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윤의 정신이 무너질 지경을 헤매고 있을 때, 마음 한 구석에서 웬 목소리가 그녀를 일깨워 줬다. ‘진정해야 해.’ ‘이미 오해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는데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돼.’ 더욱이 민재혁은 원래부터 속셈을 알 수 없는 데다 지금은 몰락한 상태라서 민도준을 어떻게 할 수 없으니 화살을 하윤에게 겨눴을 수 있다. 일부러 이런 시점에 이런 말을 한 건 하윤과 도준 사이에 모순이 생기기를 바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오늘 경성에서 난다긴다 하는 사람들이 모두 모였는데 이런 때에 하윤이 화라도 내고 따지고 들면 도준은 그녀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다. ‘그래. 민재혁이 말한 게 진짜가 아닐 수도 있잖아. 진짜라고 해도…….’ 하윤은 더 이상의 가능성은 상상할 수 없어 애써 침을 삼키며 목구멍을 막고 있는 이물감을 무시했다. 하지만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 아팠다. 심지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마저 쉬었다. “민재혁, 내가 당신 목적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 당신이 말하는 건 하나도 안 믿으니까.” “그래요?” 민재혁은 애써 괜찮은 척 하는 하윤을 바라보며 또다시 충격적인 말을 했다. “혹시 도준이 매녕 겨울만 되면 해원에 한달 정도 간다는 얘기 들은 적 있어요? 그렇다면 가족이 그 일을 당했던 때가 언제인지는 잊지 않았겠죠?” 가을의 따사로운 햇살이 서늘한 공기 속에서 하윤의 기억을 끄집어내며 또다시 하윤을 옥죄었다. 해원의 겨울은 눈이 적게 내린다. 하지만 하윤은 그날 공씨 저택 문 앞에 무릎 꿇고 빌던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 속, 차디찬 바닥에 무릎을 꿇었을 때 뼈속까지 전해지던 차가운 느낌을 잊을 수 없다. 그때 하윤은 해원의 겨울도 이토록 춥구나 하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이윽고 진소혜의 노트북으로 몰래 본 USB의 내용이 눈앞에 떠올랐다. 도준이 누트북을 닫아 버리기 전에 하윤은 화면에서 언뜻 스쳐지나는 사람의 인영을 봤었다. 어두운 불빛, 흔들리는 화면, 그때 볼 때는
민도준의 짙은 눈동자가 권하윤의 몸을 한번 훑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화를 할 때가 아니라서 할 수 없이 손을 들ㄹ어 하윤의 머리를 눌렀다. “착하게 굴어.”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온기는 검은 머리카락 너머에 전해지지 못하고 그저 표면에 맴돌다가 사라졌다. 하윤은 검은 옷을 입은 도준이 사람들 앞에서 향을 손에 들고 제사를 지내는 걸 멀리서 바라봤다. 희뿌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 방향이 마치 민씨 가문의 앞으로의 방향을 명시하는 것 같았다. 그 뒤는 하윤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영혼을 가식적인 웃음 뒤에 묶어 둔 채 사람들을 배웅했다. 도준은 역시나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하윤이 아무리 곁에 있어도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뜨거운 시선은 막을 수 없었다. 한때 하유도 그 중 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피곤하기만 해 화장실에 가겠다는 핑계를 대며 인파를 벗어났다. “쏴-” 물줄기가 손을 훑고는 번쩍이는 세면대에 떨어지더니 이내 하수구로 흘러 들었다. 수도꼭지를 잠근 하윤은 고개를 들어 거울에 비친 영혼 없는 듯한 여인을 바라봤다. ‘울면 안 돼.’ ‘추태를 부려서는 안 돼.’ ‘도준 씨가 나중에 말해준다고 했잖아.’ ‘이제 몇 시간 밖에 안 남았으니 기다릴 수 있어.’ 하윤은 애써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표정이 너무 어색해보이지 않는 걸 확인한 뒤에야 화장실을 나섰다. 하지만 화장실을 나서자마자 의외의 인물을 발견했다. “장 집사님?” 장 집사는 몸을 돌려 하윤을 바라봤다. 민상철이 세상을 떠서인지 원래 정정하던 장 집사는 하루아침에 늙은 것 같아 보였다. 나무 껍질 같은 피부가 푹 꺼진 눈을 덮고 있어 더 그런 모양이다. 그는 하윤을 보자마자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시윤 씨, 혹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하윤은 장 집사가 사적으로 자기를 찾아온 것에 대해 의문이 들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장 집사는 이 묘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적어도 하윤 보다는. 그는 곧바로 하윤을 데리고 그늘
장 집사는 권하윤이 자기의 의도를 이렇게 빨리 파악했다는 것에 놀라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민상철 곁에서 오랜 세월을 버텨온 사람인지라 그 표정을 얼굴에 드러내지는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가 이렇게 시윤 씨를 찾아온 건 다른 할 얘기가 있어서입니다.” 장 집사는 잠깐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 “아까 재혁 도련님과 얘기를 하는 걸 봤는데 그 뒤로 표정이 많이 안 좋았던 것 같아서요.” 장 집사는 애매모호하게 말했지만 하윤은 이내 그의 의도를 알아챘다. ‘내가 민재혁 말 때문에 영향받을까 봐 이러는 거구나.’ ‘아니지, 내가 뭐라고. 도준 씨가 영향받을까 봐 이러는 거겠지.’ 하윤은 마음 속의 분노를 억누르고 애써 원래의 목소리를 되찾았다. “무슨 뜻이죠?” “이 얘기는 저 같은 일개 집사가 하기엔 주제 넘지만 어르신께서는 늘 도준 도련님과 이시윤 씨를 걱정하셨습니다. 시윤 씨도 어르신의 임종 직전에 약속 하셨잖습니까? 어떻게 해서든 도준 도련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그러니 부디…….” “부디 약속을 지켜주십시오.” 잠깐 멈췄다가 이어진 간절한 말투는 장 집사가 하윤의 고통을 잘 알고 있다는 걸 말해줬다. 사실 민상철이 했던 말을 처음 들었을 때 하윤은 감동했었다. 한 노인이 임종 직전까지 손자의 행복을 바라는구나 하고. 하지만 이 순간 되새겨보니 본인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알게 되었다. 민상철이 그런 말을 했다는 건 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뜻이니까. 도준은 더욱 말할 것도 없고. 그때 병실에서 바보는 하윤 한 사람뿐이었다. 더욱 우스운 건 그때 하윤은 아무것도 모르고 영원히 도준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있겠다고 약속했다는 거다. ‘진짜 불쌍할 정도로 바보 같았네.’ 이 순간 하윤은 어떤 변명으로 자기를 설득해야 할지도 몰랐다. 설득할 수록 허튼 생각이 드니까. 도준이 자기 아버지의 죽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도 우스웠다. 하윤은 더 이상 억누르고 있던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민씨 집안
쓰러진 권하윤을 본 순간 장 집사는 사람을 당장 불러 와야겠다는 생각에 다급히 발을 뗐다가 우뚝 멈춰 섰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하윤을 빤히 쳐다봤다. ‘만약 깨어나서 소란을 피우면 큰일인데. 이대로 사라지는 게 오히려…….’ 장 집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바닥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 고개를 홱 돌렸다. 이윽고 눈앞에 나타난 사람을 보는 순간 장 집사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도준 도련님…….” 장 집사는 애써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 “이시윤 씨가…….” 도준은 허리를 숙여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하윤을 품에 안았다. 하지만 포악한 분위기와 잔인한 표정은 숨길 수가 없었다. “장 집사, 나보다 나이가 많은 걸 봐서 이번 한번은 넘어가겠으니 당장 내 눈 앞에서 사라져.” 장 집사는 떠나기는커녕 도준의 앞길을 가로 막았다. 물론 일개 집사이긴 하나 민씨 가문에서 몇십 년 동안 있은 장 집사는 민씨 가문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도준 도련님, 이시윤 씨는 고집이 센 분입니다. 이런 시점에 곁에 두고 있으면 오히려 위험합니다. 아니면 제가 먼저 병원으로 모셔가겠으니 이따가 장례식이 끝나면…….” 장 집사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남자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이에 장 집사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 도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 공태준이 민상철을 찾아와서 공씨 집안과 이씨 집안 사이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을 때 장 집사도 같이 있었다. 민상철이 하윤에게 핸드폰을 몰래 준 것도 하윤이 공태준과 함께 경성을 떠나 이 모든 걸 끝내고 모든 일이 다시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바라서였다. 하지만 하윤이 갑자기 마음을 바꿔 도준 곁에 남기로 결정하고 발표회에서 자기 신분까지 밝힐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도준이 동림 부지를 하윤에게 넘겨준 뒤에야 민사철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민상철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부터 기억력이 쇠퇴해져 자꾸만 같은 말만 반복했었다. ‘도
권하윤이 갑자기 조용해진 건 한 가지 사실을 설명해줬다. 그녀가 아직도 민도준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그걸 인지한 도준은 기분이 좋아져 갑자기 말을 걸어온 사람과 몇 마디 대화까지 해주었다. 하지만 도준 옆에 선 하윤은 이 순간이 고통스러웠다. 심지어 컴퓨터처럼 머릿속에서 이 순간의 데이터를 지워버리고 도준에 대한 감정도 지워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은 컴퓨터보다도 복잡하다. 사랑과 미움이 함께 공존할 수 있을뿐만 아니라 당장 상대를 죽여버리고 싶으면서도 중요한 순간에 상대의 발목을 잡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하니까. 하지만 도준이 사람들과 대화하는 동안 하윤은 자기의 행동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찾았다. 단죄하기 전에 도준에게 물어봐야 겠다고. 모든 사람, 모든 증거가 도준이 바로 아버지를 죽게 만든 범인이라고 가리켜도 하윤은 도준의 말을 듣고 싶었다. 전에 도준을 오해 했었으니 이번에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손바닥 안의 작은 손이 버둥대며 빠져나가려 하지 않자 도준의 미간도 따라서 펴졌다. 그런 편안한 표정은 도준에게 매력을 한층 불어넣었다. 그 때문인지 도준과 대화를 하던 여사장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힐끔거렸다. “저희 제품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민 사장님의 마음에 드는 보고서를 만들겠습니다. 그럼 저는 사장님과 사모님의 좋은 시간을 방해하지 않을게요.” 처음으로 듣는 호칭에 깨질 것만 같던 하윤의 뇌는 순간 멈췄다. 그러다가 한참 뒤에야 여사장이 뭔 말을 했는지 반응하고는 여사장이 내민 손을 뒤늦게 잡았다. “조심히 가세요.” 여사장은 기회를 틈타 자기의 명함을 내밀었다. “이건 제 명함입니다. 요즘 미용 기기를 출시하고 있고요. 물론 사모님은 아직 젊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시겠지만 저희가 현재 사람들의 피드백이 필요한 상황이니 도와주실 수 있다면 연락 주세요. 그러면 제가 바로 기계를 보내드릴 테니.” 여사장은 분수를 지킬 줄 알았다. 심지어 일부러 도준에게
권하윤은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며 결국 민도준에게 마음을 기울였다. 아직 답을 알 수 없는 일보다 도준을 위한 결정을 내리는 게 더 확실하니까. 한참을 몸부림치던 하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남아요. 우리 일은 나중에 얘기해요.” 민시영은 그제야 하윤의 낯빛을 보더니 놀란 듯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왜 안색이 이렇게 안 좋아요?” 하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더위 먹었나 봐요.” 시영은 하윤과 도준을 번갈아 보다가 뭔가 눈치챈 것처럼 멈칫하더니 이내 웃으며 분위기를 풀었다. “오빠도 참. 어쩜 이렇게 사람을 보살필 줄을 몰라? 내가 먼저 둘째 형수를 데리고 휴게실에서 쉬고 있을게.” 묘원에는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을 뿐만 아니라 만찬을 즐길 수 있는 연회장과 휴식할 수 있는 별채도 있다. 하윤은 시영의 표정에서 그녀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추측할 여유도 없어 그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아까 여기로 오면서 휴게실을 지나와서 저도 알아요. 제가 혼자 가면 돼요.” “아…….” 시영이 망설이는 사이 하윤은 이미 떠나버렸다. 하지만 하윤은 연회장 대신 조용한 곳을 찾아 어머니의 번호로 전화했다. 양현숙은 무척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딸! 오랜만에 전화 오네. 요즘 어때? 잘 지내? 누가 괴롭히는 사람은 없고?”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의 감정은 출구를 찾은 것처럼 이내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입을 막으며 애써 목소리를 조절했다. “전 잘 있죠. 요즘 좀 바빴어요. 엄마는 어때요? 오빠랑 시영은요?” “우리도…… 잘 지내지.” 잠깐 멈칫하는 양현숙의 말투에 하윤은 순간 불안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혹시 오빠한테 무슨 일 생긴 건 아니죠?” “걱정할 거 없어. 오빠는 잘 지내. 이제는 목발 없이도 걸을 수 있어. 그런데…….” 양현숙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다. “너랑 공태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공태준이 왜
“오빠, 아빠는 대체 어떻게 돌아가신 거야?” 이승우가 동생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권하윤은 이런 질문부터 던졌다. “왜 또 그걸 묻는 건데?” 하윤은 이미 이런 질문을 여러 번 한 적 있는데 승우는 매번 말을 피했었다. 예전에는 이게 모두 오빠가 자기를 생각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해 오빠를 난처하게 하지 않았지만 이제 하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 때문인지 목이 쉬도록 외쳤다. “오빠, 나 이제 어린 애 아니야. 나도 아빠가 어떻게 돌아가신 건지 알 권리가 있다고!” 승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뭐라 말하려 했는데 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흐느낌 소리에 이내 걱정스레 물었다. “시윤아?” 승우는 당황함을 감출 수 없었다. “윤아, 왜 그래?” “오빠, 시윤이라는 내 이름, 타고난 재능과 지혜로 매사에 결실과 다복이 함께 하는 삶을 살라는 뜻에서 지어줬다고 했잖아. 그런데…….” 하윤은 끝내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나 지금 바보가 된 느낌이야. 하나도 행복하지도 않고…….” 완전히 무너진 듯한 흐느낌 소리는 전류를 통해 수만리 밖에 전해졌다. “오빠, 제발 알려줘. 아빠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려줘. 오빠 제발…….” 동생의 울음소리를 듣자 승우는 마음이 미어질 듯 아팠다. 그 순간 어릴 적 동생이 넘어져 무릎에 피가 흘렀을 때 의사가 상처를 소독해주는 사이 자기를 꼭 안고 울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승우는 자기를 탓하며 아프면 자기를 물라고 했었다. 그랬더니 시윤은 울면서 오빠가 치킨보다 맛없다고 차라리 치킨을 먹겠다며 울음을 뚝 그쳤다. 한참 어린 그때도 지금처럼 이렇게 울지는 않았었는데 지금 이토록 서글피 우는 동생의 목소리를 듣자 승우는 동생이 얼마나 괴로울지 상상이 갔다. 결국 모든 이성을 뒤로한 채 승우는 동의했다. “그래, 알려줄게. 그러면 너부터 오빠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하윤이 하는 얘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한 남자의 이름만 언급됐다. “오빠, 나 너무 무서워. 그 사람이 아
“그리고 공씨 가문에서 민도준이 사위가 되는 걸 원하지 않았어.” 권하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전 가주, 그러니까 공태준과 공은채의 아버지가 공은채를 무척 아꼈다고 하더라고.” 지금껏 이런 저런 일에 휘말리면서 하윤은 식견이 넓어졌다. 하지만 이런 황당한 일을 듣자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건……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이승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예전에 공은채를 도와주고 싶어 하셨거든.” 하윤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공은채가 특별하다는 걸 하윤은 처음부터 발견했었다. 그도 그럴 게, 공은채는 이성호의 기타 제자들과 달리 모임에도 자주 나오지 않고 피아노를 칠때를 빼곤 자기 감정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때문에 아버지한테서 가르침을 받고 있는 제자 중 하나인 시윤조차 공은채를 몇 번 만나지 못했고 대화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공은채의 무뚝뚝한 성격을 떠올리자 하윤은 숨을 몇 번 돌리고 나서야 말을 내뱉었다. “공은채는 왜 도준 씨한테 도움을 청하지 않고 아빠한테 청했는데?” “상세한 건 나도 몰라. 사실 아버지가 나한테도 말을 많이 해주지 않으셨거든.” 이성호가 건물에서 뛰어내리기 전날 밤 [이성호 교수가 짐승 같은 면모를 숨기고 학생을 범했다]는 뉴스가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었다. 그 뒤로 연락이 두절되었던 이성호는 자기가 자살하려던 건물로 승우를 불러냈었다. 그때의 승우도 지금의 하윤처럼 아버지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울부짖으며 따져 물었었다. 무대 위에서 빛나기만 하던 음악가는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 잔뜩 풀이 죽어 있었고 정신이 반쯤 나가 있어 예전의 기품 있는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아버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예요? 밖에서 떠도는 얘기는 다 뭐고요? 공은채는…….” 공은채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이성호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아빠가 미안해. 네 엄마한테도 너희들한테도, 그리고 공은채 한테도. 내가 너희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