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이 은범을 친구목록에 추가한 이후, 시연이 처음으로 업데이트한 SNS였다. 은범은 창밖을 바라봤다. ‘오늘 밤엔 태풍이 올 것 같은데, 시연이 혼자서 SYD호텔에 있다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자, 외투와 핸드폰, 차 키를 챙긴 은범은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은범아, 어디 가니?” 은범을 부른 사람은 그의 어머니 강수희였다. 은범은 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 이제 다 큰 성인이에요. 아직도 어디 갈 때마다 엄마 허락 일일이 받아야 해요?” “그런 뜻이 아니야.” 강수희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날씨가 안 좋아서... 그리고 오늘 저녁에 네 아버지가 네 삼촌들 몇 분을 초대했거든...” 은범은 냉소를 지었다. “몇몇 삼촌들? 그 딸들도 함께 세트로 데려오는 자리이겠죠.” 은범이 귀국한 뒤, 가족은 그에게 이런 방식의 식사 자리를 여러 번 마련했다. 사실, 그것은 선을 보는 것이라고 해야 마땅한 자리였다. 그 아가씨들은 다 강수희가 신중하게 고른, 은범의 부모님이 원하는 며느릿감이었다. 은범은 이런 불편한 상황에 다시 놓이기 싫어 강수희에게 명확히 말했다. “엄마, 다시는 그런 자리 마련하지 마세요. 엄마가 고른 그 여자들,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말하며 그는 무심코 왼쪽 손목을 만졌다. “엄마가 다시 나를 밀어붙이기 전에, 완전히 아들을 잃게 될 준비는 되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고요!” 그 말이 끝나자 은범은 강수희 옆을 지나 현관문을 나섰다. “은범아...!” 뒤에서 강수희의 창백한 얼굴로 균형을 잃을뻔한 몸을 간신히 지탱했다. ‘아들은 여전히 날 원망하고 있어!! 하지만 그때, 정말 내가 잘못한 걸까? 사실, 예전에 은범이 시연과 만나다가 헤어지게 된 것은 바로 강수희가 둘 사이에서 계속 분란을 일으키고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시연과 헤어지고 난 뒤로 은범은 강수희를 원수처럼 여기게
곧 주문한 음식들이 식탁에 가득 놓였다. 시연은 식탁 가득한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그녀가 주문한 야채 듬뿍 얼큰 만둣국만 기다리고 있었다. “만둣국 나왔습니다.” 서빙 직원이 음식을 가져왔다. 시연은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와, 냄새 진짜 좋아요.” 소미가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그 얼큰 만둣국을 자기 앞에 놓았다. “정말 맛있게 보여요. 식욕이 확 돋네요.” 소미는 시연이가 만둣국을 주문한 것을 완전히 잊은 듯했다. 테이블에 음식이 가득했지만, 시연은 그 하나만 주문했을 뿐이었다. 소미는 숟가락을 들어 만두를 하나 떠서 한입 먹었다. “존맛탱이네요!!” 그뿐만 아니라, 국물을 두 모금이나 마셨다. “유건 씨.” 소미는 고개를 들고 유건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음식 맛을 칭찬했다. “이렇게 외진 곳인데도 호텔의 만둣국이 이렇게 맛있을 줄은 몰랐네.” 유건은 이마를 찌푸렸고,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장소미가 일부러 그런가?’ “아!” 소미가 잠시 멈추더니, 갑자기 생각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시연을 보았다. “미안해요, 지 선생님. 제가 깜빡했네요. 이건 지 선생님이 주문한 거였는데요.” 그녀는 그 말을 하며, 그릇을 시연 앞으로 다시 밀어 놓았다. “만두 한 개밖에 안 먹었고, 국물도 두 숟가락밖에 안 먹었어요. 거의 손도 안 댄 거나 마찬가지예요.” 소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전혀 공격적인 표정 하나 없이 말했다. “지 선생님, 신경 안 쓰이시죠?” 시연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10년이 넘었는데, 장소미는 언제나 이런 식이야!’ ‘이 모든 세월 동안 내가 입고 쓰던 것들은 언제나 장소미가 남긴 것들이거나, 버린 것들이거나, 중고품이었어!’ ‘이미 지씨 집안과 연을 끊었지만, 장소미는 여전히 이런 방식으로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군.’ ‘예전에 매번 다 참았다고 해서 이번
시연은 유건과 소미를 향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몸을 돌려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여기에서 그 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모습을 볼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녀는 소파가 있는 라운지로 돌아와 가방에서 초콜릿 캔디를 꺼냈다. 누가 준 캔디였나 잠시 생각해 보니 지난번에 은범이 준 것임이 떠올랐다. ‘그날 밤, 노은범도 여자 친구와 함께 왔었지...’ 캔디는 배를 채울 수는 없지만, 최소한의 에너지를 유지할 정도는 가능했다. 시연은 포장지를 뜯고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바깥에서는 비가 점점 더 세차게 내렸고, 라운지 안쪽도 사방에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밤이 깊어지면서 점점 더 추워졌다. 그때, 유건과 소미가 식당에서 나와 라운지를 지나가다가 소파 한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잠든 시연을 발견했다. 유건은 발걸음을 돌려 곧장 시연에게 다가갔다. 시연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손에는 반쯤 먹다 만 초콜릿이 쥐어져 있었다. “지시연!” 유건은 이유 없이 화가 치밀었다. ‘이 여자, 나와 같이 식사하자는 걸 거부하더니, 이렇게 초콜릿으로 배를 채우고 있어? 말도 안 돼!’ “아!” 시연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마자 유건과 소미가 눈앞에 있는 것을 보고 더 짜증이 났다. 그녀는 눈을 감고 두 사람을 무시하려 했다. “일어나!” 유건은 허리를 굽혀 시연의 손목을 잡았다. 시연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적극적이고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했다. ‘도대체 뭐 하려는 거지? 내가 장소미를 비난했다고 해서 대신 복수라도 하겠다는 거야?’ 시연은 저항하지 않고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이 손 놔요, 안 그러면 소리 지를 거예요. 고 대표님은 상관없겠지만, 여자 친구분은 연예계에 있으니 곤란해질 텐데요.” 그 말을 들은 소미는 유건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유건 씨?” 하지만 유건은 손을 놓지 않았다. 눈을 더 가늘게 뜨고 한층 더 어두운 표정으로 시연에게 말했다
소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 선생님, 차라리 저랑 같은 방을 쓰는 게 어때요? 유건 씨는 밤에 처리할 업무도 있고, 게다가 남자 셋이 함께 한 방에서 자긴 어렵잖아요.” ‘그래, 이 말도 그럴듯한 말이었네.’유건은 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때?” 시연은 거절하려던 참이었지만, 소미가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해요.” 시연이 내키지 않는 기색이 드러나자, 유건이 그녀에게 상기시켰다. “네 몸이니까, 잘 생각해서 결정해.” 그 말속에는 배 속 아이를 위해서라도 시연에게 무리하면 안 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점점 날씨가 추워지고 있었고, 라운지에서 밤을 지새운다면 정말로 병이 날 수도 있었다. 시연은 잠시 망설이며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 밤을 참고 견뎌야 할지 고민했다. “네, 그럼 가요.” 소미는 더 다정한 태도로 말했다. “아까는 제가 지 선생님께 잘못했으니, 저에게 사과할 기회를 주세요.” 결국 시연은 동의했고, 소미와 함께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소미는 시연의 팔을 놓고, 속에 담아두었던 의문을 던졌다. “너랑 유건 씨 무슨 관계야? 너, 유건 씨와 너무 가까워지는 거 아니야?” 갑작스러운 소미의 질문에 시연은 놀라 잠시 멈칫하더니,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뭐가 그렇게 웃긴다는 거야?” 소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 진지하게 묻고 있어. 유건 씨는 신사야. 넌 단지 유건 씨를 치료하고 있는 주치의고! 유건 씨가 널 존중하는 거지. 너 착각하지 마!” “하하하.” 참지 못하고 시연은 크게 웃어버렸다. 소미는 점점 더 화를 내며 말했다. “대체 뭐가 웃기다는 거야?” “어머나.” 시연은 배를 잡고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너 혹시, 불륜 자식 증후군이 있니? 네 엄마가 불륜녀였으니까, 너도 언젠가 네가 ‘불륜녀’가 될까 봐 걱정하는 거야? 하하, 이게 바로 하늘의 뜻이고 순리라는 거구나!” “너
그러나 임신 중에는 잠이 훨씬 많이 쏟아지기 마련이라, 시연은 결국 호텔 라운지 소파 위에서 잠들고 말았다. ... 한밤중, 노은범이 SYD호텔에 도착했다. 그는 소파가 있는 로비의 라운지에서 시연을 발견했다. 시연이 올린 사진을 보며 어느 각도에서 사진이 찍혔는지를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시연은 막 잠든 상태였다. 몸을 웅크리고,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그녀를 놀라게 할까 봐, 은범은 조심스럽게 시연 앞에 쪼그려 앉았다.지금 시연를 깨울지 말지 고민이 들었다. ‘그래도 깨우지 않는 쪽이 낫겠어. 그냥 안아서 방으로 데려가야겠다.’ 은범은 시연의 SNS를 보자마자 이미 빈방을 예약해 두었다. 막 안아 들자마자, 시연이 눈을 떴다. 은범은 즉시 움직이지 못하고 멈춰 섰고,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시연이 혹시 화를 내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그때 시연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은이야...” 은범은 순간 멍해졌다가, 곧 기쁜 감정이 온몸에 휘몰아쳐 흥분된 목소리로 떨면서 대답했다. “나야, 시연아. 나 여기 있어.” “응.” 시연은 눈을 감으며 안도한 듯 그의 품에 기대었다. 은범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고 방으로 데려가 침대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때, 시연은 갑자기 눈을 뜨며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노은범?” 그녀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어디야?” 지금의 시연은 아까 은범에게 기대고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고,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생경한 얼굴로 은범을 대했다. 은범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정신이 돌아와서, 나에게 화내고 있는 건가?’ ‘하지만 조금 전 시연이 잠에서 덜 깼을 때 나를 ‘은이야’라고 불렀어...’실은 조금 전 시연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찾고 의지했다는 사실이 그에게 큰 위안이었다. 은범은 시은이 자신을 ‘은이야’라는 이름으로 부른 이유가
호텔 주방. “선생님, 주문하신 재료는 모두 준비됐습니다. 더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은범은 재료를 한 번 훑어보고 나서, 친절하게 말했다. “재료들을 잘게 다지고, 속을 만들어주세요. 그리고 반죽은 발효시켜 주세요.” 그는 말하면서 핸드폰을 꺼냈다. “여기 계신 분들, 제 톡 좀 추가해 주세요. 아내가 특별히 먹고 싶어 해서요.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해서, 작은 성의 표시로 감사 인사 전하고 싶습니다.” “아, 무슨 말씀이세요.” 몇 명의 주방 직원들이 놀라서 톡을 추가하자마자, 은범은 주방에 있던 직원들에게 바로 각각 20만 원씩 송금했다! 주방 직원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는 속으로 기뻐했다. 은범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앞치마를 단단히 맸다. 주방 직원들은 기꺼이 은범을 도와 만둣국에 넣을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 ... 몇 분 전, 유건 역시 주방에 전화를 걸어 만둣국을 주문했다. 그는 시연이 제대로 먹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시연이 배가 고프면, 배 속에 있는 아기까지도 잠을 잘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방에서는 똑같은 답이 돌아왔다. [만둣국을 만드는 셰프가 퇴근했습니다.]유건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지금 어쩌면 좋단 말인가? 임신하고 나서 지시연 입맛이 까다로워졌는데...’ ‘방금도 주문한 만둣국을 못 먹고 빵 한 조각만 먹었잖아...’그저 한 그릇의 만둣국인데, 자신이 시연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다는 사실에 유건은 화가 치밀었다. “형!” 정기환은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건에게 다가오더니 웃으며 말했다. “저 만둣국 만들 줄 알아요.” ‘응?’ 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음을 터트렸다. “왜 진작 말 안 했어? 가자!” 유건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정민환까지 끌고 다짜고짜 주방으로 향했다. “형님,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주방, 만둣국 만들러.” 유건 일행이 주방에 도착했을 때, 은범이 막
다음 날 아침 이른 시간에, 시연은 부드러운 침대에서 눈을 떴다. 은범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젯밤 시연이 잠들기 전 그는 거실 소파에 기대어 있었다. 문이 열리고 은범이 들어왔다. “깼어?” 그는 미소 지으며 손에 든 도시락 상자를 내려놓았다. “세수하고 와서 아침 먹자.” “응, 알았어.” 간단히 씻고 나서 가볍게 아침을 먹은 뒤, 두 사람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은범은 먼저 차를 가지러 갔다. 문 앞에서 은범은 차를 세우고 말했다. “내리지 않아도 돼. 나 혼자 갈게.” “그래.” 멀지 않은 곳에서, 유건 일행도 내려오고 있었다. 정기환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유건을 한 번 쳐다보며 말했다. “저기 형수님 아니에요? 겨우 찾았네요! 밤새도록 형수님이 도대체 어디 계시는지만 고민했어요!” 유건도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시연이 가방을 메고 차에 올라탔다. 창문 너머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운전석에 남자가 있는 게 분명했다! 유건의 눈동자는 깊게 어두워졌고, 차가운 기운이 시연을 감쌌다. ‘내가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밤새 저 여자를 걱정했는데!!!’ ‘지시연, 너 정말 대단하구나! 새로운 만나 남자도 벤틀리 콘티넨털을 타다니!’ ‘허.’“형, 내가 형수님 불러올게...” “됐어, 그만 해!” 민환이 동생 기환의 목덜미를 잡고는 눈치를 보며 유건을 살폈다. 그런데 유건은 말하지 않고 갑자기 돌아서서 걸어가 버렸다. ... 차 안에서, 은범은 시연에게 담요를 건넸다. “덮어, 추울 거야.” “응.” 시연은 담요를 받아 들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네 취향 맞아? 너 원래 이런 스타일 아니잖아.” 이렇게 여성스러운 무늬는 오히려 시연의 취향과 맞았다. 그렇게 말하면서 시연은 은범이 이미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거 네 여자 친구 거지?” 말하고 나니 시연도 후회가 밀려왔다. 그녀가 마치 은범의 여자 친구를 신경 쓰는 것처럼
장소미는 이 근처에서 광고 촬영을 하고 있었고, 유건은 촬영장을 방문하다가 마침 시간이 남아 그녀와 함께 쇼핑하러 이곳에 오게 되었다. “오랜만에 쇼핑하네요. 신상이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유건이 쇼핑에 별로 흥미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가 이렇게 함께 나와준 것만으로도 소미는 고마워했다. 소미는 그의 손을 놓고 고개를 들어 유건을 보며 말했다. “유건 씨, 저기 가서 앉아서 기다려요. 제가 금방 갈게요.” “그래.” 유건은 별로 흥미 없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 쪽으로 가서 앉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진아는 속으로 놀랐다. ‘원래 고유건이 우리 시연에게 관심이 있는 줄 알았는데, 여자 친구가 있었구나. 더구나 그 여자 친구가 장소미였다니!’ ‘고유건 눈이 정말 멀었군!’ “어?” 소미의 시선이 진아가 보고 있던 드레스에 멈췄다. 진아가 조금 전에 예쁘다고 했던 바로 그 드레스였다. “와, 정말 예쁘다.” 그녀는 그 드레스를 꺼내 들고 유건에게 보였다. “유건 씨, 어때? 저 이거 한번 입어볼게요.” “응.” 유건은 멀리서 소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미는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유건은 다시 고개를 숙이려 했지만, 그 순간 그의 시야에 한 여인의 날씬하고 키 큰 모습이 들어왔다. 시연이었다. 키가 170cm에 가까운 시연은 날씬한 몸매에 캐러멜 색상의 긴 드레스를 입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우아한 실루엣을 자랑했다. 어깨는 살짝 드러났고, 민낯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서 소녀다운 생기 넘치는 매력이 뿜어져 나왔다. 유건은 잠시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아내인 지시연은 타고난 외모를 지닌 사람이었다. “정말 예쁘세요.” 직원이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모델보다 훨씬 더 잘 어울리세요!” 시연은 살짝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과찬이세요.” “우와!” 진아는 두 손을 모아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시연, 너 정말 너무 예뻐!
[너희 집안 때문에... 고 대표가 시연이더러 문란하다고 했어. 그래서, 시연이를 버린 거라고!]은범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고, 숨이 턱 막혔다. ‘내가... 내가 시연이를 이렇게 만든 거야?’ ‘시연이가 이렇게까지 무너졌는데... 정작, 난... 그 이유도 모른 채...’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이상, 은범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고유건한테 가야 해. 오해든, 분노든, 뭐든 다 풀어야 해.’‘내가... 시연이 대신 말해야 해.’ 그날 밤, 은범은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부터 GP그룹 앞으로 향했다. 해가 채 뜨기도 전이었다. ‘여기서 마주친다면...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설마... 어젯밤부터 회사에 있었던 건가?’ 시계는 어느덧 오전 10시를 가리켰고, 불안해진 은범은 1층 로비로 들어가, 안내 데스크에 조심스레 물었다. 직원은 은범이 또 계약 관련 건으로 온 줄 알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대표님, 오늘 출근 안 하셨어요.” “안 나오셨다고요?” 은범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럼 어디 계신지는...” “죄송합니다.” 직원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저희가 알려드릴 수가 없어요.” 은범은 더 묻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건물을 나섰다. 그리고 밖으로 나서자마자, 바로 백일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군데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정보를 얻었다. [고 대표? 지금 태평컨트리클럽에 갔대.]“알겠어. 고마워.” 전화를 끊자마자, 은범은 곧장 차를 몰아 태평만으로 향했다. 그곳은 회원제로 운영되는 고급 골프장. 다행히 은범도 회원권이 있어, 어렵지 않게 입장할 수 있었다. 프런트에 물으니, 유건은 성하그룹 대표와 라운딩 중이라고 했다. ‘협상 중이겠지... 괜히 방해하면 안 돼.’ 그래서 은범은 탈의실 근처에서 조용히
진료 시간엔 병실 출입이 어려워서 은범은 외과 병동 건물 아래를 한참 서성이다가, 응급실과 외래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래... 오늘 시연이가 외래 근무일 수도 있잖아.’ 먼저 응급실을 찾았지만, 그곳엔 시연이 없었다. 이후 외래로 가보니 운이 좋았다. 시연은 정말로 외래에 있었다. 간호사가 환자를 부르고, 문이 열릴 때마다 시연은 환자와 마주 앉아 진지하게 상태를 묻거나, 진찰대 앞에 서서 환자를 진료하고 있었다.진지하게 집중한 듯한 그녀의 표정은 아주 안정되어 있었다. ‘별일 없나 보네. 고유건이 아무리 화가 났다지만, 그 분노는 나한테만 쏟은 건가...?’‘시연이는 건드리지 않은 건가? 그렇다면...’‘그래도 고유건, 최소한의 선은 지키는 사람이구나.’ 은범은 그냥 돌아설 수도, 직접 물을 수도 없었다. 예전에 시연과 했던 약속이 떠올랐기 때문. ‘되도록 얼굴 보지 말자’는 그 약속을 말이다. 그래서 은범은 조용히 외래 복도 한쪽에 앉아, 시연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점심 무렵.오전 진료가 끝난 시연은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메더니 병원 건물을 나섰다. 은범은 조용히 그녀를 따라갔다. ‘근데... 이상하네. 고유건이 붙여놓은 경호원은 어디 갔지?’ ‘내가 못 본 건가? 아니면... 오늘은 따로 없었던 건가?’ 그보다 더 이상한 건 따로 있었다. 병원 문을 나와 좌측으로 꺾으면, 길은 세 방향으로 갈라진다. 하지만 시연이 선택한 길은... 진아 집이나 고씨 가문 본가로 이어지는 길이 아니었다. ‘이 방향은 뭐지?’ 미간을 찌푸린 은범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만삭에 가까운 몸으로, 시연은 허리를 짚으며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힘들어 보였지만, 묵묵히 나아가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향한 곳은 시장이었다. ‘시장?’ 마트보다 조금은 번잡하지만, 이곳의 채소와 고기들은 더 신선하고, 가격도 저렴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닭이 당긴
은범은 늘 그렇게 생각해 왔다. 만약 시연 때문이라면, 유건은 애초에 HUA테크와 손을 잡지 않았을 거라고.하지만, 일재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닐 수도 있지! 잘 생각해 봐. 우리랑 제일 먼저 계약 끊은 사람, 고 대표잖아. 그리고 그럴 능력 있는 사람도, 고유건밖에 없어.] 은범은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야... 그렇게 따지면, 일재 말도 꽤 설득력이 있지.’ “그래도 난, 고 대표가 그런 사람이라고는 생각 안 해.” ‘그 사람, 그 정도로 감정에 휘둘릴 인간은 아닌데...’ 쿵!갑자기 등 뒤에서 무언가 쾅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은범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엌 쪽에서 강수희가 당황한 얼굴로 반찬통 하나를 떨어뜨린 상태였다. 다행히 뚜껑이 단단히 닫혀 있어 내용물이 쏟아지진 않았다. 그런데도, 은범은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어머니... 왜 저렇게 당황한 눈빛이지?’ “일단 끊을게.” 전화를 서둘러 끊고, 은범은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강수희 옆에 앉아 반찬통을 주워 정리했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강수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은범아, 너 방금... 전화할 때 고 대표 얘기했지?” “네.” 은범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른 척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떠보려면 지금이 기회였으니 말이다. “요즘 고 대표랑 우리 회사 계약도 끊겼고, 그 이후로 프로젝트가 두 개나 물 건너갔어요. 일재가 묻더라고요, 혹시 제가 고 대표한테 밉보인 건 아니냐고요.” “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수희가 눈을 질끈 감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 반응을 본 순간, 은범의 가슴은 묘하게 쿵 내려앉았다. ‘뭔가 있다. 어머니... 뭔가 아는 거야.’ “어머니.” 은범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저한테 뭐 숨기고 있는 거 있어요?” “엄마... 엄마는...” 강수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입술
시연은 조용히 손바닥을 꼭 쥐었다. 서늘한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고유건이 한 말, 틀린 건 아니야.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결국 사람 생명은 다 똑같잖아...’ ‘하지만 사람 생명을 구하는 일과 아버지를 용서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야... 구해야 할까?’ ... 한편, 은범이 유건을 만나지 못한 채, HUA테크와 GP그룹의 협업은 이달 말로 종료될 예정이었다. 요 며칠 은범은 정신없이 바빴지만, 골치 아픈 건 이 일 하나만이 아니었다. 어제는 성하그룹 쪽에서 연락이 왔다. 이번 분기 협업을 끝으로, HUA테크와의 재계약은 없을 거라는 소식이었다. 은범은 친구이자 HUA테크 상무인 백일재와 함께 성하그룹 대표를 찾아갔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종일 밖에서 뛰어다니던 은범이 집으로 돌아온 건 새벽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는 샤워하고 약 먹고 겨우 몸을 뉘었는데, 눈을 감은지 얼마 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강수희가 서 있었다. 두 손엔 큼직한 장바구니와 비닐백. “은범아, 엄마가 국 좀 끓였어. 반찬도 몇 가지 가져왔고.” 은범은 말없이 돌아섰고, 강수희는 그 뒤를 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어머니.” 은범이 입을 열었다. “이런 거 인제 그만 좀 가져와요. 저, 이 정도 나이면 밥은 알아서 챙겨 먹어요.” 아들의 무뚝뚝한 반응에 강수희는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그렇지만 밖에서 먹는 건 질릴 때도 있잖아.” 강수희는 가져온 반찬들을 하나씩 꺼내 정리했고, 냉장고에 넣기 전엔 스티커를 붙였다. “위에 라벨도 붙였으니까 먹을 때 볼 수 있을 거야. 넌 데우기만 하면 돼.” 더는 설득이 안 통할 것 같아서, 은범은 그냥 입을 닫았다. 그때 전화가 울렸는데, 박일재에서 온 전화였다. 은범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설마 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순간, 마음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전화가 연결되자,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그럼 다행이네요.”시연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며칠 동안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 가라앉았다.‘다행이야... 아무 일도 아니어서.’“그나저나...”오선화는 진료차트를 정리하며, 마치 일상 대화하듯 조용히 말을 꺼냈다.“이제 6개월 차에 들어섰어. 곧 임신 후반기인데, 슬슬 휴식은 생각 안 해?”“휴식이요?”시연은 잠깐 멍해졌다. 그 생각은 진심으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오선화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제부터는 배도 더 많이 나올 거고, 몸도 훨씬 무거워질 거야. 부기도 생기고, 움직이기도 불편해지고. 집에서 편하게 쉬는 것도 괜찮지 않나?”시연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아직 일할 수 있어요.”오선화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뭔가 걸리는 게 있어? 고 대표님이 계시니까, 병원에서도 대놓고 뭐라고 하진 않잖아.”“네... 알고 있어요.”시연은 순간 망설였지만, 이내 담담하게 말했다.‘나는 그렇게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 아니야.’ “저보다 선배인 선생님들도 다들 만삭까지 일하세요. 7개월까지 야간 당직도 서시고요. 저야 그에 비하면 충분히 배려받고 있는 거죠.”‘그 배려가... 전부 고유건 덕분이라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어.’“게다가 가만히 있는 것보다 이렇게 일하는 게 마음도 편하고, 출산도 더 수월하다고 하잖아요?”“그건 맞아.” 오선화는 고개를 끄덕였고, 더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나는 그냥 권유만 한 거야.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말고, 컨디션 안 좋을 땐 꼭 쉬어야 해, 알지?”“네. 그럴게요.”시연은 산모 수첩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교수님, 수고하세요.”“그래, 잘 가.”시연이 문을 나서자 방 안의 공기가 살짝 무거워졌다.오선화는 웃음을 거두고 곧바로 표정을 바꿨다. 그러고는 이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통화 목록을 스르륵 넘긴 오 교수의 손이, 한 이름에서 멈췄다.바로 ‘고유건’이었다. 오선화는 깊게 한숨을 쉬고, 전화를 걸 준비했다.
그날 오후, 은범은 곧장 회사로 향했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부사장 이지혁과 비서가 며칠 사이 벌어진 상황을 보고했다.“GP그룹이 우리와의 협약을 전면 종료했어요.”“GP그룹?”은범의 표정이 굳어졌다. ‘GP그룹... 고유건... 왜 갑자기...?’이번 협약은 처음부터 은범이 직접 유건과 만나 성사한 것이었다. 물론, 사적인 일로 둘 사이에 약간의 감정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시연을 둘러싼 복잡한 사정.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감정일 뿐.‘우린 둘 다 공사 구분은 확실한 사람들이었잖아...’은범은 이해할 수 없었다.“협약은 계속 수익이 나고 있었잖아요. GP 측에서 계약 종료 사유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정확히 말하지 않았어요.”이지혁은 고개를 저었다.“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입장은 아주 확고했어요. 위약금은 예정대로 지급하겠다고 했고요. 환불 어음은 이미 발송했다고 합니다.”‘그렇게 빨리?’은범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어떤 설득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모든 절차가 ‘깔끔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더 불안했다.“그래서 일단 수령하진 않았습니다. 돌아오시면 같이 상의하려고 했거든요.” “잘하셨어요.”‘보상보다 중요한 건, 이 협력이 가진 미래 가능성이었는데...’은범은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내가 고 대표님한테 직접 연락해 볼게요. 무슨 이유인지 물어봐야 하니까요.”“네, 애초에 사장님께서 직접 성사한 건이니까... 사장님께서 움직이는 게 맞죠.”은범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GP그룹으로 향했다.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GP그룹 본사 건물에 도착한 은범은 곧장 로비 데스크로 다가갔다.“안녕하세요, 고 대표님 뵈러 왔습니다. 전해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로비 데스크 직원은 정중하게 미소 지었다.“안녕하세요, 혹시 예약은 하셨을까요?”“아니요.”“죄송하지만, 고 대표님과의 면담은 반드시 사전 예약이 필요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그건 알지...’은범은 고개를
“고 대표님!”하은이 성큼성큼 걸어 나와 유건 앞을 가로막았다. 눈빛엔 분노가 가득했다.“이렇게 그냥 가시면 안 되죠!”“뭐라고?”유건은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이어서 시선엔 의아함과 경멸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시연이 말이에요.” 하은은 안쪽을 가리켰다.“시연이는 고 대표님의 아내잖아요. 근데, 아내 앞에서 애인이랑 나가는 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애인’이라는 단어가 뱉어지는 순간, 유건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리고 눈가의 웃음기마저 순식간에 사라졌다.“지금... 누가 감히 소미 씨한테 그런 말을 해?”그 말에 하은은 본능적으로 움찔했지만, 곧 더 큰 화가 치밀었다.“제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요? 그리고, 장소미 씨는 또 뭐예요? 고 대표님한테 아내가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행동하는 거, 무슨 의미인데요? 그리고 고 대표님이 장소미 씨를 감싸면, 시연이는 뭐가 되는 건데요?!” ‘시연이를 뭐로 보는 건지, 내가 대신 물어야겠어!’하지만 유건은 피식 웃었다. 차가운 비웃음이었다.‘그럼 지시연은 나를 뭐로 봤을까?’그러나 이런 생각을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비켜.”“싫어요!”그 말에 유건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목소리엔 더 이상 감정이 없었다.“솔직히, 너한텐 손쓸 가치도 못 느끼겠지만... 이쯤 되면 진짜 귀찮네.”“뭐라고요?”하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멍해졌다. ‘지금... 나한테 이런 말을...?’“비킬 거야, 안 비킬 거야?”“하은아!”그때, 시연이 급히 달려왔고, 하은의 팔을 잡아끌며 중간에 섰다.“이런 사람들이랑 뭐 하러 싸워? 가고 싶다잖아. 그냥 보내줘. 누가 어딜 가든, 그건 자유잖아.”그러면서 하은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가서 라면이나 먹자. 아까 건 너무 불었으니까, 새로 하나 뜯어야겠어.”시연의 말투는 덤덤했고, 시선은 여전히 유건을 보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유건은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유건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깊고 어두운 눈빛으로 시연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던졌다.“간 이식 얘기, 우주한테 물어본 적 있어?”“뭐라고요?”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그걸... 저 사람이... 지금 왜 묻지?’찰나의 정적. 그리고 곧, 시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나는 우주의 보호자예요. 우주에 대한 결정은, 내가 해요.”하지만 유건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내가 알기론, 우주는 올해로 만 14세야. 이미 법적으로 자기 결정권이 생긴 셈이지.”남자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만큼 분명했다.“게다가 우주는 신체 조건도 아주 좋잖아. 심리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기증 가능 기준에 부합해.”유건의 말은 아주 논리적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논리는, 결국 ‘장소미’를 위한 것이었다.‘하... 정말 대단하다, 고유건.’시연은 속으로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무심한 듯 시선을 옆으로 돌려 장소미를 스치듯 바라봤다.‘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뭐든 말이 되는구나.’“우주의 열네 살이, 일반 아이들의 열네 살과 같다고 생각해요?”시연은 미세한 미소를 짓는 듯 마는 듯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우주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서 내가 결정하는 거라고요.”그 말에 유건의 눈빛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그는 톤을 낮추면서도 힘을 실어 말했다.“지나치게 독단적이네.”“우주는 똑똑한 아이야. 심리적으로 결핍이 있는 거지, 지능이 낮은 건 아니잖아. 만약 언젠가 지 사장이 세상을 떠나고, 우주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자책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해?”그 말에 시연은 순간 얼어붙었다. 입꼬리에 걸려 있던 억지 미소조차 사라졌다.“자책이요...?”시연은 낮게 웃었다. 그리고 냉소가 섞인 차가운 어린 목소리로 유건을 향해 말했다.“잘 들어요. 우린 인생에서 많은 걸 후회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미안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의 그 ‘누군가’ 안에 지동성은 절대 포함되지 않아요.”그 말에 유건의 이
하은은 눈치가 빨라서 괜히 시연에게 짐이 될까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시연은 역시 장미리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우리 엄마요? 죽은 지 십몇 년 됐는데, 오늘 좀비처럼 부활이라도 한 거예요?”하은은 그제야 시연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했다. “아! 그럼 내가 지금 바로 무당 선생님한테 연락할게!”“얼른 해줘.”두 사람은 말 그대로 티키타카였다. 장미리의 얼굴은 금세 시뻘겋게 달아올랐다.“지시연! 넌 진짜 싹수가 없어!”“맞아요.”시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엄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빠라는 사람도 죽은 거나 다름없죠.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으니, 예의 따윈 배운 적 없어요.”그녀는 팔을 쭉 뻗어 문을 가리켰다.“무슨 용건인지는 상관없고, 지금 당장 나가세요. 그리고 다시는 나한테 ‘엄마’라는 말 좀 들먹이지 마세요. 혹시라도 다음에 또 그런 말을 뱉는다면... 당신 입, 내가 부숴놓을 수도 있어요.”시연의 눈빛이 단단하게 가라앉았다.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서릿발 같았다.“진심이에요. 장난 아니니까, 절대 시도하지 마세요.”“너... 너 진짜...!”장미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시연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말솜씨에서도, 기세에서도 밀렸으니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물러설 수 없었다.“네 아빠... 쓰러졌어. 지금 혼수상태야.”그 말에 시연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그 정도라고...?’눈빛 속에 망설임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러나 곧 다시 차분한 얼굴로 돌아왔고,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그럼 그분 옆에서 간병이라도 해주셔야죠. 여긴 왜 와서 소란인데요?”“너...”“지시연!”자기 엄마가 밀리는 걸 보다 못한 소미가 나섰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진짜 모르는 척하는 거야? 우리가 왜 너를 찾아왔는지, 정말 몰라서 그래?”“나야 모르지.”시연은 흰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그럼 알려줘 봐. 여기엔 왜 온 건지.”소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