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심장한 민도준의 마지막 한마디에 권하윤은 꿈속에서마저 그의 말을 되새겼다.밤새 꿈에 시달린 그녀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 허리를 감고 있는 손에 아직도 꿈을 꾸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뭐 하는 거예요?”가슴을 밀어내며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민도준은 그녀의 손을 자기 어깨에 올려놓으며 허리를 꽉 감쌌다.“아침 운동.”그렇지 않아도 흐릿하던 머리는 너무 흔들리는 바람에 더 흐리멍덩해졌다.그러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옆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오늘 해야 할 일이 많은지라 그녀는 무거운 몸을 애써 일으켜 세우며 샤워실로 향했다.그리고 다시 샤워실에서 나왔을 때 몸에는 실크 슬립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밖에 입을 옷이 보이지 않았다.‘밖에 있나?’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어 틈새로 확인한 권하윤은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한 듯 밖으로 걸어 나왔다.‘하긴, 민도준 씨 집에 누가 마음대로 쳐들어오겠어.’그렇게 한참 동안 옷을 찾던 그녀는 소파 뒤에서 겨우 자기 것으로 보이는 옷을 찾아냈다.그제야 어제 샤워할 때 민도준이 그녀 대신 옷을 벗겨주고는 아무 데나 버려뒀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하지만 이미 쭈글쭈글해진 원피스를 보는 순간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결국 그대로 입을 수 없다는 생각에 집안 이곳저곳을 뒤지며 다리미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문이 열렸다.…….“공 가주님이 오실 줄은 몰랐네요. 오기 전에 미리 인사라도 주시지 그러셨어요. 그랬다면 제대로 대접했을 텐데.”누군가 대화를 하며 방에 들어선 민도준은 집안에 발을 들여놓기 바쁘게 품에 와락 안기는 여자 때문에 일순 넋을 잃었다.하지만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오던 공태준의 눈에는 오직 여자의 뒷모습만 보였다.여자는 민도준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채 두 팔로 그의 목을 감고 있었다.키 차이가 많이 나 까치발을 한 탓에 무릎까지 드리웠던 원피스가 위로 조금 당겨졌다.그 시각, 권하윤의 가슴은 미친 듯이
“쾅”하는 소리에 이를 악물고 있던 공태준은 천천히 힘을 풀었다. 입안 전체에 퍼진 피비린내를 맡으며 고개를 돌린 그는 시선을 굳게 닫힌 문에 고정했다.문 위에 작게 나 있는 유리로 뒤엉킨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언뜻언뜻 보였다. 하지만 흐릿한 화면이 오히려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했다.공태준은 그걸 무시하려고 애써 고개를 돌렸지만 머리는 저도 모르게 자꾸만 안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상상했다.하지만 민도준은 그에게 엿들을 기회를 주기 싫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밖으로 나왔다.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소파에 기대앉은 그는 공태준이 아직 서 있자 손을 흔들며 그를 불렀다.“공 가주님도 앉으세요.”공태훈은 소리 없이 소파에 앉았다. 하지만 민도준처럼 흐트러진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를 곧게 펴고 양복이 다리 양쪽에 반듯하게 놓이게끔 반듯한 자세를 취했다.그때, 담배를 피우려던 민도준은 담뱃갑이 텅텅 비어있다는 걸 발견하고는 휙 내팽개치고 차이터를 돌려대기 시작했다.이윽고 껄렁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며 아쉬운 듯 입을 열었다.“참 아쉽네요. 조금만 늦게 왔더라면 블랙썬의 애들을 불러 공 가주님을 잘 모시게 하는 건데. 그러면 무료하게 기다릴 필요도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공태준은 그의 말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마음만 받겠습니다. 오늘은 일에 관한 얘기를 하러 온 거라서요.”“…….”그 시각, 방 안에 있는 권하윤은 밖에서 오가는 대화를 듣고 싶어 문 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방금 민도준에게 된통 당하고 난 지라 다리가 후들거려 문에 바싹 붙기까지 한참이 걸렸다.들어보니 두 사람은 간단한 사업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권하윤은 민도준이 공씨 가문과 손잡은 프로젝트가 적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더욱이 민씨 가문에 있을 때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프로젝트였다.잠시 정신이 팔린 사이 두 사람의 대화는 이미 본론으로 들어간 듯했다.“듣기로 지난번 민 사장님이 약혼하기로 했던 고은지 씨가 우리 은채랑 많이 닮
두 사람은 이번에도 역시 온천 펜션에서 약속을 잡았다.권하윤이 도착했을 때 이남기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이에 그녀는 곧바로 시동을 끄며 그에게 물었다.“어떻게 됐어요? 무슨 소식인데요?”그때 이남기가 그녀에게 모자 하나를 건넸다.“혹시 이거 알아요?”희뿌연 먼지가 쌓인 모자 끝부분에 검붉은 자국이 이미 마른 상태로 묻어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권하윤의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떨리는 손끝으로 모자를 터치하는 순간 귓가에 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윤아…….’머릿속에 맴도는 익숙한 부름소리에 권하윤은 모자를 꽉 움켜잡았다. 그녀는 그 모자가 왜 그 모양 그 꼴이 되었는지 감히 생각할 수 없었다.하지만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희망이 남아 있었다.“은우는 찾았어요? 무사한가요?”이윽고 이남기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말을 보탰다.“혹시 많이 다쳤던가요? 걔가 원래 그래요, 다쳐도 아프다는 소리도 하지 않고 사람을 걱정시켜요. 앞으로 그런 나쁜 버릇은 꼭 고치라고 타일러야겠어요.”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권하윤의 모습에 이남기의 눈빛은 복잡해졌다.“권하윤 씨, 은우 형 정말 죽었어요.”“그럴 리가요.”권하윤은 혼잣말로 중얼댔다.“블랙썬에서 분명 개를 안 기른다고 했는데. 분명 나 속인 건데, 그러니까 은우가 죽었다는 것도 거짓말이어야 하는데.”말하면 할수록 그녀의 소리는 점차 작아지더니 이윽고 옹알이처럼 제대로 들리지조차 않았다.절망보다 희망 끝에 다가온 실망이 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은우는 어디 있는데요? 어디 있어요?”권하윤의 눈빛에 이남기는 안타까운 듯 고개를 돌렸다.“권하윤 씨, 그만 물어보세요.”“왜요? 은우가 어디 있는데요?”이남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은우 형의 시신이 완전하지 않아요.”관자놀이에 전해지는 찢어질 듯한 고통에 권하윤은 간단한 문제도 답을 얻지 못하고 되물었다.“완전하지 않다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 보존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권하윤의 상태가 너무 안 좋은 바람에 이남기가 운전을 담당하게 되었다.심지어 운전하는 동안에도 그는 권하윤의 상태를 이따금 살폈다. 혼절한 뒤로 그녀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가녀린 몸은 마치 조수석에 고정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말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그사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공씨 가문의 리조트였다.호수처럼 고요하던 권하윤의 눈동자도 그 순간 미세하게 흔들렸다.“여긴…….”이남기는 이내 설명했다.“가주님께서 안 계십니다. 만약 걱정된다면 제가 사진으로 보내드릴게요.”“아니에요, 제가 직접 볼래요.”차는 리조트 내부에 있는 한 작은 오두막 앞에 멈춰 섰다.흰 천으로 덮인 좁은 침대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권하윤은 옆에 드리운 손을 꽉 그러쥐었다.이윽고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하지만 그녀가 천을 들어보려 할 때, 이남기가 조심스럽게 주의를 줬다.“사람을 찾아 복구하려고 노력했는데 효과가 이상적이지 않았어요. 보시려면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시기 바랍니다.”권하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흰 천을 살짝 들추었다.그야말로 원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었다.오싹한 백골이 부패한 몸을 뚫고 나왔고 갈기갈기 찢긴 피부와 부서진 뼈에서 성은우의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권하윤은 구역질을 참으며 속으로 눈앞의 시신이 자기가 아는 성은우라고 연신 최면을 걸었다.그러던 그때, 손으로 시체를 만지려는 권하윤의 행동에 이남기가 장갑을 건네더니 그녀가 거절할까 봐 설명을 보탰다.“장갑을 끼시는 게 두 사람한테 다 좋을 거예요.”권하윤은 장갑을 받아 끼기 바쁘게 성은우의 팔부터 확인했다.성은우는 민도준의 총에 맞아 팔에 총상을 입은 적이 있기에 이 시신이 그가 맞다면 무조건 같은 총상흔적이 있을 거다.그리고 다음 순간 같은 총상 흔적을 보는 순간 그녀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총상은 팔뿐만 아니라 이마에도 나 있었다.전에 꿨던 꿈이 갑자기 뇌리에 파고들었다. 그 꿈에서 민도준은
약을 손에 꼭 쥔 권하윤은 시큰거리는 눈을 감은 채 의자에 기댔다. 마지막 남았던 희망마저 타버려 그 자리에는 회색의 잿더미만 남았다.그녀도 이남기의 말이 맞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성은우의 죽음 앞에서 아무 일도 없었듯이 지낼 수 없을 뿐이었다.성은우는 그녀에게 은인일 뿐만 아니라 그녀가 공씨 저택에 있을 때 유일한 친구였다.그런 사람이 민도준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했으니 그녀는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어머니랑 시영이도 해외로 빼돌렸으니 내가 실패하더라도 계속 살 수 있을 거야. 물론 성공한다면, 민도준이…….’권하윤은 힘이 빠진 듯 고개를 뒤로 젖혔다.그 시각, 그녀는 몸이 두 개로 나뉘어져 자꾸만 서로 다른 생각을 주입해 댔다. 그중 반쪽은 자꾸만 민도준이 극악무도한 사람인 데다 친구를 죽였고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 건 그저 아직 흥미가 달아나지 않았을 뿐이라고, 그녀가 공은채의 죽음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걸 알면 가차 없이 죽일 거라고 말해주고 있었고 다른 반쪽은 자꾸만 긍와 함께했던 따뜻한 기억을 되새기게 했다.완전히 미워할수록, 순수하게 좋아할 수도 없는 애매모호한 변두리에서 두 가지 생각은 저로의 의견을 주장하고 있었다.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심장에 권하윤은 약을 잡고 있던 손을 살짝 풀었다.진짜 손을 쓴다 해도 좋은 기회를 찾아야 한다.민도준이 얼마나 눈치 빠른 사람인지 여러 번 경험해 봤기에 이 일을 성공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그러니 그가 생각지도 못하고 미처 준비도 하지 못한 찰나에 공격해야 한다.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싱숭생숭해 난 것 때문인지 권하윤은 돌아가는 길에 작은 사고를 당했다.솔직히 접촉 사고 자체는 큰 사고가 아니었지만 차주가 많이 까다로웠다.자기 차가 새 차여서 수리비 외에도 손해 배상을 하라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결국은 교통경찰이 나서고 나서야 잠잠해졌다.한바탕 고생을 겪고 나서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권하윤은 다시 가던 길을 가려고 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차에 시동이 걸리
“놀랐나 봐요. 몸에 힘이 안 들어가요.”힘없는 말과 함께 자기 손바닥에 얼굴을 비벼대는 권하윤의 행동에 민도준은 피식 웃으며 차가운 그녀의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이리 와. 내가 위로해 줄게.”곧이어 들리는 그의 말에 권하윤은 고분고분 그의 다리 위에 앉더니 이내 고개를 그의 품에 파묻었다.새끼 고양이 같은 그녀의 행동에 마음이 녹았는지 민도준은 아이 달래듯 그녀의 등을 토닥여 줬다.“진짜 무서웠나 보네?”“네.”나른핫 콧소리를 내며 눈을 내리깐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죽는 줄 알았어요.”곧이어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그렇다면 왜 전화로 나한테 유언을 남기지 않았어?”“저를 귀찮아할까 봐요.”권하윤은 애교 섞인 모습으로 아무 밀도 없었던 것처럼 머리를 그의 품에 비벼댔다.“혹시 저 귀찮아할 거예요?”사람을 홀리는 듯한 웃음소리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가슴의 진동과 함께 그녀에게 전해졌다.“그렇다고 하면 귀찮게 안 할 거야?”“네.”“계속 귀찮게 해도 돼. 이미 익숙해졌으니까.”머리를 쓰다듬으며 내뱉은 민도준의 말에 권하윤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봐도 도무지 웃음이 나지 않았다.이윽고 자기를 떼어놓으려고 하는 민도준을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이제 내려.”민도준이 그녀의 엉덩이를 토닥 재촉했지만 권하윤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오히려 자기 얼굴을 그의 품에 파묻더니 낮은 소리로 웅얼거렸다.“싫어요.”억지를 부리는 그녀의 모습에 민도준은 피식 웃었다.“이젠 떼까지 쓰는 걸 보니 내가 너무 오냐오냐해 줬나 보네? 안 내리면 차 밖으로 내던져…….”그리고 그때, 말을 채 내뱉지도 않았는데 말캉한 촉감이 그의 입술을 막아버렸다.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민도준을 눈썹을 치켜올렸다.지금껏 흰 종이처럼 깨끗하기만 하던 권하윤의 얼굴에는 화려한 색이 더해진 것처럼 눈이 부셨다.심지어 작은 손도 쉬지 않고 민도준의 가슴을 쓸어올리며 짙은 암시를 보냈다.하지만 민도준은
그다음 며칠 동안 차가 없는 권하윤은 외출도 거의 하지 않고 먹고 자는 시간 외에 주인을 기다리는 애완동물처럼 민도준만 하염없이 기다렸다.지금 이 순간마저 민도준은 한 손으로 핸드폰을 하며 다른 한 손으로 그의 다리 위에 엎드려 있는 권하윤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심지어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한민혁마저 그 광경에 굳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안에는 그가 발 들여놓을 곳이 없이 온통 둘만의 세상인 것 같았다.“손이 쓸모없다고 생각되면 내가 부러트리는 거 도와줄게.”싸늘한 눈빛에 한민혁은 흠칫 놀라 재빨리 손을 등 뒤에 숨겼다.“저기, 권하윤 씨도 있다는 거 깜빡 잊었어. 다음부터는 꼭 노크할게.”이윽고 그는 민도준이 눈길을 자기 팔로 옮길까 봐 얼른 본론으로 들어갔다.“조 사장 쪽 움직임이 또 심상치 않아. 오늘 로건이 주변을 어슬렁대는 이상한 놈 하나 잡아들였는데 보러 갈래?”일전에 권씨 가문이 무너지면서 조 사장이 홍옥정에서 벌였던 짓까지 덜미를 잡혔었다.하지만 그들이 미리 소식을 접해 장 형사가 사람을 데리고 들이닥쳤을 때 홍옥정에는 개미 한 마리 남아있지 않았다.조 사장은 민도준과 원한이 깊은 사람 중 하나이기에 그의 아래에 있는 똘마니가 민도준의 구역에 왔다는 말에 권하윤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때마침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그녀를 발견한 민도준은 다리를 슬쩍 움직여 그녀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궁금해?”그 동작에 권하윤은 아래로 미끌어지지 않으려고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조 사장이 도준 씨한테 해라도 끼칠까 봐 걱정돼서 그러죠.”“하.”민도준의 웃음소리에는 광기가 담겨 있었다.“무서울 게 뭐 있어? 내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많아. 그런데도 무사하잖아.”별다른 뜻 없이 내뱉은 말같았지만 권하윤의 심장은 덜컹 내려앉았다.그 사이 민도준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붉은 자국이 난 채 멍하니 앉아 있는 권하윤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가 볼래?”그는 권하윤이 거절하기도 전에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하지만
바디워시 냄새가 욕실 안 열기에 흩어지면서 신경을 자극하던 피비린내를 겨우 덮어버렸다.하지만 침대에 누운 지 한참이나 흘렀지만 권하윤은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컴컴한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그도 그럴 것이, 눈을 감으면 자꾸만 뼈가 으스러지고 살점이 찢긴 채로 애원하고 울부짖던 남자의 모습이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것도 모자라 성은우의 얼굴이 자꾸만 겹쳐 보였다.솔직히 요 며칠 동안 그녀는 매일이다시피 꿈에서 성은우를 만났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계속 아무것도 하지 않고 미루다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민도준 옆에 붙어있다 보면 언젠가 그와 술을 마실 기회가 찾아오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원래부터 술을 좋아하지 않는지는 모르겠으나 민도준은 며칠 동안 단 한 번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설마 내가 여기 있어서 술 마시러 갈 시간이 없나?’하지만 이곳에 있지 않는다면 기회를 엿볼 수가 없다.솔직히 술에 이렇게 집착하는 건, 술이 약효를 촉진하는 원인도 있지만 민도준에게 술을 먹이지 않으면 예리한 그를 상대로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한참 동안 머리를 굴리던 그녀는 더 이상 기회만 기다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밤새도록 그 문제에 시달린 권하윤은 다음날 민도준이 떠난 후에도 여전히 멍해 있었다.“권하윤 씨, 왜 안 먹어요?”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아침을 배달해 온 한민혁을 바라보더니 대충 둘러댔다.“죽이 뜨거워서요.”“아. 그럼 천천히 드세요 저는 나가볼게요.”“잠깐만요.”권하윤은 한민혁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네?”한민혁은 괜히 겁을 먹었지만 아예 블랙썬에 눌러앉다시피 살고 있는 권하윤을 보더니 이제 곧 사모님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거절하지 않았다.“무슨 부탁인데요?”“그게, 여기를 조금 색다르게 꾸며 줬으면 해서요…….”‘아, 뭐 이벤트 해주려는 거구나?’그제야 한민혁은 안도의 한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