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공씨 가문에서 민도준이 사위가 되는 걸 원하지 않았어.” 권하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전 가주, 그러니까 공태준과 공은채의 아버지가 공은채를 무척 아꼈다고 하더라고.” 지금껏 이런 저런 일에 휘말리면서 하윤은 식견이 넓어졌다. 하지만 이런 황당한 일을 듣자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건……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이승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예전에 공은채를 도와주고 싶어 하셨거든.” 하윤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공은채가 특별하다는 걸 하윤은 처음부터 발견했었다. 그도 그럴 게, 공은채는 이성호의 기타 제자들과 달리 모임에도 자주 나오지 않고 피아노를 칠때를 빼곤 자기 감정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때문에 아버지한테서 가르침을 받고 있는 제자 중 하나인 시윤조차 공은채를 몇 번 만나지 못했고 대화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공은채의 무뚝뚝한 성격을 떠올리자 하윤은 숨을 몇 번 돌리고 나서야 말을 내뱉었다. “공은채는 왜 도준 씨한테 도움을 청하지 않고 아빠한테 청했는데?” “상세한 건 나도 몰라. 사실 아버지가 나한테도 말을 많이 해주지 않으셨거든.” 이성호가 건물에서 뛰어내리기 전날 밤 [이성호 교수가 짐승 같은 면모를 숨기고 학생을 범했다]는 뉴스가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었다. 그 뒤로 연락이 두절되었던 이성호는 자기가 자살하려던 건물로 승우를 불러냈었다. 그때의 승우도 지금의 하윤처럼 아버지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울부짖으며 따져 물었었다. 무대 위에서 빛나기만 하던 음악가는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 잔뜩 풀이 죽어 있었고 정신이 반쯤 나가 있어 예전의 기품 있는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아버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예요? 밖에서 떠도는 얘기는 다 뭐고요? 공은채는…….” 공은채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이성호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아빠가 미안해. 네 엄마한테도 너희들한테도, 그리고 공은채 한테도. 내가 너희를 해
그 어떤 말로도 권하윤의 지금 심정을 형용하기엔 부족하다. 지난 2년간 하윤의 세계는 이미 수많은 충격때문에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매번 버티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때마다 하윤은 가족들과 함께 보냈던 행복한 추억을 떠올렸고 가족에게 사랑받던 그 시절을 회상했다. 그건 하윤이 고난을 이겨내는 원천이었고 영원히 더럽혀지지 않을 거라 믿었던 유일한 기억이었다. 하지만 지금 모든 게 산산이 부서지면서 날카로운 파편이 하윤을 헤집어 피투성이가 된 기분이었다. 주위를 빙 둘러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언제나 위안으로 삼던 자기의 보금자리에 조금이나마 기대려고 뒤를 돌아봤더니 그 보금자리마저 진작에 사라졌다. 하윤은 아버지가 누명을 썼다고 항상 믿어왔기에 돌아가실 때 얼마나 비통했을까 자꾸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그 죄가 사실일 수도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마치 바다에 빠져 물이 코와 입과 귀에 흘러 드는 것처럼 숨이 막히고 갑갑해났다. 심지어 승우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윤아? 너 왜 그래? 오빠 놀라게 하지 마. 말 좀 해봐, 응?” 하윤은 오빠를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 뭔가를 말해서 안심시키고 싶었지만 벙어리가 된 것처럼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승우도 하윤의 심정이 이해됐다. 자기가 모든 걸 말하면 하윤이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으니까. 그제야 마음 약해져 사실을 말한 게 후회됐지만 소용이 없었다. “윤아, 지난 일은 생각하지 말자. 게다가 우리는 아버지가 그랬을리 없다고 믿잖아. 안 그래?” 승우는 답을 듣지 못하자 느릿느릿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 일은 나중에 얘기하자. 너 민도준의 일에 대해 물어보려던 거 아니야?” ‘참, 그랬지. 잊을 뻔했네…….’ 하윤이 전화를 한 건 민도준이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지 묻기 위해서다. 하지만 아버지가 생전에 참회했다는 걸 듣고는 갑자기 어떻게 물어야 할지 모랐다. ‘만약 공은채의 죽음이 아빠와 관련이 있고, 아빠의 죽음도 도준 씨와, 관련이 있다
순간 민도준이 자기를 괴롭혔던 사람을 어떻게 처리했던지 기억났다. 하지만 그 상대가 공은채로 바뀌니 벌을 받는 사람은 오히려 하윤과 하윤의 가족으로 변했다. ‘참 잔인하네.’ 하윤이 나무 그늘 아래에서 멍 때리고 있을 때 앞에 갑자기 그림자 하나가 더 겹쳤다. 하지만 반응마저 무뎌진 하윤은 한참이 지나서야 사람을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하윤의 앞에 선 사람은 낯선 남자였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깊은 눈동자 그리고 남회색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갈색 곱슬머리에 양복을 입은 남자는 마치 옛날 영화에서 걸어 나온 영국 신사 같았다. 하지만 남자의 표정은 신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시각, 남자는 눈살을 찌푸린 채 하윤을 바라보다가 하윤이 얼룩 고양이 같은 얼굴을 들자 뒤로 두 걸음 정도 물러섰다. 순간 미간이 더 움푹 파여 들어가더니 양복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이거 써요.” 그 눈빛은 마치 길고양이한테 먹이를 주려다가 더러워서 머뭇거리는 사람 같았다. 하윤은 이 낯선 남자가 왜 갑자기 다가와 서로를 불편하게 만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자기 모습을 정리해야 했기에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하윤이 손수건을 잡으려는 찰나 남자가 손을 놓아버리는 바람에 손수건은 하윤의 다리 위에 어졌다. 하윤은 언짢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죠?” 평소 같았으면 절대 낯선 사람한테 이런 태도로 말하지 않았을 텐데 상대의 행동이 너무 언짢아 말투가 좋을 리 없었다. “혹시 소원 있어요?” 남자가 또박또박 내뱉은 말에 하윤은 어리둥절했다. “뭐라고요?” “그쪽 소원 하나 들어줄 수 있어요.” 하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너무 황당했다. “이봐요, 설마 당신이 제가 불러낸 램프의 요정 지니라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죠?” 상대방은 하윤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도 자기 말만 해댔다. “잘 생각해 봐요. 생각나면 전화 줘요.” 남자는 말하면서 명함 하나를 꺼내 하윤과 약 세 걸음 떨어진 화단 옆에 놓고는 떠나버렸다. 남자는 너무
권하윤은 자기가 민도준을 당해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건 도준을 알게 된 그날부터 자각한 일이다. 두 사람이 엮인 그날부터 하윤에게는 이 모든 걸 끝낼 권리조차 없었다. 하윤의 몸과 마음은 모두 도준에게 지배되었고 도준은 그저 사냥꾼처럼 하윤이 점차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걸 지켜봤다. 이에 하윤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젓가락을 든 채 밥을 먹기 시작했다. 심지어 도준이 짚어주는 것대로 모두 받아먹었다. 이미 배가 불렀으면서 억지로 꾸역꾸역 삼키는 하윤을 보자 도준은 그녀의 손에서 젓가락을 뺏고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말해 봐, 뭘 알고 싶은데?” “제 아버지의 죽음이 도준 씨와 관련 있어요?” “꼭 관련이 있는 건 아니야.” “말장난 하지 마요! 제 아버지를 해치는 일을 한 적이 있어요?” 도준은 그 말에 고개를 돌려 반문했다. “그런 짓을 하고도 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하윤은 목이 멨다. 예전이었다면 자기 아버지는 절대 그런 일을 했을 리 없다고 반박했을 테지만 이 순간 하윤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뜨거운 손바닥이 하윤의 볼을 쓰다듬으며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말투로 말했다. “내가 아니더라도 하윤 씨 아버지는 살지 못했을 거야.” 하윤은 도준의 손을 뿌리쳤다. 이 순간 가슴 속에 수많은 감정이 쌓였다. 분노, 수치심, 의문, 그리고 고통까지……. 모든 감정이 좌충우돌하며 하윤의 정신을 괴롭혀 하윤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제 아버지는 공은채 씨를…….” “착하지, 이거 말고 다른 거 물어봐.” 하윤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도준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화를 내지 않아요?” ‘만약 아빠가 공은채를 강요하여 그런 짓을 벌였다면 도준 씨가 왜 화를 내지 않지?’ 도준은 여전히 변함없는 표정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내가 왜 화를 내야 하지?” “도준 씨는 공은채 씨를 좋아하잖아요.” “그것도 맞긴 해. 좋아했지” 또다시 확인을 받자 하윤은 이제 고통스럽다
이걸 깨닫는 순간 권하윤은 등골이 오싹했다. 만약 아버지가 정말 공은채에게 그런 몹쓸 짓을 해서 죽게 만들었다면 공은채가 죽었을 뿐만 아니라 진명주가 세상에 남겼던 마지막 흔적까지 사라져버린 게 된다. 잇따라 오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민도준은 공은채가 위독할 때마다 어떤 노력을 했는지. 시간과 정력을 쏟아붓고 인력과 물력을 투자하며 공은채를 살리려 한 건 어머니의 흔적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니. 그렇게 해서 어렵사리 공은채의 생명을 건졌는데 결국은 그런 결말을 맞이했다니. 하윤은 도준이 공은채에 대해 집착하는 건 부모님이 공은채를 구해줘서 공은채를 부모님 생명의 연속으로 여기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연속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끈끈하고 명실상부한 것일 줄이야. 이건 단순히 도준이 사랑하는 사람을 해친 것보다 더 잔인하고 무서운 일이다. 도준은 부들부들 떨리는 하윤의 어깨를 꼭 잡더니 마치 장난기 많은 어린 아이처럼 그녀를 바라봤다. 심지어 말에도 약간의 농담이 섞여 있었다. “내가 뭐랬어? 못 견딜 거라고 했잖아. 이럴 거면서 묻긴 왜 물어?” “떠는 것 좀 봐. 이리와. 달래줄게.” 몸이 기울더니 하윤이 앉은 의자가 남자의 다리에 끌려 확 잡아당겨졌다. 두 의자가 조금의 틈도 없이 꼭 붙었지만 하윤은 도준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도준이 어떻게 이토록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가장 가까운 가족이 그렇게 됐는데, 세상에 남아 있던 유일한 위안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하윤은 생각과 동시에 질문을 내던졌다. 그 말을 들은 도준은 피식 웃으며 하윤의 이마를 튕겼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하윤 씨한테 복수라도 할까? 죽일까?” 하윤은 여전히 도준을 바라보며 자기의 뜻이 바로 그거라고 눈으로 표현했다. 그러자 도준이 웃었다. “진작 알았다면 그랬었겠는데 지금 그러기에는 마음이 아파.” 하윤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다시 물었다. “
권하윤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미워하는 게 얼마나 사치인지.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도 얼마나 뱃심이 필요한 일인지. 사람은 남을 미워하기 전 자기가 정의롭다고 확신할 수 있어야지, 그런 확신조차 없다면 타인에게 따질 자격도 없게 된다는 것도.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지금 대체 누구를 미워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거다. 공은채와 엮인 아버지를 미워해야 하는지. 아니면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 있는 민도준을 미워해야 하는지. 그도 아니면, 계속 가족을 괴롭히는 공씨 집안 사람을 미워해야 하는지. 하윤의 모든 뱃심은 이성호가 임종 직전 남긴 몇 마디 때문에 완전히 사라졌다. 심지어 이 지경이 되어버린 게 마땅한 벌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뭔지 알 수조차 없었다. 아버지의 누명을 벗겨주고 명예를 회복한 뒤 한 가족이 평온한 삶을 살자던 꿈도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냥 나를 미워하자. 이건 내가 아빠와 함께 일찍 죽지 않은 탓이야.’ 공씨 집 앞에서 무릎 꿇고 빌던 그 겨울 얼어 죽을 뻔한 적도, 공씨 집안 사람들이 연못에 밀어 버렸을 때 익사해 죽을 번한 적도 있었다. 권씨 집안 사람들에게 온갓 착취를 당할 때 죽을 뻔한 적도, 문태훈에게 살해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나마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도 있고 꿈이 있었다……. 오랜 침묵이 이어지는 사이, 하윤의 고개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질 것처럼 점점 숙여졌다. 그때 도준이 잿빛이 된 얼굴로 하윤의 얼굴을 들어 올리며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어디 불편해? 말해.” 손을 놓는 순간, 하윤은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남자의 눈살을 이내 찌푸려졌고 하윤을 들어 안은 채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 꼬박 이틀이 지난 뒤. 하윤이 다시 깬 것은 병원 침대 위였다. 손이 무의식적으로 아픈 심장을 움켜쥐려고 하던 찰나, 다른 한 손이 하윤의 손목을 잡았다. “조심해요, 바늘 잘못 만지면 안 되니까.” 익숙하고도 위화감이 드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리자 하윤은 흠칫 놀
“우리가 예전에 했던 내기 기억해요?” 공태준의 눈동자에 부드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 그날 그때, 분명 함께 강물에 휩쓸려 함께 죽을 고비를 넘겨 온갖 고생을 했지만 태준은 오히려 그 며칠이 지금껏 살아온 나날들 중 가장 행복했다. 그때 두 사람이 한 내기에서 태준이 이겨 권하윤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을 했었다. 하윤 역시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지만 그리워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의아한 듯 태준을 위아래로 훑을 뿐. “그때 공태준 당신이 이겼잖아.” “맞아요.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원한다면 저도 윤이 씨 질문 하나만 답해줄 수 있어요.” 분명 물어보고 싶은 걸 물어보라고 하면 될 것을 태준은 꼭 유일한 즐거움을 한번 회상하기 위해 그날 일을 입에 담았다. 하지만 하윤은 오히려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정말 친절하네. 몰라봤어. 내가 뭘 물어봤으면 좋겠는데? 도준 씨가 우리 아빠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지 물을까?” “관련 있어요. 다시 말하면, 만약 민도준이 아니었다면 윤이 씨 아버님은 돌아가시지 않았을 거예요.” “…….” 태준의 느닷없는 대답에 하윤은 약 2초간 멍해졌다. 그러다가 이내 화가 치밀었다. 지금껏 너무나도 많은 걸 겪어왔기에 하윤은 태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어떤 것도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태준의 확신에 찬 답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진짜가 맞는지 다시한번 확인하고 싶어졌다. 의심의 씨앗은 가슴에 묻히기만 하면 믿든 믿지 않든 결국엔 그 사람을 괴롭힐 거다. 더욱이 하윤은 마음 속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의심해왔다. 이게 바로 태준이 원하는 목표라는 걸 인지한 하윤은 이를 악물었다. “공태준, 당신 진짜 비열하네. 나가, 지금 당장 나가라고!” 하윤의 분노를 미리 짐작한 듯 태준은 아무런 흔들림도 없이 외투 주머니 속에서 편지 봉투 하나를 꺼내 하윤의 침대 머리맡에 놓고는 뒤로 물러났다. “이게 제 말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할 거예요. 물론 보거나 말거나 모두 윤이 씨 선택에 달렸어요.” 하윤
봉투를 봉하지 않은 탓에 가장자리를 살짝 쥐기만 해도 안에 있는 몇 장의 사진이 보였다. 하지만 손가락을 안으로 넣으려는 찰나, 문 밖에서 갑자기 소리가 들려오면서 금속으로 된 병실 문손잡이가 아래로 꺾였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은…….’ 좌우를 급히 살피다가 재빨리 봉투를 베개 아래에 감추는 찰나, 문이 마침 열렸고 민도준은 권하윤의 눈에 남아 있는 놀라움을 포착하고는 침대 옆으로 걸어갔다. “뭐 잘못한 거라도 있는 것처럼 왜 이렇게 깜짝 놀라?” 도준이 갑자기 지금 이 시간에 나타난 걸 본 하윤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도준이 이미 공태준이 왔었다는 걸 알아버렸다는 거다. 하지만 또 자기가 깨어나 병원 관계자가 도준에게 알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지금 이 시간에 나타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여겨졌다. 도준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침대 옆에 앉더니 자기를 빤히 바라보는 하윤을 보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왜 그렇게 봐? 내가 늦게 왔다고 타박하는 거야?” 이윽고 하윤의 어깨를 누르며 침대에 눕히더니 농담조로 말을 이었다. “어쩜 내가 나가기 바쁘게 정신이 들었지? 나랑 반항하는 것도 아니고.” 하윤의 머릿속에는 베개 밑에 있는 사진뿐이라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다. 게다가 도준과 마주하고 싶지 않은 터라 눈을 내리깔면서 시선을 가렸다. “아니에요.” 도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하윤의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 “됐어. 이제 농담 그만할게. 주사 다 맞으면 내려가 검사하고 별일 없으면 집에 가자.” ‘집에 가자고?’ ‘나한테 집이 있기나 한가?’ 하지만 하윤은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런 흔들림도 없이 고분고분 따르는 하윤의 모습을 보자 도준의 눈에는 오히려 짜증이 더해졌다. 이윽고 목소리마저 가라앉았다. “지금 나한테 성깔 부리는 거야?” “그냥 피곤한 것뿐이에요.” “피곤하면 좀 자.” 하윤은 소리 없이 눈을 감은 채 시선을 차단하고는 본인마저 자기의 세상 속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