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도준은 물을 끓이며 입을 열었다. “그 꼬맹이도 있잖아. 아까 통역해 달라고 부탁했어.” “동의 하던가요?” “응.” 권하윤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어떻게 설득했어요? 다솜이가 도준 씨 무서워하는 거 아니었어요?” 도준은 물 온도를 체크하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도와주면 돈 주겠다고 했거든.” “그렇게 간단하다고요?” 하윤은 도준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면?” 도준은 하윤의 머리를 꾹 눌렀다. “동기 부여가 되면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는 게 사람 아니야?” “…….” ‘그럼 내가 어제 인내심 있게 설득하려 한 건 헛수고였다는 거네…….’ ……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다솜은 하윤과 도준을 데리고 주림의 외할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이장의 말대로 어제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고 등이 휜 할아버지 한 분이 마당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주림의 외할아버지 주민수였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저 주림 선배 후배인데, 혹시 선배 여기 있나요?” 하윤의 인삿말에 주민수는 경계 가득한 표정을 짓더니 연신 손을 저으며 사람을 쫓아냈다. 그 모습에 다솜이 설명했다. “할아버지는 귀가 안 들려서 그렇게 말하면 못 들어요.” 하지만 하윤이 보기에는 주민수가 단순히 안 들리는 게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자기가 낯선 사람이라 상대하기 싫어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하윤은 얼른 다솜에게 부탁했다. “그럼 주림 선배가 이 마을에 있는지 언니 대신 물어봐 줄래?” 다솜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하윤의 물음을 곧이곧대로 전했다. 물론 사투리가 섞인 말투와 억양으로. 다행히 주민수는 다솜을 그나마 살갑게 대하며 귀담아듣는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한참 듣는가 싶더니 이내 손을 저으며 사투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다솜은 이내 하윤에게 그 말을 전했다. “주림 오빠는 오래 전에 마을을 떠났대요.” ‘주림 선배가 떠났다면 단서가 또 끊기는데.’ 하윤은 괜히 맥이 빠져 눈살을 찌푸렸다. 만약 엄석규가 그런 일
민도준은 가만 있지 못하는 하윤의 손을 꽉 잡았다. “이리 와. 그렇게 대놓고 가는 건 나 왔소 하고 알리는 거랑 뭐가 달라?” 잔뜩 흥분해 있던 권하윤은 그제야 냉정을 되찾고 도둑질하는 사람처럼 목솔리를 한껏 낮추고 속삭였다. “그럼 어떡해요?” 도준은 하윤이 귀여운 듯 잡아 끌어 품에 안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 “숨을 곳 찾아서 기다려야지. 점심 때 그 할아버지가 어디로 가는지.” 하윤은 도준의 가슴에 고개를 기대며 문질렀다. “그런데 저 졸린데 어떡해요?” “하루 종일 졸렸다 배고팠다 가지가지 하네.” 그 말에 하윤은 불만 섞인 말투로 투덜거렸다. “그게 어떻게 제 탓이에요?” 며칠 동안 길을 떠나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졸린 건데, 매일 밤 사람을 괴롭히던 당사자가 오히려 미안한 기색도 없자 하윤은 바로 불만을 내비쳤다. 하지만 도준은 오히려 하윤의 코를 잡아당기며 이유를 댔다. “전에 빚진 거 갚아야 할 거 아니야?” “대체 얼마나 더 갚아야 하는데요! 게다가 제가 해원에 온 게 고작 며칠인데, 이렇게 갚다가는 제가 죽을까 봐 겁나요.” 잔뜩 화가 난 듯한 하윤의 모습에 도준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 졸린다며? 잠깐 빈 곳에서 눈 붙여.” 도준이 말한 곳은 다름 아닌 주민수네 집 뒤에 있는 밭이었다. 가을이라 밭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게다가 마침 해가 가장 뜨거울 무렵이라 도준은 그늘진 곳을 찾아 자기 다리를 툭툭 두드렸다. “자, 여기 누워 눈 좀 붙여.” 하윤은 싫은 티를 팍팍 내며 바닥을 둘러봤다. “여기 누우면 제 옷 더러워져요.” 그 말에 도준은 피식 웃으며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자기 외투를 바닥에 깔았다. “이렇게 하면 됐지?” 그제야 하윤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는 듯이 도준의 다리에 누웠다. 하윤이 눕자 도준의 손이 하윤의 허리를 둘렀고 따뜻한 햇살이 하윤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바람은 흙내음도 풀냄새를 싣고 살살 불어왔다. 물론 좋은 냄새는 아니었지만 싱그럽고 편안했다
신장의 우세로 민도준은 손 쉽게 담을 넘었지만 권하윤을 잡아당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하윤의 옷이 찢어지기까지 했다. 그 시각, 마당은 텅 비어 있었고 방문도 굳게 잠겨 있었다. 게다가 가장 특별한 것은 집 인테리어를 바꿨는지 문은 도난 방지를 하는 철문으로 되어 있었다. 햇빛을 오래 받은 탓에 하윤은 뒤통수가 찌근거지만 창문에 찰싹 붙어 두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 안쪽을 들여다봤다. “우리 어떻게 들어가요?” 도준은 바닥에 있는 삽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비켜, 얼굴에 스크래치라도 생기면 안 되니까.” 하윤이 얼른 옆으로 몸을 피하자 도준은 삽을 나무로 된 창문틀에 끼워 넣더니 두 번 만에 창문을 떼어내 버렸다. 하지만 창문이 너무 작은 탓에 도준의 덩치로 들어가는 것은 무리였다. 그때 하윤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제가 들어가서 문 열어줄게요.” 날씬한 하윤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나마 쉬워 보였다. 하윤이 날렵하게 안으로 상체를 밀어 넣자 도준은 ‘친절하게’ 하윤의 엉덩이를 받쳐 주었다. “조심해, 넘어지지 말고.” 이미 몸을 반쯤 안으로 넣은 데다 소리를 지를 수 없는 상황이라 하윤은 발을 구르며 도준을 차버렸다. 다행히 그저 잠깐 장난 치는 것으로 끝낸 도준은 하윤을 도와주고 나서 바로 손을 뗐다. 이윽고 안으로 들어 간 하윤이 얼른 방 문을 열었다. “얼른 들어와요.” 문 틈 사이로 고개를 삐죽 내민 채 도준을 향해 손을 흔드는 히윤의 모습은 영락없는 도둑이었다. 하윤은 안으로 들어가면 주림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안에는 주림은커녕 주민수조차 보이지 않았다. 방을 통해 뒤뜰을 찾아 낸 하윤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낮게 속삭였다. “왜 사람이 없지? 설마 그 할아버지가 주림 선배를 데리고 도망간 건 아니겠죠?” 그때, 뒤뜰을 빙 둘러보던 도준의 발이 바닥에 삐죽 나온 무언가에 걸렸다. “지하실이 있어.” 하윤이 말하려는 찰나, 도준은 하윤을 끌어당겨 문 뒤에 숨었고 다음 순간 나무로 된
권하윤은 손전등으로 안을 비치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도준 씨, 조심해요!” 하지만 쥐구멍처럼 작은 곳을 빙 둘러본 민도준은 하윤의 걱정이 쓸데없다고 느껴졌다. 물론 그런 걱정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 구멍은 다름 아닌 김치나 채소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안에는 식사를 할 수 있는 테이블과 한 사람이 잘 수 있는 침대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공간이 많이 협소했다. 그 시각, 침대에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는 핏기 하나 없었고, 두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 “주림 선배?” “선배?” 주림은 위층으로 올라온 뒤에도 여전히 바깥세상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고작 2년이 지난 사이 주림은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이목구비는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예전의 생기발랄하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치 좀비나 다름없었다. 사실 예전에 주림은 이성호를 가장 속 썩이는 학생이었다. 그건 주림의 욱하는 성격도 한 몫 했지만 실패를 맛보기 전에는 절대 뜻을 굽히지 않는 고집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성호를 가장 닮은 학생이기도 했다. 주림은 전문적인 분야에서만큼은 교수인 이성호와 얼굴을 붉히며 따싸울 정도로 뜻을 굽히지 않았고, 공연하기 전 이성호의 피아노에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나서서 다른 사람에게 피아노를 빌리려고 뛰어다니는 제자였다. 게다가 공연이 끝나면 일꾼을 불러 그 무거운 피아노를 직접 운반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 보다……. 이성호의 딸인 하윤조차 이성호를 의심할 때, 유일하게 자기의 스승을 믿고 심지어 본인의 미래까지 걸고 이성호의 억울함을 대신 호소했다. 하지만 이 시각 지하실에서 영혼 없는 사람처럼 세월을 보낸 주림을 보자 하윤의 눈시울은 이내 촉촉해졌다. “주림 선배, 저 이성호의 딸, 이시윤이에요. 설마 잊은 거예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 지경이 됐어요?” 하윤이 아무리 불러봐
주림의 증상은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게다가 주림이 이렇게 변한 건 고작 2달 전이라고 한다. 주민수는 마당에 앉아 주림을 힐끗 바라보더니 회억에 잠겼다. “어느 날 내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얘가 글쎄 짐을 싸고 있더라니까.” 그때는 주림이 지하실에서 생활한지 한참 되는 때였다. 지금껏 한 번도 밖에 나오지 않던 손자가 밖으로 나오자 주민수는 주림이 괜찮아진 줄 알고 기뻐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장 짐을 싸서 마을을 떠나야 한다며 재촉하지 뭔가.” “그러면 혹시 어디로 가자고 말한 적은 있나요?” 하윤의 질문에 주민수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 그저 누군가 왔다고 같은 말만 반복하며 나더러 빨리 도망치라고 하더라고.”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떠나지 못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주민수의 다리가 안 좋아 고생을 견딜 수 없어서였고, 다른 한 가지는 지금껏 지내오던 곳을 떠나 다른 곳에 또 뿌리를 내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날을 회상하자 주민수는 후회막심했다. “주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떠나는 건데.” 그날 주민수를 설득하지 못한 주림은 한참 동안 마당에 앉아 있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주민수가 신경을 딴 곳에 팔고 있던 사이 주림은 사라져 버렸다. 항상 주림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던 주민수는 손자에게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까 봐 조바심이 났다. 이에 주위를 하루 종일 둘러본 끝에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주림이 지하실에 쓰러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주림이 정신을 차리고 나서부터 저렇게 됐다네.” 주민수의 말을 듣던 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주민수의 말에 따르면, 주림이 이상 증세를 보인 두 번 모두 누군가 있다는 말을 했다. ‘대체 누구지? 누구길래 주림 선배가 그렇게 무서워했던 거지?’ 멍하니 앉아 있는 주림을 보던 하윤은 도준을 잡아당겼다. 이윽고 얼마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하윤이 낮게 속삭였다. “저 주림 선배 데려가고 싶어요.” 도준은 하윤을 약 2초간
주민수는 민도준과 권하윤이 주림을 데리고 가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지만, 먼 곳에서 주림을 찾으러 일부러 여기까지 왔다는 말에 집에 하룻밤 머물도록 했다. 어렵게 얻은 기회에 하윤은 주민수를 설득할 생각에 바로 동의했다. 이윽고 주민수가 저녁을 하는 동안, 하윤은 도준과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방을 가리키며 눈빛을 보내던 하윤은 손가락으로 2를 가리키며 속삭였다. “어떻게 생각해요?” “뭐야? 이젠 사람까지 훔치려는 거야?” 눈썹을 치켜 올리며 비아냥대는 도준의 태도에 하윤은 끝까지 부정했다. “훔치다라니요? 말이 너무 심하네, 저는 주림 선배를 도와주려는 것뿐이에요.” 이윽고 목소리를 한껏 낮춘 뒤 말을 이었다. “우리 밤에 몰래 주림 선배를 데리고 도망치는 게 어때요?” 하지만 하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준이 하윤의 이마를 꾹 밀었다. “나를 따라 나쁜 짓을 배우려고?”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는 말 몰라요?” 하윤이 이마를 부여잡으며 투덜거리자 도준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물론 생각은 이렇게 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좋은 방법은 아닌지라 하윤은 여전히 주민수가 동의하기를 바랐다. 이에 저녁식사가 끝난 뒤, 하윤은 또다시 주민수를 찾아가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며 그를 회유하려 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자식 얘기를 입에 달고 사는 건 인지상정. 주민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심지어 말끝마다 주림을 언급했다. 그 덕에 알게 된 사실은, 주림이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는 거다. 다른 어린애들이 진흙으로 놀고 있을 때 주림은 물 담은 그릇으로 곡을 연주했다고. 주씨 집안은 가정 형편이 썩 좋은 것은 아닌 데다 주림의 어머니 혼자 식구를 돌보고 있었기에 가족들은 주림이 음악을 배우는 것보다 기술을 배우는 것을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집이 센 주림은 전자 피아노를 사기 위해 어린 나이에 어른들을 따라 약재를 캐러 깊은 산속에 들어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주림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자 주민수의 얼굴은 부드러워졌다. “고작 10
주민수가 옷을 깁는 동안 권하윤은 주림을 보러 갔다. 뒤뜰에 도착한 하윤은 민도준이 있는 방을 힐끗거리다가 도준이 전화를 받느라 자기 쪽에 눈길을 돌리지 않자 그제야 안심하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왠지 모르겠지만 하윤은 도준이 주림에 대한 태도가 안 좋다는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때문에 자기가 주림과 단둘이 만나는 걸 도준이 거절할 거라고 생각하고는 무의식적으로 도준의 눈을 피했다. 이에 하윤은 계단을 내려갈 때도 소리 내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행동했다. 지하실에는 전등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 대신 배터리가 필요한 탁상등이 작은 방을 비추고 있었다. 주림이 얇은 옷을 입은 채로 침대 끝에 앉아 있는 것을 보자 하윤은 저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거렸다. “주림 선배, 저 선배 보러 왔어요. 지난 2년 동안 계속 경성에 있느라 선배한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몰랐어요. 아빠를 대신해 고맙다는 말 하고 싶어요.” “참, 그리고 걱정하지 마요. 저희 아빠가 이제는 억울함을 풀었어요. 아빠한테 누명을 씌운 사람도 벌을 받았으니 하늘에서 기뻐하실 거예요…….” 잘 알고 지내던 사람을 눈 앞에서 보니 하윤은 저도 모르게 옛 추억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주림과 만났을 때만 해도 콘서트 홀이었는데. 이성호는 엄격한 스승이지만 기회만 되면 제자들을 데리고 무대에 올랐고, 자기 제자들에게 무대에 오를 기회를 만들어 주려고 애썼다. 그리고 주림과 만난 마지막날, 주림은 평소 연습하던 연주 방식을 버리고 과감하게 새로 해석하여 연주한 덕에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그 일로 이성호는 보고도 없이 스스로 결정을 내린 주림의 행동에 화를 내면서도 주림 대신 기뻐 어쩔 줄 몰라했다. 그때 이승우가 나서서 일을 원만하게 해결한 덕에 일은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이승우는 이성호를 대신해 주림을 꾸짖는 척하다가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가 대신 욕했으니 아버지는 칭찬만 하면 돼요.” 그때 구경하고 있던 선배들도 주림의 목을 조르는 척하며 끼어들었다. “만약
잠깐 사이, 권하윤은 주림이 방금 정신이 돌아온 사실을 숨기려고 결심하고는 일부러 화난 척 투덜거렸다. “선배가 이런데 어쩜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너무 인간성 없는 발언 아니에요?” 지하실은 산소가 부족한 탓에 점점 답답해난 하윤은 심지어 불안해지기까지 했다. 특히 자기를 꿰뚫어볼 것만 같은 민도준의 눈빛에 하윤은 압박감이 들어 모든 것을 사실대로 털어놓고 싶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이 평화로울 때, 도준의 통제욕은 오히려 하윤에게 도움을 주지만 하윤이 도준에게 무언가 숨기는 일이 있을 때는 자꾸만 숨을 곳을 찾고 싶어진다. 도준의 강압적인 눈빛에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려던 찰나, 도준이 갑자기 손을 들었다. 하윤은 도준의 동작에 놀라 몸을 피했지만 도준은 그걸 보지 못한 것처럼 하윤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도준은 꽉 움켜쥐고 있던 하윤의 주먹을 억지로 펴면서 굳은살이 박힌 손으로 하윤의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혼자 높은 곳을 오르다가 떨어지면 어떡하려고 그래?” 여상스러운 도준의 표정에서 화난 기색을 보아내지 못하자 하윤은 약간 안도했다. “이게 뭐 그리 높다고. 이보다 더 높으면 저도 혼자 안 왔죠.” 먼지 묻은 손이 깨끗해지자 하윤은 손을 뒤로 뺐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도준이 하윤의 팔을 잡아 자기 품속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이윽고 허리를 감은 손 때문에 서로 꼭 붙어 있게 되자 하윤의 심장은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하윤은 너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혼란은 턱이 잡히는 순간 더욱 절정에 치달았다. 이에 고개를 홱 돌리자 남자의 숨결이 볼에 떨어졌다. “왜? 만지지도 못해?” 하윤은 뒤에 있는 주림을 힐끗거렸다. 다른 사람도 있는 곳에서 이토록 다정하게 구는 게 하윤은 부끄러웠다. 그것도 아버지의 제자 앞이라 부끄러움음 배가 되었다. 이에 하윤은 도준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다른 사람도 있잖아요.” 도준은 화를 내는 대신 하윤의 턱선을 따라 손을 쓸어 올리더니 말캉한 하윤의 귓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