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건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 어린 시연이, 대체 어떤 고통을 겪으며 살아왔는지.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지동성이었다. 정말 우스운 일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오해를 했던가. 정작 진짜 잘못된 건, 지동성이란 남자가 ‘아버지’라는 이름조차 감당하지 못한 사람이었다는 것.소미의 말에 일부 과장이 섞여 있을지 몰라도... 지동성이 시연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준 적이 있었을까?아니, 지동성은 자기 자식들에게조차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한 적이 없었다. 딸이 아버지를 그렇게까지 미워하고,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 할 정도라면, 그게 어떤 아버지란 말인가?그리고... 유건의 가슴을 더 서늘하게 만든 건...혹시, 시연이 자신에게 다가온 이유가 정말 소미가 말한 것처럼 ‘복수’였다면?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마음 한편이 쓰디쓴 한약에 담가진 것처럼 저릿하게 아려왔다. ‘그때... 우리가 처음 계약 결혼을 했을 때, 시연이가 이혼을 고집했던 것도... 그 이유였던 걸까?’그땐 단지 무심한 성격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뭔가 숨기고 있던 게 분명했다. 그 숨겨진 이유가, 그토록 잔인한 것이라면......한편, 병실에서는...잠시 눈을 붙이고 난 뒤, 시연은 이제 괜찮다는 듯 스스로 산소호흡기를 뗐다.“시연아!” 하은이 놀라 달려왔다.“왜 벌써 일어났어? 아직 컨디션 안 좋을 텐데, 좀 더 쉬지.”“괜찮아.” 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까는 잠시 숨이 가빴을 뿐이야. 지금은 정말 멀쩡해.”하은은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억지로 버티는 얼굴은 아니었다.“알겠어. 근데 무리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바로 말해야 해.”“응, 알았어.” 시연은 여전히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그녀가 다른 데 시선을 두고 있을 틈을 타, 하은은 몰래 핸드폰을 꺼내 시연의 모습을 ‘찰칵’ 사진에 담았다.그리고 곧장 유건에게 전송했다.한편, 유건은 메시지 알림을 보고 화면을 터치했다. 사진 속 시연은
“시연이 왔구나. 소개할게.” 양석현 교수는 환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이쪽은 변이준. 네 선배야. 이준아, 여기는 시연이. 너보다 한참 어린 네 후배지.”“시연 씨, 반가워.” 변이준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시연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선배님, 안녕하세요!” 시연은 들뜬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변이준... 그 이름, 나 들어본 적 있어!’ 양석현의 자랑이자, ‘의대의 천재’라고 불리던 그 이름. 학부 시절에 이미 심장 수술을 집도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 강울대뿐만 아니라, 전 의학계에서 손꼽히는 인재.‘진짜 실물을 보게 되다니...!’ 시연이 실습을 시작했을 때, 이준은 이미 해외 연수 중이었다.그런데 그가 1년 만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그녀는 가슴이 벌렁댔다. 이 순간, 직접 만나게 될 줄이야.“왜 그렇게 쳐다봐?” 변이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아, 아뇨... 그냥... 너무 신기해서요. 선배님, 정말 대단하시잖아요!”“오?” 변이준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눈썹을 살짝 올렸다. “시연 씨도 꽤 괜찮던데? 교수님이 그러시던데, 이번 의대생 중에 단독 진료도 보고, 응급 환자도 맡을 수 있는 사람은 시연 씨 하나뿐이라던데?”“에이... 선배님에 비하면 아직 멀었죠...”“그만, 그만!” 양석현 교수가 웃으며 두 사람을 제지했다. “둘 다 내 자랑스러운 제자야. 서로 띄워주기는 그만하라고.”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고 동시에 말했다. “네, 교수님.”“네, 교수님.”“앞으로 잘 지내봐. 이준이는 선배니까 시연이 좀 잘 챙겨주고, 시연은 후배니까 선배한테 많이 배워야 해.”“네, 교수님.” “네, 교수님.” 또다시 이구동성으로 대답이 돌아왔다.“가자, 자리 예약해놨어. 이준이가 점심 사준다니까 시연이도 같이 가자꾸나.” 양석현은 시계를 보고 외투를 챙기며 말했다.“네! 감사합니다, 교수님!”...훌륭한 선배
임신 중기로 접어들면서, 시연의 배는 눈에 띄게 불러왔다. 방광이 눌려서 그런지, 밤에 두세 번은 꼭 깨게 되었다. 그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잠에서 깨자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고유건... 아직도 안 왔어?’ 핸드폰을 집어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1시. 시연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유건의 술자리가 잦은 편이긴 해도, 결혼 후 이렇게 늦게까지 집에 안 들어온 적은 거의 없었다. ‘전화해 볼까...?’ 망설이던 그녀는 이내 핸드폰을 내려두었다. 대신 조심스레 방을 나서, 복도를 따라 서재로 향했다. 서재 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문틈 사이로 은은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그 공간은 이 집에서 오직 유건만 드나드는 곳.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그일 터였다. ‘이 시간까지 뭐 하는 거야... 자지도 않고.’ 시연은 문고리를 천천히 돌렸다. 사각거리는 조명 아래, 유건은 소파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테이블 위엔 반쯤 비운 와인병과 와인잔. 몸에서는 짙은 술 냄새가 풍겼다. ‘진짜 술꾼 같아...’ 취한 사람을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신 시연은 슬쩍 돌아서려 했다. 그 순간, 손목이 잡혔다.“여보.” 유건은 눈을 떴고,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날 보러 왔네? 걱정됐어? 보고 싶었어?” 그 웃음 속엔 왠지 모를 슬픔이 섞여 있었다. ‘왜... 저런 눈빛이지?’ “이렇게까지 마셨는데, 속은 좀 괜찮아요?” 시연은 코끝을 찌푸리며 물었다. “장소미 일 때문에 그래요? 불안해서...?”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소미의 일이, 유건을 흔들어 놓았을 가능성. “하...” 유건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피식 웃었다. “분위기 한번 잘 망치네.” 여긴 본가고, 둘은 부부였다. 유건이 붙잡은 손도 아내의 손. 그런데 이 타이밍에 시연이 굳이 다른 여자 이야기를 꺼내다니. 유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시연도 더
유건의 약속을 들은 시연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입을 열었다.“그럼... 사실대로 말할게요.” “처음에 계약 결혼을 수락한 건... 돈 때문이었어요. 우주 치료비가 필요해서.” “그리고 나중에 당신이 장소미의 남자친구라는 걸 알았죠... 이혼을 거부한 건, 복수였어요. 그 여자한테, 그 집안에... 복수하고 싶었어요. 그게 전부예요.”시연의 분홍빛 입술이 천천히 열리고 닫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유건의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 ‘정말... 복수였어...’예전에 시연이 병실에서 그랬다. 유건이 누굴 사랑하든, 상관하지 않을 거라고. 그 말이 인제야 명확하게 유건의 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듯했다‘그동안... 내가 느낀 시연이의 다정함은... 모두 연기였던 걸까?’‘아니, 내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걸까?’유건은 더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표정을 감췄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그런 방식으로 복수한다고? 좀 유치하지 않아?”“그렇죠, 유치하죠.”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하게 웃었다.‘결국 복수는커녕, 나 자신만 구역질 나게 했으니까.’그녀는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미안해요.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어요. 이혼 안 해준 것도, 당신을 이용한 것도... 그건 분명 내가 잘못한 거니까요.”그 한마디가 유건의 가슴 깊은 곳에 단번에 불을 밝혔다. ‘‘그동안’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은?’‘지금은... 나에 대한 감정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걸까?’유건은 묻고 싶었다. 정말, 정말로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무서웠다.그런 유건의 망설임을 모른 채, 시연은 조용히 물었다.“이제 다 알았으니까... 어쩔 건데요? 이혼할 거예요?”“뭐...?”그 순간, 유건의 표정이 무너졌다. 아무리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라 해도, 그 질문을 참을 수는 없을 터였다.‘이혼? 또 이혼? 이혼이 무슨 일상 대화야?’‘조금만 감정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다면, 두 번째도 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시연은 진심으로 무서웠다. 그리고... 또...‘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지...?’뭔가 꽉 막힌 듯한 느낌, 그리고 불쾌한 통증. 혹시 또 쓰러지기라도 할까 두려워진 시연은, 조용히 방으로 돌아가 누웠다. 하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유건과 나눴던 대화가 계속 맴돌았다. 특히 복수 때문에 이혼을 거부했다는 말. 그 말은 진심이었다.깜깜한 어둠 속, 시연은 가슴에 손을 얹고 속삭였다. “그렇지만... 결국, 난 지키지 못했어.” ‘난... 마음이 움직였으니까.’‘사랑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을... 좋아하게 돼버렸어.’ ‘내가 만든 덫에 내가 걸려든 거야. 자업자득이지.’그날 밤, 유건은 끝내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식탁에서 아침을 챙겨 먹었지만, 여전히 유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출근했나...?’ ‘어제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 두통도 없나 보네. 진짜 대단한 체력이다.’시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가방을 둘러매고 현관을 나섰다. 역시나 정기환이 대기 중이었다.“형수님.” 기환은 운전석에서 시연을 힐끔힐끔 보며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였다.“왜요...?” 시연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할 말이라도 있어요?”“아니요... 그게...” 기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혹시... 저한테 궁금한 거 없으세요?”“네...?” 시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없는데요? 왜요, 제가 뭘 물어야 하죠? 무슨 질문을 기다리는 거예요?”‘뭐야, 이건 또 무슨 희한한 대화야...’“아, 아니요... 그냥요. 하하.” 기환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조용히 운전대를 잡았다.강울대병원에 도착하자, 시연이 병동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기환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핸드폰을 꺼냈다. ‘이걸... 형님한테 뭐라고 보고해야
노은범이었다.“시연아.”시연보다 먼저, 은범이 담담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응, 오랜만이야.” 딱히 오래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은범은 또 눈에 띄게 말라 있었다. 매번 마주할 때마다, 그는 더 말라가고 있었다.‘왜 이렇게... 보기만 해도 마음이 복잡하지...?’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시연의 감정. 그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은범은 심재규 쪽을 힐끗 보더니, 늘 그렇듯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교수님이랑 아는 사이야. 근처에 볼일 있어서 잠깐 들른 거고. 이제 나가려던 참이었어.”‘정말 그게 다일까? 아니야, 분명 날 보러 온 거잖아.’하지만 시연은 굳이 그 사실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래? 그럼... 내가 배웅해 줄게.”“응, 좋아.” 두 사람은 마치 친구인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함께 별산장 밖으로 걸어 나왔다.은범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배로 향했다. “많이 나왔네.”“응, 이제 슬슬 티 나기 시작했어. 4개월 지나고부터 눈에 띄더니, 하루가 다르게 불러오는 느낌이야.”“그래... 참 좋다.” 은범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문득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잘 지내? 그 사람은... 너한테 잘해줘?”시연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든, 나쁘든... 이젠 내 몫이야. 너까지 이런 얘기 들어야 할 이유는 없잖아. 너... 상태도 안 좋은데.’정문 앞에 다다랐을 때, 은범은 걸음을 멈췄다. “여기까지만 데려다줘. 곧 우주 수업이 끝날 시간이잖아. 이만 돌아가.” “응, 잘 가.”“잘 있어.”시연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은범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가 돌아온 후에도, 우주는 아직 수업 중이었다....심재규는 시연을 보자 바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오늘이 마침 노 사장님의 진료 날이었어
햇살은 눈부시게 쏟아졌고, 하늘은 한 점 구름 없이 맑았다. 농구 코트 위, 남자들의 구호와 땀방울이 어우러진 뜨거운 풍경 속, 관중석의 친구들이 장난스럽게 소리쳤다.“은범이 파이팅!” “은범이, 잘생겼다!”“오늘은 구경꾼도 많네! 은범아, 여자애들이 저렇게 많은데 한 명도 눈에 안 들어와?” “야야, 우리 은범이 여자 친구 있잖아.”“아, 그냥 농담이지 뭐... 여기, 여자 친구는 안 왔잖아?”“저기 ‘법대 퀸’, 너 좋아한 지 꽤 됐지? 아빠가 대형 로펌 대표래. 솔직히 네 여친보다 집안이 몇 배는 좋잖아. 솔직히 말해봐, 흔들리지도 않아?”“그래, 시대가 변해도, 결국은 ‘분수에 맞는 집안’이 최고잖아.”“야, 그만해.” 은범이 결국 참지 못하고 수건을 내팽개쳤다. “끝나고 밥도 없어. 다들 꺼져.”“뭐야?!”“오늘 은범이의 한턱 기대했는데...”“야야, 시연이 얘기 꺼낸 너 때문이야! 은범이가 시연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서 그러냐?”“오늘의 죄인은 너로 정했다!”농구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정리할 때쯤, ‘법대 퀸’이라 불리는 여대생이 다가왔다. 손에 시원한 음료를 든 채, 수줍은 미소를 띠며.“은범아, 이거...”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은범은 그녀를 스치듯 지나쳐 버렸다. 남자의 시선은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하고 있었다.등에 백팩을 멘 채, 린넨 원피스를 입고 햇살을 받으며 다가오는... 시연.“우리 여친 왔네!”“흥!” 시연은 콧소리를 흘리며, 은범의 시선을 따라 ‘법대 퀸’을 슬쩍 훑었다. “내가 좀... 타이밍이 안 좋았나 보네?”‘질투 날 수밖에 없잖아. 저렇게 예쁘고, 잘 어울리데...’“무슨 소리야! 나, 이제 막 경기 끝났어. 못 봤지? 나 아까 진짜 멋있었어.” 은범은 웃으며 시연의 손을 잡았다.그제야 시연도 입꼬리를 올렸다. “물 마실래?”시연이 내민 물병을 보자 은범이 반갑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는 장난스럽게 손을 뒤로 뺐다.“이건 그냥 물이야
차가운 면도날이 혈관을 스쳤다. 피가 터지듯 솟구쳤다.은범은 미동도 없이 그 광경을 바라봤다. 점점 창백해지는 얼굴. ‘이상하다... 오히려... 편안해.’ ‘이대로 피가 다 빠지면, 이제... 끝이겠지.’그는 서서히 의자에 앉았다. 팔을 세면대 안으로 걸치고, 마치 아무 일 없는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해방이란 게 있다면, 이런 거 아닐까?’‘죽음은 단지 긴 수면일 뿐이야.’ ‘두렵지도 않아...’그리고 점점 몸이 식어갔다.은범의 의식이 아득해지고, 생각은 흐릿해지고 있었다.그때, 어디선가 급한 발소리, 그리고 울먹이는 목소리.“은범아! 은범아!!”강수희였다. 피범벅이 된 아들의 손목을 보는 순간, 그녀는 그대로 무너졌다.“으아아악... 은범아...!”어머니의 얼굴 위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재빨리 떨리는 손으로 겨우 핸드폰을 꺼내 119를 눌렀다.“제발요, 제 아들이에요! 지금 피를 너무 많이 흘려요...” “여기... 제발, 빨리 와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제발...!!”...병원.“어떻게 된 거야?! 은범이는...!” 노수철이 숨을 헐떡이며 응급실로 뛰어들었다.“아직 수술 중이에요...” 강수희의 눈은 완전히 부어올랐고, 손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우리 은범이가 왜...”“이모.” 조용히,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진성빈이었다. 은범과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온, 가장 가까운 친구.“성빈이?” 노수철이 인상을 찌푸렸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삼촌.” 성빈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말, 싫어하실 거 알아요. 하지만... 더는 참을 수가 없어요.” 강수희는 얼굴을 찡그리며 겨우 물었다. “무슨 말이든... 해줘, 제발.”“네...” 성빈은 잠시 말을 고르다, 이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이모, 은범이... 심각한 우울증 환자예요.”“뭐...?” 강수희와 노수철은 동시
“시연아, 나 M국 도착했어. 며칠은 적응해야 해서, 학교 등록은 좀 이따가 하려고...”“오늘은 눈이 왔어. M국 날씨는 G시보다 더 오락가락하고 있어. 어제는 반 소매 입었는데, 오늘은 눈이 내려...”“오늘 장 봐서 집에서 밥해 먹었어. 햄버거랑 치킨만 먹다 보니 몸이 좀 이상하더라...”“요리가 좀 익숙해지면, 나중에 너한테도 해줄게. 넌 교수가 될 거니까 아주 바쁠 거잖아. 내가 집안일도, 너도 챙길게.” 한 문장, 또 한 문장. 은범의 글씨를 따라가던 시연의 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눈물이 자꾸만 번졌다. ‘왜 이제야 보게 된 걸까...’ 시연의 심장이, 천천히, 무겁게 가라앉았다. ...“계속 답장이 없네. 아직도 화난 거야? 내가 갑작스럽게 떠난 건... 정말 어쩔 수 없었어. 우리 부모님이...” “지난번 내가 한 설명... 안 믿는 거야? 맹세할게. 단 한 마디도 거짓은 없어.” “시연아, 보고 싶어.” “난 언제나 진심이야. 그 마음은 단 한 번도 변한적이 없어. 너를, 그리고 우리를 배신한 적 없어.” “나, 오늘 전액 장학금 받았어! 너도 기뻐해 줄 거지?” “내 디자인이 공모전에서 상 받았어! 앞으로... 우리 집은 내가 잘 지켜낼 수 있을 거야.” “시연아, 날 기다려줘. 제발... 나 돌아갈게.” “너무 보고 싶다. 딱 한 번만, 연락해 줄래?” “내가 잘못했어. 넌... 절대 날 용서하지 않을 거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 점점, 시연은 더 이상 문장을 끝까지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아...!!!” 손으로 가슴을 꾹 누른 채, 시연은 오열했다. 이와 동시에 침대 위에 누운 은범을 바라보는 눈빛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서렸다. ‘난... 몰랐어.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 지난 3년 동안, 시연이 은범에게 가졌던 감정은 오직 하나... 증오였다. 약속을 어긴 은범에 대한, 자신을 버린 은범에 대한, 가차 없이 떠난 은범에 대한.
시연은 조용히 침대 곁에 앉았고, 모니터에 뜬 숫자들을 힐끗 봤다. 심박수, 산소포화도를 포함한 모든 상태가 아주 심각했다. “은범아... 나야, 시연이.” 물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시연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은범의 손 가까이 다가가, 살며시... 감쌌다. “은이야...” 갑자기 목이 메었다. “내가 왔어. 널 보러 왔어... 은이야...” 이어서 눈을 감자, 눈물이 쏟아졌다. “왜 이렇게 바보같이 굴었어... 아프면 말하지 그랬어. 그동안 혼자 견디느라... 많이 힘들었지?” “포기하지 마. 지금 여기서 끝내지 마. 다 괜찮아질 거야. 괜찮아질 거야.” “내가 곁에 있을게.” 시연은 계속 중얼거렸다. 우울증이 어떤 건지, 그녀는 의사지만 완전히 알 수 없었다. ‘내가 뭘 하면... 널 도울 수 있을까?’은범은 의식이 없는 상태였지만, 시연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가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녀는,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연아?” 문밖에 서 있던 강수희와 노수철이 놀라 그녀를 불렀다. “어디 가는 거니?” 지금 노수철 부부에게, 시연이 병실을 떠나는 건 곧 ‘희망’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연은 두 사람을 지나쳐, 병실 구석에 조용히 서 있던 정기환을 바라봤다. “기환 씨...” 그녀의 부름에 그가 다가왔다. “형수님, 무슨 일이세요?”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뒤적였다. “예전에... 지 사장님이... 제 이름으로 집을 하나 사주셨거든요. 그 집, 어딘지 알죠?” “네, 압니다.” 그녀는 집 열쇠를 꺼내 건넸다. “거기 서재 책상 왼쪽 서랍에, 천으로 된 가방이 하나 있어요. 그거 좀 가져다주세요.” 기환은 멈칫했다. ‘지금 내가 자리를 비웠다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가 선뜻 움직이지 못하자, 시연은 고개를 돌려 노수철 부부를 바라봤다.
이 광경에 시연은 숨이 턱 막혔다. “사모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 “그러게요, 사모님!” 시연뿐만 아니라, 나이 지긋한 왕성애마저 놀라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 사모님은 아직 어리세요. 갑자기 이러시면 놀라서 수명이 깎일지도 모른다고요!” “절대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강수희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서 일어나세요.” 왕성애는 불쾌하다는 듯이 입을 삐죽거렸다‘한밤중에, 그것도 울고불고하며 무릎까지 꿇다니... 대체 누구한테 겁을 주려는 거야?’ “아, 네...” 노수철이 강수희를 부축해 일으켰고, 강수희는 그 틈에 시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시연아, 미안해...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너무 급해서, 너무 막막해서 그랬어. 부탁이야... 우리 은범이 좀 살려줘.” ‘뭐...?’ 시연은 당황스러웠다. “은범이가... 왜요?” “은범이가...” 그 이름을 입에 올리자마자, 강수희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은범이가 손목을 그었어... 자살 시도를 했다고... 의사 말로는, 그냥... 살고 싶어 하지도 않는대. 시연아, 너밖에 없어. 은범이한테 남은 마지막 희망은 너뿐이야...” “맞아.” 노수철은 체면이고 뭐고 다 내려놓은 듯했다. “예전에 우리가 널 힘들게 했던 거 안다. 근데 은범이도... 결국 피해자잖니.” 시연은 이미 정신이 아득했다. 입술을 파르르 떨리며 말을 내뱉었다. “지금... 은범이는 어디 있어요?” “병원에 있어.” “어서 가요.” ‘지금은 묻고 따질 때가 아니야.’ 은범에게 우울증 있다는 거, 시연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손목을 그은 건... 처음이 아니었다. “안 돼요!” 갑자기 왕성애가 가로막았다. “사모님! 가시면 안 돼요!” “왜요?” 시연은 당황했다. 왕성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답답한 듯 말을 끌었다. “유건 도련님을 생각하셔야죠!” ‘고유건...’ 유건이 알게 된다면,
“어떻습니까, 교수님?” 강수희는 비틀거리며 다가가 물었다. 초조함이 전신을 감쌌고, 목소리도 떨렸다.의사는 깊게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출혈은 막았고 봉합은 완료했지만... 생명 징후가 매우 불안정합니다. 혹시 부모님이시라면, 자살 시도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노수철과 강수희는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절망과 자책, 무지의 공허함만이 흐를 뿐.의사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일단 병실로 옮겨 보겠습니다. 상황은 조금 더 지켜봐야 합니다.”...병실로 옮겨진 은범은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몸은 차갑고, 호흡은 희미했다.의사는 곁을 돌며 환자의 상태를 살핀 후, 다시 고개를 저었다. “생명 징후가 너무 약해요. 솔직히 말해서... 살겠다는 본인의 의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네요. 두 분... 부모로서... 정말 이유를 모르십니까?”‘살겠다는 의지가 없다’라는 말이, 비수처럼 강수희의 가슴에 꽂혔다. 의료는 기적을 바랄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마음이 꺾인 사람에겐 한없이 무력해지는 일이기도 했다.“방법... 방법이...” 강수희는 중얼거리며, 불현듯 남편의 팔을 움켜잡았다.“방법 있어요! 방법이 있어요, 분명히!”그리고 이내, 진성빈을 찾아갔다.“성빈아... 있어. 방법이 있어.” 강수희의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다.성빈은 바로 눈치를 챘다. 하지만 믿을 수 없어 되물었다. “설마... 시연이요?”“그래, 시연이.” 강수희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만이 은범이를 살릴 수 있어... 그 아이는... 은범이한테 약이야...”“이모...” 성빈은 난감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요. 시연이가 결혼했다는 거, 이모도 아시잖아요.”고씨 가문의 결혼식은 조용히 이루어졌지만, G시의 상류 사회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이제는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버린 시연이, 전 남자 친구를 보러 오는 일은 불가능에 가
차가운 면도날이 혈관을 스쳤다. 피가 터지듯 솟구쳤다.은범은 미동도 없이 그 광경을 바라봤다. 점점 창백해지는 얼굴. ‘이상하다... 오히려... 편안해.’ ‘이대로 피가 다 빠지면, 이제... 끝이겠지.’그는 서서히 의자에 앉았다. 팔을 세면대 안으로 걸치고, 마치 아무 일 없는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해방이란 게 있다면, 이런 거 아닐까?’‘죽음은 단지 긴 수면일 뿐이야.’ ‘두렵지도 않아...’그리고 점점 몸이 식어갔다.은범의 의식이 아득해지고, 생각은 흐릿해지고 있었다.그때, 어디선가 급한 발소리, 그리고 울먹이는 목소리.“은범아! 은범아!!”강수희였다. 피범벅이 된 아들의 손목을 보는 순간, 그녀는 그대로 무너졌다.“으아아악... 은범아...!”어머니의 얼굴 위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재빨리 떨리는 손으로 겨우 핸드폰을 꺼내 119를 눌렀다.“제발요, 제 아들이에요! 지금 피를 너무 많이 흘려요...” “여기... 제발, 빨리 와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제발...!!”...병원.“어떻게 된 거야?! 은범이는...!” 노수철이 숨을 헐떡이며 응급실로 뛰어들었다.“아직 수술 중이에요...” 강수희의 눈은 완전히 부어올랐고, 손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우리 은범이가 왜...”“이모.” 조용히,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진성빈이었다. 은범과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온, 가장 가까운 친구.“성빈이?” 노수철이 인상을 찌푸렸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삼촌.” 성빈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말, 싫어하실 거 알아요. 하지만... 더는 참을 수가 없어요.” 강수희는 얼굴을 찡그리며 겨우 물었다. “무슨 말이든... 해줘, 제발.”“네...” 성빈은 잠시 말을 고르다, 이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이모, 은범이... 심각한 우울증 환자예요.”“뭐...?” 강수희와 노수철은 동시
햇살은 눈부시게 쏟아졌고, 하늘은 한 점 구름 없이 맑았다. 농구 코트 위, 남자들의 구호와 땀방울이 어우러진 뜨거운 풍경 속, 관중석의 친구들이 장난스럽게 소리쳤다.“은범이 파이팅!” “은범이, 잘생겼다!”“오늘은 구경꾼도 많네! 은범아, 여자애들이 저렇게 많은데 한 명도 눈에 안 들어와?” “야야, 우리 은범이 여자 친구 있잖아.”“아, 그냥 농담이지 뭐... 여기, 여자 친구는 안 왔잖아?”“저기 ‘법대 퀸’, 너 좋아한 지 꽤 됐지? 아빠가 대형 로펌 대표래. 솔직히 네 여친보다 집안이 몇 배는 좋잖아. 솔직히 말해봐, 흔들리지도 않아?”“그래, 시대가 변해도, 결국은 ‘분수에 맞는 집안’이 최고잖아.”“야, 그만해.” 은범이 결국 참지 못하고 수건을 내팽개쳤다. “끝나고 밥도 없어. 다들 꺼져.”“뭐야?!”“오늘 은범이의 한턱 기대했는데...”“야야, 시연이 얘기 꺼낸 너 때문이야! 은범이가 시연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서 그러냐?”“오늘의 죄인은 너로 정했다!”농구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정리할 때쯤, ‘법대 퀸’이라 불리는 여대생이 다가왔다. 손에 시원한 음료를 든 채, 수줍은 미소를 띠며.“은범아, 이거...”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은범은 그녀를 스치듯 지나쳐 버렸다. 남자의 시선은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하고 있었다.등에 백팩을 멘 채, 린넨 원피스를 입고 햇살을 받으며 다가오는... 시연.“우리 여친 왔네!”“흥!” 시연은 콧소리를 흘리며, 은범의 시선을 따라 ‘법대 퀸’을 슬쩍 훑었다. “내가 좀... 타이밍이 안 좋았나 보네?”‘질투 날 수밖에 없잖아. 저렇게 예쁘고, 잘 어울리데...’“무슨 소리야! 나, 이제 막 경기 끝났어. 못 봤지? 나 아까 진짜 멋있었어.” 은범은 웃으며 시연의 손을 잡았다.그제야 시연도 입꼬리를 올렸다. “물 마실래?”시연이 내민 물병을 보자 은범이 반갑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는 장난스럽게 손을 뒤로 뺐다.“이건 그냥 물이야
노은범이었다.“시연아.”시연보다 먼저, 은범이 담담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응, 오랜만이야.” 딱히 오래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은범은 또 눈에 띄게 말라 있었다. 매번 마주할 때마다, 그는 더 말라가고 있었다.‘왜 이렇게... 보기만 해도 마음이 복잡하지...?’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시연의 감정. 그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은범은 심재규 쪽을 힐끗 보더니, 늘 그렇듯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교수님이랑 아는 사이야. 근처에 볼일 있어서 잠깐 들른 거고. 이제 나가려던 참이었어.”‘정말 그게 다일까? 아니야, 분명 날 보러 온 거잖아.’하지만 시연은 굳이 그 사실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래? 그럼... 내가 배웅해 줄게.”“응, 좋아.” 두 사람은 마치 친구인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함께 별산장 밖으로 걸어 나왔다.은범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배로 향했다. “많이 나왔네.”“응, 이제 슬슬 티 나기 시작했어. 4개월 지나고부터 눈에 띄더니, 하루가 다르게 불러오는 느낌이야.”“그래... 참 좋다.” 은범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문득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잘 지내? 그 사람은... 너한테 잘해줘?”시연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든, 나쁘든... 이젠 내 몫이야. 너까지 이런 얘기 들어야 할 이유는 없잖아. 너... 상태도 안 좋은데.’정문 앞에 다다랐을 때, 은범은 걸음을 멈췄다. “여기까지만 데려다줘. 곧 우주 수업이 끝날 시간이잖아. 이만 돌아가.” “응, 잘 가.”“잘 있어.”시연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은범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가 돌아온 후에도, 우주는 아직 수업 중이었다....심재규는 시연을 보자 바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오늘이 마침 노 사장님의 진료 날이었어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다면, 두 번째도 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시연은 진심으로 무서웠다. 그리고... 또...‘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지...?’뭔가 꽉 막힌 듯한 느낌, 그리고 불쾌한 통증. 혹시 또 쓰러지기라도 할까 두려워진 시연은, 조용히 방으로 돌아가 누웠다. 하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유건과 나눴던 대화가 계속 맴돌았다. 특히 복수 때문에 이혼을 거부했다는 말. 그 말은 진심이었다.깜깜한 어둠 속, 시연은 가슴에 손을 얹고 속삭였다. “그렇지만... 결국, 난 지키지 못했어.” ‘난... 마음이 움직였으니까.’‘사랑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을... 좋아하게 돼버렸어.’ ‘내가 만든 덫에 내가 걸려든 거야. 자업자득이지.’그날 밤, 유건은 끝내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식탁에서 아침을 챙겨 먹었지만, 여전히 유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출근했나...?’ ‘어제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 두통도 없나 보네. 진짜 대단한 체력이다.’시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가방을 둘러매고 현관을 나섰다. 역시나 정기환이 대기 중이었다.“형수님.” 기환은 운전석에서 시연을 힐끔힐끔 보며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였다.“왜요...?” 시연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할 말이라도 있어요?”“아니요... 그게...” 기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혹시... 저한테 궁금한 거 없으세요?”“네...?” 시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없는데요? 왜요, 제가 뭘 물어야 하죠? 무슨 질문을 기다리는 거예요?”‘뭐야, 이건 또 무슨 희한한 대화야...’“아, 아니요... 그냥요. 하하.” 기환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조용히 운전대를 잡았다.강울대병원에 도착하자, 시연이 병동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기환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핸드폰을 꺼냈다. ‘이걸... 형님한테 뭐라고 보고해야
유건의 약속을 들은 시연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입을 열었다.“그럼... 사실대로 말할게요.” “처음에 계약 결혼을 수락한 건... 돈 때문이었어요. 우주 치료비가 필요해서.” “그리고 나중에 당신이 장소미의 남자친구라는 걸 알았죠... 이혼을 거부한 건, 복수였어요. 그 여자한테, 그 집안에... 복수하고 싶었어요. 그게 전부예요.”시연의 분홍빛 입술이 천천히 열리고 닫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유건의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 ‘정말... 복수였어...’예전에 시연이 병실에서 그랬다. 유건이 누굴 사랑하든, 상관하지 않을 거라고. 그 말이 인제야 명확하게 유건의 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듯했다‘그동안... 내가 느낀 시연이의 다정함은... 모두 연기였던 걸까?’‘아니, 내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걸까?’유건은 더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표정을 감췄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그런 방식으로 복수한다고? 좀 유치하지 않아?”“그렇죠, 유치하죠.”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하게 웃었다.‘결국 복수는커녕, 나 자신만 구역질 나게 했으니까.’그녀는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미안해요.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어요. 이혼 안 해준 것도, 당신을 이용한 것도... 그건 분명 내가 잘못한 거니까요.”그 한마디가 유건의 가슴 깊은 곳에 단번에 불을 밝혔다. ‘‘그동안’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은?’‘지금은... 나에 대한 감정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걸까?’유건은 묻고 싶었다. 정말, 정말로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무서웠다.그런 유건의 망설임을 모른 채, 시연은 조용히 물었다.“이제 다 알았으니까... 어쩔 건데요? 이혼할 거예요?”“뭐...?”그 순간, 유건의 표정이 무너졌다. 아무리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라 해도, 그 질문을 참을 수는 없을 터였다.‘이혼? 또 이혼? 이혼이 무슨 일상 대화야?’‘조금만 감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