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성빈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들어 놀라고 억울한 눈빛으로 유건을 쳐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유건의 권력과 지위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는 어쨌든 진씨 가문의 도련님이었다! “고유건, 너 미쳤어? 나랑 아무 원한도 없는데, 나를 때리는 이유가 뭐야?” 성빈도 말하면서 일어나서는 금방이라도 유건에게 덤빌 듯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민환과 기환이 재빠르게 유건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성빈 도련님, 우리를 먼저 이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두 형제는 딱 봐도 군인 출신, 게다가 특수부대 출신일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성빈은 애당초 자신이 싸움으로는 그들을 이길 수 없다는 계산이 섰다. “젠장!” 성빈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경찰 불러! 이렇게 억울한 꼴을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어!” “억울해?” 지금까지 침묵하던 유건이 차갑게 웃으며 비웃는 말투로 말했다. “네가 가지고 노는 여자보다 더 억울한 사람이 있을까?” 이 말에 성빈은 할 말을 잃었다. 성빈은 여러 여자와 교제해 왔고, 늘 세상과 가볍게 게임을 하듯이 살아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로 합의 하에 이루어진 일이었고, 그는 여자를 가지고 논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억울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내가 누구를 가지고 놀았다는 거야? 말해봐! 내가 네 여자를 가지고 놀았냐?” 그 순간 유건은 거의 이렇게 말할 뻔했다. ‘너는 내 아내를 가지고 놀았어!'‘어제 지시연은 이놈을 위해 다른 여자와 싸웠는데, 오늘 이 자식은 다른 여자를 껴안고 애정을 과시하고 있었네!!’ 하지만 지금 다행히도 유건의 이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그는 천천히 말꼬리를 물었다. “지, 시, 연!” ‘뭐?’ 성빈과 진아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했다. ‘시연? 내가 시연이를 가지고 놀았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저기...” 진아가 나서서 말했다. “이
시연은 말하면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단지 고맙다고 말하려고 했어요. 저를 위해 화내줘서 고마워요.” 유건은 잠시 멍해졌다. ‘내가 잘못 들은 걸까?’갑자기 그는 상처 부위를 부여잡으며 통증을 느꼈다. “고유건 씨?” 시연은 긴장한 채로 허리를 굽혀 그의 복부에 손을 얹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유건을 바라볼 때, 시연의 눈은 마치 하얀 수은 속에 검은 수은이 담겨 있는 것처럼 반짝였고, 그 눈동자 속에는 오로지 유건만이 존재했다. 시연의 눈동자 속에 자기 모습을 본 굳게 빗장을 걸었던 유건의 마음이 순간 풀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졌다. 시연이 갑자기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유건 씨! 제가 격렬하게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런데도 싸우다니! 정말 다시 수술받고 싶어서 그래요?” ‘이 여자의 태세 전환은 정말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더 빠르네. 조금 전까지도 나한테 고맙다고 하지 않았나?’ 유건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투덜거렸다. “내가 이렇게 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귀찮으면 신경 쓰지 마.” ‘고유건이 지금 또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건가?’시연은 기가 찼다.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좀 다급했어요. 저 귀찮지 않아요, 일단 검사하고 상태를 볼게요.” 유건은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검사를 받았다. 그의 건강 상태는 다행히 나쁘지 않았고, 상처도 다시 터졌지만 심각한 문제는 없었다. 시연은 안도의 숨을 쉬며 그를 병실로 다시 데리고 갔다. “어젯밤 일을 당신이 봤을 줄은 전혀 몰랐어요. 그런데 다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예요.” 그녀는 설명했다. “성빈이와 진아와 저 이렇게 셋은 오랜 친구예요. 성빈이는 집안에서 정해준 맞선을 피하려고 저희에게 도움을 요청한 거예요.” ‘아, 그런 일이었구나.’ 유건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마치 가슴에 있던 커다란 돌덩이가 사라진 것처럼, 호흡이 한결 편해졌다.
“으아악!!” 시연은 갑자기 정신이 들자 비명을 지르고, 얼굴을 감싸 쥔 채 급히 욕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세상에!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침착하자, 침착하자. 난 의사야... 의사가 남자를 본 게 뭐가 그렇게 놀랄 일이야?’ ‘그래, 그거야.’ 시연은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천천히 차분해졌다. 유건은 아직 욕실에 나오지 않았다. 시연은 계속 그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고, 아까 했던 실수를 떠올리며, 더 이상 아무 데나 돌아다니거나 무작정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스탠드 테이블 위로 향했다. 거기에는 열려 있는 보석 상자가 있었고, 안에는 플래티넘 다이아몬드 팔찌가 담겨 있었다. 시연은 혼잣말로 말했다. “정말 예쁘네요.” 갑자기 유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에 들어?” 그는 나와서 시연에게 다가와 침대 끝에 앉았다. “네?” 시연은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며 조금 부끄러워졌다. “뭐라고요?” “맘에 드냐고 묻잖아.” 유건은 그 팔찌를 들고 물었다. 이 팔찌는 아까 주지한이 가져온 것이다. ‘근데 이 남자가 왜 나에게 그런 걸 묻지?’ 시연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고,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예쁘네요.” “그러면 당신에게 선물할게.” 유건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지시연은 이걸 좋아하는 것 같아.’ “예?” 시연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걸 나한테 준다고?’ “아니, 아니에요, 됐어요.” 그녀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 “전 받을 수 없어요. 그리고 왜 제가 이걸 받아야 하죠?” 유건의 표정은 금세 불쾌해졌다. “말했잖아, 너에게 주는 감사 선물이라고.” 시연은 여전히 거절했다. “그럼 더 받을 수 없어요. 저는 의사예요. 환자를 돕는 건 당연한 일인데, 이걸 받으면 뇌물을 받는 거나 다름없잖아요...” “그만해.” 유건은 시연의 말을 더 들어줄 수 없다는 듯이 거칠게
시연은 잠깐 망설였을 뿐, 바로 차에 올라탔다. 노은범이 왜 갑자기 여기에 나타났는지, 그와 함께 차를 타는 것이 적절한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고마워, 서쪽에 있는 주선교로 가줘.” 주선교, 하늘길 묘원...은범도 그곳을 낯설지 않게 여겼다. 그들은 어린 시절 서로 사랑하던 사이였고, 그 시절 매년 시연의 엄마인 부명주의 생일과 기일마다 은범은 시연과 함께 묘지를 찾곤 했다. ‘그런데 오늘 시연이가 이렇게 급히 가는 이유가 뭘까?’ 은범은 묻지 않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대답했다. “알았어.” 도착하자마자 차가 멈추기도 전에 시연은 허둥지둥 뛰어내렸고, 그만 넘어질 뻔했다. “시연아!” 은범이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 “조심해.” “난 괜찮아.” 시연은 급히 말했다. “고마워, 시간 빼앗아서 미안해. 바쁘면 먼저 가도 돼.”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후다닥 앞쪽으로 뛰어갔다. 은범은 그 자리에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시연이와 내 사이가 이제 이렇게나 멀어진 걸까?’ ‘지금 이 모든 게 다 내가 자초한 일이니... 그래, 당연하지.’ 잠시 망설인 후, 그는 시연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묘비 앞. 지동건 일가가 이미 땅을 파기 시작했다! 지동성, 장미리, 그리고 장소미, 세 사람 모두 그곳에 있었다. “지동성!” 시연은 창백한 얼굴로 다급히 지동성 앞에 다가갔다. “지시연!!” 지동성은 불만스럽게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이제 아버지라는 말도 못 하겠니?” “아버지?” 시연은 지동성의 말을 되물었다. 호칭도 아닌 말을 내뱉으며 그녀는 스스로 웃음을 터뜨렸고, 손으로 부명주의 묘를 가리켰다. “우리 엄마 앞에서 내가 아버지라 부르면, 당신이 감히 대답이나 할 수 있겠어요?” “너...” 지동성은 시연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장미리가 빈정대며 끼어들었다. “정말 주둥이가 살아있네. 너의 그 잘난 척을 가족에
“여보, 그러면...”지동성이 겨우 입을 열려고 하자, 장미리가 거칠게 그를 막았다.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거야? 어서 파내라고!” 장미리는 지동성에게 말할 기회도 전혀 주지 않았다. 오히려 우유부단한 그의 태도 때문에 더욱 화가 나서, 눈에 불을 켠 듯 형형한 눈빛으로 말했다. “더 지체하면 신고할 거야!” 그 말 뒤에, 그녀는 독하게 한 마디 더 덧붙였다. “고유건 알지? 내 딸의 남자 친구가 바로 그 사람이야! 나를 불편하게 하면, 내 딸이 불편해지고, 내 딸이 불편해지면 고유건이 불편해질 거야!” 그 말을 듣자 망설이던 몇 명의 사람들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삽을 들었다. G시에서 고유건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고유건이 발을 구르면 G시가 흔들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고유건은 대단한 위세를 가진 사람이었다. “파내라!” “안 돼!” 시연은 놀라 달려가며 그들을 막으려고 했지만, 여러 장정을 한꺼번에 당해낼 수는 없었다. “아!” 몸싸움 도중 시연의 손에 상처가 났고, 피가 흘렀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당황해 잠시 멈췄다. “정말 짜증 나!” 소미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시연을 붙잡았다. “비켜! 끝까지 이럴 거야?” 그 순간, 누군가가 소미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악...!!!” 소미는 아픔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노려보았다. 은범은 평소에 온화하고 점잖은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몹시 살기 어린 눈빛으로 소미를 보고 있었다. 손에 전혀 힘을 주지 않은 것처럼 보였으나, 소미는 마치 손목이 부서질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아프잖아!” “시연이는 안 아프겠어?” 은범은 시연의 손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고 핏발 선 눈으로 말했다. “꺼져.” 그는 소미의 손목을 놓으며 그녀를 밀쳐냈다. 그리고 시연을 살며시 끌어안고 말했다. “시연아, 미안해... 내가 왔어.” 시연은 모든 에너지를 잃은 듯 그에게 기대었다. 지금 시연도 잘 알고 있
시연은 차갑게 고개를 돌려, 여전히 고상한 태도를 유지하는 남자를 잠시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착각했어요. 이 팔찌가 제 것인 줄 알았거든요. 그때 저한테 말씀을 해주셨어야죠. 제가 오해했다고요.” ‘지금 이 여자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유건은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연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고 대표님, 앞으로 여자 친구에게 줄 선물은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주지 마세요. 제가 가져갔으니, 고 대표님은 하나 더 사서 여자 친구에게 줘야 하잖아요. 귀찮지 않나요?” 그 말을 남기고 시연은 문 쪽으로 걸어갔다. 유건은 안색이 순간에 어두워지며 생각했다. ‘설마 지시연이 장소미를 만난 거야? 둘이 어디서 만났지?’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지시연이 장소미가 그 팔찌를 차고 있는 것을 봤다는 사실이야... 그래서 지시연은 기분이 나빴던 걸까?’ ‘왜?’ ‘기분이 나빠야 할 사람은 장소미여야지, 왜 자기가 기분 나쁘다는 거야? 원래 그 팔찌는 지시연에게 주려고 했던 거였는데...’시연이 문을 열고 나감과 동시에, 주지한이 들어왔다. 지한은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시연 씨, 얘기는 다 끝났어요?” 시연은 지산의 말을 무시한 채, 갑자기 고개를 돌려 유건을 바라보았다. “고유건 씨, 나는 당신과 절대 이혼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이를 악물고 덧붙였다. “제 것이 아닌 건 가지지 않겠지만, 제 것이라면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거예요.” 시연은 그렇게 말한 뒤 방을 떠났다. 유건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지한을 향해 물었다. “저 여자가 방금 한 말, 무슨 뜻이지?” 지한도 당황스러워 눈이 휘둥그레졌다. “형님, 시연 씨가 지금 형한테 고백한 거 아닌가요? 시연 씨가 형님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음... 화내지 말고, 차분히 생각해 보자.’ 유건은 속으로 마음을 가다듬으며 생각했다. ‘왜 내 주변에는 연애를 해본 사람도 없고
“시연아.” 진아가 시연을 쿡 찌르며 말했다. “저기, 너 찾는 거 아니야?” 시연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바로 옆에서 은색 파가니가 천천히,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이 느리게 달리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내밀자 차가 멈췄고, 지한이 문을 열고 내렸다. “시연 씨, 어디 가는 겁니까? 그렇게 무거운 짐을 들고 있어요? 어서 차에 타요, 형님도 시연 씨를 데려다주겠다고 하셨어요.” 그는 말하면서 여행 가방의 손잡이를 잡아 들어 올리려 했다. “필요 없어요!” 시연은 손을 놓지 않고 차갑게 거절했다. “제가 알아서 갈게요.” “이게...” 지한은 당황스러워하며 뒷좌석에 있던 유건을 바라봤다. 차창 너머로 유건은 상황을 보고 있었고, 얼굴이 굳어지며 곧바로 차에서 내려 주지한을 지나쳐 여행 가방을 들어 올렸다. “트렁크 열어.”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네, 형님!” 지한은 재빨리 트렁크를 열었고, 유건은 가볍게 여행 가방을 트렁크에 집어넣었다. 시연은 놀라고 화가 나서 그의 팔을 붙잡으며 외쳤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건 제 짐이에요! 내려놔요! 저는 고 대표님의 차 타고 싶지 않아요!” “그만해!” 유건은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꾸짖었다. 그 순간, 그는 아이를 혼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시연은 그보다 다섯 살 어리니 충분히 아이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자아이였다. 그래서 함부로 손댈 수 없었고, 다만 시연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었다. “네가 스스로 차에 탈래, 아니면 내가 안아서 태울까?” 그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질문이었다. 시연은 화가 나서 입술을 삐죽이며 결국 뒷좌석에 올랐다. 지한은 진아가 든 여행 가방을 받아서 들며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아가씨, 타세요.” “아, 알겠어요.” 진아는 어리둥절해하며 지한의 말에 따랐다. 뒷좌석에서는 유건과 시연이 나란히 앉아 있었지만, 둘 다 말없이 서로에게 등을 돌린 채
유건은 가까이서 시연을 응시하며 어두운 얼굴로 불만을 내비쳤지만, 그 이상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녀가 여전히 그에게 화를 내는 건 손목에 찬 팔찌 때문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유건은 남자였고, 이번 일은 확실히 그가 잘못 처리한 부분이었다. “팔찌 문제는 내 잘못이야. 하지만 넌 정말로 오해한 거야. 원래 그 팔찌는 너에게 주려고 했던 거였어.”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자존심을 지키는 듯했다. 시연은 당황했다. ‘고유건이 왜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낸 걸까? 그리고 이 남자가 왜 지금 나에게 해명하고, 사과를 하는 거야?’ “방금... 뭐라고 했어요?” 그녀는 믿기 어려웠다. 유건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말했다. “못 들었으면 됐어!” ‘한 번 해명한 것만으로도 내 한계였어. 이 여자가 일부러 나에게 두 번 말하게 할 생각이었나?’ 그는 더 이상 화첩에 대한 호기심도 없었고, 방금의 호기심은 분노에 묻혔다. “지한아, 가자!” “네, 형님!” 두 사람이 떠나자, 진아는 곧바로 시연에게 다가와 말했다. “어? 이 화첩이구나. 내가 기억하는데, 네가 어렸을 때 같이 놀던 친구를 그린 거 맞지?” “응.”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림 속 장면은 이미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며 대화를 나눴다. 진아가 말했다. “그러면 그 뒤로는 한 번도 못 만난 거야?” “응, 한 번도.” “하!” 진아는 웃으며 말했다. “만약 만나더라도 너희 둘 다 못 알아볼걸? 어릴 땐 다들 많이 변하잖아. 어른이 되어도 거의 그대로인 사람이 많지만, 어린애가 커서 성인이 되면 엄청나게 달라지지.” 그 말에 시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아마 우리 인연은 거기까지였던 거겠지.” 그녀는 화첩을 여행 가방에 넣으며 대화를 끝냈다. “시연아!” 진아는 다시 시연을 쫓아가며 물었다. “그리고,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너랑 고 대표, 도대체 무슨
유건은 결국 함정에 빠졌다. 재빨리 걸음을 멈추고 시연을 놓아주었다.“배가 어떻게 아파? 심한...”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시연은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지시연!”유건은 당황하며 몇 걸음에 따라잡아 그녀를 끌어안았다.시연은 눈을 크게 뜨고 온몸이 얼어붙었다. 뭔가 반응할 새도 없이, 유건의 넓고 따뜻한 손이 여자의 눈을 가렸다.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보지 마.”“뭐를요...?”시연은 놀라며 남자의 손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왜 이러는 건데요? 안 가려도 돼요...”‘안 가리면 어떡하라고?!’유건은 앞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노은범이 하진주에게 자기 재킷을 벗어 걸쳐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이걸 시연이가 본다면 얼마나 상처받을까?’“유건 씨!”시연이 저항하자, 유건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너, 으음...”시연이 놀라서 입을 열려는 순간, 유건이 그녀를 덮치듯 입을 맞췄다.‘뭐야?!’시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놔... 윽...”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유건은 더욱 거칠게 여자의 입술을 탐했다.남자의 키스는 점점 깊어졌고, 점점 더 강렬해졌다.시연은 필사적으로 유건의 가슴을 두드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라 손을 번쩍 들었다.찰싹!깨끗한 타격음이 울리며 유건의 뺨이 돌아갔다.유건은 순간 멍해졌다.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며 충격받은 표정으로 시연을 바라보았다.“미안해, 나는...”그는 단지 시연이 은범을 보지 못하게 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키스하고 나서 이성을 잃어버렸다.그녀를 원했고, 가까이하고 싶었으며, 심지어 그녀를 독차지하고 싶었다.시연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마치 혐오스러운 존재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너무나 속상하다는 듯 말했다.“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우리... 그래도 예전에는 부부였고, 이 사람의 포옹과 키스를 받아들일 이유라도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이제 우리는 이혼을 앞둔 상태잖아!
연회장으로 돌아온 유건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그는 소미를 한 번 바라보고 나직이 말했다.“가자, 별로 재미없어.”소미는 아무런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건의 표정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무슨 일 있어요?”“아니.”유건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너무 늦게 자면 두 사람한테 안 좋잖아.”“네.”소미는 미소를 띠었지만 속으로 불안했다.‘어떡하지? 이 사람, 아이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지금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나중에 크게 곤란해질지도 몰라.’“왜 그래?”유건은 소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눈을 가늘게 떴다.“몸이 안 좋아?”“아니에요.”소미는 웃으며 얼버무렸다.“그냥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같이 가자.”“괜찮아요...”“아니.”유건은 단호했다. 그녀가 지금 상태에서 혼자 다니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니 말이다.그는 결국 화장실 입구까지 소미를 데려다주었다.“천천히 다녀와.”“네.”소미는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이 남자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이렇게 다정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겠어?’유건은 조금 떨어진 흡연 구역으로 이동했다.담배를 꺼내 들었지만, 불을 붙이기도 전에 시연이 책가방을 메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았다.‘시연이? 여기 온 이유는 뭘까?시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뭐 찾는 거야?”“네?”시연이 놀라 돌아보았다.유건을 보자, 그녀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여기 B동 6층 맞나요?”유건은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6층은 맞는데, 여긴 B동이 아니라 C동이야.”“아.”시연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두드렸다.“아, 진짜! 또 길을 잘못 들었네요.”“또?”유건은 그녀의 찡그린 얼굴을 보며 무심코 물었다.“길을 자주 잃어버려?”시연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사실, 자주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방향 감각이 떨
[알겠습니다, 형님.]전화를 끊자, 소미가 방으로 들어왔다.“유건 씨.”유건은 담배를 비벼 끄고 손을 저었다.“먼저 들어가 있어. 여기 담배 냄새 나.”담배는 임신한 여자에게 좋지 않으니까.“아, 네.”연기가 가라앉은 후, 유건은 문을 열고 들어가 소미가 건넨 물을 받았다.“좀 괜찮아요?”소미가 다정하게 물었다.“네.”유건은 물을 마시고 소파에 기대었다.“너무 많이 마셨나 봐.” 그는 관자놀이를 가볍게 눌렀다.“머리가 좀 아프네. 그래도 잠깐 앉아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제가 마사지해 드릴까요?”소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건의 곁에 앉으며 소매를 걷었다.남자가 거부할 틈도 없이, 그녀는 말했다.“눈 감아요. 우리 아빠가 술 마셨을 때 자주 해드렸어요.”여자의 손끝이 관자놀이를 누르자, 유건은 거부하지 않았다.“고마워.”소미가 잔잔히 웃었다.“저한테 뭘 그렇게 고마워하세요? 제가 유건 씨를 도로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우린, 앞으로 평생 함께할 사이잖아요.”‘그래, 앞으로도 함께할 사람이지.’유건은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익숙해져야 했다.소미의 손길이 생각보다 편안해서 그는 점점 나른해졌다.“유건 씨?”그녀가 속삭이듯 부르자, 유건은 반쯤 감긴 눈으로 대답했다.“응...”소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가슴이 뛰었다.‘이건 기회야!’‘내 임신은 거짓말이잖아... 시간을 더 끌면 고유건은 의심할 거고, 배를 감출 수도 없을 거야.’‘그 전에 내가 확실히 해야 해. 이 사람과 더욱 가까워지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그녀는 숨을 죽이고 목에서 어깨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유건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남자의 입술과 단 한 뼘도 남지 않은 거리.하지만, 소미는 남자의 입술이 닿기 직전, 유건의 눈이 번쩍 뜨였다.여자가 너무 가까이 있는 걸 깨닫고, 순간 멈칫했다.“소미 씨?”“유건 씨.”소미는 포기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키스해 줘요.”유건은 말이 막혔고, 본능적으로 미간이 좁혀졌다
유건은 회의를 마치고 대표실로 돌아왔다.비서가 다가와 보고했다.“대표님, 장소미 씨가 도착하신 지 좀 되었습니다.”오늘 밤, 유건은 한 연회에 참석해야 했고, 이번엔 소미가 파트너였다.“유건 씨.”소미가 환하게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그냥 앉아 있어.”유건은 손을 살짝 흔들며 무심하게 말했다.“조애린 씨한테 들었는데, 일을 계속할 생각이야?”“네, 그래요.”소미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설명했다.“양 감독님의 작품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게다가, 이미 절반 정도 촬영했거든요. 광고를 비롯한 일정이 과하게 많은 것도 아니고요. 저는 가만히 있는 게 더 싫어요.”잠시 생각하던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미의 배를 힐끗 바라보았다.“몸에 이상 없으면 소미 씨 뜻대로 해. 다만, 배가...”언젠가는 드러날 것이었다.“아, 아직 문제없어요. 사극이라 의상 때문에 티도 안 나고요.”소미는 오늘 넉넉한 원피스를 입고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평평한 신발까지 신은 것을 떠올렸다.유건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양 감독님께 소미 씨 촬영 분량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달라고 이야기해.”“네, 유건 씨 말대로 할게요.”시간이 늦어서 유건은 휴게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소미와 함께 대표실을 나섰다....연회는 해성 호텔에서 열렸다.주차장에서, 노은범이 먼저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고마워.”진주가 미소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은범은 담담히 말했다.“별일 아니야.”그가 어색해하는 모습을 본 하진주는 웃으며 말했다.“너무 긴장하지 마. 우리 약속했잖아? 친구처럼 지내기로.”“알아.”은범은 살짝 찡그렸다.“하지만, 네가 나 때문에 불편해질 수도 있잖아.”“괜찮아.”진주는 고개를 저었다.“이건 너만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엄마도 연관되어 있으니까.”그녀는 남자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았다.“그냥 편하게 가자. 시간이 지나면 부모님들도 우리가 진짜 안 될 거라고 깨달으시겠지.”은범은 한결 편안해졌다.‘나보다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하진주를 힐끗 바라보았다.“내가 보기엔 진주가 참 괜찮은 것 같은데, 정말 아쉬워. 우리 은범이 복이 없는 탓이지, 뭐.”진주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이모, 그런 말씀 마세요. 과찬이세요.”“진주야.”강수희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진주의 손을 잡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지난번에 은범이랑 같이 연극 봤다면서? 그 후로는 어떻게 된 거야? 솔직히 말해 봐. 은범이의 뭐가 마음에 안들었니?”“그게...”진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할까?’지난번에 은범과 미리 조율한 대로, 진주는 연극을 본 후 자기 부모님께 자신이 은범을 향한 마음이 없다고 전했다. 이는 진주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거였고, 은범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강수희가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진주는 은범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모, 은범이는 괜찮은 사람이에요. 다만, 저희는 서로를 잘 모르잖아요...”이 말이 강수희에게 희망을 주고 말았다.“그럼, 좀 더 만나보고 알아가면 되잖아? 제발, 은범이에게 기회를 줘 봐, 응?”“어머니!”은범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다가왔다.그는 먼저 방혜령에게 인사를 건넸다.“이모, 오랜만이네요.”그리고 곧바로 어머니를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어머니, 이모는 어머니를 뵈러 오신 거잖아요.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내가 이러는 건...”“괜찮아.”방혜령이 손을 흔들며 부드럽게 웃으면서 시선을 은범에게 두었다.“이제 많이 컸네? 그런데 너희 엄마 말도 틀린 건 아닌 것 같아.”그녀는 딸을 한번 흘긋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너희, 한 번 본 걸로 판단하기엔 너무 성급하지 않아? 좀 더 만나면서 알아가는 게 맞지 않나?”강수희가 기뻐하며 맞장구쳤다.“내 말이! 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어머니!”“엄마!”은범과 진주가 동시에 소리쳤다.그 모습을 보고, 방혜령과 강수희는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과장실 문 앞에서, 시연은 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형수님.]“지한 씨.”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유건 씨와 잠깐 통화할 수 있을까요?”[당연하죠. 형님도 여기 계세요.]잠시 후, 수화기 너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나야.]유건의 무심한 어조.“심폐 프로젝트팀에 내가 들어가게 된 거, 당신이 한 일이에요?”질문은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개입했다면, 바로 이해할 터였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남자의 답이 돌아왔다.[그래.]전혀 놀랍지 않았다. 시연은 눈을 감았지만, 당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여자의 침묵에, 유건은 비웃듯 말했다.[설마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벌인 일이라는 이유만으로?]시연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멍청하긴...]유건이 낮게 욕했다.[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간다는 게 너한테 어떤 의미인지, 내가 설명해야 하냐?]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팀에 들어가면 분명 시연의 수입도 늘어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경험과 기술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돈 때문이라면 이렇게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지시연.]유건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나와 관계를 끊는 게 중요해? 아니면 네 미래가 더 중요해?]책망과 걱정이 섞인 목소리.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시연도 알고 있었다.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결정을 내렸다.“고마워요, 유건 씨.”유건은 핸드폰을 쥔 채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동시에, 안도감이 밀려왔다.‘다행이네. 이 여자, 결국 받아들였어!’하지만 시연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유건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그리고 그녀는 덧붙였다.“예전엔 내가 잘못했어요. 항상 미안하게 생각해요. 앞으로는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이 잘되길 바랄게요. 그리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유건은 한참 동안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원래라면, 저 여자, 부와 명예를 누려야 마땅해. 하지만 지금은...’...차에 돌아온 지한은 유건이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즉, 유건의 온몸에서 스며 나오는 묵직한 어둠과 슬픔을 느낀 것.‘설마, 또 형수님한테 혼난 건가? 그게 아니면, 이번엔 진짜로 맞기라도 한 건가?’“형님...”“지한아.”유건의 시선이 멍하니 허공을 가로질렀다.“방법을 좀 찾아봐. 시연이가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내가 돈을 건네면, 시연이는 절대 받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연이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지 못하는 건 아닐 거야.’ ‘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시연이가 돈과 명예를 탐하는 여자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지? 정말 한심해!’...시연은 임진아 집으로 돌아온 뒤, 저녁에 양석현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교수님.”[시연아, 내일 오전에 내 사무실로 와. 할 말이 있어.]“네, 교수님.”양석현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다음 날 아침, 시연은 교대 근무도 마치지 못한 채 서둘러 외과로 향했다.양석현은 회진을 마친 후에야 시간을 냈고, 시연을 과장실로 데려갔다.“일찍 왔구나. 앉아.”시연은 긴장한 채 자리에 앉았다.“교수님, 무슨 일이신가요?”‘혹시 내가 1학년 실험 수업을 하는 데에 문제가 생긴 걸까?’“뭘 그렇게 긴장해?”양석현은 일부러 뜸을 들이다가도, 결국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은 소식이야.”그는 서랍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내 시연에게 건넸다.“이걸 작성하면, 너는 공식적으로 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가게 될 거거든.”시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교수님, 이게... 정말 규정에 맞는 건가요?”“규정대로라면, 맞지 않지.”양석현이 웃었다.“원래는 네가 대학원에 합격하면 팀에 넣을 생각이었어. 그 자체도 예외적인 거지만 말이야.” 그런데 아직 대학원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가능하게 된 걸까?양석현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말했
차가 시연 앞에 멈췄다.창문이 내려가더니, 지한이 고개를 내밀고 미소를 지었다. “형수님, 어디 가세요? 타세요, 제가 모시고 갈게요.”시연은 유건을 흘낏 보았다.‘이상하네, 왜 조수석에 앉아 있지?’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또 유건의 차를 타면 점점 엮이게 될 것 같았다.“형수님, 얼른 타세요.” 지한은 차를 움직일 기색도 없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내려서 직접 문 열어드려야 합니까?”“아니에요...”시연은 거절하려 했지만, 정류장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불만을 터뜨렸다.“뭐야, 버스 정류장에 세우면 안 되는 거 몰라?”“그러니까! 버스가 못 지나가잖아.”“빨리 가라고!”“벤틀리네, 저런 차를 태워준다는데 안 탄다고?”“재수 없어.”점점 더 듣기 거북한 말들이 오갔다.어쩔 수 없이, 시연은 차 문을 열고 탔다.“형수님, 어디로 가면 됩니까?”차에 타자마자, 지한이 물었다.시연은 대답 대신 조수석에 앉아 있는 유건을 바라보았다.‘이거 완전 악연 아니야? 왜 자꾸 마주치는 거지?’“형수님.” 지한이 웃으며 유건을 가리켰다. “마침 형님이 차에 계시긴 하지만, 너무 신경 쓰진 마세요. 그냥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셔도 돼요. 어차피 아무 말도 안 할 거니까요.” 시연은 당황했다. ‘이 둘 뭐 하는 거야?’“이제 목적지 말해주실래요?”지한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형수님, 실은 우리도 친구라고 할 수 있잖아요. 제가 그저 한 번 모시고 가는 걸로 부담 갖는 건 아니시죠?”지한의 말에 시연은 결국 마지못해 답했다.“산신당으로 갈 거예요.”지한은 잠시 멈칫하더니, 본능적으로 조수석의 유건을 바라보았다.“거기서 볼일 있으세요?”“네.”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좀 살 게 있어서요.”‘거기서 뭘 사려는 거지?’산신당은 G시보다 더 오래된 곳일지도 모른다. 사찰뿐만 아니라 재래시장도 있어, 평범한 서민들이 주로 찾는 곳이었으니 말이다.분명 번잡하고 활기차지만, 고급스
시연은 믿을 수 없었다.‘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는 우리한테 단 한 번도 아버지 역할을 해주지 않던 사람이,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한다고?’지동성은 딸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다시 한번 말하마. 우주를 ‘웰스’로 보내는 돈은 이 아빠가 다 낼게.” 시연은 멍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닌데, 이해할 수 없었다.“왜요?”지동성은 한숨을 쉬며 난감한 듯 말했다.“아버지가 자식한테 돈을 주는 데에도 이유가 필요하니?”‘이유가 필요하냐고? 그럼 그때 우주의 치료비를 끊고,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건 누구였더라?’‘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진 당신이 그 중심에 있던 거 아니었나?’ 시연은 믿을 수 없었다. 곧이어, 지동성이 말을 이었다.“시연아, 곧 다가올 아빠의 생일에 네가 꼭 와줬으면 좋겠구나.”시연은 또다시 얼어붙었다.‘오늘따라 무슨 일이 이렇게 많아?’무심결에 튀어나왔다.“무슨 뜻이에요? 도대체 뭘 하려는 거죠?”“흠.”지동성이 가볍게 기침했다.“아빠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앞으로 몇 번이나 생일을 맞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단다. 가족끼리 모여서 밥 한 끼라도 같이 먹고 싶어.” ‘뭐 이런 헛소리가 다 있어?’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냉소를 흘렸다.“아내도 있고 딸도 있잖아요. 가족이랑 매일매일 함께하잖아요?”“시연아.”지동성이 딸의 말을 끊고, 불만스럽게 고개를 저었다.“너와 우주도 아빠의 자식이야.”그는 모델 조립에 열중하고 있는 우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아빠의 생일에 와준다면, 네가 나를 아버지로 인정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게. 그때가 되면 우주의 치료비는 얼마가 되든 내가 책임지마.” ‘우주를 빌미로 협박하는 거야?’시연은 본능적으로 떠올렸다.‘로얄호텔에서의 그때도...’그녀는 경계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예요?”딸의 반응을 본 지동성도 깨달은 듯했다. 잠시 스치는 후회의 눈빛.“아빠가 뭘 할 수 있겠니? 그냥 생일을 함께 보내고 싶은 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