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3화

작가: 임공
“고 대표님.”

진광수가 갑자기 행동을 멈추었는데, 상업계에 관련된 사람이라면 고유건을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유건은 진광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눈물을 줄줄 흘리는 장소미를 응시하였다.

‘저 여자가 바로 어젯밤에 내 품에서 간드러지게 신음하던 여자라는 거지...?’

그가 갑자기 손을 들어 거센 힘으로 진광수를 바닥에 뒤집어엎었다.

“으악!”

진광수가 갑자기 피가 잔뜩 문득 이빨 하나를 뱉어냈다.

이 광경을 본 지동성의 일가족은 겁에 질려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유건은 얇은 입술로 조롱의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그의 말투는 얇고 예리한 칼날 같았다.

“감히 내 여자를 건드려?!”

진광수는 처절한 모습으로 땅에 엎드려 입을 가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고 대표님, 정말이지 장소미 씨가 고 대표님의 여자인 줄은 몰랐습니다. 물론 건드린 적도 없지만요. 정말입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그의 말을 들은 유건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미를 바라보았다.

“확실해요?”

소미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확실해요...”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고 대표님, 정말 감사합니다!”

진광수가 헐레벌떡 저택을 뛰어나갔다.

지동성 일가가 분분히 서로를 마주 보던 찰나, 유건이 허리를 숙여 소미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부드러운 손끝으로 소미의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아주었다.

“왜 울어요? 겁낼 거 하나도 없어요.”

“내가 있으니까 아무도 소미 씨를 건드릴 수 없을 거예요.”

약간은 허스키하고 저음인 목소리를 들은 소미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저를 아세요?”

“어젯밤에...”

이 말을 뱉는 유건의 말투는 아주 부드러웠다.

“로얄호텔 7203호실, 소미 씨와 나, 이제 알겠어요?”

‘어젯밤?’

‘로얄호텔?’

‘나와 이 남자?’

지동성 일가는 말이 막힐 정도로 놀랐다.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럼 지시연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던 거야? 어젯밤에 호텔에 간 건 맞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실수로 눈앞에 있는 저 남자의 침대에 올랐던 거냐고!’

‘게다가 저 남자는 시연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해서 어젯밤의 여자가 소미라고 착각하는 것 같은데?!’

소미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물었다.

“실례지만... 성함이?”

유건이 드디어 얇은 입술을 열었다.

“고유건입니다.”

‘고! 유! 건?’

G시에서 그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GP 그룹의 대표이자 G시 최고의 권력자인 고유건, 그는 사람됨이 겸손하여 결코 언론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젊고 준수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라니...

소미의 얼굴은 더욱 빨개졌고, 심장 박동도 덩달아 급격히 빨라졌다.

‘지금이 기회야!’

‘고유건이 잘못 알고 있는 이상, 어젯밤에 이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 사람은 나인 거라고!’

소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에는 제가 방을 잘못 찾아서 그만... 오늘 여기 오신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유건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젯밤의 기억을 되찾으려 했으나, 야속하게도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중요하지 않은 일은 개의치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소미 씨는 이미 내 사람입니다. 마침 아내가 필요하던 참인데, 저랑 결혼하시죠.”

‘결혼?’

세 사람은 이 엄청난 기쁨에 정신이 멍해져서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대답을 듣지 못한 유건이 눈썹을 찌푸렸다.

“왜 대답이 없어요? 싫은 겁니까?”

“그럴 리가요!”

소미가 정신을 차리고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결혼... 할게요.”

유건은 그제야 만족했다.

“그럼 결혼에 관한 건 다 내가 준비할게요. 소미 씨는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 없고, 그냥 차분히 내 아내가 되는 걸 기다리기만 하면 돼요.”

“네, 모두 유건 씨의 의견에 따를게요.”

소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좋은 마음을 내비쳤다.

소미뿐만 아니라 지동성과 장미리도 큰 기쁨에 빠졌다.

‘우리 소미가 고 대표님에게 시집만 가면, 우리가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리는 건 시간문제일 거야!’

...

고씨 저택.

고상훈이 비취 팔찌를 다시 상자에 넣어 시연에게 건넸다.

“받아 둬라, 원래 너한테 주려던 거였으니까.”

“네, 어르신.”

“아직도 나를 어르신이라고 부를 게냐?”

고상훈이 탄식하며 말했다.

“그 당시에 네 어머니가 나를 구했기 때문에, 나는 그 대가로 이 팔찌를 주면서 너와 유건이의 혼약을 정했던 거란다. 헌데, 연락이 끊겼던 몇 년 동안 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구나.”

“그래도 네가 나를 찾아와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벌써 시집갈 나이가 다 되었는데, 그냥 나를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건 어떻겠니?”

“...”

시연은 아무리 노력해도 고상훈을 ‘할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다.

시연의 어머니인 부명주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 혼약에 대해 말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부명주 역시 시연에게 이 혼약을 진실로 여길 수 없으며, 그저 고상훈이 은혜에 보답하려고 한 말을 냉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시연이 오늘 고상훈을 찾아온 것은 혼약을 위해서가 아니었으며, 동생 우주의 치료비를 빌리기 위한 것이었다.

‘엄마가 어르신의 목숨을 구해줬으니, 분명 돈을 빌려주실 거야. 게다가 나는 그 돈을 꼭 갚을 생각이고...’

‘막다른 길에 다다르지만 않았더라면, 이 집에 와서 돈을 빌릴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을 거야.’

시연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어르신, 제가 오늘 여기 온 이유는...”

그 순간,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상훈이 말했다.

“유건이가 온 모양이구나!”

그렇다. 발걸음 소리의 주인공은 고유건이었다.

유건은 고상훈에게 돌아오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지동성의 저택에서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빨리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는 이 경사를 고상훈에게 전하여 그를 기쁘게 해 줄 생각이었다.

유건은 긴 다리를 내디디며 안으로 들어왔는데, 따뜻한 조명이 그의 아름다운 얼굴과 풍채를 비추자, 그는 더욱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저랑 식사도 하시고 바둑도...”

그가 하려던 말을 갑자기 멈추고 시연을 바라보았다.

가늘고 늘씬한 여인은 희고 윤기 흐르는 피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는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다.

고상훈이 반갑다는 듯 손자를 끌고 왔다.

“유건아, 이 아이가 바로 네 약혼녀인 지시연이란다. 잘 준비해서 시연이와 결혼하도록 하거라.”

“안녕하세요.”

시연이 급히 일어나 유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눈살을 찌푸린 유건은 조금 전까지의 행복한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는 듯했다.

‘이 여자가 여태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던...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되었다던 내 약혼녀라고?’

‘이틀만 일찍 나타났어도 할아버지를 위해서 소미 씨와의 결혼을 결심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하지만 이제 내 곁에는 소미 씨가 있어. 게다가 소미 씨는 나와 보낸 그날 밤이 처음이라서… 내가 소미 씨의 첫 남자인 셈이지. 난 소미 씨를 책임지고 싶고, 이미 그렇게 하겠다고 소미 씨와 약속하기도 했어.’

‘나는 절대 소미 씨를 버리지 않을 거야. 절대 다른 여자는 받아들일 수 없어.’

유건이 시연을 힐끗 보고는 거절했다.

“할아버지, 저는 지시연 씨와 결혼할 수 없어요.”

“뭐야?”

고상훈이 경악했다.

“할아버지, 저는 이미 결혼할 여자가 있거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고상훈이 그를 밀쳐냈다.

‘평생 효도하던 유건이가 내 말을 거스르는 날이 올 줄이야!’

“헛소리는 집어치우거라!”

유건이 무거운 말투로 말했다.

“죄송하지만… 거짓말이 아니에요. 저는 절대 지시연 씨와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그의 시선이 시연에게 떨어지자, 시연은 뼛속까지 전해지는 서늘함을 느꼈다.

“어린 시절에 약속한 결혼을 여태 진심으로 여긴 건 아니죠?”

“그 입 닥치지 못해?! 네가 아주 미쳤구나!”

고상훈은 가슴을 가린 채 숨을 크게 쉬었다.

“내가 여태 너를 그렇게 가르쳤니?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은혜에 보답하고, 뱉은 말은 지켜야하는 법이거늘!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한 줄 알아? 네가 감히 이 할아비를 곤경에 빠뜨리다니! 아...”

갑자기 눈을 감은 고상훈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할아버지!”

“어르신!”

고상훈은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어 응급처치를 받았고 병실로 옮겨졌다.

고상훈의 상태를 확인한 유건은 로비에 있던 시연을 찾아갔다.

시연은 두 손을 모은 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어르신은 괜찮으세요?”

“네.”

유건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다행이네요.”

유건가 자신을 귀찮게 여긴다는 것을 알아챈 시연이 입을 열었다.

“어르신께는 제가 혼약을 위해서 온 게 아니었다고 전해주세요.”

시연도 고상훈이 혼약을 고집하며 화가 나서 쓰러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자신이 돈을 빌릴 면목을 잃게 된 셈이었다.

“어르신께서 괜찮으시다니 저는 이만...”

하지만 시연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유건이 입을 열었다.

그의 음침한 눈빛은 한기가 되어 시연의 뼛속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어쩜 그렇게 마음대로 행동하는 겁니까? 지시연 씨가 저지른 사고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하지 않겠어요?”

‘이 여자만 아니었어도, 할아버지께서 쓰러지시는 일은 없었을 거야.’

‘할아버지는 한평생 신뢰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던 분이셔. 그런 할아버지의 목숨을 걸고 도박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유건의 눈동자에는 차가운 조롱의 빛이 깔려 있었다.

“저를 할아버지를 쓰러뜨린 불효자식으로 만들고 싶은 겁니까? 그런 게 아니라면 결혼은 꼭 해야 할 것 같군요.”

시연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결혼?’

그녀는 거절하고 싶었으나, 그의 말에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랐다.

‘어르신께서 쓰러지신 데에는 분명히 내 책임도 있어. 내가 어르신을 찾아가지만 않았더라면...’

유건이 시연을 흘겨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저랑 거래 하나 하시죠, 형식적으로 결혼해서 부부가 되었다는 것만 할아버지께 보여드리는 거예요. 실질적인 부부관계는 없고, 서로 간섭도 하지 않는 거죠.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건강을 회복하는 대로 이혼하는 거예요, 어때요?”

‘아, 계약 결혼을 하자는 거구나.’
이 책을.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최신 챕터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572화

    “뭘 봐? 아직도 안 가?”채숙희는 이미 인내심이 바닥났다.“지금 안 가면 경비 아저씨 부를 거야!”“갈게요, 가요.”지하는 가슴이 얼어붙은 듯했다.“지금... 바로 가요.”채숙희의 날 선 시선 속에서 지하는 어쩔 수 없이 돌아서서 천천히 걸어갔다.길모퉁이에 다다랐을 때.쾅!분명 그가 들었으면 하는 마음에 일부러 세게 닫은 문소리가 들렸다. 지하는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어떡하지...?’진아에게 다가갈 수도 없고...잠깐 얼굴을 보는 것조차...좋아하는 과일 하나 건네는 것조차...이젠 사치가 되어버렸다....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지하는 어머니 이혜영에게 불려 갔다.채숙희가 이미 이혜영에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부지하.”이혜영은 복잡한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잘못이 전부 아들에게 있다는 걸 그녀도 잘 알았다.그런데 오늘 또 지하가 진아 집안을 찾아갔다고 하니, 채숙희에게 몇 번이고 사과를 전해야 했다. 아들을 기다리는 동안, 이혜영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대체 머리에 뭐가 들었길래 거길 또 가?’하지만 축 처진 모습으로 들어온 지하를 보고 있자니, 또 마음이 짠해졌다.“지하야... 인제 그만 놓아줘.”이혜영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게 바로 후회야. 지금은 네가 뭘 한다고 해도... 이미 늦었어.” 지하는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참...”이혜영은 애잔한 눈으로 말했다.“넌 어릴 때부터 모든 게 순탄했는데... 어쩌다 인연만 이렇게 꼬인 거니?”“잊어. 인생은 아직 길어. 그러니까 앞만 보고 살아.”“지금처럼 과거에만 매달리다 또 같은 실수 하고 싶어?”지하는 여전히 침묵뿐이었다.“지하야?”이혜영은 걱정스레 물었다.“엄마 말 듣고 있는 거 맞아?”지하는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듣고 있어요. 어머니, 알았어요. 저... 잘 살게요.”“정말?”이혜영은 반신반의했다.“정말이에요.”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571화

    진아의 눈이 반짝이자, 채숙희는 딸의 손을 툭 치며 막았다.“아직 씻지도 않은 거잖아? 왜 이렇게 급해? 지금은 더러워. 엄마가 씻어줄 테니까 그때 먹어.” “네!”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채숙희는 접시에 한 움큼 덜어, 진아를 위해 먼저 씻어주려고 했다.“근데 정말 먹음직스럽네, 이번 체리. 시장에서 자주 사봤지만... 이번 게 제일 좋아.”그러다, 채숙희는 문득 손을 멈췄다.“어? 그런데 사장님이 내일은 돼야 재고 들어온다고 하지 않았나?”아까 배달 온 사람도 시장 사장님이 아니었다.가게 직원도 아니었고, 그냥 택배 기사였다.‘그럼... 이건 시장에서 온 게 아닌데?’채숙희는 핸드폰을 들어 단골 가게 사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통화해 보니, 역시나 그쪽에서 보낸 게 아니라고 했다.“이상하네...”채숙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그럼 이건 누가 보낸 거야?”진아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조심스레 말했다.“엄마... 혹시 부지하 아닐까요?”“뭐?”채숙희는 멈칫했다.“설마... 네가 체리 먹고 싶다고 하니까... 이렇게 딱 보낸 거라고?” “저도 잘 몰라요.”진아가 고개를 저음 말했다.“그런데 그냥 느낌이 그래요. 부지하... 우리 집 앞에 있을지도 몰라요.” “그래, 알겠어.”채숙희는 그 말을 듣자, 씻어놓은 체리를 다시 상자로 쏟아 넣고는 상자를 번쩍 들었다.“엄마?”진아가 놀라 눈살을 찌푸렸다.“어디 가세요?”“우리 딸, 그냥 집에서 얌전히 기다려.”채숙희는 상자를 든 채 문을 나섰다.그러고는 마당 문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부지하! 당장 나와!”처음엔 아무 반응도 없었다.“여기 있는 거 알아! 빨리 안 나와?!”결국, 어둑한 곳에 숨어 있던 지하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냈다.그러고는 발걸음을 끌듯 다가와 섰다.“장모님...”“부지하!”“아... 그게 아니라!”지하는 황급히 말을 고쳤다.채숙희는 성큼 다가가 그의 품에 상자를 확 밀어 넣었다.지하는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570화

    지하는 잠시 멈칫하더니, 오설아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진아야.”설아의 충격과 불신이 뒤섞인 눈빛을 외면하며, 지하는 그녀의 손을 조용히 뿌리쳤다.“설아... 몸 건강히 지내. 그리고 이제 연락하지 마.”그 말을 끝으로, 지하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 나갔다.“안 돼... 안 돼...”설아는 지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소리쳤다.“나한테 어떻게 이래! 으흑...!”그녀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흐느끼며 오열했다.얼굴을 감싼 채 흐느끼자, 후회가 온몸을 뒤덮는 느낌이었다. “지하...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나 정말... 잘못했어!”하지만 지하는 이미 가게를 빠져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설아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이내 차에 올라 도로로 접어들었다.번잡한 거리 속을 달리며, 지하는 생각했다.‘젊었을 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 그때의 상처...’그 상처를 치유하는 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그리고 결국, 그 상처를 완전히 아물게 해준 사람은... 진아였다.지하는 가속페달을 밟았다.목적지는 오직 한 곳, 진아의 부모님 댁이었다. ...한편, 진아와 부모님은 점심을 끝낸 참이었다. 오늘은 진아의 입맛이 괜찮았다. 밥도 반 공기 넘게 먹고, 고기도 두 점이나 먹었다.식사 후, 진아가 갑자기 체리를 먹고 싶다고 해서, 채숙희는 딸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잠깐 바람 쐬는 것도 운동이 되는 법이니까.지하는 멀리서 임씨 저택의 대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하지만 그는 소리 내지도,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다.채숙희 모녀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채숙희와 진아는 팔짱을 낀 채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우며 걸어갔다.둘은 길을 건너 시장으로 향했다.채숙희는 이 시장을 좋아했다. 신선하고 종류도 많았으니까.단골 과일 가게에 도착하자, 채숙희가 물었다.“사장님, 체리 있어요? 우리 진아가 먹고 싶대서요.”“사모님, 오늘은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569화

    오설아는 드디어 가게를 오픈했고, 지하가 꼭 오길 바라는 마음에 일부러 주말을 택했다. 찾아온 사람도 꽤 많았다. 대부분이 지하의 체면을 봐서 온 이들이었다.지하는 손님들을 챙기고 인사하고 술잔을 주고받느라 분주했다. 그래서 행사가 끝날 무렵엔 이미 술기운이 꽤 올랐다.“지하.”설아가 지하를 붙들어 휴게실 소파에 앉혔다.“어때? 많이 취했어?”“괜찮아...”지하는 소파에 기대어 손을 휘저었다.“좀 어지럽긴 한데... 잠깐만 쉬면 될 거야.”설아가 말했다.“내가 따뜻한 수건 가져올게. 얼굴 좀 닦고, 꿀물 마시면 금방 나을 거야.”“응... 고마워.”“고맙긴, 뭐가?”설아는 살짝 눈을 흘기며 일어났다.잠시 후, 그녀는 쟁반에 물과 따뜻한 수건을 올려둔 채 돌아왔다.“지하?”지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잠든 것처럼 고요했다.“지하...”설아가 다시 조심스레 불렀지만, 역시 반응이 없었다.당장은 꿀물을 못 마시겠다고 판단한 설아는 따뜻한 수건을 들어 그의 얼굴 가까이로 가져갔다.그 순간, 지하가 번쩍 눈을 떴다.술기운이 걷힌 듯한 맑은 눈빛에 경계심이 스쳤다.“뭐 하는 거야?”“나...”설아는 당황해 잠시 굳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자는 줄 알고... 얼굴 좀 닦아주려고 했어.”“됐어.”지하는 고개를 저으며 오설아를 피해 일어섰다.“이제 괜찮아.”설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지하... 나가려고?”“응.”지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파에 걸쳐둔 재킷을 집어 들었다.그리고 잠시 멈춰 선 채 그녀를 바라봤다.“설아... 앞으로는, 잘 살아.”‘뭐... 라고?’그 말에 설아는 순간 멍해졌다. 불안과 공포가 한꺼번에 밀려왔고,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왜... 왜 그런 말 해? 앞으로 나랑... 안 볼 것처럼?”지하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공기가 갑자기 싸늘하고 묘하게 고요해졌다.설아는 갑자기 직감했다.“내가... 맞췄구나?”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설아, 이번이 마지막이야.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568화

    “부지하, 우리가 이혼한 그 순간부터... 난 다시는 당신과 어떤 인연도 이어가고 싶지 않았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지하는 온몸이 덜컥 떨리며 피가 한순간에 얼어붙는 듯했다.입이 벌어졌지만 말은 뒤엉켰다.“아... 진아... 나... 잘못...”진아는 눈물이 가득 고인 채 입꼬리를 약하게 올렸다.“우리가 함께 있을 때... 당신은 한 번도 날 사랑한 적 없었어...”‘아니야... 정말 아닌데...’지하는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입을 크게 벌려 말하려 했지만...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왜...? 왜 아무 말도 안 나오지...?’진아는 계속 말했다.“나... 아마 곧 죽을 것 같아. 제발 부탁이야, 날 좀 놔줘. 조용히... 세상 떠나게 해주면 안 돼?”“그리고...”진아는 이혜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여태 저를 아껴주신 거, 잘 알아요.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저를 위해서, 아드님을 데려가 주세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않게 해주세요.” 그리고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정말... 감사했습니다.”그 말을 끝내자마자 진아는 뒤돌아 계단으로 달려 올라갔다.“진아!”지하는 벌떡 일어서서 뒤따라 가려 했다.“그만!”그 순간, 이혜영이 지하의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그러고는 이를 악물고 아들을 노려보며 말했다.“진아가 뭐라고 했는지 못 들었어?”“어머니!”지하는 완전히 무너질 듯했다.‘안 돼... 이렇게 끝나면 안 돼...’“제가 여기 온 이유는, 진아를 설득하려는 거였잖아요! 진아는 절 미워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한테 화를 내는 거라고요! 그래도... 치료는 받아야 하잖아요! 죽으면 안 돼요!”“전... 진아를 잃을 수 없다고요.” 찰싹!순간, 따귀 소리가 울리며, 지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이혜영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을 올린 것이었다.그러고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아들을 가리켰다.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니?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건데?”“너는 늘 ‘내가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567화

    하지만, 지하는 이혜영이 배 아파 낳은 자식이었다.그래서 이혜영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그렇다고 아들은 무조건 감쌀 수도, 완전히 손을 놓을 수도 없었다. “지하는... 어릴 때부터 외모도 빼어났고, 공부도 알아서 잘해서 우리가 신경 쓸 일이 없었어요.”“형들하고도 사이가 좋았고, 한 번도 사랑받는다고 해서 버릇없이 굴지도 않았어요.”여기까지 말하자, 이혜영은 정말 마음 깊숙한 곳의 진심을 꺼내놓는 듯했다.“그런데 성인이 되더니... 하필 사랑 문제에서 이 모양이 된 거죠.”이혜영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진아를 한 번 바라본 뒤, 고개를 숙여 임병지와 채숙희에게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두 분...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아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 진아에게 상처를 줬습니다.”그 말을 듣자, 진아는 얼굴을 돌리고 눈가의 뜨거움을 꾹 눌러 참았다.‘울면 안 돼...’이렇게까지 말하는 이혜영 앞에서, 임병지와 채숙희도 더는 냉정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채숙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런 말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과거 일은 그냥 지나간 일로 해두시죠.” 하지만 속으로는 걱정했다.‘설마 이제 와서 부지하 편을 들어달라는 건 아니겠지?’이혜영도 그 뉘앙스를 알아채고 눈물을 닦으며 설명했다.“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여기까지 온 건, 이 녀석 편을 들거나 무슨 관계를 되돌리려고 온 건 아닙니다.”그녀는 진아를 바라보며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빈말로 하는 얘기가 아니에요. 이 녀석한테도 똑같이 말했어요. 진아한테는 못 미치는 애라고요! 두 사람의 이혼도 제가 찬성한 일입니다.”일단 동의한 이상 뒤집을 마음은 전혀 없었다.게다가 상대 집 딸이 이미 이렇게 힘든 상황인데, 어떻게 또 상처를 줄 수 있겠는가?임병지와 채숙희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그럼 오늘은 무슨 일로...?’“사실은...”이혜영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진아 병 때문에 왔어요. 제가 아는 한의사가 한 명 있는데, 정말 명

더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책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책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