장해?”양석현은 일부러 뜸을 들이다가도, 결국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은 소식이야.”그는 서랍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내 시연에게 건넸다.“이걸 작성하면, 너는 공식적으로 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가게 될 거거든.”시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교수님, 이게... 정말 규정에 맞는 건가요?”“규정대로라면, 맞지 않지.”양석현이 웃었다.“원래는 네가 대학원에 합격하면 팀에 넣을 생각이었어. 그 자체도 예외적인 거지만 말이야.” 그런데 아직 대학원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가능하게 된 걸까?양석현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말했
차가 시연 앞에 멈췄다.창문이 내려가더니, 지한이 고개를 내밀고 미소를 지었다. “형수님, 어디 가세요? 타세요, 제가 모시고 갈게요.”시연은 유건을 흘낏 보았다.‘이상하네, 왜 조수석에 앉아 있지?’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또 유건의 차를 타면 점점 엮이게 될 것 같았다.“형수님, 얼른 타세요.” 지한은 차를 움직일 기색도 없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내려서 직접 문 열어드려야 합니까?”“아니에요...”시연은 거절하려 했지만, 정류장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불만을 터뜨렸다.“뭐야, 버스 정류장에 세우면 안 되는 거 몰라?”“그러니까! 버스가 못 지나가잖아.”“빨리 가라고!”“벤틀리네, 저런 차를 태워준다는데 안 탄다고?”“재수 없어.”점점 더 듣기 거북한 말들이 오갔다.어쩔 수 없이, 시연은 차 문을 열고 탔다.“형수님, 어디로 가면 됩니까?”차에 타자마자, 지한이 물었다.시연은 대답 대신 조수석에 앉아 있는 유건을 바라보았다.‘이거 완전 악연 아니야? 왜 자꾸 마주치는 거지?’“형수님.” 지한이 웃으며 유건을 가리켰다. “마침 형님이 차에 계시긴 하지만, 너무 신경 쓰진 마세요. 그냥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셔도 돼요. 어차피 아무 말도 안 할 거니까요.” 시연은 당황했다. ‘이 둘 뭐 하는 거야?’“이제 목적지 말해주실래요?”지한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형수님, 실은 우리도 친구라고 할 수 있잖아요. 제가 그저 한 번 모시고 가는 걸로 부담 갖는 건 아니시죠?”지한의 말에 시연은 결국 마지못해 답했다.“산신당으로 갈 거예요.”지한은 잠시 멈칫하더니, 본능적으로 조수석의 유건을 바라보았다.“거기서 볼일 있으세요?”“네.”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좀 살 게 있어서요.”‘거기서 뭘 사려는 거지?’산신당은 G시보다 더 오래된 곳일지도 모른다. 사찰뿐만 아니라 재래시장도 있어, 평범한 서민들이 주로 찾는 곳이었으니 말이다.분명 번잡하고 활기차지만, 고급스
시연은 믿을 수 없었다.‘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는 우리한테 단 한 번도 아버지 역할을 해주지 않던 사람이,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한다고?’지동성은 딸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다시 한번 말하마. 우주를 ‘웰스’로 보내는 돈은 이 아빠가 다 낼게.” 시연은 멍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닌데, 이해할 수 없었다.“왜요?”지동성은 한숨을 쉬며 난감한 듯 말했다.“아버지가 자식한테 돈을 주는 데에도 이유가 필요하니?”‘이유가 필요하냐고? 그럼 그때 우주의 치료비를 끊고,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건 누구였더라?’‘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진 당신이 그 중심에 있던 거 아니었나?’ 시연은 믿을 수 없었다. 곧이어, 지동성이 말을 이었다.“시연아, 곧 다가올 아빠의 생일에 네가 꼭 와줬으면 좋겠구나.”시연은 또다시 얼어붙었다.‘오늘따라 무슨 일이 이렇게 많아?’무심결에 튀어나왔다.“무슨 뜻이에요? 도대체 뭘 하려는 거죠?”“흠.”지동성이 가볍게 기침했다.“아빠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앞으로 몇 번이나 생일을 맞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단다. 가족끼리 모여서 밥 한 끼라도 같이 먹고 싶어.” ‘뭐 이런 헛소리가 다 있어?’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냉소를 흘렸다.“아내도 있고 딸도 있잖아요. 가족이랑 매일매일 함께하잖아요?”“시연아.”지동성이 딸의 말을 끊고, 불만스럽게 고개를 저었다.“너와 우주도 아빠의 자식이야.”그는 모델 조립에 열중하고 있는 우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아빠의 생일에 와준다면, 네가 나를 아버지로 인정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게. 그때가 되면 우주의 치료비는 얼마가 되든 내가 책임지마.” ‘우주를 빌미로 협박하는 거야?’시연은 본능적으로 떠올렸다.‘로얄호텔에서의 그때도...’그녀는 경계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예요?”딸의 반응을 본 지동성도 깨달은 듯했다. 잠시 스치는 후회의 눈빛.“아빠가 뭘 할 수 있겠니? 그냥 생일을 함께 보내고 싶은 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