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은 잠깐 망설였을 뿐, 바로 차에 올라탔다. 노은범이 왜 갑자기 여기에 나타났는지, 그와 함께 차를 타는 것이 적절한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고마워, 서쪽에 있는 주선교로 가줘.” 주선교, 하늘길 묘원...은범도 그곳을 낯설지 않게 여겼다. 그들은 어린 시절 서로 사랑하던 사이였고, 그 시절 매년 시연의 엄마인 부명주의 생일과 기일마다 은범은 시연과 함께 묘지를 찾곤 했다. ‘그런데 오늘 시연이가 이렇게 급히 가는 이유가 뭘까?’ 은범은 묻지 않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대답했다. “알았어.” 도착하자마자 차가 멈추기도 전에 시연은 허둥지둥 뛰어내렸고, 그만 넘어질 뻔했다. “시연아!” 은범이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 “조심해.” “난 괜찮아.” 시연은 급히 말했다. “고마워, 시간 빼앗아서 미안해. 바쁘면 먼저 가도 돼.”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후다닥 앞쪽으로 뛰어갔다. 은범은 그 자리에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시연이와 내 사이가 이제 이렇게나 멀어진 걸까?’ ‘지금 이 모든 게 다 내가 자초한 일이니... 그래, 당연하지.’ 잠시 망설인 후, 그는 시연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묘비 앞. 지동건 일가가 이미 땅을 파기 시작했다! 지동성, 장미리, 그리고 장소미, 세 사람 모두 그곳에 있었다. “지동성!” 시연은 창백한 얼굴로 다급히 지동성 앞에 다가갔다. “지시연!!” 지동성은 불만스럽게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이제 아버지라는 말도 못 하겠니?” “아버지?” 시연은 지동성의 말을 되물었다. 호칭도 아닌 말을 내뱉으며 그녀는 스스로 웃음을 터뜨렸고, 손으로 부명주의 묘를 가리켰다. “우리 엄마 앞에서 내가 아버지라 부르면, 당신이 감히 대답이나 할 수 있겠어요?” “너...” 지동성은 시연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장미리가 빈정대며 끼어들었다. “정말 주둥이가 살아있네. 너의 그 잘난 척을 가족에
“여보, 그러면...”지동성이 겨우 입을 열려고 하자, 장미리가 거칠게 그를 막았다.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거야? 어서 파내라고!” 장미리는 지동성에게 말할 기회도 전혀 주지 않았다. 오히려 우유부단한 그의 태도 때문에 더욱 화가 나서, 눈에 불을 켠 듯 형형한 눈빛으로 말했다. “더 지체하면 신고할 거야!” 그 말 뒤에, 그녀는 독하게 한 마디 더 덧붙였다. “고유건 알지? 내 딸의 남자 친구가 바로 그 사람이야! 나를 불편하게 하면, 내 딸이 불편해지고, 내 딸이 불편해지면 고유건이 불편해질 거야!” 그 말을 듣자 망설이던 몇 명의 사람들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삽을 들었다. G시에서 고유건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고유건이 발을 구르면 G시가 흔들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고유건은 대단한 위세를 가진 사람이었다. “파내라!” “안 돼!” 시연은 놀라 달려가며 그들을 막으려고 했지만, 여러 장정을 한꺼번에 당해낼 수는 없었다. “아!” 몸싸움 도중 시연의 손에 상처가 났고, 피가 흘렀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당황해 잠시 멈췄다. “정말 짜증 나!” 소미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시연을 붙잡았다. “비켜! 끝까지 이럴 거야?” 그 순간, 누군가가 소미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악...!!!” 소미는 아픔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노려보았다. 은범은 평소에 온화하고 점잖은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몹시 살기 어린 눈빛으로 소미를 보고 있었다. 손에 전혀 힘을 주지 않은 것처럼 보였으나, 소미는 마치 손목이 부서질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아프잖아!” “시연이는 안 아프겠어?” 은범은 시연의 손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고 핏발 선 눈으로 말했다. “꺼져.” 그는 소미의 손목을 놓으며 그녀를 밀쳐냈다. 그리고 시연을 살며시 끌어안고 말했다. “시연아, 미안해... 내가 왔어.” 시연은 모든 에너지를 잃은 듯 그에게 기대었다. 지금 시연도 잘 알고 있
시연은 차갑게 고개를 돌려, 여전히 고상한 태도를 유지하는 남자를 잠시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착각했어요. 이 팔찌가 제 것인 줄 알았거든요. 그때 저한테 말씀을 해주셨어야죠. 제가 오해했다고요.” ‘지금 이 여자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유건은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연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고 대표님, 앞으로 여자 친구에게 줄 선물은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주지 마세요. 제가 가져갔으니, 고 대표님은 하나 더 사서 여자 친구에게 줘야 하잖아요. 귀찮지 않나요?” 그 말을 남기고 시연은 문 쪽으로 걸어갔다. 유건은 안색이 순간에 어두워지며 생각했다. ‘설마 지시연이 장소미를 만난 거야? 둘이 어디서 만났지?’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지시연이 장소미가 그 팔찌를 차고 있는 것을 봤다는 사실이야... 그래서 지시연은 기분이 나빴던 걸까?’ ‘왜?’ ‘기분이 나빠야 할 사람은 장소미여야지, 왜 자기가 기분 나쁘다는 거야? 원래 그 팔찌는 지시연에게 주려고 했던 거였는데...’시연이 문을 열고 나감과 동시에, 주지한이 들어왔다. 지한은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시연 씨, 얘기는 다 끝났어요?” 시연은 지산의 말을 무시한 채, 갑자기 고개를 돌려 유건을 바라보았다. “고유건 씨, 나는 당신과 절대 이혼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이를 악물고 덧붙였다. “제 것이 아닌 건 가지지 않겠지만, 제 것이라면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거예요.” 시연은 그렇게 말한 뒤 방을 떠났다. 유건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지한을 향해 물었다. “저 여자가 방금 한 말, 무슨 뜻이지?” 지한도 당황스러워 눈이 휘둥그레졌다. “형님, 시연 씨가 지금 형한테 고백한 거 아닌가요? 시연 씨가 형님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음... 화내지 말고, 차분히 생각해 보자.’ 유건은 속으로 마음을 가다듬으며 생각했다. ‘왜 내 주변에는 연애를 해본 사람도 없고
“시연아.” 진아가 시연을 쿡 찌르며 말했다. “저기, 너 찾는 거 아니야?” 시연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바로 옆에서 은색 파가니가 천천히,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이 느리게 달리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내밀자 차가 멈췄고, 지한이 문을 열고 내렸다. “시연 씨, 어디 가는 겁니까? 그렇게 무거운 짐을 들고 있어요? 어서 차에 타요, 형님도 시연 씨를 데려다주겠다고 하셨어요.” 그는 말하면서 여행 가방의 손잡이를 잡아 들어 올리려 했다. “필요 없어요!” 시연은 손을 놓지 않고 차갑게 거절했다. “제가 알아서 갈게요.” “이게...” 지한은 당황스러워하며 뒷좌석에 있던 유건을 바라봤다. 차창 너머로 유건은 상황을 보고 있었고, 얼굴이 굳어지며 곧바로 차에서 내려 주지한을 지나쳐 여행 가방을 들어 올렸다. “트렁크 열어.”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네, 형님!” 지한은 재빨리 트렁크를 열었고, 유건은 가볍게 여행 가방을 트렁크에 집어넣었다. 시연은 놀라고 화가 나서 그의 팔을 붙잡으며 외쳤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건 제 짐이에요! 내려놔요! 저는 고 대표님의 차 타고 싶지 않아요!” “그만해!” 유건은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꾸짖었다. 그 순간, 그는 아이를 혼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시연은 그보다 다섯 살 어리니 충분히 아이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자아이였다. 그래서 함부로 손댈 수 없었고, 다만 시연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었다. “네가 스스로 차에 탈래, 아니면 내가 안아서 태울까?” 그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질문이었다. 시연은 화가 나서 입술을 삐죽이며 결국 뒷좌석에 올랐다. 지한은 진아가 든 여행 가방을 받아서 들며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아가씨, 타세요.” “아, 알겠어요.” 진아는 어리둥절해하며 지한의 말에 따랐다. 뒷좌석에서는 유건과 시연이 나란히 앉아 있었지만, 둘 다 말없이 서로에게 등을 돌린 채
유건은 가까이서 시연을 응시하며 어두운 얼굴로 불만을 내비쳤지만, 그 이상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녀가 여전히 그에게 화를 내는 건 손목에 찬 팔찌 때문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유건은 남자였고, 이번 일은 확실히 그가 잘못 처리한 부분이었다. “팔찌 문제는 내 잘못이야. 하지만 넌 정말로 오해한 거야. 원래 그 팔찌는 너에게 주려고 했던 거였어.”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자존심을 지키는 듯했다. 시연은 당황했다. ‘고유건이 왜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낸 걸까? 그리고 이 남자가 왜 지금 나에게 해명하고, 사과를 하는 거야?’ “방금... 뭐라고 했어요?” 그녀는 믿기 어려웠다. 유건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말했다. “못 들었으면 됐어!” ‘한 번 해명한 것만으로도 내 한계였어. 이 여자가 일부러 나에게 두 번 말하게 할 생각이었나?’ 그는 더 이상 화첩에 대한 호기심도 없었고, 방금의 호기심은 분노에 묻혔다. “지한아, 가자!” “네, 형님!” 두 사람이 떠나자, 진아는 곧바로 시연에게 다가와 말했다. “어? 이 화첩이구나. 내가 기억하는데, 네가 어렸을 때 같이 놀던 친구를 그린 거 맞지?” “응.”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림 속 장면은 이미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며 대화를 나눴다. 진아가 말했다. “그러면 그 뒤로는 한 번도 못 만난 거야?” “응, 한 번도.” “하!” 진아는 웃으며 말했다. “만약 만나더라도 너희 둘 다 못 알아볼걸? 어릴 땐 다들 많이 변하잖아. 어른이 되어도 거의 그대로인 사람이 많지만, 어린애가 커서 성인이 되면 엄청나게 달라지지.” 그 말에 시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아마 우리 인연은 거기까지였던 거겠지.” 그녀는 화첩을 여행 가방에 넣으며 대화를 끝냈다. “시연아!” 진아는 다시 시연을 쫓아가며 물었다. “그리고,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너랑 고 대표, 도대체 무슨
묘지 문제는 그렇게 결정되었다. 은범은 단지 묘지만 알아본 것뿐만 아니라, 풍수사에게도 의뢰하여 이장하기 좋은 날과 시간을 받았다. 당일, 날씨는 맑고, 산들바람이 불고 있었다. 성빈과 진아는 시연과 함께 묘지에 도착했는데, 그곳에 은범이 이미 와 있었다. 시연은 놀라서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은범의 시선을 피했다. 진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진성빈을 노려보았다.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 “내가 어떻게 알아?” 성빈은 태연하게 대답하며 전혀 모르는 척했다. “시연아.” 차가운 태도에도 불구하고, 은범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말했다. “명주 이모를 보내 드리는 데 오지 않으면 양심에 걸릴 것 같아서 왔어.” 진아는 바로 반박했다. “너에게 양심이라는 게 있었어?” “진아야.” 시연이 진아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진아는 불만을 억누르며 더는 말하지 않았다. 시연은 은범을 바라보며 말했다. “와줘서 고마워.” 오늘은 어머니의 안식을 위한 날이었기에, 시연도 어머니의 묘 앞에서 다투고 싶지 않았다. 은범은 기뻐하며 미소 지었다. “천만에.”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그는 속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부명주의 안장식은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시연은 어머니의 묘비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말없이 눈물을 흘렸고, 진아는 시연의 옆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뒤에서 성빈이 은범에게 속삭였다. “왜 시연이에게 다 말하지 않아?” 은범이 묘지 문제를 모두 해결했으니 시연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어야 하지 않겠냐는 의미였다. 은범은 시연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굳이 말할 필요 없어. 내가 하는 일은 시연이를 감동하게 하려는 게 아니야. 인생은 길어. 내가 시연에게 잘해주는 모든 걸 굳이 다 알릴 필요는 없잖아.” 성빈은 혀를 차며 말했다. “정말 지나치게 헌신적이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했다. “참, 시연이가 나에게 송금한 돈, 네가 처리한 거니까
“뭐라고?” “네가 직접 손으로 만든 거라고?” 유건은 깜짝 놀라 다시 셔츠를 보았다. 갑자기 셔츠가 눈에 쏙 들어왔다. “네가 한 땀 한 땀 직접 바느질해서 만든 거야?” “네.” 시연은 입술을 꼭 다물고 약간 부끄러워했다. 부명주는 생전에 패션 디자이너였고, 집에는 작업실도 갖고 있었다. 시연은 걷기도 전부터 바늘을 잡았고,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옷을 만드는 시연의 기본기는 탄탄했다. 어쩌면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았을지도 모른다. 셔츠 하나쯤 만드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유건은 겉으로는 아닌 척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시연의 뜻밖의 실력에 깜짝 놀라고 감탄했다. ‘진짜로 지시연이 직접 만든 거야! 한 땀 한 땀, 모든 바느질 자국이!’ 시연은 유건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지난번에는 미안했어요.” 그녀는 유건이 준 카드에서 또 돈을 인출해서 썼기 때문에 화낸 거라는 말은 못 하고 그냥 핑계를 댔다. 시연의 이 말은 유건에게 물러날 구실을 만들어준 셈이었다. 상대방이 한 걸음 물러서면 자신도 상대를 너그럽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좋은 남자다.“됐어.” 유건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대범한 척 말했다. “나는 상남자라 여자한테 그런 걸 일일이 따지지 않아” “그럼...” 시연은 셔츠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 셔츠, 입을 거예요?” “그냥 둬.” 유건은 자존심을 부리며 셔츠를 보지 않고 말했다. “어차피 옷장에 널리고 널린 게 셔츠야.” “아...” 시연은 속으로 생각했다.‘역시 그렇지, 고유건이 내가 만든 셔츠를 입을 리 없겠지. 아마도 옷장 깊숙이 넣어두겠지... 하지만 더 비싼 옷을 해줄 수는 없으니까...’ “그럼 저는 이만 갈게요, 일정이 좀 빠듯해서요.” 시연이 나가자 바로 주지한이 들어왔다. “형님, 이건 방금 받은 프로젝트 서류인데요...” “어, 웬 셔츠가 있네요?” 지한은 셔츠를 치우려 손을 뻗었다. “손대지 마!” 낮게 깔린 경고가
그림 미술 전시회에서 작품들을 감상하던 중, 소미는 유건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유건은 그림들을 대충 훑어보았지만, 머릿속에는 자꾸 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는 모습이 떠올랐다. ‘지시연은 내 데이트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유건 씨.” 그의 팔을 잡고 있던 소미가 손을 살짝 움직이자, 유건은 정신을 차렸다. 소미는 약간 서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일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니면 상처가 불편한 거예요?” “아니야, 일도 아니고 상처도 괜찮아.” 유건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나는 지금 대체 뭘 이렇게 신경 쓰고 있는 걸까?’ ‘지시연이 나한테 신경 쓰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나? 그 여자는 단지 명목상 아내일 뿐, 진짜는 아니니까.’ ‘게다가, 이 명분도 오래가지 않을 거야. 지금 내 옆에 있는 장소미가 진짜로 나와 함께할 사람인데...’ “그냥 그림에 몰입한 것뿐이야.” 유건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넘기고, 다정하게 물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이라도 있어? 마음에 들면 사 줄게.” “음...” 소미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목을 긁적였다. “조금 더 둘러볼게요. 아직 딱히 마음에 드는 건 안 보이네요.” 사실, 그녀는 그림에 관심이 없었다. ‘그림을 사서 뭘 하겠어?’소미에게는 그림보다 보석이나 명품 가방이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유건은 어두운 눈빛으로 잠시 소미를 응시했다. “그래, 조금 더 보자.” 유건은 날카로운 판단력으로 소미가 그림을 전혀 이해하지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당연히 금세 알아챘다. 왜냐하면 둘이 전시회장에 들어온 이후 소미의 시선은 그림에 머무르지 못하고 계속 이리저리 떠돌고 있었다. 하지만 유건은 소미의 취향이 그림이 아니라는 것에 크게 상관없었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유건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림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소미의 의도였다. 기분이 이미
[너희 집안 때문에... 고 대표가 시연이더러 문란하다고 했어. 그래서, 시연이를 버린 거라고!]은범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고, 숨이 턱 막혔다. ‘내가... 내가 시연이를 이렇게 만든 거야?’ ‘시연이가 이렇게까지 무너졌는데... 정작, 난... 그 이유도 모른 채...’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이상, 은범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고유건한테 가야 해. 오해든, 분노든, 뭐든 다 풀어야 해.’‘내가... 시연이 대신 말해야 해.’ 그날 밤, 은범은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부터 GP그룹 앞으로 향했다. 해가 채 뜨기도 전이었다. ‘여기서 마주친다면...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설마... 어젯밤부터 회사에 있었던 건가?’ 시계는 어느덧 오전 10시를 가리켰고, 불안해진 은범은 1층 로비로 들어가, 안내 데스크에 조심스레 물었다. 직원은 은범이 또 계약 관련 건으로 온 줄 알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대표님, 오늘 출근 안 하셨어요.” “안 나오셨다고요?” 은범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럼 어디 계신지는...” “죄송합니다.” 직원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저희가 알려드릴 수가 없어요.” 은범은 더 묻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건물을 나섰다. 그리고 밖으로 나서자마자, 바로 백일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군데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정보를 얻었다. [고 대표? 지금 태평컨트리클럽에 갔대.]“알겠어. 고마워.” 전화를 끊자마자, 은범은 곧장 차를 몰아 태평만으로 향했다. 그곳은 회원제로 운영되는 고급 골프장. 다행히 은범도 회원권이 있어, 어렵지 않게 입장할 수 있었다. 프런트에 물으니, 유건은 성하그룹 대표와 라운딩 중이라고 했다. ‘협상 중이겠지... 괜히 방해하면 안 돼.’ 그래서 은범은 탈의실 근처에서 조용히
진료 시간엔 병실 출입이 어려워서 은범은 외과 병동 건물 아래를 한참 서성이다가, 응급실과 외래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래... 오늘 시연이가 외래 근무일 수도 있잖아.’ 먼저 응급실을 찾았지만, 그곳엔 시연이 없었다. 이후 외래로 가보니 운이 좋았다. 시연은 정말로 외래에 있었다. 간호사가 환자를 부르고, 문이 열릴 때마다 시연은 환자와 마주 앉아 진지하게 상태를 묻거나, 진찰대 앞에 서서 환자를 진료하고 있었다.진지하게 집중한 듯한 그녀의 표정은 아주 안정되어 있었다. ‘별일 없나 보네. 고유건이 아무리 화가 났다지만, 그 분노는 나한테만 쏟은 건가...?’‘시연이는 건드리지 않은 건가? 그렇다면...’‘그래도 고유건, 최소한의 선은 지키는 사람이구나.’ 은범은 그냥 돌아설 수도, 직접 물을 수도 없었다. 예전에 시연과 했던 약속이 떠올랐기 때문. ‘되도록 얼굴 보지 말자’는 그 약속을 말이다. 그래서 은범은 조용히 외래 복도 한쪽에 앉아, 시연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점심 무렵.오전 진료가 끝난 시연은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메더니 병원 건물을 나섰다. 은범은 조용히 그녀를 따라갔다. ‘근데... 이상하네. 고유건이 붙여놓은 경호원은 어디 갔지?’ ‘내가 못 본 건가? 아니면... 오늘은 따로 없었던 건가?’ 그보다 더 이상한 건 따로 있었다. 병원 문을 나와 좌측으로 꺾으면, 길은 세 방향으로 갈라진다. 하지만 시연이 선택한 길은... 진아 집이나 고씨 가문 본가로 이어지는 길이 아니었다. ‘이 방향은 뭐지?’ 미간을 찌푸린 은범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만삭에 가까운 몸으로, 시연은 허리를 짚으며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힘들어 보였지만, 묵묵히 나아가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향한 곳은 시장이었다. ‘시장?’ 마트보다 조금은 번잡하지만, 이곳의 채소와 고기들은 더 신선하고, 가격도 저렴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닭이 당긴
은범은 늘 그렇게 생각해 왔다. 만약 시연 때문이라면, 유건은 애초에 HUA테크와 손을 잡지 않았을 거라고.하지만, 일재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닐 수도 있지! 잘 생각해 봐. 우리랑 제일 먼저 계약 끊은 사람, 고 대표잖아. 그리고 그럴 능력 있는 사람도, 고유건밖에 없어.] 은범은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야... 그렇게 따지면, 일재 말도 꽤 설득력이 있지.’ “그래도 난, 고 대표가 그런 사람이라고는 생각 안 해.” ‘그 사람, 그 정도로 감정에 휘둘릴 인간은 아닌데...’ 쿵!갑자기 등 뒤에서 무언가 쾅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은범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엌 쪽에서 강수희가 당황한 얼굴로 반찬통 하나를 떨어뜨린 상태였다. 다행히 뚜껑이 단단히 닫혀 있어 내용물이 쏟아지진 않았다. 그런데도, 은범은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어머니... 왜 저렇게 당황한 눈빛이지?’ “일단 끊을게.” 전화를 서둘러 끊고, 은범은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강수희 옆에 앉아 반찬통을 주워 정리했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강수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은범아, 너 방금... 전화할 때 고 대표 얘기했지?” “네.” 은범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른 척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떠보려면 지금이 기회였으니 말이다. “요즘 고 대표랑 우리 회사 계약도 끊겼고, 그 이후로 프로젝트가 두 개나 물 건너갔어요. 일재가 묻더라고요, 혹시 제가 고 대표한테 밉보인 건 아니냐고요.” “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수희가 눈을 질끈 감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 반응을 본 순간, 은범의 가슴은 묘하게 쿵 내려앉았다. ‘뭔가 있다. 어머니... 뭔가 아는 거야.’ “어머니.” 은범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저한테 뭐 숨기고 있는 거 있어요?” “엄마... 엄마는...” 강수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입술
시연은 조용히 손바닥을 꼭 쥐었다. 서늘한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고유건이 한 말, 틀린 건 아니야.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결국 사람 생명은 다 똑같잖아...’ ‘하지만 사람 생명을 구하는 일과 아버지를 용서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야... 구해야 할까?’ ... 한편, 은범이 유건을 만나지 못한 채, HUA테크와 GP그룹의 협업은 이달 말로 종료될 예정이었다. 요 며칠 은범은 정신없이 바빴지만, 골치 아픈 건 이 일 하나만이 아니었다. 어제는 성하그룹 쪽에서 연락이 왔다. 이번 분기 협업을 끝으로, HUA테크와의 재계약은 없을 거라는 소식이었다. 은범은 친구이자 HUA테크 상무인 백일재와 함께 성하그룹 대표를 찾아갔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종일 밖에서 뛰어다니던 은범이 집으로 돌아온 건 새벽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는 샤워하고 약 먹고 겨우 몸을 뉘었는데, 눈을 감은지 얼마 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강수희가 서 있었다. 두 손엔 큼직한 장바구니와 비닐백. “은범아, 엄마가 국 좀 끓였어. 반찬도 몇 가지 가져왔고.” 은범은 말없이 돌아섰고, 강수희는 그 뒤를 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어머니.” 은범이 입을 열었다. “이런 거 인제 그만 좀 가져와요. 저, 이 정도 나이면 밥은 알아서 챙겨 먹어요.” 아들의 무뚝뚝한 반응에 강수희는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그렇지만 밖에서 먹는 건 질릴 때도 있잖아.” 강수희는 가져온 반찬들을 하나씩 꺼내 정리했고, 냉장고에 넣기 전엔 스티커를 붙였다. “위에 라벨도 붙였으니까 먹을 때 볼 수 있을 거야. 넌 데우기만 하면 돼.” 더는 설득이 안 통할 것 같아서, 은범은 그냥 입을 닫았다. 그때 전화가 울렸는데, 박일재에서 온 전화였다. 은범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설마 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순간, 마음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전화가 연결되자,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그럼 다행이네요.”시연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며칠 동안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 가라앉았다.‘다행이야... 아무 일도 아니어서.’“그나저나...”오선화는 진료차트를 정리하며, 마치 일상 대화하듯 조용히 말을 꺼냈다.“이제 6개월 차에 들어섰어. 곧 임신 후반기인데, 슬슬 휴식은 생각 안 해?”“휴식이요?”시연은 잠깐 멍해졌다. 그 생각은 진심으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오선화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제부터는 배도 더 많이 나올 거고, 몸도 훨씬 무거워질 거야. 부기도 생기고, 움직이기도 불편해지고. 집에서 편하게 쉬는 것도 괜찮지 않나?”시연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아직 일할 수 있어요.”오선화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뭔가 걸리는 게 있어? 고 대표님이 계시니까, 병원에서도 대놓고 뭐라고 하진 않잖아.”“네... 알고 있어요.”시연은 순간 망설였지만, 이내 담담하게 말했다.‘나는 그렇게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 아니야.’ “저보다 선배인 선생님들도 다들 만삭까지 일하세요. 7개월까지 야간 당직도 서시고요. 저야 그에 비하면 충분히 배려받고 있는 거죠.”‘그 배려가... 전부 고유건 덕분이라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어.’“게다가 가만히 있는 것보다 이렇게 일하는 게 마음도 편하고, 출산도 더 수월하다고 하잖아요?”“그건 맞아.” 오선화는 고개를 끄덕였고, 더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나는 그냥 권유만 한 거야.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말고, 컨디션 안 좋을 땐 꼭 쉬어야 해, 알지?”“네. 그럴게요.”시연은 산모 수첩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교수님, 수고하세요.”“그래, 잘 가.”시연이 문을 나서자 방 안의 공기가 살짝 무거워졌다.오선화는 웃음을 거두고 곧바로 표정을 바꿨다. 그러고는 이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통화 목록을 스르륵 넘긴 오 교수의 손이, 한 이름에서 멈췄다.바로 ‘고유건’이었다. 오선화는 깊게 한숨을 쉬고, 전화를 걸 준비했다.
그날 오후, 은범은 곧장 회사로 향했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부사장 이지혁과 비서가 며칠 사이 벌어진 상황을 보고했다.“GP그룹이 우리와의 협약을 전면 종료했어요.”“GP그룹?”은범의 표정이 굳어졌다. ‘GP그룹... 고유건... 왜 갑자기...?’이번 협약은 처음부터 은범이 직접 유건과 만나 성사한 것이었다. 물론, 사적인 일로 둘 사이에 약간의 감정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시연을 둘러싼 복잡한 사정.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감정일 뿐.‘우린 둘 다 공사 구분은 확실한 사람들이었잖아...’은범은 이해할 수 없었다.“협약은 계속 수익이 나고 있었잖아요. GP 측에서 계약 종료 사유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정확히 말하지 않았어요.”이지혁은 고개를 저었다.“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입장은 아주 확고했어요. 위약금은 예정대로 지급하겠다고 했고요. 환불 어음은 이미 발송했다고 합니다.”‘그렇게 빨리?’은범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어떤 설득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모든 절차가 ‘깔끔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더 불안했다.“그래서 일단 수령하진 않았습니다. 돌아오시면 같이 상의하려고 했거든요.” “잘하셨어요.”‘보상보다 중요한 건, 이 협력이 가진 미래 가능성이었는데...’은범은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내가 고 대표님한테 직접 연락해 볼게요. 무슨 이유인지 물어봐야 하니까요.”“네, 애초에 사장님께서 직접 성사한 건이니까... 사장님께서 움직이는 게 맞죠.”은범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GP그룹으로 향했다.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GP그룹 본사 건물에 도착한 은범은 곧장 로비 데스크로 다가갔다.“안녕하세요, 고 대표님 뵈러 왔습니다. 전해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로비 데스크 직원은 정중하게 미소 지었다.“안녕하세요, 혹시 예약은 하셨을까요?”“아니요.”“죄송하지만, 고 대표님과의 면담은 반드시 사전 예약이 필요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그건 알지...’은범은 고개를
“고 대표님!”하은이 성큼성큼 걸어 나와 유건 앞을 가로막았다. 눈빛엔 분노가 가득했다.“이렇게 그냥 가시면 안 되죠!”“뭐라고?”유건은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이어서 시선엔 의아함과 경멸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시연이 말이에요.” 하은은 안쪽을 가리켰다.“시연이는 고 대표님의 아내잖아요. 근데, 아내 앞에서 애인이랑 나가는 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애인’이라는 단어가 뱉어지는 순간, 유건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리고 눈가의 웃음기마저 순식간에 사라졌다.“지금... 누가 감히 소미 씨한테 그런 말을 해?”그 말에 하은은 본능적으로 움찔했지만, 곧 더 큰 화가 치밀었다.“제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요? 그리고, 장소미 씨는 또 뭐예요? 고 대표님한테 아내가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행동하는 거, 무슨 의미인데요? 그리고 고 대표님이 장소미 씨를 감싸면, 시연이는 뭐가 되는 건데요?!” ‘시연이를 뭐로 보는 건지, 내가 대신 물어야겠어!’하지만 유건은 피식 웃었다. 차가운 비웃음이었다.‘그럼 지시연은 나를 뭐로 봤을까?’그러나 이런 생각을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비켜.”“싫어요!”그 말에 유건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목소리엔 더 이상 감정이 없었다.“솔직히, 너한텐 손쓸 가치도 못 느끼겠지만... 이쯤 되면 진짜 귀찮네.”“뭐라고요?”하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멍해졌다. ‘지금... 나한테 이런 말을...?’“비킬 거야, 안 비킬 거야?”“하은아!”그때, 시연이 급히 달려왔고, 하은의 팔을 잡아끌며 중간에 섰다.“이런 사람들이랑 뭐 하러 싸워? 가고 싶다잖아. 그냥 보내줘. 누가 어딜 가든, 그건 자유잖아.”그러면서 하은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가서 라면이나 먹자. 아까 건 너무 불었으니까, 새로 하나 뜯어야겠어.”시연의 말투는 덤덤했고, 시선은 여전히 유건을 보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유건은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유건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깊고 어두운 눈빛으로 시연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던졌다.“간 이식 얘기, 우주한테 물어본 적 있어?”“뭐라고요?”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그걸... 저 사람이... 지금 왜 묻지?’찰나의 정적. 그리고 곧, 시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나는 우주의 보호자예요. 우주에 대한 결정은, 내가 해요.”하지만 유건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내가 알기론, 우주는 올해로 만 14세야. 이미 법적으로 자기 결정권이 생긴 셈이지.”남자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만큼 분명했다.“게다가 우주는 신체 조건도 아주 좋잖아. 심리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기증 가능 기준에 부합해.”유건의 말은 아주 논리적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논리는, 결국 ‘장소미’를 위한 것이었다.‘하... 정말 대단하다, 고유건.’시연은 속으로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무심한 듯 시선을 옆으로 돌려 장소미를 스치듯 바라봤다.‘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뭐든 말이 되는구나.’“우주의 열네 살이, 일반 아이들의 열네 살과 같다고 생각해요?”시연은 미세한 미소를 짓는 듯 마는 듯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우주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서 내가 결정하는 거라고요.”그 말에 유건의 눈빛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그는 톤을 낮추면서도 힘을 실어 말했다.“지나치게 독단적이네.”“우주는 똑똑한 아이야. 심리적으로 결핍이 있는 거지, 지능이 낮은 건 아니잖아. 만약 언젠가 지 사장이 세상을 떠나고, 우주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자책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해?”그 말에 시연은 순간 얼어붙었다. 입꼬리에 걸려 있던 억지 미소조차 사라졌다.“자책이요...?”시연은 낮게 웃었다. 그리고 냉소가 섞인 차가운 어린 목소리로 유건을 향해 말했다.“잘 들어요. 우린 인생에서 많은 걸 후회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미안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의 그 ‘누군가’ 안에 지동성은 절대 포함되지 않아요.”그 말에 유건의 이
하은은 눈치가 빨라서 괜히 시연에게 짐이 될까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시연은 역시 장미리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우리 엄마요? 죽은 지 십몇 년 됐는데, 오늘 좀비처럼 부활이라도 한 거예요?”하은은 그제야 시연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했다. “아! 그럼 내가 지금 바로 무당 선생님한테 연락할게!”“얼른 해줘.”두 사람은 말 그대로 티키타카였다. 장미리의 얼굴은 금세 시뻘겋게 달아올랐다.“지시연! 넌 진짜 싹수가 없어!”“맞아요.”시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엄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빠라는 사람도 죽은 거나 다름없죠.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으니, 예의 따윈 배운 적 없어요.”그녀는 팔을 쭉 뻗어 문을 가리켰다.“무슨 용건인지는 상관없고, 지금 당장 나가세요. 그리고 다시는 나한테 ‘엄마’라는 말 좀 들먹이지 마세요. 혹시라도 다음에 또 그런 말을 뱉는다면... 당신 입, 내가 부숴놓을 수도 있어요.”시연의 눈빛이 단단하게 가라앉았다.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서릿발 같았다.“진심이에요. 장난 아니니까, 절대 시도하지 마세요.”“너... 너 진짜...!”장미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시연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말솜씨에서도, 기세에서도 밀렸으니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물러설 수 없었다.“네 아빠... 쓰러졌어. 지금 혼수상태야.”그 말에 시연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그 정도라고...?’눈빛 속에 망설임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러나 곧 다시 차분한 얼굴로 돌아왔고,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그럼 그분 옆에서 간병이라도 해주셔야죠. 여긴 왜 와서 소란인데요?”“너...”“지시연!”자기 엄마가 밀리는 걸 보다 못한 소미가 나섰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진짜 모르는 척하는 거야? 우리가 왜 너를 찾아왔는지, 정말 몰라서 그래?”“나야 모르지.”시연은 흰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그럼 알려줘 봐. 여기엔 왜 온 건지.”소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