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오후의 햇살은 사람을 노곤노곤하게 내리쬤지만 권하윤은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한민혁이 간 뒤로 그녀는 줄곧 그의 반응을 되새겼다.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그런 반응은 이상하기만 했다.‘은우가 이미 죽었는데, 시체가 있는 곳 알려주는 게 그렇게 어렵나? 난 그저 고향에 묻어주려는 것뿐인데, 누가 다시 살려낸다고 했나? 설마…….’갑자기 든 생각에 권하윤은 가슴이 두근거리더니 전류라도 흐르는 것처럼 등줄기로부터 손끝까지 저릿해 났다.‘설마, 은우가 안 죽었나? 그날 총소리만 들었을 뿐 은우 시체는 못 봤잖아. 설마 죽이지 않고 어디 가뒀나?’그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권하윤의 가슴은 뜨거운 물을 부어 넣은 것처럼 끓기 시작했다.이윽고 더 이상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방 안을 계속 서성이며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그날의 모든 장면을 되새겼다.‘은우를 개밥으로 던져줬다는 것도 속인 거라면, 은우가 죽었다는 것도 속일 수 있잖아.’분명 이 모든 게 현실성 없는 신기루 같은 생각이라지만 그녀는 기쁨을 제어할 수 없었다.‘은우가 죽지 않았다면…… 만약 안 죽었다면…….’너무나도 깊이 몰두한 나머지 그녀는 문이 열리는 소리마저 듣지 못했다.때문에 민도준이 들어왔을 때 그의 앞에는 선 자리에서 뱅뱅 도는 권하윤이 보였다.“귀신이라도 들렸어?”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권하윤은 눈앞에 나타난 사람을 본 순간 모든 생각을 고이 접었다.“도준 씨.”이윽고 참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지만 눈은 저도 모르게 자꾸만 민도준을 쫓았다. 마치 그의 머리를 꿰뚫어 성은우의 생사를 알아내기라도 하듯이.민도준은 자기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권하윤이 아예 자기를 빤히 쳐다보자 재밌는 듯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쿡쿡 찍었다.“왜? 안 본 새에 나 잊은 거야? 못 알아보겠어?”“아니거든요. 저는 그저…….”권하윤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더니 무의식적으로 그의 비위를 맞추는 듯 나긋한 한마디를 내뱉었다.“보고 싶어서요.”“하. 진짜
권하윤은 입을 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민도준은 그녀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하윤 씨가 인색하다지만 공태준은 아니던데? 하윤 씨랑 놀려고 집안 밑천까지 탈탈 털어낸 걸 보면.”“네? 집안 밑천이요?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요?”밑도 끝도 없는 한마디에 권하윤은 일순 멍해졌다.하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그녀의 얼굴에 민도준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그래, 오해했다고 쳐.”자비 없이 꽉 눌러대는 그의 손가락 아래의 피부는 점점 붉게 물들었다. 이윽고 뻘건 자국이 날 때쯤 권하윤은 끝내 고통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렸다.그녀가 고통을 호소하자 민도준은 그제야 자비를 베풀 듯 손을 놓더니 별로 먹지도 않은 만둣국을 보며 댐배를 꺼내 들었다.“왜 안 먹었어?”권하윤은 얼른 그의 손에 있는 라이터를 받아 그를 도와 불을 붙였다.“도준 씨가 오면 같이 먹으려고요.”고분고분한 한마디를 내뱉으면서 말이다.하지만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은 담배에서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르자 민도준은 몸을 뒤로 젖히며 권하윤과 거리를 두더니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또 무슨 꿍꿍이지?”권하윤의 손은 일순 멈칫했다.하지만 자기가 말하지 않아도 한민혁이 무조건 말할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한참을 머뭇대다가 끝내 입을 열었다.“저…… 요즘 은우가 자꾸 꿈에 나와요. 그래서 말인데, 이왕 죽었는데 고향에 묻게 할 수는 없나요?”그녀는 말하면서 민도준의 표정을 살폈다. 마치 그가 조금이나마 소식을 흘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하지만 아쉽게도 그건 모두 헛수고였다.민도준의 검은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었고, 흔들림 없는 표정에서마저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었다.몇 초간의 침묵 끝에 그는 갑자기 피식 웃었다.“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망자가 꿈에 나타나 부탁한다고 하나?”권하윤은 당연히 그의 말속에 담긴 경고를 캐치했다. 이에 곧바로 눈을 피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토막 난
민도준은 애써 머리를 굴리며 그의 모에 불을 지피고 있는 권하윤을 여유롭게 바라보더니 살짝 풀린 손으로 두근대는 그녀의 맥박을 매만졌다.이게 풀어진 표현이라고 생각한 권하윤은 얼른 그의 팔을 끌어안았다.그러면서도 그가 머리를 만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생각났는지 얌전히 그의 등에 매달리면서 부드러운 입술로 꾹 다문 그의 입술을 문질렀다.그제야 민도준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였었다.“자기야, 설마 성은우가 아직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거야?”“그게…….”꿍꿍이가 상대에게 까발리자 그녀의 숨소리는 단번에 빨라지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가 다음 대책을 생각하기도 전에 민도준은 그녀의 얼굴을 들어올렸다.분명 웃는 얼굴이었지만 권하윤은 저도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심지어 목덜미 뒤에 붙어있는 따가운 손바닥 때문에 뼛속까지 오한이 느껴졌다.그러던 끝에 참지 못한 그녀가 애원하려고 할 때 목덜미가 갑자기 차가워지며 민도준이 그녀를 놓아주면서 한순간에 다시 나른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아까 잘 놀았잖아. 계속해 봐.”이렇듯 반복된 상황에 권하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깨물었다.“도준 씨, 은우가…….”“경고하는데…….”소파에 기댄 남자는 권하윤의 고개를 들어 올리며 무심한 듯 말을 이었다.“나 지금 기분이 안 좋아서 성격도 안 좋을 거야.”그 한마디에 권하윤은 하려던 말을 도로 목구멍으로 삼켰다.그는 권하윤에게 성은우의 이야기를 꺼내는 건 자기의 화를 돋우는 거라고 경고하고 있었다.아무리 마음이 급하다지만 권하윤도 너무 서두르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때문에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살짝 말아 올린 그의 입술에 다시 자기 입술을 갖다 댔다.이번에 민도준은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음 동작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권하윤이 눈을 들었을 때 마침 남자의 장난기 섞인 눈동자와 마주치고 말았다.“왜? 그동안 대접 받는 데 너무 익숙해져 혼자서는 못하겠어?”민도준은 눈길로 아래를 가리키며 암시
“뭐, 그럭저럭.”민도준은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기는 동작을 멈추지 않은 채 나른한 콧소리로 대답했다.“그런데 알아서 한다고 했었잖아?”이윽고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그의 손가락이 아래로 쭉 미끄러져 내리며 권하윤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불합격이야.”“다, 다음에 할게요.”권하윤은 말문이 막힌 듯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민도준의 눈치를 살폈다.“저기, 기분이 괜찮다면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민도준은 그녀를 힐끗 바라봤다.“그 개자식이 아직 살아 있냐고?”숨이 턱 막혔지만 권하윤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죽었어.”짤막한 세 글자는 권하윤의 희망을 반쯤 꺼버렸다.하지만 그렇다고 그 말을 믿고 싶지는 않았다. 애써 몸을 일으킨 그녀는 민도준과 눈을 마주하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도준 씨도 그때 오해였다고 말했잖아요. 그러니까 장난치지 마세요. 네?”민도준은 재밌다는 듯 피식 웃으며 그녀의 뒤통수를 꾹꾹 눌러댔다.“꿈은 하윤 씨가 꿨으면서 내가 깨웠다고 탓하는 거야?”권하윤의 머리는 그의 힘에 밀려 앞으로 살짝 치우쳤다. 하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반짝거리던 눈빛은 어느새 희망이 완전히 점멸된 듯 어두워졌다.따뜻하던 몸의 온도마저 이내 식어버려 벗어나려고 몸을 움직였지만 민도준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왜? 그 개자식이 죽었다니까 방금 전 행동이 후회 돼?”권하윤은 이내 고개를 피했다. 하지만 아직 부탁해야 할 일이 남았기에 하는 수 없이 그의 비위에 맞춰야 했다.솔직히 그의 말은 아무리 들어도 귀에 너무나도 거슬렸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또 진짜일까 봐 겁이 났다.이에 그녀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끝내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피곤해서 그래요.”민도준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지만 그녀의 속마음을 까발리지는 않았다.이윽고 침대에서 내리더니 따라 내리는 권하윤의 어깨를 눌러 다시 침대에 앉혔다.“여기서 자.”“여기서요?”권하윤은 어리둥절했다.그때 겉옷을 입은 민도준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이렇게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온천 펜션은 대부분 개발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내비게이션을 따라 그곳으로 향하던 중 권하윤은 펜션의 위치가 공씨 가문 리조트와 멀지 않다는 걸 발견했다. 하지만 모든 방면에서 리조트보다 많이 떨어졌다.게다가 엄 변호사의 말대로 주위에 건물도 없고 가로등도 없어 펜션이라기보다는 귀신의 집에 더 가까웠다.때마침 날이 어두워 어둑어둑한 주위 환경 때문에 권하윤은 감히 내리지 못하고 차에 앉은 채로 이남기를 기다렸다.고요한 주변 환경은 왠지 모르게 김장감을 안겨주었다.그 때문인지 차 문손잡이가 움직이는 순간, 권하윤은 하마터면 소리 지를 뻔했다.그러다가 차창으로 이남기를 확인하고 나서야 문을 열며 정신을 가다듬었다.“물 마실래요?”이남기는 고개를 저으며 직설적으로 물었다.“그런데 아까 전화로 은우 형의 시신에 관한 소식을 들은 적 있다고 하셨죠?”“네.”권하윤은 짤막한 대답을 끝으로 그의 얼굴을 빤히 훑어보더니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참, 전에 보육원에서 입양되셨다고 하셨죠? 혹시 어느 보육원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이남기는 그녀의 물음에 여전히 흔들림이 없는 모습이었다.“저를 시험하시는 겁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제 말은 다 사실이니까.”이윽고 그는 자기가 성은우와 있었던 일을 모두 사실대로 설명했다. 어느 보육원 출신이고, 공씨 가문에 들어간 지는 몇 년이고, 또 성은우의 습관 심지어는 성은우가 입었던 상처까지 모두 꿰뚫고 있었다.그 답은 권하윤이 알고 있던 것과 모두 일치했다.그때 이남기가 공손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저 권하윤 씨의 생활을 방해할 생각 없어요. 단지 은우 형의 유해를 해원으로 데려가고 싶은 것뿐입니다. 그러니 알고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이남기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권하윤은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은우 안 죽은 것 같아요.”“네?”이남기는 그녀의 말에 흥분한 태도를 보였다.“은우 형이 안 죽었다고요? 그럼 지금 어디
차 안.공태준은 백미러를 통해 권하윤이 떠나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시선을 거두었다.“유턴해.”몇 분 뒤, 그 차는 온천 펜션 문 앞에 다시 멈춰 섰다.상향등이 어둠을 가르며 길을 비추자 공태준은 차에서 내려 권하윤이 걸었던 길을 걷기 시작했다.수제 구두로 바닥에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느릿느릿 걷던 그는 선명한 발자국이 나 있는 한 자리에 멈춰서더니 바닥의 낙엽을 주어 들었다.곧이어 어두운 밤처럼 깊고 무거운 목소리가 텅 빈 공간에 울려 퍼졌다.“아까 무슨 얘기 했어?”등 뒤에서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이남기는 희색을 감추지 못했다.“권하윤 씨가 말하는데 은우 형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대요.”“살아 있다고?”공태준의 눈에 약간의 놀라움이 피어올랐다.이윽고 이남기의 말을 듣고 난 뒤 그의 어둡던 눈동자는 먹물처럼 검게 변해버렸다.하지만 이남기는 여전히 기쁨에 겨워 공태준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성은우는 공씨 가문의 가장 날카로운 칼 같은 존재다. 만약 그가 아직 살아있다면 공태준 한테건 공씨 가문 한테건 모두 좋은 일이기에 그는 공태준이 당연히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다.“가주님, 저 내일 바로 확인해 보고 싶은데 그래도 됩니까?”긴 손가락을 점점 그러쥐는 힘에 손안에 있던 낙엽이 부스러졌다.“그래.”-저녁 9시.다시 블랙썬으로 돌아가는 길에 권하윤은 갑자기 암호가 걸린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하루 종일 그 소식만 눈이 빠지도록 기다린 그녀는 얼른 차를 길가에 세우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엄마, 오빠는 어떻게 됐어요? 만났어요?”“만났어, 너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는 잘 있으니까.”전화 내내 양현숙은 모든 일이 순조롭다고 계속 강조했다. 하지만 딸인 권하윤이 엄마가 이상하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럼 오빠더러 전화 받으라고 해 봐요.”“네 오빠는…… 지금 자고 있어.”뭔가 숨기는 듯한 어머니의 말투에 권하윤은 이내 자기 생각을 확신했다.“엄마, 사실대로 말해 줘요. 대체 무슨 일 있는 거예요?”
“도준 씨가 간 뒤 잠이 오지 않아 권씨 가문의 온천 펜션에 다녀왔어요.”역시나 바로 탄로나자 권하윤은 미리 준비해 뒀던 핑계를 댔다.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건너편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 내가 떠나기 전 하윤 씨 잠재우지 않은 탓이라 이거네?”“아니 그게 아니라…….”“아니면 얼른 돌아와. 혼자 산속에 놀러 갔다가 모르는 사람이 하윤 씨 잡아먹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상대의 말에 가시가 있다는 걸 느낀 권하윤은 이내 말소리를 가다듬었다.“바로 갈게요.”그와 동시에 한참 동안 세워뒀던 차의 시동을 걸었다.민도준이 전화까지 걸어 재촉하는 바람에 그녀는 더 이상 꾸물대지 않고 곧바로 블랙썬으로 돌아갔다.밤 10시.권하윤이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섰을 때, 민도준은 창가에 서 있었다.마침 밤 생활이 시작되는 시간이라 블랙썬도 한산하던 낮과는 달리 북적거렸고 네온등이 번쩍거리며 검은 방안을 밝혀주었다.어지러운 불빛 아래에 선 민도준의 뒷모습은 마치 안개가 짙게 낀 것처럼 희미하게 보이기까지 했다.쿵쾅거리는 심장 때문에 권하윤은 문 닫는 동작마저 한결 조심스러워졌다.하지만 그 작은 소리에도 방해 됐는지 민도준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봤다.“왔어?”아무 일 없다는 듯한 가벼운 말투에 권하윤은 더 긴장한 듯 대답을 얼버무렸다.그렇게 문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이고 있던 그때, 민도준이 갑자기 그녀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이에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치다 결국은 등이 문에 바싹 붙어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하지만 잔뜩 경계하는 그녀의 모습에도 민도준은 마치 보지 못한 것처럼 몸을 숙인 채 바싹 달라붙었다.순간 눈이 무의식적으로 감겨버렸다.민도준은 일부러 그녀의 얼굴과 목덜미에 자기의 숨결을 불며 노골적으로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닿을 듯 말 듯한 거리 때문에 권하윤의 목덜미에 난 솜털마저 바짝 곤두섰다.이윽고 잔뜩 흐트러진 호흡을 애써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도준 씨, 뭐 하는 거예요?”“하윤 씨
어쨌든 민도준이 돈을 대주기로 한 덕에 병원비는 그럭저럭 해결되었다. 그 덕에 권하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커다란 돌멩이도 사라진 기분이었다.하지만 신세를 지게 되어서인지 민도준을 마주할 때 권하윤은 편하지가 않았다.“저기, 돈은 투자로 생각해요. 제가 영업하기 시작하면 수익을 나눠줄게요.”그녀는 말하면서도 민도준이 한바탕 비웃을 거라고 생각해 마음속으로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는 오히려 의외의 대답을 내왔다.“나한테 얼마나 줄 건데?”권하윤은 비즈니스에 영 젬병인지라 솔직히 이런 거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하지만 민도준이 돈을 냈다는 생각에 아무 숫자나 마구 불러댔다.“도준 씨가 6, 제가 4요.”“오, 통이 크네.”상대의 말이 진짜인지 아니면 비웃는 것인지 알 수 없어 권하윤은 잠깐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사실 7을 가져도 돼요.”그녀의 말에 민도준은 아예 웃음을 터뜨렸다.“뭐가 그렇게 쉬워? 설마 7이라는 게 다 빚은 아니겠지?”“에이…… 설마요.”권하윤이 오랜만에 이토록 고분고분하고 귀여운 모습을 보이자 민도준도 인내심이 생겼는지 그녀의 얼굴을 톡톡 두드리며 농담을 해댔다.“괜찮아, 빚이라도 내가 대신 갚아줄 수 있어.”그의 말에 권하윤은 잠시 넋을 잃었다. 하지만 눈을 들어 민도준을 보려던 찰나 마침 빤히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과 마주했다.순간 가슴이 따끔해나 입을 뻐금거리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한참 망설인 끝에 그녀는 결국 감사하다는 한마디를 내뱉었다.늦은 밤.권하윤은 잠을 이루지 못해 계속 뒤척였다.오빠가 깨났을지, 또 깨어났다면 정말 의료진의 말대로 다시 일어설 수는 있을지 하는 수많은 생각이 그녀를 괴롭혔다.‘그러고 보니 은우 일은 어떻게 됐지? 이남기 씨가 조사하기 시작했나? 정보를 캐낼 수 있을까?’생각할수록 잠은 점점 달아났다.하지만 민도준이 깰까 봐 움직이지 못한 채 눈을 껌뻑이며 어둠 속의 천장을 바라봤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시선을 민도준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