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 문제는 그렇게 결정되었다. 은범은 단지 묘지만 알아본 것뿐만 아니라, 풍수사에게도 의뢰하여 이장하기 좋은 날과 시간을 받았다. 당일, 날씨는 맑고, 산들바람이 불고 있었다. 성빈과 진아는 시연과 함께 묘지에 도착했는데, 그곳에 은범이 이미 와 있었다. 시연은 놀라서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은범의 시선을 피했다. 진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진성빈을 노려보았다.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 “내가 어떻게 알아?” 성빈은 태연하게 대답하며 전혀 모르는 척했다. “시연아.” 차가운 태도에도 불구하고, 은범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말했다. “명주 이모를 보내 드리는 데 오지 않으면 양심에 걸릴 것 같아서 왔어.” 진아는 바로 반박했다. “너에게 양심이라는 게 있었어?” “진아야.” 시연이 진아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진아는 불만을 억누르며 더는 말하지 않았다. 시연은 은범을 바라보며 말했다. “와줘서 고마워.” 오늘은 어머니의 안식을 위한 날이었기에, 시연도 어머니의 묘 앞에서 다투고 싶지 않았다. 은범은 기뻐하며 미소 지었다. “천만에.”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그는 속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부명주의 안장식은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시연은 어머니의 묘비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말없이 눈물을 흘렸고, 진아는 시연의 옆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뒤에서 성빈이 은범에게 속삭였다. “왜 시연이에게 다 말하지 않아?” 은범이 묘지 문제를 모두 해결했으니 시연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어야 하지 않겠냐는 의미였다. 은범은 시연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굳이 말할 필요 없어. 내가 하는 일은 시연이를 감동하게 하려는 게 아니야. 인생은 길어. 내가 시연에게 잘해주는 모든 걸 굳이 다 알릴 필요는 없잖아.” 성빈은 혀를 차며 말했다. “정말 지나치게 헌신적이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했다. “참, 시연이가 나에게 송금한 돈, 네가 처리한 거니까
“뭐라고?” “네가 직접 손으로 만든 거라고?” 유건은 깜짝 놀라 다시 셔츠를 보았다. 갑자기 셔츠가 눈에 쏙 들어왔다. “네가 한 땀 한 땀 직접 바느질해서 만든 거야?” “네.” 시연은 입술을 꼭 다물고 약간 부끄러워했다. 부명주는 생전에 패션 디자이너였고, 집에는 작업실도 갖고 있었다. 시연은 걷기도 전부터 바늘을 잡았고,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옷을 만드는 시연의 기본기는 탄탄했다. 어쩌면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았을지도 모른다. 셔츠 하나쯤 만드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유건은 겉으로는 아닌 척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시연의 뜻밖의 실력에 깜짝 놀라고 감탄했다. ‘진짜로 지시연이 직접 만든 거야! 한 땀 한 땀, 모든 바느질 자국이!’ 시연은 유건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지난번에는 미안했어요.” 그녀는 유건이 준 카드에서 또 돈을 인출해서 썼기 때문에 화낸 거라는 말은 못 하고 그냥 핑계를 댔다. 시연의 이 말은 유건에게 물러날 구실을 만들어준 셈이었다. 상대방이 한 걸음 물러서면 자신도 상대를 너그럽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좋은 남자다.“됐어.” 유건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대범한 척 말했다. “나는 상남자라 여자한테 그런 걸 일일이 따지지 않아” “그럼...” 시연은 셔츠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 셔츠, 입을 거예요?” “그냥 둬.” 유건은 자존심을 부리며 셔츠를 보지 않고 말했다. “어차피 옷장에 널리고 널린 게 셔츠야.” “아...” 시연은 속으로 생각했다.‘역시 그렇지, 고유건이 내가 만든 셔츠를 입을 리 없겠지. 아마도 옷장 깊숙이 넣어두겠지... 하지만 더 비싼 옷을 해줄 수는 없으니까...’ “그럼 저는 이만 갈게요, 일정이 좀 빠듯해서요.” 시연이 나가자 바로 주지한이 들어왔다. “형님, 이건 방금 받은 프로젝트 서류인데요...” “어, 웬 셔츠가 있네요?” 지한은 셔츠를 치우려 손을 뻗었다. “손대지 마!” 낮게 깔린 경고가
그림 미술 전시회에서 작품들을 감상하던 중, 소미는 유건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유건은 그림들을 대충 훑어보았지만, 머릿속에는 자꾸 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는 모습이 떠올랐다. ‘지시연은 내 데이트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유건 씨.” 그의 팔을 잡고 있던 소미가 손을 살짝 움직이자, 유건은 정신을 차렸다. 소미는 약간 서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일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니면 상처가 불편한 거예요?” “아니야, 일도 아니고 상처도 괜찮아.” 유건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나는 지금 대체 뭘 이렇게 신경 쓰고 있는 걸까?’ ‘지시연이 나한테 신경 쓰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나? 그 여자는 단지 명목상 아내일 뿐, 진짜는 아니니까.’ ‘게다가, 이 명분도 오래가지 않을 거야. 지금 내 옆에 있는 장소미가 진짜로 나와 함께할 사람인데...’ “그냥 그림에 몰입한 것뿐이야.” 유건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넘기고, 다정하게 물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이라도 있어? 마음에 들면 사 줄게.” “음...” 소미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목을 긁적였다. “조금 더 둘러볼게요. 아직 딱히 마음에 드는 건 안 보이네요.” 사실, 그녀는 그림에 관심이 없었다. ‘그림을 사서 뭘 하겠어?’소미에게는 그림보다 보석이나 명품 가방이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유건은 어두운 눈빛으로 잠시 소미를 응시했다. “그래, 조금 더 보자.” 유건은 날카로운 판단력으로 소미가 그림을 전혀 이해하지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당연히 금세 알아챘다. 왜냐하면 둘이 전시회장에 들어온 이후 소미의 시선은 그림에 머무르지 못하고 계속 이리저리 떠돌고 있었다. 하지만 유건은 소미의 취향이 그림이 아니라는 것에 크게 상관없었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유건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림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소미의 의도였다. 기분이 이미
“저에게 밥을 사주신다고요?” 시연은 의아했지만, 유건의 의도를 굳이 묻지는 않았고, 대신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 고유건 씨는 공식적으로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없잖아요. 여자 친구랑 몰래 데이트하는 건 못 본 척할 수 있었지만, 저는 당신의 주치의예요. 환자랑 장난칠 순 없어요.” “말이 참 많네.” 유건은 날카로운 턱선을 더욱 단단히 조이며 목젖이 위아래로 꿀렁거렸다. “밥 먹을 건지, 말 건지만 말해.” “먹어... 야겠죠?” 무표정한 유건의 얼굴을 보고 시연은 거절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실은 그가 왜 밥을 사주는지 알고 싶기도 했다. 유건은 만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이따 병실에서 보자.” ... 유건의 VIP 병실은 호텔의 로얄 스위트룸과 다를 바 없었다. 거실, 다이닝 룸, 심지어 주방까지 있었다.하지만, 오늘은 주방은 사용하지 않고, 그는 직접 외식 서비스를 주문했다. 시연이 도착하자, 음식 배달차 온 셰프가 직접 식탁을 차리고 있었다. “두 분, 맛있게 드세요.” 시연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유건은 그녀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 “그만해, 이런 거 처음 보는 사람처럼 굴지 마.” “전 정말 이런 세상을 처음 보거든요.” 시연은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맞받아쳤다. “밥 먹게 해줄 거예요, 말 거예요? 더 뭐라 하시면 저 정말 그냥 갈 거예요.” “그렇게 말만 하지 말고, 빨리 앉아서 먹자.” 유건은 콧소리를 내며 킬킬 웃었지만, 시연에게 앉으라며 의자를 직접 빼주었다. “이쪽 자리로 모셔도 될까요?” “네, 좋아요!” 시연은 의자에 앉으며 음식들을 살펴보고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전부 맛있어 보이네요.” 두 사람은 마주 앉았고, 시연은 천천히 젓가락을 들며 말했다. “근데, 왜 이러는 거예요? 이유라도 알아야 안심하고 먹을 수 있죠.” 유건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가볍게 헛기침하더니 일어나 벽 쪽으로 걸어갔다. 시연은
“어?” 소미는 차려진 식탁을 보며 두 개의 식기 세트가 마주 보고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거... 혹시 지금 유건 씨의 병실에 누구 와 있어요?” 유건은 소미가 올 줄 몰랐기 때문에 당연히 소미를 위해 준비한 것은 아니었다. 유건은 설명할 수 없는 불쾌감이 마음 깊숙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늘 아무에게나 당당했던 자신이 소미에게 뭔가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 썩 기분 좋지는 않아 말투도 조금 퉁명스러워졌다. “지한이랑 같이 밥 먹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온다네.” “아...” 소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혹시 다른 여자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그래, 그럴 리가 없지. 주지한 때문이구나.’ 그녀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혼자 먹으면 재미없잖아요. 제가 같이 먹을게요.” 유건이 가만히 서 있자 소미는 다정하게 말했다. “빨리 앉아요.” “그래.” 유건은 대답했지만,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가 앉자, 소미는 벽 쪽에 기대어 있는 그림을 보았다. ‘저건 오늘 고유건이 미술 전시회에서 산 그림이 아닌가?’ ‘고유건은 이 그림을 누군가에게 선물할 거라고 했었는데, 여기에 놓아두다니. 대체 누구에게 주려고 했던 걸까?’ 의심이 들었지만, 소미도 더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근데, 정말 뭔가 수상하네...’ ... 화장실 안에서 시연은 지루하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실습생 단톡방에서는 야근을 앞둔 의사와 간호사들이 저녁 식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김현진: 저녁 뭐 먹지?] [주하은: 구내식당 어때? 내가 사 올게, 몇 개나 가져올까?] [인턴A: 야근인데 구내식당 말고, 좀 더 제대로 된 거 먹어야지.][인턴B: 그러면 새콤한 생선찜이나 먹을까? 그리고 꼬치구이도 추가!] [인턴C: 좋아, 어디가 맛있어?]시연은 몰래 대화를 엿보다가 한마디 남겼다. [지시연: 문창길에 있는 집 맛있더라.] 시연이 임진아와 함
시연은 손목을 살짝 비틀며 유건에게 손을 놓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제 가도 돼요?” “어디로?” 유건의 목소리는 여전히 싸늘했다. 이제 시연도 화가 나기 시작해서, 입을 꾹 다문 채 말했다. “고유건 씨, 대체 저한테 왜 화내는 건데요? 밥 먹자고 해놓고 날 화장실에 두 시간이나 가둬놨잖아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화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닐까요?” 유건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시연의 말이 너무 당연해서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유건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유건 스스로도 왜 화를 내는지 알지 못했다. 심지어 왜 시연을 화장실에 밀어 넣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저 그 순간, 본능적으로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었다. 이후로 후회와 자책, 그리고 분노가 뒤섞여 현재의 감정 상태를 만든 것이었다. “하...” 시연은 한숨을 쉬며 유건에게 미소를 지었다. “농담이에요. 저 화 안 났어요. 그런 상황에서는 저도 유건 씨의 입장를 이해해요. 당연히 여자 친구가 더 중요하죠.” ‘지시연의 말은 맞지만, 따지고 보면, 지시연이 내 아내인데!’ 얽히고설킨 이 상황 속에서 유건은 여전히 시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 “너 아직 밥도 안 먹었잖아.” “맞네요.” 시연은 눈을 살짝 굴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손 좀 놔줄래요?” 그녀는 유건을 가리키며 그가 여자 친구와 함께 먹던 식탁을 가리켰다. “설마 제가 고유건 씨와 여자 친구가 남긴 음식 먹으라고 하는 건 아니겠죠? 저도 사람이에요, 키우는 개가 아니라고요.” 말하며 시연은 피식 웃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고 대표님, 대표님 집에서 키우는 개도 이런 음식 안 먹을걸요?” ‘웃긴가?’ 유건의 잘생긴 얼굴에는 차가운 표정이 떠올랐다. “농담은 여기까지예요.” 시연은 손목을 돌리며 부탁하듯 말했다. “저 정말 배고파요, 제발 밥 먹게 해줘요.” 유건은 손을 놓으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내가 새로 한 상 더 차리게 할게.” “
기나긴 죽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시연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그 모습을 본 유건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멍청한 자신에게 뺨이라도 때려주고 싶었다. 왜 화만 나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걸까? “지시연...” 유건은 후회했지만,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몰랐다. “그게 아니야,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그냥...” 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고유건 씨의 말이 맞아요. 제 배 속에 있는 애는 아버지도 모르는 아이예요. 저 같은 사람은 고유건 씨가 신경 쓸 필요 없으니까 앞으로는 저에게 신경 쓰지 마세요.” 시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지시연!” 유건은 손을 뻗어 시연을 잡으려고 했지만, 시연이 이미 빠르게 뛰어나가 그의 손은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순간 유건이 주먹을 꽉 쥐고, 엘리베이터 벽을 강하게 내리쳤다. 분노와 불편함이 그를 짓눌러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 시연이 회진하러 왔을 때, 주지한은 유건이 퇴원하려 한다고 말했다. 시연은 의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현재 유건의 상태로는 며칠 더 지켜보는 것이 좋겠다는 소견을 말했다. 특히 봉합한 복부의 실이 완전히 흡수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지만, 그때까지 쉬기에 유건은 너무 바쁜 사람이었다. 입원 중에도 일 처리를 쉬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시연은 그의 퇴원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고, 지한이 퇴원 수속을 밟으러 나갔다. “퇴원 후에도 당분간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시연과 유건은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한 사람은 의사로서 사무적으로 말만 하고, 한 사람은 환자로서 의사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그 외에 다른 대화는 전혀 없었다. 두 사람의 분위기는 이상할 정도로 어색했다.시연이 주의 사항을 전달하던 도중, 지한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형님!” 지한의 표정은 긴장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큰일 났어요! 고 어르신께서 형님이 다
고상훈은 이미 의식을 회복한 상태였고, 그의 주름진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는 지금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시연은 고상훈이 어떤 심정인지 금방 눈치챘다. “할아버지, 유건 씨는 괜찮아요. 유건 씨의 부상은 제가 다 확인했고, 제가 계속 돌보고 있어요. 저를 믿으셔야죠.” 고상훈은 알겠다는 의미로 눈을 몇 번 깜박였고, 얼굴에 안도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유건은 시연의 말을 듣고 옆으로 다가와, 고상훈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보세요, 저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고상훈은 힘겹게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할아버지, 말씀해 보세요” 고상훈은 천천히 시연의 손과 유건의 손을 잡아 함께 포개어 놓았고, 그 뜻은 분명했다. 그는 두 사람이 부부로 행복하게 살아가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유건은 목이 메며 목구멍에 돌이 걸린 듯한 기분이었다. “할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잘 지내고 있어요.” 고상훈은 너무나도 기력이 약해져 있었던 터라, 유건의 말을 들은 후 안도하며 눈을 감았다. “할아버지 좀 더 쉬셔야 해요.” ... 병실을 나서며 문을 닫자, 시연이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지 상태는 위험해 보였지만, 사실...” 유건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거 말고, 나한테 더 할 말 없어?” “무슨?” 시연은 어리둥절했다. 순간, 유건의 그림자가 그녀 위로 드리워졌다. 유건은 강한 힘으로 두 팔 벌려 시연을 꽉 끌어안았다. 한 손으로 시연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손은 등을 받치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유건의 품은 단단하고 따뜻했으며, 희미한 페퍼민트 향의 향수가 배어 있었다. 시연은 두 손을 아래로 내리고 온몸이 굳어버린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고유건 씨?”“응.” 유건은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기댔다. 마치 어른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잠깐만, 잠깐
시연보다 일찍 도착한 유건 일행은 이미 말을 타기 위한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주정빈과 유강석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고, 유건은 시연을 주시하며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를 본 부지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왜 갑자기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말을 타자고 하나 했더니, 알고 보니 여기 우리 고 대표님의 아내가 계시네.” 유건은 지하의 농담에 신경 쓰지 않고,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다 멈췄다. 지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래? 아내가 방이 없어서 곤란해하는 거 보고도 안 도와줄 거야?” ‘도와주라고?’ 유건의 입술에 미소가 살짝 번졌지만, 곧 자리를 떴다. ‘내가 도와주고 싶은데... 옆에 딴 남자가 이미 있지.’ “시연아.” 그때, 은범이 차를 주차하고 시연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시연은 입을 삐죽 내밀며 방을 예약하지 못한 일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걱정하지 마. 작은 문제야.” 은범은 우주를 그녀에게 맡기고 말했다. “내가 해결할게. 걱정하지 마.” 그가 나서자마자, 문제는 금세 해결되었다. 은범은 두 장의 방 키를 들고 시연에게 흔들며 말했다. “다 됐어.” 그는 짐을 들고 설명했다. “내가 VIP 카드가 있어서 사전 예약 없이도 가능해.” 시연이 여전히 입을 삐죽 내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은범은 부드럽게 말했다. “왜 화가 나 있어?” 시연은 투덜거리며 말했다. “성빈이도 못 오게 됐어...” 알고 보니 그 일 때문에 화가 난 거였다. “괜찮아.” 은범은 미소 지으며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우리는 우주를 위해 온 거잖아. 우주가 기뻐하는 게 가장 중요해. 나머지는 사소한 문제야.” 시연은 그의 말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미소를 지었다. “응.”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분위기가 훈훈했다. “우주 손 잘 잡고, 방에 짐부터 놓으러 가자.” “그래.” 이 광경을 목격한 지하는 깜짝 놀라며 유건을 쳐
며칠 후, 노은범은 GP그룹에 갔다. HUA테크는 GP그룹의 요구에 따라 절차를 밟았고, 오늘은 고유건을 만나러 온 날이었다. 유건의 비서가 은범을 작은 회의실로 안내했고, 은범이 막 자리에 앉자 유건이 도착했다. 은범은 일어나 인사했다. “고 대표님.” “노 사장님.” 유건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악수했다. “앉으세요.” 두 사람은 짧은 인사 후 바로 협력에 대해 자세히 논의했다. 유건은 은범의 능력에 매우 만족했고, 바로 계약을 결정했다. “협력하게 되어 기쁩니다.” “저야말로 고 대표님께서 저희를 선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협력 잘 부탁드립니다.” 관례에 따라 저녁에는 식사 자리가 마련되었다. 유건이 초대했다. “노 사장님, 저녁 식사 같이하시죠?” 은범은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고 대표님의 초대에 감사드립니다만, 잠시 후에 일정이 있어서 오늘 저녁엔 G시에 있지 않습니다. 죄송하지만, 다음에 제가 장소를 정해서 고 대표님을 초대하겠습니다.”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은범이 떠나자마자, 유건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늘은 금요일인데, 노은범이 저녁에 G시에 없다고? ‘CLOUD’는 G시 밖에 있는 곳이야. 시연도 오늘 저녁에 떠난다고 말했는데... 그러니까 이 여자는, 노은범과 함께 놀러 가는 거야?!!!’ 핸드폰이 울리자 유건은 짜증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빨리 말해!” 부지하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렇게 거칠게 나올 것까진 없잖아! 누가 너 건드렸어? 저녁에 우리랑 같이 안 갈 거야?] 유건은 불쾌한 기분에 답했다. “너희들이랑 술 마시고 카드 게임하는 게 그렇게 재밌겠냐?” 지하는 웃으며 물었다. [그럼, 고 대표님. 뭐가 재밌는지 말씀해 보시죠?]유건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휴가 가자. CLOUD가 좋겠군.” ... 은범은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뭐?” 강석은 갑작스럽게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누가 연애 경험이 많다고? 나에게 그런 딱지 붙이지 마! 그 여자들은 다 내 여자 친구가 아니라 그냥 친한 여사진들이라고!” 나머지 세 사람은 가차 없이 눈을 굴리며 그를 향해 빈정거렸다. “헤헤.” 강석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개의치 않는 듯 웃었다. “애 있는 여자는 한 번도 만난 적 없지...” “하하!” 정빈이 강석을 비웃으며 말했다. “그건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거지. 우리 강석 도련님이 만약 마음에 들었다면, 애가 있든 없든 상관없지. 그렇지?”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두 사람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강석은 웃으며 말했다. “그게 뭐 어때서? 요즘 같은 시대에 애 하나 때문에 평생을 묶어두겠어?” “네 말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해.” 그동안 조용히 있던 지하가 끼어들며 말했다. “지금 시대가 어떻든, 옛날에 많은 나라들은 왕의 어머니도 딱 한 번 결혼해서 아이를 낳기도 했지만, 결국 또 다른 군주와 결혼해 많은 자식을 낳았잖아.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고.” 지하는 유건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진짜 사랑한다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유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깊은 눈빛 속에 뭔가를 감추고 있었다. 마음이 복잡해진 유건은 이내 흥미를 잃고, 밤 10시도 되기 전에 자리를 떠났다. 본가로 가는 길에 그는 문득 생각했다. ‘시연은 퇴근했을까?' 그때, 그는 우연히 버스에서 내리는 시연을 보았다. 이곳에서 집까지는 거리가 꽤 있었고, 버스가 다니지 않는 길이었다. 유건은 아무 말 없이 차를 그녀 가까이로 몰고, 창문을 내렸다. “타.” 시연은 남자가 유건인 것을 보고는, 거절하지 않고 차에 올랐다. “정말 우연이네요.” 차에 앉자마자 시연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녀는 메시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유건은 그녀를 슬쩍 바라보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유건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눈빛이 어두워졌다. “맞아. 왜?” “감사해요.” 시연은 그를 바라보며 매우 진지하게 말했다. “정말, 감사해요. 어릴 때부터 저에게 잘해준 사람은 거의 없었거든요.” 유건은 가슴속이 찌릿하게 울리며, 그 느낌이 온몸에 퍼졌고, 겨우 입꼬리를 억누르며 말했다. “흥, 그래.” “그런데...” 시연이 무언가 더 말하려 했으나,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 “현진아? 내 친구 외투가 너에게 있다고? 알았어... 아, 그리고 아직 너한테 고맙단 말도 못 했네. 그날 밤, 내 친구를 위해 침대를 양보해 줘서 고마워. 너무 늦었고, 비까지 쏟아져서 호텔을 못 잡았거든. 너 주사실에서 자느라 아주 피곤했지? 나중에 밥 한번 살게.” 시연은 통화하면서 유건에게 지하철역을 가리키며 자신이 바쁘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고는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뛰어 들어갔다. “천천히 가!” 유건은 그녀가 그 말을 들었는지 확신하지 못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의 입꼬리는 결국 올라가고 말았다. ‘이 여자가 결국 나한테 고마워하고, 내 마음을 알고 있었네!’ 게다가, 방금 시연이 전화에서 말한 내용을 유건도 아주 분명히 들었다. ‘그날 밤, 비가 쏟아지던 날, 그건 바로 노은범이 왔던 날이 아닌가?’ ‘이 여자는 노은범과 같은 방에서 자지 않았어!’ ‘이게 뭘 의미하는 거지? 그러니까 노은범은 지시연을 버렸었고, 두 사람은 아직 화해하지 않은 상태이야! 흥!’ 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마음속 깊이 감추고 있는 생각을 들키지 않으려 했다. 아무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 태산요양병원. 은범과 시연은 문 앞에서 서 있었다. 방 안에서는 CA국에서 온 전문가들이 우주를 검사하고 있었다. 시연은 불안한 마음으로 손을 꼭 쥔 채 떨고 있었다. “시연아.” 은범은 시연의 옆에 서서, 그녀를 꼭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
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힘차게 두근거리는 심장은 그녀의 진심을 속일 수 없었다. 전혀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에게 잘해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얼마 되지 않는 만큼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누군가 시연에게 친절을 베풀면, 그 작은 호의조차도 그녀는 감사하게 여기며 마음에 새겼다. 그리고 남이 자신에게 베푼 작은 호의를 열 배로 갚으려 했다. ... 강울대학교병원을 나선 시연은 고씨 가문의 본가로 돌아갔다. 고상훈은 매우 기뻐하며 곧바로 유건에게 전화를 걸었고, 시연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며칠 동안 네가 없어서 그런지, 우리 유건이도 뭘 그렇게 바쁜지 하루 종일 얼굴을 못 봤어. 마침 잘 됐어, 저녁에 같이 밥을 먹자.” 그러나 전화를 걸자, 유건은 말했다. [할아버지, 저 바빠서 못 돌아갑니다.] “뭐가 그렇게 바빠?” 고상훈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을 것 아니냐? 더군다나 시연이가 출장 갔다가 일주일 만에 돌아왔는데...” [할아버지, 회의가 있어서 이만 끊을게요.]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고상훈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이런 고얀 것! 정말 무례하군!” “할아버지.” 시연은 속으로 알고 있었다. 유건이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화내지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오늘 저녁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할아버지랑 밥도 먹고, 같이 바둑도 두고, 불경도 읽어드릴게요. 괜찮죠?” “좋지, 좋지.” 순식간에 고상훈은 미소를 지으며 기뻐했다. 그날 저녁, 유건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시연은 소파에서 눈을 떴다. 그때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고유건이 돌아왔나?’ ‘침대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니, 아마 아침에 돌아온 것 같네.’ 물소리가 멈추고, 유건은 욕실에서 나와 곧바로 옷방으로 들어갔다. 마치 그녀를 보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정
GP그룹 회의실. 주지한은 서류 폴더 하나를 펼쳐 유건 앞에 놓았다. 최근 GP그룹에서 추진 중인 프로젝트에 기술 협력 파트너가 필요한데, 현재까지 적합한 후보가 없는 상태였다. 이번에 제출된 것은 두 번째 후보군이었다. 유건은 한눈에 서류를 훑었다. [HUA테크, CEO 겸 총괄 엔지니어, 노은범]유건의 손가락이 ‘노은범’이라는 세 글자를 톡톡 두드렸다. 지한이 말했다. “형님, 노은범은 비록 최근에 귀국했지만, 해외 유학 시절 뛰어난 성과를 냈고, 여러 번 과학 기술상을 수상한 인재입니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노은범은 매우 드문 전문가였다. 유건은 사업가이자 남자였다. 사업상의 문제를 감정과 잘 분리했고, 또한 사적인 감정으로 인해 일을 그르치지 않았다. “좋아, HUA테크와 절차를 진행해.” 저녁에 유건은 부지하 등과 술자리 약속이 있었다. 유건은 노은범에 관해 이야기하며 물었다.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게 있어?” “노씨 가문의 도련님 말이지.” 주정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그거 못 들어봤어? 사람들이 G시 제일 미남이라고 평가했잖아.” 유건의 머릿속에 노은범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유건조차도 은범이 그 ‘칭찬’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지시연은 노은범의 외모에 반한 거야?!’ 유건은 무의식적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답답한 숨을 내쉬었고, 웅얼거리듯 말했다. “너 여자냐? 누가 외모 얘기를 물었어?” “그럼 뭘 묻는 건데?” 유강석은 웃으며 말했다. “은범 도련님은 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았고, 별다른 나쁜 습관도 없어. 너처럼 남녀 관계도 깨끗하고...” 하지만, 그도 말을 돌려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너는 예전 얘기고, 지금은 본처와 첩을 두 손에 잡고 있는 상태잖아!” 유건은 침묵했다. ‘결국 노은범이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었던 거야?’ ‘좋네.’ ‘지시연도 눈이 멀진 않았고, 원하
문이 열리자, 노은범의 부드럽고 우아한 얼굴이 드러났다. 방금 샤워를 마친 그는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고, 상체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서 있었다. 하체는 시연이 방금 김현진에게서 빌린 널찍한 운동복 바지만 입고 있었다. 유건은 그를 가만히 응시하며,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 대표님.” 은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오신 걸 보니, 시연이 찾으러 오셨나 봅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공기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은범은 말했다. “시연이 지금 욕실에 있어요.” 그는 이 말에 오해의 여지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남자의 직감으로, 은범도 유건이 시연에게 남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고유건은 단순히 시연의 환자가 아니었어...’ 유건의 얼굴은 무표정하고 차가웠다. 지금 이 상황은 그를 화나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유건은 억누르고 있었다. 그는 그저 낮게 말했다. “시연이 어디 있지? 직접 만나야겠어.” “은범아, 누구야?” 바로 그때, 시연이 나와 은범의 어깨 너머로 이쪽을 보며 걸어왔다. 유건은 은범을 무시하고, 시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고유건 씨?” 시연은 놀라며 물었다. “여긴 왜 왔어요?” ‘이 남자는 조금 전까지도 장소미와 함께 있던 게 아닌가? 두 사람이 끌어안고 있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따라와.” 유건은 시연의 손목을 잡고 이끌려 했다. 그러나 은범이 유건을 막아섰다. “고 대표님, 이 손 놓으세요.” 그 순간, 팽팽한 긴장감이 퍼져나갔다. 유건은 비웃으며 가볍게 콧방귀를 뀌고, 시연에게 물었다. “나랑 갈 거야, 말 거야?” 시연은 갈등을 피하기 위해 말했다. “은범아, 고 대표님과 몇 마디만 하고 올게. 걱정하지 마.” 시연이 이렇게 말하자, 은범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놓아주며 당부했다. “만약에 너를 괴롭히면 바로 소리 질러.” “알았어..
“설마 우리 우주를 위해서?” 시연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물론이지.] 은범은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너와 약속한 일은 반드시 지킬 거야.] 시연은 이 일이 우주에 관한 것인 만큼 더는 따지지 않았다. “그럼 도착하면 전화해.” [알겠어.]전화를 끊고, 은범은 미소를 지었다. 비록 시연이 우주 때문에 연락을 받았을 뿐이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시연이 자신을 의지하게 만들고, 결국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 비는 점점 더 굵어졌다. 진아는 문 앞에 서 있는 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비가 쏟아지네.” 그러더니 진아도 궁금한 듯 물었다. “누구 기다리는 거야? 너 정말 남편 기다리는 망부석처럼 보이는데...”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시연이 뒤돌아보며 대답했다. “나 좀 나갔다 올게.” 시연은 1층 공터로 내려갔고, 그곳에서는 은범이 차를 세우고 문을 열고 나오는 중이었다. 시연은 그를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됐어?” 은범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젖어 있었고, 얼굴과 옷에는 진흙이 잔뜩 묻은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은범은 웃으며 대답했다. “오는 길에 타이어가 터져서 타이어를 갈아 끼우느라 이렇게 됐어.” 시연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 내 잘못이야.” “그렇게 말하지 마.” 은범은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진 걸 보고 말렸다. “내가 창우면에 오지 않았다 해도 타이어는 터졌을 거야.” 그는 시연의 뒤를 힐끗 보며 말했다. “나 안으로 들어가도 돼?” “아, 맞다!” 시연은 그를 손짓해 재촉하며 말했다. “어서 들어와!” “그래.” 시연은 그를 따라 2층으로 데려갔다. “여기는 병원 직원 숙소야. 좀 낡고 허름하지만, 화장실이 있으니까 샤워는 할 수 있어.” 말을 나누며 두 사람은 시연의 방에 도착했다. 시연은 문을 열며 말했다. “나랑 진아는 한방을 써.”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면서, 유건은 시연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유건의 전화를 전혀 받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하자, 시연은 의료팀과 함께 물품을 정리하고, 차에 싣고 출발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원래 그녀는 마지막 차로 떠나려 했으나, 이제 그럴 필요도 없었다. 시연의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 유건의 이름을 보자, 시연은 아무 말 없이 핸드폰을 ‘비행기 모드’로 바꿨다. 그 순간, 유건은 차를 몰고 병원으로 들어왔지만, 이미 첫 번째 의료 차량이 출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여기 주차하시면 안 됩니다. 중앙 주차장으로 가세요.” 유건은 어쩔 수 없이 차를 돌려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서둘러 응급실로 향하며 물었다. “지시연 선생님 계신가요?” 접수대의 간호사는 시연과 친분이 있었다. “지 선생님이요? 방금 의료지원 차량과 함께 떠났어요.” “떠났다고요? 언제요?” “저기요!” 간호사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방금 출발한 저 차요...” 간호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건은 벌써 달려 나갔다. “시연아! 지시연!” 막 출발한 차량은 병원 문을 막 나섰고, 차의 속도는 아직 빠르지 않았다. 차 안에서는 누군가가 차를 쫓아오는 것을 발견했다. “어? 저 사람 우리 차를 쫓아오는 거야?” “당연하지! 엄청나게 빨리 달리잖아!” “오, 키가 크네. 최소 190cm는 되겠어. 정말 잘생겼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다들 한 번 봐봐. 저 사람은 누구를 쫓아오는 거야?” “맞아, 맞아. 일단 모두 일어나서 누굴 쫓는지 알아보자고. 뭔가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차 안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운전기사도 일부러 속도를 늦췄다. 하지만 시연만은 차에 오르자마자 음악을 틀고 이어폰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는 차 안의 소란을 전혀 알지 못했다. 차가 병원을 빠져나가 큰길로 들어서려 할 때, 운전기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