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장소미를 응시하며 말없이 있었다. ‘장소미는 고유건의 여자 친구야. 조만간 만나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시연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소미 역시 마음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어젯밤, 소미도 실시간 검색어를 보았는데, 그때 곧바로 병원에 오려고 했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지한은 상황이 여의찮다며 기다리라고 할 뿐이었다. 결국 소미는 밤새워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소식을 들을 수 없었고,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아침부터 그녀 홀로 달려온 것이었다. 그러나 고유건이 아닌 지시연을 먼저 만나고 말았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던가. 소미는 크게 겁을 먹었다.그녀가 억지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병실 입구의 환자 명패를 훑어보았다.‘유건 씨의 병실이 맞잖아!’ ‘그런데 지시연이 왜 여기서 나오는 거지?’ 소미가 조금은 허무한 목소리로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 눈을 가늘게 뜬 시연은 잠이 부족해 나른해 보였다. “의사가 병원에 있는 게 뭐 어때서? 너야말로, 앓고 있는 정신병을 진찰받으러 온 거야?” “지시연, 말이면 다인 줄 알아?!” 눈살을 찌푸린 소미는 눈 밑의 혐오감을 감출 수 없었다. 소미는 어려서부터 시연의 뼛속 깊은 곳까지 배어 있는 그 도도함을 싫어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집이랑 아버지까지 모두 나한테 빼앗긴 주제에, 뭐가 저렇게 기세등등한 거야?’ 그러나 오히려 지금 마음이 불안하고 조급한 것은 바로 소미였다. “남자 친구를 보러 온 거야.”“아.”시연이 문득 뒤를 가리켰다.“고유건 대표님? 저 사람이 네 남자 친구구나.”시연이 길을 터주며 말했다.“그럼 들어가 봐.”이 말을 마친 그녀는 걸음을 내디뎠다.소미는 시연의 뒷모습을 보고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지시연이 이미 유건 씨를 만난 거 같지? 하긴, 의사와 환자가 만나는 건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지.’ ‘하지만... 두 사람
지금 유건은 상의가 반쯤 벗겨져 있는 상태로 여인을 품에 안고 있었다. 정말 아찔한 장면이었다.다만, 유건의 신분 때문에 누구도 감히 뭐라고 할 수 없었다.모두가 아무 일도 없는 듯이 행동하며 각자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시연은 특히 침착하게, 교대할 의사에게 유건의 상태를 설명했다.“칼에 찔려 부상을 당한 환자입니다. 복부 3.2센티미터 깊이로 칼이 들어갔지만, 장기 손상은 없습니다...”시연이 무슨 말을 하든 유건은 신경 쓰지 않았다.소미를 부축하면서 그는 온몸의 신경이 바짝 곤두서는 것 같았고, 심지어 약간의 죄책감까지 느끼면서 시연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비록 그가 처음부터 결혼 상대가 있다고 말했지만, 시연에게 소미를 들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기분이 뭔가 묘했다.마치 바람피우다 아내에게 딱 걸린 찌질한 남자가 된 기분이었다.“고유건 님, 푹 쉬세요.”교대가 끝나자 의료진은 하나둘씩 바뀌었다.유건은 처음 병원에 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시연이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유건 씨.”그가 꼼짝도 하지 않고 입구를 주시하는 것을 보고 소미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어디 불편해요? 다친 데가 많이 아파요? 의사 부를까요?”유건의 신경이 다시 곤두섰고, 안색이 변했다.“아니, 괜찮아요.”유건은 단지 스스로에게 놀랐을 뿐만 아니라 화가 났다. ‘왜 이렇게 양심에 찔리지?’‘허울뿐인 부부 사이인데, 누구를 만나든 외도는 아니지.’소미는 오전에 촬영 일정이 있었다. 어렵게 캐스팅된 유명한 감독 양호천의 영화라 빠질 수 없었다.주지한이 오고 나서야 소미는 아쉬워하며 떠났다.“그럼 푹 쉬어요, 시간 날 때 다시 올게요.”“그래요, 가봐요.”이와 동시에 지한을 따라온 두 젊은 남자들이 있었다. 둘은 매우 닮았고, 모두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었다.“형님.”지한이 설명했다.“이런 일이 생길까 싶어 민환과 기환을 불러들였습니다. 이들이 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시연은 치료에만 집중하고 유건을 전혀 보지 않았다.유건이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너 지금 나한테 화났어?”“예?”시연은 치료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화났느냐고요? 제가요? 고유건 씨에게? 그럴 게 있나요?”유건은 목소리가 담담하고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니면 다행이고.”“아.”시연은 여전히 유건이 질문한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고 허리를 굽혀 상처에 삽입한 튜브를 짰다.유건이 물었다.“이 튜브는 언제 빼나? 매우 불편한데.”“그렇게 금방은 안돼요.”“쉽게 말하면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다 배출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복막염으로 더 위험해질 수 있어요.”이 말을 끝으로 시연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이 여자가 왜 이렇게 조용해?’유건은 반쯤 눈을 감고 말했다.“나에게 할 말 없나?”“네?”시연이 당황해서 대답하려는 순간 유건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치료 이야기는 그만 해.”유건의 말에 지시연은 깜짝 놀라서, 긴 속눈썹을 떨며 웃기 시작했다.“한마디 하자면, 여자 친구가 아주 예쁘더라고요.”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유건은 지시연을 조롱했다.“위선적이네.”“그래요.”시연은 손을 들며 유건의 말을 인정했다.“진심은 아니었어요. 사실, 제가 더 예쁘잖아요.”유건은 눈빛이 미묘하게 변하며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이었다.“참 뻔뻔한 사람이네, 이렇게 자신을 칭찬하는 법도 있나?”이 말에 큰 의미가 있지는 않았지만 시연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제가 뻔뻔스러운 거, 벌써 알고 있었잖아요?”시연의 답답한 태도에 유건은 화낼 기분도 사라져버렸다.“그렇게 쳐다보지 마요.”시연은 고개를 숙이고 약을 갈아주면서 마스크 너머로 말했다.“우리 결혼이 계약 결혼인 거 나도 알아요. 고유건 씨가 누구와 만나는지 간섭할 권리도 없고요. 사랑하고 싶은 사람 계속 사랑하시고, 만나고 싶은 사람 계속 만나세요.”그녀는 원래 고유건과의 결혼을 간절히 원하던 장소미를 혼내주고 싶었을 뿐,
점심시간에 시연은 구내식당에서 식사 후 돌아오다가 복도에서 유건이 정기철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걷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나쁘지 않네요.”시연은 환자를 격려하듯 유건을 칭찬하며 말했다.“몸 상태가 정말 좋네요, 벌써 일어나 걸을 수 있다니. 이렇게 잘 움직이면 회복이 더 빠르겠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요.”“예, 선생님.” 정기철이 아주 진지하게 대답했다.시연이 막 가려고 하는데 유건이 불러세웠다.“잠깐만.”“무슨 일 있어요?” 지시연이 몸을 돌렸다.“너...” 유건은 뜻밖에도 좀 쑥스러워했다.“뭐 좋아해?”“네?”밑도 끝도 없는 고유건의 질문에 시연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의 큰 눈을 깜박이자 속눈썹이 살랑거렸다.“갑자기 못 알아듣는 척은.”유건이 불만스럽게 말했다.“고맙다는 말 못 들었다며? 한 회장님 일까지 다 빠뜨리지 않고 너에게 감사표시 할게.”시연은 이제야 고유건의 말을 이해했다.“감사 표시요?”그녀도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특별할 것 없어요. 나도 다른 여자들이 좋아하는 걸 좋아해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핸드폰이 울렸다.그녀는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네, 네. 이미 번역은 다 마쳤어요. 점심시간이니까 바로 보내 드릴게요. 네, 네.”전화를 끊었는데 유건이 아직 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또 무슨 일 있어요?”“뭐가 그렇게 바빠?” 유건은 대답 대신 도리어 다른 질문을 했다.시연이 대답했다.“통번역 아르바이트를 찾았는데 말할 시간 없어요. 빨리 보내야 해요.”말을 마치고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로 들어갔다.혼자 남겨진 유건은 상처를 가볍게 누르며 머릿속에 물음표를 가득 채웠다‘아르바이트?’‘BLUE에서 하던 아르바이트를 계속 방해하니까 다른 아르바이트를 찾느라 바빴는데, 정말 찾은 건가?’‘번역?’‘그래서, 열심히 돈을 벌고 있는 거야?’‘도대체 왜?’‘돈 많은 남자를 찾는 거 아니었나?’‘지금까지 있었던 일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
[시연아! 흑흑.]“무슨 일이야?” 시연은 어쩔 수 없이 실소를 터뜨렸다.“너 요즘 울음 연기 성의가 점점 부족하네.”성빈은 즉시 가짜 울음을 거두었다.[나 지금 너무 급해. 소개팅 중이야, 빨리 와서 나 좀 구해줘!]시연은 눈을 굴리며 말했다.“이번에는 진아 차례 아니야?”[진아가 지금 통화가 안 돼. 이 오빠한테는 지금 너밖에 없다! 제발 나 좀 살려줘, 기다릴게!]“여보세요?”상대편은 이미 전화를 끊은 상태였다.시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성빈의 집안에서는 뭐가 그리 급한지 아직 어린 성빈에게 1년 내내 맞선을 주선해 왔다.그러나 성빈은 전혀 원하지 않았다. 매번 시연이나 진아에게 자기 여자친구인 척 해달라고 해서 소개팅을 망치곤 했다.시연은 가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가야 했다.핸드폰이 울렸다. 성빈이 보낸 현재 위치를 알리는 메시지였다.‘나도 모르겠다, 일단 가자. 친구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바로 퇴근 시간이라 길이 막혀서 시연의 도착시간이 상당히 늦어졌다.핸드폰에서 성빈이 재촉하는 메시지가 내내 멈추지 않았다.약속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시연은 숨을 한번 깊이 들이마시고 가방에서 안약을 꺼내 두 눈에 각각 한 방울씩 떨어뜨렸다.레스토랑에 들어가서 둘러보며 성빈이 어디 있는지 확인했다.시연은 곧장 성빈에게 달려갔다. 그의 맞은편에는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청순한 외모를 가진 그녀는 어느 곳을 보든 부잣집 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숨을 깊이 들이마신 시연은 두세 걸음 앞으로 다가가 테이블 위의 물잔을 집어들고 성빈에게 확 부어버렸다.“젠장, 누구야?”머리와 얼굴이 흠뻑 젖은 성빈은 본능적으로 소리쳤다.“감히 누가 나에게 물을 끼얹어?!”“으흑흑...”시연의 연기는 서툴렀지만 다행히 적절한 타이밍에 안약의 도움으로 눈물을 흘렸다.그 여자를 가리키며 울먹이며 말했다.“진성빈! 똑똑히 설명해봐, 이 여자는 누구야?”“아이고.”성빈은 갑자기 싱글벙글 웃으며 시연을 와락 끌어안았다
시연은 성빈의 품에 안겨 그의 가슴에 기대고 흐느껴 울었다.“성빈아, 저 여자 진짜 사납잖아, 너무 무서워!”“무서워하지 마, 내가 있잖아.” 성빈은 시연과 호흡이 척척 맞았다.“남자나 꼬시는 여우 같은 X! 이 쓰레기 같은 X아!”여자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시연을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찰싹'하고 뺨을 한 대 때렸는데, 성빈의 얼굴에 대신 맞았다. 여자는 성빈의 행동에 경악하며 말했다. “이렇게까지 그 여자를 감싸주는 거예요?”성빈은 시연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어두워진 얼굴로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었다.“내 여자니까 당연히 보호해야지! 누가 감히 내 여자에게 손을 대? 당장 꺼져!”“좋아! 진성빈, 너 정말 잘났네!”여자는 울면서 레스토랑 밖으로 뛰쳐나갔다.시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울음을 멈추며 성빈을 노려보았다.“이 정도면 됐어?”시연이 얼마나 양심에 찔려 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헤헤.” 성빈은 히죽거리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말했다.“화 안 났지? 이 오빠가 맛있는 거 사 줄게.”“나한테 맨날 이런 못된 짓만 시키다니! 나 랍스터 회 먹을 거야!”“사 줄게!”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안으로 들어갔다.멀리 이 광경을 전부 지켜보던 유건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결코 화내지 않고 담담하게 웃기만 했다.‘생각해보면 지시연의 뱃속에 있는 아이의 아버지는 진성빈이겠지’.‘허.’ 유건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저 여자, 도대체 안목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저 여자 눈에 보이는 건 돈뿐이군!’‘오늘 이 상황에서는 지시연이 완전히 승리한 꼴이네. 그래서, 이제 결혼까지 성사시키려는 건가?’‘진성빈의 주변에는 여자들이 워낙 많은데… 과연 지시연에게 잘해 줄 수 있을까? 오늘 그 여자의 결말이 바로 지시연의 미래일 텐데.’“형님.”한참 동안 유건이 움직이지 않고 자리에 서 있자 지한이 조용히 일깨웠다.유건은 시연을 향한 시선을 거두고 냉담하게 말했다.“가자.”‘왜 이렇게 저 여자
소미의 등장에 유건의 상처를 보던 시연이 고개를 들었다. ‘아, 정말 아름다운 여자가 막 목욕을 마치고 나오는 모습을 다 보다니.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장소미도 젊은 여자인데, 막 샤워를 마치고 나왔고... 유건의 상처도 다시 터졌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가네.'‘이 두 사람, 어젯밤이었거나 아니면 조금 전에 뭔가 즐거운 일이 있었던 것 같아...’ “선생님은 회진을 돌고 있네요.” 소미는 가슴 위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순간, 시연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천만에요.” 시연은 침착하게 유건의 상처가 벌어진 부분을 확인한 후 다시 몇 바늘 꿰매면서 유건과 소미의 모습에 의사로서 직설적인 충고를 했다. “두 분, 환자분의 현재 상태로는 부부 생활이 적합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녀는 잠시 멈춘 뒤 덧붙였다. “여자분 쪽이 먼저 다가왔다 하더라도 적합하지 않아요.” “상처가 다시 터지면 상황이 악화할 겁니다. 복강에 농양이 생기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어요. 잠깐의 즐거움이와 생명,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요? 그러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그 말을 끝으로 장갑을 벗고 그녀는 방을 나갔다. “저, 저 선생님...” 소미는 충격에 말을 더듬으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유건은 입술을 살짝 당기며 말했다. “소미 씨, 촬영장에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늦었으니 옷 갈아입고 빨리 가요.” “네, 알았어요.” 소미는 탈의실로 들어가고, 유건은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선물로 준비한 작은 상자를 바닥에 던졌다.유건은 갑자기 온몸에 열이 나는 것처럼 화가 불타올랐다.‘지시연이 생각하기에, 내 상처는 장소미와 무언가 해서 생긴 것이라 생각한 것일까?’ ‘허, 본인이 남녀 관계에 대하여 그렇게 무분별하니, 다른 사람들도 다 본인과 똑같다고 생각하는 건가?’ ‘내가 정말 미쳤
“아...” 성빈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들어 놀라고 억울한 눈빛으로 유건을 쳐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유건의 권력과 지위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는 어쨌든 진씨 가문의 도련님이었다! “고유건, 너 미쳤어? 나랑 아무 원한도 없는데, 나를 때리는 이유가 뭐야?” 성빈도 말하면서 일어나서는 금방이라도 유건에게 덤빌 듯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민환과 기환이 재빠르게 유건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성빈 도련님, 우리를 먼저 이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두 형제는 딱 봐도 군인 출신, 게다가 특수부대 출신일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성빈은 애당초 자신이 싸움으로는 그들을 이길 수 없다는 계산이 섰다. “젠장!” 성빈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경찰 불러! 이렇게 억울한 꼴을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어!” “억울해?” 지금까지 침묵하던 유건이 차갑게 웃으며 비웃는 말투로 말했다. “네가 가지고 노는 여자보다 더 억울한 사람이 있을까?” 이 말에 성빈은 할 말을 잃었다. 성빈은 여러 여자와 교제해 왔고, 늘 세상과 가볍게 게임을 하듯이 살아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로 합의 하에 이루어진 일이었고, 그는 여자를 가지고 논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억울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내가 누구를 가지고 놀았다는 거야? 말해봐! 내가 네 여자를 가지고 놀았냐?” 그 순간 유건은 거의 이렇게 말할 뻔했다. ‘너는 내 아내를 가지고 놀았어!'‘어제 지시연은 이놈을 위해 다른 여자와 싸웠는데, 오늘 이 자식은 다른 여자를 껴안고 애정을 과시하고 있었네!!’ 하지만 지금 다행히도 유건의 이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그는 천천히 말꼬리를 물었다. “지, 시, 연!” ‘뭐?’ 성빈과 진아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했다. ‘시연? 내가 시연이를 가지고 놀았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저기...” 진아가 나서서 말했다. “이
문 밖.유건, 은범, 그리고 진주는 침묵 속에 서 있었다.가장 먼저 진주의 핸드폰이 울렸다.“엄마. 네, 이제 끝났어요. 곧 갈게요.”전화를 끊고 나서, 진주는 은범을 바라보았다.“은범아, 우리 엄마가 집에 빨리 들어오래.”하지만 은범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말 한마디 없이 굳어 있었다.그는 무조건 시연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진주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그럼 나 먼저 갈게.”“응...”은범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절대 시연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그러나 그때, 은범의 핸드폰이 울렸다.강수희였다.“어머니.”[은범아,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진주를 안 데려다준 거니? 서로 친해지는 건 좋지만, 너무 늦으면 진주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야.]은범은 진주를 한 번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강수희의 목소리는 여전히 이어졌다.[이제 늦었으니, 무조건 진주 데려다줘야 해. 알겠지?]이를 악물며, 은범은 짧게 대답했다.“알았어요.”전화를 끊고, 그는 진주를 향해 말했다.“가자, 집까지 데려다줄게.”“어?”진주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라며 회의실 문을 가리켰다.“그래도 돼?”“너랑 같이 왔잖아.”은범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연히 너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게 맞지.”시연에게는 나중에 충분히 설명하면 될 일이었다. 그녀는 이성적인 사람이니까.“가자.”“응.”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유건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눈빛 가득한 냉소를 띄웠다.‘역시 믿을 수 없는 놈이었어.’그는 긴 다리를 내디뎌 은범의 앞을 가로막았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 비꼬는 듯한 미소.“어디 가려고?”“고 대표님...”은범이 답하려 했지만, 유건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내가 있는 한, 넌 한 발짝도 못 움직여.”은범은 얼굴을 찌푸리며 침착하게 말했다.“고 대표님, 전 친구를 집에 데려다줘야 합니다.”“헛소리 좀 그만하지 그래?”유건의 분노가 폭발했다.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몇 걸음 떨어진 곳.노은범과 하진주가 나란히 서 있었다.그리고 시연과 마주쳤다.“시, 시연아.”은범은 당황해 더듬거렸다.진주는 은범을 한 번 바라보더니 옅게 미소 지었다.“친구야?”“응, 아니... 아니야. 내가 좋아한다던 그 사람이야.”은범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부정했고, 더 이상 진주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서둘러 시연에게 다가갔다.그리고 시연을 바라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뜻밖의 조우에 시연은 잠시 놀랐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교수님이 여기서 회의 중이셔. 놓고 가신 자료를 가져다주러 왔어.”그녀가 유건에게 한 말과 똑같았다.“그렇구나.”은범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시연의 가방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번엔 허공을 잡았다.시연은 재빨리 한 걸음 물러난 것이었다.은범은 순간 멍해졌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시연아?”시연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지만, 그 속엔 명확한 거리감이 담겨 있었다.“교수님이 기다리고 계셔서 먼저 가볼게. 그리고 널 방해하면 안 되잖아.”시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을 지나쳐 걸어가려 했다.은범은 당황했다.시연이 오해했다고 확신했다.“시연아...”“잠시만요.”진주가 갑자기 시연의 앞을 가로막았다.여자의 직감은 빠르다. 이 짧은 순간에도 진주는 분위기를 감지했다.시연과 눈을 마주치며 조용히 말했다.“죄송하지만, 잠깐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시겠어요?”“...”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시간 없어서요. 비켜주세요.”거절이었다.진주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강단 있게 나섰다.그녀는 시연의 팔을 잡았다.“잠깐이면 돼요! 금방 끝날 말이에요.”그녀는 은범을 흘끗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당신이 은범이가 좋아하는 사람이죠? 그런데 오해하신 것 같아요. 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그냥 친구일 뿐이거든요.”“하고 싶으신 말, 다 하신 거예요?”
유건은 결국 함정에 빠졌다. 재빨리 걸음을 멈추고 시연을 놓아주었다.“배가 어떻게 아파? 심한...”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시연은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지시연!”유건은 당황하며 몇 걸음에 따라잡아 그녀를 끌어안았다.시연은 눈을 크게 뜨고 온몸이 얼어붙었다. 뭔가 반응할 새도 없이, 유건의 넓고 따뜻한 손이 여자의 눈을 가렸다.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보지 마.”“뭐를요...?”시연은 놀라며 남자의 손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왜 이러는 건데요? 안 가려도 돼요...”‘안 가리면 어떡하라고?!’유건은 앞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노은범이 하진주에게 자기 재킷을 벗어 걸쳐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이걸 시연이가 본다면 얼마나 상처받을까?’“유건 씨!”시연이 저항하자, 유건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너, 으음...”시연이 놀라서 입을 열려는 순간, 유건이 그녀를 덮치듯 입을 맞췄다.‘뭐야?!’시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놔... 윽...”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유건은 더욱 거칠게 여자의 입술을 탐했다.남자의 키스는 점점 깊어졌고, 점점 더 강렬해졌다.시연은 필사적으로 유건의 가슴을 두드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라 손을 번쩍 들었다.찰싹!깨끗한 타격음이 울리며 유건의 뺨이 돌아갔다.유건은 순간 멍해졌다.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며 충격받은 표정으로 시연을 바라보았다.“미안해, 나는...”그는 단지 시연이 은범을 보지 못하게 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키스하고 나서 이성을 잃어버렸다.그녀를 원했고, 가까이하고 싶었으며, 심지어 그녀를 독차지하고 싶었다.시연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마치 혐오스러운 존재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너무나 속상하다는 듯 말했다.“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우리... 그래도 예전에는 부부였고, 이 사람의 포옹과 키스를 받아들일 이유라도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이제 우리는 이혼을 앞둔 상태잖아!
연회장으로 돌아온 유건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그는 소미를 한 번 바라보고 나직이 말했다.“가자, 별로 재미없어.”소미는 아무런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건의 표정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무슨 일 있어요?”“아니.”유건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너무 늦게 자면 두 사람한테 안 좋잖아.”“네.”소미는 미소를 띠었지만 속으로 불안했다.‘어떡하지? 이 사람, 아이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지금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나중에 크게 곤란해질지도 몰라.’“왜 그래?”유건은 소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눈을 가늘게 떴다.“몸이 안 좋아?”“아니에요.”소미는 웃으며 얼버무렸다.“그냥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같이 가자.”“괜찮아요...”“아니.”유건은 단호했다. 그녀가 지금 상태에서 혼자 다니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니 말이다.그는 결국 화장실 입구까지 소미를 데려다주었다.“천천히 다녀와.”“네.”소미는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이 남자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이렇게 다정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겠어?’유건은 조금 떨어진 흡연 구역으로 이동했다.담배를 꺼내 들었지만, 불을 붙이기도 전에 시연이 책가방을 메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았다.‘시연이? 여기 온 이유는 뭘까?시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뭐 찾는 거야?”“네?”시연이 놀라 돌아보았다.유건을 보자, 그녀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여기 B동 6층 맞나요?”유건은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6층은 맞는데, 여긴 B동이 아니라 C동이야.”“아.”시연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두드렸다.“아, 진짜! 또 길을 잘못 들었네요.”“또?”유건은 그녀의 찡그린 얼굴을 보며 무심코 물었다.“길을 자주 잃어버려?”시연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사실, 자주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방향 감각이 떨
[알겠습니다, 형님.]전화를 끊자, 소미가 방으로 들어왔다.“유건 씨.”유건은 담배를 비벼 끄고 손을 저었다.“먼저 들어가 있어. 여기 담배 냄새 나.”담배는 임신한 여자에게 좋지 않으니까.“아, 네.”연기가 가라앉은 후, 유건은 문을 열고 들어가 소미가 건넨 물을 받았다.“좀 괜찮아요?”소미가 다정하게 물었다.“네.”유건은 물을 마시고 소파에 기대었다.“너무 많이 마셨나 봐.” 그는 관자놀이를 가볍게 눌렀다.“머리가 좀 아프네. 그래도 잠깐 앉아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제가 마사지해 드릴까요?”소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건의 곁에 앉으며 소매를 걷었다.남자가 거부할 틈도 없이, 그녀는 말했다.“눈 감아요. 우리 아빠가 술 마셨을 때 자주 해드렸어요.”여자의 손끝이 관자놀이를 누르자, 유건은 거부하지 않았다.“고마워.”소미가 잔잔히 웃었다.“저한테 뭘 그렇게 고마워하세요? 제가 유건 씨를 도로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우린, 앞으로 평생 함께할 사이잖아요.”‘그래, 앞으로도 함께할 사람이지.’유건은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익숙해져야 했다.소미의 손길이 생각보다 편안해서 그는 점점 나른해졌다.“유건 씨?”그녀가 속삭이듯 부르자, 유건은 반쯤 감긴 눈으로 대답했다.“응...”소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가슴이 뛰었다.‘이건 기회야!’‘내 임신은 거짓말이잖아... 시간을 더 끌면 고유건은 의심할 거고, 배를 감출 수도 없을 거야.’‘그 전에 내가 확실히 해야 해. 이 사람과 더욱 가까워지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그녀는 숨을 죽이고 목에서 어깨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유건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남자의 입술과 단 한 뼘도 남지 않은 거리.하지만, 소미는 남자의 입술이 닿기 직전, 유건의 눈이 번쩍 뜨였다.여자가 너무 가까이 있는 걸 깨닫고, 순간 멈칫했다.“소미 씨?”“유건 씨.”소미는 포기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키스해 줘요.”유건은 말이 막혔고, 본능적으로 미간이 좁혀졌다
유건은 회의를 마치고 대표실로 돌아왔다.비서가 다가와 보고했다.“대표님, 장소미 씨가 도착하신 지 좀 되었습니다.”오늘 밤, 유건은 한 연회에 참석해야 했고, 이번엔 소미가 파트너였다.“유건 씨.”소미가 환하게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그냥 앉아 있어.”유건은 손을 살짝 흔들며 무심하게 말했다.“조애린 씨한테 들었는데, 일을 계속할 생각이야?”“네, 그래요.”소미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설명했다.“양 감독님의 작품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게다가, 이미 절반 정도 촬영했거든요. 광고를 비롯한 일정이 과하게 많은 것도 아니고요. 저는 가만히 있는 게 더 싫어요.”잠시 생각하던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미의 배를 힐끗 바라보았다.“몸에 이상 없으면 소미 씨 뜻대로 해. 다만, 배가...”언젠가는 드러날 것이었다.“아, 아직 문제없어요. 사극이라 의상 때문에 티도 안 나고요.”소미는 오늘 넉넉한 원피스를 입고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평평한 신발까지 신은 것을 떠올렸다.유건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양 감독님께 소미 씨 촬영 분량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달라고 이야기해.”“네, 유건 씨 말대로 할게요.”시간이 늦어서 유건은 휴게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소미와 함께 대표실을 나섰다....연회는 해성 호텔에서 열렸다.주차장에서, 노은범이 먼저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고마워.”진주가 미소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은범은 담담히 말했다.“별일 아니야.”그가 어색해하는 모습을 본 하진주는 웃으며 말했다.“너무 긴장하지 마. 우리 약속했잖아? 친구처럼 지내기로.”“알아.”은범은 살짝 찡그렸다.“하지만, 네가 나 때문에 불편해질 수도 있잖아.”“괜찮아.”진주는 고개를 저었다.“이건 너만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엄마도 연관되어 있으니까.”그녀는 남자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았다.“그냥 편하게 가자. 시간이 지나면 부모님들도 우리가 진짜 안 될 거라고 깨달으시겠지.”은범은 한결 편안해졌다.‘나보다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하진주를 힐끗 바라보았다.“내가 보기엔 진주가 참 괜찮은 것 같은데, 정말 아쉬워. 우리 은범이 복이 없는 탓이지, 뭐.”진주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이모, 그런 말씀 마세요. 과찬이세요.”“진주야.”강수희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진주의 손을 잡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지난번에 은범이랑 같이 연극 봤다면서? 그 후로는 어떻게 된 거야? 솔직히 말해 봐. 은범이의 뭐가 마음에 안들었니?”“그게...”진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할까?’지난번에 은범과 미리 조율한 대로, 진주는 연극을 본 후 자기 부모님께 자신이 은범을 향한 마음이 없다고 전했다. 이는 진주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거였고, 은범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강수희가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진주는 은범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모, 은범이는 괜찮은 사람이에요. 다만, 저희는 서로를 잘 모르잖아요...”이 말이 강수희에게 희망을 주고 말았다.“그럼, 좀 더 만나보고 알아가면 되잖아? 제발, 은범이에게 기회를 줘 봐, 응?”“어머니!”은범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다가왔다.그는 먼저 방혜령에게 인사를 건넸다.“이모, 오랜만이네요.”그리고 곧바로 어머니를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어머니, 이모는 어머니를 뵈러 오신 거잖아요.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내가 이러는 건...”“괜찮아.”방혜령이 손을 흔들며 부드럽게 웃으면서 시선을 은범에게 두었다.“이제 많이 컸네? 그런데 너희 엄마 말도 틀린 건 아닌 것 같아.”그녀는 딸을 한번 흘긋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너희, 한 번 본 걸로 판단하기엔 너무 성급하지 않아? 좀 더 만나면서 알아가는 게 맞지 않나?”강수희가 기뻐하며 맞장구쳤다.“내 말이! 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어머니!”“엄마!”은범과 진주가 동시에 소리쳤다.그 모습을 보고, 방혜령과 강수희는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과장실 문 앞에서, 시연은 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형수님.]“지한 씨.”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유건 씨와 잠깐 통화할 수 있을까요?”[당연하죠. 형님도 여기 계세요.]잠시 후, 수화기 너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나야.]유건의 무심한 어조.“심폐 프로젝트팀에 내가 들어가게 된 거, 당신이 한 일이에요?”질문은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개입했다면, 바로 이해할 터였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남자의 답이 돌아왔다.[그래.]전혀 놀랍지 않았다. 시연은 눈을 감았지만, 당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여자의 침묵에, 유건은 비웃듯 말했다.[설마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벌인 일이라는 이유만으로?]시연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멍청하긴...]유건이 낮게 욕했다.[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간다는 게 너한테 어떤 의미인지, 내가 설명해야 하냐?]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팀에 들어가면 분명 시연의 수입도 늘어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경험과 기술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돈 때문이라면 이렇게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지시연.]유건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나와 관계를 끊는 게 중요해? 아니면 네 미래가 더 중요해?]책망과 걱정이 섞인 목소리.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시연도 알고 있었다.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결정을 내렸다.“고마워요, 유건 씨.”유건은 핸드폰을 쥔 채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동시에, 안도감이 밀려왔다.‘다행이네. 이 여자, 결국 받아들였어!’하지만 시연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유건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그리고 그녀는 덧붙였다.“예전엔 내가 잘못했어요. 항상 미안하게 생각해요. 앞으로는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이 잘되길 바랄게요. 그리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유건은 한참 동안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원래라면, 저 여자, 부와 명예를 누려야 마땅해. 하지만 지금은...’...차에 돌아온 지한은 유건이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즉, 유건의 온몸에서 스며 나오는 묵직한 어둠과 슬픔을 느낀 것.‘설마, 또 형수님한테 혼난 건가? 그게 아니면, 이번엔 진짜로 맞기라도 한 건가?’“형님...”“지한아.”유건의 시선이 멍하니 허공을 가로질렀다.“방법을 좀 찾아봐. 시연이가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내가 돈을 건네면, 시연이는 절대 받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연이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지 못하는 건 아닐 거야.’ ‘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시연이가 돈과 명예를 탐하는 여자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지? 정말 한심해!’...시연은 임진아 집으로 돌아온 뒤, 저녁에 양석현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교수님.”[시연아, 내일 오전에 내 사무실로 와. 할 말이 있어.]“네, 교수님.”양석현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다음 날 아침, 시연은 교대 근무도 마치지 못한 채 서둘러 외과로 향했다.양석현은 회진을 마친 후에야 시간을 냈고, 시연을 과장실로 데려갔다.“일찍 왔구나. 앉아.”시연은 긴장한 채 자리에 앉았다.“교수님, 무슨 일이신가요?”‘혹시 내가 1학년 실험 수업을 하는 데에 문제가 생긴 걸까?’“뭘 그렇게 긴장해?”양석현은 일부러 뜸을 들이다가도, 결국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은 소식이야.”그는 서랍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내 시연에게 건넸다.“이걸 작성하면, 너는 공식적으로 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가게 될 거거든.”시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교수님, 이게... 정말 규정에 맞는 건가요?”“규정대로라면, 맞지 않지.”양석현이 웃었다.“원래는 네가 대학원에 합격하면 팀에 넣을 생각이었어. 그 자체도 예외적인 거지만 말이야.” 그런데 아직 대학원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가능하게 된 걸까?양석현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말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