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미란은 도준을 고발하면서 속으로 머리를 굴렸다. 조관성이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더욱이 조관성의 도움을 받아보겠다고 접촉한 사람들은 모두 거절 당했었고.만약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도준을 자기 입맛대로 굴릴 수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조관성 때문에 공미란은 격지 않아도 될 번거로움을 겪었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성정이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공미란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남의 편도 들어주지 않을 테니까.더욱이 지금 증인과 증거 모두 있는 상황이라 민도준을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생각에 공미란은 웃음이 절로 났다.공미란의 고발에 조관성은 이내 도준을 바라봤다.“사실입니까?”하윤은 조관성의 차가운 표정에 도준이 끌려갈까 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고 따라서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도준은 하윤이 놀라 기절할까 봐 하윤의 어깨를 꼭 잡은 채로 조관성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제 집사람이 겁이 많아서 그러는데, 혹시 저쪽에서 얘기할 수 있을까요?”서로 안면이 있는 듯한 둘의 대화에 침착하기만 하던 공미란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자, 자네가 조 국장을 어떻게 아는가?”한편 하윤은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심지어 자기가 손을 놓아 버리면 다시는 도준을 볼 수 없게 될까 봐 도준의 팔을 꼭 끌어안은 채 머리를 저었다.“저 무섭지 않아요. 여기서 말해요.”조관성은 날카로운 눈매를 찌푸리며 물었다.“방금 폭발 민 사장님이 낸 겁니까?”도준은 통쾌하게 인정했다.“네, 맞아요.”그 말에 공미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준이 조관성과 아는 사이든 아니든 죄를 인정했으니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게 된 거니까.군무기를 은닉하고 민가를 습격한 죄는 가볍게 처벌할 수 있는 죄목이 아니다.이에 공미란은 거드름을 피우며 끼어들었다.“조 국장님, 해원에서 이런 악랄한 사건이 일어나 가족 모두가 불안에 떨고 있으니 부디 엄벌해 주세요.”조관성은 도준을 힐
민도준은 더 이상 말하기 귀찮았는지 외투 호주머니에서 4장의 종이를 꺼내 펼쳐 보이며 끝을 손가락을 툭 튕겼다.“여기 명확하게 적혀 있는데, 돋보기라도 껴야 잘 보이시려나?”종이에는 공씨 가문이 자발적으로 자택을 실험 기지로 내놓고 모든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게 명시되어 있었다.하지만 공미란은 아무리 봐도 믿기지 않았다. 특히 똑똑히 보이는 서명과 공인을 보자 더욱 황당했다.“조작하면 누가 모를 줄 알아?”그때 도준이 복도 끝에 나타난 인영을 힐끗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공 가주님, 그쪽 할머니께서 이 사인에 대해 묻는데요?”‘공태준? 공태준이 여기 있다고?’하윤은 도준의 눈길이 향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랬더니 역시나 공태준이 어두운 곳에서 점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그 순간 하윤은 고은지와 공천하는 공태준이 벌을 받고 있다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게, 태준은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외상도 보이지 않았지만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으니까.“합의서는 진짜예요. 제가 직접 사인했고요.”태준의 말에 공미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무서운 표정으로 공태준을 죽일 듯 노려볼 뿐.그때 도준이 손을 펴 보이며 말했다.“보세요, 조 국장님. 제가 말했잖아요. 저 착한 시민입니다.”조관성은 눈살을 찌푸린 채 도준과 몇 초간 눈빛을 교환하더니 이내 눈을 피하고는 떠나기 전 낮게 경고했다.“도 넘는 행동하지 마세요.”“당연하죠.”도준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우여곡절 끝에 조관성마저 떠나자 하윤은 그제야 이 모든 게 도준이 계획한 것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렇다면 아까 생이별하는 것처럼 군 것도…….모두 거짓이라는 소리다.아까 자기가 했던 ‘진심어린’ 말을 떠올리자 하윤은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하지만 화가 잔뜩 나 있는 상태라서 태준이 자기를 주시하고 있는 건 눈치채지 못했다.몇 초 뒤, 태준은 눈을 내리 깔더니 공미란을 향해 걸어갔다.“짝!”곧이어 뺨 때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하윤은
민도준은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옆에 앉은 권하윤이 목을 빼들다 못해 핸드폰 안으로 들어갈 기세를 보이자 도준은 아예 스피커 모드로 전환했다.조관성은 겉치레 적인 말도 없이 바로 볼론부터 얘기했다.“오늘 정말 실험한 거 맞아요?”마침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자 도준은 핸들을 돌리며 대답했다.“당연하죠.”“흥.”조관성은 콧방귀를 뀌더니 도준을 차갑게 꾸짖었다.“공적인 이름을 빌어 사욕을 채우는 걸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조수석에 앉은 하윤은 조관성이 책임을 물을까 봐 불안한 듯 도준을 바라봤다.하지만 그러면서도 도준이 잘 설명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도준은 하윤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오히려 재밌다는 듯한 목소리와 말투로 장난기 있게 말했다.“역시 조 국장님의 눈은 못 속인다니까요.”“비행기 태우지 마세요!”조관성은 잠시 침묵하더니 경고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겠지만 다음 번은 없다는 거 알아두세요.”전화가 끊기자 하윤은 긴장한 듯 도준을 바라봤다.“도준 씨가 실험 때문에 그 일을 벌인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데 괜찮아요?”“실험 때문이 아니라니? 실험 때문 맞아. 상황을 설정해서 시뮬레이션 진행한 거고, 공씨 집안에서 동의했는데 무슨 일이 있겠어?”하윤은 입을 뻐끔거리며 맞받아 치려고 했지만 좀처럼 뭐라 말해야 할 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보기엔 황당한 일이지만 도준은 확실히 오래 전부터 이 일에 대한 계획을 세워왔다.그걸 인지한 하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기대더니 입을 삐죽거렸다.“그러니까 도준 씨가 꾸민 일인데 저만 도준 씨가 무슨 일일이라도 날까 봐 가슴 졸였던 거네요?”차가 마침 호텔에 도착하자 도준은 하윤을 차에서 끌어내리며 심장을 토닥여줬다.“마음을 제대로 내비치지 않았다간 안에서 곰팡이 끼겠어. 이건 나를 탓하면 안 되지.”하윤은 콧방귀를 뀌었지만 그래도 속으로는 기뻤다.도준이
던은 화를 내는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재빨리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안쪽을 향해 다정하게 손을 흔들었다. “좋은 시간 보내요.” “…….” 이윽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어깨를 으쓱거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구애기에 있는 수컷은 참 무섭네.’ 신중을 기하기 위해 던은 다른 쪽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호텔을 나가기 전 문자 한 통을 받게 되었다. [던 씨, 아까는 죄송했어요. 혹시 공태준이 위험한지 알아봐 줄 수 있어요? 정말 고마워요.] 문자를 보낸 뒤 화장실에 숨어 있던 권하윤은 민도준이 보기라도 할까 봐 얼른 기록을 지워버렸다. 공씨 저택에서 공미란을 본 하윤은 공씨 저택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알고 있다. 더욱이 공태준이 어떤 상황에 직면할 것이며 오늘 일로 잔인한 일을 당하지 않을지 알 수 없었다. 때문에 도준에게 말하는 대신 던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 새벽, 공씨 저택. 질질 끌리는 듯한 발소리가 적막한 사당에서 메아리치고, 신발 밑창이 무거운 쇠사슬처럼 바닥을 스치며 복도를 지나 사당 문 앞에 멈췄다. 높이가 십여 미터나 되는 사당 안에는 위패가 가득 놓여 있었고 한 층 한 층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어두워지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차갑고도 검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던 여인은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언제나 신사 같던 남자는 이 시각 이마에 식은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으며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땀방울이 더해지더니 바닥에 무릎을 꿇는 동시에 어두운 바닥으로 떨어져 사라졌다. 고은지는 남자를 힐끗 보고는 다시 위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요?” 태준은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피비린내를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태준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으면서도 무릎을 꿇고 있는 자세는 여전히 흐트러짐이 없었다. 사당에서는 휴식할 수 없다. 흐트러진 자세를 보이면 망자에 대한 불경으로 보일 테니까. 그때 흰 알약 두 개가 태준 앞에 쑥 나타났다. “
몇 글자도 안 되는 문자를 본 순간 권하윤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전에는 그나마 공태준이 자기를 도와줬지만 속이기도 했으니 비긴 셈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지만, 지금 태준은 하윤을 위해 공씨 가문과 척진 상태다. 하윤은 태준이 앞으로 어떤 일을 당할지도, 왜 이런 짓을 한지도 알지 못했다. ‘마음 때문인가?’ 하지만 하루도 함께 지낸 적이 없고 태준도 하윤에게서 즐거움을 얻은 적이 없는 데 그럴 이유가 없었다. ‘대체 뭐지?’ 순간, 공씨 저택을 떠날 때 문틈새로 보이던 장면이 반복적으로 하윤의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무릎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는 들릴 듯 말 듯 작았지만 귀청을 찢는 듯 크게 들렸었다. 이리저리 생각하던 하윤은 끝내 안부 문자를 보냈다. [어제 도와줘서 고마워. 왕 사모님이 괴롭히지는 않았어?] 하윤은 등을 돌린 채 침대에 누워 문자를 보냈다. 옆에 누워 있는 남자가 이미 눈을 뜬 것은 꿈에도 모른 채. “지금 뭐 해?” 하윤은 깜짝 놀라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핸드폰이 이불 위에 떨어지기도 전에 남자의 손안에 들어갔다. 커다란 손은 핸드폰을 꽉 움켜쥔 동시 하윤의 심장도 움켜쥐었다. 도준은 문자를 힐끗 보더니 이를 악물었다. “왜? 공태준이 걱정돼?” 왠지 모르게 바람을 피우다 들킨 것처럼 하윤은 당황하여 말소리조차 작아졌다. “저는 그저 어제 우리를 도와준 게 고마워서…….” 도준의 눈에는 흥미로움이 더해졌다. ‘말은 참 잘 한다니까. 본인을 도운 건데 우리라고 선을 긋다니.’ 핸드폰을 쥔 도준의 손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동안 하윤의 심장도 따라서 오르락내리락했다. “고맙다고?” 하윤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움 외엔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것을 강력 어필했다. 그 동작에 도준이 피식 웃었다. “그래?” 하윤이 겨우 고비를 넘겼다고 안심하려던 찰나, 도준은 핸드폰으로 하윤의 볼을 톡톡 두드리더니 위험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 옆에 누워서 딴 놈 달랠 정도로 고마웠어?” “아니, 그게 아니
청천벽력 같은 말에 권하윤은 그제야 오늘 민도준이 떠나는 날이라는 걸 인지했다. 마치 수소 가스를 마신 풍선처럼 언제나 들떠 있던 하윤의 마음은 한순간 쪼그라들어 바닥에 툭 떨어졌다. 하윤은 도준이 떠나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을 들려던 찰나, 도준의 무서운 눈빛에 겁을 먹고 다시 내렸다. 이별의 슬픔에 하윤의 눈시울은 순간 붉어졌다. “왜 이렇게 갑자기…….” “이게 갑작스러워?” 도준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휘어진 입꼬리는 오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내가 떠나면 그렇게 알고 싶던 일을 마음껏 조사하고, 걱정하고 싶었던 사람 마음껏 걱정해도 되잖아. 숨어서 몰래 할 필요 없이.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윤은 고개를 힘껏 저었다. “제가 걱정하는 사람은 도준 씨뿐이에요. 공태준은 그저…… 미안해서…….” 도준을 곁에 붙잡아 두기 위해 하윤은 자기가 고은지와 했던 거래를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버렸다. 그러고는 자기가 부도덕한 거래를 했다는 자각이 들었는지 목을 한껏 움츠렸다. “저도 승낙하지 않으려 했는데 제가 빠져나가지 않으면 도준 씨가 저 때문에 공씨 집안 사람들에게 휘둘리게 될 거라고 해서 동의했어요. 공태준한테 미안한 것보다 도준 씨가 손해 보는 게 더 싫으니까.” 하윤이 은지를 태준과 결혼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다는 말을 듣자 도준의 표정은 약간 미묘해졌다. 그도 그럴 게, 양심을 중요시하는 하윤에게 이렇듯 부도덕한 일을 하게 한 것은 곤란한 일이었을 테니까. 하윤은 자기의 말이 도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여전히 자아성찰을 하고 있었다. “제가 공태준을 이용했는데 공태준은 저를 도우려고 했다는 걸 알고 미안해서 그랬어요.” 그 말에 도준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럼 나한테는 미안하지 않아?” 하윤은 도준의 말에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문제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그러다가 잠시 뒤, 생각도 거치지 않은 답을 내뱉었다. “그런데 도준 씨
질문을 던진 권하윤도 조마조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명 민도준을 곁에 오래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함께 하기를 바랐다. 그때 도준이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빙빙 돌리더니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가는 게 싫어?” 하윤은 도준의 마음이 약해진 것으로 착각하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 하지만 돌아온 것은 조롱 섞인 웃음이었다. 하윤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도준을 빤히 바라봤지만, 확인 사살 같은 조롱이 이어졌다. “나랑 같이 가자고 할 때는 싫다고 하더니 하윤 씨를 도와 위험을 없애 주고 남으라고 한다고 남기까지 해야 해? 또 뭘 원하는데? 어디 한 번 다 말해 봐.” 순간 끼얹어진 찬물 같은 말이 하윤의 희망을 꺼버렸다. 구구절절 틀린 말 하나 없어 더더욱 하윤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하윤은 그간 간과했던 것을 다시 되돌아봤다. 도준이 지금껏 자기를 봐주고 있다는 것을. 경성에 머무르기 싫다고 해서 놓아줬는데 하윤은 도준이 자기를 무시한다며 졸라대고, 해원이 위험한 것을 알면서 도준과 함께 떠나려 하지 않았고. 따지고 보면 하윤은 자기가 위험에 처하면 도준이 모른 체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기가 어떤 선택을 하든 도준이라는 퇴로가 있었으니까. 때문에 겁도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했었다. 그때마다 한 번 또 한 번 도준의 심기를 건드렸으면서. 자기의 행복은 도준의 끝없는 양보 덕이라는 것을 완전히 잊은 채. 자기가 얼마나 이기적인 행동을 했었는지 깨달은 하윤은 순간 몸 둘 바를 몰랐다. “아니에요.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도준 씨와 같이 있고 싶어서…….” 하윤이 또다시 변명을 사랑으로 포장하자 도준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나랑 같이 있고 싶다면서 왜 기회를 줄 때마다 반대로 선택하지?” 성은우 때부터 지금까지 하윤은 단 한 번도 도준을 선택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 대한 빚은 갚아야 한다는 걸 알고, 가족의 안위는 생각하면서 도준한테만 언제나 빈
강한 좌절감과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한데 섞여 권하윤의 등줄기를 부러트리고 모두 뽑아가는 듯했다. 하윤은 온 몸의 힘이 빠진 채로 어디에 기대야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몰랐다. …… 호텔 자동문을 나서는 순간 눈치도 없이 뜨겁게 비치는 햇빛에 민도준은 더 짜증이 났다. 도준의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차를 몰고 달려온 한민혁은 얼른 문을 열었다. “도준 형…….” 마치 살인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섬뜩한 도준의 얼굴을 보자 민혁은 하려던 말을 삼켰다. ‘아이고, 또 틀어졌나 보네.’ 도준이 차에 앉자 하윤은 얼른 운전석으로 돌아가 문을 닫았다. 하지만 의자에 앉기 바쁘게, 차창문을 두드리는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창 밖에 있는 여인은 달려온 것처럼 머리가 산발이 된 채 다급히 문을 쾅쾅 두드렸다. “잠깐만요.” “하윤 씨?” 민혁이 너무 놀라 차에서 내리려 하던 그때, 뒤에 앉아 있던 남자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출발해.” ‘엥?’ 한쪽은 도준이고, 한쪽은 도준의 한평생을 행복하게 해줄 사람인데, 선택하라는 자체가 민혁에게는 고역이었다. 이에 민혁은 느릿느릿 열쇠를 꺼내 할머니가 바늘에 실을 꿰는 것처럼 천천히 꽂아 넣었다. 다행히 하윤은 민혁을 막아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아챘는지 뒤좌석으로 달려갔다. “저 할 말 있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다급한 표정과 새하얗게 질린 낯빛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하지만 차 안의 도준은 하윤에게 눈빛조차 주지 않고 발로 민혁의 의자를 쾅 찼다. “빨리 빨리 못해?” 등뒤에서 느껴지는 발길질에 민혁은 현혹된 듯 열쇠를 구멍에 넣고 시동을 걸었다. 엔진 소리가 들리자 하윤의 조급함도 절정에 달했다. 이에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도준 씨랑 같이 갈래요!” “끼이익!” 액셀을 밟던 민혁은 다급히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얼굴이 핸들에 쿵 하고 부딪혔다. 이윽고 엎드린 자세 그대로 잠가 버렸던 차 문을 열었다. 겨우 차에 오른 하윤은 곧바로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