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내에는 관광 명소로 알려진 강이 있었지만 사람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민박집에도 딱 3칸에만 불이 켜져 있었고 그 중 한 칸은 사장님의 방이었다. 도준은 돈을 보탠 덕에 두 사람은 민박집에서 저녁을 해결하였다. 이윽고 샤워를 하고 난 뒤, 하윤은 방 안에 헤어드라이기가 없는 것을 발견하였다. “욕실에 드라이기가 없는데 저 머리 어떡해요?” 도준은 눈까풀을 들어 하윤을 힐끗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따가 사장님한테 빌려달라고 해. 이리 와, 내가 먼저 닦아줄게.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하윤이 고분고분 의자에 앉자 도준이 하윤의 등에 바싹 붙었다. 이윽고 세다 못해 무식한 힘으로 하윤의 머리카락을 박박 문질렀다. 그렇게 큰 힘 덕에 하윤의 머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대충 말랐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하윤의 머리가 부드러워 엉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잠시 뒤 빌려온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린 하윤은 배부른 고양이처럼 도준의 가슴 위에 엎드려 그의 얼굴에 쪽하고 입을 맞췄다. “잘 자요.” “벌써?” 도준은 긴 팔로 하윤의 가느다란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너무 이른 시간 아니야?” 그 말에 하윤의 얼굴은 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오늘 하루 종일 운전해서 피곤하잖아요. 내일도 계속 운전해야 하니 그냥 자요.” “왜? 지금 나 걱정하는 거야?” 머리를 쓰다듬는 도준의 손길을 느끼며 하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도준의 팔을 끌어안은 채로 낮게 속삭였다. “도준 씨가 너무 고생해서 그러죠.” 민씨 집안에도 해결해야 할 일이 많은 데다 사업도 돌봐야 하는 타이밍에 구세주처럼 등장한 것도 모자라 이렇게 고생하는 도준의 모습에 하윤은 마음이 아팠다. 때문에 조금이나마 더 쉬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 하지만 그녀의 의도와는 달리 도준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은혜 갚을 기회를 줄게.” “아!” 허리를 확 끌어당기는 힘 때문에 도준의 몸 위에 앉게 된 하윤은 두 손으로 도준의 가슴을 받친 채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버텼다.
투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차는 주림이 있는 마을로 향했다. 두 사람은 또 부근에서 민박집 하나를 구했지만 이번에 구한 민박집은 어제의 집보다는 환경이 현저히 나빴다. 심지어 문도 발로 걷어 차야 닫히는 정도였으니. 사실 전에 주림의 외할아버지가 사는 곳이 외진 곳에 있다고 김종서가 말해준 적이 있다. 운전을 하다가 오토바이로 갈아타고 한참 뒤 다시 차로 갈아타면서 하윤은 김종서의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걸 제대로 체험했다. 오토바이에서 내리자 날은 어느새 어두워졌다. 순간 소녀가 산속에 팔려 갔다는 뉴스가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그도 그럴 게, 너무 외지고 고요한 곳이라 법률도 닿지 않을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곳은 대체로 무릉도원일 수도, 꽉 막힌 지옥일 수도 있다. 하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 옆에서 불이 반짝거리더니 남자의 입가에서 희뿌연 연기가 흘러나왔다. 이윽고 도준이 하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나한테 업혀서 갈래? 아니면 혼자 걸을래?” “업어 줘요.” 하윤은 익숙한 듯 도준의 등에 폴짝 뛰어올랐다. 도준은 불을 붙인 담배를 입에 문 채 하윤을 업고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이곳은 자동차 경적도 들리지 않고 네온 불빛도 없었다. 오직 밝은 달빛만 메마른 땅을 비추고 있었다. 하윤은 축 늘어진 채 도준의 어깨에 얼굴을 대고 두 발을 동동 구르며 불만을 토로했다. “왜 아직도 도착하지 못했어요? 아까 볼 때 이렇게 멀지 않은 것 같았는데.” 도준은 게으름 피우는 하윤의 모습에 그녀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편히 가면서 말이 많아.” 하윤은 코방귀를 뀌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약 20분쯤 더 걸었을까? 도준의 목을 감고 있던 손이 스르르 풀렸고 하윤의 머리가 맥없이 도준의 어깨에 떨어졌다. ‘이젠 아예 잠들어?’ 도준은 하윤이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한 번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 동작에 뒤에서 곧바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달빛이 부드러워질 때쯤 주림이 살고 있는 태강촌
이장의 말에 의하면 전에 주림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한동안 마을에서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때문에 아직도 마을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라고. 그 말에 권하윤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그러면 주림 선배 집에 물어봐줄 수 있나요?” 이장은 아내에게 상황을 설명하고는 친절하게 두 사람을 데리고 주림의 집을 향했다. 울퉁불퉁한 길 때문에 도준은 하윤을 반쯤 들고 걷다가 주림의 집에 도착해서야 놓아주었다. “이 봐!” “쾅쾅쾅!” “손님 왔어.” 문을 한참 동안 두드렸지만 안에서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이장은 큰 한숨을 쉬며 뭐라 한참 동안 말하다가 하윤이 알아듣지 못하자 자기의 귀를 가리키다가 주림의 집을 가리켰다. 그 말인 즉 주림의 외할아버지의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듣지 못하니 내일 다시 오자는 뜻이었다. 이에 하윤은 도준과 함께 다시 이장의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주위에 호텔이 없어 이장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자 도준은 지갑 안에서 5만원권을 몇 장 꺼내 숙박비 삼아 이장에게 건넸다. 그 돈을 보자 이장은 깜짝 놀라 연신 손을 저었다. 하지만 하윤의 견지 끝에 한 장만 받았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이장은 명절이라도 쇠는 것처럼 두 사람을 대접했다. 두 사람의 입맛을 몰라서인지 달걀 볶음과 같은 집반찬도 있었고, 수육과 같은 음식도 차려졌다. 너무 거한 환대에 하윤은 몸둘바를 몰라 하다가 자기의 머리를 자꾸만 힐끗거리는 이장의 막내딸에게 진주 장식이 붙은 머리핀을 선물로 주었다. 꼬마 아이는 포동포동한 손으로 하윤이 건네는 머리핀을 받고는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진주 장식이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럽게 만져댔다. 식사가 끝난 뒤, 할 일이 없는 데다 신호까지 터지지 않자 하윤은 꼬마 아이의 머리를 예쁘게 땋아주고 선물로 주었던 진주 머리핀을 달아주었다. 하윤은 쭈뼛거리는 꼬마 아이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예뻐.” “감사합니다.” 사투리를 고치려고 애를 썼지만
민도준은 입안에서 혀를 굴리며 흥분한 눈빛을 뿜어냈다. 하지만 지금 방해꾼이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됐어. 시간도 늦었는데 내일 물어봐.” 권하윤은 사냥감을 노리는 듯한 도준의 눈빛을 당연히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겁을 먹고 울어대는 다솜을 달래느라 정신이 팔려 있다가 도준의 의견에 동의하는 듯 아이를 이장 아내에게 데려갔다. 그러고 나서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도준은 이미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원래도 작은 침대였는데 도준이 누워 있자 마치 어린이 침대 같아 보이는 신기한 마법이 펼쳐졌다. 하윤은 그런 도준을 옆으로 밀어 버리며 위로 올라왔다. “저쪽으로 누어 봐요. 도준 씨 혼자만 위에서 자면 저는 어디 누워요?” 애석하게도 하윤의 가는 팔로 아무리 밀어 봤자 도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윤의 팔을 낚아채더니 자기 몸 위로 잡아당기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침대가 딱딱하니 내 몸 위에 누워.” 하윤은 버둥대며 도준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때 도준이 하윤의 허리를 야릇하게 문지르며 경고했다. “계속 움직이면 불편해질 줄 알아.” 그제야 하윤은 뻣뻣하게 굳어버린 채로 화가 난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렇게 한참 뒤, 오늘은 온전히 잠을 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윤의 목덜미에서 간지럼을 태우는 듯한 도준의 숨결이 느껴졌다. 이윽고 도준의 입술이 하윤의 목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이가 그렇게 좋아?” “다솜이가 얼마나 귀여운데요.” 하윤은 간지러운 감각 때문에 참지 못하고 몸을 피하려 했지만 움직이기도 전에 도준의 커다란 손이 하윤의 아랫배를 꾹 눌렀다. 이윽고 남자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직접 나은 아이는 더 귀여울 거야.” 도준의 희롱에 이미 익숙해진 하윤이었지만 이 말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누가 도준 씨 아이 낳아준대요? 아이 낳는 게 얼마나 아프다고. 저는 아픈 거 싫어요.” 하윤의 말에 도준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
민도준은 물을 끓이며 입을 열었다. “그 꼬맹이도 있잖아. 아까 통역해 달라고 부탁했어.” “동의 하던가요?” “응.” 권하윤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어떻게 설득했어요? 다솜이가 도준 씨 무서워하는 거 아니었어요?” 도준은 물 온도를 체크하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도와주면 돈 주겠다고 했거든.” “그렇게 간단하다고요?” 하윤은 도준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면?” 도준은 하윤의 머리를 꾹 눌렀다. “동기 부여가 되면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는 게 사람 아니야?” “…….” ‘그럼 내가 어제 인내심 있게 설득하려 한 건 헛수고였다는 거네…….’ ……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다솜은 하윤과 도준을 데리고 주림의 외할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이장의 말대로 어제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고 등이 휜 할아버지 한 분이 마당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주림의 외할아버지 주민수였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저 주림 선배 후배인데, 혹시 선배 여기 있나요?” 하윤의 인삿말에 주민수는 경계 가득한 표정을 짓더니 연신 손을 저으며 사람을 쫓아냈다. 그 모습에 다솜이 설명했다. “할아버지는 귀가 안 들려서 그렇게 말하면 못 들어요.” 하지만 하윤이 보기에는 주민수가 단순히 안 들리는 게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자기가 낯선 사람이라 상대하기 싫어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하윤은 얼른 다솜에게 부탁했다. “그럼 주림 선배가 이 마을에 있는지 언니 대신 물어봐 줄래?” 다솜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하윤의 물음을 곧이곧대로 전했다. 물론 사투리가 섞인 말투와 억양으로. 다행히 주민수는 다솜을 그나마 살갑게 대하며 귀담아듣는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한참 듣는가 싶더니 이내 손을 저으며 사투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다솜은 이내 하윤에게 그 말을 전했다. “주림 오빠는 오래 전에 마을을 떠났대요.” ‘주림 선배가 떠났다면 단서가 또 끊기는데.’ 하윤은 괜히 맥이 빠져 눈살을 찌푸렸다. 만약 엄석규가 그런 일
민도준은 가만 있지 못하는 하윤의 손을 꽉 잡았다. “이리 와. 그렇게 대놓고 가는 건 나 왔소 하고 알리는 거랑 뭐가 달라?” 잔뜩 흥분해 있던 권하윤은 그제야 냉정을 되찾고 도둑질하는 사람처럼 목솔리를 한껏 낮추고 속삭였다. “그럼 어떡해요?” 도준은 하윤이 귀여운 듯 잡아 끌어 품에 안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 “숨을 곳 찾아서 기다려야지. 점심 때 그 할아버지가 어디로 가는지.” 하윤은 도준의 가슴에 고개를 기대며 문질렀다. “그런데 저 졸린데 어떡해요?” “하루 종일 졸렸다 배고팠다 가지가지 하네.” 그 말에 하윤은 불만 섞인 말투로 투덜거렸다. “그게 어떻게 제 탓이에요?” 며칠 동안 길을 떠나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졸린 건데, 매일 밤 사람을 괴롭히던 당사자가 오히려 미안한 기색도 없자 하윤은 바로 불만을 내비쳤다. 하지만 도준은 오히려 하윤의 코를 잡아당기며 이유를 댔다. “전에 빚진 거 갚아야 할 거 아니야?” “대체 얼마나 더 갚아야 하는데요! 게다가 제가 해원에 온 게 고작 며칠인데, 이렇게 갚다가는 제가 죽을까 봐 겁나요.” 잔뜩 화가 난 듯한 하윤의 모습에 도준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 졸린다며? 잠깐 빈 곳에서 눈 붙여.” 도준이 말한 곳은 다름 아닌 주민수네 집 뒤에 있는 밭이었다. 가을이라 밭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게다가 마침 해가 가장 뜨거울 무렵이라 도준은 그늘진 곳을 찾아 자기 다리를 툭툭 두드렸다. “자, 여기 누워 눈 좀 붙여.” 하윤은 싫은 티를 팍팍 내며 바닥을 둘러봤다. “여기 누우면 제 옷 더러워져요.” 그 말에 도준은 피식 웃으며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자기 외투를 바닥에 깔았다. “이렇게 하면 됐지?” 그제야 하윤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는 듯이 도준의 다리에 누웠다. 하윤이 눕자 도준의 손이 하윤의 허리를 둘렀고 따뜻한 햇살이 하윤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바람은 흙내음도 풀냄새를 싣고 살살 불어왔다. 물론 좋은 냄새는 아니었지만 싱그럽고 편안했다
신장의 우세로 민도준은 손 쉽게 담을 넘었지만 권하윤을 잡아당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하윤의 옷이 찢어지기까지 했다. 그 시각, 마당은 텅 비어 있었고 방문도 굳게 잠겨 있었다. 게다가 가장 특별한 것은 집 인테리어를 바꿨는지 문은 도난 방지를 하는 철문으로 되어 있었다. 햇빛을 오래 받은 탓에 하윤은 뒤통수가 찌근거지만 창문에 찰싹 붙어 두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 안쪽을 들여다봤다. “우리 어떻게 들어가요?” 도준은 바닥에 있는 삽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비켜, 얼굴에 스크래치라도 생기면 안 되니까.” 하윤이 얼른 옆으로 몸을 피하자 도준은 삽을 나무로 된 창문틀에 끼워 넣더니 두 번 만에 창문을 떼어내 버렸다. 하지만 창문이 너무 작은 탓에 도준의 덩치로 들어가는 것은 무리였다. 그때 하윤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제가 들어가서 문 열어줄게요.” 날씬한 하윤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나마 쉬워 보였다. 하윤이 날렵하게 안으로 상체를 밀어 넣자 도준은 ‘친절하게’ 하윤의 엉덩이를 받쳐 주었다. “조심해, 넘어지지 말고.” 이미 몸을 반쯤 안으로 넣은 데다 소리를 지를 수 없는 상황이라 하윤은 발을 구르며 도준을 차버렸다. 다행히 그저 잠깐 장난 치는 것으로 끝낸 도준은 하윤을 도와주고 나서 바로 손을 뗐다. 이윽고 안으로 들어 간 하윤이 얼른 방 문을 열었다. “얼른 들어와요.” 문 틈 사이로 고개를 삐죽 내민 채 도준을 향해 손을 흔드는 히윤의 모습은 영락없는 도둑이었다. 하윤은 안으로 들어가면 주림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안에는 주림은커녕 주민수조차 보이지 않았다. 방을 통해 뒤뜰을 찾아 낸 하윤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낮게 속삭였다. “왜 사람이 없지? 설마 그 할아버지가 주림 선배를 데리고 도망간 건 아니겠죠?” 그때, 뒤뜰을 빙 둘러보던 도준의 발이 바닥에 삐죽 나온 무언가에 걸렸다. “지하실이 있어.” 하윤이 말하려는 찰나, 도준은 하윤을 끌어당겨 문 뒤에 숨었고 다음 순간 나무로 된
권하윤은 손전등으로 안을 비치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도준 씨, 조심해요!” 하지만 쥐구멍처럼 작은 곳을 빙 둘러본 민도준은 하윤의 걱정이 쓸데없다고 느껴졌다. 물론 그런 걱정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 구멍은 다름 아닌 김치나 채소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안에는 식사를 할 수 있는 테이블과 한 사람이 잘 수 있는 침대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공간이 많이 협소했다. 그 시각, 침대에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는 핏기 하나 없었고, 두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 “주림 선배?” “선배?” 주림은 위층으로 올라온 뒤에도 여전히 바깥세상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고작 2년이 지난 사이 주림은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이목구비는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예전의 생기발랄하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치 좀비나 다름없었다. 사실 예전에 주림은 이성호를 가장 속 썩이는 학생이었다. 그건 주림의 욱하는 성격도 한 몫 했지만 실패를 맛보기 전에는 절대 뜻을 굽히지 않는 고집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성호를 가장 닮은 학생이기도 했다. 주림은 전문적인 분야에서만큼은 교수인 이성호와 얼굴을 붉히며 따싸울 정도로 뜻을 굽히지 않았고, 공연하기 전 이성호의 피아노에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나서서 다른 사람에게 피아노를 빌리려고 뛰어다니는 제자였다. 게다가 공연이 끝나면 일꾼을 불러 그 무거운 피아노를 직접 운반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 보다……. 이성호의 딸인 하윤조차 이성호를 의심할 때, 유일하게 자기의 스승을 믿고 심지어 본인의 미래까지 걸고 이성호의 억울함을 대신 호소했다. 하지만 이 시각 지하실에서 영혼 없는 사람처럼 세월을 보낸 주림을 보자 하윤의 눈시울은 이내 촉촉해졌다. “주림 선배, 저 이성호의 딸, 이시윤이에요. 설마 잊은 거예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 지경이 됐어요?” 하윤이 아무리 불러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