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작년에 말했을 걸. 엄마도 이젠 나이가 들어 기억이 가물가물해. 휴, 나이가 드는 것도 좋은 일이지. 일찍 네 아 곁에 갈 수 있을 테니.” 권하윤은 조급해 났다. “엄마는 아빠 곁에 갈 생각만 하고. 우리는 싫어요? 어떻게 절 버리고 갈 생각을 해요?” 양현숙은 자기의 말이 하윤을 속상하게 했다는 걸 눈치채고는 얼른 말을 돌렸다. “그래. 우리 딸 말 대로 어디도 안 가고 곁에 있을게. 아빠더러 기다리라고 하면 되지 뭐.” 몇 초간 침묵이 흐르더니 하윤이 핸드폰을 손톱으로 긁으며 입을 열었다. “엄마는 아빠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갑자기 왜 그런 물음은 물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아빠가 보고 싶어서.” 양현숙은 그제야 한숨을 푹 내쉬더니 그리운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네 아빠는 보기에는 얄짤 없는 사람 같아도 사실은 마음이 약해. 네가 피아도 안 배우고 춤 배운다고 했을 때도 말로만 반대하고 너 몰래 선생님 알아보느라 여기저기 수소문 했었어.” “그리고 네가 공연할 때 절대 보러 가지 않는다고 말하더니 결국에는 도둑처럼 맨 뒷줄에 앉아 매번 몰래 보고 나왔어.” 순간 눈물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리더니 목소리마저 가라앉았다. “그리고 또 있어요?” “그리고 네 아빠는 다른 것에는 너그러운 편인데 음악에 있어서는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어. 그래서 학생들이 네 아빠한테 꾸중을 듣고는 항상 나한테 찾아와서 하소연했거든. 특히 주림이라고, 매일 네 아빠랑 싸우고는 나한테 찾아와서 화해하게 도와달라고 했었어…….” 학생을 떠올리자 양현숙은 점점 목이 쉬었다. “모든 사람이 네 아빠가 나쁜 짓을 했다고 손가락질할 때, 주림 그 애만이 끝까지 네 아빠 편을 들어줬어. 심지어 학교에 현수막까지 내 걸고 시위하다가 결국은 퇴학당했는데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몰라.” 하윤은 그 말에 멍해졌다. “주림 선배 말하는 거예요? 전에는 왜 말하지 않았는데요?” “휴. 그때 네 아빠랑 오빠가 그런 일이
‘우선 아버지가 건물에서 뛰어내리기 직전 오빠더러 가족을 데리고 떠나라고 했으니 우리가 위험할 거라는 걸 알았을 거야.’ 만약 예전이었다면 하윤은 당연히 그 위험이 공씨 가문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민도준을 만났다는 걸 알았기에 확신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오빠가 겪은 교통 사고가 정말 단순한 사고일까? 아니면 인위적인 걸까?’ ‘그런 상황에 마침 사고를 당했다는 건 너무 우연의 일치 아닌가?’ ‘그런데 만약 인위적인 거라면 범인은 오빠가 아빠를 찾으러 그 건물로 갈 거라는 걸 알았을 거야.’ 사진을 쥔 손끝은 다시 새하얗게 질렸고 소파에 앉아 있는 하윤의 얼굴도 잔뜩 굳어버렸다. ‘지금의 모든 단서가 도준 씨를 가리키고 있잖아.’ 하윤은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 지금 그녀의 추측은 모두 이 몇 장의 사진에서부터 시작된 거다. 게다가 이게 바로 공태준의 목표일 거고. 하윤은 자기가 꺼낸 사진을 빤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 멈칫했다. ‘잠깐만, 이 사진은 어디서 난 거지?’ ‘사진을 찍은 사람이 혹시 아빠를 감시했나?’ ‘아니야, 감시했다면 아빠가 묵었던 방만 나왔어야 했어.’ 하지만 이 사진 속에는 도준도 있으니 그런 가능성은 배제할 수 있었다. ‘아니면, 사진을 찍은 사람이 사실은 도준 씨를 감시했나?’ ‘그런데 누가 감히 도준 씨를? 설마 공태준? 아니면 다른 사람?’ 주위의 모든 게 마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것처럼 막연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하윤은 우선 이 일에 커다란 물음표 하나를 새겨 둘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한테서 상황을 전해 들었지만 모두가 자기의 생각과 입장을 대입해서 말해줬다. 때문에 지금 수집한 단서는 아직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태준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런 때에 이 사진을 하윤에게 준 건 이성호의 죽음이 도준과 상관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걸 어떻게 알
누군가 민시영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가씨, 방금 민 사장님께서 한 말이 무슨 뜻이죠?” 똑같은 민씨 집안 사람이지만 속내를 알 수 없는 민도준보다 팔방미인 민시영이 더 귀여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시영도 일부러 빙빙 둘러 말했다. “도준 오빠 속을 누가 알겠어요?” 그때, 부사장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러면 방금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게 설마 저희 보고서를 두고 하신 말씀인가요?” 시영은 서류를 닫으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맞든 아니든 뭔 상관이에요? 부사장님께서 보고서를 대충 작성하실 리는 없을 텐데. 이런 걸 걱정할 필요가 뭐 있나요?” 시영한테 한 방 먹은 부사장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네, 맞는 말씀이네요.” 두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들은 상황을 캐물으려던 생각을 바로 접었다. 방금 시영이 그런 말까지 했으니 지금 물어본 사람은 자기의 보고서가 형편없다고 인정하는 꼴이니까. 때문에 그들은 그저 시영이 떠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전화를 끊은 하윤은 도준이 당연히 점심 아니면 저녁에 돌아올 줄 알고 인터넷에서 몇 년 전의 뉴스를 확인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개 찾아보지도 못했을 때 문소리가 들려왔다. 도준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멍하니 자기를 보는 하윤과 마주쳤다. 심지어 하윤은 도준이 코앞까지 다가오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지만 어느새 남자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누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멍 때려? 바람이라도 피우다 걸린 사람처럼.” 하윤은 도준의 힘때문에 고개를 푹 숙인 채 도준이 옆에 앉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어떻게 왔어요?” 도준은 대충 과일 접시 위의 딸기 하나를 포크로 콕 집더니 아리송한 표정으로 하윤을 바라봤다. “언제 오는지 물었잖아?” 하윤은 그 말에 잠깐 멍해졌다. ‘그러니까. 내가 그걸 물었다고 돌아왔다고?’ 도준은 테이블에 놓인 두 개의 물컵을 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뭐야? 정말 바람이라도 피웠던
민도준의 비아냥거림에 권하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전에 성은우 때문에 도준한테 했던 짓을 생각하면 하윤은 도준이 왜 로건을 다시 곁에 두지 않는지 이해가 됐다. 도준은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소파에 기대 앉았다. “하윤 씨가 아니었다면 로건이 쫓길 리 없다기 보다는 오히려 하윤 씨 덕분이 이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는 게 더 맞는 말이지. 그러니까 무슨 책임이든 짊어지려 하지 마.” 도준의 말에 하윤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분명 한편으로는 로건을 도와 사정하고 싶지만 그러면 도준한테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자 하윤은 순간 풀이 죽었다. ‘왜 내 삶에는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이렇게 많은 거야?’ 게다가 매번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를 어려울 선택지만 있으니. 도준은 점점 쓸쓸해지는 하윤의 표정을 보더니 담배를 두 모금 들이켰다. “난 더 이상 로건을 곁에 둘 리 없어. 하윤 씨가 거두어 가겠다면 반대도 하지 않을게.” 하윤은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다. “무슨 뜻이에요?” 그때 도준이 눈빛으로 자기 다리를 가리키며 하윤에게 앉으라는 사인을 보냈다. 이에 약 몇 초간 머뭇거리던 하윤은 끝내 도준의 다리에 앉았다. 하지만 본능 때문에 도준의 가슴에 기대는 대신 시간을 보는 학생처럼 두 손을 자기 다리 위에 올려놓고 꼿꼿이 앉았다. 도준은 하윤을 더 이상 곤란하게 하지 않고 귀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나 요즘 바쁠 거니까 경호원이 있으면 편할 거야.” 하윤은 순간 움찔했다. ‘그러니까 도준 씨는 로건 씨를 곁에 두지 않을 거지만 내 곁에 두는 건 괜찮다는 건가?’ 이렇게 된다면 희연에게 그나마 좋은 소식을 알릴 수 있다는 생각에 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도준을 보는 눈은 더 복잡해졌다. 하윤의 경호원으로 로건을 고용하는 건 도준과는 상관없는 일인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또 한발 물러난 셈이다. 도준의 성격에 이런 선택을 했다는 건 이미 충분히 크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 두 사람은 같은 곳에 서있었지만 사이에 거리를 두고 있어 소원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상황을 눈치챈 순간 하윤은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준 씨가 가뜩이나 나를 믿지 않는데 내가 해원으로 갔다고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게 뻔해.’ 그런 생각이 들자 하윤은 옆에 있는 도준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우리 어디 가요?” 하윤의 작은 손은 도준의 큰 손안에 쏙 들어오더니 겁먹은 듯 손가락 뼈마디를 쓸었다. 그 모습은 마치 도준의 비위를 맞추려면서 마음을 완전히 열지는 못하는 듯했다. 때문에 도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영화 보러 가자.” ‘영화?’ 영화관이야 연인들이 자주 가는 데이트 코스이지만 도준의 입에서 들으니 왠지 위화감이 들었다. 이에 하윤은 더 깊게 파고들었다. “혹시 회사에서 영화관을 인수하려는 거예요?” “아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도준은 하윤의 손을 대충 잡아 밖으로 끌고 나왔다. “그런데 원한다면 하나 만들어. 동림 부지에 만들면 몇 백 개 정도는 거뜬할 걸.” 도준의 말에 하윤은 그제야 자기한테 그 땅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그곳은 회사에서 처리해야 하는 곳이잖아요.” 애초에 민상철도 남한테 그 땅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애를 먹었었고 민시영도 그 땅 덕분에 민상철에게 실력을 인정받았다. 도준은 하윤을 조수석에 밀어 넣으며 피식 웃었다. “회사 사람들이 뭐라고. 그 사람들한테 땅을 맡겨? 그냥 회사 사람들을 인테리어 회사 직원이라고 생각해. 하윤 씨가 그곳을 목장으로 만들고 싶다 해도 그 사람들은 하윤 씨 말을 순순히 들어야 할 걸.” 하윤은 도준의 말에 돌란 듯 되물었다. “저요?” “응. 그 땅으로 뭐 할지 생각해 내면 사람들한테 말하면 돼.” 하윤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그 정도 규모의 땅은 잘 활용만 한다면 엄청난 수익을 벌어들일 거다. 하지만 그 전에 투입
화장실. 권하윤이 칸막이 화장실에 들어서자 밖에서 여자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민주가 저런 여자한테 밀렸다니 참 기가 막하네.” “그러게 말이야. 민주는 박씨 가문 공주님이라도 되지 저 여자는 대체 뭔데?” 밖에 있는 세 여자는 본인이 말하는 그 사람이 현재 문 하나를 사이 두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채 화장을 고치며 하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질 해댔다. 세 사람은 모두 박민주의 친구지만 그렇다고 명문가 여식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가정 형편이 넉넉하여 다른 사람보다 당연히 본인이 뛰어나는 자신감 정도는 가지고 있다. 맨 먼저 입을 연 여자는 유난히 더 잘난 체했다. “내가 아빠한테 물어봤는데 민 사장님이 민주랑 약혼까지 했는데 그 여자가 갑자기 끼어들어 헤어진 거래.” 때마침 옆에 있던 여자가 맞장구쳤다. “얘네 아빠가 박씨 일가 임원이라서 이거 절대 거짓말은 아닐 걸.” “당연하지.” 이화진은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우리 아빠는 회사에서도 기둥 같은 존재라서 절대 나를 속이지 않았을 거야.” “그렇다면 그 약혼식이 아예 박씨 가문에서 자작극을 벌인 거라는 건 아빠한테서 못 들었나 봐?”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세 명은 모두 깜짝 놀라더니 하윤을 본 순간 모두 표정이 굳어버렸다. 하지만 하윤은 세 사람을 가로 지나 세면대에서 손을 씻은 뒤 깨끗이 닦고는 세 사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친구를 위해 나서는 건 좋은데 사실을 좀 알고 나서지 그래?” 별것도 아닌 사람들과 더 얘기하고 싶지 않아 하윤은 이내 화장실을 나가려고 했는데, 그때 마침 뒤에서 분노 속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우리 아빠가 거짓말했다는 거야?” 이화진은 체면이 깎인 게 불만이었는지 괴상야릇한 말투로 비꼬았다. “본인이 남의 관계에 갑자기 끼어든 제3자인데 인정할 리가 있나?” 자기를 원수처럼 노려보는 세 여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하윤은 소 귀에 경을 읽는 게 이런 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 사람은 이미 하윤에게 죄
이화진은 그제야 알아챘다. 눈 앞의 남자는 도리를 따지러 온 게 아니라는 것을. 이 남자는 자기가 뭐라하든 자기 여자를 때린 사람이 누구인지만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민도준의 무서운 눈빛을 보자 이화진은 팔이 더 아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감히 인정하지 못했다. “아니에요. 전 저 여자 때린 적 없어요. 그냥 얘기 좀 하려던 것뿐이었어요.” 그때 도준은 권하윤을 잡고 있는 두 여자를 힐끗 보더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얘기만 했다고?”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두 사람은 얼른 손을 뗐다. 하지만 하윤은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고 팔에는 잡아당겨 남은 듯한 붉은 자국이 어렴풋이 보였다. 도준은 하윤을 자기 앞으로 끌어오더니 아무렇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손가락으로 그녀 이마를 쿡쿡 찔렀다. “화장실 한번 다녀오는 것도 다치면 어떡해? 아주 키링으로 만들어 허리에 달고 다녀야 할 판이네?” 하윤은 여전히 분노와 흥분이 가시지 않아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설명을 했다. “저 여자들이 먼저 제 아빠를 말해서 흥분한 거예요.” 도준은 장난치는 듯 입을 열었다. “흥분한 것 같네. 집단 싸움도 하고.” 그제야 자기가 화장실에서 사람들과 싸웠다는 걸 알아챈 하윤은 어색해졌다. 그때 도준은 존재감을 숨기려고 애쓰는 두 여자를 바라보며 뜬금없는 찬사를 보냈다. “우애가 좋네.” 짧은 머리 여자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이화진이 맞고는 흥분해서 저희는 그저 싸움을 말린 것뿐이에요…….” 도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사람을 도운 거다, 이 말인가? 그러면 내가 오해했네. 아니면 이건 어때? 아까 어떻게 했는지 내 앞에서 다시 연기해 봐. 날 납득하게 하면 보내줄게.” ‘연기 하라고?’ 세 사람은 서로의 눈치를 살필 뿐 누구도 도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인내심을 잃은 도준이 포악해진 얼굴로 세 사람을 바라봤다. “내 말 못 알아 들었어?” 그 때, 세 명 가운데서 키가
권하윤은 온갖 비명과 욕설이 난무하는 화장실 쪽을 힐끗 흘겨보고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벌이라도 받았으니 다행이네.”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입꼬리를 말아 올린 도준은 약간 사악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거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하윤은 그 말에 멈칫했다. “그러면 저 여자들을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거예요?” “왜? 마음 아파?” 도준은 하윤의 머리를 톡톡 쳤다. “걱정할 거 없어. 그냥 선물 좀 주려는 거니까. 그러지 않으면 앞으로 다른 사람까지 괴롭히면 어떡해? 안 그래?” 하윤은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밖에서 다들 듣기 거북할 정도로 소문 내고 다니는 거예요?” 이화진을 포함한 세 사람이 했던 말은 마치 곱게 핀 솜을 들어 아래의 더러운 흙, 마른 나뭇가지와 가시덤불을 보게 하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의 존경과 경멸의 시선을 함께 보내오는 느낌 뭐라 단정짓기도 어려웠다. 도준만 곁에 있다면 하윤의 앞에 와서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는 사람은 당연히 없을 거다. 하지만 뒤에서는 누구나 하윤의 가정을 놓고 손가락질할 거고 겉으로는 사냥한 척 굴지만 사적으로는 이화진보다 더 심한 말을 할 지도 모른다. 그건 하윤뿐만 아니라 나중에 가족이 돌아와도 이어질 비난이다. 지금껏 돌아가고 싶어 하던 평범한 생활은 이미 하윤이 몸 담을 곳도 없어졌다. 한참 동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허리에 힘이 느껴져 하윤은 도준이 자기를 잡아 끄는 대로 그의 품에 반쯤 기댔다. “아직도 슬퍼?” 하윤은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자기의 목적을 생각하고는 이내 말을 바꾸었다. “네. 아빠의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저희 가족은 아마 한 편생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할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방금 전 까지만 해도 하윤을 달래는 듯하던 도준의 눈빛이 이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는 하윤의 허리에 두르고 있던 손으로 그녀를 도와 안마를 해주기 시작했다. “음?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데?” 두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