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투를 봉하지 않은 탓에 가장자리를 살짝 쥐기만 해도 안에 있는 몇 장의 사진이 보였다. 하지만 손가락을 안으로 넣으려는 찰나, 문 밖에서 갑자기 소리가 들려오면서 금속으로 된 병실 문손잡이가 아래로 꺾였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은…….’ 좌우를 급히 살피다가 재빨리 봉투를 베개 아래에 감추는 찰나, 문이 마침 열렸고 민도준은 권하윤의 눈에 남아 있는 놀라움을 포착하고는 침대 옆으로 걸어갔다. “뭐 잘못한 거라도 있는 것처럼 왜 이렇게 깜짝 놀라?” 도준이 갑자기 지금 이 시간에 나타난 걸 본 하윤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도준이 이미 공태준이 왔었다는 걸 알아버렸다는 거다. 하지만 또 자기가 깨어나 병원 관계자가 도준에게 알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지금 이 시간에 나타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여겨졌다. 도준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침대 옆에 앉더니 자기를 빤히 바라보는 하윤을 보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왜 그렇게 봐? 내가 늦게 왔다고 타박하는 거야?” 이윽고 하윤의 어깨를 누르며 침대에 눕히더니 농담조로 말을 이었다. “어쩜 내가 나가기 바쁘게 정신이 들었지? 나랑 반항하는 것도 아니고.” 하윤의 머릿속에는 베개 밑에 있는 사진뿐이라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다. 게다가 도준과 마주하고 싶지 않은 터라 눈을 내리깔면서 시선을 가렸다. “아니에요.” 도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하윤의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 “됐어. 이제 농담 그만할게. 주사 다 맞으면 내려가 검사하고 별일 없으면 집에 가자.” ‘집에 가자고?’ ‘나한테 집이 있기나 한가?’ 하지만 하윤은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런 흔들림도 없이 고분고분 따르는 하윤의 모습을 보자 도준의 눈에는 오히려 짜증이 더해졌다. 이윽고 목소리마저 가라앉았다. “지금 나한테 성깔 부리는 거야?” “그냥 피곤한 것뿐이에요.” “피곤하면 좀 자.” 하윤은 소리 없이 눈을 감은 채 시선을 차단하고는 본인마저 자기의 세상 속
지난 날의 일들이 다시 떠오르자 하윤은 손가락은 부들부들 떨렸다. 심지어 사진을 제대로 잡을 수조차 없었다. ‘아니야,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눈을 감은 채 애써 기억 속에서 벗어난 하윤은 손에 쥔 사진을 바라봤다. 방금은 그저 사진 속의 빌딩에 시선이 갔었는데 자세히 보니 사진 속에는 한 사람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담배를 피우면서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남자는 단연 눈에 띄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도준이었으니까……. ‘도준 씨가 이 건물에 갔었다고?’ ‘언제적 일이지?’ 하윤은 호흡이 흐트러진 채 곧바로 다음 사진을 확인했다. 두 번째 사진은 건물 맞은편에서 찍은 것 같았는데 마치 파파라치가 몰래 찍은 각도 같았다. 사진 속 창문 너머에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분명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하윤은 단번에 두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 두 사람을 알아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중 한 명은 가족이고 한 명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사진 속의 이성호는 창문 쪽으로 몸을 돌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퇴폐한 모습으로 서 있었고, 창문 옆에는 도준이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낀 채 여유롭게 서 있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하윤은 온 몸의 온도가 급격히 내려갔다. ‘아빠가 뛰어내리기 전 만난 사람이 도준 씨였다고?’ 세면대의 거울에 여자의 창백하고도 멍한 얼굴이 그대로 반사되었다. 눈동자 속의 마지막 빛이 꺼진 채 희뿌연 연기가 끼어 있는 듯했다. 그와 동시에 태준이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다. ‘만약 민도준이 아니었다면 윤이 씨 아버님은 돌아가시지 않았을 거예요.’ 온기가 남아 있지 않은 손가락이 기계적으로 움직이며 사진을 뒤로 넘겼다. 이번 사진은 주차장 배경이었다. 도준이 차 문을 열고 있는 모습. 하지만 곧바로 차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차문에 기대 멀어지는 차 한 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사진은 힘껏 구겨졌고 사진을 쥐고 있던 손가락이 하얗게 질렸다. 눈물이 한 방
권하윤은 민도준이 이른 일을 벌였을 리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잘못했더라도 오빠와는 상관없으니까. 하지만 지난 날의 모든 게 자꾸만 도준은 절대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팔은 더 이상 무게를 버티지 못해 힘이 빠졌고 하윤의 몸도 세면대를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 지탱하는 힘을 잃은 하윤은 그대로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스스로를 위로했다. “똑똑-” 그때 간호사가 밖에서 노크했다. “환자분, 괜찮으세요? 혹시 제가 뭐 도와드릴 게 있나요?” 하윤은 아무 대답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잘 알았다. “아니에요. 바로 나갈게요.” “네. 그럼 밖에서 기다릴게요.” 간호사가 멀어지는 소리를 듣자 하윤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그렇게 씻고 나온 하윤은 한참 고민 끝에 결국 사진을 잠시 보관해 두기로 결정하고는 가방 안에 넣은 뒤 스카프로 숨겼다. 자기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하윤은 무의식적으로 이걸 도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지 않았다가 다시 방에 갇혀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야 할까 봐. 도준의 심기를 건드릴 바엔 스스로 아버지가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린 진실을 파헤치는 게 나았으니까. 하윤이 정신을 차렸을 때, 몸은 어느새 주차장에 도착해 있었다. 어둠 속, 닫히지 않은 차 안, 남자는 긴 다리 한쪽을 밖으로 내놓은 채 삐딱하게 앉아 있었다. 재떨이에 있는 담배꽁초를 보면 도준이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알 수 있었다. 하윤은 당연히 기사가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지 도준이 직접 기다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윽고 하윤이 조수석에 앉자마자 시동이 걸렸다. 차가 그렇게 병원을 빠져나올 때쯤 하윤은 나지막하게 물었다. “왜 먼저 가지 않았어요?” 도준은 핸들을 꺾으며 되물었다. “먼저 갔다가 하윤 씨가 이곳에서 미아가 되면 어떡하라고?” 하윤은 입을 벙긋거렸지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만약 그 사진을 보지 않았더라면 도준이 아무것도 하지
권하윤이 이런저런 불만을 얘기할 때마다 민도준은 듣는 둥 마는 둥 관심 없다는 태도를 보였었다. 물론 가끔은 웃으며 뭐가 이렇게 예민하냐고 타박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하윤의 손에 닿은 벽에는 마침 적당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바닥은 매번 투덜대며 외웠던 마룻바닥으로 되어 있었다. 이걸 보는 순간 하윤의 마음에는 씁쓸함이 피어올랐다. 하윤은 도준이 이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심지어 전에는 거의 매일 블랙썬의 휴게실에서 잠을 잤으니 이런 걸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하윤을 위해 이런 곳을 마련해 준 거다. 하윤은 재벌가에서 태어난 게 아니기에 썰렁하고 넓기만 한 별장보다는 북적거리는 시내에 위치한 아파트를 더 좋아한다. 되도록이면 주위에 먹거리가 널려 있어 원하는 때에 아래층으로 내려가 먹고 싶은 걸 먹고 근처의 공원에서 산책도 하며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이 모든 걸 한 번도 입 밖에 꺼낸 적이 없는데, 한순간 원했던 모든 게 눈앞에 나타났다. 하윤은 벽을 마주한 채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여긴 언제 준비한 거예요?” 이런 위치, 이런 인테리어는 며칠 만에 준비했을 리 없다. 벽을 마주하고 있는 하윤을 보자 도준은 순간 그녀가 스스로를 속이는 솜씨가 날이 갈수록 능숙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보지 않으면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나?’ 도준은 잔뜩 움츠린 하윤의 어깨를 잡고 자기 쪽으로 돌려놓더니 자꾸만 수그리는 하윤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윤 씨가 까탈스럽다는 거 안 순간부터.” 순간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눈에 고인 눈물에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사실 누구든 까탈스럽게 하고 싶은 대로 편안히 살기를 바랄 거다. 하지만 사람이 살면서 하고 싶은 대로 살 수는 없고 뜻대로 되지 않아도 참아야 할 때가 많다. 더욱이 하윤은 목숨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사치인데 이것저것 따질 상황은 더더욱 아니다. 예전에 도준이 자기를 까탈스럽
눈에 들어온 건 하윤이 꿈에 그리던 집이고 귓가에 들리는 건 남자의 애정이 담긴 속삭임이었다. 통유리창에 반사된 그림자 속, 하윤은 앞에 서 있고 그 뒤에는 하윤을 안은 남자가 보였다. 꼭 붙어 있는 모습은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분명 모든 게 행복한 모습인데 하윤의 어깨는 무겁기만 하다. 그 무게는 마치 하윤의 뼈를 으스러뜨릴 정도로 꾹 누르며 하윤의 심장마저 나락으로 떨어지게 했다. 끝내 참지 못하고 버둥댔지만 움직이자마자 도준이 어깨를 꾹 눌렀다. 이윽고 하윤의 등이 도준의 가슴에 꼭 붙었다. “자기야, 힘들잖아. 다른 사람 생각하지 말고 본인만 생각해. 나 사랑하잖아. 같이 있고 싶잖아. 아니야?” 도준의 말은 마침 악마의 속삭임처럼 하윤을 유혹했고 그의 팔처럼 하윤을 끌어안았다. 다른 건 모두 잊으라고, 지난 건 지난 거라고, 사람의 한평생은 짧은데 왜 굳이 본인을 괴롭히냐고 현혹했다. 하지만 하윤이 도준의 가슴에 기대려고 할 때 눈앞에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실망 가득한 아버지의 눈빛은 한순간 하윤을 일깨워 주었다. ‘안돼, 이러면 안 돼…….’ 하윤은 점점 세게 고개를 저었다. “전 그럴 수 없어요.” 거절의 말을 내뱉는 순간 주위의 온도가 급격히 내려갔고 등 뒤에서 기분을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여왔다. “그럴 수 없다고?” 이윽고 하윤을 안고 있던 힘이 풀렸다. 도준은 몸을 돌려 티 테이블 위에 놓인 칼을 집어 들고는 하윤에게 걸어왔다. 칼을 들고 가까워지는 도준의 모습은 마치 악마 같아 하윤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뭐 하자는 거지? 설마 날 죽이려고?’ 등이 벽에 닿은 순간 이제는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어졌다. 도준이 칼을 드는 순간 하윤은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도준은 칼을 반 바퀴 빙 돌려 하윤에게 건넸다. “받아.” 하윤은 그대로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지만 도준은 하윤의 손을 끌어와 억지로 칼자루를 쥐게 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복수할 기회를 줄게.” 도준은 고
민도준은 무척 즐거워 보였지만 권하윤은 이토록 마음 여린 자신이 밉기만 했다. 확실히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윤은 자기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남자를 죽일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나약한 거야?’ ‘아버지의 죽음을 모른 체 하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지도 못할 거면서 왜 도준 씨에 대한 감정을 내려놓고 복수하지 못하는 거야?’ ‘진실을 알게 된다 한들 달라질 건 없잖아. 결국 복수도 못 할 거면서.’ 하윤은 그제야 도준의 의도를 알아챘다. 도준은 하윤에게 가르쳐 준 거다. 그녀가 아무리 아버지의 죽음을 모른 체 하지 못한대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걸. 순간 절망감이 마음속에 퍼졌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뭘 선택해야 맞는 거?’ 도준은 품속에 안 긴 여인이 몸을 점점 움츠리는 걸 빤히 바라봤다.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는 듯한 자세는 마치 어린애처럼 가엾었다. 이에 도준은 더 이상 몰아붙이지 않고 손을 들어 하윤의 등을 쓰다듬었다. “됐어. 이제 막 퇴원해서 피곤하겠는데 일찍 자. 마침 침실도 구경시켜 줄게.” 도준은 마치 영혼을 잃은 것같은 하윤을 끌고 침실로 걸어갔다. 침실 역시 하윤이 원했던 대로 편안하고도 폭신폭신하게 되어 있었다. 커튼이 바닥에 축 드리웠고 심지어 침대 머리맡 캐비닛은 가장자리가 둥글둥글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도준은 인형을 다루는 것처럼 하윤을 침대 위에 앉히고는 옷장에서 잠옷 하나를 꺼냈다. 심지어 하윤의 몸에 대고 맞춰 보기까지 했다. “응, 이거 입어.” 연두색 슬립 치마는 섹시하면서도 보수적이어서 하윤의 우아하고도 매혹적인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옷을 갈아입자 도준은 침대 끝에 앉은 하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예뻐.” 너무나 노골적인 남자의 시선에 하윤은 침대에 기댄 손을 꽉 그러쥐었다. 하지만 도준은 그저 하윤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난 샤워하고 올 테니까, 먼저 자.” 도준이 욕실로 들어가고 나서야 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윤은 이런 때에 도준과
권하윤은 정확히 말하지 않았지만 민도준은 그녀가 뭘 묻는지 알고 있었다. 긴 손가락이 하윤의 긴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으며 엉킨 머리를 풀어줬지만 엉킨 하윤의 마음은 풀지 못했다. “내가 지은 죄가 너무 많아 하윤 씨마저 함께 말려들었나 봐.” 위로를 하는 탓인지 도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도 몇 배 더 부드러워 하윤의 눈물샘을 더 자극했다. ‘차라리 더 못되게 굴거나 아예 무시하지, 왜 이렇게 마음을 흔들어 놓는 거야?’ 하윤은 부드러운 도준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려고 했지만 따뜻한 온기를 가진 손이 그녀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뭔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해? 내가 하윤 씨 도망가게 둘 것 같아? 그만 울어. 하윤 씨는 내가 찜한 사람이니까 하윤 씨한테 죄가 있다고 해도 다 나한테 넘기면 돼. 하윤 씨가 벌받을 일은 없으니까 울지 마.” 검음 머리카락에 가려진 하윤의 등은 파르르 떨렸다. 도준은 하윤이 마음 속의 고비를 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변명을 만들어 준 거다. 자기가 하윤을 놓아주지 않는 거지 하윤이 떠나지 않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하윤의 두 가지 마음이 하윤을 양쪽으로 잡아당겨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랑과 증오. 매번 당겨질 때마다 하윤의 마음은 피투성이가 되어 통증이 느껴졌다. 하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도준의 손길을 느끼며 점점 잠이 들었다. 다음날. 하윤이 일어났을 때 도준은 이미 가버리고 없었다. 씻고 나와 침실 문을 나선 순간 하윤은 주방에 사람이 있는 걸 발견하고는 움찔했다. 말쑥하게 차려 입은 아주머니가 허리를 숙여 하윤에게 인사했다. “사모님, 깨어나셨어요? 아침은 다 되었는데 지금 드실래요?” 아주머니의 성은 장씨인데 도준과 하윤이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이 집을 청소해왔다. 장 아주머니는 음식솜씨 뿐만 아니라 하는 일도 재빨라 하윤이 식사를 마치자마자 설거지와 청소를 마치고 떠났다. 홀로 집에 남은 하윤은 장 아주머니가 가기 전에 데워 준 따끈한 죽을 쥔 채 창가에 서
권희연의 말로는 민도준이 로건을 내쫓을 때 카드 한 장을 줬는데 안에는 한평생 쓰고도 남을 돈이 들어있다고 했다. 만약 단순히 경호원과 고용주의 관계라면 로건은 돈을 받고 편히 퇴직 생활을 즐기거나 다른 일을 알아보면 그만이지 도준의 곁에서 생사를 걸고 일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도준에게 쫓겨난 뒤로부터 로건은 오히려 매일 의기소침해 있다고 하니 하윤은 도 도준과 로건의 관계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도준이 대체 어디에서 로건과 같은 사람을 찾았는지도 궁금했다. 희연은 하윤의 질문에 입꼬리를 올리더니 이내 마음 아픈 표정을 지었다. “로건 씨 말로는 6년 전에 만났대.” ‘그렇다면 도준 씨가 실종된 마지막 1년이잖아?’ “어디서 만났대?” “해외의 불법 복싱장에서 만났다는 것 같아.” …… 불법 복싱장은 법도도 인성도 없는 곳이다. 그 곳으로 가는 사람은 딱 두 가지 부류인데, 돈이 필요한 도박꾼과 돈이 필요한 권투 선수뿐. 다른 점이라곤 도박꾼이 내건 건 돈이고 권투 선수가 내건 건 목숨이라는 점이다. 그런 곳은 정규적인 경기장처럼 보호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실력만 겨루는 것도 아니다. 그곳에는 피 묻은 낡은 장갑과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상대가 있다. 그런 경기에 참가하는 사람은 밖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다니지 못하는 도망자거나 어려운 생활 환경 때문에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사람뿐. 이겨서 얻는 건 돈이지만 져서 잃는 건 목숨이다. 아무 생각 없이 질문을 던진 하윤은 상세한 내막을 듣자 눈살을 찌푸렸다. 도준이 지금은 건방지고 눈에 뵈는 게 없는 사람처럼 멋대로 하고 다닌다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래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도련님이었을 텐데. 하루 아침에 지옥으로 떨어져 남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신세가 되었다는 생각에 하윤은 마음이 아팠다. 희연도 그런 하윤이 마음을 알았기에 상세하게 말하지는 않았다. “로건 씨가 그 불법 복싱장의 선수였는데 민 사장님이 구해준 것도 모자라 데리고 함께 귀국했대.”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