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윤이 이런저런 불만을 얘기할 때마다 민도준은 듣는 둥 마는 둥 관심 없다는 태도를 보였었다. 물론 가끔은 웃으며 뭐가 이렇게 예민하냐고 타박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하윤의 손에 닿은 벽에는 마침 적당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바닥은 매번 투덜대며 외웠던 마룻바닥으로 되어 있었다. 이걸 보는 순간 하윤의 마음에는 씁쓸함이 피어올랐다. 하윤은 도준이 이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심지어 전에는 거의 매일 블랙썬의 휴게실에서 잠을 잤으니 이런 걸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하윤을 위해 이런 곳을 마련해 준 거다. 하윤은 재벌가에서 태어난 게 아니기에 썰렁하고 넓기만 한 별장보다는 북적거리는 시내에 위치한 아파트를 더 좋아한다. 되도록이면 주위에 먹거리가 널려 있어 원하는 때에 아래층으로 내려가 먹고 싶은 걸 먹고 근처의 공원에서 산책도 하며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이 모든 걸 한 번도 입 밖에 꺼낸 적이 없는데, 한순간 원했던 모든 게 눈앞에 나타났다. 하윤은 벽을 마주한 채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여긴 언제 준비한 거예요?” 이런 위치, 이런 인테리어는 며칠 만에 준비했을 리 없다. 벽을 마주하고 있는 하윤을 보자 도준은 순간 그녀가 스스로를 속이는 솜씨가 날이 갈수록 능숙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보지 않으면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나?’ 도준은 잔뜩 움츠린 하윤의 어깨를 잡고 자기 쪽으로 돌려놓더니 자꾸만 수그리는 하윤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윤 씨가 까탈스럽다는 거 안 순간부터.” 순간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눈에 고인 눈물에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사실 누구든 까탈스럽게 하고 싶은 대로 편안히 살기를 바랄 거다. 하지만 사람이 살면서 하고 싶은 대로 살 수는 없고 뜻대로 되지 않아도 참아야 할 때가 많다. 더욱이 하윤은 목숨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사치인데 이것저것 따질 상황은 더더욱 아니다. 예전에 도준이 자기를 까탈스럽
눈에 들어온 건 하윤이 꿈에 그리던 집이고 귓가에 들리는 건 남자의 애정이 담긴 속삭임이었다. 통유리창에 반사된 그림자 속, 하윤은 앞에 서 있고 그 뒤에는 하윤을 안은 남자가 보였다. 꼭 붙어 있는 모습은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분명 모든 게 행복한 모습인데 하윤의 어깨는 무겁기만 하다. 그 무게는 마치 하윤의 뼈를 으스러뜨릴 정도로 꾹 누르며 하윤의 심장마저 나락으로 떨어지게 했다. 끝내 참지 못하고 버둥댔지만 움직이자마자 도준이 어깨를 꾹 눌렀다. 이윽고 하윤의 등이 도준의 가슴에 꼭 붙었다. “자기야, 힘들잖아. 다른 사람 생각하지 말고 본인만 생각해. 나 사랑하잖아. 같이 있고 싶잖아. 아니야?” 도준의 말은 마침 악마의 속삭임처럼 하윤을 유혹했고 그의 팔처럼 하윤을 끌어안았다. 다른 건 모두 잊으라고, 지난 건 지난 거라고, 사람의 한평생은 짧은데 왜 굳이 본인을 괴롭히냐고 현혹했다. 하지만 하윤이 도준의 가슴에 기대려고 할 때 눈앞에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실망 가득한 아버지의 눈빛은 한순간 하윤을 일깨워 주었다. ‘안돼, 이러면 안 돼…….’ 하윤은 점점 세게 고개를 저었다. “전 그럴 수 없어요.” 거절의 말을 내뱉는 순간 주위의 온도가 급격히 내려갔고 등 뒤에서 기분을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여왔다. “그럴 수 없다고?” 이윽고 하윤을 안고 있던 힘이 풀렸다. 도준은 몸을 돌려 티 테이블 위에 놓인 칼을 집어 들고는 하윤에게 걸어왔다. 칼을 들고 가까워지는 도준의 모습은 마치 악마 같아 하윤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뭐 하자는 거지? 설마 날 죽이려고?’ 등이 벽에 닿은 순간 이제는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어졌다. 도준이 칼을 드는 순간 하윤은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도준은 칼을 반 바퀴 빙 돌려 하윤에게 건넸다. “받아.” 하윤은 그대로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지만 도준은 하윤의 손을 끌어와 억지로 칼자루를 쥐게 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복수할 기회를 줄게.” 도준은 고
민도준은 무척 즐거워 보였지만 권하윤은 이토록 마음 여린 자신이 밉기만 했다. 확실히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윤은 자기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남자를 죽일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나약한 거야?’ ‘아버지의 죽음을 모른 체 하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지도 못할 거면서 왜 도준 씨에 대한 감정을 내려놓고 복수하지 못하는 거야?’ ‘진실을 알게 된다 한들 달라질 건 없잖아. 결국 복수도 못 할 거면서.’ 하윤은 그제야 도준의 의도를 알아챘다. 도준은 하윤에게 가르쳐 준 거다. 그녀가 아무리 아버지의 죽음을 모른 체 하지 못한대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걸. 순간 절망감이 마음속에 퍼졌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뭘 선택해야 맞는 거?’ 도준은 품속에 안 긴 여인이 몸을 점점 움츠리는 걸 빤히 바라봤다.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는 듯한 자세는 마치 어린애처럼 가엾었다. 이에 도준은 더 이상 몰아붙이지 않고 손을 들어 하윤의 등을 쓰다듬었다. “됐어. 이제 막 퇴원해서 피곤하겠는데 일찍 자. 마침 침실도 구경시켜 줄게.” 도준은 마치 영혼을 잃은 것같은 하윤을 끌고 침실로 걸어갔다. 침실 역시 하윤이 원했던 대로 편안하고도 폭신폭신하게 되어 있었다. 커튼이 바닥에 축 드리웠고 심지어 침대 머리맡 캐비닛은 가장자리가 둥글둥글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도준은 인형을 다루는 것처럼 하윤을 침대 위에 앉히고는 옷장에서 잠옷 하나를 꺼냈다. 심지어 하윤의 몸에 대고 맞춰 보기까지 했다. “응, 이거 입어.” 연두색 슬립 치마는 섹시하면서도 보수적이어서 하윤의 우아하고도 매혹적인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옷을 갈아입자 도준은 침대 끝에 앉은 하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예뻐.” 너무나 노골적인 남자의 시선에 하윤은 침대에 기댄 손을 꽉 그러쥐었다. 하지만 도준은 그저 하윤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난 샤워하고 올 테니까, 먼저 자.” 도준이 욕실로 들어가고 나서야 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윤은 이런 때에 도준과
권하윤은 정확히 말하지 않았지만 민도준은 그녀가 뭘 묻는지 알고 있었다. 긴 손가락이 하윤의 긴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으며 엉킨 머리를 풀어줬지만 엉킨 하윤의 마음은 풀지 못했다. “내가 지은 죄가 너무 많아 하윤 씨마저 함께 말려들었나 봐.” 위로를 하는 탓인지 도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도 몇 배 더 부드러워 하윤의 눈물샘을 더 자극했다. ‘차라리 더 못되게 굴거나 아예 무시하지, 왜 이렇게 마음을 흔들어 놓는 거야?’ 하윤은 부드러운 도준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려고 했지만 따뜻한 온기를 가진 손이 그녀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뭔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해? 내가 하윤 씨 도망가게 둘 것 같아? 그만 울어. 하윤 씨는 내가 찜한 사람이니까 하윤 씨한테 죄가 있다고 해도 다 나한테 넘기면 돼. 하윤 씨가 벌받을 일은 없으니까 울지 마.” 검음 머리카락에 가려진 하윤의 등은 파르르 떨렸다. 도준은 하윤이 마음 속의 고비를 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변명을 만들어 준 거다. 자기가 하윤을 놓아주지 않는 거지 하윤이 떠나지 않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하윤의 두 가지 마음이 하윤을 양쪽으로 잡아당겨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랑과 증오. 매번 당겨질 때마다 하윤의 마음은 피투성이가 되어 통증이 느껴졌다. 하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도준의 손길을 느끼며 점점 잠이 들었다. 다음날. 하윤이 일어났을 때 도준은 이미 가버리고 없었다. 씻고 나와 침실 문을 나선 순간 하윤은 주방에 사람이 있는 걸 발견하고는 움찔했다. 말쑥하게 차려 입은 아주머니가 허리를 숙여 하윤에게 인사했다. “사모님, 깨어나셨어요? 아침은 다 되었는데 지금 드실래요?” 아주머니의 성은 장씨인데 도준과 하윤이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이 집을 청소해왔다. 장 아주머니는 음식솜씨 뿐만 아니라 하는 일도 재빨라 하윤이 식사를 마치자마자 설거지와 청소를 마치고 떠났다. 홀로 집에 남은 하윤은 장 아주머니가 가기 전에 데워 준 따끈한 죽을 쥔 채 창가에 서
권희연의 말로는 민도준이 로건을 내쫓을 때 카드 한 장을 줬는데 안에는 한평생 쓰고도 남을 돈이 들어있다고 했다. 만약 단순히 경호원과 고용주의 관계라면 로건은 돈을 받고 편히 퇴직 생활을 즐기거나 다른 일을 알아보면 그만이지 도준의 곁에서 생사를 걸고 일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도준에게 쫓겨난 뒤로부터 로건은 오히려 매일 의기소침해 있다고 하니 하윤은 도 도준과 로건의 관계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도준이 대체 어디에서 로건과 같은 사람을 찾았는지도 궁금했다. 희연은 하윤의 질문에 입꼬리를 올리더니 이내 마음 아픈 표정을 지었다. “로건 씨 말로는 6년 전에 만났대.” ‘그렇다면 도준 씨가 실종된 마지막 1년이잖아?’ “어디서 만났대?” “해외의 불법 복싱장에서 만났다는 것 같아.” …… 불법 복싱장은 법도도 인성도 없는 곳이다. 그 곳으로 가는 사람은 딱 두 가지 부류인데, 돈이 필요한 도박꾼과 돈이 필요한 권투 선수뿐. 다른 점이라곤 도박꾼이 내건 건 돈이고 권투 선수가 내건 건 목숨이라는 점이다. 그런 곳은 정규적인 경기장처럼 보호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실력만 겨루는 것도 아니다. 그곳에는 피 묻은 낡은 장갑과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상대가 있다. 그런 경기에 참가하는 사람은 밖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다니지 못하는 도망자거나 어려운 생활 환경 때문에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사람뿐. 이겨서 얻는 건 돈이지만 져서 잃는 건 목숨이다. 아무 생각 없이 질문을 던진 하윤은 상세한 내막을 듣자 눈살을 찌푸렸다. 도준이 지금은 건방지고 눈에 뵈는 게 없는 사람처럼 멋대로 하고 다닌다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래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도련님이었을 텐데. 하루 아침에 지옥으로 떨어져 남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신세가 되었다는 생각에 하윤은 마음이 아팠다. 희연도 그런 하윤이 마음을 알았기에 상세하게 말하지는 않았다. “로건 씨가 그 불법 복싱장의 선수였는데 민 사장님이 구해준 것도 모자라 데리고 함께 귀국했대.”
한참 동안 곰곰이 생각한 뒤, 권하윤은 어머니의 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당장 물어봐야 할 질문 때문에 긴장했는지 전화가 연결되는 순간 가슴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응, 딸. 무슨 일 있는 거야?” 양현숙도 하윤을 보고 싶지만 지난 2년 동안 간 떨어질 뻔한 일이 너무 많이 벌어져 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까 봐 무서웠다. 하윤도 어머니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알아 차리고는 위로했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냥 엄마랑 얘기하고 싶어서 전화한 거예요.” 그 말에 양현숙은 그제야 조금 안도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하윤은 대충 얼버무리고는 이내 말머리를 돌렸다. “엄마, 혹시 오빠는 곁에 있어요?” “네 오빠는 지금 재활 치료 중이야. 혹시 오빠 찾는 거야?” 이승우가 곁에 없다는 말에 하윤을 얼른 기회를 잡았다. “아니에요.” 그러더니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엄마랑 얘기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딸의 애교에 양현숙은 이내 웃음을 지었다. “그래. 승우 그 자식은 상관하지 말고 엄마랑만 얘기하자.” 예전처럼 오빠를 “따돌림” 하는 어머니의 행동에 하윤은 코끝이 찡해났다. 어릴 때부터 승우는 하윤의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곤 했지만 여자애의 마음을 몰라 하윤을 화나게 할 때가 많았다. 그때면 양현숙은 하윤의 편에 서서 이승우를 꾸짖곤 했다. “윤이를 더 화나게 했다간 네 아버지랑 함께 밖에 내다 버리겠다”고. 옛 기억을 떠올리자 하윤은 당장 해야 할 질문을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어머니한테 어떻게 아버지가 다른 여자를 좋아했냐고, 바람을 피운 적 있냐고 물어보냔 말이다. 두 분의 사이가 그렇게 좋았었는데. 음악가라서 그런지 이성호는 로맨티스트였다. 때문에 매번 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면 꼭 양현숙에게 선물을 사 가지고 오곤 했다. 어떨 때는 모자였다가 어떨 때는 꽃이었다고 심지어 어떨 때는 해외에서 테이크아웃한 음식이었다. 양현숙이 좋아
“아마 작년에 말했을 걸. 엄마도 이젠 나이가 들어 기억이 가물가물해. 휴, 나이가 드는 것도 좋은 일이지. 일찍 네 아 곁에 갈 수 있을 테니.” 권하윤은 조급해 났다. “엄마는 아빠 곁에 갈 생각만 하고. 우리는 싫어요? 어떻게 절 버리고 갈 생각을 해요?” 양현숙은 자기의 말이 하윤을 속상하게 했다는 걸 눈치채고는 얼른 말을 돌렸다. “그래. 우리 딸 말 대로 어디도 안 가고 곁에 있을게. 아빠더러 기다리라고 하면 되지 뭐.” 몇 초간 침묵이 흐르더니 하윤이 핸드폰을 손톱으로 긁으며 입을 열었다. “엄마는 아빠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갑자기 왜 그런 물음은 물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아빠가 보고 싶어서.” 양현숙은 그제야 한숨을 푹 내쉬더니 그리운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네 아빠는 보기에는 얄짤 없는 사람 같아도 사실은 마음이 약해. 네가 피아도 안 배우고 춤 배운다고 했을 때도 말로만 반대하고 너 몰래 선생님 알아보느라 여기저기 수소문 했었어.” “그리고 네가 공연할 때 절대 보러 가지 않는다고 말하더니 결국에는 도둑처럼 맨 뒷줄에 앉아 매번 몰래 보고 나왔어.” 순간 눈물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리더니 목소리마저 가라앉았다. “그리고 또 있어요?” “그리고 네 아빠는 다른 것에는 너그러운 편인데 음악에 있어서는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어. 그래서 학생들이 네 아빠한테 꾸중을 듣고는 항상 나한테 찾아와서 하소연했거든. 특히 주림이라고, 매일 네 아빠랑 싸우고는 나한테 찾아와서 화해하게 도와달라고 했었어…….” 학생을 떠올리자 양현숙은 점점 목이 쉬었다. “모든 사람이 네 아빠가 나쁜 짓을 했다고 손가락질할 때, 주림 그 애만이 끝까지 네 아빠 편을 들어줬어. 심지어 학교에 현수막까지 내 걸고 시위하다가 결국은 퇴학당했는데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몰라.” 하윤은 그 말에 멍해졌다. “주림 선배 말하는 거예요? 전에는 왜 말하지 않았는데요?” “휴. 그때 네 아빠랑 오빠가 그런 일이
‘우선 아버지가 건물에서 뛰어내리기 직전 오빠더러 가족을 데리고 떠나라고 했으니 우리가 위험할 거라는 걸 알았을 거야.’ 만약 예전이었다면 하윤은 당연히 그 위험이 공씨 가문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민도준을 만났다는 걸 알았기에 확신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오빠가 겪은 교통 사고가 정말 단순한 사고일까? 아니면 인위적인 걸까?’ ‘그런 상황에 마침 사고를 당했다는 건 너무 우연의 일치 아닌가?’ ‘그런데 만약 인위적인 거라면 범인은 오빠가 아빠를 찾으러 그 건물로 갈 거라는 걸 알았을 거야.’ 사진을 쥔 손끝은 다시 새하얗게 질렸고 소파에 앉아 있는 하윤의 얼굴도 잔뜩 굳어버렸다. ‘지금의 모든 단서가 도준 씨를 가리키고 있잖아.’ 하윤은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 지금 그녀의 추측은 모두 이 몇 장의 사진에서부터 시작된 거다. 게다가 이게 바로 공태준의 목표일 거고. 하윤은 자기가 꺼낸 사진을 빤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 멈칫했다. ‘잠깐만, 이 사진은 어디서 난 거지?’ ‘사진을 찍은 사람이 혹시 아빠를 감시했나?’ ‘아니야, 감시했다면 아빠가 묵었던 방만 나왔어야 했어.’ 하지만 이 사진 속에는 도준도 있으니 그런 가능성은 배제할 수 있었다. ‘아니면, 사진을 찍은 사람이 사실은 도준 씨를 감시했나?’ ‘그런데 누가 감히 도준 씨를? 설마 공태준? 아니면 다른 사람?’ 주위의 모든 게 마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것처럼 막연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하윤은 우선 이 일에 커다란 물음표 하나를 새겨 둘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한테서 상황을 전해 들었지만 모두가 자기의 생각과 입장을 대입해서 말해줬다. 때문에 지금 수집한 단서는 아직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태준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런 때에 이 사진을 하윤에게 준 건 이성호의 죽음이 도준과 상관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걸 어떻게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