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아악!!” 시연은 갑자기 정신이 들자 비명을 지르고, 얼굴을 감싸 쥔 채 급히 욕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세상에!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침착하자, 침착하자. 난 의사야... 의사가 남자를 본 게 뭐가 그렇게 놀랄 일이야?’ ‘그래, 그거야.’ 시연은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천천히 차분해졌다. 유건은 아직 욕실에 나오지 않았다. 시연은 계속 그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고, 아까 했던 실수를 떠올리며, 더 이상 아무 데나 돌아다니거나 무작정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스탠드 테이블 위로 향했다. 거기에는 열려 있는 보석 상자가 있었고, 안에는 플래티넘 다이아몬드 팔찌가 담겨 있었다. 시연은 혼잣말로 말했다. “정말 예쁘네요.” 갑자기 유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에 들어?” 그는 나와서 시연에게 다가와 침대 끝에 앉았다. “네?” 시연은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며 조금 부끄러워졌다. “뭐라고요?” “맘에 드냐고 묻잖아.” 유건은 그 팔찌를 들고 물었다. 이 팔찌는 아까 주지한이 가져온 것이다. ‘근데 이 남자가 왜 나에게 그런 걸 묻지?’ 시연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고,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예쁘네요.” “그러면 당신에게 선물할게.” 유건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지시연은 이걸 좋아하는 것 같아.’ “예?” 시연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걸 나한테 준다고?’ “아니, 아니에요, 됐어요.” 그녀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 “전 받을 수 없어요. 그리고 왜 제가 이걸 받아야 하죠?” 유건의 표정은 금세 불쾌해졌다. “말했잖아, 너에게 주는 감사 선물이라고.” 시연은 여전히 거절했다. “그럼 더 받을 수 없어요. 저는 의사예요. 환자를 돕는 건 당연한 일인데, 이걸 받으면 뇌물을 받는 거나 다름없잖아요...” “그만해.” 유건은 시연의 말을 더 들어줄 수 없다는 듯이 거칠게
시연은 잠깐 망설였을 뿐, 바로 차에 올라탔다. 노은범이 왜 갑자기 여기에 나타났는지, 그와 함께 차를 타는 것이 적절한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고마워, 서쪽에 있는 주선교로 가줘.” 주선교, 하늘길 묘원...은범도 그곳을 낯설지 않게 여겼다. 그들은 어린 시절 서로 사랑하던 사이였고, 그 시절 매년 시연의 엄마인 부명주의 생일과 기일마다 은범은 시연과 함께 묘지를 찾곤 했다. ‘그런데 오늘 시연이가 이렇게 급히 가는 이유가 뭘까?’ 은범은 묻지 않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대답했다. “알았어.” 도착하자마자 차가 멈추기도 전에 시연은 허둥지둥 뛰어내렸고, 그만 넘어질 뻔했다. “시연아!” 은범이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 “조심해.” “난 괜찮아.” 시연은 급히 말했다. “고마워, 시간 빼앗아서 미안해. 바쁘면 먼저 가도 돼.”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후다닥 앞쪽으로 뛰어갔다. 은범은 그 자리에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시연이와 내 사이가 이제 이렇게나 멀어진 걸까?’ ‘지금 이 모든 게 다 내가 자초한 일이니... 그래, 당연하지.’ 잠시 망설인 후, 그는 시연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묘비 앞. 지동건 일가가 이미 땅을 파기 시작했다! 지동성, 장미리, 그리고 장소미, 세 사람 모두 그곳에 있었다. “지동성!” 시연은 창백한 얼굴로 다급히 지동성 앞에 다가갔다. “지시연!!” 지동성은 불만스럽게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이제 아버지라는 말도 못 하겠니?” “아버지?” 시연은 지동성의 말을 되물었다. 호칭도 아닌 말을 내뱉으며 그녀는 스스로 웃음을 터뜨렸고, 손으로 부명주의 묘를 가리켰다. “우리 엄마 앞에서 내가 아버지라 부르면, 당신이 감히 대답이나 할 수 있겠어요?” “너...” 지동성은 시연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장미리가 빈정대며 끼어들었다. “정말 주둥이가 살아있네. 너의 그 잘난 척을 가족에
“여보, 그러면...”지동성이 겨우 입을 열려고 하자, 장미리가 거칠게 그를 막았다.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거야? 어서 파내라고!” 장미리는 지동성에게 말할 기회도 전혀 주지 않았다. 오히려 우유부단한 그의 태도 때문에 더욱 화가 나서, 눈에 불을 켠 듯 형형한 눈빛으로 말했다. “더 지체하면 신고할 거야!” 그 말 뒤에, 그녀는 독하게 한 마디 더 덧붙였다. “고유건 알지? 내 딸의 남자 친구가 바로 그 사람이야! 나를 불편하게 하면, 내 딸이 불편해지고, 내 딸이 불편해지면 고유건이 불편해질 거야!” 그 말을 듣자 망설이던 몇 명의 사람들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삽을 들었다. G시에서 고유건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고유건이 발을 구르면 G시가 흔들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고유건은 대단한 위세를 가진 사람이었다. “파내라!” “안 돼!” 시연은 놀라 달려가며 그들을 막으려고 했지만, 여러 장정을 한꺼번에 당해낼 수는 없었다. “아!” 몸싸움 도중 시연의 손에 상처가 났고, 피가 흘렀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당황해 잠시 멈췄다. “정말 짜증 나!” 소미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시연을 붙잡았다. “비켜! 끝까지 이럴 거야?” 그 순간, 누군가가 소미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악...!!!” 소미는 아픔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노려보았다. 은범은 평소에 온화하고 점잖은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몹시 살기 어린 눈빛으로 소미를 보고 있었다. 손에 전혀 힘을 주지 않은 것처럼 보였으나, 소미는 마치 손목이 부서질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아프잖아!” “시연이는 안 아프겠어?” 은범은 시연의 손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고 핏발 선 눈으로 말했다. “꺼져.” 그는 소미의 손목을 놓으며 그녀를 밀쳐냈다. 그리고 시연을 살며시 끌어안고 말했다. “시연아, 미안해... 내가 왔어.” 시연은 모든 에너지를 잃은 듯 그에게 기대었다. 지금 시연도 잘 알고 있
시연은 차갑게 고개를 돌려, 여전히 고상한 태도를 유지하는 남자를 잠시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착각했어요. 이 팔찌가 제 것인 줄 알았거든요. 그때 저한테 말씀을 해주셨어야죠. 제가 오해했다고요.” ‘지금 이 여자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유건은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연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고 대표님, 앞으로 여자 친구에게 줄 선물은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주지 마세요. 제가 가져갔으니, 고 대표님은 하나 더 사서 여자 친구에게 줘야 하잖아요. 귀찮지 않나요?” 그 말을 남기고 시연은 문 쪽으로 걸어갔다. 유건은 안색이 순간에 어두워지며 생각했다. ‘설마 지시연이 장소미를 만난 거야? 둘이 어디서 만났지?’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지시연이 장소미가 그 팔찌를 차고 있는 것을 봤다는 사실이야... 그래서 지시연은 기분이 나빴던 걸까?’ ‘왜?’ ‘기분이 나빠야 할 사람은 장소미여야지, 왜 자기가 기분 나쁘다는 거야? 원래 그 팔찌는 지시연에게 주려고 했던 거였는데...’시연이 문을 열고 나감과 동시에, 주지한이 들어왔다. 지한은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시연 씨, 얘기는 다 끝났어요?” 시연은 지산의 말을 무시한 채, 갑자기 고개를 돌려 유건을 바라보았다. “고유건 씨, 나는 당신과 절대 이혼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이를 악물고 덧붙였다. “제 것이 아닌 건 가지지 않겠지만, 제 것이라면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거예요.” 시연은 그렇게 말한 뒤 방을 떠났다. 유건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지한을 향해 물었다. “저 여자가 방금 한 말, 무슨 뜻이지?” 지한도 당황스러워 눈이 휘둥그레졌다. “형님, 시연 씨가 지금 형한테 고백한 거 아닌가요? 시연 씨가 형님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음... 화내지 말고, 차분히 생각해 보자.’ 유건은 속으로 마음을 가다듬으며 생각했다. ‘왜 내 주변에는 연애를 해본 사람도 없고
“시연아.” 진아가 시연을 쿡 찌르며 말했다. “저기, 너 찾는 거 아니야?” 시연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바로 옆에서 은색 파가니가 천천히,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이 느리게 달리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내밀자 차가 멈췄고, 지한이 문을 열고 내렸다. “시연 씨, 어디 가는 겁니까? 그렇게 무거운 짐을 들고 있어요? 어서 차에 타요, 형님도 시연 씨를 데려다주겠다고 하셨어요.” 그는 말하면서 여행 가방의 손잡이를 잡아 들어 올리려 했다. “필요 없어요!” 시연은 손을 놓지 않고 차갑게 거절했다. “제가 알아서 갈게요.” “이게...” 지한은 당황스러워하며 뒷좌석에 있던 유건을 바라봤다. 차창 너머로 유건은 상황을 보고 있었고, 얼굴이 굳어지며 곧바로 차에서 내려 주지한을 지나쳐 여행 가방을 들어 올렸다. “트렁크 열어.”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네, 형님!” 지한은 재빨리 트렁크를 열었고, 유건은 가볍게 여행 가방을 트렁크에 집어넣었다. 시연은 놀라고 화가 나서 그의 팔을 붙잡으며 외쳤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건 제 짐이에요! 내려놔요! 저는 고 대표님의 차 타고 싶지 않아요!” “그만해!” 유건은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꾸짖었다. 그 순간, 그는 아이를 혼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시연은 그보다 다섯 살 어리니 충분히 아이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자아이였다. 그래서 함부로 손댈 수 없었고, 다만 시연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었다. “네가 스스로 차에 탈래, 아니면 내가 안아서 태울까?” 그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질문이었다. 시연은 화가 나서 입술을 삐죽이며 결국 뒷좌석에 올랐다. 지한은 진아가 든 여행 가방을 받아서 들며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아가씨, 타세요.” “아, 알겠어요.” 진아는 어리둥절해하며 지한의 말에 따랐다. 뒷좌석에서는 유건과 시연이 나란히 앉아 있었지만, 둘 다 말없이 서로에게 등을 돌린 채
유건은 가까이서 시연을 응시하며 어두운 얼굴로 불만을 내비쳤지만, 그 이상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녀가 여전히 그에게 화를 내는 건 손목에 찬 팔찌 때문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유건은 남자였고, 이번 일은 확실히 그가 잘못 처리한 부분이었다. “팔찌 문제는 내 잘못이야. 하지만 넌 정말로 오해한 거야. 원래 그 팔찌는 너에게 주려고 했던 거였어.”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자존심을 지키는 듯했다. 시연은 당황했다. ‘고유건이 왜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낸 걸까? 그리고 이 남자가 왜 지금 나에게 해명하고, 사과를 하는 거야?’ “방금... 뭐라고 했어요?” 그녀는 믿기 어려웠다. 유건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말했다. “못 들었으면 됐어!” ‘한 번 해명한 것만으로도 내 한계였어. 이 여자가 일부러 나에게 두 번 말하게 할 생각이었나?’ 그는 더 이상 화첩에 대한 호기심도 없었고, 방금의 호기심은 분노에 묻혔다. “지한아, 가자!” “네, 형님!” 두 사람이 떠나자, 진아는 곧바로 시연에게 다가와 말했다. “어? 이 화첩이구나. 내가 기억하는데, 네가 어렸을 때 같이 놀던 친구를 그린 거 맞지?” “응.”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림 속 장면은 이미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며 대화를 나눴다. 진아가 말했다. “그러면 그 뒤로는 한 번도 못 만난 거야?” “응, 한 번도.” “하!” 진아는 웃으며 말했다. “만약 만나더라도 너희 둘 다 못 알아볼걸? 어릴 땐 다들 많이 변하잖아. 어른이 되어도 거의 그대로인 사람이 많지만, 어린애가 커서 성인이 되면 엄청나게 달라지지.” 그 말에 시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아마 우리 인연은 거기까지였던 거겠지.” 그녀는 화첩을 여행 가방에 넣으며 대화를 끝냈다. “시연아!” 진아는 다시 시연을 쫓아가며 물었다. “그리고,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너랑 고 대표, 도대체 무슨
묘지 문제는 그렇게 결정되었다. 은범은 단지 묘지만 알아본 것뿐만 아니라, 풍수사에게도 의뢰하여 이장하기 좋은 날과 시간을 받았다. 당일, 날씨는 맑고, 산들바람이 불고 있었다. 성빈과 진아는 시연과 함께 묘지에 도착했는데, 그곳에 은범이 이미 와 있었다. 시연은 놀라서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은범의 시선을 피했다. 진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진성빈을 노려보았다.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 “내가 어떻게 알아?” 성빈은 태연하게 대답하며 전혀 모르는 척했다. “시연아.” 차가운 태도에도 불구하고, 은범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말했다. “명주 이모를 보내 드리는 데 오지 않으면 양심에 걸릴 것 같아서 왔어.” 진아는 바로 반박했다. “너에게 양심이라는 게 있었어?” “진아야.” 시연이 진아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진아는 불만을 억누르며 더는 말하지 않았다. 시연은 은범을 바라보며 말했다. “와줘서 고마워.” 오늘은 어머니의 안식을 위한 날이었기에, 시연도 어머니의 묘 앞에서 다투고 싶지 않았다. 은범은 기뻐하며 미소 지었다. “천만에.”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그는 속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부명주의 안장식은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시연은 어머니의 묘비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말없이 눈물을 흘렸고, 진아는 시연의 옆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뒤에서 성빈이 은범에게 속삭였다. “왜 시연이에게 다 말하지 않아?” 은범이 묘지 문제를 모두 해결했으니 시연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어야 하지 않겠냐는 의미였다. 은범은 시연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굳이 말할 필요 없어. 내가 하는 일은 시연이를 감동하게 하려는 게 아니야. 인생은 길어. 내가 시연에게 잘해주는 모든 걸 굳이 다 알릴 필요는 없잖아.” 성빈은 혀를 차며 말했다. “정말 지나치게 헌신적이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했다. “참, 시연이가 나에게 송금한 돈, 네가 처리한 거니까
“뭐라고?” “네가 직접 손으로 만든 거라고?” 유건은 깜짝 놀라 다시 셔츠를 보았다. 갑자기 셔츠가 눈에 쏙 들어왔다. “네가 한 땀 한 땀 직접 바느질해서 만든 거야?” “네.” 시연은 입술을 꼭 다물고 약간 부끄러워했다. 부명주는 생전에 패션 디자이너였고, 집에는 작업실도 갖고 있었다. 시연은 걷기도 전부터 바늘을 잡았고,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옷을 만드는 시연의 기본기는 탄탄했다. 어쩌면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았을지도 모른다. 셔츠 하나쯤 만드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유건은 겉으로는 아닌 척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시연의 뜻밖의 실력에 깜짝 놀라고 감탄했다. ‘진짜로 지시연이 직접 만든 거야! 한 땀 한 땀, 모든 바느질 자국이!’ 시연은 유건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지난번에는 미안했어요.” 그녀는 유건이 준 카드에서 또 돈을 인출해서 썼기 때문에 화낸 거라는 말은 못 하고 그냥 핑계를 댔다. 시연의 이 말은 유건에게 물러날 구실을 만들어준 셈이었다. 상대방이 한 걸음 물러서면 자신도 상대를 너그럽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좋은 남자다.“됐어.” 유건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대범한 척 말했다. “나는 상남자라 여자한테 그런 걸 일일이 따지지 않아” “그럼...” 시연은 셔츠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 셔츠, 입을 거예요?” “그냥 둬.” 유건은 자존심을 부리며 셔츠를 보지 않고 말했다. “어차피 옷장에 널리고 널린 게 셔츠야.” “아...” 시연은 속으로 생각했다.‘역시 그렇지, 고유건이 내가 만든 셔츠를 입을 리 없겠지. 아마도 옷장 깊숙이 넣어두겠지... 하지만 더 비싼 옷을 해줄 수는 없으니까...’ “그럼 저는 이만 갈게요, 일정이 좀 빠듯해서요.” 시연이 나가자 바로 주지한이 들어왔다. “형님, 이건 방금 받은 프로젝트 서류인데요...” “어, 웬 셔츠가 있네요?” 지한은 셔츠를 치우려 손을 뻗었다. “손대지 마!” 낮게 깔린 경고가
문 밖.유건, 은범, 그리고 진주는 침묵 속에 서 있었다.가장 먼저 진주의 핸드폰이 울렸다.“엄마. 네, 이제 끝났어요. 곧 갈게요.”전화를 끊고 나서, 진주는 은범을 바라보았다.“은범아, 우리 엄마가 집에 빨리 들어오래.”하지만 은범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말 한마디 없이 굳어 있었다.그는 무조건 시연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진주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그럼 나 먼저 갈게.”“응...”은범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절대 시연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그러나 그때, 은범의 핸드폰이 울렸다.강수희였다.“어머니.”[은범아,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진주를 안 데려다준 거니? 서로 친해지는 건 좋지만, 너무 늦으면 진주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야.]은범은 진주를 한 번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강수희의 목소리는 여전히 이어졌다.[이제 늦었으니, 무조건 진주 데려다줘야 해. 알겠지?]이를 악물며, 은범은 짧게 대답했다.“알았어요.”전화를 끊고, 그는 진주를 향해 말했다.“가자, 집까지 데려다줄게.”“어?”진주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라며 회의실 문을 가리켰다.“그래도 돼?”“너랑 같이 왔잖아.”은범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연히 너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게 맞지.”시연에게는 나중에 충분히 설명하면 될 일이었다. 그녀는 이성적인 사람이니까.“가자.”“응.”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유건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눈빛 가득한 냉소를 띄웠다.‘역시 믿을 수 없는 놈이었어.’그는 긴 다리를 내디뎌 은범의 앞을 가로막았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 비꼬는 듯한 미소.“어디 가려고?”“고 대표님...”은범이 답하려 했지만, 유건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내가 있는 한, 넌 한 발짝도 못 움직여.”은범은 얼굴을 찌푸리며 침착하게 말했다.“고 대표님, 전 친구를 집에 데려다줘야 합니다.”“헛소리 좀 그만하지 그래?”유건의 분노가 폭발했다.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몇 걸음 떨어진 곳.노은범과 하진주가 나란히 서 있었다.그리고 시연과 마주쳤다.“시, 시연아.”은범은 당황해 더듬거렸다.진주는 은범을 한 번 바라보더니 옅게 미소 지었다.“친구야?”“응, 아니... 아니야. 내가 좋아한다던 그 사람이야.”은범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부정했고, 더 이상 진주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서둘러 시연에게 다가갔다.그리고 시연을 바라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뜻밖의 조우에 시연은 잠시 놀랐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교수님이 여기서 회의 중이셔. 놓고 가신 자료를 가져다주러 왔어.”그녀가 유건에게 한 말과 똑같았다.“그렇구나.”은범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시연의 가방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번엔 허공을 잡았다.시연은 재빨리 한 걸음 물러난 것이었다.은범은 순간 멍해졌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시연아?”시연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지만, 그 속엔 명확한 거리감이 담겨 있었다.“교수님이 기다리고 계셔서 먼저 가볼게. 그리고 널 방해하면 안 되잖아.”시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을 지나쳐 걸어가려 했다.은범은 당황했다.시연이 오해했다고 확신했다.“시연아...”“잠시만요.”진주가 갑자기 시연의 앞을 가로막았다.여자의 직감은 빠르다. 이 짧은 순간에도 진주는 분위기를 감지했다.시연과 눈을 마주치며 조용히 말했다.“죄송하지만, 잠깐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시겠어요?”“...”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시간 없어서요. 비켜주세요.”거절이었다.진주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강단 있게 나섰다.그녀는 시연의 팔을 잡았다.“잠깐이면 돼요! 금방 끝날 말이에요.”그녀는 은범을 흘끗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당신이 은범이가 좋아하는 사람이죠? 그런데 오해하신 것 같아요. 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그냥 친구일 뿐이거든요.”“하고 싶으신 말, 다 하신 거예요?”
유건은 결국 함정에 빠졌다. 재빨리 걸음을 멈추고 시연을 놓아주었다.“배가 어떻게 아파? 심한...”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시연은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지시연!”유건은 당황하며 몇 걸음에 따라잡아 그녀를 끌어안았다.시연은 눈을 크게 뜨고 온몸이 얼어붙었다. 뭔가 반응할 새도 없이, 유건의 넓고 따뜻한 손이 여자의 눈을 가렸다.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보지 마.”“뭐를요...?”시연은 놀라며 남자의 손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왜 이러는 건데요? 안 가려도 돼요...”‘안 가리면 어떡하라고?!’유건은 앞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노은범이 하진주에게 자기 재킷을 벗어 걸쳐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이걸 시연이가 본다면 얼마나 상처받을까?’“유건 씨!”시연이 저항하자, 유건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너, 으음...”시연이 놀라서 입을 열려는 순간, 유건이 그녀를 덮치듯 입을 맞췄다.‘뭐야?!’시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놔... 윽...”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유건은 더욱 거칠게 여자의 입술을 탐했다.남자의 키스는 점점 깊어졌고, 점점 더 강렬해졌다.시연은 필사적으로 유건의 가슴을 두드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라 손을 번쩍 들었다.찰싹!깨끗한 타격음이 울리며 유건의 뺨이 돌아갔다.유건은 순간 멍해졌다.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며 충격받은 표정으로 시연을 바라보았다.“미안해, 나는...”그는 단지 시연이 은범을 보지 못하게 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키스하고 나서 이성을 잃어버렸다.그녀를 원했고, 가까이하고 싶었으며, 심지어 그녀를 독차지하고 싶었다.시연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마치 혐오스러운 존재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너무나 속상하다는 듯 말했다.“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우리... 그래도 예전에는 부부였고, 이 사람의 포옹과 키스를 받아들일 이유라도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이제 우리는 이혼을 앞둔 상태잖아!
연회장으로 돌아온 유건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그는 소미를 한 번 바라보고 나직이 말했다.“가자, 별로 재미없어.”소미는 아무런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건의 표정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무슨 일 있어요?”“아니.”유건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너무 늦게 자면 두 사람한테 안 좋잖아.”“네.”소미는 미소를 띠었지만 속으로 불안했다.‘어떡하지? 이 사람, 아이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지금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나중에 크게 곤란해질지도 몰라.’“왜 그래?”유건은 소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눈을 가늘게 떴다.“몸이 안 좋아?”“아니에요.”소미는 웃으며 얼버무렸다.“그냥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같이 가자.”“괜찮아요...”“아니.”유건은 단호했다. 그녀가 지금 상태에서 혼자 다니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니 말이다.그는 결국 화장실 입구까지 소미를 데려다주었다.“천천히 다녀와.”“네.”소미는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이 남자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이렇게 다정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겠어?’유건은 조금 떨어진 흡연 구역으로 이동했다.담배를 꺼내 들었지만, 불을 붙이기도 전에 시연이 책가방을 메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았다.‘시연이? 여기 온 이유는 뭘까?시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뭐 찾는 거야?”“네?”시연이 놀라 돌아보았다.유건을 보자, 그녀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여기 B동 6층 맞나요?”유건은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6층은 맞는데, 여긴 B동이 아니라 C동이야.”“아.”시연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두드렸다.“아, 진짜! 또 길을 잘못 들었네요.”“또?”유건은 그녀의 찡그린 얼굴을 보며 무심코 물었다.“길을 자주 잃어버려?”시연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사실, 자주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방향 감각이 떨
[알겠습니다, 형님.]전화를 끊자, 소미가 방으로 들어왔다.“유건 씨.”유건은 담배를 비벼 끄고 손을 저었다.“먼저 들어가 있어. 여기 담배 냄새 나.”담배는 임신한 여자에게 좋지 않으니까.“아, 네.”연기가 가라앉은 후, 유건은 문을 열고 들어가 소미가 건넨 물을 받았다.“좀 괜찮아요?”소미가 다정하게 물었다.“네.”유건은 물을 마시고 소파에 기대었다.“너무 많이 마셨나 봐.” 그는 관자놀이를 가볍게 눌렀다.“머리가 좀 아프네. 그래도 잠깐 앉아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제가 마사지해 드릴까요?”소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건의 곁에 앉으며 소매를 걷었다.남자가 거부할 틈도 없이, 그녀는 말했다.“눈 감아요. 우리 아빠가 술 마셨을 때 자주 해드렸어요.”여자의 손끝이 관자놀이를 누르자, 유건은 거부하지 않았다.“고마워.”소미가 잔잔히 웃었다.“저한테 뭘 그렇게 고마워하세요? 제가 유건 씨를 도로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우린, 앞으로 평생 함께할 사이잖아요.”‘그래, 앞으로도 함께할 사람이지.’유건은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익숙해져야 했다.소미의 손길이 생각보다 편안해서 그는 점점 나른해졌다.“유건 씨?”그녀가 속삭이듯 부르자, 유건은 반쯤 감긴 눈으로 대답했다.“응...”소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가슴이 뛰었다.‘이건 기회야!’‘내 임신은 거짓말이잖아... 시간을 더 끌면 고유건은 의심할 거고, 배를 감출 수도 없을 거야.’‘그 전에 내가 확실히 해야 해. 이 사람과 더욱 가까워지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그녀는 숨을 죽이고 목에서 어깨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유건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남자의 입술과 단 한 뼘도 남지 않은 거리.하지만, 소미는 남자의 입술이 닿기 직전, 유건의 눈이 번쩍 뜨였다.여자가 너무 가까이 있는 걸 깨닫고, 순간 멈칫했다.“소미 씨?”“유건 씨.”소미는 포기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키스해 줘요.”유건은 말이 막혔고, 본능적으로 미간이 좁혀졌다
유건은 회의를 마치고 대표실로 돌아왔다.비서가 다가와 보고했다.“대표님, 장소미 씨가 도착하신 지 좀 되었습니다.”오늘 밤, 유건은 한 연회에 참석해야 했고, 이번엔 소미가 파트너였다.“유건 씨.”소미가 환하게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그냥 앉아 있어.”유건은 손을 살짝 흔들며 무심하게 말했다.“조애린 씨한테 들었는데, 일을 계속할 생각이야?”“네, 그래요.”소미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설명했다.“양 감독님의 작품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게다가, 이미 절반 정도 촬영했거든요. 광고를 비롯한 일정이 과하게 많은 것도 아니고요. 저는 가만히 있는 게 더 싫어요.”잠시 생각하던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미의 배를 힐끗 바라보았다.“몸에 이상 없으면 소미 씨 뜻대로 해. 다만, 배가...”언젠가는 드러날 것이었다.“아, 아직 문제없어요. 사극이라 의상 때문에 티도 안 나고요.”소미는 오늘 넉넉한 원피스를 입고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평평한 신발까지 신은 것을 떠올렸다.유건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양 감독님께 소미 씨 촬영 분량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달라고 이야기해.”“네, 유건 씨 말대로 할게요.”시간이 늦어서 유건은 휴게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소미와 함께 대표실을 나섰다....연회는 해성 호텔에서 열렸다.주차장에서, 노은범이 먼저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고마워.”진주가 미소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은범은 담담히 말했다.“별일 아니야.”그가 어색해하는 모습을 본 하진주는 웃으며 말했다.“너무 긴장하지 마. 우리 약속했잖아? 친구처럼 지내기로.”“알아.”은범은 살짝 찡그렸다.“하지만, 네가 나 때문에 불편해질 수도 있잖아.”“괜찮아.”진주는 고개를 저었다.“이건 너만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엄마도 연관되어 있으니까.”그녀는 남자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았다.“그냥 편하게 가자. 시간이 지나면 부모님들도 우리가 진짜 안 될 거라고 깨달으시겠지.”은범은 한결 편안해졌다.‘나보다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하진주를 힐끗 바라보았다.“내가 보기엔 진주가 참 괜찮은 것 같은데, 정말 아쉬워. 우리 은범이 복이 없는 탓이지, 뭐.”진주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이모, 그런 말씀 마세요. 과찬이세요.”“진주야.”강수희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진주의 손을 잡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지난번에 은범이랑 같이 연극 봤다면서? 그 후로는 어떻게 된 거야? 솔직히 말해 봐. 은범이의 뭐가 마음에 안들었니?”“그게...”진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할까?’지난번에 은범과 미리 조율한 대로, 진주는 연극을 본 후 자기 부모님께 자신이 은범을 향한 마음이 없다고 전했다. 이는 진주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거였고, 은범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강수희가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진주는 은범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모, 은범이는 괜찮은 사람이에요. 다만, 저희는 서로를 잘 모르잖아요...”이 말이 강수희에게 희망을 주고 말았다.“그럼, 좀 더 만나보고 알아가면 되잖아? 제발, 은범이에게 기회를 줘 봐, 응?”“어머니!”은범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다가왔다.그는 먼저 방혜령에게 인사를 건넸다.“이모, 오랜만이네요.”그리고 곧바로 어머니를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어머니, 이모는 어머니를 뵈러 오신 거잖아요.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내가 이러는 건...”“괜찮아.”방혜령이 손을 흔들며 부드럽게 웃으면서 시선을 은범에게 두었다.“이제 많이 컸네? 그런데 너희 엄마 말도 틀린 건 아닌 것 같아.”그녀는 딸을 한번 흘긋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너희, 한 번 본 걸로 판단하기엔 너무 성급하지 않아? 좀 더 만나면서 알아가는 게 맞지 않나?”강수희가 기뻐하며 맞장구쳤다.“내 말이! 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어머니!”“엄마!”은범과 진주가 동시에 소리쳤다.그 모습을 보고, 방혜령과 강수희는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과장실 문 앞에서, 시연은 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형수님.]“지한 씨.”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유건 씨와 잠깐 통화할 수 있을까요?”[당연하죠. 형님도 여기 계세요.]잠시 후, 수화기 너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나야.]유건의 무심한 어조.“심폐 프로젝트팀에 내가 들어가게 된 거, 당신이 한 일이에요?”질문은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개입했다면, 바로 이해할 터였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남자의 답이 돌아왔다.[그래.]전혀 놀랍지 않았다. 시연은 눈을 감았지만, 당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여자의 침묵에, 유건은 비웃듯 말했다.[설마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벌인 일이라는 이유만으로?]시연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멍청하긴...]유건이 낮게 욕했다.[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간다는 게 너한테 어떤 의미인지, 내가 설명해야 하냐?]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팀에 들어가면 분명 시연의 수입도 늘어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경험과 기술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돈 때문이라면 이렇게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지시연.]유건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나와 관계를 끊는 게 중요해? 아니면 네 미래가 더 중요해?]책망과 걱정이 섞인 목소리.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시연도 알고 있었다.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결정을 내렸다.“고마워요, 유건 씨.”유건은 핸드폰을 쥔 채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동시에, 안도감이 밀려왔다.‘다행이네. 이 여자, 결국 받아들였어!’하지만 시연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유건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그리고 그녀는 덧붙였다.“예전엔 내가 잘못했어요. 항상 미안하게 생각해요. 앞으로는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이 잘되길 바랄게요. 그리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유건은 한참 동안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원래라면, 저 여자, 부와 명예를 누려야 마땅해. 하지만 지금은...’...차에 돌아온 지한은 유건이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즉, 유건의 온몸에서 스며 나오는 묵직한 어둠과 슬픔을 느낀 것.‘설마, 또 형수님한테 혼난 건가? 그게 아니면, 이번엔 진짜로 맞기라도 한 건가?’“형님...”“지한아.”유건의 시선이 멍하니 허공을 가로질렀다.“방법을 좀 찾아봐. 시연이가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내가 돈을 건네면, 시연이는 절대 받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연이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지 못하는 건 아닐 거야.’ ‘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시연이가 돈과 명예를 탐하는 여자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지? 정말 한심해!’...시연은 임진아 집으로 돌아온 뒤, 저녁에 양석현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교수님.”[시연아, 내일 오전에 내 사무실로 와. 할 말이 있어.]“네, 교수님.”양석현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다음 날 아침, 시연은 교대 근무도 마치지 못한 채 서둘러 외과로 향했다.양석현은 회진을 마친 후에야 시간을 냈고, 시연을 과장실로 데려갔다.“일찍 왔구나. 앉아.”시연은 긴장한 채 자리에 앉았다.“교수님, 무슨 일이신가요?”‘혹시 내가 1학년 실험 수업을 하는 데에 문제가 생긴 걸까?’“뭘 그렇게 긴장해?”양석현은 일부러 뜸을 들이다가도, 결국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은 소식이야.”그는 서랍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내 시연에게 건넸다.“이걸 작성하면, 너는 공식적으로 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가게 될 거거든.”시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교수님, 이게... 정말 규정에 맞는 건가요?”“규정대로라면, 맞지 않지.”양석현이 웃었다.“원래는 네가 대학원에 합격하면 팀에 넣을 생각이었어. 그 자체도 예외적인 거지만 말이야.” 그런데 아직 대학원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가능하게 된 걸까?양석현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말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