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윤은 손에 힘을 주지 않고 가볍게 민도준의 머리를 닦아주었다. 부드럽지 않던 수건은 물기를 머금고 점점 부드러워졌고 남자의 머리가락을 스치며 점점 젖어 들었다. 하지만 치명적인 상처를 낼 수 있는 머리가 다른 사람의 손에 닿은 탓인지 도준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특히 도준의 머리를 닦아주려고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를 선점하고 있는 하윤 때문에 도준은 불쾌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도 하윤의 손이 두피를 스칠 때의 촉감이 너무 부드러워 위협감이 아닌 야릇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하지만 주림의 일을 생각하느라 하윤은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하윤이 눈치챘을 때 손은 이미 꿈쩍도 할 수 붙잡혀 중심을 잃은 하윤이 도준의 등에 넘어졌다. “뭐 하는 거예요? 지금 머리 닦아주고 있잖아요.” “다른 곳도 닦아주면 좋겠는데.” 도준의 말에 하윤은 귀밑까지 달아올랐다. “저리 비켜요.” 하윤은 화를 내며 도준을 밀어버리려고 했지만 너른 등 위에 엎드려 있는 느낌이 너무 좋아 쉽사리 말어내지 못했다. 쩍 벌러진 어깨에서부터 허리까지 이어진 라인은 움직이지 않아도 힘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윤은 두 팔을 도준의 목을 꼭 감았다. 심장이 쿵쾅댈 때마다 심장을 감싼 살갗이 따라 오르내렸고 마치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처럼 남자의 등에 붙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심장 박동 소리에 하윤은 점점 긴장이 풀어졌다. ‘도준 씨도 너무 무서운 건 아닌데.’ 주림이 도준을 알지 못하지만 하윤은 도준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주림에게 도준이 어떤 사람인지 잘 설명해줄 수 있었다. 더욱이 이미 관계를 확인한 지금, 하윤은 도준이 자기를 해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결론을 짓자 마음속에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이 덜어진 듯 한결 편해졌다. 이에 하윤은 도준의 등에 더 바싹 몸을 붙인 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던 그때,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주림은 어떻게 할 거야?”
권하윤은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반짝이는 눈으로 민도준을 바라봤다. 마치 다이너마이트를 분해하는 것처럼 긴장되는 상황에 하윤은 심장이 쪼그라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어느 선을 잘라야 살수 있는지 하윤에게는 아직 미지수였으니까. 솔직히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믿음도 따라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하윤은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도준을 사랑할수는 있어도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사람의 현재와 과거를 모두 사랑하는 것이지만 믿음은 자기의 불확실한 미래까지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윤은 도박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일에 신중을 가하여 아무런 위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진심을 내비치는 사람이다. 하윤은 자기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알고 있지만 이 싸움에서 절대 지면 안 되는 게 하윤이 처한 현실이기도 하다. 권하윤이라는 탈을 쓴 채 허송세월을 보내는 동안 하윤은 이미 용기를 잃었다. 게다가 지금은 자기뿐만 아니라 주림의 안전까지 내걸어야 하니 하윤에게는 어려운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오랜 고민 끝에 하윤은 끝내 자기 생각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사실 주림 선배를 던 씨한테 맡기고 싶어요. 던 씨한테 부탁해서 주림 선배를 해외로 이송했으면 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기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하윤은 도준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방이 어두운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볼 수 없어서 도준의 반응을 판단할 수조차 없었다. 하윤은 손을 더듬으며 도준의 팔을 잡았다. “화났어요?” “하.” 의미를 알 수 없는 짤막한 웃음이 터져 나오는 동시에 하윤은 도준의 팔을 놓치고 말았다. “화나냐고? 내가 화 날 거 뭐 있어? 하윤 씨가 나보다 남을 더 믿는 것에 화를 낼까? 아니면 또 거짓말을 한 것에 화를 낼까?” 웃으며 반문하는 도준의 모습은 왠지 섬뜩하게 느껴졌다. 분명 화를 내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하윤은 주위의 공기가 차가워졌다는 느낌이 들어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아니에요.
이런 혼란 속에서 민도준은 한가롭게 흔들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하윤의 목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려 능청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아, 일어났어?” 주림과 주민수가 헬기 안으로 끌려가자 하윤은 다급하게 앞으로 달려갔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죠?” “급할 거 없어.” 도준은 땅콩 껍질을 손으로 갈라 땅콩 하나를 입 안에 넣었다. “하윤 씨가 힘들까 봐 부담을 나누는 거잖아.” 주민수는 나이 든 몸으로 젊은 경호원을 당해내지 못하고 끝내 헬기 안으로 끌려갔다. “잠깐만요. 지금 할아버지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예요?” 헬기 문이 닫히려고 하자 하윤은 얼른 막아서려고 앞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팔을 세게 잡아당기는 힘 때문에 발걸음을 멈춘 하윤은 발걸음을 멈춘 채 두 사람이 헬기 안으로 끌려가는 걸 눈 뜨고 볼 수밖에 없었다. 주민수는 헬기가 떠오르기 전 버둥대면서 하윤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고 손을 어색하게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헬기는 윙윙 소리 내며 하늘을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문 밖에서 벌어진 상황에 놀란 눈치였지만 그 누구도 가까이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상황을 접한 이장이 뒤늦게 달려 나왔지만 눈 앞에 벌어진 상황을 보고는 놀란 듯 다리를 치며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를 내뱉었다. 하윤은 이장이 뭐라 말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의 눈빛에서 자기와 도준을 경계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장은 순간 ‘동곽선생’이라는 이야기가 떠올라 하윤과 도준을 거두어 들인 것을 못내 후회했다. 말할 수록 흥분한 이장은 하윤에게 따지려고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때 도준이 하윤의 팔을 잡아당겨 자기 뒤에 보호했고 잔뜩 분노한 이장과 달리 하나도 꿀릴 거 없다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도준을 바라봤다. “쯧. 이것 봐. 어쩜 하윤 씨 닮은 사람이 이렇게 많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서 따지고 들 생각부터 하다니, 이건 대체 무슨 취미야?” 얼굴
이장의 말을 들은 다솜은 용기를 내어 권하윤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허리를 숙이라는 시늉을 했다. 두 사람이 무슨 귓속말을 주고받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인지라 하윤은 할 수 없이 허리를 숙였다. “왜 그래?” 그때 다솜이 포동포동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하윤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언니, 만약 언니도 납치당한 거라면 눈 깜빡여 봐요. 우리가 도와 줄게요.” 다솜이 말을 전하는 사이, 이장도 눈을 둥그렇게 뜨고 마치 용기를 북돋아 줄 것처럼 하윤을 바라봤다. ‘이 분위기는 뭐지? 이거 대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하윤은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얼른 설명했다. “저 납치당한 게 아니에요. 우리는…….” 하윤은 귀찮은 듯 옆에 서 있는 도준을 힐끗 보더니 눈을 내리 깔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부부예요. 저 사람 제 남편입니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담배를 물고 있던 도준은 똑똑히 들어 버렸다. 이윽고 도준은 희뿌연 연기를 내뱉으며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하, 그래도 내가 남현이라는 건 인정하네. 많이 발전했네.’ 상황 설명을 마친 하윤은 반신반의한 이장을 집으로 돌려보내고는 몸을 돌렸다. 그랬더니 도준의 발 밑에는 그새 담배 꽁초가 몇 개 더 생겨났다. 하윤이 돌아오자 도준은 눈빛으로 자기 앞을 가리켰다. “이리 와.” 문 앞에서 2초간 머뭇거린 하윤은 천천히 도준에게 다가가 한참을 고민하는가 싶더니 도준의 무릎 위에 앉아 버렸다. 도준의 의외라는 듯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불어볼 거 없어?” 이에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하윤은 끝내 용기를 내어 도준을 바라봤다. “도준 씨는 주림 선배 해치지 않아요.” 도준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물어보는 거야? 서술하는 거야?” “서술이요.” 하윤은 천천히 도준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 “저 도준 씨 믿어요. 어떠한 상황에서든 저를 해칠 리 없으니까.” “…….” 고요한 산 속에서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자 주위의 모든 게 정
권하윤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민도준이 자기 다리 위에 앉은 하윤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얼른 준비해. 이제 하산해야지.”하윤은 본능적으로 어디로 가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저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고 준비를 할 뿐.얼마 뒤, 하윤은 가방을 멘 채 밖으로 나와 도준의 손을 잡았다.그런 고분고분한 모습에 만족했는지 도준도 하윤의 작은 손을 잡은 채 주물럭거렸다.“왜 어디 가는지 묻지 않아? 내가 하윤 씨 팔아버릴까 봐 무섭지 않아?”하윤은 고개를 돌리며 싱긋 웃었다.“그럴 건가요?”도준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재밌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이윽고 하윤의 손을 잡아 차가운 하윤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아까워서 어떻게 그래.”뜨거운 숨결이 손등의 얇은 살갗을 데우고 뼈에까지 낙인을 새기는 듯했다.하윤은 본능적으로 흠칫 움츠러들더니 고개를 들고 도준을 바라봤다.“저도 도준 씨가 떠나는 게 싫어요.”……오붓하게 지내던 와중에 두 사람은 하산했다.분명 주림을 만났지만 도준은 다시 오던 길을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남쪽을 향해 달렸다.하산 후, 오랫동안 조용했던 하윤의 핸드폰에도 마침내 신호가 잡히더니 갑자기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여보세요?”“여기는 해원 경찰서입니다. 조사기간 동안 무단으로 해원을 떠나 도주죄에 해당하므로 하루 내로…….”약 절반쯤 들었을 때 도준이 하윤의 핸드폰을 빼앗아 가더니 그 자리에서 꺼버렸다.하윤이 그런 도준이 이해가 되지 않아 의아한 듯 바라봤지만 핸드폰은 어느새 도준에게 내팽개쳐졌다.“뭐 하러 그런 골치 아픈 얘기 듣고 자빠졌어? 경치나 구경해.”창밖의 경치는 확실히 아름다웠다. 경성의 웅장하고 화려한 아름다움과 달리 안개 속에 있는 선경 같았다.하지만 그런 풍경에도 하윤은 전혀 흥이 나지 않았다.방금 경찰의 태도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마치 하윤이 정말 죄를 짓고 도주하기라도 한 것처럼 범죄자를 대하는 태도였으니까?그런데 의아한 것은 도준이 자꾸만
권하윤은 민도준이 잠든 뒤 몰래 확인하려고 마음먹고는 도준을 등진 채 불을 껐다. 심지어 졸린 듯 눈까지 감은 탓에 촉감이 점점 더 민감하게 살아났다. 특히 도준이 손장난 칠 때 평소보다 더 민감하게 느껴진 탓에 하윤은 옷을 사이 둔 채 도준의 손을 붙잡았다.오늘 해야 할 ‘임무’가 있기도 하고, 도준은 한번 시작하면 끝을 모르는 사람이라 절대 시작을 하면 안 된다.이에 하윤은 완곡히 거절했다.“오늘 하루 종일 차 타고 달렸더니 피곤해요.”남자의 숨결이 귓가를 스치더니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귀 안을 파고 들며 하윤을 건드렸다.이윽고 커다란 손이 하윤의 허리를 쓸며 아래로 내려갔다.“착하지, 말 들어. 내가 피로 풀어 줄게. 안 그러면 내일 더 힘들 거야.”하윤은 이런 상황에 도준을 잘 거절하지 못한다. 특히 뒷덜미를 잡힌 채로 키스를 해댈 때면 더더욱.산에서 지낸 이틀동안 도준이 건드리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남의 집에서 지내는 터라 많이 절제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도준은 마치 철창에서 꺼내진 짐승처럼 사냥감을 탐했다.도준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하윤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자기 공제를 벗어나 점점 고통과 흥분이 뒤섞인 감각 속에 빠진 하윤은 도준의 어깨를 꽉 잡을 수밖에 없었다.흥분한 듯한 근육이 단단해졌고 혈관은 펄쩍펄쩍 뛰면서 살갗 위로 튀어 오를 것처럼 굴었다.깊은 밤, 하윤은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치켜 뜨며 도준에게 안겨 샤워를 했지만 그 과정마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그러다가 끝내 힘 없이 고개를 떨군 채 도준의 가슴에 기댔다.결국 그날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다음 날, 도준의 부름에 깨어난 하윤은 머리가 무겁고 멍했다.원래는 한밤중에 깨어나 몰래 확인해보려고 했는데 왜 지금까지 잤는지도 의문이었다.도준은 여전히 흐리멍덩한 하윤의 모습이 재밌었는지 손을 들어 하윤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그만 정신 차리고 밥 먹자.”하윤은 도준을 바라보더니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섰다.“내려가기 귀찮아요. 안 먹을
정리를 마친 뒤 권하윤은 곧바로 문을 열어주려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문고리에 손이 닿으려던 찰나 문득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도준 씨는 이렇게 인내심 좋은 사람 아닌데?’예전에 하윤이 샤워하느라 문을 조금 늦게 열었다고 도준은 하윤을 달달 볶았던 적이 있다. 하지만 오늘은 재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게다가 밖에 나간 지 2분 만에 돌아온다는 게 말이 되나? 아무리 이미 완성된 음식을 사온다 해도 이렇게 빠를 수는 없다.“쾅쾅.”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그 소리와 함께 진동하는 문이 공포감을 자아냈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실루엣을 보면 한 사람만은 아닌 듯했다.하윤은 점점 뒷걸음 쳐 창가로 물러나면서 몸을 지킬만한 도구가 있는지 사방을 둘러봤다.오랫동안 문을 열지 않은 탓인지 상대방도 자기 신분이 탄로났다는 것을 눈치채고 문을 더 쾅쾅 두드리기 시작했다.“문 여세요. 경찰입니다. 수사에 협조 바랍니다.”‘경찰?’하윤은 상대방이 말한 게 진실인지 아닌지 알 길 없어 창밖을 초조하게 바라보며 도준이 빨리 돌아오기를 바랐다.하지만 하윤이 소리를 내지 않으니 상대방도 인내심을 잃었는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차 거칠어졌다.낡은 벽과 문 사이의 흙먼지가 부슬부슬 떨어지기까지 했다. 이대로 가면 얼마 되지 않아 문은 아마 박살 날 거다.‘저 사람들 경찰 아니야.’경찰이라면 영장을 제출하고 사장한테 문 열어달라고 하면 그만이지, 이렇게 폭력적으로 문을 부술 필요는 없다.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몰려와 문을 부수는 위험한 상황이지만 하윤은 진정해야 했다.‘이 문은 도준 씨가 올 때까지 버티지 못할 거야. 방법을 생각해야 해.’……쾅!쾅!‘쿵’ 하는 소리와 함께 삐걱거리던 문이 끝내 버티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곧바로 세 사람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고, 맨 앞에 있던 남자가 텅 빈 방 안을 둘러보면서 소리쳤다.“어디 갔어?”그때 맨 마지막에 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활짝 열린 창문
권하윤은 당황한 나머지 마구 몸부림 쳤다.“이거 놔.”“그만하고 사람 좀 확인해.”고개를 들어 민도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하윤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도준 씨…….”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놈들이 쫓아왔다.험상궂은 얼굴을 한 놈들은 도준을 보는 순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솔직히 놈들은 도준이 없는 틈에 하윤을 잡으려 했었다.여자 한 명을 덩치 큰 남자가 몇 명이 몇 분 내에 잡지 못할까 하는 오만함 때문에 그 틈을 노렸던 거다.그런데 하윤이 도준이 돌아올 때까지 버틸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놈들이 아니었다. 물론 고용주가 정면으로 도준과 마주치지 말라고 했지만 극악무도한 짓을 일삼아 온 놈들은 도준을 자기들의 상대로 여기지 않았다.그도 그럴 게, 도준은 한 명이고 놈들은 세 명이니까. 게다가 도준은 하윤이라는 ‘짐’까지 있으니 놈들은 무서울 게 없었다.그 뿐만 아니라 하윤을 겁탈하는 데 성공하면 20억, 하윤을 잡아 고용주 앞에 가져가면 40억을 더 받을 수 있는데, 그 돈을 포기할 놈들이 아니었다.맨 앞에 있던 형님이라는 놈이 거침없이 앞으로 돌진하며 도준에게 겁을 주었다.“이 봐, 우리가 그 여자한테 좀 볼 일이 있어 그러는데 여기로 넘겨. 그러면 댁은 곱게 보내 줄게.”하윤은 놈들이 바로 도망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의외였는데 이렇게 간 큰 소리를 지껄이자 어안이 벙벙하여 도준을 바라봤다.놈들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발언에 도준은 흥미진진한 듯 미소를 지었다.“어떡하지? 그러기 싫은데.”분명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 미소에 놈들은 소름이 돋았다.그때, 형님이라는 놈이 겁먹은 걸 숨기려는 듯 일부러 소리를 높였다.“이 구역 실세가 누구인지 알아는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 여자 내놓지 않으면 살아서 돌아갈 생각 하지 마.”도준은 놈들의 겁 없는 말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움직였다.“죽인다는 말인가? 재밌겠는데? 어디 해 봐.”도준이 순순히 말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