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장소미를 응시하며 말없이 있었다. ‘장소미는 고유건의 여자 친구야. 조만간 만나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시연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소미 역시 마음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어젯밤, 소미도 실시간 검색어를 보았는데, 그때 곧바로 병원에 오려고 했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지한은 상황이 여의찮다며 기다리라고 할 뿐이었다. 결국 소미는 밤새워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소식을 들을 수 없었고,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아침부터 그녀 홀로 달려온 것이었다. 그러나 고유건이 아닌 지시연을 먼저 만나고 말았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던가. 소미는 크게 겁을 먹었다.그녀가 억지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병실 입구의 환자 명패를 훑어보았다.‘유건 씨의 병실이 맞잖아!’ ‘그런데 지시연이 왜 여기서 나오는 거지?’ 소미가 조금은 허무한 목소리로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 눈을 가늘게 뜬 시연은 잠이 부족해 나른해 보였다. “의사가 병원에 있는 게 뭐 어때서? 너야말로, 앓고 있는 정신병을 진찰받으러 온 거야?” “지시연, 말이면 다인 줄 알아?!” 눈살을 찌푸린 소미는 눈 밑의 혐오감을 감출 수 없었다. 소미는 어려서부터 시연의 뼛속 깊은 곳까지 배어 있는 그 도도함을 싫어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집이랑 아버지까지 모두 나한테 빼앗긴 주제에, 뭐가 저렇게 기세등등한 거야?’ 그러나 오히려 지금 마음이 불안하고 조급한 것은 바로 소미였다. “남자 친구를 보러 온 거야.”“아.”시연이 문득 뒤를 가리켰다.“고유건 대표님? 저 사람이 네 남자 친구구나.”시연이 길을 터주며 말했다.“그럼 들어가 봐.”이 말을 마친 그녀는 걸음을 내디뎠다.소미는 시연의 뒷모습을 보고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지시연이 이미 유건 씨를 만난 거 같지? 하긴, 의사와 환자가 만나는 건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지.’ ‘하지만... 두 사람
지금 유건은 상의가 반쯤 벗겨져 있는 상태로 여인을 품에 안고 있었다. 정말 아찔한 장면이었다.다만, 유건의 신분 때문에 누구도 감히 뭐라고 할 수 없었다.모두가 아무 일도 없는 듯이 행동하며 각자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시연은 특히 침착하게, 교대할 의사에게 유건의 상태를 설명했다.“칼에 찔려 부상을 당한 환자입니다. 복부 3.2센티미터 깊이로 칼이 들어갔지만, 장기 손상은 없습니다...”시연이 무슨 말을 하든 유건은 신경 쓰지 않았다.소미를 부축하면서 그는 온몸의 신경이 바짝 곤두서는 것 같았고, 심지어 약간의 죄책감까지 느끼면서 시연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비록 그가 처음부터 결혼 상대가 있다고 말했지만, 시연에게 소미를 들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기분이 뭔가 묘했다.마치 바람피우다 아내에게 딱 걸린 찌질한 남자가 된 기분이었다.“고유건 님, 푹 쉬세요.”교대가 끝나자 의료진은 하나둘씩 바뀌었다.유건은 처음 병원에 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시연이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유건 씨.”그가 꼼짝도 하지 않고 입구를 주시하는 것을 보고 소미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어디 불편해요? 다친 데가 많이 아파요? 의사 부를까요?”유건의 신경이 다시 곤두섰고, 안색이 변했다.“아니, 괜찮아요.”유건은 단지 스스로에게 놀랐을 뿐만 아니라 화가 났다. ‘왜 이렇게 양심에 찔리지?’‘허울뿐인 부부 사이인데, 누구를 만나든 외도는 아니지.’소미는 오전에 촬영 일정이 있었다. 어렵게 캐스팅된 유명한 감독 양호천의 영화라 빠질 수 없었다.주지한이 오고 나서야 소미는 아쉬워하며 떠났다.“그럼 푹 쉬어요, 시간 날 때 다시 올게요.”“그래요, 가봐요.”이와 동시에 지한을 따라온 두 젊은 남자들이 있었다. 둘은 매우 닮았고, 모두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었다.“형님.”지한이 설명했다.“이런 일이 생길까 싶어 민환과 기환을 불러들였습니다. 이들이 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시연은 치료에만 집중하고 유건을 전혀 보지 않았다.유건이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너 지금 나한테 화났어?”“예?”시연은 치료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화났느냐고요? 제가요? 고유건 씨에게? 그럴 게 있나요?”유건은 목소리가 담담하고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니면 다행이고.”“아.”시연은 여전히 유건이 질문한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고 허리를 굽혀 상처에 삽입한 튜브를 짰다.유건이 물었다.“이 튜브는 언제 빼나? 매우 불편한데.”“그렇게 금방은 안돼요.”“쉽게 말하면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다 배출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복막염으로 더 위험해질 수 있어요.”이 말을 끝으로 시연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이 여자가 왜 이렇게 조용해?’유건은 반쯤 눈을 감고 말했다.“나에게 할 말 없나?”“네?”시연이 당황해서 대답하려는 순간 유건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치료 이야기는 그만 해.”유건의 말에 지시연은 깜짝 놀라서, 긴 속눈썹을 떨며 웃기 시작했다.“한마디 하자면, 여자 친구가 아주 예쁘더라고요.”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유건은 지시연을 조롱했다.“위선적이네.”“그래요.”시연은 손을 들며 유건의 말을 인정했다.“진심은 아니었어요. 사실, 제가 더 예쁘잖아요.”유건은 눈빛이 미묘하게 변하며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이었다.“참 뻔뻔한 사람이네, 이렇게 자신을 칭찬하는 법도 있나?”이 말에 큰 의미가 있지는 않았지만 시연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제가 뻔뻔스러운 거, 벌써 알고 있었잖아요?”시연의 답답한 태도에 유건은 화낼 기분도 사라져버렸다.“그렇게 쳐다보지 마요.”시연은 고개를 숙이고 약을 갈아주면서 마스크 너머로 말했다.“우리 결혼이 계약 결혼인 거 나도 알아요. 고유건 씨가 누구와 만나는지 간섭할 권리도 없고요. 사랑하고 싶은 사람 계속 사랑하시고, 만나고 싶은 사람 계속 만나세요.”그녀는 원래 고유건과의 결혼을 간절히 원하던 장소미를 혼내주고 싶었을 뿐,
점심시간에 시연은 구내식당에서 식사 후 돌아오다가 복도에서 유건이 정기철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걷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나쁘지 않네요.”시연은 환자를 격려하듯 유건을 칭찬하며 말했다.“몸 상태가 정말 좋네요, 벌써 일어나 걸을 수 있다니. 이렇게 잘 움직이면 회복이 더 빠르겠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요.”“예, 선생님.” 정기철이 아주 진지하게 대답했다.시연이 막 가려고 하는데 유건이 불러세웠다.“잠깐만.”“무슨 일 있어요?” 지시연이 몸을 돌렸다.“너...” 유건은 뜻밖에도 좀 쑥스러워했다.“뭐 좋아해?”“네?”밑도 끝도 없는 고유건의 질문에 시연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의 큰 눈을 깜박이자 속눈썹이 살랑거렸다.“갑자기 못 알아듣는 척은.”유건이 불만스럽게 말했다.“고맙다는 말 못 들었다며? 한 회장님 일까지 다 빠뜨리지 않고 너에게 감사표시 할게.”시연은 이제야 고유건의 말을 이해했다.“감사 표시요?”그녀도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특별할 것 없어요. 나도 다른 여자들이 좋아하는 걸 좋아해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핸드폰이 울렸다.그녀는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네, 네. 이미 번역은 다 마쳤어요. 점심시간이니까 바로 보내 드릴게요. 네, 네.”전화를 끊었는데 유건이 아직 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또 무슨 일 있어요?”“뭐가 그렇게 바빠?” 유건은 대답 대신 도리어 다른 질문을 했다.시연이 대답했다.“통번역 아르바이트를 찾았는데 말할 시간 없어요. 빨리 보내야 해요.”말을 마치고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로 들어갔다.혼자 남겨진 유건은 상처를 가볍게 누르며 머릿속에 물음표를 가득 채웠다‘아르바이트?’‘BLUE에서 하던 아르바이트를 계속 방해하니까 다른 아르바이트를 찾느라 바빴는데, 정말 찾은 건가?’‘번역?’‘그래서, 열심히 돈을 벌고 있는 거야?’‘도대체 왜?’‘돈 많은 남자를 찾는 거 아니었나?’‘지금까지 있었던 일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
[시연아! 흑흑.]“무슨 일이야?” 시연은 어쩔 수 없이 실소를 터뜨렸다.“너 요즘 울음 연기 성의가 점점 부족하네.”성빈은 즉시 가짜 울음을 거두었다.[나 지금 너무 급해. 소개팅 중이야, 빨리 와서 나 좀 구해줘!]시연은 눈을 굴리며 말했다.“이번에는 진아 차례 아니야?”[진아가 지금 통화가 안 돼. 이 오빠한테는 지금 너밖에 없다! 제발 나 좀 살려줘, 기다릴게!]“여보세요?”상대편은 이미 전화를 끊은 상태였다.시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성빈의 집안에서는 뭐가 그리 급한지 아직 어린 성빈에게 1년 내내 맞선을 주선해 왔다.그러나 성빈은 전혀 원하지 않았다. 매번 시연이나 진아에게 자기 여자친구인 척 해달라고 해서 소개팅을 망치곤 했다.시연은 가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가야 했다.핸드폰이 울렸다. 성빈이 보낸 현재 위치를 알리는 메시지였다.‘나도 모르겠다, 일단 가자. 친구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바로 퇴근 시간이라 길이 막혀서 시연의 도착시간이 상당히 늦어졌다.핸드폰에서 성빈이 재촉하는 메시지가 내내 멈추지 않았다.약속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시연은 숨을 한번 깊이 들이마시고 가방에서 안약을 꺼내 두 눈에 각각 한 방울씩 떨어뜨렸다.레스토랑에 들어가서 둘러보며 성빈이 어디 있는지 확인했다.시연은 곧장 성빈에게 달려갔다. 그의 맞은편에는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청순한 외모를 가진 그녀는 어느 곳을 보든 부잣집 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숨을 깊이 들이마신 시연은 두세 걸음 앞으로 다가가 테이블 위의 물잔을 집어들고 성빈에게 확 부어버렸다.“젠장, 누구야?”머리와 얼굴이 흠뻑 젖은 성빈은 본능적으로 소리쳤다.“감히 누가 나에게 물을 끼얹어?!”“으흑흑...”시연의 연기는 서툴렀지만 다행히 적절한 타이밍에 안약의 도움으로 눈물을 흘렸다.그 여자를 가리키며 울먹이며 말했다.“진성빈! 똑똑히 설명해봐, 이 여자는 누구야?”“아이고.”성빈은 갑자기 싱글벙글 웃으며 시연을 와락 끌어안았다
시연은 성빈의 품에 안겨 그의 가슴에 기대고 흐느껴 울었다.“성빈아, 저 여자 진짜 사납잖아, 너무 무서워!”“무서워하지 마, 내가 있잖아.” 성빈은 시연과 호흡이 척척 맞았다.“남자나 꼬시는 여우 같은 X! 이 쓰레기 같은 X아!”여자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시연을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찰싹'하고 뺨을 한 대 때렸는데, 성빈의 얼굴에 대신 맞았다. 여자는 성빈의 행동에 경악하며 말했다. “이렇게까지 그 여자를 감싸주는 거예요?”성빈은 시연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어두워진 얼굴로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었다.“내 여자니까 당연히 보호해야지! 누가 감히 내 여자에게 손을 대? 당장 꺼져!”“좋아! 진성빈, 너 정말 잘났네!”여자는 울면서 레스토랑 밖으로 뛰쳐나갔다.시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울음을 멈추며 성빈을 노려보았다.“이 정도면 됐어?”시연이 얼마나 양심에 찔려 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헤헤.” 성빈은 히죽거리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말했다.“화 안 났지? 이 오빠가 맛있는 거 사 줄게.”“나한테 맨날 이런 못된 짓만 시키다니! 나 랍스터 회 먹을 거야!”“사 줄게!”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안으로 들어갔다.멀리 이 광경을 전부 지켜보던 유건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결코 화내지 않고 담담하게 웃기만 했다.‘생각해보면 지시연의 뱃속에 있는 아이의 아버지는 진성빈이겠지’.‘허.’ 유건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저 여자, 도대체 안목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저 여자 눈에 보이는 건 돈뿐이군!’‘오늘 이 상황에서는 지시연이 완전히 승리한 꼴이네. 그래서, 이제 결혼까지 성사시키려는 건가?’‘진성빈의 주변에는 여자들이 워낙 많은데… 과연 지시연에게 잘해 줄 수 있을까? 오늘 그 여자의 결말이 바로 지시연의 미래일 텐데.’“형님.”한참 동안 유건이 움직이지 않고 자리에 서 있자 지한이 조용히 일깨웠다.유건은 시연을 향한 시선을 거두고 냉담하게 말했다.“가자.”‘왜 이렇게 저 여자
소미의 등장에 유건의 상처를 보던 시연이 고개를 들었다. ‘아, 정말 아름다운 여자가 막 목욕을 마치고 나오는 모습을 다 보다니.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장소미도 젊은 여자인데, 막 샤워를 마치고 나왔고... 유건의 상처도 다시 터졌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가네.'‘이 두 사람, 어젯밤이었거나 아니면 조금 전에 뭔가 즐거운 일이 있었던 것 같아...’ “선생님은 회진을 돌고 있네요.” 소미는 가슴 위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순간, 시연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천만에요.” 시연은 침착하게 유건의 상처가 벌어진 부분을 확인한 후 다시 몇 바늘 꿰매면서 유건과 소미의 모습에 의사로서 직설적인 충고를 했다. “두 분, 환자분의 현재 상태로는 부부 생활이 적합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녀는 잠시 멈춘 뒤 덧붙였다. “여자분 쪽이 먼저 다가왔다 하더라도 적합하지 않아요.” “상처가 다시 터지면 상황이 악화할 겁니다. 복강에 농양이 생기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어요. 잠깐의 즐거움이와 생명,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요? 그러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그 말을 끝으로 장갑을 벗고 그녀는 방을 나갔다. “저, 저 선생님...” 소미는 충격에 말을 더듬으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유건은 입술을 살짝 당기며 말했다. “소미 씨, 촬영장에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늦었으니 옷 갈아입고 빨리 가요.” “네, 알았어요.” 소미는 탈의실로 들어가고, 유건은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선물로 준비한 작은 상자를 바닥에 던졌다.유건은 갑자기 온몸에 열이 나는 것처럼 화가 불타올랐다.‘지시연이 생각하기에, 내 상처는 장소미와 무언가 해서 생긴 것이라 생각한 것일까?’ ‘허, 본인이 남녀 관계에 대하여 그렇게 무분별하니, 다른 사람들도 다 본인과 똑같다고 생각하는 건가?’ ‘내가 정말 미쳤
“아...” 성빈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들어 놀라고 억울한 눈빛으로 유건을 쳐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유건의 권력과 지위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는 어쨌든 진씨 가문의 도련님이었다! “고유건, 너 미쳤어? 나랑 아무 원한도 없는데, 나를 때리는 이유가 뭐야?” 성빈도 말하면서 일어나서는 금방이라도 유건에게 덤빌 듯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민환과 기환이 재빠르게 유건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성빈 도련님, 우리를 먼저 이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두 형제는 딱 봐도 군인 출신, 게다가 특수부대 출신일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성빈은 애당초 자신이 싸움으로는 그들을 이길 수 없다는 계산이 섰다. “젠장!” 성빈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경찰 불러! 이렇게 억울한 꼴을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어!” “억울해?” 지금까지 침묵하던 유건이 차갑게 웃으며 비웃는 말투로 말했다. “네가 가지고 노는 여자보다 더 억울한 사람이 있을까?” 이 말에 성빈은 할 말을 잃었다. 성빈은 여러 여자와 교제해 왔고, 늘 세상과 가볍게 게임을 하듯이 살아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로 합의 하에 이루어진 일이었고, 그는 여자를 가지고 논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억울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내가 누구를 가지고 놀았다는 거야? 말해봐! 내가 네 여자를 가지고 놀았냐?” 그 순간 유건은 거의 이렇게 말할 뻔했다. ‘너는 내 아내를 가지고 놀았어!'‘어제 지시연은 이놈을 위해 다른 여자와 싸웠는데, 오늘 이 자식은 다른 여자를 껴안고 애정을 과시하고 있었네!!’ 하지만 지금 다행히도 유건의 이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그는 천천히 말꼬리를 물었다. “지, 시, 연!” ‘뭐?’ 성빈과 진아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했다. ‘시연? 내가 시연이를 가지고 놀았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저기...” 진아가 나서서 말했다. “이
“그럼 다행이네요.”시연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며칠 동안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 가라앉았다.‘다행이야... 아무 일도 아니어서.’“그나저나...”오선화는 진료차트를 정리하며, 마치 일상 대화하듯 조용히 말을 꺼냈다.“이제 6개월 차에 들어섰어. 곧 임신 후반기인데, 슬슬 휴식은 생각 안 해?”“휴식이요?”시연은 잠깐 멍해졌다. 그 생각은 진심으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오선화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제부터는 배도 더 많이 나올 거고, 몸도 훨씬 무거워질 거야. 부기도 생기고, 움직이기도 불편해지고. 집에서 편하게 쉬는 것도 괜찮지 않나?”시연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아직 일할 수 있어요.”오선화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뭔가 걸리는 게 있어? 고 대표님이 계시니까, 병원에서도 대놓고 뭐라고 하진 않잖아.”“네... 알고 있어요.”시연은 순간 망설였지만, 이내 담담하게 말했다.‘나는 그렇게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 아니야.’ “저보다 선배인 선생님들도 다들 만삭까지 일하세요. 7개월까지 야간 당직도 서시고요. 저야 그에 비하면 충분히 배려받고 있는 거죠.”‘그 배려가... 전부 고유건 덕분이라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어.’“게다가 가만히 있는 것보다 이렇게 일하는 게 마음도 편하고, 출산도 더 수월하다고 하잖아요?”“그건 맞아.” 오선화는 고개를 끄덕였고, 더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나는 그냥 권유만 한 거야.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말고, 컨디션 안 좋을 땐 꼭 쉬어야 해, 알지?”“네. 그럴게요.”시연은 산모 수첩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교수님, 수고하세요.”“그래, 잘 가.”시연이 문을 나서자 방 안의 공기가 살짝 무거워졌다.오선화는 웃음을 거두고 곧바로 표정을 바꿨다. 그러고는 이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통화 목록을 스르륵 넘긴 오 교수의 손이, 한 이름에서 멈췄다.바로 ‘고유건’이었다. 오선화는 깊게 한숨을 쉬고, 전화를 걸 준비했다.
그날 오후, 은범은 곧장 회사로 향했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부사장 이지혁과 비서가 며칠 사이 벌어진 상황을 보고했다.“GP그룹이 우리와의 협약을 전면 종료했어요.”“GP그룹?”은범의 표정이 굳어졌다. ‘GP그룹... 고유건... 왜 갑자기...?’이번 협약은 처음부터 은범이 직접 유건과 만나 성사한 것이었다. 물론, 사적인 일로 둘 사이에 약간의 감정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시연을 둘러싼 복잡한 사정.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감정일 뿐.‘우린 둘 다 공사 구분은 확실한 사람들이었잖아...’은범은 이해할 수 없었다.“협약은 계속 수익이 나고 있었잖아요. GP 측에서 계약 종료 사유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정확히 말하지 않았어요.”이지혁은 고개를 저었다.“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입장은 아주 확고했어요. 위약금은 예정대로 지급하겠다고 했고요. 환불 어음은 이미 발송했다고 합니다.”‘그렇게 빨리?’은범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어떤 설득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모든 절차가 ‘깔끔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더 불안했다.“그래서 일단 수령하진 않았습니다. 돌아오시면 같이 상의하려고 했거든요.” “잘하셨어요.”‘보상보다 중요한 건, 이 협력이 가진 미래 가능성이었는데...’은범은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내가 고 대표님한테 직접 연락해 볼게요. 무슨 이유인지 물어봐야 하니까요.”“네, 애초에 사장님께서 직접 성사한 건이니까... 사장님께서 움직이는 게 맞죠.”은범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GP그룹으로 향했다.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GP그룹 본사 건물에 도착한 은범은 곧장 로비 데스크로 다가갔다.“안녕하세요, 고 대표님 뵈러 왔습니다. 전해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로비 데스크 직원은 정중하게 미소 지었다.“안녕하세요, 혹시 예약은 하셨을까요?”“아니요.”“죄송하지만, 고 대표님과의 면담은 반드시 사전 예약이 필요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그건 알지...’은범은 고개를
“고 대표님!”하은이 성큼성큼 걸어 나와 유건 앞을 가로막았다. 눈빛엔 분노가 가득했다.“이렇게 그냥 가시면 안 되죠!”“뭐라고?”유건은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이어서 시선엔 의아함과 경멸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시연이 말이에요.” 하은은 안쪽을 가리켰다.“시연이는 고 대표님의 아내잖아요. 근데, 아내 앞에서 애인이랑 나가는 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애인’이라는 단어가 뱉어지는 순간, 유건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리고 눈가의 웃음기마저 순식간에 사라졌다.“지금... 누가 감히 소미 씨한테 그런 말을 해?”그 말에 하은은 본능적으로 움찔했지만, 곧 더 큰 화가 치밀었다.“제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요? 그리고, 장소미 씨는 또 뭐예요? 고 대표님한테 아내가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행동하는 거, 무슨 의미인데요? 그리고 고 대표님이 장소미 씨를 감싸면, 시연이는 뭐가 되는 건데요?!” ‘시연이를 뭐로 보는 건지, 내가 대신 물어야겠어!’하지만 유건은 피식 웃었다. 차가운 비웃음이었다.‘그럼 지시연은 나를 뭐로 봤을까?’그러나 이런 생각을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비켜.”“싫어요!”그 말에 유건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목소리엔 더 이상 감정이 없었다.“솔직히, 너한텐 손쓸 가치도 못 느끼겠지만... 이쯤 되면 진짜 귀찮네.”“뭐라고요?”하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멍해졌다. ‘지금... 나한테 이런 말을...?’“비킬 거야, 안 비킬 거야?”“하은아!”그때, 시연이 급히 달려왔고, 하은의 팔을 잡아끌며 중간에 섰다.“이런 사람들이랑 뭐 하러 싸워? 가고 싶다잖아. 그냥 보내줘. 누가 어딜 가든, 그건 자유잖아.”그러면서 하은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가서 라면이나 먹자. 아까 건 너무 불었으니까, 새로 하나 뜯어야겠어.”시연의 말투는 덤덤했고, 시선은 여전히 유건을 보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유건은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유건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깊고 어두운 눈빛으로 시연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던졌다.“간 이식 얘기, 우주한테 물어본 적 있어?”“뭐라고요?”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그걸... 저 사람이... 지금 왜 묻지?’찰나의 정적. 그리고 곧, 시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나는 우주의 보호자예요. 우주에 대한 결정은, 내가 해요.”하지만 유건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내가 알기론, 우주는 올해로 만 14세야. 이미 법적으로 자기 결정권이 생긴 셈이지.”남자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만큼 분명했다.“게다가 우주는 신체 조건도 아주 좋잖아. 심리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기증 가능 기준에 부합해.”유건의 말은 아주 논리적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논리는, 결국 ‘장소미’를 위한 것이었다.‘하... 정말 대단하다, 고유건.’시연은 속으로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무심한 듯 시선을 옆으로 돌려 장소미를 스치듯 바라봤다.‘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뭐든 말이 되는구나.’“우주의 열네 살이, 일반 아이들의 열네 살과 같다고 생각해요?”시연은 미세한 미소를 짓는 듯 마는 듯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우주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서 내가 결정하는 거라고요.”그 말에 유건의 눈빛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그는 톤을 낮추면서도 힘을 실어 말했다.“지나치게 독단적이네.”“우주는 똑똑한 아이야. 심리적으로 결핍이 있는 거지, 지능이 낮은 건 아니잖아. 만약 언젠가 지 사장이 세상을 떠나고, 우주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자책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해?”그 말에 시연은 순간 얼어붙었다. 입꼬리에 걸려 있던 억지 미소조차 사라졌다.“자책이요...?”시연은 낮게 웃었다. 그리고 냉소가 섞인 차가운 어린 목소리로 유건을 향해 말했다.“잘 들어요. 우린 인생에서 많은 걸 후회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미안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의 그 ‘누군가’ 안에 지동성은 절대 포함되지 않아요.”그 말에 유건의 이
하은은 눈치가 빨라서 괜히 시연에게 짐이 될까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시연은 역시 장미리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우리 엄마요? 죽은 지 십몇 년 됐는데, 오늘 좀비처럼 부활이라도 한 거예요?”하은은 그제야 시연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했다. “아! 그럼 내가 지금 바로 무당 선생님한테 연락할게!”“얼른 해줘.”두 사람은 말 그대로 티키타카였다. 장미리의 얼굴은 금세 시뻘겋게 달아올랐다.“지시연! 넌 진짜 싹수가 없어!”“맞아요.”시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엄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빠라는 사람도 죽은 거나 다름없죠.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으니, 예의 따윈 배운 적 없어요.”그녀는 팔을 쭉 뻗어 문을 가리켰다.“무슨 용건인지는 상관없고, 지금 당장 나가세요. 그리고 다시는 나한테 ‘엄마’라는 말 좀 들먹이지 마세요. 혹시라도 다음에 또 그런 말을 뱉는다면... 당신 입, 내가 부숴놓을 수도 있어요.”시연의 눈빛이 단단하게 가라앉았다.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서릿발 같았다.“진심이에요. 장난 아니니까, 절대 시도하지 마세요.”“너... 너 진짜...!”장미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시연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말솜씨에서도, 기세에서도 밀렸으니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물러설 수 없었다.“네 아빠... 쓰러졌어. 지금 혼수상태야.”그 말에 시연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그 정도라고...?’눈빛 속에 망설임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러나 곧 다시 차분한 얼굴로 돌아왔고,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그럼 그분 옆에서 간병이라도 해주셔야죠. 여긴 왜 와서 소란인데요?”“너...”“지시연!”자기 엄마가 밀리는 걸 보다 못한 소미가 나섰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진짜 모르는 척하는 거야? 우리가 왜 너를 찾아왔는지, 정말 몰라서 그래?”“나야 모르지.”시연은 흰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그럼 알려줘 봐. 여기엔 왜 온 건지.”소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흐흑... 흐윽...]전화기 너머로 장미리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네 아빠 비서한테 전화 왔어... 회사에서 멀쩡히 있다가 갑자기 쓰러졌대! 지금 병원으로 이송됐고, 나도 지금 가는 중이야! 소미야, 네가 더 가까우니까 먼저 좀 가봐!]“알겠어요, 엄마!”소미는 전화를 끊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눈가엔 금세 눈물이 맺혔고, 목소리는 떨리기 시작했다.“유건 씨... 우리 아빠가 또 쓰러지셨어요...”사정을 들은 유건은 곧장 몸을 일으켜, 여자의 팔을 부드럽게 받쳐주었다.“괜찮아, 지금 당장 같이 가자. 내가 함께할게.”“네... 유건 씨가 옆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저 혼자였으면 무너졌을지도 몰라요.”...장미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지동성은 응급실을 거쳐 병실로 옮겨진 상태였다. 이번엔 지난번보다도 훨씬 상태가 심각했다.지동성은 입원했지만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담당 교수도 장담할 수 없었다.“지금은 경과를 보셔야 합니다. 언제 의식이 돌아올지는... 확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흑...”병상 옆 의자에 앉은 장미리는 눈물을 뚝뚝 흘렸고,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이걸 어쩌면 좋아... 네 아빠, 갈수록 심해지는데... 간이식도 아직 못 받았는데...”갑자기 장미리는 고개를 번쩍 들어 유건을 바라봤다.“고 대표님, 간 이식 소식은 아직도 없는 건가요?”이전에 유건은 간 이식 대기자를 대신 알아봐 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유건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직은 연락이 없습니다.”그는 도와주기로 했고, 실제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이런 일은 결국 ‘운’과 ‘순번’이 따라야 하는 법이었다. 돈이 많다고 먼저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흐흑... 흐으...”장미리는 더욱 흐느껴 울며, 소미의 손을 꼭 붙잡았다.“소미야... 네 아빠, 의식도 없고... 이대로면... 정말 오래 못 버틸 수도 있어...”“그럴 리 없어요, 엄마. 아직 방법이 있을 거예요.”소미는
여자애는 두 손을 들고 조심스레 다가왔다.“진짜 살짝만, 살짝만 만져볼게요.”말처럼, 여자애의 손끝은 아주 조심스러웠다.“와... 아기가 있는 배는 이런 느낌이구나! 선생님, 진짜 대단해요. 엄마 되는 거, 완전 힘든 일인데...”시연은 조용히 웃으며 물었다.“근데,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예요? 누굴 찾는 건가요?”“저요?”여자애는 손을 거두며 입술을 내밀었다. 그리고 어깨에 멘 가방을 툭 내려놓았다.“혹시 변이준 있어요? 저 보고 오라 그랬거든요.”‘이준 선배님?’“수술 들어가셨어요.”“헉, 진짜요?”여자애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아싸, 잘됐다!”그 말과 동시에, 다시 가방을 어깨에 멨다.“선생님, 나중에 변이준이 오면 전해주세요. 저 왔다 갔다고, 없어서 먼저 간다고요!”시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여자애는 벌써 휙 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도망치듯 사라지는 뒷모습이었다.“어... 네...”시연은 허탈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여기가 무슨 호랑이굴이라도 되는 건가? 저렇게까지... 도망갈 일인가?” 그래도, 궁금했다. ‘저 친구... 선배님이랑 어떤 사이지?’‘여동생일까? 닮은 구석은 없었는데...’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둘 다... 눈에 띄게 수려했다는 정도?’오후 2시쯤, 변이준이 수술을 마치고 내려왔다.머리는 아직 축축했지만, 얼굴은 늘 그렇듯 환했다.시연은 손을 들어 그를 불렀다.“선배님, 의뢰하신 처방은 이미 내려놨어요. 환자도 약을 복용 중이고요.”“역시, 고마워!”이준은 환하게 웃으며,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훑었다. 그때, 시연은 문득 오전 일을 떠올렸다.“아, 맞다. 오늘 오전에 어떤 여자분이 선배님을 찾아왔었어요. 근데 안 계셔서 그냥 간다고 하시던데요?”“그냥... 갔다고?”그 말을 들은 이준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하... 그 녀석, 말을 좀 듣고 살면 어디 덧나나...”이준은 수건을 손에 쥔 채, 더 이상 머리를
단 한 마디. 그 말에 시연은 마치 얼음물에 던져진 듯 몸이 굳었다. ‘맞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따갑지?’그리고 뺨이 화끈거릴 정도로 따가운 말이 그녀를 후려쳤다.“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유건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 냉소가 담긴 웃음이었다.“내가 왜 양석현 교수 프로젝트에 투자했을 것 같아?” “내가 마음이 약해서? 돈이 남아돌아서? 밤에 잠이 안 와서?”순간, 남자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유건의 눈빛은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아니, 다 아니야. 널 위해서였어. 널 아끼니까, 널 좋아하니까, 돈을 쓰는 것도 아깝지 않았던 거야.”그 말을 끝내고, 유건은 웃었다. 이번엔 대놓고, 조롱이 담긴 웃음이었다.“근데 이런 상황에서 내가 왜 또 돈을 써야 하지? 지금의 네가, 그럴 가치가 있나? 차라리 그 돈으로 비둘기 밥이나 주는 게 더 낫겠는데?” 시연은 벙찐 얼굴로 그를 바라봤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유건은 한 손을 들어 휘휘 저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이제 가고, 다시는 날 찾아오지 마. 너랑 엮이는 거, 진심으로 지긋지긋해. 너랑 관련된 모든 일은 다 끝났어.”그는 돌아섰다. 단호하고 차가운 걸음이었다.“유...” 시연은 반사적으로 불러보려 했지만, 목에 걸린 그의 이름은 한 글자조차 나오지 않았다. ‘왜 아무 말도 못 해...’온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심장도, 생각도, 감정도 전부 마비된 채로.그 순간, 유건이 다시 멈춰 섰다. 하지만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그저 등을 보인 채로 담담하게 말했다.“그래도 일부러 찾아왔고, 부부였던 정은 있으니까... 지원금은 지한이 통해서 처리하도록 할게. 하지만 이번뿐이야. 다음은 없어.”그는 그 말을 끝으로 차로 향했고, 조용히 문을 열고 올라탔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그대로 떠나버렸다.그리고 시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가을 오후의 바람이 여자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지한이 보기엔, 시연은 이미 오래전에 돌아간 듯했다. 너무 오래 기다렸으니, 그럴 법도 했다.하지만 바로 그때, 화장실에서 막 나온 시연은 멀리서 유건과 지한이 정문을 지나 계단 아래로 향하는 모습을 보았다. ‘저기 있다...!’더는 생각할 틈이 없어서 시연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유건 씨!”문 앞에서 유건의 몸이 순간 멈칫했다. 놀란 듯 고개를 돌리자, 시연이 급히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여자의 걸음은 빨랐고, 숨이 찰 정도로 다급했다. 유건의 미간이 스르륵 좁혀졌다.‘저 여자... 아직도 안 갔던 거야?’“유건 씨! 잠깐만요!”시연은 허리를 짚으며, 거의 뛰다시피 정문 쪽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며 유건은 다시 한번 얼굴을 찌푸렸다.‘배가 저렇게 불렀는데도... 뛰고 있어?’ 하지만 곧 속으로 비웃듯 생각했다.‘뛰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유건 씨...” 시연은 겨우 도착해, 숨을 헐떡이며 그를 올려다봤다.“잠깐이면 돼요. 몇 분이면 되는데... 시간 좀 줄 수 있어요?”맑은 눈망울이 간절히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유건은 잠시 목이 메는 듯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비웃듯 느릿하게 말했다.“신기하네. 네가 먼저 날 찾을 줄은 몰랐거든.”“그게 아니라, 나...”그러나 시연의 말은 끝맺지 못했다. 유건은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근데 난, 너한테 줄 시간이 없어. 단 1분도.”차가운 눈매, 건조한 말투. 남자의 입꼬리는 비쭉 올라갔지만, 표정엔 온기가 없었다.그러고는 단호히 돌아섰다. 그 차가운 뒷모습은 조금의 여지도 없이 닫혀 있었다. 시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췄다. ‘그래... 이런 사람이었지. 이런 식으로, 날 밀어내던 사람...’유건의 본모습을, 그녀는 잠시 잊고 있었다. 시연의 몸속으로 한기 같은 게 퍼지며, 두 발이 바닥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그저 멍하니 유건이 차에 올라 문을 닫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