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소미는 차려진 식탁을 보며 두 개의 식기 세트가 마주 보고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거... 혹시 지금 유건 씨의 병실에 누구 와 있어요?” 유건은 소미가 올 줄 몰랐기 때문에 당연히 소미를 위해 준비한 것은 아니었다. 유건은 설명할 수 없는 불쾌감이 마음 깊숙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늘 아무에게나 당당했던 자신이 소미에게 뭔가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 썩 기분 좋지는 않아 말투도 조금 퉁명스러워졌다. “지한이랑 같이 밥 먹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온다네.” “아...” 소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혹시 다른 여자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그래, 그럴 리가 없지. 주지한 때문이구나.’ 그녀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혼자 먹으면 재미없잖아요. 제가 같이 먹을게요.” 유건이 가만히 서 있자 소미는 다정하게 말했다. “빨리 앉아요.” “그래.” 유건은 대답했지만,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가 앉자, 소미는 벽 쪽에 기대어 있는 그림을 보았다. ‘저건 오늘 고유건이 미술 전시회에서 산 그림이 아닌가?’ ‘고유건은 이 그림을 누군가에게 선물할 거라고 했었는데, 여기에 놓아두다니. 대체 누구에게 주려고 했던 걸까?’ 의심이 들었지만, 소미도 더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근데, 정말 뭔가 수상하네...’ ... 화장실 안에서 시연은 지루하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실습생 단톡방에서는 야근을 앞둔 의사와 간호사들이 저녁 식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김현진: 저녁 뭐 먹지?] [주하은: 구내식당 어때? 내가 사 올게, 몇 개나 가져올까?] [인턴A: 야근인데 구내식당 말고, 좀 더 제대로 된 거 먹어야지.][인턴B: 그러면 새콤한 생선찜이나 먹을까? 그리고 꼬치구이도 추가!] [인턴C: 좋아, 어디가 맛있어?]시연은 몰래 대화를 엿보다가 한마디 남겼다. [지시연: 문창길에 있는 집 맛있더라.] 시연이 임진아와 함
시연은 손목을 살짝 비틀며 유건에게 손을 놓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제 가도 돼요?” “어디로?” 유건의 목소리는 여전히 싸늘했다. 이제 시연도 화가 나기 시작해서, 입을 꾹 다문 채 말했다. “고유건 씨, 대체 저한테 왜 화내는 건데요? 밥 먹자고 해놓고 날 화장실에 두 시간이나 가둬놨잖아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화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닐까요?” 유건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시연의 말이 너무 당연해서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유건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유건 스스로도 왜 화를 내는지 알지 못했다. 심지어 왜 시연을 화장실에 밀어 넣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저 그 순간, 본능적으로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었다. 이후로 후회와 자책, 그리고 분노가 뒤섞여 현재의 감정 상태를 만든 것이었다. “하...” 시연은 한숨을 쉬며 유건에게 미소를 지었다. “농담이에요. 저 화 안 났어요. 그런 상황에서는 저도 유건 씨의 입장를 이해해요. 당연히 여자 친구가 더 중요하죠.” ‘지시연의 말은 맞지만, 따지고 보면, 지시연이 내 아내인데!’ 얽히고설킨 이 상황 속에서 유건은 여전히 시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 “너 아직 밥도 안 먹었잖아.” “맞네요.” 시연은 눈을 살짝 굴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손 좀 놔줄래요?” 그녀는 유건을 가리키며 그가 여자 친구와 함께 먹던 식탁을 가리켰다. “설마 제가 고유건 씨와 여자 친구가 남긴 음식 먹으라고 하는 건 아니겠죠? 저도 사람이에요, 키우는 개가 아니라고요.” 말하며 시연은 피식 웃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고 대표님, 대표님 집에서 키우는 개도 이런 음식 안 먹을걸요?” ‘웃긴가?’ 유건의 잘생긴 얼굴에는 차가운 표정이 떠올랐다. “농담은 여기까지예요.” 시연은 손목을 돌리며 부탁하듯 말했다. “저 정말 배고파요, 제발 밥 먹게 해줘요.” 유건은 손을 놓으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내가 새로 한 상 더 차리게 할게.” “
기나긴 죽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시연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그 모습을 본 유건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멍청한 자신에게 뺨이라도 때려주고 싶었다. 왜 화만 나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걸까? “지시연...” 유건은 후회했지만,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몰랐다. “그게 아니야,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그냥...” 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고유건 씨의 말이 맞아요. 제 배 속에 있는 애는 아버지도 모르는 아이예요. 저 같은 사람은 고유건 씨가 신경 쓸 필요 없으니까 앞으로는 저에게 신경 쓰지 마세요.” 시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지시연!” 유건은 손을 뻗어 시연을 잡으려고 했지만, 시연이 이미 빠르게 뛰어나가 그의 손은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순간 유건이 주먹을 꽉 쥐고, 엘리베이터 벽을 강하게 내리쳤다. 분노와 불편함이 그를 짓눌러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 시연이 회진하러 왔을 때, 주지한은 유건이 퇴원하려 한다고 말했다. 시연은 의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현재 유건의 상태로는 며칠 더 지켜보는 것이 좋겠다는 소견을 말했다. 특히 봉합한 복부의 실이 완전히 흡수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지만, 그때까지 쉬기에 유건은 너무 바쁜 사람이었다. 입원 중에도 일 처리를 쉬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시연은 그의 퇴원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고, 지한이 퇴원 수속을 밟으러 나갔다. “퇴원 후에도 당분간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시연과 유건은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한 사람은 의사로서 사무적으로 말만 하고, 한 사람은 환자로서 의사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그 외에 다른 대화는 전혀 없었다. 두 사람의 분위기는 이상할 정도로 어색했다.시연이 주의 사항을 전달하던 도중, 지한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형님!” 지한의 표정은 긴장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큰일 났어요! 고 어르신께서 형님이 다
고상훈은 이미 의식을 회복한 상태였고, 그의 주름진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는 지금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시연은 고상훈이 어떤 심정인지 금방 눈치챘다. “할아버지, 유건 씨는 괜찮아요. 유건 씨의 부상은 제가 다 확인했고, 제가 계속 돌보고 있어요. 저를 믿으셔야죠.” 고상훈은 알겠다는 의미로 눈을 몇 번 깜박였고, 얼굴에 안도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유건은 시연의 말을 듣고 옆으로 다가와, 고상훈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보세요, 저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고상훈은 힘겹게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할아버지, 말씀해 보세요” 고상훈은 천천히 시연의 손과 유건의 손을 잡아 함께 포개어 놓았고, 그 뜻은 분명했다. 그는 두 사람이 부부로 행복하게 살아가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유건은 목이 메며 목구멍에 돌이 걸린 듯한 기분이었다. “할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잘 지내고 있어요.” 고상훈은 너무나도 기력이 약해져 있었던 터라, 유건의 말을 들은 후 안도하며 눈을 감았다. “할아버지 좀 더 쉬셔야 해요.” ... 병실을 나서며 문을 닫자, 시연이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지 상태는 위험해 보였지만, 사실...” 유건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거 말고, 나한테 더 할 말 없어?” “무슨?” 시연은 어리둥절했다. 순간, 유건의 그림자가 그녀 위로 드리워졌다. 유건은 강한 힘으로 두 팔 벌려 시연을 꽉 끌어안았다. 한 손으로 시연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손은 등을 받치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유건의 품은 단단하고 따뜻했으며, 희미한 페퍼민트 향의 향수가 배어 있었다. 시연은 두 손을 아래로 내리고 온몸이 굳어버린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고유건 씨?”“응.” 유건은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기댔다. 마치 어른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잠깐만, 잠깐
시연은 입을 가리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을 휘저었다. 유건의 손에 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빨리!” 유건은 다급해졌다. 결국, 시연은 참지 못하고 결국 그의 손 위에 토하고 말았다. 그의 외투에도 제법 많은 토사물이 묻었다. “죄송... 죄송해요.” 시연은 가쁜 숨을 내쉬며 얼굴이 창백해졌다. “괜찮아.”유건은 외투를 벗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는 자리를 떠났고, 돌아왔을 때 셔츠에 물이 조금 묻어 있었다. 시연은 그가 자신이 만든 셔츠를 입지 않은 것을 보았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때, 좀 괜찮아졌어?” 유건은 시연 앞에 다시 쪼그리고 앉아, 그녀의 긴 속눈썹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원래 배가 고팠는데, 토하고 나니 더 배 속이 더 허전해졌겠어. 아까 나왔던 음식은 못 먹겠고, 뭐 먹고 싶은 게 있어?” 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음... 저는 그냥 수제비가 먹고 싶어요.” 시연이 뜻밖의 음식을 말하자 유건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시연은 그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기에 말을 꺼내기가 망설여졌다. “왜 하필 그게 먹고 싶어?” 유건은 당황스러웠다. 시연이 6성급 호텔의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모든 고급 음식을 다 마다했기 때문이다. 그는 곧바로 일어나 차 키를 집어 들었다. 시연은 유건이 화가 난 줄 알고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또 화가 났구나!’ “가자.” 유건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여기에는 네가 원하는 수제비가 없어.” “아...” 시연은 갑자기 속이 상해서 아무 말 없이 유건을 따라나섰다. 차에 올라타자, 그녀는 그저 병원 구내식당에서 라면이나 먹으면 딱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차가 한참을 달리자, 창밖을 바라보던 시연은 차가 진행하는 방향이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이 방향은 강울대학교병원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었다. 유건은 운전대
시연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매우 진지하게 대답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전자일 수도 있고, 후자일 수도 있고, 어쩌면 둘 다, 아니면 둘 다 아닐 수도 있어요.” 그녀는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시연의 이 대답에 유건은 충격을 받아 동공이 확장된 눈으로 시연을 바라보았다. ‘이 여자는 도대체 어떤 쓰레기 같은 남자를 만난 걸까?’ 유건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고, 그의 표정은 더욱 험악해졌다. “그렇게 임신한 아이를 낳겠다는 거야?” ‘아이를 낳을지 말지는...’ 시연은 조심스럽게 배를 만지작거렸다. 사실 그녀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단지, 그 아이를 포기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유건의 눈에는 그녀가 쓰레기 같은 남자에게 당한 순진한 여자로 보였다. “대답하지 마!” 갑자기 유건은 담배와 라이터를 들고 발코니로 나갔다. 그의 뒷모습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또 화가 난 걸까?’ 시연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정말 화를 잘 내는 사람이네. 기분이 왔다 갔다 하니 본인도 참 피곤하겠네...’ ‘도대체 장소미는 어떻게 고유건의 성격을 견디고 있는 걸까?’ 하지만 시연도 곧 생각을 바꿨다. ‘아마도 고유건이 장소미와 함께 있을 때는 다를 거야.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와 다른 사람을 분명 다른 방식으로 대할 테니까.’ 시연은 고개를 숙이고 수제비를 먹었다. 자신이 억지로 유건의 아내 자리를 차지한 이상, 그의 마음속에 있는 여자와 자신을 비교할 수는 없었다. 어느 정도 배가 차자 식사를 마친 유건은 시연을 다시 병원으로 데려다주기로 했다. “병원으로 가? 아니면 기숙사로?” “기숙사로요.” 유건은 그녀를 기숙사 앞에 데려다주며 한마디 내뱉었다. “여기 기숙사, 건물 정말 낡았네.” “맞아요.” 시연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강울대학교는 역사가 깊잖아요. 기숙사 건물이 오래된 건 당연해요.” 그녀는
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 주는 건 분명 기쁜 일이야. 하지만, 현진아, 나한테 시간 낭비하지 마.” 직설적이면서도 여지를 남기지 않는 단호한 말이었다. 그녀가 현진을 이곳으로 부른 것은 사실 현진을 거절하기 위해서였다. 현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왜... 뭐가 시간 낭비야?” 시연은 차마 현진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있어서 현진은 그저 스쳐 가는 사람일 뿐이라고.그녀는 현진을 거절할 수는 있어도, 상처까지 줄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반면, 뒤에서 이 대화를 듣고 있던 유건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입가에 미소까지 번졌다. ‘역시 지시연은 저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야!’ 하지만 바로 그때, 시연이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왜냐하면,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뭐라고?” 현진은 믿기 힘들다는 듯 물었다. “한 번도 그런 얘기는 들어 본 적 없는데... 그 사람이 대체 누구야? 내가 아는 사람이야? 우리 학교 학생인가?” 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모르는 사람이야. 우리 학교 사람도 아니고.” “그, 그런데...” 현진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왜 한 번도 너를 만나러 오지 않아? 그리고 진아도 너에게 남자 친구가 없다고 하던데. 너, 나 떼어내려고 일부러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시연은 순간 할 말을 잃었고, 진아가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짓말 아니야. 다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그 사람과 함께할 수 없는 상황이야. 진아도 그 사람을 만나본 적 없어.” 시연이 이 말까지 하고 나니, 현진도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래... 그런데, 너 그 사람을 정말 좋아해?” 이 질문이 나오자, 유건도 무심코 몸을 똑바로 세우고 귀를 기울였다. “응, 좋아해.” 시연은 잠시 주저하다가 덧붙였다. “정말 좋아해, 아주 많이.” “아...
SYD호텔. 시연이 이곳에 온 지 벌써 이틀이 지났다. 올해 외과 학술회의가 여기서 열렸고, 시연의 지도 교수인 양석현이 중요한 발표자로 참석했기 때문에, 시연은 지도교수의 발표를 돕기 위해 보조로 따라오게 되었다. 양석현의 발표가 있던 오전 콘퍼런스 일정이 막 끝나자, 양석현 교수는 예정되어 있던 심폐 이식수술을 위해 서둘러 병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학회 주최 측에 제출한 양 교수의 발표 원고를 아직 돌려받기 전이라, 시연이 남아서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료를 받기로 했다. “서두를 필요 없어.” 양석현은 SYD호텔 호텔의 상품권을 건네며 말했다. “시간이 되면 여기서 좀 쉬다가 와도 괜찮아.” SYD호텔은 다소 외진 곳이었지만, 근처의 자연경관이 빼어나게 아름다워서 돌아보며 시간을 보낼 만한 곳이었다. 시연은 기쁜 마음으로 양석현이 건네는 상품권을 두 손으로 받아 들고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양 교수님.” 먼저 떠나는 양석현을 배웅한 후, 시연은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했다. “이러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데...” 주최 측에서 발표 원고를 돌려받는 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을 것 같아, 시연은 짐을 정리하고 체크아웃을 한 뒤, 호텔 로비의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폭풍우가 곧 몰아칠 것 같은 기세였다. 시연은 시계를 보며 콘퍼런스 진행이 생각보다 늦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때 호텔의 정문이 열리며 많은 사람이 시끌벅적하게 동시에 들어왔다. 알고 보니 한 영화 촬영팀이 SYD호텔을 촬영 장소로 섭외해 촬영을 위해 들른 것이었다. 시연은 무심코 촬영팀 스태프들을 쓱 훑어보다가 그들 속에서 장소미를 발견했다. 소미는 훤칠한 미남의 팔짱을 끼고 서 있었는데 며칠간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유건이었다. 유건도 시연을 발견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시연은 미소를 지었지만, 유건은 인상을 찌푸렸다. ‘저 여자는 며칠 사이에 왜
[너희 집안 때문에... 고 대표가 시연이더러 문란하다고 했어. 그래서, 시연이를 버린 거라고!]은범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고, 숨이 턱 막혔다. ‘내가... 내가 시연이를 이렇게 만든 거야?’ ‘시연이가 이렇게까지 무너졌는데... 정작, 난... 그 이유도 모른 채...’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이상, 은범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고유건한테 가야 해. 오해든, 분노든, 뭐든 다 풀어야 해.’‘내가... 시연이 대신 말해야 해.’ 그날 밤, 은범은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부터 GP그룹 앞으로 향했다. 해가 채 뜨기도 전이었다. ‘여기서 마주친다면...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설마... 어젯밤부터 회사에 있었던 건가?’ 시계는 어느덧 오전 10시를 가리켰고, 불안해진 은범은 1층 로비로 들어가, 안내 데스크에 조심스레 물었다. 직원은 은범이 또 계약 관련 건으로 온 줄 알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대표님, 오늘 출근 안 하셨어요.” “안 나오셨다고요?” 은범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럼 어디 계신지는...” “죄송합니다.” 직원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저희가 알려드릴 수가 없어요.” 은범은 더 묻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건물을 나섰다. 그리고 밖으로 나서자마자, 바로 백일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군데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정보를 얻었다. [고 대표? 지금 태평컨트리클럽에 갔대.]“알겠어. 고마워.” 전화를 끊자마자, 은범은 곧장 차를 몰아 태평만으로 향했다. 그곳은 회원제로 운영되는 고급 골프장. 다행히 은범도 회원권이 있어, 어렵지 않게 입장할 수 있었다. 프런트에 물으니, 유건은 성하그룹 대표와 라운딩 중이라고 했다. ‘협상 중이겠지... 괜히 방해하면 안 돼.’ 그래서 은범은 탈의실 근처에서 조용히
진료 시간엔 병실 출입이 어려워서 은범은 외과 병동 건물 아래를 한참 서성이다가, 응급실과 외래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래... 오늘 시연이가 외래 근무일 수도 있잖아.’ 먼저 응급실을 찾았지만, 그곳엔 시연이 없었다. 이후 외래로 가보니 운이 좋았다. 시연은 정말로 외래에 있었다. 간호사가 환자를 부르고, 문이 열릴 때마다 시연은 환자와 마주 앉아 진지하게 상태를 묻거나, 진찰대 앞에 서서 환자를 진료하고 있었다.진지하게 집중한 듯한 그녀의 표정은 아주 안정되어 있었다. ‘별일 없나 보네. 고유건이 아무리 화가 났다지만, 그 분노는 나한테만 쏟은 건가...?’‘시연이는 건드리지 않은 건가? 그렇다면...’‘그래도 고유건, 최소한의 선은 지키는 사람이구나.’ 은범은 그냥 돌아설 수도, 직접 물을 수도 없었다. 예전에 시연과 했던 약속이 떠올랐기 때문. ‘되도록 얼굴 보지 말자’는 그 약속을 말이다. 그래서 은범은 조용히 외래 복도 한쪽에 앉아, 시연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점심 무렵.오전 진료가 끝난 시연은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메더니 병원 건물을 나섰다. 은범은 조용히 그녀를 따라갔다. ‘근데... 이상하네. 고유건이 붙여놓은 경호원은 어디 갔지?’ ‘내가 못 본 건가? 아니면... 오늘은 따로 없었던 건가?’ 그보다 더 이상한 건 따로 있었다. 병원 문을 나와 좌측으로 꺾으면, 길은 세 방향으로 갈라진다. 하지만 시연이 선택한 길은... 진아 집이나 고씨 가문 본가로 이어지는 길이 아니었다. ‘이 방향은 뭐지?’ 미간을 찌푸린 은범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만삭에 가까운 몸으로, 시연은 허리를 짚으며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힘들어 보였지만, 묵묵히 나아가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향한 곳은 시장이었다. ‘시장?’ 마트보다 조금은 번잡하지만, 이곳의 채소와 고기들은 더 신선하고, 가격도 저렴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닭이 당긴
은범은 늘 그렇게 생각해 왔다. 만약 시연 때문이라면, 유건은 애초에 HUA테크와 손을 잡지 않았을 거라고.하지만, 일재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닐 수도 있지! 잘 생각해 봐. 우리랑 제일 먼저 계약 끊은 사람, 고 대표잖아. 그리고 그럴 능력 있는 사람도, 고유건밖에 없어.] 은범은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야... 그렇게 따지면, 일재 말도 꽤 설득력이 있지.’ “그래도 난, 고 대표가 그런 사람이라고는 생각 안 해.” ‘그 사람, 그 정도로 감정에 휘둘릴 인간은 아닌데...’ 쿵!갑자기 등 뒤에서 무언가 쾅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은범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엌 쪽에서 강수희가 당황한 얼굴로 반찬통 하나를 떨어뜨린 상태였다. 다행히 뚜껑이 단단히 닫혀 있어 내용물이 쏟아지진 않았다. 그런데도, 은범은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어머니... 왜 저렇게 당황한 눈빛이지?’ “일단 끊을게.” 전화를 서둘러 끊고, 은범은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강수희 옆에 앉아 반찬통을 주워 정리했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강수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은범아, 너 방금... 전화할 때 고 대표 얘기했지?” “네.” 은범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른 척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떠보려면 지금이 기회였으니 말이다. “요즘 고 대표랑 우리 회사 계약도 끊겼고, 그 이후로 프로젝트가 두 개나 물 건너갔어요. 일재가 묻더라고요, 혹시 제가 고 대표한테 밉보인 건 아니냐고요.” “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수희가 눈을 질끈 감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 반응을 본 순간, 은범의 가슴은 묘하게 쿵 내려앉았다. ‘뭔가 있다. 어머니... 뭔가 아는 거야.’ “어머니.” 은범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저한테 뭐 숨기고 있는 거 있어요?” “엄마... 엄마는...” 강수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입술
시연은 조용히 손바닥을 꼭 쥐었다. 서늘한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고유건이 한 말, 틀린 건 아니야.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결국 사람 생명은 다 똑같잖아...’ ‘하지만 사람 생명을 구하는 일과 아버지를 용서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야... 구해야 할까?’ ... 한편, 은범이 유건을 만나지 못한 채, HUA테크와 GP그룹의 협업은 이달 말로 종료될 예정이었다. 요 며칠 은범은 정신없이 바빴지만, 골치 아픈 건 이 일 하나만이 아니었다. 어제는 성하그룹 쪽에서 연락이 왔다. 이번 분기 협업을 끝으로, HUA테크와의 재계약은 없을 거라는 소식이었다. 은범은 친구이자 HUA테크 상무인 백일재와 함께 성하그룹 대표를 찾아갔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종일 밖에서 뛰어다니던 은범이 집으로 돌아온 건 새벽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는 샤워하고 약 먹고 겨우 몸을 뉘었는데, 눈을 감은지 얼마 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강수희가 서 있었다. 두 손엔 큼직한 장바구니와 비닐백. “은범아, 엄마가 국 좀 끓였어. 반찬도 몇 가지 가져왔고.” 은범은 말없이 돌아섰고, 강수희는 그 뒤를 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어머니.” 은범이 입을 열었다. “이런 거 인제 그만 좀 가져와요. 저, 이 정도 나이면 밥은 알아서 챙겨 먹어요.” 아들의 무뚝뚝한 반응에 강수희는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그렇지만 밖에서 먹는 건 질릴 때도 있잖아.” 강수희는 가져온 반찬들을 하나씩 꺼내 정리했고, 냉장고에 넣기 전엔 스티커를 붙였다. “위에 라벨도 붙였으니까 먹을 때 볼 수 있을 거야. 넌 데우기만 하면 돼.” 더는 설득이 안 통할 것 같아서, 은범은 그냥 입을 닫았다. 그때 전화가 울렸는데, 박일재에서 온 전화였다. 은범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설마 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순간, 마음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전화가 연결되자,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그럼 다행이네요.”시연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며칠 동안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 가라앉았다.‘다행이야... 아무 일도 아니어서.’“그나저나...”오선화는 진료차트를 정리하며, 마치 일상 대화하듯 조용히 말을 꺼냈다.“이제 6개월 차에 들어섰어. 곧 임신 후반기인데, 슬슬 휴식은 생각 안 해?”“휴식이요?”시연은 잠깐 멍해졌다. 그 생각은 진심으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오선화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제부터는 배도 더 많이 나올 거고, 몸도 훨씬 무거워질 거야. 부기도 생기고, 움직이기도 불편해지고. 집에서 편하게 쉬는 것도 괜찮지 않나?”시연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아직 일할 수 있어요.”오선화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뭔가 걸리는 게 있어? 고 대표님이 계시니까, 병원에서도 대놓고 뭐라고 하진 않잖아.”“네... 알고 있어요.”시연은 순간 망설였지만, 이내 담담하게 말했다.‘나는 그렇게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 아니야.’ “저보다 선배인 선생님들도 다들 만삭까지 일하세요. 7개월까지 야간 당직도 서시고요. 저야 그에 비하면 충분히 배려받고 있는 거죠.”‘그 배려가... 전부 고유건 덕분이라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어.’“게다가 가만히 있는 것보다 이렇게 일하는 게 마음도 편하고, 출산도 더 수월하다고 하잖아요?”“그건 맞아.” 오선화는 고개를 끄덕였고, 더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나는 그냥 권유만 한 거야.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말고, 컨디션 안 좋을 땐 꼭 쉬어야 해, 알지?”“네. 그럴게요.”시연은 산모 수첩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교수님, 수고하세요.”“그래, 잘 가.”시연이 문을 나서자 방 안의 공기가 살짝 무거워졌다.오선화는 웃음을 거두고 곧바로 표정을 바꿨다. 그러고는 이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통화 목록을 스르륵 넘긴 오 교수의 손이, 한 이름에서 멈췄다.바로 ‘고유건’이었다. 오선화는 깊게 한숨을 쉬고, 전화를 걸 준비했다.
그날 오후, 은범은 곧장 회사로 향했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부사장 이지혁과 비서가 며칠 사이 벌어진 상황을 보고했다.“GP그룹이 우리와의 협약을 전면 종료했어요.”“GP그룹?”은범의 표정이 굳어졌다. ‘GP그룹... 고유건... 왜 갑자기...?’이번 협약은 처음부터 은범이 직접 유건과 만나 성사한 것이었다. 물론, 사적인 일로 둘 사이에 약간의 감정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시연을 둘러싼 복잡한 사정.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감정일 뿐.‘우린 둘 다 공사 구분은 확실한 사람들이었잖아...’은범은 이해할 수 없었다.“협약은 계속 수익이 나고 있었잖아요. GP 측에서 계약 종료 사유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정확히 말하지 않았어요.”이지혁은 고개를 저었다.“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입장은 아주 확고했어요. 위약금은 예정대로 지급하겠다고 했고요. 환불 어음은 이미 발송했다고 합니다.”‘그렇게 빨리?’은범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어떤 설득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모든 절차가 ‘깔끔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더 불안했다.“그래서 일단 수령하진 않았습니다. 돌아오시면 같이 상의하려고 했거든요.” “잘하셨어요.”‘보상보다 중요한 건, 이 협력이 가진 미래 가능성이었는데...’은범은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내가 고 대표님한테 직접 연락해 볼게요. 무슨 이유인지 물어봐야 하니까요.”“네, 애초에 사장님께서 직접 성사한 건이니까... 사장님께서 움직이는 게 맞죠.”은범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GP그룹으로 향했다.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GP그룹 본사 건물에 도착한 은범은 곧장 로비 데스크로 다가갔다.“안녕하세요, 고 대표님 뵈러 왔습니다. 전해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로비 데스크 직원은 정중하게 미소 지었다.“안녕하세요, 혹시 예약은 하셨을까요?”“아니요.”“죄송하지만, 고 대표님과의 면담은 반드시 사전 예약이 필요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그건 알지...’은범은 고개를
“고 대표님!”하은이 성큼성큼 걸어 나와 유건 앞을 가로막았다. 눈빛엔 분노가 가득했다.“이렇게 그냥 가시면 안 되죠!”“뭐라고?”유건은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이어서 시선엔 의아함과 경멸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시연이 말이에요.” 하은은 안쪽을 가리켰다.“시연이는 고 대표님의 아내잖아요. 근데, 아내 앞에서 애인이랑 나가는 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애인’이라는 단어가 뱉어지는 순간, 유건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리고 눈가의 웃음기마저 순식간에 사라졌다.“지금... 누가 감히 소미 씨한테 그런 말을 해?”그 말에 하은은 본능적으로 움찔했지만, 곧 더 큰 화가 치밀었다.“제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요? 그리고, 장소미 씨는 또 뭐예요? 고 대표님한테 아내가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행동하는 거, 무슨 의미인데요? 그리고 고 대표님이 장소미 씨를 감싸면, 시연이는 뭐가 되는 건데요?!” ‘시연이를 뭐로 보는 건지, 내가 대신 물어야겠어!’하지만 유건은 피식 웃었다. 차가운 비웃음이었다.‘그럼 지시연은 나를 뭐로 봤을까?’그러나 이런 생각을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비켜.”“싫어요!”그 말에 유건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목소리엔 더 이상 감정이 없었다.“솔직히, 너한텐 손쓸 가치도 못 느끼겠지만... 이쯤 되면 진짜 귀찮네.”“뭐라고요?”하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멍해졌다. ‘지금... 나한테 이런 말을...?’“비킬 거야, 안 비킬 거야?”“하은아!”그때, 시연이 급히 달려왔고, 하은의 팔을 잡아끌며 중간에 섰다.“이런 사람들이랑 뭐 하러 싸워? 가고 싶다잖아. 그냥 보내줘. 누가 어딜 가든, 그건 자유잖아.”그러면서 하은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가서 라면이나 먹자. 아까 건 너무 불었으니까, 새로 하나 뜯어야겠어.”시연의 말투는 덤덤했고, 시선은 여전히 유건을 보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유건은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유건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깊고 어두운 눈빛으로 시연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던졌다.“간 이식 얘기, 우주한테 물어본 적 있어?”“뭐라고요?”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그걸... 저 사람이... 지금 왜 묻지?’찰나의 정적. 그리고 곧, 시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나는 우주의 보호자예요. 우주에 대한 결정은, 내가 해요.”하지만 유건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내가 알기론, 우주는 올해로 만 14세야. 이미 법적으로 자기 결정권이 생긴 셈이지.”남자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만큼 분명했다.“게다가 우주는 신체 조건도 아주 좋잖아. 심리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기증 가능 기준에 부합해.”유건의 말은 아주 논리적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논리는, 결국 ‘장소미’를 위한 것이었다.‘하... 정말 대단하다, 고유건.’시연은 속으로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무심한 듯 시선을 옆으로 돌려 장소미를 스치듯 바라봤다.‘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뭐든 말이 되는구나.’“우주의 열네 살이, 일반 아이들의 열네 살과 같다고 생각해요?”시연은 미세한 미소를 짓는 듯 마는 듯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우주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서 내가 결정하는 거라고요.”그 말에 유건의 눈빛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그는 톤을 낮추면서도 힘을 실어 말했다.“지나치게 독단적이네.”“우주는 똑똑한 아이야. 심리적으로 결핍이 있는 거지, 지능이 낮은 건 아니잖아. 만약 언젠가 지 사장이 세상을 떠나고, 우주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자책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해?”그 말에 시연은 순간 얼어붙었다. 입꼬리에 걸려 있던 억지 미소조차 사라졌다.“자책이요...?”시연은 낮게 웃었다. 그리고 냉소가 섞인 차가운 어린 목소리로 유건을 향해 말했다.“잘 들어요. 우린 인생에서 많은 걸 후회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미안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의 그 ‘누군가’ 안에 지동성은 절대 포함되지 않아요.”그 말에 유건의 이
하은은 눈치가 빨라서 괜히 시연에게 짐이 될까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시연은 역시 장미리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우리 엄마요? 죽은 지 십몇 년 됐는데, 오늘 좀비처럼 부활이라도 한 거예요?”하은은 그제야 시연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했다. “아! 그럼 내가 지금 바로 무당 선생님한테 연락할게!”“얼른 해줘.”두 사람은 말 그대로 티키타카였다. 장미리의 얼굴은 금세 시뻘겋게 달아올랐다.“지시연! 넌 진짜 싹수가 없어!”“맞아요.”시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엄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빠라는 사람도 죽은 거나 다름없죠.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으니, 예의 따윈 배운 적 없어요.”그녀는 팔을 쭉 뻗어 문을 가리켰다.“무슨 용건인지는 상관없고, 지금 당장 나가세요. 그리고 다시는 나한테 ‘엄마’라는 말 좀 들먹이지 마세요. 혹시라도 다음에 또 그런 말을 뱉는다면... 당신 입, 내가 부숴놓을 수도 있어요.”시연의 눈빛이 단단하게 가라앉았다.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서릿발 같았다.“진심이에요. 장난 아니니까, 절대 시도하지 마세요.”“너... 너 진짜...!”장미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시연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말솜씨에서도, 기세에서도 밀렸으니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물러설 수 없었다.“네 아빠... 쓰러졌어. 지금 혼수상태야.”그 말에 시연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그 정도라고...?’눈빛 속에 망설임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러나 곧 다시 차분한 얼굴로 돌아왔고,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그럼 그분 옆에서 간병이라도 해주셔야죠. 여긴 왜 와서 소란인데요?”“너...”“지시연!”자기 엄마가 밀리는 걸 보다 못한 소미가 나섰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진짜 모르는 척하는 거야? 우리가 왜 너를 찾아왔는지, 정말 몰라서 그래?”“나야 모르지.”시연은 흰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그럼 알려줘 봐. 여기엔 왜 온 건지.”소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