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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Author: 임공

제1화

Author: 임공
밤 10시, 로얄호텔.

지시연이 7203호 로얄 스위트룸의 호수를 확인했다.

‘여기구나.’

그 순간,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는데, 지동성이 보내온 문자 메시지였다.

[시연아, 네 새엄마가 네가 진 사장을 잘 모시기만 하면, 바로 네 동생의 치료비를 주겠다고 약속했단다.]

이 문자 메시지를 읽은 시연의 창백한 얼굴에 무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미 신경이 마비되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듯했다.

아버지는 재혼한 후, 시연과 동생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심지어는 계모가 10여년간 두 남매를 가혹하게 학대하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의식주를 마련해주지 않는 것은 기본이었으며, 때리고 욕하고 비난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지금까지 벌인 학대로도 모자라, 사업상의 빛 때문에 딸 시연이 남자랑 잠자리를 가지게 하다니...

시연이 응답을 하지 않자, 지동성과 새엄마 장미리는 동생 지우주의 치료비를 빌미로 그녀를 핍박하기 시작했다.

시연의 동생 우주는 자폐증을 앓고 있어서 치료를 멈출 수 없었다.

호랑이도 자기 새끼는 건들지 않는 법이거늘... 지동성은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었다!

시연은 동생 우주를 위한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시연이 방문 앞에 선 채 깊은숨을 들이마셨고, 이내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그녀가 문고리를 살짝 돌리자, 스르륵 문이 열렸다.

방 안은 조금의 불빛도 없이 어두컴컴했다.

시연은 눈썹을 찌푸린 채 더듬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진 사장님, 저예요. 어...”

갑자기 길고 우락부락한 팔이 그녀의 목덜미를 잡더니 벽으로 밀쳤다.

벽에 부딪힌 시연은 등에서 통증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바로 이때, 남자의 거친 숨결이 순식간에 그녀를 휘감기 시작했다.

남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며 손으로 시연의 목을 조여왔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머릿속이 멍해진 시연은 이것이 도통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흔들며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몰라요...”

그 남자는 시연의 목을 조르던 손을 풀고,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움켜쥐며 자신의 몸과 밀착시켰다.

순간, 남자의 탄탄한 복근이 시연의 부드러운 살결에 닿아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남자의 온몸이 비정상적으로 뜨겁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입을 열자, 뜨거운 숨결이 뿜어져 나왔다.

“기회를 줄게, 날 밀어내고, 당장 여기서 꺼져!”

놀란 시연이 눈을 크게 떴다.

‘꺼지라고?’

‘혹시... 진 사장... 내가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아서 불만을 느낀 건가?’

‘안 돼, 우리 우주를 위해서라면, 절대 이 방에서 나갈 수 없어!’

‘여기까지 온 이상, 더는 물러날 곳도 없고, 인제 와서 부끄러워할 건 또 뭐야?’

“저는 절대 나가지 않을 거예요, 오늘 밤... 저는 당신의 여자가 될 거예요.”

두 손으로 남자의 목덜미를 감싼 시연이 까치발을 한 채 손을 더듬으며 남자의 입술에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몹시 어색하고 서툴렀다.

남자가 흠칫 몸을 떨었는데, 시연의 부드럽고 차가운 입술은 순식간에 그의 마지막 이성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처음이야?”

남자는 점점 거칠어지는 호흡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시연은 따질 틈도 없이 굴욕적으로 눈을 감고 입술을 떨며 말했다.

“처음... 이에요.”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이 말을 마친 그 남자는 시연을 가로로 안아 들고는 침대로 향했고, 그녀와 몸을 밀착시켰다.

“예쁜 아가씨, 오늘 밤만 지나면, 당신은 내 여자가 되는 거야!”

굵직한 손이 시연의 허리를 누르며 그녀를 이불 속으로 밀어 넣었는데, 남자의 목소리를 굵고 허스키했다.

뜨거운 키스의 열기가 방 안을 뒤덮었고...

수치심과 통증을 느낀 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았다.

끝내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울며 애원했으나, 그 남자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더욱 거센 힘으로 그녀를 몰아붙였다.

그렇게 밤새도록 그 남자를 상대한 시연은 통증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그녀는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는데, 그의 몸에서는 옅은 담배 냄새와 박하향 향수 냄새가 뒤섞여 났다.

‘꽤 향기로운데?’

시연을 일어나려다 허리에 가로놓인 팔을 누르고 말았다.

“깼어?”

남자는 몸을 뒤척이며 시연의 몸을 덮쳤는데, 놀란 그녀는 꿈쩍도 하지 못했다.

“예쁜 아가씨, 날 속이지 않았더라? 너는 이제 내 거야.”

서늘한 손끝이 시연의 뺨을 스쳤고, 남자의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배어 있었다.

“같이 샤워할까? 아님 혼자? 그것도 아니면... 안아줄까?”

“네?”

시연은 놀라서 두 손을 꽉 쥐고 허둥지둥 거절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머, 먼저 씻으세요...”

“싱겁기는.”

남자는 시연이 여전히 내숭을 떤다며 비웃었다.

“좋아, 내가 먼저 씻을게.”

그가 시연의 뺨을 만지작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조금만 기다려.”

‘기다리라고? 미친 거 아니야?’

‘밤새도록 했는데도 모자란 거냐고!’

욕실에 불이 켜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시연은 결국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아!”

움직이는 순간, 아래쪽에서 밀려오는 통증을 느낀 시연이 짧은 숨을 들이마셨다.

‘아무래도 다친 것 같아.’

하지만 시연은 자신의 몸을 살필 겨를도 없이 욕실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빌어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옷을 주워 입고는 방을 뛰쳐나갔다.

호텔 입구를 나서자,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시연이 말했다.

“시키시는 대로 했어요. 우주의 치료비는...”

[네 이 X! 네가 감히 날 엿 먹여?!]

새어머니 장미리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

[너, 밤새 어디 있었던 거야? 소미를 보내겠다는 걸 한사코 말리면서 자기가 가겠다더니, 어디 숨어 있었던 거냐고! 이딴 짓을 벌이고도 X신 같은 네 동생의 치료비를 달라고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시연이 냉소하며 말했다.

“제가 룸에 들어갔을 때, 진 사장은 샤워하고 있었다고요.”

“설마 돈을 안 주려고 이러시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장미리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당장 들어와! 감히 겁도 없이 진 사장을 화나게 하다니, 그 빚은 네가 다 갚아줄 거니?!]

장미리는 소리를 꽥 지르고 전화를 끊었다.

시연이 아연실색했다.

‘농담하시는 것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나는 어젯밤에 분명히...’

‘설마, 그 사람... 진 사장이 아니었던 거야? 그럼 그 사람은 누구였다는 거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

호텔 안.

방으로 들어선 주지한이 커튼을 열자, 밝고 따스한 아침 햇살이 밀려 들어왔다.

그 순간, 욕실의 물소리가 멎었고, 안에서 나온 고유건은 허리에 목욕 수건을 걸치고 있었다.

길게 우뚝 솟은 키, 그리고 넓은 어깨와 좁은 엉덩이, 이는 표준적인 남자 모델의 몸매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준수하고 깊은 이목구비를 뽐내며 만족스럽다는 듯 나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주지한을 힐끗 본 유건은 방 안을 살폈으나, 어제 자신과 함께‘즐거운 밤’을 보냈던 그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디 갔지?”

지한이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제가 들어왔을 때는 이미 아무도 없었습니다.”

얇은 입술을 치켜올린 유건이 새하얀 침대 시트 위의 야릇한 붉은 색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도망간 건가?”

‘나를 기다리지도 않고?’

‘이렇게 말을 안 듣다니.’

그가 사악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유건은 성인이 된 순간부터 그의 침대로 여자를 불러들이기 일쑤였으나, 성공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사람이 몰래 나한테 쓴 약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어젯밤에 그 여자를 굉장히 안고 싶었는데…’

‘아니면... 그 여자가 특별했기 때문에?’

“지한아, 어젯밤에 있었던 일 좀 알아봐 줘. 그리고... 그 여자애도 당장 찾아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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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연은 진아의 집에 하루 종일 머무르다가 저녁에 시간을 확인하고서야 가방을 메고 외출했다. 오늘 밤, 그녀는 해야 할 아르바이트가 있었다. 18세가 된 이후, 장미리는 시연에게 일절 돈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시연은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스스로를 책임져야만 했다. 비록 그녀는 고유건이 준 카드로 우주의 치료비를 지불했으나, 그 외의 비용은 지출할 생각도 없었고, 지출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연이 아르바이트하는 곳은 ‘BLUE’였다.‘BLUE’은 G시의 유명한 재벌 마사지 클럽으로서 재벌들의 사치스러운 유흥업소라고 할 수 있었다. 시연은 이곳에서 안마사와 침구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임상의학이 전공인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하여 특별히 한의학의 안마와 침구에 대한 과목을 선택하여 이수했고, 자격증까지 수료한 바 있었다. 하지만 실습의 자체가 바쁘기 때문에 임시직으로 아르바이트했으며, 손님의 수와 서비스 시간에 따라 임금을 계산하고 정해진 출퇴근 시간조차 없었다. 정규직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입이었지만, 시연은 스스로를 먹여 살릴 수 있었다. 물론 호의적이지 않은 손님을 만난 적도 있었지만, 시연은 늘 유연하게 대처했다. 시연은 출근할 때 찍어야 할 직원 카드를 스캔한 후,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그 순간, 매니저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시연아, 손님 오셨다!” “네, 바로 갈게요!”그녀는 서둘러 안마와 침술에 필요한 도구를 가지고 나와 객실로 달려갔다. 한 명의 손님에게 서비스를 마친 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배웅했다. “손님, 안녕히 가세요. 오늘 밤에는 푹 주무실 수 있을 거예요.” 복도의 다른 한쪽 끝,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고유건은 주지한을 따라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그가 앞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지한이 물었다.“형님, 왜 그러십니까?” “지한아, 봐봐, 저게 누구야?” 유건의 어조는 마치 ‘오늘 날씨가 참 좋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낯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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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한아, 비켜.” 지한을 밀쳐낸 유건은 조금 전의 분노를 가라앉힌 채, 다시 평소와 같은 무덤덤하고 고고한 모습을 회복한 상태였다. 그가 담담히 말했다.“무슨 일이야?” “고유건 씨가 절 해고하게 시킨 거예요?” “그래, 맞아.” 그가 시연을 힐끗 쳐다보았다.“대답이 됐니? 지한아, 가자.” “예, 형님...”“잠시만요!”시연이 재빨리 두 걸음 뛰어서 유건의 앞을 가로막았다. “제가 잘못했어요!”시연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비굴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다 내 잘못이야.’ ‘결혼으로 저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었던 건 맞지만, 내가 고유건을 건드릴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는 건 간과했으니까!’‘내가 주제넘은 짓을 한 거야!’ “제발요, 해고는 없던 일로 해주세요. 이 일은 제게 정말 중요한 거예요!”그녀는 의과대학 마지막 학기의 실습 과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습의는 급여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 아르바이트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시연이 짙은 안개가 낀 눈빛으로 간청했다. “제가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이혼할게요, 동의할게요. 고...”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유건이 뼈마디가 뚜렷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힘껏 움켜쥐었다. “네가 이혼을 원하면 하고, 원하지 않으면 안 하는 거야?” 분노가 극에 달한 유건이 온몸에서 포악한 기운을 발산하며 말했다. “네까짓 게 감히 몇 번이나 날 건드려?! 겁은 지나가던 개나 줘버린 거야?!” 이 말을 마친 그가 손을 뿌리쳤다. “꺼져!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하지만 시연이 다시 그를 막았다.“고유건 씨!”유건이 눈살을 찌푸렸다.“꺼지라니까? 사람 말 못 알아들어?!”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괜히...”시연은 그를 쳐다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제발, 이번만 용서해 주세요. 저는 사는 것만으로도 힘든 사람이에요. 저는 정말 이 일이 필요해요...” 음침하고 냉담한 얼굴의 유건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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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238화

    [알겠습니다, 형님.]전화를 끊자, 소미가 방으로 들어왔다.“유건 씨.”유건은 담배를 비벼 끄고 손을 저었다.“먼저 들어가 있어. 여기 담배 냄새 나.”담배는 임신한 여자에게 좋지 않으니까.“아, 네.”연기가 가라앉은 후, 유건은 문을 열고 들어가 소미가 건넨 물을 받았다.“좀 괜찮아요?”소미가 다정하게 물었다.“네.”유건은 물을 마시고 소파에 기대었다.“너무 많이 마셨나 봐.” 그는 관자놀이를 가볍게 눌렀다.“머리가 좀 아프네. 그래도 잠깐 앉아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제가 마사지해 드릴까요?”소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건의 곁에 앉으며 소매를 걷었다.남자가 거부할 틈도 없이, 그녀는 말했다.“눈 감아요. 우리 아빠가 술 마셨을 때 자주 해드렸어요.”여자의 손끝이 관자놀이를 누르자, 유건은 거부하지 않았다.“고마워.”소미가 잔잔히 웃었다.“저한테 뭘 그렇게 고마워하세요? 제가 유건 씨를 도로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우린, 앞으로 평생 함께할 사이잖아요.”‘그래, 앞으로도 함께할 사람이지.’유건은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익숙해져야 했다.소미의 손길이 생각보다 편안해서 그는 점점 나른해졌다.“유건 씨?”그녀가 속삭이듯 부르자, 유건은 반쯤 감긴 눈으로 대답했다.“응...”소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가슴이 뛰었다.‘이건 기회야!’‘내 임신은 거짓말이잖아... 시간을 더 끌면 고유건은 의심할 거고, 배를 감출 수도 없을 거야.’‘그 전에 내가 확실히 해야 해. 이 사람과 더욱 가까워지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그녀는 숨을 죽이고 목에서 어깨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유건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남자의 입술과 단 한 뼘도 남지 않은 거리.하지만, 소미는 남자의 입술이 닿기 직전, 유건의 눈이 번쩍 뜨였다.여자가 너무 가까이 있는 걸 깨닫고, 순간 멈칫했다.“소미 씨?”“유건 씨.”소미는 포기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키스해 줘요.”유건은 말이 막혔고, 본능적으로 미간이 좁혀졌다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237화

    유건은 회의를 마치고 대표실로 돌아왔다.비서가 다가와 보고했다.“대표님, 장소미 씨가 도착하신 지 좀 되었습니다.”오늘 밤, 유건은 한 연회에 참석해야 했고, 이번엔 소미가 파트너였다.“유건 씨.”소미가 환하게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그냥 앉아 있어.”유건은 손을 살짝 흔들며 무심하게 말했다.“조애린 씨한테 들었는데, 일을 계속할 생각이야?”“네, 그래요.”소미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설명했다.“양 감독님의 작품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게다가, 이미 절반 정도 촬영했거든요. 광고를 비롯한 일정이 과하게 많은 것도 아니고요. 저는 가만히 있는 게 더 싫어요.”잠시 생각하던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미의 배를 힐끗 바라보았다.“몸에 이상 없으면 소미 씨 뜻대로 해. 다만, 배가...”언젠가는 드러날 것이었다.“아, 아직 문제없어요. 사극이라 의상 때문에 티도 안 나고요.”소미는 오늘 넉넉한 원피스를 입고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평평한 신발까지 신은 것을 떠올렸다.유건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양 감독님께 소미 씨 촬영 분량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달라고 이야기해.”“네, 유건 씨 말대로 할게요.”시간이 늦어서 유건은 휴게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소미와 함께 대표실을 나섰다....연회는 해성 호텔에서 열렸다.주차장에서, 노은범이 먼저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고마워.”진주가 미소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은범은 담담히 말했다.“별일 아니야.”그가 어색해하는 모습을 본 하진주는 웃으며 말했다.“너무 긴장하지 마. 우리 약속했잖아? 친구처럼 지내기로.”“알아.”은범은 살짝 찡그렸다.“하지만, 네가 나 때문에 불편해질 수도 있잖아.”“괜찮아.”진주는 고개를 저었다.“이건 너만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엄마도 연관되어 있으니까.”그녀는 남자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았다.“그냥 편하게 가자. 시간이 지나면 부모님들도 우리가 진짜 안 될 거라고 깨달으시겠지.”은범은 한결 편안해졌다.‘나보다도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236화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하진주를 힐끗 바라보았다.“내가 보기엔 진주가 참 괜찮은 것 같은데, 정말 아쉬워. 우리 은범이 복이 없는 탓이지, 뭐.”진주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이모, 그런 말씀 마세요. 과찬이세요.”“진주야.”강수희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진주의 손을 잡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지난번에 은범이랑 같이 연극 봤다면서? 그 후로는 어떻게 된 거야? 솔직히 말해 봐. 은범이의 뭐가 마음에 안들었니?”“그게...”진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할까?’지난번에 은범과 미리 조율한 대로, 진주는 연극을 본 후 자기 부모님께 자신이 은범을 향한 마음이 없다고 전했다. 이는 진주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거였고, 은범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강수희가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진주는 은범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모, 은범이는 괜찮은 사람이에요. 다만, 저희는 서로를 잘 모르잖아요...”이 말이 강수희에게 희망을 주고 말았다.“그럼, 좀 더 만나보고 알아가면 되잖아? 제발, 은범이에게 기회를 줘 봐, 응?”“어머니!”은범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다가왔다.그는 먼저 방혜령에게 인사를 건넸다.“이모, 오랜만이네요.”그리고 곧바로 어머니를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어머니, 이모는 어머니를 뵈러 오신 거잖아요.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내가 이러는 건...”“괜찮아.”방혜령이 손을 흔들며 부드럽게 웃으면서 시선을 은범에게 두었다.“이제 많이 컸네? 그런데 너희 엄마 말도 틀린 건 아닌 것 같아.”그녀는 딸을 한번 흘긋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너희, 한 번 본 걸로 판단하기엔 너무 성급하지 않아? 좀 더 만나면서 알아가는 게 맞지 않나?”강수희가 기뻐하며 맞장구쳤다.“내 말이! 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어머니!”“엄마!”은범과 진주가 동시에 소리쳤다.그 모습을 보고, 방혜령과 강수희는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235화

    과장실 문 앞에서, 시연은 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형수님.]“지한 씨.”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유건 씨와 잠깐 통화할 수 있을까요?”[당연하죠. 형님도 여기 계세요.]잠시 후, 수화기 너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나야.]유건의 무심한 어조.“심폐 프로젝트팀에 내가 들어가게 된 거, 당신이 한 일이에요?”질문은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개입했다면, 바로 이해할 터였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남자의 답이 돌아왔다.[그래.]전혀 놀랍지 않았다. 시연은 눈을 감았지만, 당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여자의 침묵에, 유건은 비웃듯 말했다.[설마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벌인 일이라는 이유만으로?]시연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멍청하긴...]유건이 낮게 욕했다.[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간다는 게 너한테 어떤 의미인지, 내가 설명해야 하냐?]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팀에 들어가면 분명 시연의 수입도 늘어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경험과 기술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돈 때문이라면 이렇게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지시연.]유건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나와 관계를 끊는 게 중요해? 아니면 네 미래가 더 중요해?]책망과 걱정이 섞인 목소리.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시연도 알고 있었다.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결정을 내렸다.“고마워요, 유건 씨.”유건은 핸드폰을 쥔 채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동시에, 안도감이 밀려왔다.‘다행이네. 이 여자, 결국 받아들였어!’하지만 시연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유건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그리고 그녀는 덧붙였다.“예전엔 내가 잘못했어요. 항상 미안하게 생각해요. 앞으로는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이 잘되길 바랄게요. 그리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유건은 한참 동안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234화

    ‘원래라면, 저 여자, 부와 명예를 누려야 마땅해. 하지만 지금은...’...차에 돌아온 지한은 유건이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즉, 유건의 온몸에서 스며 나오는 묵직한 어둠과 슬픔을 느낀 것.‘설마, 또 형수님한테 혼난 건가? 그게 아니면, 이번엔 진짜로 맞기라도 한 건가?’“형님...”“지한아.”유건의 시선이 멍하니 허공을 가로질렀다.“방법을 좀 찾아봐. 시연이가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내가 돈을 건네면, 시연이는 절대 받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연이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지 못하는 건 아닐 거야.’ ‘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시연이가 돈과 명예를 탐하는 여자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지? 정말 한심해!’...시연은 임진아 집으로 돌아온 뒤, 저녁에 양석현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교수님.”[시연아, 내일 오전에 내 사무실로 와. 할 말이 있어.]“네, 교수님.”양석현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다음 날 아침, 시연은 교대 근무도 마치지 못한 채 서둘러 외과로 향했다.양석현은 회진을 마친 후에야 시간을 냈고, 시연을 과장실로 데려갔다.“일찍 왔구나. 앉아.”시연은 긴장한 채 자리에 앉았다.“교수님, 무슨 일이신가요?”‘혹시 내가 1학년 실험 수업을 하는 데에 문제가 생긴 걸까?’“뭘 그렇게 긴장해?”양석현은 일부러 뜸을 들이다가도, 결국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은 소식이야.”그는 서랍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내 시연에게 건넸다.“이걸 작성하면, 너는 공식적으로 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가게 될 거거든.”시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교수님, 이게... 정말 규정에 맞는 건가요?”“규정대로라면, 맞지 않지.”양석현이 웃었다.“원래는 네가 대학원에 합격하면 팀에 넣을 생각이었어. 그 자체도 예외적인 거지만 말이야.” 그런데 아직 대학원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가능하게 된 걸까?양석현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말했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233화

    차가 시연 앞에 멈췄다.창문이 내려가더니, 지한이 고개를 내밀고 미소를 지었다. “형수님, 어디 가세요? 타세요, 제가 모시고 갈게요.”시연은 유건을 흘낏 보았다.‘이상하네, 왜 조수석에 앉아 있지?’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또 유건의 차를 타면 점점 엮이게 될 것 같았다.“형수님, 얼른 타세요.” 지한은 차를 움직일 기색도 없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내려서 직접 문 열어드려야 합니까?”“아니에요...”시연은 거절하려 했지만, 정류장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불만을 터뜨렸다.“뭐야, 버스 정류장에 세우면 안 되는 거 몰라?”“그러니까! 버스가 못 지나가잖아.”“빨리 가라고!”“벤틀리네, 저런 차를 태워준다는데 안 탄다고?”“재수 없어.”점점 더 듣기 거북한 말들이 오갔다.어쩔 수 없이, 시연은 차 문을 열고 탔다.“형수님, 어디로 가면 됩니까?”차에 타자마자, 지한이 물었다.시연은 대답 대신 조수석에 앉아 있는 유건을 바라보았다.‘이거 완전 악연 아니야? 왜 자꾸 마주치는 거지?’“형수님.” 지한이 웃으며 유건을 가리켰다. “마침 형님이 차에 계시긴 하지만, 너무 신경 쓰진 마세요. 그냥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셔도 돼요. 어차피 아무 말도 안 할 거니까요.” 시연은 당황했다. ‘이 둘 뭐 하는 거야?’“이제 목적지 말해주실래요?”지한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형수님, 실은 우리도 친구라고 할 수 있잖아요. 제가 그저 한 번 모시고 가는 걸로 부담 갖는 건 아니시죠?”지한의 말에 시연은 결국 마지못해 답했다.“산신당으로 갈 거예요.”지한은 잠시 멈칫하더니, 본능적으로 조수석의 유건을 바라보았다.“거기서 볼일 있으세요?”“네.”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좀 살 게 있어서요.”‘거기서 뭘 사려는 거지?’산신당은 G시보다 더 오래된 곳일지도 모른다. 사찰뿐만 아니라 재래시장도 있어, 평범한 서민들이 주로 찾는 곳이었으니 말이다.분명 번잡하고 활기차지만, 고급스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232화

    시연은 믿을 수 없었다.‘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는 우리한테 단 한 번도 아버지 역할을 해주지 않던 사람이,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한다고?’지동성은 딸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다시 한번 말하마. 우주를 ‘웰스’로 보내는 돈은 이 아빠가 다 낼게.” 시연은 멍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닌데, 이해할 수 없었다.“왜요?”지동성은 한숨을 쉬며 난감한 듯 말했다.“아버지가 자식한테 돈을 주는 데에도 이유가 필요하니?”‘이유가 필요하냐고? 그럼 그때 우주의 치료비를 끊고,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건 누구였더라?’‘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진 당신이 그 중심에 있던 거 아니었나?’ 시연은 믿을 수 없었다. 곧이어, 지동성이 말을 이었다.“시연아, 곧 다가올 아빠의 생일에 네가 꼭 와줬으면 좋겠구나.”시연은 또다시 얼어붙었다.‘오늘따라 무슨 일이 이렇게 많아?’무심결에 튀어나왔다.“무슨 뜻이에요? 도대체 뭘 하려는 거죠?”“흠.”지동성이 가볍게 기침했다.“아빠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앞으로 몇 번이나 생일을 맞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단다. 가족끼리 모여서 밥 한 끼라도 같이 먹고 싶어.” ‘뭐 이런 헛소리가 다 있어?’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냉소를 흘렸다.“아내도 있고 딸도 있잖아요. 가족이랑 매일매일 함께하잖아요?”“시연아.”지동성이 딸의 말을 끊고, 불만스럽게 고개를 저었다.“너와 우주도 아빠의 자식이야.”그는 모델 조립에 열중하고 있는 우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아빠의 생일에 와준다면, 네가 나를 아버지로 인정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게. 그때가 되면 우주의 치료비는 얼마가 되든 내가 책임지마.” ‘우주를 빌미로 협박하는 거야?’시연은 본능적으로 떠올렸다.‘로얄호텔에서의 그때도...’그녀는 경계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예요?”딸의 반응을 본 지동성도 깨달은 듯했다. 잠시 스치는 후회의 눈빛.“아빠가 뭘 할 수 있겠니? 그냥 생일을 함께 보내고 싶은 것뿐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231화

    주말, 시연은 여느 때처럼 태산 요양병원에 우주를 보러 갔다.“시연 씨.”간호사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오늘은 꽤 이른데요?”“실습이 끝났거든요.”“그분, 시연 씨보다 더 일찍 왔어요.”시연은 순간 멈칫했다. “누가요?”“지난번에도 왔던 분이요. 시연 씨랑 우주의 아버지라고 하시던데요?”순간, 시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또 지동성이야?’‘요즘 대체 왜 저러는 거야?’“그리고...”간호사가 시연을 조용히 불러 세우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분이 우주가 ‘웰스’ 검사받은 거에 관해 물어보셨어요.”그 말을 듣자, 시연의 이마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알겠어요. 고마워요.”“별말씀을요.”간호사와 작별한 뒤, 시연은 우주의 병실로 들어갔다.방 안, 우주는 바르게 앉아 있었고, 지동성은 그의 맞은편에서 상자를 열고 있었다.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우주야, 그거 마음에 드니?”멀리서 본 그것은, 비행기 모델이었다.우주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남자아이들이 이런 걸 마다할 이유는 없었으니 말이다.“누나.”우주는 고개를 들어 시연을 바라보았다. 조심스레 허락을 구하는 눈빛이었다.최근 이 아저씨가 자주 찾아오긴 했지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나가 싫어한다면, 그 선물을 받을 순 없었다.우주가 실망하는 것은 원치 않았기에, 시연은 소년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우주가 마음에 들면 받아. 그리고 감사하다고 해야지.”“아, 감사합니다!”우주는 기쁜 듯 지동성을 향해 방긋 웃으며 상자를 안아 들었다.“우주야, 잘 가지고 놀아.”“네!”시연은 그제야 지동성을 마주 보았다.“오셨어요?”그녀는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건넸다.“지난번엔 오실 줄 몰라서 못 돌려줬는데, 이번엔 가져왔어요. 돌려드릴게요.”지난번, 지동성이 간식 봉투 안에 넣어둔 돈이었다.지동성은 찡그리며 받지 않았다.“받으세요.”시연은 재촉하며 덧붙였다.“그리고, 그 모델 얼마 주고 사셨어요? 같이 송금해 드릴게요.”“시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230화

    “그럼, 유건 씨 말대로 할게요.” “간호사님, 수액 놔주세요.” 유건은 한발 물러서며, 핸드폰을 꺼내 은범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은범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네 번까지. 그는 결국 포기했고, 다시 수액실로 돌아왔다. 그 사이, 간호사는 이미 시연에게 주사를 놓고 있었다. 시연은 조용히 눈을 감고, 수액을 맞고 있었다. 유건이 들어서자, 시연은 천천히 눈을 떴다. “이제 가려는 거예요?” 유건은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미안하지만, 아직은 못 가.” 그는 핸드폰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너희 ‘은이’가 전화를 안 받더라고.” 시연은 순간 멍해져서 입술을 달싹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바쁘겠죠.” “응.” 유건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액실은 냉방이 켜져 있었고, 침상에는 이불이 없었다. 유건은 입고 있던 정장 외투를 벗어, 시연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좀 불편해도 참아. 네 남자 친구한테 안전하게 넘기기 전까진, 절대 못 가.” 남자의 태도는 변함없이 고집스러웠다. ‘이 남자는 정말로 쉽게 물러나지 않는구나.’ 결국 시연은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그냥 유건이 없는 것처럼 무시하기로 했다. 그 사이, 유건의 핸드폰이 몇 번 울렸다. 그는 멀리 가지 않고, 시연의 곁에서 전화를 받았다. 실은 유건에게 온 전화는 대부분 주지한이 걸어온 업무 관련 전화였다.“난 못 가니까 네가 알아서 처리해.” “그래, 그렇게 해.” 시연은 눈을 감은 채, 복잡한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다. ‘일이 있다면서, 왜 끝까지 여기에 남아 있는 거야?’ ‘나를 쉽게 놓을 수 없다는 건가?’ 시연은 손바닥이 따끔거릴 정도로 손을 꽉 쥐었다.첫 번째 수액이 끝날 무렵, 이번엔 은범의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세요.] 유건이 전화를 받자마자, 목소리에서 불쾌감이 묻어났다. “노 사장님, 바쁘셨나 보네요.” 전화기 너머의 은범이 정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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