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글자도 안 되는 문자를 본 순간 권하윤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전에는 그나마 공태준이 자기를 도와줬지만 속이기도 했으니 비긴 셈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지만, 지금 태준은 하윤을 위해 공씨 가문과 척진 상태다. 하윤은 태준이 앞으로 어떤 일을 당할지도, 왜 이런 짓을 한지도 알지 못했다. ‘마음 때문인가?’ 하지만 하루도 함께 지낸 적이 없고 태준도 하윤에게서 즐거움을 얻은 적이 없는 데 그럴 이유가 없었다. ‘대체 뭐지?’ 순간, 공씨 저택을 떠날 때 문틈새로 보이던 장면이 반복적으로 하윤의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무릎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는 들릴 듯 말 듯 작았지만 귀청을 찢는 듯 크게 들렸었다. 이리저리 생각하던 하윤은 끝내 안부 문자를 보냈다. [어제 도와줘서 고마워. 왕 사모님이 괴롭히지는 않았어?] 하윤은 등을 돌린 채 침대에 누워 문자를 보냈다. 옆에 누워 있는 남자가 이미 눈을 뜬 것은 꿈에도 모른 채. “지금 뭐 해?” 하윤은 깜짝 놀라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핸드폰이 이불 위에 떨어지기도 전에 남자의 손안에 들어갔다. 커다란 손은 핸드폰을 꽉 움켜쥔 동시 하윤의 심장도 움켜쥐었다. 도준은 문자를 힐끗 보더니 이를 악물었다. “왜? 공태준이 걱정돼?” 왠지 모르게 바람을 피우다 들킨 것처럼 하윤은 당황하여 말소리조차 작아졌다. “저는 그저 어제 우리를 도와준 게 고마워서…….” 도준의 눈에는 흥미로움이 더해졌다. ‘말은 참 잘 한다니까. 본인을 도운 건데 우리라고 선을 긋다니.’ 핸드폰을 쥔 도준의 손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동안 하윤의 심장도 따라서 오르락내리락했다. “고맙다고?” 하윤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움 외엔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것을 강력 어필했다. 그 동작에 도준이 피식 웃었다. “그래?” 하윤이 겨우 고비를 넘겼다고 안심하려던 찰나, 도준은 핸드폰으로 하윤의 볼을 톡톡 두드리더니 위험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 옆에 누워서 딴 놈 달랠 정도로 고마웠어?” “아니, 그게 아니
청천벽력 같은 말에 권하윤은 그제야 오늘 민도준이 떠나는 날이라는 걸 인지했다. 마치 수소 가스를 마신 풍선처럼 언제나 들떠 있던 하윤의 마음은 한순간 쪼그라들어 바닥에 툭 떨어졌다. 하윤은 도준이 떠나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을 들려던 찰나, 도준의 무서운 눈빛에 겁을 먹고 다시 내렸다. 이별의 슬픔에 하윤의 눈시울은 순간 붉어졌다. “왜 이렇게 갑자기…….” “이게 갑작스러워?” 도준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휘어진 입꼬리는 오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내가 떠나면 그렇게 알고 싶던 일을 마음껏 조사하고, 걱정하고 싶었던 사람 마음껏 걱정해도 되잖아. 숨어서 몰래 할 필요 없이.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윤은 고개를 힘껏 저었다. “제가 걱정하는 사람은 도준 씨뿐이에요. 공태준은 그저…… 미안해서…….” 도준을 곁에 붙잡아 두기 위해 하윤은 자기가 고은지와 했던 거래를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버렸다. 그러고는 자기가 부도덕한 거래를 했다는 자각이 들었는지 목을 한껏 움츠렸다. “저도 승낙하지 않으려 했는데 제가 빠져나가지 않으면 도준 씨가 저 때문에 공씨 집안 사람들에게 휘둘리게 될 거라고 해서 동의했어요. 공태준한테 미안한 것보다 도준 씨가 손해 보는 게 더 싫으니까.” 하윤이 은지를 태준과 결혼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다는 말을 듣자 도준의 표정은 약간 미묘해졌다. 그도 그럴 게, 양심을 중요시하는 하윤에게 이렇듯 부도덕한 일을 하게 한 것은 곤란한 일이었을 테니까. 하윤은 자기의 말이 도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여전히 자아성찰을 하고 있었다. “제가 공태준을 이용했는데 공태준은 저를 도우려고 했다는 걸 알고 미안해서 그랬어요.” 그 말에 도준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럼 나한테는 미안하지 않아?” 하윤은 도준의 말에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문제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그러다가 잠시 뒤, 생각도 거치지 않은 답을 내뱉었다. “그런데 도준 씨
질문을 던진 권하윤도 조마조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명 민도준을 곁에 오래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함께 하기를 바랐다. 그때 도준이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빙빙 돌리더니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가는 게 싫어?” 하윤은 도준의 마음이 약해진 것으로 착각하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 하지만 돌아온 것은 조롱 섞인 웃음이었다. 하윤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도준을 빤히 바라봤지만, 확인 사살 같은 조롱이 이어졌다. “나랑 같이 가자고 할 때는 싫다고 하더니 하윤 씨를 도와 위험을 없애 주고 남으라고 한다고 남기까지 해야 해? 또 뭘 원하는데? 어디 한 번 다 말해 봐.” 순간 끼얹어진 찬물 같은 말이 하윤의 희망을 꺼버렸다. 구구절절 틀린 말 하나 없어 더더욱 하윤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하윤은 그간 간과했던 것을 다시 되돌아봤다. 도준이 지금껏 자기를 봐주고 있다는 것을. 경성에 머무르기 싫다고 해서 놓아줬는데 하윤은 도준이 자기를 무시한다며 졸라대고, 해원이 위험한 것을 알면서 도준과 함께 떠나려 하지 않았고. 따지고 보면 하윤은 자기가 위험에 처하면 도준이 모른 체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기가 어떤 선택을 하든 도준이라는 퇴로가 있었으니까. 때문에 겁도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했었다. 그때마다 한 번 또 한 번 도준의 심기를 건드렸으면서. 자기의 행복은 도준의 끝없는 양보 덕이라는 것을 완전히 잊은 채. 자기가 얼마나 이기적인 행동을 했었는지 깨달은 하윤은 순간 몸 둘 바를 몰랐다. “아니에요.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도준 씨와 같이 있고 싶어서…….” 하윤이 또다시 변명을 사랑으로 포장하자 도준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나랑 같이 있고 싶다면서 왜 기회를 줄 때마다 반대로 선택하지?” 성은우 때부터 지금까지 하윤은 단 한 번도 도준을 선택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 대한 빚은 갚아야 한다는 걸 알고, 가족의 안위는 생각하면서 도준한테만 언제나 빈
강한 좌절감과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한데 섞여 권하윤의 등줄기를 부러트리고 모두 뽑아가는 듯했다. 하윤은 온 몸의 힘이 빠진 채로 어디에 기대야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몰랐다. …… 호텔 자동문을 나서는 순간 눈치도 없이 뜨겁게 비치는 햇빛에 민도준은 더 짜증이 났다. 도준의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차를 몰고 달려온 한민혁은 얼른 문을 열었다. “도준 형…….” 마치 살인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섬뜩한 도준의 얼굴을 보자 민혁은 하려던 말을 삼켰다. ‘아이고, 또 틀어졌나 보네.’ 도준이 차에 앉자 하윤은 얼른 운전석으로 돌아가 문을 닫았다. 하지만 의자에 앉기 바쁘게, 차창문을 두드리는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창 밖에 있는 여인은 달려온 것처럼 머리가 산발이 된 채 다급히 문을 쾅쾅 두드렸다. “잠깐만요.” “하윤 씨?” 민혁이 너무 놀라 차에서 내리려 하던 그때, 뒤에 앉아 있던 남자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출발해.” ‘엥?’ 한쪽은 도준이고, 한쪽은 도준의 한평생을 행복하게 해줄 사람인데, 선택하라는 자체가 민혁에게는 고역이었다. 이에 민혁은 느릿느릿 열쇠를 꺼내 할머니가 바늘에 실을 꿰는 것처럼 천천히 꽂아 넣었다. 다행히 하윤은 민혁을 막아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아챘는지 뒤좌석으로 달려갔다. “저 할 말 있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다급한 표정과 새하얗게 질린 낯빛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하지만 차 안의 도준은 하윤에게 눈빛조차 주지 않고 발로 민혁의 의자를 쾅 찼다. “빨리 빨리 못해?” 등뒤에서 느껴지는 발길질에 민혁은 현혹된 듯 열쇠를 구멍에 넣고 시동을 걸었다. 엔진 소리가 들리자 하윤의 조급함도 절정에 달했다. 이에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도준 씨랑 같이 갈래요!” “끼이익!” 액셀을 밟던 민혁은 다급히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얼굴이 핸들에 쿵 하고 부딪혔다. 이윽고 엎드린 자세 그대로 잠가 버렸던 차 문을 열었다. 겨우 차에 오른 하윤은 곧바로 도
“이렇게 돌아갈 거야?” 돌아간다는 말에 권하윤은 귀를 쫑긋 세우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눈물 머금은 눈동자를 굴렸다. “경성으로 돌아가는 거죠?” 깊에 파인 도준의 아이홀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니면? 설마 또 거짓말 친 거야?” “아니요! 절대 아니에요!” 자기의 결심을 내비친 하윤은 순간 달콤함과 동시에 코끝이 찡해났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도준은 여전히 자기한테 기회를 주려고 한다는 생각에 하윤의 눈에는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이윽고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도준의 목에 감더니 그의 품에 완전히 안겼다. “도준 씨 따라 갈게요. 절대…… 도준 씨 곁을 떠나지 않을게요.” 다투고 난 뒤에 얻은 따스함은 마치 시고 떫은 맛 뒤에 따른 단맛처럼 여전히 신맛에 혀끝이 얼얼하면서도 달콤함이 느껴졌다. 한참 뒤, 도준이 하윤의 허리를 두르며 입을 열었다. “왜 갑자기 변했어? 진실을 이제 안 알아보려고?” 등에서 느껴지는 힘은 미친 듯 뛰던 하윤의 마음을 다독여주고 동시에 마음 한켠에 남아 있던 불안마저 달래 주었다. 하윤은 도준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중얼거렸다. “알아보고 싶어요. 그런데 도준 씨한테 미안한 짓 하고 싶지 않아요.” 그 말을 내뱉고 난 뒤에야 하윤은 도준이 왜 자기 때문에 화가 났는지 깨달았다. 공태준한테는 미안해하고 빚졌다고 했으면서 그동안 빚을 가장 많이 진 도준은 또 뒷전으로 밀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분명 도준이야말로 하윤을 가장 아끼고 보호해준 사람인데 말이다. ‘나 왜 이렇게 못됐지…….’ 생각할수록 미안한 마음이 더해져 하윤은 파묻고 있던 머리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아까는 제가 실수했어요.” 도준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응?” 이에 하윤은 반성하며 말했다. “아까 도준 씨가 제…… 남편이라서 도준 씨 마음은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 틀렸어요. 도준 씨가 저한테 가장 잘해주는 사람이기에 제일 도준 시 마음을 제일 먼저 고려해야 했어요.” “응.” 도준은 의자에
권하윤은 민도준의 말에 흠칫 놀라며 몇 번이나 반박하려 했지만 황당하고 터무니없던 말이 마치 진짜 일어날 것처럼 느껴졌다. 공태준이 만약 하윤이 쫓던 원흉이 아니면 그를 전처럼 증오하지도 않을 거고, 지금껏 본인을 구해준 정을 생각해서 친구로 지내는 것도 문제될 것 없다. 도준의 말대로 태준이 점점 하윤의 마음의 벽을 허물고 파고든다면 하윤이 그를 막을 수 있을 가능성이 있을까? 태준을 경계하던 때도, 태준이 원하면 하윤에게 접근할 수 있었는데, 친구라는 이유로 가까이 지내다가 천천히 접근한다면……. 이러한 가능성은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던 하윤은 그제야 덜컥 겁이 나 도준의 손을 꽉 잡았다. “미안해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도준은 코웃음을 쳤다. “이제 알았으니 어떻게 할래?” 그 물음에 하윤은 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도준이 말한 이 모든 게 아직은 그저 가설에 불과하지만 태준이 하윤을 도와 가문과 척진 것은 명백한 사실이니까. 이런 상황에 공태준을 무시한다면 너무 양심이 없는 처사지만 그렇다고 매번 대꾸하자니 잘못하다가 태준한테 넘어갈 지도 모른다……. 한참을 생각하던 하윤은 갑자기 도준을 보며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 모습이 재미 있어 웃음이 나려 하자 도준은 일부러 하윤을 밀어버렸다. “무슨 꿍꿍이를 꾸미기에 눈에서 빛이 나?” 하윤은 슬금슬금 도준에게 다가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도준 씨. 세상에서 제일 좋은 도준 씨.” “뭘 마구 불러대? 소름 돋게.” 싫은 듯 자기를 밀어내는 도준의 태도에 하윤은 입을 삐죽거렸다. “이게 뭐가 소름 돋는다고 그래요?” 하윤은 작은 손으로 도준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공태준의 빚을 제가 갚을 수는 없으니 도준 씨한테 부탁할게요.” 도주은 약 2초간 멈칫하다가 하윤의 허리를 꽉 움켜쥐었다. “한참 동안 생각한 방법이 나한테 모두 떠넘기는 거였어?” 도준의 손길에 간지러워진 하윤은 옆으로 몸을 피하면서 입은 멈추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떠넘기는 거
민도준의 말은 공태준의 퇴로를 막았을 뿐만 아니라 태준이 자기와 다르다는 것을 집어냈다. 도준이 하윤을 돕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태준이 하윤을 돕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 꿍꿍이가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도준의 몇 마디 말로 태준이 하윤을 위해 한 모든 일이 아무 의미도 없어졌다. 이건 태준에게 너무 잔인했다. 잔인하다 못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태준은 싸늘한 목소리조차 감추지 못했다. “저도 윤이 씨와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서 도와준 것이니 민 사장님도 너무 신경 쓸 거 없어요.” 도준은 손으로 하윤의 긴 머리카락을 만지막거리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뭐가 됐든 우리 집사람이 하도 잘 속아넘어가서요. 제가 제대로 지키고 있지 않으면 누군가 우리 집사람 쉽게 보고 보답하라는 빌미로 접근해서 유괴라도 할까 봐 그럽니다. 그러면 안 되잖아요.” “…….” 쉽게 속아넘어가는 당사자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렇게까지 말했다는 것은 모두 까놓고 말하자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태준은 화를 내지는 않았어도 더 이상 평온함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뜻은 감사하지만 따로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요?” 도준은 느긋하네 하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댔다. 이윽고 하윤이 긴장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그녀의 목덜미를 눌러 얼굴을 마주했다. 하윤은 자기를 꿰뚫어볼 듯한 도준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비위를 맞추려는 듯 도준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푸딩처럼 말캉한 입술은 도준의 턱선을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 그제야 도준은 하윤에게 화를 내지 않고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공 가주님이 착한 일 하겠다니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후회한다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약속은 유효하니까. 공적인 일로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계속 접근하는 게 얼마나 추한지 공 가주님도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 전화를 끊자마자 도준은 옆에서 멍 때리고 있는 하윤을 바라봤다. “왜? 마음 아파?” 하윤은 그 말에 얼른 고개를 저으며 아부해 댔다
권하윤은 말하면서 창 밖을 내다봤다. 출근하려고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 언뜻언뜻 보였고 하이힐 소리와 전화 안내음이 이따금씩 들리면서 하윤이 지금 얼마나 황당한 일을 하고 있는지 일깨워 주는 듯했다. 하지만 민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한 손으로 하윤의 허리를 움켜쥐고 입꼬리를 씩 올렸다. 아무것도 안중에 없는 듯한 미소는 마치 그물처럼 하윤을 꿈쩍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남자의 손바닥은 부드러운 실크 원단을 스치며 자나 가는 자리마다 욕망의 흔적을 남겼다. “되고 안 되고는 내가 판단해. 착하지. 소리 내지 않으면 신경 쓰는 사람 없을 거야.” 도준의 황당한 말에 하윤은 버럭 화를 냈다. “그게…… 읍읍!” 하지만 도준은 하윤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낼까 봐 도와주겠다는 이유로 하윤의 입을 막아버렸다. 이른 아침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차 안의 온도는 점점 올라갔다. 뜨거운 열기가 차창에 김이 서리는가 싶더니 힘없는 듯한 하윤의 작은 손에 의해 사라졌다. 차 경적 소리가 연달아 울리고 길가에는 차가 끊임없이 지나치다가 회사 사무실에 사람이 꽉 차서야 비로소 원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차 안. 티슈가 박스 안에서 꺼내 지더니 한참 뒤 작은 손이 그것을 던져버렸다. 겨우 청소를 끝냈지만 더 이상 입을 수 없게 된 슬립 치마의 모습에 하윤은 도준을 째려봤다. “이거 좀 봐요! 저 이런 꼴로 어떻게 나가요!” 도준은 하윤이 옆으로 던져버린 슬립 치마를 들어 슬쩍 냄새 맡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음, 확실히 못 입겠네.” 너무 노골적인 행동에 따져 묻던 하윤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이윽고 화가 난 듯 고개를 돌려 트렌치코드를 그대로 걸쳤다. 다행히 코트가 긴 덕에 무릎까지 덮을 수 있었다. 이대로 나가도 괜찮을지 하윤이 한참 동안 확인하던 그때, 차창 밖에서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흠칫 놀란 하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도준이 자기 외투로 하윤을 가렸다. 밖을 힐끗 본 하윤은 경찰 복을 입은 사람이 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