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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9화 무너지다 

권하윤의 정신이 무너질 지경을 헤매고 있을 때, 마음 한 구석에서 웬 목소리가 그녀를 일깨워 줬다.

‘진정해야 해.’

‘이미 오해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는데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돼.’

더욱이 민재혁은 원래부터 속셈을 알 수 없는 데다 지금은 몰락한 상태라서 민도준을 어떻게 할 수 없으니 화살을 하윤에게 겨눴을 수 있다.

일부러 이런 시점에 이런 말을 한 건 하윤과 도준 사이에 모순이 생기기를 바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오늘 경성에서 난다긴다 하는 사람들이 모두 모였는데 이런 때에 하윤이 화라도 내고 따지고 들면 도준은 그녀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다.

‘그래. 민재혁이 말한 게 진짜가 아닐 수도 있잖아. 진짜라고 해도…….’

하윤은 더 이상의 가능성은 상상할 수 없어 애써 침을 삼키며 목구멍을 막고 있는 이물감을 무시했다. 하지만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 아팠다.

심지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마저 쉬었다.

“민재혁, 내가 당신 목적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 당신이 말하는 건 하나도 안 믿으니까.”

“그래요?”

민재혁은 애써 괜찮은 척 하는 하윤을 바라보며 또다시 충격적인 말을 했다.

“혹시 도준이 매녕 겨울만 되면 해원에 한달 정도 간다는 얘기 들은 적 있어요? 그렇다면 가족이 그 일을 당했던 때가 언제인지는 잊지 않았겠죠?”

가을의 따사로운 햇살이 서늘한 공기 속에서 하윤의 기억을 끄집어내며 또다시 하윤을 옥죄었다.

해원의 겨울은 눈이 적게 내린다.

하지만 하윤은 그날 공씨 저택 문 앞에 무릎 꿇고 빌던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 속, 차디찬 바닥에 무릎을 꿇었을 때 뼈속까지 전해지던 차가운 느낌을 잊을 수 없다.

그때 하윤은 해원의 겨울도 이토록 춥구나 하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이윽고 진소혜의 노트북으로 몰래 본 USB의 내용이 눈앞에 떠올랐다.

도준이 누트북을 닫아 버리기 전에 하윤은 화면에서 언뜻 스쳐지나는 사람의 인영을 봤었다.

어두운 불빛, 흔들리는 화면, 그때 볼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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