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안.공태준은 백미러를 통해 권하윤이 떠나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시선을 거두었다.“유턴해.”몇 분 뒤, 그 차는 온천 펜션 문 앞에 다시 멈춰 섰다.상향등이 어둠을 가르며 길을 비추자 공태준은 차에서 내려 권하윤이 걸었던 길을 걷기 시작했다.수제 구두로 바닥에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느릿느릿 걷던 그는 선명한 발자국이 나 있는 한 자리에 멈춰서더니 바닥의 낙엽을 주어 들었다.곧이어 어두운 밤처럼 깊고 무거운 목소리가 텅 빈 공간에 울려 퍼졌다.“아까 무슨 얘기 했어?”등 뒤에서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이남기는 희색을 감추지 못했다.“권하윤 씨가 말하는데 은우 형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대요.”“살아 있다고?”공태준의 눈에 약간의 놀라움이 피어올랐다.이윽고 이남기의 말을 듣고 난 뒤 그의 어둡던 눈동자는 먹물처럼 검게 변해버렸다.하지만 이남기는 여전히 기쁨에 겨워 공태준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성은우는 공씨 가문의 가장 날카로운 칼 같은 존재다. 만약 그가 아직 살아있다면 공태준 한테건 공씨 가문 한테건 모두 좋은 일이기에 그는 공태준이 당연히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다.“가주님, 저 내일 바로 확인해 보고 싶은데 그래도 됩니까?”긴 손가락을 점점 그러쥐는 힘에 손안에 있던 낙엽이 부스러졌다.“그래.”-저녁 9시.다시 블랙썬으로 돌아가는 길에 권하윤은 갑자기 암호가 걸린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하루 종일 그 소식만 눈이 빠지도록 기다린 그녀는 얼른 차를 길가에 세우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엄마, 오빠는 어떻게 됐어요? 만났어요?”“만났어, 너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는 잘 있으니까.”전화 내내 양현숙은 모든 일이 순조롭다고 계속 강조했다. 하지만 딸인 권하윤이 엄마가 이상하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럼 오빠더러 전화 받으라고 해 봐요.”“네 오빠는…… 지금 자고 있어.”뭔가 숨기는 듯한 어머니의 말투에 권하윤은 이내 자기 생각을 확신했다.“엄마, 사실대로 말해 줘요. 대체 무슨 일 있는 거예요?”
“도준 씨가 간 뒤 잠이 오지 않아 권씨 가문의 온천 펜션에 다녀왔어요.”역시나 바로 탄로나자 권하윤은 미리 준비해 뒀던 핑계를 댔다.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건너편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 내가 떠나기 전 하윤 씨 잠재우지 않은 탓이라 이거네?”“아니 그게 아니라…….”“아니면 얼른 돌아와. 혼자 산속에 놀러 갔다가 모르는 사람이 하윤 씨 잡아먹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상대의 말에 가시가 있다는 걸 느낀 권하윤은 이내 말소리를 가다듬었다.“바로 갈게요.”그와 동시에 한참 동안 세워뒀던 차의 시동을 걸었다.민도준이 전화까지 걸어 재촉하는 바람에 그녀는 더 이상 꾸물대지 않고 곧바로 블랙썬으로 돌아갔다.밤 10시.권하윤이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섰을 때, 민도준은 창가에 서 있었다.마침 밤 생활이 시작되는 시간이라 블랙썬도 한산하던 낮과는 달리 북적거렸고 네온등이 번쩍거리며 검은 방안을 밝혀주었다.어지러운 불빛 아래에 선 민도준의 뒷모습은 마치 안개가 짙게 낀 것처럼 희미하게 보이기까지 했다.쿵쾅거리는 심장 때문에 권하윤은 문 닫는 동작마저 한결 조심스러워졌다.하지만 그 작은 소리에도 방해 됐는지 민도준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봤다.“왔어?”아무 일 없다는 듯한 가벼운 말투에 권하윤은 더 긴장한 듯 대답을 얼버무렸다.그렇게 문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이고 있던 그때, 민도준이 갑자기 그녀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이에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치다 결국은 등이 문에 바싹 붙어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하지만 잔뜩 경계하는 그녀의 모습에도 민도준은 마치 보지 못한 것처럼 몸을 숙인 채 바싹 달라붙었다.순간 눈이 무의식적으로 감겨버렸다.민도준은 일부러 그녀의 얼굴과 목덜미에 자기의 숨결을 불며 노골적으로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닿을 듯 말 듯한 거리 때문에 권하윤의 목덜미에 난 솜털마저 바짝 곤두섰다.이윽고 잔뜩 흐트러진 호흡을 애써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도준 씨, 뭐 하는 거예요?”“하윤 씨
어쨌든 민도준이 돈을 대주기로 한 덕에 병원비는 그럭저럭 해결되었다. 그 덕에 권하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커다란 돌멩이도 사라진 기분이었다.하지만 신세를 지게 되어서인지 민도준을 마주할 때 권하윤은 편하지가 않았다.“저기, 돈은 투자로 생각해요. 제가 영업하기 시작하면 수익을 나눠줄게요.”그녀는 말하면서도 민도준이 한바탕 비웃을 거라고 생각해 마음속으로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는 오히려 의외의 대답을 내왔다.“나한테 얼마나 줄 건데?”권하윤은 비즈니스에 영 젬병인지라 솔직히 이런 거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하지만 민도준이 돈을 냈다는 생각에 아무 숫자나 마구 불러댔다.“도준 씨가 6, 제가 4요.”“오, 통이 크네.”상대의 말이 진짜인지 아니면 비웃는 것인지 알 수 없어 권하윤은 잠깐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사실 7을 가져도 돼요.”그녀의 말에 민도준은 아예 웃음을 터뜨렸다.“뭐가 그렇게 쉬워? 설마 7이라는 게 다 빚은 아니겠지?”“에이…… 설마요.”권하윤이 오랜만에 이토록 고분고분하고 귀여운 모습을 보이자 민도준도 인내심이 생겼는지 그녀의 얼굴을 톡톡 두드리며 농담을 해댔다.“괜찮아, 빚이라도 내가 대신 갚아줄 수 있어.”그의 말에 권하윤은 잠시 넋을 잃었다. 하지만 눈을 들어 민도준을 보려던 찰나 마침 빤히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과 마주했다.순간 가슴이 따끔해나 입을 뻐금거리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한참 망설인 끝에 그녀는 결국 감사하다는 한마디를 내뱉었다.늦은 밤.권하윤은 잠을 이루지 못해 계속 뒤척였다.오빠가 깨났을지, 또 깨어났다면 정말 의료진의 말대로 다시 일어설 수는 있을지 하는 수많은 생각이 그녀를 괴롭혔다.‘그러고 보니 은우 일은 어떻게 됐지? 이남기 씨가 조사하기 시작했나? 정보를 캐낼 수 있을까?’생각할수록 잠은 점점 달아났다.하지만 민도준이 깰까 봐 움직이지 못한 채 눈을 껌뻑이며 어둠 속의 천장을 바라봤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시선을 민도준에게로
의미심장한 민도준의 마지막 한마디에 권하윤은 꿈속에서마저 그의 말을 되새겼다.밤새 꿈에 시달린 그녀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 허리를 감고 있는 손에 아직도 꿈을 꾸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뭐 하는 거예요?”가슴을 밀어내며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민도준은 그녀의 손을 자기 어깨에 올려놓으며 허리를 꽉 감쌌다.“아침 운동.”그렇지 않아도 흐릿하던 머리는 너무 흔들리는 바람에 더 흐리멍덩해졌다.그러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옆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오늘 해야 할 일이 많은지라 그녀는 무거운 몸을 애써 일으켜 세우며 샤워실로 향했다.그리고 다시 샤워실에서 나왔을 때 몸에는 실크 슬립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밖에 입을 옷이 보이지 않았다.‘밖에 있나?’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어 틈새로 확인한 권하윤은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한 듯 밖으로 걸어 나왔다.‘하긴, 민도준 씨 집에 누가 마음대로 쳐들어오겠어.’그렇게 한참 동안 옷을 찾던 그녀는 소파 뒤에서 겨우 자기 것으로 보이는 옷을 찾아냈다.그제야 어제 샤워할 때 민도준이 그녀 대신 옷을 벗겨주고는 아무 데나 버려뒀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하지만 이미 쭈글쭈글해진 원피스를 보는 순간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결국 그대로 입을 수 없다는 생각에 집안 이곳저곳을 뒤지며 다리미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문이 열렸다.…….“공 가주님이 오실 줄은 몰랐네요. 오기 전에 미리 인사라도 주시지 그러셨어요. 그랬다면 제대로 대접했을 텐데.”누군가 대화를 하며 방에 들어선 민도준은 집안에 발을 들여놓기 바쁘게 품에 와락 안기는 여자 때문에 일순 넋을 잃었다.하지만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오던 공태준의 눈에는 오직 여자의 뒷모습만 보였다.여자는 민도준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채 두 팔로 그의 목을 감고 있었다.키 차이가 많이 나 까치발을 한 탓에 무릎까지 드리웠던 원피스가 위로 조금 당겨졌다.그 시각, 권하윤의 가슴은 미친 듯이
“쾅”하는 소리에 이를 악물고 있던 공태준은 천천히 힘을 풀었다. 입안 전체에 퍼진 피비린내를 맡으며 고개를 돌린 그는 시선을 굳게 닫힌 문에 고정했다.문 위에 작게 나 있는 유리로 뒤엉킨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언뜻언뜻 보였다. 하지만 흐릿한 화면이 오히려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했다.공태준은 그걸 무시하려고 애써 고개를 돌렸지만 머리는 저도 모르게 자꾸만 안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상상했다.하지만 민도준은 그에게 엿들을 기회를 주기 싫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밖으로 나왔다.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소파에 기대앉은 그는 공태준이 아직 서 있자 손을 흔들며 그를 불렀다.“공 가주님도 앉으세요.”공태훈은 소리 없이 소파에 앉았다. 하지만 민도준처럼 흐트러진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를 곧게 펴고 양복이 다리 양쪽에 반듯하게 놓이게끔 반듯한 자세를 취했다.그때, 담배를 피우려던 민도준은 담뱃갑이 텅텅 비어있다는 걸 발견하고는 휙 내팽개치고 차이터를 돌려대기 시작했다.이윽고 껄렁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며 아쉬운 듯 입을 열었다.“참 아쉽네요. 조금만 늦게 왔더라면 블랙썬의 애들을 불러 공 가주님을 잘 모시게 하는 건데. 그러면 무료하게 기다릴 필요도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공태준은 그의 말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마음만 받겠습니다. 오늘은 일에 관한 얘기를 하러 온 거라서요.”“…….”그 시각, 방 안에 있는 권하윤은 밖에서 오가는 대화를 듣고 싶어 문 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방금 민도준에게 된통 당하고 난 지라 다리가 후들거려 문에 바싹 붙기까지 한참이 걸렸다.들어보니 두 사람은 간단한 사업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권하윤은 민도준이 공씨 가문과 손잡은 프로젝트가 적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더욱이 민씨 가문에 있을 때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프로젝트였다.잠시 정신이 팔린 사이 두 사람의 대화는 이미 본론으로 들어간 듯했다.“듣기로 지난번 민 사장님이 약혼하기로 했던 고은지 씨가 우리 은채랑 많이 닮
두 사람은 이번에도 역시 온천 펜션에서 약속을 잡았다.권하윤이 도착했을 때 이남기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이에 그녀는 곧바로 시동을 끄며 그에게 물었다.“어떻게 됐어요? 무슨 소식인데요?”그때 이남기가 그녀에게 모자 하나를 건넸다.“혹시 이거 알아요?”희뿌연 먼지가 쌓인 모자 끝부분에 검붉은 자국이 이미 마른 상태로 묻어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권하윤의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떨리는 손끝으로 모자를 터치하는 순간 귓가에 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윤아…….’머릿속에 맴도는 익숙한 부름소리에 권하윤은 모자를 꽉 움켜잡았다. 그녀는 그 모자가 왜 그 모양 그 꼴이 되었는지 감히 생각할 수 없었다.하지만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희망이 남아 있었다.“은우는 찾았어요? 무사한가요?”이윽고 이남기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말을 보탰다.“혹시 많이 다쳤던가요? 걔가 원래 그래요, 다쳐도 아프다는 소리도 하지 않고 사람을 걱정시켜요. 앞으로 그런 나쁜 버릇은 꼭 고치라고 타일러야겠어요.”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권하윤의 모습에 이남기의 눈빛은 복잡해졌다.“권하윤 씨, 은우 형 정말 죽었어요.”“그럴 리가요.”권하윤은 혼잣말로 중얼댔다.“블랙썬에서 분명 개를 안 기른다고 했는데. 분명 나 속인 건데, 그러니까 은우가 죽었다는 것도 거짓말이어야 하는데.”말하면 할수록 그녀의 소리는 점차 작아지더니 이윽고 옹알이처럼 제대로 들리지조차 않았다.절망보다 희망 끝에 다가온 실망이 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은우는 어디 있는데요? 어디 있어요?”권하윤의 눈빛에 이남기는 안타까운 듯 고개를 돌렸다.“권하윤 씨, 그만 물어보세요.”“왜요? 은우가 어디 있는데요?”이남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은우 형의 시신이 완전하지 않아요.”관자놀이에 전해지는 찢어질 듯한 고통에 권하윤은 간단한 문제도 답을 얻지 못하고 되물었다.“완전하지 않다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 보존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권하윤의 상태가 너무 안 좋은 바람에 이남기가 운전을 담당하게 되었다.심지어 운전하는 동안에도 그는 권하윤의 상태를 이따금 살폈다. 혼절한 뒤로 그녀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가녀린 몸은 마치 조수석에 고정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말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그사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공씨 가문의 리조트였다.호수처럼 고요하던 권하윤의 눈동자도 그 순간 미세하게 흔들렸다.“여긴…….”이남기는 이내 설명했다.“가주님께서 안 계십니다. 만약 걱정된다면 제가 사진으로 보내드릴게요.”“아니에요, 제가 직접 볼래요.”차는 리조트 내부에 있는 한 작은 오두막 앞에 멈춰 섰다.흰 천으로 덮인 좁은 침대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권하윤은 옆에 드리운 손을 꽉 그러쥐었다.이윽고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하지만 그녀가 천을 들어보려 할 때, 이남기가 조심스럽게 주의를 줬다.“사람을 찾아 복구하려고 노력했는데 효과가 이상적이지 않았어요. 보시려면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시기 바랍니다.”권하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흰 천을 살짝 들추었다.그야말로 원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었다.오싹한 백골이 부패한 몸을 뚫고 나왔고 갈기갈기 찢긴 피부와 부서진 뼈에서 성은우의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권하윤은 구역질을 참으며 속으로 눈앞의 시신이 자기가 아는 성은우라고 연신 최면을 걸었다.그러던 그때, 손으로 시체를 만지려는 권하윤의 행동에 이남기가 장갑을 건네더니 그녀가 거절할까 봐 설명을 보탰다.“장갑을 끼시는 게 두 사람한테 다 좋을 거예요.”권하윤은 장갑을 받아 끼기 바쁘게 성은우의 팔부터 확인했다.성은우는 민도준의 총에 맞아 팔에 총상을 입은 적이 있기에 이 시신이 그가 맞다면 무조건 같은 총상흔적이 있을 거다.그리고 다음 순간 같은 총상 흔적을 보는 순간 그녀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총상은 팔뿐만 아니라 이마에도 나 있었다.전에 꿨던 꿈이 갑자기 뇌리에 파고들었다. 그 꿈에서 민도준은
약을 손에 꼭 쥔 권하윤은 시큰거리는 눈을 감은 채 의자에 기댔다. 마지막 남았던 희망마저 타버려 그 자리에는 회색의 잿더미만 남았다.그녀도 이남기의 말이 맞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성은우의 죽음 앞에서 아무 일도 없었듯이 지낼 수 없을 뿐이었다.성은우는 그녀에게 은인일 뿐만 아니라 그녀가 공씨 저택에 있을 때 유일한 친구였다.그런 사람이 민도준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했으니 그녀는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어머니랑 시영이도 해외로 빼돌렸으니 내가 실패하더라도 계속 살 수 있을 거야. 물론 성공한다면, 민도준이…….’권하윤은 힘이 빠진 듯 고개를 뒤로 젖혔다.그 시각, 그녀는 몸이 두 개로 나뉘어져 자꾸만 서로 다른 생각을 주입해 댔다. 그중 반쪽은 자꾸만 민도준이 극악무도한 사람인 데다 친구를 죽였고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 건 그저 아직 흥미가 달아나지 않았을 뿐이라고, 그녀가 공은채의 죽음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걸 알면 가차 없이 죽일 거라고 말해주고 있었고 다른 반쪽은 자꾸만 긍와 함께했던 따뜻한 기억을 되새기게 했다.완전히 미워할수록, 순수하게 좋아할 수도 없는 애매모호한 변두리에서 두 가지 생각은 저로의 의견을 주장하고 있었다.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심장에 권하윤은 약을 잡고 있던 손을 살짝 풀었다.진짜 손을 쓴다 해도 좋은 기회를 찾아야 한다.민도준이 얼마나 눈치 빠른 사람인지 여러 번 경험해 봤기에 이 일을 성공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그러니 그가 생각지도 못하고 미처 준비도 하지 못한 찰나에 공격해야 한다.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싱숭생숭해 난 것 때문인지 권하윤은 돌아가는 길에 작은 사고를 당했다.솔직히 접촉 사고 자체는 큰 사고가 아니었지만 차주가 많이 까다로웠다.자기 차가 새 차여서 수리비 외에도 손해 배상을 하라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결국은 교통경찰이 나서고 나서야 잠잠해졌다.한바탕 고생을 겪고 나서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권하윤은 다시 가던 길을 가려고 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차에 시동이 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