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민시영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가씨, 방금 민 사장님께서 한 말이 무슨 뜻이죠?” 똑같은 민씨 집안 사람이지만 속내를 알 수 없는 민도준보다 팔방미인 민시영이 더 귀여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시영도 일부러 빙빙 둘러 말했다. “도준 오빠 속을 누가 알겠어요?” 그때, 부사장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러면 방금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게 설마 저희 보고서를 두고 하신 말씀인가요?” 시영은 서류를 닫으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맞든 아니든 뭔 상관이에요? 부사장님께서 보고서를 대충 작성하실 리는 없을 텐데. 이런 걸 걱정할 필요가 뭐 있나요?” 시영한테 한 방 먹은 부사장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네, 맞는 말씀이네요.” 두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들은 상황을 캐물으려던 생각을 바로 접었다. 방금 시영이 그런 말까지 했으니 지금 물어본 사람은 자기의 보고서가 형편없다고 인정하는 꼴이니까. 때문에 그들은 그저 시영이 떠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전화를 끊은 하윤은 도준이 당연히 점심 아니면 저녁에 돌아올 줄 알고 인터넷에서 몇 년 전의 뉴스를 확인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개 찾아보지도 못했을 때 문소리가 들려왔다. 도준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멍하니 자기를 보는 하윤과 마주쳤다. 심지어 하윤은 도준이 코앞까지 다가오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지만 어느새 남자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누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멍 때려? 바람이라도 피우다 걸린 사람처럼.” 하윤은 도준의 힘때문에 고개를 푹 숙인 채 도준이 옆에 앉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어떻게 왔어요?” 도준은 대충 과일 접시 위의 딸기 하나를 포크로 콕 집더니 아리송한 표정으로 하윤을 바라봤다. “언제 오는지 물었잖아?” 하윤은 그 말에 잠깐 멍해졌다. ‘그러니까. 내가 그걸 물었다고 돌아왔다고?’ 도준은 테이블에 놓인 두 개의 물컵을 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뭐야? 정말 바람이라도 피웠던
민도준의 비아냥거림에 권하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전에 성은우 때문에 도준한테 했던 짓을 생각하면 하윤은 도준이 왜 로건을 다시 곁에 두지 않는지 이해가 됐다. 도준은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소파에 기대 앉았다. “하윤 씨가 아니었다면 로건이 쫓길 리 없다기 보다는 오히려 하윤 씨 덕분이 이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는 게 더 맞는 말이지. 그러니까 무슨 책임이든 짊어지려 하지 마.” 도준의 말에 하윤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분명 한편으로는 로건을 도와 사정하고 싶지만 그러면 도준한테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자 하윤은 순간 풀이 죽었다. ‘왜 내 삶에는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이렇게 많은 거야?’ 게다가 매번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를 어려울 선택지만 있으니. 도준은 점점 쓸쓸해지는 하윤의 표정을 보더니 담배를 두 모금 들이켰다. “난 더 이상 로건을 곁에 둘 리 없어. 하윤 씨가 거두어 가겠다면 반대도 하지 않을게.” 하윤은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다. “무슨 뜻이에요?” 그때 도준이 눈빛으로 자기 다리를 가리키며 하윤에게 앉으라는 사인을 보냈다. 이에 약 몇 초간 머뭇거리던 하윤은 끝내 도준의 다리에 앉았다. 하지만 본능 때문에 도준의 가슴에 기대는 대신 시간을 보는 학생처럼 두 손을 자기 다리 위에 올려놓고 꼿꼿이 앉았다. 도준은 하윤을 더 이상 곤란하게 하지 않고 귀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나 요즘 바쁠 거니까 경호원이 있으면 편할 거야.” 하윤은 순간 움찔했다. ‘그러니까 도준 씨는 로건 씨를 곁에 두지 않을 거지만 내 곁에 두는 건 괜찮다는 건가?’ 이렇게 된다면 희연에게 그나마 좋은 소식을 알릴 수 있다는 생각에 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도준을 보는 눈은 더 복잡해졌다. 하윤의 경호원으로 로건을 고용하는 건 도준과는 상관없는 일인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또 한발 물러난 셈이다. 도준의 성격에 이런 선택을 했다는 건 이미 충분히 크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 두 사람은 같은 곳에 서있었지만 사이에 거리를 두고 있어 소원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상황을 눈치챈 순간 하윤은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준 씨가 가뜩이나 나를 믿지 않는데 내가 해원으로 갔다고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게 뻔해.’ 그런 생각이 들자 하윤은 옆에 있는 도준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우리 어디 가요?” 하윤의 작은 손은 도준의 큰 손안에 쏙 들어오더니 겁먹은 듯 손가락 뼈마디를 쓸었다. 그 모습은 마치 도준의 비위를 맞추려면서 마음을 완전히 열지는 못하는 듯했다. 때문에 도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영화 보러 가자.” ‘영화?’ 영화관이야 연인들이 자주 가는 데이트 코스이지만 도준의 입에서 들으니 왠지 위화감이 들었다. 이에 하윤은 더 깊게 파고들었다. “혹시 회사에서 영화관을 인수하려는 거예요?” “아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도준은 하윤의 손을 대충 잡아 밖으로 끌고 나왔다. “그런데 원한다면 하나 만들어. 동림 부지에 만들면 몇 백 개 정도는 거뜬할 걸.” 도준의 말에 하윤은 그제야 자기한테 그 땅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그곳은 회사에서 처리해야 하는 곳이잖아요.” 애초에 민상철도 남한테 그 땅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애를 먹었었고 민시영도 그 땅 덕분에 민상철에게 실력을 인정받았다. 도준은 하윤을 조수석에 밀어 넣으며 피식 웃었다. “회사 사람들이 뭐라고. 그 사람들한테 땅을 맡겨? 그냥 회사 사람들을 인테리어 회사 직원이라고 생각해. 하윤 씨가 그곳을 목장으로 만들고 싶다 해도 그 사람들은 하윤 씨 말을 순순히 들어야 할 걸.” 하윤은 도준의 말에 돌란 듯 되물었다. “저요?” “응. 그 땅으로 뭐 할지 생각해 내면 사람들한테 말하면 돼.” 하윤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그 정도 규모의 땅은 잘 활용만 한다면 엄청난 수익을 벌어들일 거다. 하지만 그 전에 투입
화장실. 권하윤이 칸막이 화장실에 들어서자 밖에서 여자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민주가 저런 여자한테 밀렸다니 참 기가 막하네.” “그러게 말이야. 민주는 박씨 가문 공주님이라도 되지 저 여자는 대체 뭔데?” 밖에 있는 세 여자는 본인이 말하는 그 사람이 현재 문 하나를 사이 두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채 화장을 고치며 하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질 해댔다. 세 사람은 모두 박민주의 친구지만 그렇다고 명문가 여식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가정 형편이 넉넉하여 다른 사람보다 당연히 본인이 뛰어나는 자신감 정도는 가지고 있다. 맨 먼저 입을 연 여자는 유난히 더 잘난 체했다. “내가 아빠한테 물어봤는데 민 사장님이 민주랑 약혼까지 했는데 그 여자가 갑자기 끼어들어 헤어진 거래.” 때마침 옆에 있던 여자가 맞장구쳤다. “얘네 아빠가 박씨 일가 임원이라서 이거 절대 거짓말은 아닐 걸.” “당연하지.” 이화진은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우리 아빠는 회사에서도 기둥 같은 존재라서 절대 나를 속이지 않았을 거야.” “그렇다면 그 약혼식이 아예 박씨 가문에서 자작극을 벌인 거라는 건 아빠한테서 못 들었나 봐?”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세 명은 모두 깜짝 놀라더니 하윤을 본 순간 모두 표정이 굳어버렸다. 하지만 하윤은 세 사람을 가로 지나 세면대에서 손을 씻은 뒤 깨끗이 닦고는 세 사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친구를 위해 나서는 건 좋은데 사실을 좀 알고 나서지 그래?” 별것도 아닌 사람들과 더 얘기하고 싶지 않아 하윤은 이내 화장실을 나가려고 했는데, 그때 마침 뒤에서 분노 속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우리 아빠가 거짓말했다는 거야?” 이화진은 체면이 깎인 게 불만이었는지 괴상야릇한 말투로 비꼬았다. “본인이 남의 관계에 갑자기 끼어든 제3자인데 인정할 리가 있나?” 자기를 원수처럼 노려보는 세 여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하윤은 소 귀에 경을 읽는 게 이런 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 사람은 이미 하윤에게 죄
이화진은 그제야 알아챘다. 눈 앞의 남자는 도리를 따지러 온 게 아니라는 것을. 이 남자는 자기가 뭐라하든 자기 여자를 때린 사람이 누구인지만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민도준의 무서운 눈빛을 보자 이화진은 팔이 더 아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감히 인정하지 못했다. “아니에요. 전 저 여자 때린 적 없어요. 그냥 얘기 좀 하려던 것뿐이었어요.” 그때 도준은 권하윤을 잡고 있는 두 여자를 힐끗 보더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얘기만 했다고?”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두 사람은 얼른 손을 뗐다. 하지만 하윤은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고 팔에는 잡아당겨 남은 듯한 붉은 자국이 어렴풋이 보였다. 도준은 하윤을 자기 앞으로 끌어오더니 아무렇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손가락으로 그녀 이마를 쿡쿡 찔렀다. “화장실 한번 다녀오는 것도 다치면 어떡해? 아주 키링으로 만들어 허리에 달고 다녀야 할 판이네?” 하윤은 여전히 분노와 흥분이 가시지 않아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설명을 했다. “저 여자들이 먼저 제 아빠를 말해서 흥분한 거예요.” 도준은 장난치는 듯 입을 열었다. “흥분한 것 같네. 집단 싸움도 하고.” 그제야 자기가 화장실에서 사람들과 싸웠다는 걸 알아챈 하윤은 어색해졌다. 그때 도준은 존재감을 숨기려고 애쓰는 두 여자를 바라보며 뜬금없는 찬사를 보냈다. “우애가 좋네.” 짧은 머리 여자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이화진이 맞고는 흥분해서 저희는 그저 싸움을 말린 것뿐이에요…….” 도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사람을 도운 거다, 이 말인가? 그러면 내가 오해했네. 아니면 이건 어때? 아까 어떻게 했는지 내 앞에서 다시 연기해 봐. 날 납득하게 하면 보내줄게.” ‘연기 하라고?’ 세 사람은 서로의 눈치를 살필 뿐 누구도 도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인내심을 잃은 도준이 포악해진 얼굴로 세 사람을 바라봤다. “내 말 못 알아 들었어?” 그 때, 세 명 가운데서 키가
권하윤은 온갖 비명과 욕설이 난무하는 화장실 쪽을 힐끗 흘겨보고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벌이라도 받았으니 다행이네.”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입꼬리를 말아 올린 도준은 약간 사악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거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하윤은 그 말에 멈칫했다. “그러면 저 여자들을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거예요?” “왜? 마음 아파?” 도준은 하윤의 머리를 톡톡 쳤다. “걱정할 거 없어. 그냥 선물 좀 주려는 거니까. 그러지 않으면 앞으로 다른 사람까지 괴롭히면 어떡해? 안 그래?” 하윤은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밖에서 다들 듣기 거북할 정도로 소문 내고 다니는 거예요?” 이화진을 포함한 세 사람이 했던 말은 마치 곱게 핀 솜을 들어 아래의 더러운 흙, 마른 나뭇가지와 가시덤불을 보게 하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의 존경과 경멸의 시선을 함께 보내오는 느낌 뭐라 단정짓기도 어려웠다. 도준만 곁에 있다면 하윤의 앞에 와서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는 사람은 당연히 없을 거다. 하지만 뒤에서는 누구나 하윤의 가정을 놓고 손가락질할 거고 겉으로는 사냥한 척 굴지만 사적으로는 이화진보다 더 심한 말을 할 지도 모른다. 그건 하윤뿐만 아니라 나중에 가족이 돌아와도 이어질 비난이다. 지금껏 돌아가고 싶어 하던 평범한 생활은 이미 하윤이 몸 담을 곳도 없어졌다. 한참 동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허리에 힘이 느껴져 하윤은 도준이 자기를 잡아 끄는 대로 그의 품에 반쯤 기댔다. “아직도 슬퍼?” 하윤은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자기의 목적을 생각하고는 이내 말을 바꾸었다. “네. 아빠의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저희 가족은 아마 한 편생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할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방금 전 까지만 해도 하윤을 달래는 듯하던 도준의 눈빛이 이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는 하윤의 허리에 두르고 있던 손으로 그녀를 도와 안마를 해주기 시작했다. “음?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데?” 두 사람
“혹시 화났어요.” 낮은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민도준은 입꼬리를 올리며 이토록 어리석은 질문을 한 하윤을 비웃었다. 지금 당장 하윤을 목 졸라 죽이고 싶은 심정마저 드는데 화가 났냐니? 등 뒤의 하윤은 아무런 답도 얻지 못하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기가 이런 요구를 제기하면 도준이 화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예전처럼 인사도 없이 몰래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현재 직면한 문제도 충분히 많은데 또 새로운 문제까지 더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때문에 하윤은 반드시 도준을 설득해야 했다. 이 곳은 개발구라서 지세가 높아 뜨거운 바람이 휙휙 얼굴에 불어왔다. 그 순간 등 뒤가 뜨거워 나며 두 팔이 자기 허리를 꼭 껴안은 걸 느낀 도준은 담배를 피우던 손을 흠칫 멈췄다. 하지만 도준은 하윤의 말을 무시한 채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할지 지켜봤다. “뭐라고 말 좀 하면 안 돼요? 저 도준 씨랑 상의해 보고 싶어요.” 도준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약하기 그지없었다. 하윤이 숨을 죽이고 답을 기다리는 동안 손목이 꽉 조이더니 앞으로 당겨졌다. “그래. 상의하겠다고? 그러면 내가 동의하지 않아도 되는 거겠네?” 하윤은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 하윤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던 도준은 멍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니까 상의하자는 건 나더러 동의하라는 뜻이네?” 하윤은 입을 뻐끔거릴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이에 하윤은 누그러든 태도로 부탁했다. “전 그저 잠깐 조사만 하고 다시 돌아올 거예요…….” 말을 채 끝맺지도 않았는데 하윤의 몸은 남자의 가슴에 부딪혔다. 나른한 윗몸이 남자의 단단한 근육에 부딪히자 하윤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다음 순간, 도준이 담배를 낀 손으로 하윤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사건만 조사하고 돌아오겠다고? 지금 나를 어린애로 보는 거야?” 하윤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민도준은 권하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중도에 민씨 저택 쪽에 문제가 생겼다는 연락을 받았다. 도준이 전화를 끊자 하윤은 얼른 그를 바라봤다. “가는 거예요?” “먼저 하윤 씨부터 집에 데려다 주고.” “급한 일이라면 저 혼자 돌아가도 돼요.” 도준은 손을 뻗어 하윤의 손을 몇 번 주무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고 어디 가서 사고 치고 나를 불러내려고?” 그 말에 하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영화관에서 있었던 일은 사고였어요.” “하윤 씨가 말만 잘 들었어 봐, 그런 사고가 자주 일어날 리가 없지.” 도준은 끝내 하윤을 집까지 바래다줬다. 하지만 하윤은 주차장으로 가는 대신 그저 아파트 단지 부근에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문을 열려는 순간 손목이 잡혀 돌아봤더니 도준이 눈썹을 치켜 올린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냥 이렇 간다고?” 하윤은 순간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게, 도준과 다정한 행위를 할 때마자 아버지한테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었으니까. 아버지의 죽음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도준이 그 중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도 아직 모르기에 하윤은 이런 상황에서 도준과 연애 감정을 이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도준이 자기에 대한 “통제”를 풀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너무 싸늘하게 대할 수도 없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끝에 하윤은 끝내 느릿느릿 다가가 도준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조심히 다녀와요.” 막 물려서려는 그때, 하윤의 목덜미에 힘이 가해지더니 순간 도준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덥쳤다. 너무나도 집요한 입맞춤은 하윤에게 숨을 쉴 틈조차 주지 않았다. 어젯밤 꾹꾹 참았던 정욕은 이 순간 그대로 터져버렸다. 하지만 굳은살이 박힌 큰 손이 허리 라인을 따라 옷 안으로 들어오려는 순간 하윤은 있는 힘껏 도준을 밀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 마요…….” 이곳에서 그것도 이런 순간 이 짓을 하는 건 옳지 못했기에 도준은 하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았어. 그냥 입만 맞추려는 것뿐이야.” 그 뒤로 도준의 입맞춤은 많이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