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도준의 말은 공태준의 퇴로를 막았을 뿐만 아니라 태준이 자기와 다르다는 것을 집어냈다. 도준이 하윤을 돕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태준이 하윤을 돕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 꿍꿍이가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도준의 몇 마디 말로 태준이 하윤을 위해 한 모든 일이 아무 의미도 없어졌다. 이건 태준에게 너무 잔인했다. 잔인하다 못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태준은 싸늘한 목소리조차 감추지 못했다. “저도 윤이 씨와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서 도와준 것이니 민 사장님도 너무 신경 쓸 거 없어요.” 도준은 손으로 하윤의 긴 머리카락을 만지막거리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뭐가 됐든 우리 집사람이 하도 잘 속아넘어가서요. 제가 제대로 지키고 있지 않으면 누군가 우리 집사람 쉽게 보고 보답하라는 빌미로 접근해서 유괴라도 할까 봐 그럽니다. 그러면 안 되잖아요.” “…….” 쉽게 속아넘어가는 당사자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렇게까지 말했다는 것은 모두 까놓고 말하자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태준은 화를 내지는 않았어도 더 이상 평온함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뜻은 감사하지만 따로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요?” 도준은 느긋하네 하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댔다. 이윽고 하윤이 긴장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그녀의 목덜미를 눌러 얼굴을 마주했다. 하윤은 자기를 꿰뚫어볼 듯한 도준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비위를 맞추려는 듯 도준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푸딩처럼 말캉한 입술은 도준의 턱선을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 그제야 도준은 하윤에게 화를 내지 않고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공 가주님이 착한 일 하겠다니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후회한다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약속은 유효하니까. 공적인 일로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계속 접근하는 게 얼마나 추한지 공 가주님도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 전화를 끊자마자 도준은 옆에서 멍 때리고 있는 하윤을 바라봤다. “왜? 마음 아파?” 하윤은 그 말에 얼른 고개를 저으며 아부해 댔다
권하윤은 말하면서 창 밖을 내다봤다. 출근하려고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 언뜻언뜻 보였고 하이힐 소리와 전화 안내음이 이따금씩 들리면서 하윤이 지금 얼마나 황당한 일을 하고 있는지 일깨워 주는 듯했다. 하지만 민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한 손으로 하윤의 허리를 움켜쥐고 입꼬리를 씩 올렸다. 아무것도 안중에 없는 듯한 미소는 마치 그물처럼 하윤을 꿈쩍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남자의 손바닥은 부드러운 실크 원단을 스치며 자나 가는 자리마다 욕망의 흔적을 남겼다. “되고 안 되고는 내가 판단해. 착하지. 소리 내지 않으면 신경 쓰는 사람 없을 거야.” 도준의 황당한 말에 하윤은 버럭 화를 냈다. “그게…… 읍읍!” 하지만 도준은 하윤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낼까 봐 도와주겠다는 이유로 하윤의 입을 막아버렸다. 이른 아침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차 안의 온도는 점점 올라갔다. 뜨거운 열기가 차창에 김이 서리는가 싶더니 힘없는 듯한 하윤의 작은 손에 의해 사라졌다. 차 경적 소리가 연달아 울리고 길가에는 차가 끊임없이 지나치다가 회사 사무실에 사람이 꽉 차서야 비로소 원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차 안. 티슈가 박스 안에서 꺼내 지더니 한참 뒤 작은 손이 그것을 던져버렸다. 겨우 청소를 끝냈지만 더 이상 입을 수 없게 된 슬립 치마의 모습에 하윤은 도준을 째려봤다. “이거 좀 봐요! 저 이런 꼴로 어떻게 나가요!” 도준은 하윤이 옆으로 던져버린 슬립 치마를 들어 슬쩍 냄새 맡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음, 확실히 못 입겠네.” 너무 노골적인 행동에 따져 묻던 하윤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이윽고 화가 난 듯 고개를 돌려 트렌치코드를 그대로 걸쳤다. 다행히 코트가 긴 덕에 무릎까지 덮을 수 있었다. 이대로 나가도 괜찮을지 하윤이 한참 동안 확인하던 그때, 차창 밖에서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흠칫 놀란 하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도준이 자기 외투로 하윤을 가렸다. 밖을 힐끗 본 하윤은 경찰 복을 입은 사람이 눈에
경찰은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건 기밀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에 하윤은 이해한다는 듯 대답했지만 사건은 여전히 먹구름처럼 하윤의 머리 위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윤이 경찰서에서 나올 때 도준은 차에 기대 어디론가 전화하더니 하윤을 보자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래요, 나중에 연락합시다.” 전화를 끊은 도준은 손을 들어 하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살인 용의자도 되어 되고 이제는 나랑 같은 곳을 바라볼 작정이야?” 경찰서에서 취조 당하다시피 조사를 마친 뒤라 잔뜩 그늘졌던 얼굴이 도준의 농담 같은 말 덕에 다시 환해졌다. 하지만 하윤은 침울한 마음을 감추지 않은 채 피식 웃다가 아내 다시 투덜거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제가 의심받고 있는데 농담이 나와요?” 도준은 하윤을 차 안으로 끌어 들이며 피식 웃었다. “이제야 무서워?” 하윤은 입을 삐죽거리며 안전벨트를 잡아당겼다. “제가 무서울 게 뭐 있어요? 살인한 것도 아닌데.” 하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불안했다. 경찰이 하윤을 제일 먼저 찾아왔다는 건 하윤의 용의점이 가장 크다는 거니까. 하윤의 아버지와 친구였던 엄석규는 하윤의 아버지를 배신한 것도 모자라 심지어 위증까지 만들어 궁지에 몰아넣었다. 게다가 얼마 전 하윤이 공공장소에서 엄석규의 모든 죄증을 까발린 것으로 충분히 살인 동기가 있다고 판단되었을 거다. 물론 사건 당시 현장에 없었다는 명백한 증거도 있지만 경찰이 깊이 파고 들면 도준과 하윤의 관계를 알아낼 거고 하윤이 엄석규를 죽이고 싶으면 직접 나서지 않고도 죽일 수 있다는 걸 알아낼 거다. 그 가능성을 생각하자 하윤은 얼른 도준을 바라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설마 도준 씨가 엄석규한테 손쓴 거 아니죠?” “그게 무슨 말이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되묻는 도준을 보자 하윤은 찔리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니까 제가 불쌍해서 저 대신 복수해준 건 아닌가 그런 뜻이었어요. 다른 뜻은 없었어요.” 하윤의 설명
“안 돼요. 이러면 저 도망자가 되는 거라고요.” 권하윤은 민도준의 팔을 다급히 잡아당겼다. “얼른 차 세워요.” 하지만 도준은 오히려 하윤의 손을 꼭 잡아 핸들에 올려 놓더니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세울 수 없는데.” 차가 고속도로에 들어서는 걸 보자 하윤은 머리가 쭈뼛 곤두섰다. “저 데리고 도망가면 나중에 공범으로 잡히면 어쩌려고 그래요? 얼른 차 돌려요.” 조급한 나머지 당장이라도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릴 것처럼 행동하는 하윤의 모습에 도준은 그제야 하윤의 손을 놓고 차속을 줄였다. “지금 돌아가면 살인범이 될 수 있어.” “네?” 하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알리바이도 있는데 그럴 리가요.” 도준은 의아한 듯 입을 벌리고 있는 하윤을 힐끗 바라봤다. 그러다가 답을 알려달라는 듯 동그란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하윤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어쩜 이렇게 귀여울 수 있어?” 하윤은 도준이 자기를 놀리는 걸 발견하고는 화가 난 듯 콧방귀를 뀌며 의자에 몸을 던졌다. “네, 저 바보 맞아요. 그래서 나이 많고 경험 많은 도준 씨처럼 계획적인고 악랄하지 못해요. 됐어요?” “나이 많다고?” 살짝 오라간 위협적인 말투에 하윤은 등골이 오싹했지만 여전히 꿀리지 않은 태도로 대꾸했다. “제가 틀린 말 했어요? 도준 씨 저보다 나이 많은 거 맞잖아요.” “그것도 5년이나.” 하윤은 손을 쫙 편 채로 내밀며 도준 앞에서 흔들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직 27인 도준에게 나이 많다고 하는 건 너무했다. 이건 복수하려고 일부러 비아냥거리는 게 틀림없었다. 도준은 하윤의 도발에 코웃음 쳤다. “아주 기어오르는 구나.” 하윤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렸지만 이내 현재 상황이 안 좋다는 걸 인지하고는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됐어요, 얼른 말하기나 해요. 제가 어떻게 범인이 된다는 거예요?” 도준은 더 이상 하윤에게 장난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설마 엄석규가 죽는 거로 모든 일이 끝날 것 같
“참, 그리고 엄석규를 매수한 공씨 집안 사람을 좀 찾아줘요.” 말투는 분명 상의하는 말투였지만 내용은 마치 명령이라도 내리는 듯했다. 겁도 없이 말이다. 이에 민도준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게 끝이야?” “아니요…….” 권하윤은 어색한 듯 배를 끌어안았다. “저 배고파요.” 아침에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반나절이나 조사받은 탓에 하윤의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바쁠 때에는 배고픈 줄 몰랐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그제야 뱃가죽이 등에 붙은 것처럼 견딜 수 없었다. “걸신이 들렸네.” 비웃는 듯한 도준의 말에 하윤은 짜증이 치솟았다. “저 오전 내내 밥도 못 먹었거든요? 그게 어떻게 걸신 들린 거예요?” 말하다 보니 하윤은 원망스럽고 서러웠다. “어디 가는지 말도 안 하고 저 납치하듯 끌고 왔으면서. 밥도 안 주고 물도 안 주고,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하윤의 불만은 이것뿐이 아니었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건 바로 도준이 자기를 경찰서 앞까지만 데려다 주고 함께 들어가주지 않았다는 거다. 물론 취조실까지 따라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안까지는 함께 가줄 수 있는 거니까. 게다가 천하의 민도준이 그런 특권도 없다는 게 말이 되나? 물론 도준이 이렇게 한 게 따지고 보면 아무 문제없는 거라는 걸 알았지만 하윤은 그래도 서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기회를 잡자 바로 투덜거렸다. 도준은 뾰로통한 하윤의 모습이 귀여워 피식 웃었다. “배고프다고 성질 부리고, 애가 따로 없네.” 하지만 하윤은 도준의 그 말조차 들으려 하지 않았다. “됐어. 그만하고 뒤 돌아봐.” 그 말을 듣는 순간 하윤의 눈은 반짝 빛났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뾰로통해서 고개를 빳빳이 쳐든 채로 뒤돌아봤다. 물론 다음 순간 그 표정은 바로 무너져 버렸지만. “이거 언제 산 거예요?” 뒷좌석을 거의 꽉 채운 음식에 하윤은 손을 뒤로 뻗으며 물었다. 한참 동안 고른 하윤은 끝내 과자 한 봉지를 선택해 입에 밀어 넣었다
민도준은 조수석에 앉아 있는 권하윤을 힐끗 바라봤다. 하윤은 마치 납치라도 당한 사람처럼 불안한 듯 자꾸만 밖을 확인했다. 그러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며 재촉했다. “얼른 말해요.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두 사람이 들어선 길은 고속도로보다 비좁은 데다 가끔씩 화물차가 지나다녀 운전하기 불편했다. 때문에 도준은 차속을 줄였다. “경성에 돌아갈 거라고 누가 그래?” “네? 돌아가는 거 아니었어요? 그러면 어디 가는데요?” 자기가 위험에 빠질까 봐 도준이 자기를 데리고 경성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한 하윤은 아니라는 도준의 대답에 멍해졌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자 전조등이 길을 길게 비추며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과 한데 맞물렸다. 으슥한 분위기에 덜컥 겁이 난 하윤은 얼른 입을 열었다. “위험한 것 같은데 우리 다른 데로 새지 말고 경성으로 돌아가는 게 어때요?” 도준은 하윤의 말이 재밌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내가 하윤 씨도 아니고 이깟 거 무서워할 것처럼 보여?”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도준의 눈은 마치 잠복해 있는 야수처럼 고요하고도 위험했다. “상대가 점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때 숨으면 더 위험해.” 하윤도 사실 이 도리는 알고 있었다. 다만 지금 적은 어둠 속에 있고 하윤은 훤히 노출되어 있어 몸을 사리며 숨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도준이 손가락으로 핸들을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하윤 씨 아버지가 좋은 제자를 뒀잖아.” “주림 선배요?” 그제야 도준이 뭘 하려는지 눈치챈 하윤은 놀란 듯 되물었다. “지금 주림 선배 만나러 가는 거예요?” 선배를 너무 친근하게 부르는 하윤의 말투에 도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싫은 티를 냈다. “그냥 대충 이름으로 부르면 안 돼? 왜 하필 그렇게 친근하게 부르는 건데?” “선배를 선배라고 하는 게 어때서요? 저보다 기수가 빠르면 선배죠.” 하윤은 불만 섞인 말투로 대꾸하다가 눈을 굴렸다. “도준 씨 설마 질투해요?” 도준은 하윤의 말을 무시했
읍내에는 관광 명소로 알려진 강이 있었지만 사람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민박집에도 딱 3칸에만 불이 켜져 있었고 그 중 한 칸은 사장님의 방이었다. 도준은 돈을 보탠 덕에 두 사람은 민박집에서 저녁을 해결하였다. 이윽고 샤워를 하고 난 뒤, 하윤은 방 안에 헤어드라이기가 없는 것을 발견하였다. “욕실에 드라이기가 없는데 저 머리 어떡해요?” 도준은 눈까풀을 들어 하윤을 힐끗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따가 사장님한테 빌려달라고 해. 이리 와, 내가 먼저 닦아줄게.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하윤이 고분고분 의자에 앉자 도준이 하윤의 등에 바싹 붙었다. 이윽고 세다 못해 무식한 힘으로 하윤의 머리카락을 박박 문질렀다. 그렇게 큰 힘 덕에 하윤의 머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대충 말랐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하윤의 머리가 부드러워 엉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잠시 뒤 빌려온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린 하윤은 배부른 고양이처럼 도준의 가슴 위에 엎드려 그의 얼굴에 쪽하고 입을 맞췄다. “잘 자요.” “벌써?” 도준은 긴 팔로 하윤의 가느다란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너무 이른 시간 아니야?” 그 말에 하윤의 얼굴은 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오늘 하루 종일 운전해서 피곤하잖아요. 내일도 계속 운전해야 하니 그냥 자요.” “왜? 지금 나 걱정하는 거야?” 머리를 쓰다듬는 도준의 손길을 느끼며 하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도준의 팔을 끌어안은 채로 낮게 속삭였다. “도준 씨가 너무 고생해서 그러죠.” 민씨 집안에도 해결해야 할 일이 많은 데다 사업도 돌봐야 하는 타이밍에 구세주처럼 등장한 것도 모자라 이렇게 고생하는 도준의 모습에 하윤은 마음이 아팠다. 때문에 조금이나마 더 쉬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 하지만 그녀의 의도와는 달리 도준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은혜 갚을 기회를 줄게.” “아!” 허리를 확 끌어당기는 힘 때문에 도준의 몸 위에 앉게 된 하윤은 두 손으로 도준의 가슴을 받친 채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버텼다.
투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차는 주림이 있는 마을로 향했다. 두 사람은 또 부근에서 민박집 하나를 구했지만 이번에 구한 민박집은 어제의 집보다는 환경이 현저히 나빴다. 심지어 문도 발로 걷어 차야 닫히는 정도였으니. 사실 전에 주림의 외할아버지가 사는 곳이 외진 곳에 있다고 김종서가 말해준 적이 있다. 운전을 하다가 오토바이로 갈아타고 한참 뒤 다시 차로 갈아타면서 하윤은 김종서의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걸 제대로 체험했다. 오토바이에서 내리자 날은 어느새 어두워졌다. 순간 소녀가 산속에 팔려 갔다는 뉴스가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그도 그럴 게, 너무 외지고 고요한 곳이라 법률도 닿지 않을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곳은 대체로 무릉도원일 수도, 꽉 막힌 지옥일 수도 있다. 하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 옆에서 불이 반짝거리더니 남자의 입가에서 희뿌연 연기가 흘러나왔다. 이윽고 도준이 하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나한테 업혀서 갈래? 아니면 혼자 걸을래?” “업어 줘요.” 하윤은 익숙한 듯 도준의 등에 폴짝 뛰어올랐다. 도준은 불을 붙인 담배를 입에 문 채 하윤을 업고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이곳은 자동차 경적도 들리지 않고 네온 불빛도 없었다. 오직 밝은 달빛만 메마른 땅을 비추고 있었다. 하윤은 축 늘어진 채 도준의 어깨에 얼굴을 대고 두 발을 동동 구르며 불만을 토로했다. “왜 아직도 도착하지 못했어요? 아까 볼 때 이렇게 멀지 않은 것 같았는데.” 도준은 게으름 피우는 하윤의 모습에 그녀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편히 가면서 말이 많아.” 하윤은 코방귀를 뀌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약 20분쯤 더 걸었을까? 도준의 목을 감고 있던 손이 스르르 풀렸고 하윤의 머리가 맥없이 도준의 어깨에 떨어졌다. ‘이젠 아예 잠들어?’ 도준은 하윤이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한 번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 동작에 뒤에서 곧바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달빛이 부드러워질 때쯤 주림이 살고 있는 태강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