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사이, 권하윤은 주림이 방금 정신이 돌아온 사실을 숨기려고 결심하고는 일부러 화난 척 투덜거렸다. “선배가 이런데 어쩜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너무 인간성 없는 발언 아니에요?” 지하실은 산소가 부족한 탓에 점점 답답해난 하윤은 심지어 불안해지기까지 했다. 특히 자기를 꿰뚫어볼 것만 같은 민도준의 눈빛에 하윤은 압박감이 들어 모든 것을 사실대로 털어놓고 싶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이 평화로울 때, 도준의 통제욕은 오히려 하윤에게 도움을 주지만 하윤이 도준에게 무언가 숨기는 일이 있을 때는 자꾸만 숨을 곳을 찾고 싶어진다. 도준의 강압적인 눈빛에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려던 찰나, 도준이 갑자기 손을 들었다. 하윤은 도준의 동작에 놀라 몸을 피했지만 도준은 그걸 보지 못한 것처럼 하윤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도준은 꽉 움켜쥐고 있던 하윤의 주먹을 억지로 펴면서 굳은살이 박힌 손으로 하윤의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혼자 높은 곳을 오르다가 떨어지면 어떡하려고 그래?” 여상스러운 도준의 표정에서 화난 기색을 보아내지 못하자 하윤은 약간 안도했다. “이게 뭐 그리 높다고. 이보다 더 높으면 저도 혼자 안 왔죠.” 먼지 묻은 손이 깨끗해지자 하윤은 손을 뒤로 뺐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도준이 하윤의 팔을 잡아 자기 품속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이윽고 허리를 감은 손 때문에 서로 꼭 붙어 있게 되자 하윤의 심장은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하윤은 너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혼란은 턱이 잡히는 순간 더욱 절정에 치달았다. 이에 고개를 홱 돌리자 남자의 숨결이 볼에 떨어졌다. “왜? 만지지도 못해?” 하윤은 뒤에 있는 주림을 힐끗거렸다. 다른 사람도 있는 곳에서 이토록 다정하게 구는 게 하윤은 부끄러웠다. 그것도 아버지의 제자 앞이라 부끄러움음 배가 되었다. 이에 하윤은 도준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다른 사람도 있잖아요.” 도준은 화를 내는 대신 하윤의 턱선을 따라 손을 쓸어 올리더니 말캉한 하윤의 귓불
좁은 공간에서 권하윤은 깊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주림 선배가 아버지를 위해 그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선배가 내가 원하는 단서를 갖고 있든 아니든 안전을 보장해 줘야 해.’ 사실 하윤은 주림과 주민수를 데리고 함께 떠날 생각이었다. 민도준이 있으면 두 사람의 안전은 무조건 보장된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현재 상황으로 놓고 볼 때, 주림은 도준을 믿지 않을뿐만 아니라 경계하고 있다. ‘선배와 할아버지를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순간 하윤은 갑자기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던을 떠올렸다. 주림을 던에게 맡기는 것은 그나마 괜찮은 선택이다. 던에게 부탁해 주림이 아버지의 죽음에 관해 알고 있는지 조사할 수 있는 동시에 던의 신분을 이용해 두 사람을 해외로 이송할 수 있으니까. ‘그래, 이렇게 해야겠어!’ 하윤은 몰래 들고 온 핸드폰을 꺼내들었지만 다음 계획은 그대로 무산이 되고 말았다. [신호 없음]이라는 네 글자가 하윤의 아름다운 환상을 산산히 부셔버렸다. 하윤이 핸드폰을 들고 신호를 찾고 있을 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안에서 뭘 하고 있길래 아직도 안 나와? 다 씻었으면 그만 나오지.” 하윤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트릴 뻔했다. 다행히 빠른 반응 덕에 핸드폰을 사수한 하윤은 갈아 입은 옷을 챙겨 문을 열었다. 뜨거운 수증기와 향긋한 비누향이 순간 밖으로 파졌다. 그 순간, 하윤은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먼저 입을 열었다. “여자들은 원래 샤워 오래 하거든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재촛하기는.” 하윤의 작은 볼은 열기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물기가 남아 있는 긴 머리카락이 어깨 위에 드리워 옷감을 점점 적시고 있었다. 도준은 하윤을 위아래로 훑더니 재밌는 듯 입을 열었다. “좋아, 재촉하지 않을게. 내가 비누칠이라도 더 해줄까?” “싫어요.” 하윤은 도준이 뻗은 손을 피하며 거절다. ……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리자 하윤은 곧장 창가로 달려가 신호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정
권하윤은 손에 힘을 주지 않고 가볍게 민도준의 머리를 닦아주었다. 부드럽지 않던 수건은 물기를 머금고 점점 부드러워졌고 남자의 머리가락을 스치며 점점 젖어 들었다. 하지만 치명적인 상처를 낼 수 있는 머리가 다른 사람의 손에 닿은 탓인지 도준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특히 도준의 머리를 닦아주려고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를 선점하고 있는 하윤 때문에 도준은 불쾌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도 하윤의 손이 두피를 스칠 때의 촉감이 너무 부드러워 위협감이 아닌 야릇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하지만 주림의 일을 생각하느라 하윤은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하윤이 눈치챘을 때 손은 이미 꿈쩍도 할 수 붙잡혀 중심을 잃은 하윤이 도준의 등에 넘어졌다. “뭐 하는 거예요? 지금 머리 닦아주고 있잖아요.” “다른 곳도 닦아주면 좋겠는데.” 도준의 말에 하윤은 귀밑까지 달아올랐다. “저리 비켜요.” 하윤은 화를 내며 도준을 밀어버리려고 했지만 너른 등 위에 엎드려 있는 느낌이 너무 좋아 쉽사리 말어내지 못했다. 쩍 벌러진 어깨에서부터 허리까지 이어진 라인은 움직이지 않아도 힘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윤은 두 팔을 도준의 목을 꼭 감았다. 심장이 쿵쾅댈 때마다 심장을 감싼 살갗이 따라 오르내렸고 마치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처럼 남자의 등에 붙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심장 박동 소리에 하윤은 점점 긴장이 풀어졌다. ‘도준 씨도 너무 무서운 건 아닌데.’ 주림이 도준을 알지 못하지만 하윤은 도준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주림에게 도준이 어떤 사람인지 잘 설명해줄 수 있었다. 더욱이 이미 관계를 확인한 지금, 하윤은 도준이 자기를 해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결론을 짓자 마음속에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이 덜어진 듯 한결 편해졌다. 이에 하윤은 도준의 등에 더 바싹 몸을 붙인 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던 그때,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주림은 어떻게 할 거야?”
권하윤은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반짝이는 눈으로 민도준을 바라봤다. 마치 다이너마이트를 분해하는 것처럼 긴장되는 상황에 하윤은 심장이 쪼그라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어느 선을 잘라야 살수 있는지 하윤에게는 아직 미지수였으니까. 솔직히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믿음도 따라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하윤은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도준을 사랑할수는 있어도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사람의 현재와 과거를 모두 사랑하는 것이지만 믿음은 자기의 불확실한 미래까지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윤은 도박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일에 신중을 가하여 아무런 위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진심을 내비치는 사람이다. 하윤은 자기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알고 있지만 이 싸움에서 절대 지면 안 되는 게 하윤이 처한 현실이기도 하다. 권하윤이라는 탈을 쓴 채 허송세월을 보내는 동안 하윤은 이미 용기를 잃었다. 게다가 지금은 자기뿐만 아니라 주림의 안전까지 내걸어야 하니 하윤에게는 어려운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오랜 고민 끝에 하윤은 끝내 자기 생각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사실 주림 선배를 던 씨한테 맡기고 싶어요. 던 씨한테 부탁해서 주림 선배를 해외로 이송했으면 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기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하윤은 도준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방이 어두운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볼 수 없어서 도준의 반응을 판단할 수조차 없었다. 하윤은 손을 더듬으며 도준의 팔을 잡았다. “화났어요?” “하.” 의미를 알 수 없는 짤막한 웃음이 터져 나오는 동시에 하윤은 도준의 팔을 놓치고 말았다. “화나냐고? 내가 화 날 거 뭐 있어? 하윤 씨가 나보다 남을 더 믿는 것에 화를 낼까? 아니면 또 거짓말을 한 것에 화를 낼까?” 웃으며 반문하는 도준의 모습은 왠지 섬뜩하게 느껴졌다. 분명 화를 내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하윤은 주위의 공기가 차가워졌다는 느낌이 들어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아니에요.
이런 혼란 속에서 민도준은 한가롭게 흔들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하윤의 목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려 능청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아, 일어났어?” 주림과 주민수가 헬기 안으로 끌려가자 하윤은 다급하게 앞으로 달려갔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죠?” “급할 거 없어.” 도준은 땅콩 껍질을 손으로 갈라 땅콩 하나를 입 안에 넣었다. “하윤 씨가 힘들까 봐 부담을 나누는 거잖아.” 주민수는 나이 든 몸으로 젊은 경호원을 당해내지 못하고 끝내 헬기 안으로 끌려갔다. “잠깐만요. 지금 할아버지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예요?” 헬기 문이 닫히려고 하자 하윤은 얼른 막아서려고 앞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팔을 세게 잡아당기는 힘 때문에 발걸음을 멈춘 하윤은 발걸음을 멈춘 채 두 사람이 헬기 안으로 끌려가는 걸 눈 뜨고 볼 수밖에 없었다. 주민수는 헬기가 떠오르기 전 버둥대면서 하윤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고 손을 어색하게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헬기는 윙윙 소리 내며 하늘을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문 밖에서 벌어진 상황에 놀란 눈치였지만 그 누구도 가까이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상황을 접한 이장이 뒤늦게 달려 나왔지만 눈 앞에 벌어진 상황을 보고는 놀란 듯 다리를 치며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를 내뱉었다. 하윤은 이장이 뭐라 말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의 눈빛에서 자기와 도준을 경계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장은 순간 ‘동곽선생’이라는 이야기가 떠올라 하윤과 도준을 거두어 들인 것을 못내 후회했다. 말할 수록 흥분한 이장은 하윤에게 따지려고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때 도준이 하윤의 팔을 잡아당겨 자기 뒤에 보호했고 잔뜩 분노한 이장과 달리 하나도 꿀릴 거 없다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도준을 바라봤다. “쯧. 이것 봐. 어쩜 하윤 씨 닮은 사람이 이렇게 많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서 따지고 들 생각부터 하다니, 이건 대체 무슨 취미야?” 얼굴
이장의 말을 들은 다솜은 용기를 내어 권하윤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허리를 숙이라는 시늉을 했다. 두 사람이 무슨 귓속말을 주고받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인지라 하윤은 할 수 없이 허리를 숙였다. “왜 그래?” 그때 다솜이 포동포동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하윤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언니, 만약 언니도 납치당한 거라면 눈 깜빡여 봐요. 우리가 도와 줄게요.” 다솜이 말을 전하는 사이, 이장도 눈을 둥그렇게 뜨고 마치 용기를 북돋아 줄 것처럼 하윤을 바라봤다. ‘이 분위기는 뭐지? 이거 대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하윤은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얼른 설명했다. “저 납치당한 게 아니에요. 우리는…….” 하윤은 귀찮은 듯 옆에 서 있는 도준을 힐끗 보더니 눈을 내리 깔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부부예요. 저 사람 제 남편입니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담배를 물고 있던 도준은 똑똑히 들어 버렸다. 이윽고 도준은 희뿌연 연기를 내뱉으며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하, 그래도 내가 남현이라는 건 인정하네. 많이 발전했네.’ 상황 설명을 마친 하윤은 반신반의한 이장을 집으로 돌려보내고는 몸을 돌렸다. 그랬더니 도준의 발 밑에는 그새 담배 꽁초가 몇 개 더 생겨났다. 하윤이 돌아오자 도준은 눈빛으로 자기 앞을 가리켰다. “이리 와.” 문 앞에서 2초간 머뭇거린 하윤은 천천히 도준에게 다가가 한참을 고민하는가 싶더니 도준의 무릎 위에 앉아 버렸다. 도준의 의외라는 듯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불어볼 거 없어?” 이에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하윤은 끝내 용기를 내어 도준을 바라봤다. “도준 씨는 주림 선배 해치지 않아요.” 도준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물어보는 거야? 서술하는 거야?” “서술이요.” 하윤은 천천히 도준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 “저 도준 씨 믿어요. 어떠한 상황에서든 저를 해칠 리 없으니까.” “…….” 고요한 산 속에서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자 주위의 모든 게 정
권하윤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민도준이 자기 다리 위에 앉은 하윤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얼른 준비해. 이제 하산해야지.”하윤은 본능적으로 어디로 가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저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고 준비를 할 뿐.얼마 뒤, 하윤은 가방을 멘 채 밖으로 나와 도준의 손을 잡았다.그런 고분고분한 모습에 만족했는지 도준도 하윤의 작은 손을 잡은 채 주물럭거렸다.“왜 어디 가는지 묻지 않아? 내가 하윤 씨 팔아버릴까 봐 무섭지 않아?”하윤은 고개를 돌리며 싱긋 웃었다.“그럴 건가요?”도준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재밌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이윽고 하윤의 손을 잡아 차가운 하윤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아까워서 어떻게 그래.”뜨거운 숨결이 손등의 얇은 살갗을 데우고 뼈에까지 낙인을 새기는 듯했다.하윤은 본능적으로 흠칫 움츠러들더니 고개를 들고 도준을 바라봤다.“저도 도준 씨가 떠나는 게 싫어요.”……오붓하게 지내던 와중에 두 사람은 하산했다.분명 주림을 만났지만 도준은 다시 오던 길을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남쪽을 향해 달렸다.하산 후, 오랫동안 조용했던 하윤의 핸드폰에도 마침내 신호가 잡히더니 갑자기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여보세요?”“여기는 해원 경찰서입니다. 조사기간 동안 무단으로 해원을 떠나 도주죄에 해당하므로 하루 내로…….”약 절반쯤 들었을 때 도준이 하윤의 핸드폰을 빼앗아 가더니 그 자리에서 꺼버렸다.하윤이 그런 도준이 이해가 되지 않아 의아한 듯 바라봤지만 핸드폰은 어느새 도준에게 내팽개쳐졌다.“뭐 하러 그런 골치 아픈 얘기 듣고 자빠졌어? 경치나 구경해.”창밖의 경치는 확실히 아름다웠다. 경성의 웅장하고 화려한 아름다움과 달리 안개 속에 있는 선경 같았다.하지만 그런 풍경에도 하윤은 전혀 흥이 나지 않았다.방금 경찰의 태도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마치 하윤이 정말 죄를 짓고 도주하기라도 한 것처럼 범죄자를 대하는 태도였으니까?그런데 의아한 것은 도준이 자꾸만
권하윤은 민도준이 잠든 뒤 몰래 확인하려고 마음먹고는 도준을 등진 채 불을 껐다. 심지어 졸린 듯 눈까지 감은 탓에 촉감이 점점 더 민감하게 살아났다. 특히 도준이 손장난 칠 때 평소보다 더 민감하게 느껴진 탓에 하윤은 옷을 사이 둔 채 도준의 손을 붙잡았다.오늘 해야 할 ‘임무’가 있기도 하고, 도준은 한번 시작하면 끝을 모르는 사람이라 절대 시작을 하면 안 된다.이에 하윤은 완곡히 거절했다.“오늘 하루 종일 차 타고 달렸더니 피곤해요.”남자의 숨결이 귓가를 스치더니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귀 안을 파고 들며 하윤을 건드렸다.이윽고 커다란 손이 하윤의 허리를 쓸며 아래로 내려갔다.“착하지, 말 들어. 내가 피로 풀어 줄게. 안 그러면 내일 더 힘들 거야.”하윤은 이런 상황에 도준을 잘 거절하지 못한다. 특히 뒷덜미를 잡힌 채로 키스를 해댈 때면 더더욱.산에서 지낸 이틀동안 도준이 건드리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남의 집에서 지내는 터라 많이 절제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도준은 마치 철창에서 꺼내진 짐승처럼 사냥감을 탐했다.도준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하윤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자기 공제를 벗어나 점점 고통과 흥분이 뒤섞인 감각 속에 빠진 하윤은 도준의 어깨를 꽉 잡을 수밖에 없었다.흥분한 듯한 근육이 단단해졌고 혈관은 펄쩍펄쩍 뛰면서 살갗 위로 튀어 오를 것처럼 굴었다.깊은 밤, 하윤은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치켜 뜨며 도준에게 안겨 샤워를 했지만 그 과정마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그러다가 끝내 힘 없이 고개를 떨군 채 도준의 가슴에 기댔다.결국 그날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다음 날, 도준의 부름에 깨어난 하윤은 머리가 무겁고 멍했다.원래는 한밤중에 깨어나 몰래 확인해보려고 했는데 왜 지금까지 잤는지도 의문이었다.도준은 여전히 흐리멍덩한 하윤의 모습이 재밌었는지 손을 들어 하윤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그만 정신 차리고 밥 먹자.”하윤은 도준을 바라보더니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섰다.“내려가기 귀찮아요. 안 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