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윤이 갑자기 조용해진 건 한 가지 사실을 설명해줬다. 그녀가 아직도 민도준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그걸 인지한 도준은 기분이 좋아져 갑자기 말을 걸어온 사람과 몇 마디 대화까지 해주었다. 하지만 도준 옆에 선 하윤은 이 순간이 고통스러웠다. 심지어 컴퓨터처럼 머릿속에서 이 순간의 데이터를 지워버리고 도준에 대한 감정도 지워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은 컴퓨터보다도 복잡하다. 사랑과 미움이 함께 공존할 수 있을뿐만 아니라 당장 상대를 죽여버리고 싶으면서도 중요한 순간에 상대의 발목을 잡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하니까. 하지만 도준이 사람들과 대화하는 동안 하윤은 자기의 행동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찾았다. 단죄하기 전에 도준에게 물어봐야 겠다고. 모든 사람, 모든 증거가 도준이 바로 아버지를 죽게 만든 범인이라고 가리켜도 하윤은 도준의 말을 듣고 싶었다. 전에 도준을 오해 했었으니 이번에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손바닥 안의 작은 손이 버둥대며 빠져나가려 하지 않자 도준의 미간도 따라서 펴졌다. 그런 편안한 표정은 도준에게 매력을 한층 불어넣었다. 그 때문인지 도준과 대화를 하던 여사장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힐끔거렸다. “저희 제품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민 사장님의 마음에 드는 보고서를 만들겠습니다. 그럼 저는 사장님과 사모님의 좋은 시간을 방해하지 않을게요.” 처음으로 듣는 호칭에 깨질 것만 같던 하윤의 뇌는 순간 멈췄다. 그러다가 한참 뒤에야 여사장이 뭔 말을 했는지 반응하고는 여사장이 내민 손을 뒤늦게 잡았다. “조심히 가세요.” 여사장은 기회를 틈타 자기의 명함을 내밀었다. “이건 제 명함입니다. 요즘 미용 기기를 출시하고 있고요. 물론 사모님은 아직 젊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시겠지만 저희가 현재 사람들의 피드백이 필요한 상황이니 도와주실 수 있다면 연락 주세요. 그러면 제가 바로 기계를 보내드릴 테니.” 여사장은 분수를 지킬 줄 알았다. 심지어 일부러 도준에게
권하윤은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며 결국 민도준에게 마음을 기울였다. 아직 답을 알 수 없는 일보다 도준을 위한 결정을 내리는 게 더 확실하니까. 한참을 몸부림치던 하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남아요. 우리 일은 나중에 얘기해요.” 민시영은 그제야 하윤의 낯빛을 보더니 놀란 듯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왜 안색이 이렇게 안 좋아요?” 하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더위 먹었나 봐요.” 시영은 하윤과 도준을 번갈아 보다가 뭔가 눈치챈 것처럼 멈칫하더니 이내 웃으며 분위기를 풀었다. “오빠도 참. 어쩜 이렇게 사람을 보살필 줄을 몰라? 내가 먼저 둘째 형수를 데리고 휴게실에서 쉬고 있을게.” 묘원에는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을 뿐만 아니라 만찬을 즐길 수 있는 연회장과 휴식할 수 있는 별채도 있다. 하윤은 시영의 표정에서 그녀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추측할 여유도 없어 그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아까 여기로 오면서 휴게실을 지나와서 저도 알아요. 제가 혼자 가면 돼요.” “아…….” 시영이 망설이는 사이 하윤은 이미 떠나버렸다. 하지만 하윤은 연회장 대신 조용한 곳을 찾아 어머니의 번호로 전화했다. 양현숙은 무척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딸! 오랜만에 전화 오네. 요즘 어때? 잘 지내? 누가 괴롭히는 사람은 없고?”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의 감정은 출구를 찾은 것처럼 이내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입을 막으며 애써 목소리를 조절했다. “전 잘 있죠. 요즘 좀 바빴어요. 엄마는 어때요? 오빠랑 시영은요?” “우리도…… 잘 지내지.” 잠깐 멈칫하는 양현숙의 말투에 하윤은 순간 불안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혹시 오빠한테 무슨 일 생긴 건 아니죠?” “걱정할 거 없어. 오빠는 잘 지내. 이제는 목발 없이도 걸을 수 있어. 그런데…….” 양현숙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다. “너랑 공태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공태준이 왜
“오빠, 아빠는 대체 어떻게 돌아가신 거야?” 이승우가 동생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권하윤은 이런 질문부터 던졌다. “왜 또 그걸 묻는 건데?” 하윤은 이미 이런 질문을 여러 번 한 적 있는데 승우는 매번 말을 피했었다. 예전에는 이게 모두 오빠가 자기를 생각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해 오빠를 난처하게 하지 않았지만 이제 하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 때문인지 목이 쉬도록 외쳤다. “오빠, 나 이제 어린 애 아니야. 나도 아빠가 어떻게 돌아가신 건지 알 권리가 있다고!” 승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뭐라 말하려 했는데 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흐느낌 소리에 이내 걱정스레 물었다. “시윤아?” 승우는 당황함을 감출 수 없었다. “윤아, 왜 그래?” “오빠, 시윤이라는 내 이름, 타고난 재능과 지혜로 매사에 결실과 다복이 함께 하는 삶을 살라는 뜻에서 지어줬다고 했잖아. 그런데…….” 하윤은 끝내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나 지금 바보가 된 느낌이야. 하나도 행복하지도 않고…….” 완전히 무너진 듯한 흐느낌 소리는 전류를 통해 수만리 밖에 전해졌다. “오빠, 제발 알려줘. 아빠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려줘. 오빠 제발…….” 동생의 울음소리를 듣자 승우는 마음이 미어질 듯 아팠다. 그 순간 어릴 적 동생이 넘어져 무릎에 피가 흘렀을 때 의사가 상처를 소독해주는 사이 자기를 꼭 안고 울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승우는 자기를 탓하며 아프면 자기를 물라고 했었다. 그랬더니 시윤은 울면서 오빠가 치킨보다 맛없다고 차라리 치킨을 먹겠다며 울음을 뚝 그쳤다. 한참 어린 그때도 지금처럼 이렇게 울지는 않았었는데 지금 이토록 서글피 우는 동생의 목소리를 듣자 승우는 동생이 얼마나 괴로울지 상상이 갔다. 결국 모든 이성을 뒤로한 채 승우는 동의했다. “그래, 알려줄게. 그러면 너부터 오빠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하윤이 하는 얘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한 남자의 이름만 언급됐다. “오빠, 나 너무 무서워. 그 사람이 아
“그리고 공씨 가문에서 민도준이 사위가 되는 걸 원하지 않았어.” 권하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전 가주, 그러니까 공태준과 공은채의 아버지가 공은채를 무척 아꼈다고 하더라고.” 지금껏 이런 저런 일에 휘말리면서 하윤은 식견이 넓어졌다. 하지만 이런 황당한 일을 듣자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건……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이승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예전에 공은채를 도와주고 싶어 하셨거든.” 하윤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공은채가 특별하다는 걸 하윤은 처음부터 발견했었다. 그도 그럴 게, 공은채는 이성호의 기타 제자들과 달리 모임에도 자주 나오지 않고 피아노를 칠때를 빼곤 자기 감정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때문에 아버지한테서 가르침을 받고 있는 제자 중 하나인 시윤조차 공은채를 몇 번 만나지 못했고 대화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공은채의 무뚝뚝한 성격을 떠올리자 하윤은 숨을 몇 번 돌리고 나서야 말을 내뱉었다. “공은채는 왜 도준 씨한테 도움을 청하지 않고 아빠한테 청했는데?” “상세한 건 나도 몰라. 사실 아버지가 나한테도 말을 많이 해주지 않으셨거든.” 이성호가 건물에서 뛰어내리기 전날 밤 [이성호 교수가 짐승 같은 면모를 숨기고 학생을 범했다]는 뉴스가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었다. 그 뒤로 연락이 두절되었던 이성호는 자기가 자살하려던 건물로 승우를 불러냈었다. 그때의 승우도 지금의 하윤처럼 아버지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울부짖으며 따져 물었었다. 무대 위에서 빛나기만 하던 음악가는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 잔뜩 풀이 죽어 있었고 정신이 반쯤 나가 있어 예전의 기품 있는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아버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예요? 밖에서 떠도는 얘기는 다 뭐고요? 공은채는…….” 공은채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이성호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아빠가 미안해. 네 엄마한테도 너희들한테도, 그리고 공은채 한테도. 내가 너희를 해
그 어떤 말로도 권하윤의 지금 심정을 형용하기엔 부족하다. 지난 2년간 하윤의 세계는 이미 수많은 충격때문에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매번 버티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때마다 하윤은 가족들과 함께 보냈던 행복한 추억을 떠올렸고 가족에게 사랑받던 그 시절을 회상했다. 그건 하윤이 고난을 이겨내는 원천이었고 영원히 더럽혀지지 않을 거라 믿었던 유일한 기억이었다. 하지만 지금 모든 게 산산이 부서지면서 날카로운 파편이 하윤을 헤집어 피투성이가 된 기분이었다. 주위를 빙 둘러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언제나 위안으로 삼던 자기의 보금자리에 조금이나마 기대려고 뒤를 돌아봤더니 그 보금자리마저 진작에 사라졌다. 하윤은 아버지가 누명을 썼다고 항상 믿어왔기에 돌아가실 때 얼마나 비통했을까 자꾸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그 죄가 사실일 수도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마치 바다에 빠져 물이 코와 입과 귀에 흘러 드는 것처럼 숨이 막히고 갑갑해났다. 심지어 승우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윤아? 너 왜 그래? 오빠 놀라게 하지 마. 말 좀 해봐, 응?” 하윤은 오빠를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 뭔가를 말해서 안심시키고 싶었지만 벙어리가 된 것처럼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승우도 하윤의 심정이 이해됐다. 자기가 모든 걸 말하면 하윤이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으니까. 그제야 마음 약해져 사실을 말한 게 후회됐지만 소용이 없었다. “윤아, 지난 일은 생각하지 말자. 게다가 우리는 아버지가 그랬을리 없다고 믿잖아. 안 그래?” 승우는 답을 듣지 못하자 느릿느릿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 일은 나중에 얘기하자. 너 민도준의 일에 대해 물어보려던 거 아니야?” ‘참, 그랬지. 잊을 뻔했네…….’ 하윤이 전화를 한 건 민도준이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지 묻기 위해서다. 하지만 아버지가 생전에 참회했다는 걸 듣고는 갑자기 어떻게 물어야 할지 모랐다. ‘만약 공은채의 죽음이 아빠와 관련이 있고, 아빠의 죽음도 도준 씨와, 관련이 있다
순간 민도준이 자기를 괴롭혔던 사람을 어떻게 처리했던지 기억났다. 하지만 그 상대가 공은채로 바뀌니 벌을 받는 사람은 오히려 하윤과 하윤의 가족으로 변했다. ‘참 잔인하네.’ 하윤이 나무 그늘 아래에서 멍 때리고 있을 때 앞에 갑자기 그림자 하나가 더 겹쳤다. 하지만 반응마저 무뎌진 하윤은 한참이 지나서야 사람을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하윤의 앞에 선 사람은 낯선 남자였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깊은 눈동자 그리고 남회색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갈색 곱슬머리에 양복을 입은 남자는 마치 옛날 영화에서 걸어 나온 영국 신사 같았다. 하지만 남자의 표정은 신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시각, 남자는 눈살을 찌푸린 채 하윤을 바라보다가 하윤이 얼룩 고양이 같은 얼굴을 들자 뒤로 두 걸음 정도 물러섰다. 순간 미간이 더 움푹 파여 들어가더니 양복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이거 써요.” 그 눈빛은 마치 길고양이한테 먹이를 주려다가 더러워서 머뭇거리는 사람 같았다. 하윤은 이 낯선 남자가 왜 갑자기 다가와 서로를 불편하게 만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자기 모습을 정리해야 했기에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하윤이 손수건을 잡으려는 찰나 남자가 손을 놓아버리는 바람에 손수건은 하윤의 다리 위에 어졌다. 하윤은 언짢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죠?” 평소 같았으면 절대 낯선 사람한테 이런 태도로 말하지 않았을 텐데 상대의 행동이 너무 언짢아 말투가 좋을 리 없었다. “혹시 소원 있어요?” 남자가 또박또박 내뱉은 말에 하윤은 어리둥절했다. “뭐라고요?” “그쪽 소원 하나 들어줄 수 있어요.” 하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너무 황당했다. “이봐요, 설마 당신이 제가 불러낸 램프의 요정 지니라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죠?” 상대방은 하윤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도 자기 말만 해댔다. “잘 생각해 봐요. 생각나면 전화 줘요.” 남자는 말하면서 명함 하나를 꺼내 하윤과 약 세 걸음 떨어진 화단 옆에 놓고는 떠나버렸다. 남자는 너무
권하윤은 자기가 민도준을 당해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건 도준을 알게 된 그날부터 자각한 일이다. 두 사람이 엮인 그날부터 하윤에게는 이 모든 걸 끝낼 권리조차 없었다. 하윤의 몸과 마음은 모두 도준에게 지배되었고 도준은 그저 사냥꾼처럼 하윤이 점차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걸 지켜봤다. 이에 하윤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젓가락을 든 채 밥을 먹기 시작했다. 심지어 도준이 짚어주는 것대로 모두 받아먹었다. 이미 배가 불렀으면서 억지로 꾸역꾸역 삼키는 하윤을 보자 도준은 그녀의 손에서 젓가락을 뺏고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말해 봐, 뭘 알고 싶은데?” “제 아버지의 죽음이 도준 씨와 관련 있어요?” “꼭 관련이 있는 건 아니야.” “말장난 하지 마요! 제 아버지를 해치는 일을 한 적이 있어요?” 도준은 그 말에 고개를 돌려 반문했다. “그런 짓을 하고도 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하윤은 목이 멨다. 예전이었다면 자기 아버지는 절대 그런 일을 했을 리 없다고 반박했을 테지만 이 순간 하윤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뜨거운 손바닥이 하윤의 볼을 쓰다듬으며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말투로 말했다. “내가 아니더라도 하윤 씨 아버지는 살지 못했을 거야.” 하윤은 도준의 손을 뿌리쳤다. 이 순간 가슴 속에 수많은 감정이 쌓였다. 분노, 수치심, 의문, 그리고 고통까지……. 모든 감정이 좌충우돌하며 하윤의 정신을 괴롭혀 하윤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제 아버지는 공은채 씨를…….” “착하지, 이거 말고 다른 거 물어봐.” 하윤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도준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화를 내지 않아요?” ‘만약 아빠가 공은채를 강요하여 그런 짓을 벌였다면 도준 씨가 왜 화를 내지 않지?’ 도준은 여전히 변함없는 표정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내가 왜 화를 내야 하지?” “도준 씨는 공은채 씨를 좋아하잖아요.” “그것도 맞긴 해. 좋아했지” 또다시 확인을 받자 하윤은 이제 고통스럽다
이걸 깨닫는 순간 권하윤은 등골이 오싹했다. 만약 아버지가 정말 공은채에게 그런 몹쓸 짓을 해서 죽게 만들었다면 공은채가 죽었을 뿐만 아니라 진명주가 세상에 남겼던 마지막 흔적까지 사라져버린 게 된다. 잇따라 오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민도준은 공은채가 위독할 때마다 어떤 노력을 했는지. 시간과 정력을 쏟아붓고 인력과 물력을 투자하며 공은채를 살리려 한 건 어머니의 흔적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니. 그렇게 해서 어렵사리 공은채의 생명을 건졌는데 결국은 그런 결말을 맞이했다니. 하윤은 도준이 공은채에 대해 집착하는 건 부모님이 공은채를 구해줘서 공은채를 부모님 생명의 연속으로 여기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연속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끈끈하고 명실상부한 것일 줄이야. 이건 단순히 도준이 사랑하는 사람을 해친 것보다 더 잔인하고 무서운 일이다. 도준은 부들부들 떨리는 하윤의 어깨를 꼭 잡더니 마치 장난기 많은 어린 아이처럼 그녀를 바라봤다. 심지어 말에도 약간의 농담이 섞여 있었다. “내가 뭐랬어? 못 견딜 거라고 했잖아. 이럴 거면서 묻긴 왜 물어?” “떠는 것 좀 봐. 이리와. 달래줄게.” 몸이 기울더니 하윤이 앉은 의자가 남자의 다리에 끌려 확 잡아당겨졌다. 두 의자가 조금의 틈도 없이 꼭 붙었지만 하윤은 도준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도준이 어떻게 이토록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가장 가까운 가족이 그렇게 됐는데, 세상에 남아 있던 유일한 위안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하윤은 생각과 동시에 질문을 내던졌다. 그 말을 들은 도준은 피식 웃으며 하윤의 이마를 튕겼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하윤 씨한테 복수라도 할까? 죽일까?” 하윤은 여전히 도준을 바라보며 자기의 뜻이 바로 그거라고 눈으로 표현했다. 그러자 도준이 웃었다. “진작 알았다면 그랬었겠는데 지금 그러기에는 마음이 아파.” 하윤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다시 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