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돼요. 이러면 저 도망자가 되는 거라고요.” 권하윤은 민도준의 팔을 다급히 잡아당겼다. “얼른 차 세워요.” 하지만 도준은 오히려 하윤의 손을 꼭 잡아 핸들에 올려 놓더니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세울 수 없는데.” 차가 고속도로에 들어서는 걸 보자 하윤은 머리가 쭈뼛 곤두섰다. “저 데리고 도망가면 나중에 공범으로 잡히면 어쩌려고 그래요? 얼른 차 돌려요.” 조급한 나머지 당장이라도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릴 것처럼 행동하는 하윤의 모습에 도준은 그제야 하윤의 손을 놓고 차속을 줄였다. “지금 돌아가면 살인범이 될 수 있어.” “네?” 하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알리바이도 있는데 그럴 리가요.” 도준은 의아한 듯 입을 벌리고 있는 하윤을 힐끗 바라봤다. 그러다가 답을 알려달라는 듯 동그란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하윤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어쩜 이렇게 귀여울 수 있어?” 하윤은 도준이 자기를 놀리는 걸 발견하고는 화가 난 듯 콧방귀를 뀌며 의자에 몸을 던졌다. “네, 저 바보 맞아요. 그래서 나이 많고 경험 많은 도준 씨처럼 계획적인고 악랄하지 못해요. 됐어요?” “나이 많다고?” 살짝 오라간 위협적인 말투에 하윤은 등골이 오싹했지만 여전히 꿀리지 않은 태도로 대꾸했다. “제가 틀린 말 했어요? 도준 씨 저보다 나이 많은 거 맞잖아요.” “그것도 5년이나.” 하윤은 손을 쫙 편 채로 내밀며 도준 앞에서 흔들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직 27인 도준에게 나이 많다고 하는 건 너무했다. 이건 복수하려고 일부러 비아냥거리는 게 틀림없었다. 도준은 하윤의 도발에 코웃음 쳤다. “아주 기어오르는 구나.” 하윤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렸지만 이내 현재 상황이 안 좋다는 걸 인지하고는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됐어요, 얼른 말하기나 해요. 제가 어떻게 범인이 된다는 거예요?” 도준은 더 이상 하윤에게 장난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설마 엄석규가 죽는 거로 모든 일이 끝날 것 같
“참, 그리고 엄석규를 매수한 공씨 집안 사람을 좀 찾아줘요.” 말투는 분명 상의하는 말투였지만 내용은 마치 명령이라도 내리는 듯했다. 겁도 없이 말이다. 이에 민도준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게 끝이야?” “아니요…….” 권하윤은 어색한 듯 배를 끌어안았다. “저 배고파요.” 아침에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반나절이나 조사받은 탓에 하윤의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바쁠 때에는 배고픈 줄 몰랐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그제야 뱃가죽이 등에 붙은 것처럼 견딜 수 없었다. “걸신이 들렸네.” 비웃는 듯한 도준의 말에 하윤은 짜증이 치솟았다. “저 오전 내내 밥도 못 먹었거든요? 그게 어떻게 걸신 들린 거예요?” 말하다 보니 하윤은 원망스럽고 서러웠다. “어디 가는지 말도 안 하고 저 납치하듯 끌고 왔으면서. 밥도 안 주고 물도 안 주고,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하윤의 불만은 이것뿐이 아니었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건 바로 도준이 자기를 경찰서 앞까지만 데려다 주고 함께 들어가주지 않았다는 거다. 물론 취조실까지 따라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안까지는 함께 가줄 수 있는 거니까. 게다가 천하의 민도준이 그런 특권도 없다는 게 말이 되나? 물론 도준이 이렇게 한 게 따지고 보면 아무 문제없는 거라는 걸 알았지만 하윤은 그래도 서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기회를 잡자 바로 투덜거렸다. 도준은 뾰로통한 하윤의 모습이 귀여워 피식 웃었다. “배고프다고 성질 부리고, 애가 따로 없네.” 하지만 하윤은 도준의 그 말조차 들으려 하지 않았다. “됐어. 그만하고 뒤 돌아봐.” 그 말을 듣는 순간 하윤의 눈은 반짝 빛났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뾰로통해서 고개를 빳빳이 쳐든 채로 뒤돌아봤다. 물론 다음 순간 그 표정은 바로 무너져 버렸지만. “이거 언제 산 거예요?” 뒷좌석을 거의 꽉 채운 음식에 하윤은 손을 뒤로 뻗으며 물었다. 한참 동안 고른 하윤은 끝내 과자 한 봉지를 선택해 입에 밀어 넣었다
민도준은 조수석에 앉아 있는 권하윤을 힐끗 바라봤다. 하윤은 마치 납치라도 당한 사람처럼 불안한 듯 자꾸만 밖을 확인했다. 그러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며 재촉했다. “얼른 말해요.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두 사람이 들어선 길은 고속도로보다 비좁은 데다 가끔씩 화물차가 지나다녀 운전하기 불편했다. 때문에 도준은 차속을 줄였다. “경성에 돌아갈 거라고 누가 그래?” “네? 돌아가는 거 아니었어요? 그러면 어디 가는데요?” 자기가 위험에 빠질까 봐 도준이 자기를 데리고 경성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한 하윤은 아니라는 도준의 대답에 멍해졌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자 전조등이 길을 길게 비추며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과 한데 맞물렸다. 으슥한 분위기에 덜컥 겁이 난 하윤은 얼른 입을 열었다. “위험한 것 같은데 우리 다른 데로 새지 말고 경성으로 돌아가는 게 어때요?” 도준은 하윤의 말이 재밌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내가 하윤 씨도 아니고 이깟 거 무서워할 것처럼 보여?”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도준의 눈은 마치 잠복해 있는 야수처럼 고요하고도 위험했다. “상대가 점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때 숨으면 더 위험해.” 하윤도 사실 이 도리는 알고 있었다. 다만 지금 적은 어둠 속에 있고 하윤은 훤히 노출되어 있어 몸을 사리며 숨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도준이 손가락으로 핸들을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하윤 씨 아버지가 좋은 제자를 뒀잖아.” “주림 선배요?” 그제야 도준이 뭘 하려는지 눈치챈 하윤은 놀란 듯 되물었다. “지금 주림 선배 만나러 가는 거예요?” 선배를 너무 친근하게 부르는 하윤의 말투에 도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싫은 티를 냈다. “그냥 대충 이름으로 부르면 안 돼? 왜 하필 그렇게 친근하게 부르는 건데?” “선배를 선배라고 하는 게 어때서요? 저보다 기수가 빠르면 선배죠.” 하윤은 불만 섞인 말투로 대꾸하다가 눈을 굴렸다. “도준 씨 설마 질투해요?” 도준은 하윤의 말을 무시했
읍내에는 관광 명소로 알려진 강이 있었지만 사람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민박집에도 딱 3칸에만 불이 켜져 있었고 그 중 한 칸은 사장님의 방이었다. 도준은 돈을 보탠 덕에 두 사람은 민박집에서 저녁을 해결하였다. 이윽고 샤워를 하고 난 뒤, 하윤은 방 안에 헤어드라이기가 없는 것을 발견하였다. “욕실에 드라이기가 없는데 저 머리 어떡해요?” 도준은 눈까풀을 들어 하윤을 힐끗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따가 사장님한테 빌려달라고 해. 이리 와, 내가 먼저 닦아줄게.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하윤이 고분고분 의자에 앉자 도준이 하윤의 등에 바싹 붙었다. 이윽고 세다 못해 무식한 힘으로 하윤의 머리카락을 박박 문질렀다. 그렇게 큰 힘 덕에 하윤의 머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대충 말랐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하윤의 머리가 부드러워 엉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잠시 뒤 빌려온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린 하윤은 배부른 고양이처럼 도준의 가슴 위에 엎드려 그의 얼굴에 쪽하고 입을 맞췄다. “잘 자요.” “벌써?” 도준은 긴 팔로 하윤의 가느다란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너무 이른 시간 아니야?” 그 말에 하윤의 얼굴은 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오늘 하루 종일 운전해서 피곤하잖아요. 내일도 계속 운전해야 하니 그냥 자요.” “왜? 지금 나 걱정하는 거야?” 머리를 쓰다듬는 도준의 손길을 느끼며 하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도준의 팔을 끌어안은 채로 낮게 속삭였다. “도준 씨가 너무 고생해서 그러죠.” 민씨 집안에도 해결해야 할 일이 많은 데다 사업도 돌봐야 하는 타이밍에 구세주처럼 등장한 것도 모자라 이렇게 고생하는 도준의 모습에 하윤은 마음이 아팠다. 때문에 조금이나마 더 쉬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 하지만 그녀의 의도와는 달리 도준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은혜 갚을 기회를 줄게.” “아!” 허리를 확 끌어당기는 힘 때문에 도준의 몸 위에 앉게 된 하윤은 두 손으로 도준의 가슴을 받친 채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버텼다.
투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차는 주림이 있는 마을로 향했다. 두 사람은 또 부근에서 민박집 하나를 구했지만 이번에 구한 민박집은 어제의 집보다는 환경이 현저히 나빴다. 심지어 문도 발로 걷어 차야 닫히는 정도였으니. 사실 전에 주림의 외할아버지가 사는 곳이 외진 곳에 있다고 김종서가 말해준 적이 있다. 운전을 하다가 오토바이로 갈아타고 한참 뒤 다시 차로 갈아타면서 하윤은 김종서의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걸 제대로 체험했다. 오토바이에서 내리자 날은 어느새 어두워졌다. 순간 소녀가 산속에 팔려 갔다는 뉴스가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그도 그럴 게, 너무 외지고 고요한 곳이라 법률도 닿지 않을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곳은 대체로 무릉도원일 수도, 꽉 막힌 지옥일 수도 있다. 하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 옆에서 불이 반짝거리더니 남자의 입가에서 희뿌연 연기가 흘러나왔다. 이윽고 도준이 하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나한테 업혀서 갈래? 아니면 혼자 걸을래?” “업어 줘요.” 하윤은 익숙한 듯 도준의 등에 폴짝 뛰어올랐다. 도준은 불을 붙인 담배를 입에 문 채 하윤을 업고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이곳은 자동차 경적도 들리지 않고 네온 불빛도 없었다. 오직 밝은 달빛만 메마른 땅을 비추고 있었다. 하윤은 축 늘어진 채 도준의 어깨에 얼굴을 대고 두 발을 동동 구르며 불만을 토로했다. “왜 아직도 도착하지 못했어요? 아까 볼 때 이렇게 멀지 않은 것 같았는데.” 도준은 게으름 피우는 하윤의 모습에 그녀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편히 가면서 말이 많아.” 하윤은 코방귀를 뀌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약 20분쯤 더 걸었을까? 도준의 목을 감고 있던 손이 스르르 풀렸고 하윤의 머리가 맥없이 도준의 어깨에 떨어졌다. ‘이젠 아예 잠들어?’ 도준은 하윤이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한 번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 동작에 뒤에서 곧바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달빛이 부드러워질 때쯤 주림이 살고 있는 태강촌
이장의 말에 의하면 전에 주림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한동안 마을에서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때문에 아직도 마을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라고. 그 말에 권하윤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그러면 주림 선배 집에 물어봐줄 수 있나요?” 이장은 아내에게 상황을 설명하고는 친절하게 두 사람을 데리고 주림의 집을 향했다. 울퉁불퉁한 길 때문에 도준은 하윤을 반쯤 들고 걷다가 주림의 집에 도착해서야 놓아주었다. “이 봐!” “쾅쾅쾅!” “손님 왔어.” 문을 한참 동안 두드렸지만 안에서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이장은 큰 한숨을 쉬며 뭐라 한참 동안 말하다가 하윤이 알아듣지 못하자 자기의 귀를 가리키다가 주림의 집을 가리켰다. 그 말인 즉 주림의 외할아버지의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듣지 못하니 내일 다시 오자는 뜻이었다. 이에 하윤은 도준과 함께 다시 이장의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주위에 호텔이 없어 이장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자 도준은 지갑 안에서 5만원권을 몇 장 꺼내 숙박비 삼아 이장에게 건넸다. 그 돈을 보자 이장은 깜짝 놀라 연신 손을 저었다. 하지만 하윤의 견지 끝에 한 장만 받았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이장은 명절이라도 쇠는 것처럼 두 사람을 대접했다. 두 사람의 입맛을 몰라서인지 달걀 볶음과 같은 집반찬도 있었고, 수육과 같은 음식도 차려졌다. 너무 거한 환대에 하윤은 몸둘바를 몰라 하다가 자기의 머리를 자꾸만 힐끗거리는 이장의 막내딸에게 진주 장식이 붙은 머리핀을 선물로 주었다. 꼬마 아이는 포동포동한 손으로 하윤이 건네는 머리핀을 받고는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진주 장식이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럽게 만져댔다. 식사가 끝난 뒤, 할 일이 없는 데다 신호까지 터지지 않자 하윤은 꼬마 아이의 머리를 예쁘게 땋아주고 선물로 주었던 진주 머리핀을 달아주었다. 하윤은 쭈뼛거리는 꼬마 아이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예뻐.” “감사합니다.” 사투리를 고치려고 애를 썼지만
민도준은 입안에서 혀를 굴리며 흥분한 눈빛을 뿜어냈다. 하지만 지금 방해꾼이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됐어. 시간도 늦었는데 내일 물어봐.” 권하윤은 사냥감을 노리는 듯한 도준의 눈빛을 당연히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겁을 먹고 울어대는 다솜을 달래느라 정신이 팔려 있다가 도준의 의견에 동의하는 듯 아이를 이장 아내에게 데려갔다. 그러고 나서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도준은 이미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원래도 작은 침대였는데 도준이 누워 있자 마치 어린이 침대 같아 보이는 신기한 마법이 펼쳐졌다. 하윤은 그런 도준을 옆으로 밀어 버리며 위로 올라왔다. “저쪽으로 누어 봐요. 도준 씨 혼자만 위에서 자면 저는 어디 누워요?” 애석하게도 하윤의 가는 팔로 아무리 밀어 봤자 도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윤의 팔을 낚아채더니 자기 몸 위로 잡아당기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침대가 딱딱하니 내 몸 위에 누워.” 하윤은 버둥대며 도준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때 도준이 하윤의 허리를 야릇하게 문지르며 경고했다. “계속 움직이면 불편해질 줄 알아.” 그제야 하윤은 뻣뻣하게 굳어버린 채로 화가 난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렇게 한참 뒤, 오늘은 온전히 잠을 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윤의 목덜미에서 간지럼을 태우는 듯한 도준의 숨결이 느껴졌다. 이윽고 도준의 입술이 하윤의 목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이가 그렇게 좋아?” “다솜이가 얼마나 귀여운데요.” 하윤은 간지러운 감각 때문에 참지 못하고 몸을 피하려 했지만 움직이기도 전에 도준의 커다란 손이 하윤의 아랫배를 꾹 눌렀다. 이윽고 남자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직접 나은 아이는 더 귀여울 거야.” 도준의 희롱에 이미 익숙해진 하윤이었지만 이 말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누가 도준 씨 아이 낳아준대요? 아이 낳는 게 얼마나 아프다고. 저는 아픈 거 싫어요.” 하윤의 말에 도준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
민도준은 물을 끓이며 입을 열었다. “그 꼬맹이도 있잖아. 아까 통역해 달라고 부탁했어.” “동의 하던가요?” “응.” 권하윤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어떻게 설득했어요? 다솜이가 도준 씨 무서워하는 거 아니었어요?” 도준은 물 온도를 체크하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도와주면 돈 주겠다고 했거든.” “그렇게 간단하다고요?” 하윤은 도준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면?” 도준은 하윤의 머리를 꾹 눌렀다. “동기 부여가 되면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는 게 사람 아니야?” “…….” ‘그럼 내가 어제 인내심 있게 설득하려 한 건 헛수고였다는 거네…….’ ……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다솜은 하윤과 도준을 데리고 주림의 외할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이장의 말대로 어제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고 등이 휜 할아버지 한 분이 마당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주림의 외할아버지 주민수였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저 주림 선배 후배인데, 혹시 선배 여기 있나요?” 하윤의 인삿말에 주민수는 경계 가득한 표정을 짓더니 연신 손을 저으며 사람을 쫓아냈다. 그 모습에 다솜이 설명했다. “할아버지는 귀가 안 들려서 그렇게 말하면 못 들어요.” 하지만 하윤이 보기에는 주민수가 단순히 안 들리는 게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자기가 낯선 사람이라 상대하기 싫어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하윤은 얼른 다솜에게 부탁했다. “그럼 주림 선배가 이 마을에 있는지 언니 대신 물어봐 줄래?” 다솜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하윤의 물음을 곧이곧대로 전했다. 물론 사투리가 섞인 말투와 억양으로. 다행히 주민수는 다솜을 그나마 살갑게 대하며 귀담아듣는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한참 듣는가 싶더니 이내 손을 저으며 사투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다솜은 이내 하윤에게 그 말을 전했다. “주림 오빠는 오래 전에 마을을 떠났대요.” ‘주림 선배가 떠났다면 단서가 또 끊기는데.’ 하윤은 괜히 맥이 빠져 눈살을 찌푸렸다. 만약 엄석규가 그런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