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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2화

Author: 임공
“어떻습니까, 교수님?”

강수희는 비틀거리며 다가가 물었다.

초조함이 전신을 감쌌고, 목소리도 떨렸다.

의사는 깊게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출혈은 막았고 봉합은 완료했지만... 생명 징후가 매우 불안정합니다. 혹시 부모님이시라면, 자살 시도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노수철과 강수희는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절망과 자책, 무지의 공허함만이 흐를 뿐.

의사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일단 병실로 옮겨 보겠습니다. 상황은 조금 더 지켜봐야 합니다.”

...

병실로 옮겨진 은범은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몸은 차갑고, 호흡은 희미했다.

의사는 곁을 돌며 환자의 상태를 살핀 후, 다시 고개를 저었다.

“생명 징후가 너무 약해요. 솔직히 말해서... 살겠다는 본인의 의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네요. 두 분... 부모로서... 정말 이유를 모르십니까?”

‘살겠다는 의지가 없다’라는 말이, 비수처럼 강수희의 가슴에 꽂혔다.

의료는 기적을 바랄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마음이 꺾인 사람에겐 한없이 무력해지는 일이기도 했다.

“방법... 방법이...”

강수희는 중얼거리며, 불현듯 남편의 팔을 움켜잡았다.

“방법 있어요! 방법이 있어요, 분명히!”

그리고 이내, 진성빈을 찾아갔다.

“성빈아... 있어. 방법이 있어.”

강수희의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다.

성빈은 바로 눈치를 챘다.

하지만 믿을 수 없어 되물었다.

“설마... 시연이요?”

“그래, 시연이.”

강수희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만이 은범이를 살릴 수 있어... 그 아이는... 은범이한테 약이야...”

“이모...”

성빈은 난감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요. 시연이가 결혼했다는 거, 이모도 아시잖아요.”

고씨 가문의 결혼식은 조용히 이루어졌지만, G시의 상류 사회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이제는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버린 시연이, 전 남자 친구를 보러 오는 일은 불가능에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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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만큼은, 기환도 감히 전화를 피할 수 없었다. “형님!”[지금 뭐 하는 거야? 아니지, 그건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고, 시연이는? 지금 어디 있어?]“형님... 형수님, 사고 난 것 같아요. 빨리 일반외과 병동으로 와주세요!”‘일반외과 병동?’ ‘시연이가 왜 일반외과에 있어?’유건의 날렵한 턱선이 단숨에 굳어졌다.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지한도 묻지 않고 곧장 뒤따랐다....병동 앞. 팽팽한 긴장감 속, 날 선 기류가 오갔다.“다시 말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문 여세요.” 기환은 이를 악물며 노려봤다. “노 회장님, 사모님... 형수님이 어떤 분인지 아시잖아요? 만약 안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책임지실 겁니까?”“아이고, 진정 좀 해요.” 강수희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설마 무슨 일 생기겠어요? 여긴 병원이잖아요. 그냥 나올 때 문이 자동으로 잠긴 거겠죠...”그러면서 간호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요, 열쇠 좀 가져다주시겠어요?”“네, 가족분이 요청하셨으니 금방 가져다드릴게요.”간호사가 자리를 뜨기도 전에 유건이 도착했다.“기환!”“형님!”“어떻게 된 거야?” 유건은 노수철 부부를 스치듯 보았다. ‘저 사람들이 노은범의 부모라면... 이건 정말 심상치 않아.’ 왠지 가슴 깊숙한 곳이 먹먹해졌다. ‘불길해... 느낌이 안 좋아.’“시연이는?”기환이 머뭇거리자, 강수희가 멋쩍게 웃으며 맞이했다. 그녀도 유건이 갑자기 찾아올 줄은 전혀 몰랐던 눈치였다. “고 대표님... 오셨네요. 하하...” ‘분명 우리 아들하고 시연이를 엮고 싶었을 뿐인데...’‘고유건이랑 정면충돌만큼은 피하고 싶었는데... 이건 좀...’“시연이는 안에 있어요. 그냥... 좀 쉬고 있는 것 같아요.”말끝을 흐리며 둘러대려던 순간, 유건은 턱을 살짝 들었다. “기환아, 문 당장 열어.”“형님, 간호사가 열쇠를 가지러 갔어요. 곧...”그러나 유건은 조금도 기다릴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31화

    그 말은, 너무 부정적이었다.유건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 말투엔 어쩐지 짙은 불만이 스며 있었다.“소미 씨, 내 말은 그게 아니라...”“네, 알아요.” 소미의 눈빛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유건의 기분이 상한 걸 느꼈다. ‘또 실수했나... 아니면, 그냥... 내가 예민한 건가?’“저 사실... 이젠 점점 받아들이고 있어요. 앞으로는 치료에도 진지하게 임할 거예요. 잘 협조할게요.”“그렇다면 다행이네.”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까 너무 딱딱했나...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민감해질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미안해, 내가 말이 너무 심했지.”“괜찮아요.” 소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 보였고, 오히려 살짝 장난기 어린 말투로 물었다. “저, 무슨 꽃 심었게요?”“무슨 꽃인데?” 화분 위엔 아직 싹도 안 튼 흙만 보였다. 육안으론 알 수 없었다.“나비난이에요.” 소미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고, 시선을 자연스레 화분으로 옮겼다. “아직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꼭 자라날 거라고 믿어요.’“유건 씨, 혹시 기억나요?”“그때, 우리 마당에 나비난이 가득 피어 있었던 거...”유건이 어떻게 잊겠는가? 가득 핀 나비난, 그리고 그 꽃들 사이에서 나비를 쫓던 그 소녀... 그건 유건의 기억 속 가장 선명한 한 장면이었다.‘참, 오래됐네... 그래도 잊히지 않더라.’유건의 눈빛이 부드러워졌고, 마음 한편도 연이어 부드러워졌다. “지금 이 시기에 꽃을 심는 건 쉽지 않을 거야. 게다가 소미 씨는 처음 심어보는 거잖아. 어쩌면 싹이 안 틀지도 몰라. 마침 내가 조금 키워둔 게 있는데, 마음에 들면 보내줄게.” “진짜요?” 소미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너무 좋죠! 저야 당연히 좋죠. 근데... 유건 씨가 키운 건데, 저한테 줘도 돼요?”“왜 안 돼?” ‘그 꽃들, 원래 소미 씨를 위해 심은 거였어...’“그럼... 고마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30화

    노수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뭘 의미할까?’‘분명한 건,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었다는 증거겠지.’“여보, 멍하니 뭐 해요?” 강수희가 남편을 툭 찔렀다. “어서 들어가서 시연이가 깨기 전에 옮겨놔요. 이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 그런 기회가 오겠어요?” 그 말에, 노수철은 눈치를 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강수희의 뜻은 명확했다. 즉, 은범과 시연이 가까워지게 하려는 것.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병실 문을 조심스레 열고, 노수철은 마치 금고를 여는 사람처럼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히 해요. 깨우지 말고요.” 강수희가 밖에서 낮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알았어.” 시연은 아직 깊게 잠든 상태였다. 노수철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들어, 은범이의 병상 위에 살짝 눕혔다. 그리고 침대 커튼을 천천히 닫았다. 다행히 VIP 병실 침대는 넉넉한 사이즈였다.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워도 전혀 좁지 않았다. 노수철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병실을 빠져나왔다. “후... 심장 조여서 죽는 줄 알았네. 혹시 깨기라도 했으면, 그냥 끝장날 뻔했어.” “여보, 잘했어요.” 강수희가 만족스럽게 그의 팔을 툭 치며 노수철을 데리고 복도 끝 활동실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병동 끝에서 지켜보던 정기환이 멀리서 노수철 부부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왜 저렇게 몰래몰래 움직이지...?’ 의심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기환의 핸드폰이 울렸다. 유건에서 온 전화였다. 기환은 반사적으로 등이 쭉 펴졌다. “형님.” 긴장된 목소리로 전화를 받자마자, 전화기 너머로 유건의 낮고 건조한 음성이 들려왔다. [시연이는 퇴근했어?]“네, 퇴근했습니다.” [나 지금 강울대병원에 도착했어. 시연이가 계속 전화를 안 받던데, 내 말 좀 전해줘. 곧 도착하니까 병원 앞에서 기다리라고.]“네.” 기환은 애매한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젠장.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29화

    “그래도, 이모...” 시연은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가방을 가리켰다. “이 옷들은, 정말 받을 수 없어요.” “이모가 주는 거잖아.” 강수희는 손을 내저었다. “너 어젯밤에 은범이 곁에서 밤새 간호했잖아.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이건 그에 대한 고마움이야. 너무 부담 갖지 마.” 그 말과 함께,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난 은범이를 혼자 둘 수 없어서 이만 올라가 봐야겠구나. 천천히 먹고, 옷은 사이즈 안 맞으면 교환하도록 하렴. 영수증은 다 넣어뒀어.” “이모...” 시연이 일어나 말리려 했지만, 강수희는 이미 빠르게 병실 문을 나섰다. ‘하...’ 시연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가방 속을 열어보곤, 손끝이 멈췄다. ‘이건... 전부 다... 임부복이잖아.’ 고급 브랜드의, 절묘하게 편하면서도 스타일을 놓치지 않은 임산부 전용 의류들. ‘정말 정성 들였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다시 앉았다. ‘단지 은범이 옆에 하루 있어 줬다는 이유로 이 정도라니... 부모 마음이라는 게, 이런 건가?’ ...퇴근 후, 시연은 병원 가운을 갈아입고 다시 외과 병동으로 향했다. “시연아, 왔구나.” 강수희는 반갑게 맞이했다. “네, 이모. 은범 상태는 좀 어떤가요?” “아주 좋아졌어. 생체 수치도 안정됐고. 근데... 아직도 계속 자고만 있어서...” 강수희는 또 한숨을 쉬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시연은 부드럽게 말했다. “은범은 잠 못 자는 기간이 꽤 길었어요. 이젠 몸이 알아서 회복하려고, 푹 자는 거예요.”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안심되는구나.” 강수희는 믿음 어린 눈으로 시연을 바라봤다. 그리고 핸드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잘 왔어. 은범이 아빠가 왔는데, 짐이 많아서 내가 데리러 가야 하거든. 너만 괜찮으면, 우리 은범이 옆에 좀 있어 줄래? 말도 좀 걸어주고... 금방 올게.” “네, 괜찮아요.” 강수희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28화

    강수희의 지금 태도는, 이전에 비하면 너무도 다정했다.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가 있나...’ 시연은 어쩐지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시연아, 왜 멍하니 있어?” 강수희는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밥그릇을 건네며 말했다. “배고프지? 어서 먹어봐.” “사모님, 저는 그냥 병원 식당에서 먹어도 돼요.” 시연은 조심스럽게 거절을 시도했다. “식당?” 강수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안 되지! 지금 넌 임신 중이니, 영양을 챙겨야 해.” 그러고는, 무심한 듯 덧붙였다. “그나저나, 점심마다 그렇게 식당에서 먹는 거야? 고 대표님은 신경도 안 쓰니?” ‘왜 고유건이 그런 걸 신경 써야 하지...?’ 시연은 고개를 조용히 저었다. “아휴...” 강수희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바쁘니까 그러시겠지. 고 대표님은 워낙 일이 많으시잖니. 아무래도 널 세심히 살피긴 어려우실 거야.” ‘지금... 고유건이 나한테 무관심하단 걸 돌려 말하는 거야?’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히 부정하거나, 맞장구치기도 애매했다. ‘병원 식당 음식이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고, 요즘은 입덧도 거의 없어서 뭐든 잘 먹는데...’ “아직도 멍하니 있네. 어서 먹어.” 강수희가 다그치듯 말했다가, 곧 불안한 듯 덧붙였다. “입에 안 맞니? 혹시 음식이 별로야?” “아니요, 아니에요.” 시연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다 너무 맛있어요.” “그래, 그럼 많이 먹어. 지금 넌 두 사람 몫을 먹어야 하니까.” 강수희는 시연의 아랫배를 힐끔 보며 말을 이었다. 그 눈빛엔 어딘가 스치는 듯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내가 그때 막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저 아이는, 우리 집 손주였을 텐데.’ 시연은 그 시선을 읽지 못한 척, 은범의 안부를 물었다. “은범이는... 좀 어때요?” “응, 괜찮아졌어.” 강수희는 활짝 웃었다. “기본적인 생체 수치는 안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27화

    “사람 일이란 모르는 거잖아요. 안 해보면, 정말 불가능한지 어떻게 알아요?” 강수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바로 그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욕실 문이 열렸다. 시연이었다.강수희는 얼른 남편 팔을 톡 건드렸다. “됐어요. 이제 그만 얘기해요.” 그러고는 곧장 시연을 향해 입가에 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 다가갔다. “시연아, 어서 와. 따뜻할 때 먹어야지. 네가 뭘 좋아하는지 잊었는데... 입에 안 맞으면 말해줘. 다음엔 네 취향에 맞춰볼게.” “사모님, 잘 먹겠습니다.” 시연은 상 위를 내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적당한 간을 맞춘 음식이 정성스럽게 꾸려져 있었다. 딱 봐도 대충 준비한 게 아니었다. “고맙습니다.” “아유, 뭘... 내가 너랑 무슨 예의를 따지겠니?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만 해. 언제든지 해줄게.” “네...” 시연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꾹 다물자,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 사모님이... 이렇게까지 다정한 사람이었나?’ 시연이 은범을 만난 지는 꽤 되었지만, 강수희에게서 이렇게 따뜻한 표정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강수희는 언제나 냉정하고, 불편하고,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너무 달라. 이 변화... 당황스러울 정도야.’ ...세 사람이 가볍게 요기를 마치고 있을 즈음, 의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상태 확인 결과, 전반적으로 상태가 아주 좋아졌습니다. 가족분들 덕분이네요. 계속 잘 유지해 주세요.” 강수희의 얼굴에 한 줄기 빛이 돌았다. “정말요, 교수님? 그럼... 은범이는 언제쯤 눈을 뜰까요?” 의사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건 확답드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현재 상태로 보면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장기간 불면이었을 가능성도 있어서... 지금은 그냥 푹 자는 걸 수도 있어요.” “그렇군요.” 강수희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곁눈질로 시연을 한 번 바라봤다. ‘역시... 은범이는 시연이 없이는 안 되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26화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간호사가 진료차트를 들고 병실을 나섰다. “하...” 노수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시연이가 있어야 은범이가 진정되는구나.” 어젯밤, 노수철 부부는 병실 안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유리창 너머로 벌어진 일들을 하나하나 다 보고 있었다. “참...” 노수철은 다시 한번 고개를 내저었다. “솔직히 말해서, 시연이랑 은범이... 참 잘 어울렸지.” “외모든, 성격이든, 정말 천생연분이 따로 없었는데...”“뭐... 이제 와서 얘기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결국, 우리가 갈라놓은 거잖아. 그 선택이, 우리 아들 인생을 망쳐놓은 거고.” 찰나의 침묵이 흐르고, 강수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근데... 당신 그 얘기 들은 적 있어요? 시연이 동생 말인데...” 노수철은 고개를 돌렸다. “동생? 자폐 스펙트럼 있는 애?” 강수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근데 그 아이가 단순한 자폐가 아니래요... 굉장히 드문, 천재성 있는 아이라던데요?” “뭐?” 노수철은 깜짝 놀라 눈이 커졌다. “은범이가 제일 먼저 눈치챘대요. 이름이 우주라던데, 그 동생... 곧 CA국 ‘웰스’에서 전액 장학금 받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게... 사실이야?” “네, 나도 최근에야 알았어요.” 노수철은 허탈하게 웃었다. “우린... 그 가족을 너무 몰랐던 거야. 3년 전에만 알았어도, 그렇게 무리하게 반대하진 않았을 텐데.” 그리고 이내, 스스로를 비웃듯 피식 웃었다. “근데 뭐 하러 그런 얘길 해? 이미 늦었잖아. 이젠 가능성도 없어.” 그러자, 강수희가 조용히 남편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없어요?” “...뭐가?” “말 그대로예요. 왜 가능성이 없는데요?” 노수철은 잠깐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아니, 시연이는... 지금 고유건이랑 결혼했잖아.” “맞아요. 근데 그 결혼, 그렇게 탄탄하지 않대요.” 강수희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25화

    “시연아, 나 M국 도착했어. 며칠은 적응해야 해서, 학교 등록은 좀 이따가 하려고...”“오늘은 눈이 왔어. M국 날씨는 G시보다 더 오락가락하고 있어. 어제는 반 소매 입었는데, 오늘은 눈이 내려...”“오늘 장 봐서 집에서 밥해 먹었어. 햄버거랑 치킨만 먹다 보니 몸이 좀 이상하더라...”“요리가 좀 익숙해지면, 나중에 너한테도 해줄게. 넌 교수가 될 거니까 아주 바쁠 거잖아. 내가 집안일도, 너도 챙길게.” 한 문장, 또 한 문장. 은범의 글씨를 따라가던 시연의 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눈물이 자꾸만 번졌다. ‘왜 이제야 보게 된 걸까...’ 시연의 심장이, 천천히, 무겁게 가라앉았다. ...“계속 답장이 없네. 아직도 화난 거야? 내가 갑작스럽게 떠난 건... 정말 어쩔 수 없었어. 우리 부모님이...” “지난번 내가 한 설명... 안 믿는 거야? 맹세할게. 단 한 마디도 거짓은 없어.” “시연아, 보고 싶어.” “난 언제나 진심이야. 그 마음은 단 한 번도 변한적이 없어. 너를, 그리고 우리를 배신한 적 없어.” “나, 오늘 전액 장학금 받았어! 너도 기뻐해 줄 거지?” “내 디자인이 공모전에서 상 받았어! 앞으로... 우리 집은 내가 잘 지켜낼 수 있을 거야.” “시연아, 날 기다려줘. 제발... 나 돌아갈게.” “너무 보고 싶다. 딱 한 번만, 연락해 줄래?” “내가 잘못했어. 넌... 절대 날 용서하지 않을 거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 점점, 시연은 더 이상 문장을 끝까지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아...!!!” 손으로 가슴을 꾹 누른 채, 시연은 오열했다. 이와 동시에 침대 위에 누운 은범을 바라보는 눈빛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서렸다. ‘난... 몰랐어.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 지난 3년 동안, 시연이 은범에게 가졌던 감정은 오직 하나... 증오였다. 약속을 어긴 은범에 대한, 자신을 버린 은범에 대한, 가차 없이 떠난 은범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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