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예전에 했던 내기 기억해요?” 공태준의 눈동자에 부드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 그날 그때, 분명 함께 강물에 휩쓸려 함께 죽을 고비를 넘겨 온갖 고생을 했지만 태준은 오히려 그 며칠이 지금껏 살아온 나날들 중 가장 행복했다. 그때 두 사람이 한 내기에서 태준이 이겨 권하윤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을 했었다. 하윤 역시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지만 그리워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의아한 듯 태준을 위아래로 훑을 뿐. “그때 공태준 당신이 이겼잖아.” “맞아요.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원한다면 저도 윤이 씨 질문 하나만 답해줄 수 있어요.” 분명 물어보고 싶은 걸 물어보라고 하면 될 것을 태준은 꼭 유일한 즐거움을 한번 회상하기 위해 그날 일을 입에 담았다. 하지만 하윤은 오히려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정말 친절하네. 몰라봤어. 내가 뭘 물어봤으면 좋겠는데? 도준 씨가 우리 아빠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지 물을까?” “관련 있어요. 다시 말하면, 만약 민도준이 아니었다면 윤이 씨 아버님은 돌아가시지 않았을 거예요.” “…….” 태준의 느닷없는 대답에 하윤은 약 2초간 멍해졌다. 그러다가 이내 화가 치밀었다. 지금껏 너무나도 많은 걸 겪어왔기에 하윤은 태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어떤 것도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태준의 확신에 찬 답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진짜가 맞는지 다시한번 확인하고 싶어졌다. 의심의 씨앗은 가슴에 묻히기만 하면 믿든 믿지 않든 결국엔 그 사람을 괴롭힐 거다. 더욱이 하윤은 마음 속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의심해왔다. 이게 바로 태준이 원하는 목표라는 걸 인지한 하윤은 이를 악물었다. “공태준, 당신 진짜 비열하네. 나가, 지금 당장 나가라고!” 하윤의 분노를 미리 짐작한 듯 태준은 아무런 흔들림도 없이 외투 주머니 속에서 편지 봉투 하나를 꺼내 하윤의 침대 머리맡에 놓고는 뒤로 물러났다. “이게 제 말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할 거예요. 물론 보거나 말거나 모두 윤이 씨 선택에 달렸어요.” 하윤
봉투를 봉하지 않은 탓에 가장자리를 살짝 쥐기만 해도 안에 있는 몇 장의 사진이 보였다. 하지만 손가락을 안으로 넣으려는 찰나, 문 밖에서 갑자기 소리가 들려오면서 금속으로 된 병실 문손잡이가 아래로 꺾였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은…….’ 좌우를 급히 살피다가 재빨리 봉투를 베개 아래에 감추는 찰나, 문이 마침 열렸고 민도준은 권하윤의 눈에 남아 있는 놀라움을 포착하고는 침대 옆으로 걸어갔다. “뭐 잘못한 거라도 있는 것처럼 왜 이렇게 깜짝 놀라?” 도준이 갑자기 지금 이 시간에 나타난 걸 본 하윤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도준이 이미 공태준이 왔었다는 걸 알아버렸다는 거다. 하지만 또 자기가 깨어나 병원 관계자가 도준에게 알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지금 이 시간에 나타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여겨졌다. 도준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침대 옆에 앉더니 자기를 빤히 바라보는 하윤을 보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왜 그렇게 봐? 내가 늦게 왔다고 타박하는 거야?” 이윽고 하윤의 어깨를 누르며 침대에 눕히더니 농담조로 말을 이었다. “어쩜 내가 나가기 바쁘게 정신이 들었지? 나랑 반항하는 것도 아니고.” 하윤의 머릿속에는 베개 밑에 있는 사진뿐이라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다. 게다가 도준과 마주하고 싶지 않은 터라 눈을 내리깔면서 시선을 가렸다. “아니에요.” 도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하윤의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 “됐어. 이제 농담 그만할게. 주사 다 맞으면 내려가 검사하고 별일 없으면 집에 가자.” ‘집에 가자고?’ ‘나한테 집이 있기나 한가?’ 하지만 하윤은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런 흔들림도 없이 고분고분 따르는 하윤의 모습을 보자 도준의 눈에는 오히려 짜증이 더해졌다. 이윽고 목소리마저 가라앉았다. “지금 나한테 성깔 부리는 거야?” “그냥 피곤한 것뿐이에요.” “피곤하면 좀 자.” 하윤은 소리 없이 눈을 감은 채 시선을 차단하고는 본인마저 자기의 세상 속
지난 날의 일들이 다시 떠오르자 하윤은 손가락은 부들부들 떨렸다. 심지어 사진을 제대로 잡을 수조차 없었다. ‘아니야,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눈을 감은 채 애써 기억 속에서 벗어난 하윤은 손에 쥔 사진을 바라봤다. 방금은 그저 사진 속의 빌딩에 시선이 갔었는데 자세히 보니 사진 속에는 한 사람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담배를 피우면서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남자는 단연 눈에 띄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도준이었으니까……. ‘도준 씨가 이 건물에 갔었다고?’ ‘언제적 일이지?’ 하윤은 호흡이 흐트러진 채 곧바로 다음 사진을 확인했다. 두 번째 사진은 건물 맞은편에서 찍은 것 같았는데 마치 파파라치가 몰래 찍은 각도 같았다. 사진 속 창문 너머에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분명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하윤은 단번에 두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 두 사람을 알아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중 한 명은 가족이고 한 명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사진 속의 이성호는 창문 쪽으로 몸을 돌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퇴폐한 모습으로 서 있었고, 창문 옆에는 도준이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낀 채 여유롭게 서 있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하윤은 온 몸의 온도가 급격히 내려갔다. ‘아빠가 뛰어내리기 전 만난 사람이 도준 씨였다고?’ 세면대의 거울에 여자의 창백하고도 멍한 얼굴이 그대로 반사되었다. 눈동자 속의 마지막 빛이 꺼진 채 희뿌연 연기가 끼어 있는 듯했다. 그와 동시에 태준이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다. ‘만약 민도준이 아니었다면 윤이 씨 아버님은 돌아가시지 않았을 거예요.’ 온기가 남아 있지 않은 손가락이 기계적으로 움직이며 사진을 뒤로 넘겼다. 이번 사진은 주차장 배경이었다. 도준이 차 문을 열고 있는 모습. 하지만 곧바로 차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차문에 기대 멀어지는 차 한 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사진은 힘껏 구겨졌고 사진을 쥐고 있던 손가락이 하얗게 질렸다. 눈물이 한 방
권하윤은 민도준이 이른 일을 벌였을 리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잘못했더라도 오빠와는 상관없으니까. 하지만 지난 날의 모든 게 자꾸만 도준은 절대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팔은 더 이상 무게를 버티지 못해 힘이 빠졌고 하윤의 몸도 세면대를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 지탱하는 힘을 잃은 하윤은 그대로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스스로를 위로했다. “똑똑-” 그때 간호사가 밖에서 노크했다. “환자분, 괜찮으세요? 혹시 제가 뭐 도와드릴 게 있나요?” 하윤은 아무 대답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잘 알았다. “아니에요. 바로 나갈게요.” “네. 그럼 밖에서 기다릴게요.” 간호사가 멀어지는 소리를 듣자 하윤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그렇게 씻고 나온 하윤은 한참 고민 끝에 결국 사진을 잠시 보관해 두기로 결정하고는 가방 안에 넣은 뒤 스카프로 숨겼다. 자기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하윤은 무의식적으로 이걸 도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지 않았다가 다시 방에 갇혀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야 할까 봐. 도준의 심기를 건드릴 바엔 스스로 아버지가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린 진실을 파헤치는 게 나았으니까. 하윤이 정신을 차렸을 때, 몸은 어느새 주차장에 도착해 있었다. 어둠 속, 닫히지 않은 차 안, 남자는 긴 다리 한쪽을 밖으로 내놓은 채 삐딱하게 앉아 있었다. 재떨이에 있는 담배꽁초를 보면 도준이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알 수 있었다. 하윤은 당연히 기사가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지 도준이 직접 기다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윽고 하윤이 조수석에 앉자마자 시동이 걸렸다. 차가 그렇게 병원을 빠져나올 때쯤 하윤은 나지막하게 물었다. “왜 먼저 가지 않았어요?” 도준은 핸들을 꺾으며 되물었다. “먼저 갔다가 하윤 씨가 이곳에서 미아가 되면 어떡하라고?” 하윤은 입을 벙긋거렸지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만약 그 사진을 보지 않았더라면 도준이 아무것도 하지
권하윤이 이런저런 불만을 얘기할 때마다 민도준은 듣는 둥 마는 둥 관심 없다는 태도를 보였었다. 물론 가끔은 웃으며 뭐가 이렇게 예민하냐고 타박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하윤의 손에 닿은 벽에는 마침 적당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바닥은 매번 투덜대며 외웠던 마룻바닥으로 되어 있었다. 이걸 보는 순간 하윤의 마음에는 씁쓸함이 피어올랐다. 하윤은 도준이 이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심지어 전에는 거의 매일 블랙썬의 휴게실에서 잠을 잤으니 이런 걸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하윤을 위해 이런 곳을 마련해 준 거다. 하윤은 재벌가에서 태어난 게 아니기에 썰렁하고 넓기만 한 별장보다는 북적거리는 시내에 위치한 아파트를 더 좋아한다. 되도록이면 주위에 먹거리가 널려 있어 원하는 때에 아래층으로 내려가 먹고 싶은 걸 먹고 근처의 공원에서 산책도 하며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이 모든 걸 한 번도 입 밖에 꺼낸 적이 없는데, 한순간 원했던 모든 게 눈앞에 나타났다. 하윤은 벽을 마주한 채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여긴 언제 준비한 거예요?” 이런 위치, 이런 인테리어는 며칠 만에 준비했을 리 없다. 벽을 마주하고 있는 하윤을 보자 도준은 순간 그녀가 스스로를 속이는 솜씨가 날이 갈수록 능숙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보지 않으면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나?’ 도준은 잔뜩 움츠린 하윤의 어깨를 잡고 자기 쪽으로 돌려놓더니 자꾸만 수그리는 하윤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윤 씨가 까탈스럽다는 거 안 순간부터.” 순간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눈에 고인 눈물에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사실 누구든 까탈스럽게 하고 싶은 대로 편안히 살기를 바랄 거다. 하지만 사람이 살면서 하고 싶은 대로 살 수는 없고 뜻대로 되지 않아도 참아야 할 때가 많다. 더욱이 하윤은 목숨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사치인데 이것저것 따질 상황은 더더욱 아니다. 예전에 도준이 자기를 까탈스럽
눈에 들어온 건 하윤이 꿈에 그리던 집이고 귓가에 들리는 건 남자의 애정이 담긴 속삭임이었다. 통유리창에 반사된 그림자 속, 하윤은 앞에 서 있고 그 뒤에는 하윤을 안은 남자가 보였다. 꼭 붙어 있는 모습은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분명 모든 게 행복한 모습인데 하윤의 어깨는 무겁기만 하다. 그 무게는 마치 하윤의 뼈를 으스러뜨릴 정도로 꾹 누르며 하윤의 심장마저 나락으로 떨어지게 했다. 끝내 참지 못하고 버둥댔지만 움직이자마자 도준이 어깨를 꾹 눌렀다. 이윽고 하윤의 등이 도준의 가슴에 꼭 붙었다. “자기야, 힘들잖아. 다른 사람 생각하지 말고 본인만 생각해. 나 사랑하잖아. 같이 있고 싶잖아. 아니야?” 도준의 말은 마침 악마의 속삭임처럼 하윤을 유혹했고 그의 팔처럼 하윤을 끌어안았다. 다른 건 모두 잊으라고, 지난 건 지난 거라고, 사람의 한평생은 짧은데 왜 굳이 본인을 괴롭히냐고 현혹했다. 하지만 하윤이 도준의 가슴에 기대려고 할 때 눈앞에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실망 가득한 아버지의 눈빛은 한순간 하윤을 일깨워 주었다. ‘안돼, 이러면 안 돼…….’ 하윤은 점점 세게 고개를 저었다. “전 그럴 수 없어요.” 거절의 말을 내뱉는 순간 주위의 온도가 급격히 내려갔고 등 뒤에서 기분을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여왔다. “그럴 수 없다고?” 이윽고 하윤을 안고 있던 힘이 풀렸다. 도준은 몸을 돌려 티 테이블 위에 놓인 칼을 집어 들고는 하윤에게 걸어왔다. 칼을 들고 가까워지는 도준의 모습은 마치 악마 같아 하윤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뭐 하자는 거지? 설마 날 죽이려고?’ 등이 벽에 닿은 순간 이제는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어졌다. 도준이 칼을 드는 순간 하윤은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도준은 칼을 반 바퀴 빙 돌려 하윤에게 건넸다. “받아.” 하윤은 그대로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지만 도준은 하윤의 손을 끌어와 억지로 칼자루를 쥐게 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복수할 기회를 줄게.” 도준은 고
민도준은 무척 즐거워 보였지만 권하윤은 이토록 마음 여린 자신이 밉기만 했다. 확실히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윤은 자기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남자를 죽일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나약한 거야?’ ‘아버지의 죽음을 모른 체 하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지도 못할 거면서 왜 도준 씨에 대한 감정을 내려놓고 복수하지 못하는 거야?’ ‘진실을 알게 된다 한들 달라질 건 없잖아. 결국 복수도 못 할 거면서.’ 하윤은 그제야 도준의 의도를 알아챘다. 도준은 하윤에게 가르쳐 준 거다. 그녀가 아무리 아버지의 죽음을 모른 체 하지 못한대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걸. 순간 절망감이 마음속에 퍼졌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뭘 선택해야 맞는 거?’ 도준은 품속에 안 긴 여인이 몸을 점점 움츠리는 걸 빤히 바라봤다.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는 듯한 자세는 마치 어린애처럼 가엾었다. 이에 도준은 더 이상 몰아붙이지 않고 손을 들어 하윤의 등을 쓰다듬었다. “됐어. 이제 막 퇴원해서 피곤하겠는데 일찍 자. 마침 침실도 구경시켜 줄게.” 도준은 마치 영혼을 잃은 것같은 하윤을 끌고 침실로 걸어갔다. 침실 역시 하윤이 원했던 대로 편안하고도 폭신폭신하게 되어 있었다. 커튼이 바닥에 축 드리웠고 심지어 침대 머리맡 캐비닛은 가장자리가 둥글둥글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도준은 인형을 다루는 것처럼 하윤을 침대 위에 앉히고는 옷장에서 잠옷 하나를 꺼냈다. 심지어 하윤의 몸에 대고 맞춰 보기까지 했다. “응, 이거 입어.” 연두색 슬립 치마는 섹시하면서도 보수적이어서 하윤의 우아하고도 매혹적인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옷을 갈아입자 도준은 침대 끝에 앉은 하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예뻐.” 너무나 노골적인 남자의 시선에 하윤은 침대에 기댄 손을 꽉 그러쥐었다. 하지만 도준은 그저 하윤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난 샤워하고 올 테니까, 먼저 자.” 도준이 욕실로 들어가고 나서야 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윤은 이런 때에 도준과
권하윤은 정확히 말하지 않았지만 민도준은 그녀가 뭘 묻는지 알고 있었다. 긴 손가락이 하윤의 긴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으며 엉킨 머리를 풀어줬지만 엉킨 하윤의 마음은 풀지 못했다. “내가 지은 죄가 너무 많아 하윤 씨마저 함께 말려들었나 봐.” 위로를 하는 탓인지 도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도 몇 배 더 부드러워 하윤의 눈물샘을 더 자극했다. ‘차라리 더 못되게 굴거나 아예 무시하지, 왜 이렇게 마음을 흔들어 놓는 거야?’ 하윤은 부드러운 도준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려고 했지만 따뜻한 온기를 가진 손이 그녀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뭔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해? 내가 하윤 씨 도망가게 둘 것 같아? 그만 울어. 하윤 씨는 내가 찜한 사람이니까 하윤 씨한테 죄가 있다고 해도 다 나한테 넘기면 돼. 하윤 씨가 벌받을 일은 없으니까 울지 마.” 검음 머리카락에 가려진 하윤의 등은 파르르 떨렸다. 도준은 하윤이 마음 속의 고비를 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변명을 만들어 준 거다. 자기가 하윤을 놓아주지 않는 거지 하윤이 떠나지 않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하윤의 두 가지 마음이 하윤을 양쪽으로 잡아당겨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랑과 증오. 매번 당겨질 때마다 하윤의 마음은 피투성이가 되어 통증이 느껴졌다. 하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도준의 손길을 느끼며 점점 잠이 들었다. 다음날. 하윤이 일어났을 때 도준은 이미 가버리고 없었다. 씻고 나와 침실 문을 나선 순간 하윤은 주방에 사람이 있는 걸 발견하고는 움찔했다. 말쑥하게 차려 입은 아주머니가 허리를 숙여 하윤에게 인사했다. “사모님, 깨어나셨어요? 아침은 다 되었는데 지금 드실래요?” 아주머니의 성은 장씨인데 도준과 하윤이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이 집을 청소해왔다. 장 아주머니는 음식솜씨 뿐만 아니라 하는 일도 재빨라 하윤이 식사를 마치자마자 설거지와 청소를 마치고 떠났다. 홀로 집에 남은 하윤은 장 아주머니가 가기 전에 데워 준 따끈한 죽을 쥔 채 창가에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