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민도준이 자기를 괴롭혔던 사람을 어떻게 처리했던지 기억났다. 하지만 그 상대가 공은채로 바뀌니 벌을 받는 사람은 오히려 하윤과 하윤의 가족으로 변했다. ‘참 잔인하네.’ 하윤이 나무 그늘 아래에서 멍 때리고 있을 때 앞에 갑자기 그림자 하나가 더 겹쳤다. 하지만 반응마저 무뎌진 하윤은 한참이 지나서야 사람을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하윤의 앞에 선 사람은 낯선 남자였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깊은 눈동자 그리고 남회색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갈색 곱슬머리에 양복을 입은 남자는 마치 옛날 영화에서 걸어 나온 영국 신사 같았다. 하지만 남자의 표정은 신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시각, 남자는 눈살을 찌푸린 채 하윤을 바라보다가 하윤이 얼룩 고양이 같은 얼굴을 들자 뒤로 두 걸음 정도 물러섰다. 순간 미간이 더 움푹 파여 들어가더니 양복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이거 써요.” 그 눈빛은 마치 길고양이한테 먹이를 주려다가 더러워서 머뭇거리는 사람 같았다. 하윤은 이 낯선 남자가 왜 갑자기 다가와 서로를 불편하게 만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자기 모습을 정리해야 했기에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하윤이 손수건을 잡으려는 찰나 남자가 손을 놓아버리는 바람에 손수건은 하윤의 다리 위에 어졌다. 하윤은 언짢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죠?” 평소 같았으면 절대 낯선 사람한테 이런 태도로 말하지 않았을 텐데 상대의 행동이 너무 언짢아 말투가 좋을 리 없었다. “혹시 소원 있어요?” 남자가 또박또박 내뱉은 말에 하윤은 어리둥절했다. “뭐라고요?” “그쪽 소원 하나 들어줄 수 있어요.” 하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너무 황당했다. “이봐요, 설마 당신이 제가 불러낸 램프의 요정 지니라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죠?” 상대방은 하윤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도 자기 말만 해댔다. “잘 생각해 봐요. 생각나면 전화 줘요.” 남자는 말하면서 명함 하나를 꺼내 하윤과 약 세 걸음 떨어진 화단 옆에 놓고는 떠나버렸다. 남자는 너무
권하윤은 자기가 민도준을 당해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건 도준을 알게 된 그날부터 자각한 일이다. 두 사람이 엮인 그날부터 하윤에게는 이 모든 걸 끝낼 권리조차 없었다. 하윤의 몸과 마음은 모두 도준에게 지배되었고 도준은 그저 사냥꾼처럼 하윤이 점차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걸 지켜봤다. 이에 하윤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젓가락을 든 채 밥을 먹기 시작했다. 심지어 도준이 짚어주는 것대로 모두 받아먹었다. 이미 배가 불렀으면서 억지로 꾸역꾸역 삼키는 하윤을 보자 도준은 그녀의 손에서 젓가락을 뺏고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말해 봐, 뭘 알고 싶은데?” “제 아버지의 죽음이 도준 씨와 관련 있어요?” “꼭 관련이 있는 건 아니야.” “말장난 하지 마요! 제 아버지를 해치는 일을 한 적이 있어요?” 도준은 그 말에 고개를 돌려 반문했다. “그런 짓을 하고도 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하윤은 목이 멨다. 예전이었다면 자기 아버지는 절대 그런 일을 했을 리 없다고 반박했을 테지만 이 순간 하윤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뜨거운 손바닥이 하윤의 볼을 쓰다듬으며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말투로 말했다. “내가 아니더라도 하윤 씨 아버지는 살지 못했을 거야.” 하윤은 도준의 손을 뿌리쳤다. 이 순간 가슴 속에 수많은 감정이 쌓였다. 분노, 수치심, 의문, 그리고 고통까지……. 모든 감정이 좌충우돌하며 하윤의 정신을 괴롭혀 하윤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제 아버지는 공은채 씨를…….” “착하지, 이거 말고 다른 거 물어봐.” 하윤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도준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화를 내지 않아요?” ‘만약 아빠가 공은채를 강요하여 그런 짓을 벌였다면 도준 씨가 왜 화를 내지 않지?’ 도준은 여전히 변함없는 표정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내가 왜 화를 내야 하지?” “도준 씨는 공은채 씨를 좋아하잖아요.” “그것도 맞긴 해. 좋아했지” 또다시 확인을 받자 하윤은 이제 고통스럽다
이걸 깨닫는 순간 권하윤은 등골이 오싹했다. 만약 아버지가 정말 공은채에게 그런 몹쓸 짓을 해서 죽게 만들었다면 공은채가 죽었을 뿐만 아니라 진명주가 세상에 남겼던 마지막 흔적까지 사라져버린 게 된다. 잇따라 오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민도준은 공은채가 위독할 때마다 어떤 노력을 했는지. 시간과 정력을 쏟아붓고 인력과 물력을 투자하며 공은채를 살리려 한 건 어머니의 흔적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니. 그렇게 해서 어렵사리 공은채의 생명을 건졌는데 결국은 그런 결말을 맞이했다니. 하윤은 도준이 공은채에 대해 집착하는 건 부모님이 공은채를 구해줘서 공은채를 부모님 생명의 연속으로 여기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연속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끈끈하고 명실상부한 것일 줄이야. 이건 단순히 도준이 사랑하는 사람을 해친 것보다 더 잔인하고 무서운 일이다. 도준은 부들부들 떨리는 하윤의 어깨를 꼭 잡더니 마치 장난기 많은 어린 아이처럼 그녀를 바라봤다. 심지어 말에도 약간의 농담이 섞여 있었다. “내가 뭐랬어? 못 견딜 거라고 했잖아. 이럴 거면서 묻긴 왜 물어?” “떠는 것 좀 봐. 이리와. 달래줄게.” 몸이 기울더니 하윤이 앉은 의자가 남자의 다리에 끌려 확 잡아당겨졌다. 두 의자가 조금의 틈도 없이 꼭 붙었지만 하윤은 도준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도준이 어떻게 이토록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가장 가까운 가족이 그렇게 됐는데, 세상에 남아 있던 유일한 위안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하윤은 생각과 동시에 질문을 내던졌다. 그 말을 들은 도준은 피식 웃으며 하윤의 이마를 튕겼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하윤 씨한테 복수라도 할까? 죽일까?” 하윤은 여전히 도준을 바라보며 자기의 뜻이 바로 그거라고 눈으로 표현했다. 그러자 도준이 웃었다. “진작 알았다면 그랬었겠는데 지금 그러기에는 마음이 아파.” 하윤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다시 물었다. “
권하윤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미워하는 게 얼마나 사치인지.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도 얼마나 뱃심이 필요한 일인지. 사람은 남을 미워하기 전 자기가 정의롭다고 확신할 수 있어야지, 그런 확신조차 없다면 타인에게 따질 자격도 없게 된다는 것도.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지금 대체 누구를 미워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거다. 공은채와 엮인 아버지를 미워해야 하는지. 아니면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 있는 민도준을 미워해야 하는지. 그도 아니면, 계속 가족을 괴롭히는 공씨 집안 사람을 미워해야 하는지. 하윤의 모든 뱃심은 이성호가 임종 직전 남긴 몇 마디 때문에 완전히 사라졌다. 심지어 이 지경이 되어버린 게 마땅한 벌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뭔지 알 수조차 없었다. 아버지의 누명을 벗겨주고 명예를 회복한 뒤 한 가족이 평온한 삶을 살자던 꿈도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냥 나를 미워하자. 이건 내가 아빠와 함께 일찍 죽지 않은 탓이야.’ 공씨 집 앞에서 무릎 꿇고 빌던 그 겨울 얼어 죽을 뻔한 적도, 공씨 집안 사람들이 연못에 밀어 버렸을 때 익사해 죽을 번한 적도 있었다. 권씨 집안 사람들에게 온갓 착취를 당할 때 죽을 뻔한 적도, 문태훈에게 살해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나마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도 있고 꿈이 있었다……. 오랜 침묵이 이어지는 사이, 하윤의 고개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질 것처럼 점점 숙여졌다. 그때 도준이 잿빛이 된 얼굴로 하윤의 얼굴을 들어 올리며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어디 불편해? 말해.” 손을 놓는 순간, 하윤은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남자의 눈살을 이내 찌푸려졌고 하윤을 들어 안은 채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 꼬박 이틀이 지난 뒤. 하윤이 다시 깬 것은 병원 침대 위였다. 손이 무의식적으로 아픈 심장을 움켜쥐려고 하던 찰나, 다른 한 손이 하윤의 손목을 잡았다. “조심해요, 바늘 잘못 만지면 안 되니까.” 익숙하고도 위화감이 드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리자 하윤은 흠칫 놀
“우리가 예전에 했던 내기 기억해요?” 공태준의 눈동자에 부드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 그날 그때, 분명 함께 강물에 휩쓸려 함께 죽을 고비를 넘겨 온갖 고생을 했지만 태준은 오히려 그 며칠이 지금껏 살아온 나날들 중 가장 행복했다. 그때 두 사람이 한 내기에서 태준이 이겨 권하윤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을 했었다. 하윤 역시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지만 그리워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의아한 듯 태준을 위아래로 훑을 뿐. “그때 공태준 당신이 이겼잖아.” “맞아요.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원한다면 저도 윤이 씨 질문 하나만 답해줄 수 있어요.” 분명 물어보고 싶은 걸 물어보라고 하면 될 것을 태준은 꼭 유일한 즐거움을 한번 회상하기 위해 그날 일을 입에 담았다. 하지만 하윤은 오히려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정말 친절하네. 몰라봤어. 내가 뭘 물어봤으면 좋겠는데? 도준 씨가 우리 아빠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지 물을까?” “관련 있어요. 다시 말하면, 만약 민도준이 아니었다면 윤이 씨 아버님은 돌아가시지 않았을 거예요.” “…….” 태준의 느닷없는 대답에 하윤은 약 2초간 멍해졌다. 그러다가 이내 화가 치밀었다. 지금껏 너무나도 많은 걸 겪어왔기에 하윤은 태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어떤 것도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태준의 확신에 찬 답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진짜가 맞는지 다시한번 확인하고 싶어졌다. 의심의 씨앗은 가슴에 묻히기만 하면 믿든 믿지 않든 결국엔 그 사람을 괴롭힐 거다. 더욱이 하윤은 마음 속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의심해왔다. 이게 바로 태준이 원하는 목표라는 걸 인지한 하윤은 이를 악물었다. “공태준, 당신 진짜 비열하네. 나가, 지금 당장 나가라고!” 하윤의 분노를 미리 짐작한 듯 태준은 아무런 흔들림도 없이 외투 주머니 속에서 편지 봉투 하나를 꺼내 하윤의 침대 머리맡에 놓고는 뒤로 물러났다. “이게 제 말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할 거예요. 물론 보거나 말거나 모두 윤이 씨 선택에 달렸어요.” 하윤
봉투를 봉하지 않은 탓에 가장자리를 살짝 쥐기만 해도 안에 있는 몇 장의 사진이 보였다. 하지만 손가락을 안으로 넣으려는 찰나, 문 밖에서 갑자기 소리가 들려오면서 금속으로 된 병실 문손잡이가 아래로 꺾였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은…….’ 좌우를 급히 살피다가 재빨리 봉투를 베개 아래에 감추는 찰나, 문이 마침 열렸고 민도준은 권하윤의 눈에 남아 있는 놀라움을 포착하고는 침대 옆으로 걸어갔다. “뭐 잘못한 거라도 있는 것처럼 왜 이렇게 깜짝 놀라?” 도준이 갑자기 지금 이 시간에 나타난 걸 본 하윤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도준이 이미 공태준이 왔었다는 걸 알아버렸다는 거다. 하지만 또 자기가 깨어나 병원 관계자가 도준에게 알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지금 이 시간에 나타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여겨졌다. 도준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침대 옆에 앉더니 자기를 빤히 바라보는 하윤을 보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왜 그렇게 봐? 내가 늦게 왔다고 타박하는 거야?” 이윽고 하윤의 어깨를 누르며 침대에 눕히더니 농담조로 말을 이었다. “어쩜 내가 나가기 바쁘게 정신이 들었지? 나랑 반항하는 것도 아니고.” 하윤의 머릿속에는 베개 밑에 있는 사진뿐이라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다. 게다가 도준과 마주하고 싶지 않은 터라 눈을 내리깔면서 시선을 가렸다. “아니에요.” 도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하윤의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 “됐어. 이제 농담 그만할게. 주사 다 맞으면 내려가 검사하고 별일 없으면 집에 가자.” ‘집에 가자고?’ ‘나한테 집이 있기나 한가?’ 하지만 하윤은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런 흔들림도 없이 고분고분 따르는 하윤의 모습을 보자 도준의 눈에는 오히려 짜증이 더해졌다. 이윽고 목소리마저 가라앉았다. “지금 나한테 성깔 부리는 거야?” “그냥 피곤한 것뿐이에요.” “피곤하면 좀 자.” 하윤은 소리 없이 눈을 감은 채 시선을 차단하고는 본인마저 자기의 세상 속
지난 날의 일들이 다시 떠오르자 하윤은 손가락은 부들부들 떨렸다. 심지어 사진을 제대로 잡을 수조차 없었다. ‘아니야,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눈을 감은 채 애써 기억 속에서 벗어난 하윤은 손에 쥔 사진을 바라봤다. 방금은 그저 사진 속의 빌딩에 시선이 갔었는데 자세히 보니 사진 속에는 한 사람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담배를 피우면서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남자는 단연 눈에 띄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도준이었으니까……. ‘도준 씨가 이 건물에 갔었다고?’ ‘언제적 일이지?’ 하윤은 호흡이 흐트러진 채 곧바로 다음 사진을 확인했다. 두 번째 사진은 건물 맞은편에서 찍은 것 같았는데 마치 파파라치가 몰래 찍은 각도 같았다. 사진 속 창문 너머에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분명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하윤은 단번에 두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 두 사람을 알아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중 한 명은 가족이고 한 명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사진 속의 이성호는 창문 쪽으로 몸을 돌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퇴폐한 모습으로 서 있었고, 창문 옆에는 도준이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낀 채 여유롭게 서 있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하윤은 온 몸의 온도가 급격히 내려갔다. ‘아빠가 뛰어내리기 전 만난 사람이 도준 씨였다고?’ 세면대의 거울에 여자의 창백하고도 멍한 얼굴이 그대로 반사되었다. 눈동자 속의 마지막 빛이 꺼진 채 희뿌연 연기가 끼어 있는 듯했다. 그와 동시에 태준이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다. ‘만약 민도준이 아니었다면 윤이 씨 아버님은 돌아가시지 않았을 거예요.’ 온기가 남아 있지 않은 손가락이 기계적으로 움직이며 사진을 뒤로 넘겼다. 이번 사진은 주차장 배경이었다. 도준이 차 문을 열고 있는 모습. 하지만 곧바로 차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차문에 기대 멀어지는 차 한 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사진은 힘껏 구겨졌고 사진을 쥐고 있던 손가락이 하얗게 질렸다. 눈물이 한 방
권하윤은 민도준이 이른 일을 벌였을 리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잘못했더라도 오빠와는 상관없으니까. 하지만 지난 날의 모든 게 자꾸만 도준은 절대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팔은 더 이상 무게를 버티지 못해 힘이 빠졌고 하윤의 몸도 세면대를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 지탱하는 힘을 잃은 하윤은 그대로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스스로를 위로했다. “똑똑-” 그때 간호사가 밖에서 노크했다. “환자분, 괜찮으세요? 혹시 제가 뭐 도와드릴 게 있나요?” 하윤은 아무 대답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잘 알았다. “아니에요. 바로 나갈게요.” “네. 그럼 밖에서 기다릴게요.” 간호사가 멀어지는 소리를 듣자 하윤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그렇게 씻고 나온 하윤은 한참 고민 끝에 결국 사진을 잠시 보관해 두기로 결정하고는 가방 안에 넣은 뒤 스카프로 숨겼다. 자기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하윤은 무의식적으로 이걸 도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지 않았다가 다시 방에 갇혀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야 할까 봐. 도준의 심기를 건드릴 바엔 스스로 아버지가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린 진실을 파헤치는 게 나았으니까. 하윤이 정신을 차렸을 때, 몸은 어느새 주차장에 도착해 있었다. 어둠 속, 닫히지 않은 차 안, 남자는 긴 다리 한쪽을 밖으로 내놓은 채 삐딱하게 앉아 있었다. 재떨이에 있는 담배꽁초를 보면 도준이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알 수 있었다. 하윤은 당연히 기사가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지 도준이 직접 기다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윽고 하윤이 조수석에 앉자마자 시동이 걸렸다. 차가 그렇게 병원을 빠져나올 때쯤 하윤은 나지막하게 물었다. “왜 먼저 가지 않았어요?” 도준은 핸들을 꺾으며 되물었다. “먼저 갔다가 하윤 씨가 이곳에서 미아가 되면 어떡하라고?” 하윤은 입을 벙긋거렸지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만약 그 사진을 보지 않았더라면 도준이 아무것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