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도준은 입안에서 혀를 굴리며 흥분한 눈빛을 뿜어냈다. 하지만 지금 방해꾼이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됐어. 시간도 늦었는데 내일 물어봐.” 권하윤은 사냥감을 노리는 듯한 도준의 눈빛을 당연히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겁을 먹고 울어대는 다솜을 달래느라 정신이 팔려 있다가 도준의 의견에 동의하는 듯 아이를 이장 아내에게 데려갔다. 그러고 나서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도준은 이미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원래도 작은 침대였는데 도준이 누워 있자 마치 어린이 침대 같아 보이는 신기한 마법이 펼쳐졌다. 하윤은 그런 도준을 옆으로 밀어 버리며 위로 올라왔다. “저쪽으로 누어 봐요. 도준 씨 혼자만 위에서 자면 저는 어디 누워요?” 애석하게도 하윤의 가는 팔로 아무리 밀어 봤자 도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윤의 팔을 낚아채더니 자기 몸 위로 잡아당기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침대가 딱딱하니 내 몸 위에 누워.” 하윤은 버둥대며 도준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때 도준이 하윤의 허리를 야릇하게 문지르며 경고했다. “계속 움직이면 불편해질 줄 알아.” 그제야 하윤은 뻣뻣하게 굳어버린 채로 화가 난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렇게 한참 뒤, 오늘은 온전히 잠을 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윤의 목덜미에서 간지럼을 태우는 듯한 도준의 숨결이 느껴졌다. 이윽고 도준의 입술이 하윤의 목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이가 그렇게 좋아?” “다솜이가 얼마나 귀여운데요.” 하윤은 간지러운 감각 때문에 참지 못하고 몸을 피하려 했지만 움직이기도 전에 도준의 커다란 손이 하윤의 아랫배를 꾹 눌렀다. 이윽고 남자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직접 나은 아이는 더 귀여울 거야.” 도준의 희롱에 이미 익숙해진 하윤이었지만 이 말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누가 도준 씨 아이 낳아준대요? 아이 낳는 게 얼마나 아프다고. 저는 아픈 거 싫어요.” 하윤의 말에 도준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
민도준은 물을 끓이며 입을 열었다. “그 꼬맹이도 있잖아. 아까 통역해 달라고 부탁했어.” “동의 하던가요?” “응.” 권하윤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어떻게 설득했어요? 다솜이가 도준 씨 무서워하는 거 아니었어요?” 도준은 물 온도를 체크하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도와주면 돈 주겠다고 했거든.” “그렇게 간단하다고요?” 하윤은 도준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면?” 도준은 하윤의 머리를 꾹 눌렀다. “동기 부여가 되면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는 게 사람 아니야?” “…….” ‘그럼 내가 어제 인내심 있게 설득하려 한 건 헛수고였다는 거네…….’ ……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다솜은 하윤과 도준을 데리고 주림의 외할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이장의 말대로 어제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고 등이 휜 할아버지 한 분이 마당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주림의 외할아버지 주민수였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저 주림 선배 후배인데, 혹시 선배 여기 있나요?” 하윤의 인삿말에 주민수는 경계 가득한 표정을 짓더니 연신 손을 저으며 사람을 쫓아냈다. 그 모습에 다솜이 설명했다. “할아버지는 귀가 안 들려서 그렇게 말하면 못 들어요.” 하지만 하윤이 보기에는 주민수가 단순히 안 들리는 게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자기가 낯선 사람이라 상대하기 싫어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하윤은 얼른 다솜에게 부탁했다. “그럼 주림 선배가 이 마을에 있는지 언니 대신 물어봐 줄래?” 다솜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하윤의 물음을 곧이곧대로 전했다. 물론 사투리가 섞인 말투와 억양으로. 다행히 주민수는 다솜을 그나마 살갑게 대하며 귀담아듣는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한참 듣는가 싶더니 이내 손을 저으며 사투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다솜은 이내 하윤에게 그 말을 전했다. “주림 오빠는 오래 전에 마을을 떠났대요.” ‘주림 선배가 떠났다면 단서가 또 끊기는데.’ 하윤은 괜히 맥이 빠져 눈살을 찌푸렸다. 만약 엄석규가 그런 일
민도준은 가만 있지 못하는 하윤의 손을 꽉 잡았다. “이리 와. 그렇게 대놓고 가는 건 나 왔소 하고 알리는 거랑 뭐가 달라?” 잔뜩 흥분해 있던 권하윤은 그제야 냉정을 되찾고 도둑질하는 사람처럼 목솔리를 한껏 낮추고 속삭였다. “그럼 어떡해요?” 도준은 하윤이 귀여운 듯 잡아 끌어 품에 안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 “숨을 곳 찾아서 기다려야지. 점심 때 그 할아버지가 어디로 가는지.” 하윤은 도준의 가슴에 고개를 기대며 문질렀다. “그런데 저 졸린데 어떡해요?” “하루 종일 졸렸다 배고팠다 가지가지 하네.” 그 말에 하윤은 불만 섞인 말투로 투덜거렸다. “그게 어떻게 제 탓이에요?” 며칠 동안 길을 떠나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졸린 건데, 매일 밤 사람을 괴롭히던 당사자가 오히려 미안한 기색도 없자 하윤은 바로 불만을 내비쳤다. 하지만 도준은 오히려 하윤의 코를 잡아당기며 이유를 댔다. “전에 빚진 거 갚아야 할 거 아니야?” “대체 얼마나 더 갚아야 하는데요! 게다가 제가 해원에 온 게 고작 며칠인데, 이렇게 갚다가는 제가 죽을까 봐 겁나요.” 잔뜩 화가 난 듯한 하윤의 모습에 도준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 졸린다며? 잠깐 빈 곳에서 눈 붙여.” 도준이 말한 곳은 다름 아닌 주민수네 집 뒤에 있는 밭이었다. 가을이라 밭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게다가 마침 해가 가장 뜨거울 무렵이라 도준은 그늘진 곳을 찾아 자기 다리를 툭툭 두드렸다. “자, 여기 누워 눈 좀 붙여.” 하윤은 싫은 티를 팍팍 내며 바닥을 둘러봤다. “여기 누우면 제 옷 더러워져요.” 그 말에 도준은 피식 웃으며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자기 외투를 바닥에 깔았다. “이렇게 하면 됐지?” 그제야 하윤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는 듯이 도준의 다리에 누웠다. 하윤이 눕자 도준의 손이 하윤의 허리를 둘렀고 따뜻한 햇살이 하윤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바람은 흙내음도 풀냄새를 싣고 살살 불어왔다. 물론 좋은 냄새는 아니었지만 싱그럽고 편안했다
신장의 우세로 민도준은 손 쉽게 담을 넘었지만 권하윤을 잡아당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하윤의 옷이 찢어지기까지 했다. 그 시각, 마당은 텅 비어 있었고 방문도 굳게 잠겨 있었다. 게다가 가장 특별한 것은 집 인테리어를 바꿨는지 문은 도난 방지를 하는 철문으로 되어 있었다. 햇빛을 오래 받은 탓에 하윤은 뒤통수가 찌근거지만 창문에 찰싹 붙어 두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 안쪽을 들여다봤다. “우리 어떻게 들어가요?” 도준은 바닥에 있는 삽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비켜, 얼굴에 스크래치라도 생기면 안 되니까.” 하윤이 얼른 옆으로 몸을 피하자 도준은 삽을 나무로 된 창문틀에 끼워 넣더니 두 번 만에 창문을 떼어내 버렸다. 하지만 창문이 너무 작은 탓에 도준의 덩치로 들어가는 것은 무리였다. 그때 하윤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제가 들어가서 문 열어줄게요.” 날씬한 하윤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나마 쉬워 보였다. 하윤이 날렵하게 안으로 상체를 밀어 넣자 도준은 ‘친절하게’ 하윤의 엉덩이를 받쳐 주었다. “조심해, 넘어지지 말고.” 이미 몸을 반쯤 안으로 넣은 데다 소리를 지를 수 없는 상황이라 하윤은 발을 구르며 도준을 차버렸다. 다행히 그저 잠깐 장난 치는 것으로 끝낸 도준은 하윤을 도와주고 나서 바로 손을 뗐다. 이윽고 안으로 들어 간 하윤이 얼른 방 문을 열었다. “얼른 들어와요.” 문 틈 사이로 고개를 삐죽 내민 채 도준을 향해 손을 흔드는 히윤의 모습은 영락없는 도둑이었다. 하윤은 안으로 들어가면 주림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안에는 주림은커녕 주민수조차 보이지 않았다. 방을 통해 뒤뜰을 찾아 낸 하윤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낮게 속삭였다. “왜 사람이 없지? 설마 그 할아버지가 주림 선배를 데리고 도망간 건 아니겠죠?” 그때, 뒤뜰을 빙 둘러보던 도준의 발이 바닥에 삐죽 나온 무언가에 걸렸다. “지하실이 있어.” 하윤이 말하려는 찰나, 도준은 하윤을 끌어당겨 문 뒤에 숨었고 다음 순간 나무로 된
권하윤은 손전등으로 안을 비치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도준 씨, 조심해요!” 하지만 쥐구멍처럼 작은 곳을 빙 둘러본 민도준은 하윤의 걱정이 쓸데없다고 느껴졌다. 물론 그런 걱정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 구멍은 다름 아닌 김치나 채소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안에는 식사를 할 수 있는 테이블과 한 사람이 잘 수 있는 침대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공간이 많이 협소했다. 그 시각, 침대에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는 핏기 하나 없었고, 두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 “주림 선배?” “선배?” 주림은 위층으로 올라온 뒤에도 여전히 바깥세상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고작 2년이 지난 사이 주림은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이목구비는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예전의 생기발랄하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치 좀비나 다름없었다. 사실 예전에 주림은 이성호를 가장 속 썩이는 학생이었다. 그건 주림의 욱하는 성격도 한 몫 했지만 실패를 맛보기 전에는 절대 뜻을 굽히지 않는 고집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성호를 가장 닮은 학생이기도 했다. 주림은 전문적인 분야에서만큼은 교수인 이성호와 얼굴을 붉히며 따싸울 정도로 뜻을 굽히지 않았고, 공연하기 전 이성호의 피아노에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나서서 다른 사람에게 피아노를 빌리려고 뛰어다니는 제자였다. 게다가 공연이 끝나면 일꾼을 불러 그 무거운 피아노를 직접 운반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 보다……. 이성호의 딸인 하윤조차 이성호를 의심할 때, 유일하게 자기의 스승을 믿고 심지어 본인의 미래까지 걸고 이성호의 억울함을 대신 호소했다. 하지만 이 시각 지하실에서 영혼 없는 사람처럼 세월을 보낸 주림을 보자 하윤의 눈시울은 이내 촉촉해졌다. “주림 선배, 저 이성호의 딸, 이시윤이에요. 설마 잊은 거예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 지경이 됐어요?” 하윤이 아무리 불러봐
주림의 증상은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게다가 주림이 이렇게 변한 건 고작 2달 전이라고 한다. 주민수는 마당에 앉아 주림을 힐끗 바라보더니 회억에 잠겼다. “어느 날 내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얘가 글쎄 짐을 싸고 있더라니까.” 그때는 주림이 지하실에서 생활한지 한참 되는 때였다. 지금껏 한 번도 밖에 나오지 않던 손자가 밖으로 나오자 주민수는 주림이 괜찮아진 줄 알고 기뻐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장 짐을 싸서 마을을 떠나야 한다며 재촉하지 뭔가.” “그러면 혹시 어디로 가자고 말한 적은 있나요?” 하윤의 질문에 주민수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 그저 누군가 왔다고 같은 말만 반복하며 나더러 빨리 도망치라고 하더라고.”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떠나지 못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주민수의 다리가 안 좋아 고생을 견딜 수 없어서였고, 다른 한 가지는 지금껏 지내오던 곳을 떠나 다른 곳에 또 뿌리를 내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날을 회상하자 주민수는 후회막심했다. “주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떠나는 건데.” 그날 주민수를 설득하지 못한 주림은 한참 동안 마당에 앉아 있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주민수가 신경을 딴 곳에 팔고 있던 사이 주림은 사라져 버렸다. 항상 주림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던 주민수는 손자에게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까 봐 조바심이 났다. 이에 주위를 하루 종일 둘러본 끝에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주림이 지하실에 쓰러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주림이 정신을 차리고 나서부터 저렇게 됐다네.” 주민수의 말을 듣던 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주민수의 말에 따르면, 주림이 이상 증세를 보인 두 번 모두 누군가 있다는 말을 했다. ‘대체 누구지? 누구길래 주림 선배가 그렇게 무서워했던 거지?’ 멍하니 앉아 있는 주림을 보던 하윤은 도준을 잡아당겼다. 이윽고 얼마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하윤이 낮게 속삭였다. “저 주림 선배 데려가고 싶어요.” 도준은 하윤을 약 2초간
주민수는 민도준과 권하윤이 주림을 데리고 가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지만, 먼 곳에서 주림을 찾으러 일부러 여기까지 왔다는 말에 집에 하룻밤 머물도록 했다. 어렵게 얻은 기회에 하윤은 주민수를 설득할 생각에 바로 동의했다. 이윽고 주민수가 저녁을 하는 동안, 하윤은 도준과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방을 가리키며 눈빛을 보내던 하윤은 손가락으로 2를 가리키며 속삭였다. “어떻게 생각해요?” “뭐야? 이젠 사람까지 훔치려는 거야?” 눈썹을 치켜 올리며 비아냥대는 도준의 태도에 하윤은 끝까지 부정했다. “훔치다라니요? 말이 너무 심하네, 저는 주림 선배를 도와주려는 것뿐이에요.” 이윽고 목소리를 한껏 낮춘 뒤 말을 이었다. “우리 밤에 몰래 주림 선배를 데리고 도망치는 게 어때요?” 하지만 하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준이 하윤의 이마를 꾹 밀었다. “나를 따라 나쁜 짓을 배우려고?”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는 말 몰라요?” 하윤이 이마를 부여잡으며 투덜거리자 도준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물론 생각은 이렇게 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좋은 방법은 아닌지라 하윤은 여전히 주민수가 동의하기를 바랐다. 이에 저녁식사가 끝난 뒤, 하윤은 또다시 주민수를 찾아가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며 그를 회유하려 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자식 얘기를 입에 달고 사는 건 인지상정. 주민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심지어 말끝마다 주림을 언급했다. 그 덕에 알게 된 사실은, 주림이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는 거다. 다른 어린애들이 진흙으로 놀고 있을 때 주림은 물 담은 그릇으로 곡을 연주했다고. 주씨 집안은 가정 형편이 썩 좋은 것은 아닌 데다 주림의 어머니 혼자 식구를 돌보고 있었기에 가족들은 주림이 음악을 배우는 것보다 기술을 배우는 것을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집이 센 주림은 전자 피아노를 사기 위해 어린 나이에 어른들을 따라 약재를 캐러 깊은 산속에 들어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주림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자 주민수의 얼굴은 부드러워졌다. “고작 10
주민수가 옷을 깁는 동안 권하윤은 주림을 보러 갔다. 뒤뜰에 도착한 하윤은 민도준이 있는 방을 힐끗거리다가 도준이 전화를 받느라 자기 쪽에 눈길을 돌리지 않자 그제야 안심하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왠지 모르겠지만 하윤은 도준이 주림에 대한 태도가 안 좋다는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때문에 자기가 주림과 단둘이 만나는 걸 도준이 거절할 거라고 생각하고는 무의식적으로 도준의 눈을 피했다. 이에 하윤은 계단을 내려갈 때도 소리 내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행동했다. 지하실에는 전등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 대신 배터리가 필요한 탁상등이 작은 방을 비추고 있었다. 주림이 얇은 옷을 입은 채로 침대 끝에 앉아 있는 것을 보자 하윤은 저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거렸다. “주림 선배, 저 선배 보러 왔어요. 지난 2년 동안 계속 경성에 있느라 선배한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몰랐어요. 아빠를 대신해 고맙다는 말 하고 싶어요.” “참, 그리고 걱정하지 마요. 저희 아빠가 이제는 억울함을 풀었어요. 아빠한테 누명을 씌운 사람도 벌을 받았으니 하늘에서 기뻐하실 거예요…….” 잘 알고 지내던 사람을 눈 앞에서 보니 하윤은 저도 모르게 옛 추억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주림과 만났을 때만 해도 콘서트 홀이었는데. 이성호는 엄격한 스승이지만 기회만 되면 제자들을 데리고 무대에 올랐고, 자기 제자들에게 무대에 오를 기회를 만들어 주려고 애썼다. 그리고 주림과 만난 마지막날, 주림은 평소 연습하던 연주 방식을 버리고 과감하게 새로 해석하여 연주한 덕에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그 일로 이성호는 보고도 없이 스스로 결정을 내린 주림의 행동에 화를 내면서도 주림 대신 기뻐 어쩔 줄 몰라했다. 그때 이승우가 나서서 일을 원만하게 해결한 덕에 일은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이승우는 이성호를 대신해 주림을 꾸짖는 척하다가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가 대신 욕했으니 아버지는 칭찬만 하면 돼요.” 그때 구경하고 있던 선배들도 주림의 목을 조르는 척하며 끼어들었다. “만약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