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이번에도 역시 온천 펜션에서 약속을 잡았다.권하윤이 도착했을 때 이남기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이에 그녀는 곧바로 시동을 끄며 그에게 물었다.“어떻게 됐어요? 무슨 소식인데요?”그때 이남기가 그녀에게 모자 하나를 건넸다.“혹시 이거 알아요?”희뿌연 먼지가 쌓인 모자 끝부분에 검붉은 자국이 이미 마른 상태로 묻어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권하윤의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떨리는 손끝으로 모자를 터치하는 순간 귓가에 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윤아…….’머릿속에 맴도는 익숙한 부름소리에 권하윤은 모자를 꽉 움켜잡았다. 그녀는 그 모자가 왜 그 모양 그 꼴이 되었는지 감히 생각할 수 없었다.하지만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희망이 남아 있었다.“은우는 찾았어요? 무사한가요?”이윽고 이남기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말을 보탰다.“혹시 많이 다쳤던가요? 걔가 원래 그래요, 다쳐도 아프다는 소리도 하지 않고 사람을 걱정시켜요. 앞으로 그런 나쁜 버릇은 꼭 고치라고 타일러야겠어요.”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권하윤의 모습에 이남기의 눈빛은 복잡해졌다.“권하윤 씨, 은우 형 정말 죽었어요.”“그럴 리가요.”권하윤은 혼잣말로 중얼댔다.“블랙썬에서 분명 개를 안 기른다고 했는데. 분명 나 속인 건데, 그러니까 은우가 죽었다는 것도 거짓말이어야 하는데.”말하면 할수록 그녀의 소리는 점차 작아지더니 이윽고 옹알이처럼 제대로 들리지조차 않았다.절망보다 희망 끝에 다가온 실망이 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은우는 어디 있는데요? 어디 있어요?”권하윤의 눈빛에 이남기는 안타까운 듯 고개를 돌렸다.“권하윤 씨, 그만 물어보세요.”“왜요? 은우가 어디 있는데요?”이남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은우 형의 시신이 완전하지 않아요.”관자놀이에 전해지는 찢어질 듯한 고통에 권하윤은 간단한 문제도 답을 얻지 못하고 되물었다.“완전하지 않다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 보존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권하윤의 상태가 너무 안 좋은 바람에 이남기가 운전을 담당하게 되었다.심지어 운전하는 동안에도 그는 권하윤의 상태를 이따금 살폈다. 혼절한 뒤로 그녀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가녀린 몸은 마치 조수석에 고정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말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그사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공씨 가문의 리조트였다.호수처럼 고요하던 권하윤의 눈동자도 그 순간 미세하게 흔들렸다.“여긴…….”이남기는 이내 설명했다.“가주님께서 안 계십니다. 만약 걱정된다면 제가 사진으로 보내드릴게요.”“아니에요, 제가 직접 볼래요.”차는 리조트 내부에 있는 한 작은 오두막 앞에 멈춰 섰다.흰 천으로 덮인 좁은 침대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권하윤은 옆에 드리운 손을 꽉 그러쥐었다.이윽고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하지만 그녀가 천을 들어보려 할 때, 이남기가 조심스럽게 주의를 줬다.“사람을 찾아 복구하려고 노력했는데 효과가 이상적이지 않았어요. 보시려면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시기 바랍니다.”권하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흰 천을 살짝 들추었다.그야말로 원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었다.오싹한 백골이 부패한 몸을 뚫고 나왔고 갈기갈기 찢긴 피부와 부서진 뼈에서 성은우의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권하윤은 구역질을 참으며 속으로 눈앞의 시신이 자기가 아는 성은우라고 연신 최면을 걸었다.그러던 그때, 손으로 시체를 만지려는 권하윤의 행동에 이남기가 장갑을 건네더니 그녀가 거절할까 봐 설명을 보탰다.“장갑을 끼시는 게 두 사람한테 다 좋을 거예요.”권하윤은 장갑을 받아 끼기 바쁘게 성은우의 팔부터 확인했다.성은우는 민도준의 총에 맞아 팔에 총상을 입은 적이 있기에 이 시신이 그가 맞다면 무조건 같은 총상흔적이 있을 거다.그리고 다음 순간 같은 총상 흔적을 보는 순간 그녀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총상은 팔뿐만 아니라 이마에도 나 있었다.전에 꿨던 꿈이 갑자기 뇌리에 파고들었다. 그 꿈에서 민도준은
약을 손에 꼭 쥔 권하윤은 시큰거리는 눈을 감은 채 의자에 기댔다. 마지막 남았던 희망마저 타버려 그 자리에는 회색의 잿더미만 남았다.그녀도 이남기의 말이 맞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성은우의 죽음 앞에서 아무 일도 없었듯이 지낼 수 없을 뿐이었다.성은우는 그녀에게 은인일 뿐만 아니라 그녀가 공씨 저택에 있을 때 유일한 친구였다.그런 사람이 민도준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했으니 그녀는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어머니랑 시영이도 해외로 빼돌렸으니 내가 실패하더라도 계속 살 수 있을 거야. 물론 성공한다면, 민도준이…….’권하윤은 힘이 빠진 듯 고개를 뒤로 젖혔다.그 시각, 그녀는 몸이 두 개로 나뉘어져 자꾸만 서로 다른 생각을 주입해 댔다. 그중 반쪽은 자꾸만 민도준이 극악무도한 사람인 데다 친구를 죽였고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 건 그저 아직 흥미가 달아나지 않았을 뿐이라고, 그녀가 공은채의 죽음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걸 알면 가차 없이 죽일 거라고 말해주고 있었고 다른 반쪽은 자꾸만 긍와 함께했던 따뜻한 기억을 되새기게 했다.완전히 미워할수록, 순수하게 좋아할 수도 없는 애매모호한 변두리에서 두 가지 생각은 저로의 의견을 주장하고 있었다.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심장에 권하윤은 약을 잡고 있던 손을 살짝 풀었다.진짜 손을 쓴다 해도 좋은 기회를 찾아야 한다.민도준이 얼마나 눈치 빠른 사람인지 여러 번 경험해 봤기에 이 일을 성공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그러니 그가 생각지도 못하고 미처 준비도 하지 못한 찰나에 공격해야 한다.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싱숭생숭해 난 것 때문인지 권하윤은 돌아가는 길에 작은 사고를 당했다.솔직히 접촉 사고 자체는 큰 사고가 아니었지만 차주가 많이 까다로웠다.자기 차가 새 차여서 수리비 외에도 손해 배상을 하라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결국은 교통경찰이 나서고 나서야 잠잠해졌다.한바탕 고생을 겪고 나서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권하윤은 다시 가던 길을 가려고 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차에 시동이 걸리
“놀랐나 봐요. 몸에 힘이 안 들어가요.”힘없는 말과 함께 자기 손바닥에 얼굴을 비벼대는 권하윤의 행동에 민도준은 피식 웃으며 차가운 그녀의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이리 와. 내가 위로해 줄게.”곧이어 들리는 그의 말에 권하윤은 고분고분 그의 다리 위에 앉더니 이내 고개를 그의 품에 파묻었다.새끼 고양이 같은 그녀의 행동에 마음이 녹았는지 민도준은 아이 달래듯 그녀의 등을 토닥여 줬다.“진짜 무서웠나 보네?”“네.”나른핫 콧소리를 내며 눈을 내리깐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죽는 줄 알았어요.”곧이어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그렇다면 왜 전화로 나한테 유언을 남기지 않았어?”“저를 귀찮아할까 봐요.”권하윤은 애교 섞인 모습으로 아무 밀도 없었던 것처럼 머리를 그의 품에 비벼댔다.“혹시 저 귀찮아할 거예요?”사람을 홀리는 듯한 웃음소리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가슴의 진동과 함께 그녀에게 전해졌다.“그렇다고 하면 귀찮게 안 할 거야?”“네.”“계속 귀찮게 해도 돼. 이미 익숙해졌으니까.”머리를 쓰다듬으며 내뱉은 민도준의 말에 권하윤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봐도 도무지 웃음이 나지 않았다.이윽고 자기를 떼어놓으려고 하는 민도준을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이제 내려.”민도준이 그녀의 엉덩이를 토닥 재촉했지만 권하윤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오히려 자기 얼굴을 그의 품에 파묻더니 낮은 소리로 웅얼거렸다.“싫어요.”억지를 부리는 그녀의 모습에 민도준은 피식 웃었다.“이젠 떼까지 쓰는 걸 보니 내가 너무 오냐오냐해 줬나 보네? 안 내리면 차 밖으로 내던져…….”그리고 그때, 말을 채 내뱉지도 않았는데 말캉한 촉감이 그의 입술을 막아버렸다.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민도준을 눈썹을 치켜올렸다.지금껏 흰 종이처럼 깨끗하기만 하던 권하윤의 얼굴에는 화려한 색이 더해진 것처럼 눈이 부셨다.심지어 작은 손도 쉬지 않고 민도준의 가슴을 쓸어올리며 짙은 암시를 보냈다.하지만 민도준은
그다음 며칠 동안 차가 없는 권하윤은 외출도 거의 하지 않고 먹고 자는 시간 외에 주인을 기다리는 애완동물처럼 민도준만 하염없이 기다렸다.지금 이 순간마저 민도준은 한 손으로 핸드폰을 하며 다른 한 손으로 그의 다리 위에 엎드려 있는 권하윤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심지어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한민혁마저 그 광경에 굳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안에는 그가 발 들여놓을 곳이 없이 온통 둘만의 세상인 것 같았다.“손이 쓸모없다고 생각되면 내가 부러트리는 거 도와줄게.”싸늘한 눈빛에 한민혁은 흠칫 놀라 재빨리 손을 등 뒤에 숨겼다.“저기, 권하윤 씨도 있다는 거 깜빡 잊었어. 다음부터는 꼭 노크할게.”이윽고 그는 민도준이 눈길을 자기 팔로 옮길까 봐 얼른 본론으로 들어갔다.“조 사장 쪽 움직임이 또 심상치 않아. 오늘 로건이 주변을 어슬렁대는 이상한 놈 하나 잡아들였는데 보러 갈래?”일전에 권씨 가문이 무너지면서 조 사장이 홍옥정에서 벌였던 짓까지 덜미를 잡혔었다.하지만 그들이 미리 소식을 접해 장 형사가 사람을 데리고 들이닥쳤을 때 홍옥정에는 개미 한 마리 남아있지 않았다.조 사장은 민도준과 원한이 깊은 사람 중 하나이기에 그의 아래에 있는 똘마니가 민도준의 구역에 왔다는 말에 권하윤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때마침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그녀를 발견한 민도준은 다리를 슬쩍 움직여 그녀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궁금해?”그 동작에 권하윤은 아래로 미끌어지지 않으려고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조 사장이 도준 씨한테 해라도 끼칠까 봐 걱정돼서 그러죠.”“하.”민도준의 웃음소리에는 광기가 담겨 있었다.“무서울 게 뭐 있어? 내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많아. 그런데도 무사하잖아.”별다른 뜻 없이 내뱉은 말같았지만 권하윤의 심장은 덜컹 내려앉았다.그 사이 민도준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붉은 자국이 난 채 멍하니 앉아 있는 권하윤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가 볼래?”그는 권하윤이 거절하기도 전에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하지만
바디워시 냄새가 욕실 안 열기에 흩어지면서 신경을 자극하던 피비린내를 겨우 덮어버렸다.하지만 침대에 누운 지 한참이나 흘렀지만 권하윤은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컴컴한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그도 그럴 것이, 눈을 감으면 자꾸만 뼈가 으스러지고 살점이 찢긴 채로 애원하고 울부짖던 남자의 모습이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것도 모자라 성은우의 얼굴이 자꾸만 겹쳐 보였다.솔직히 요 며칠 동안 그녀는 매일이다시피 꿈에서 성은우를 만났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계속 아무것도 하지 않고 미루다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민도준 옆에 붙어있다 보면 언젠가 그와 술을 마실 기회가 찾아오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원래부터 술을 좋아하지 않는지는 모르겠으나 민도준은 며칠 동안 단 한 번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설마 내가 여기 있어서 술 마시러 갈 시간이 없나?’하지만 이곳에 있지 않는다면 기회를 엿볼 수가 없다.솔직히 술에 이렇게 집착하는 건, 술이 약효를 촉진하는 원인도 있지만 민도준에게 술을 먹이지 않으면 예리한 그를 상대로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한참 동안 머리를 굴리던 그녀는 더 이상 기회만 기다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밤새도록 그 문제에 시달린 권하윤은 다음날 민도준이 떠난 후에도 여전히 멍해 있었다.“권하윤 씨, 왜 안 먹어요?”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아침을 배달해 온 한민혁을 바라보더니 대충 둘러댔다.“죽이 뜨거워서요.”“아. 그럼 천천히 드세요 저는 나가볼게요.”“잠깐만요.”권하윤은 한민혁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네?”한민혁은 괜히 겁을 먹었지만 아예 블랙썬에 눌러앉다시피 살고 있는 권하윤을 보더니 이제 곧 사모님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거절하지 않았다.“무슨 부탁인데요?”“그게, 여기를 조금 색다르게 꾸며 줬으면 해서요…….”‘아, 뭐 이벤트 해주려는 거구나?’그제야 한민혁은 안도의 한숨
민도준의 말에 권하윤은 일순 난처해졌다.사실 얼마 전 차에서 미친 듯이 하고 난 뒤로 며칠 동안 걷는 것조차 불편해 엉기적거렸었다. 당연히 민도준이 눈치채지 못했을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보니 그녀의 착각일 뿐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부끄러워할 때가 아니기에 권하윤은 민도준의 손목을 살짝 잡아당겼다.“앉아요.”민도준은 그녀가 잡아당기는 대로 자리에 앉더니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으로 눈길을 돌리며 입꼬리를 올렸다.“이건 흥을 돋우는 용도인가?”권하윤은 이내 손을 뻗어 와인을 집어 들더니 민도준이 보는 앞에서 빈 잔에 따라 그에게 건넸다.하지만 민도준은 그걸 받지 않고 오히려 입꼬리를 올렸다.“이렇게 마시는 건 너무 시시하지 않아?”권하윤은 역시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와인잔을 내려놓았다.“무슨 뜻이죠?”“게임 하나 할래?”민도준은 서랍에서 주사위 하나를 꺼내며 제안했다.“주사위 게임 알아?”권하윤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억지를 부리려 했다.“제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이거 나 괴롭히는 거잖아요.”“간단해. 큰 수인지 작은 수인지 알아 맞추는 게임이야. 하윤 씨가 이기면 내가 마시고 내가 이기면 하윤 씨가 마시고.”‘운에 맡기자고?’그렇다 한들 확률은 같기에 민도준이 어떻게든 마실 확률은 있었다.한참 생각하던 끝에 권하윤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그나마 권하윤의 “편리”를 생각해 민도준은 주사위 하나만 사용하기로 했다.핏줄이 불룩 튀어나온 팔뚝은 주사위를 흔드는 동작에 맞춰 움찍대다가 권하윤의 김장한 시선 속에서 우뚝 멈춰서더니 잇따라 주사위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이윽고 민도준은 담배를 입에 물더니 뒤로 기대며 흐트러진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하윤 씨가 먼저 맞춰 봐.”권하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 큰 수 혹은 작은 수 중의 하나인데 간단한 문제를 그녀는 한참 동안 생각했다.“작은…… 수요.”“직접 열어 봐.”민도준이 고개를 까닥이며 내뱉은 말에 권하윤은 조심스럽게 컵을 열어 봤다.하지만 아쉽게도
벌써 취했는지 눈동자가 흐릿해진 권하윤을 보자 민도준은 흥미로운 듯 그녀의 무거운 고개를 받쳐 들었다.“계속할래?”한참이 걸려서야 초점이 맞춰진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더니 권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민도준의 엄지가 와인색을 입은 그녀의 입술을 슬쩍 문질러댔다.“뭐야? 나 그렇게 이기고 싶어?”“빨리요. 저 작은 수자요.”권하윤이 나지막하게 웅얼거렸다.민도준이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을 뻗어 주사위 컵을 잡았다. 하지만 그러기 바쁘게 그의 품속에 있던 권하윤이 갑자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멈추지 마요. 제가 멈추라고 하면 멈춰야 돼요.”이윽고 그녀는 주사위가 컵을 치며 “짤그락”대는 소리를 듣다가 갑자기 민도준의 팔을 잡아당겼다.“멈춰요.”술에 취해 잔뜩 높아진 그녀의 톤과 명령하는 말투에도 민도준은 화를내지 않고 고분고분 따랐다.그리고 그때, 권하윤이 자신만만한 듯 컵을 들어 올렸다. 이번 판은 무조건 이겼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하지만 컵 아래의 주사위는 6을 가리키고 있었다.어지럽던 머리는 숫자를 확인하고 난 뒤 더 어질거렸다. 이윽고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혼잣말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너무 취해서 잘못 봤나 보네.”민도준은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권하윤을 다시 잡아 오더니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설마 룰을 안 지킬 거야? 진 사람이 마시기로 했잖아.”연거푸 와인 몇 잔을 들이켠 권하윤은 속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가슴이 답답하고 더워져 정신이 혼미해졌고 심지어 본인이 뭘 하려고 했던지조차 잊어버린 채로 민도준의 품속으로 숨어들었다.“내일 마실게요. 내일…….”하지만 얼마 피하지 못하고 민도준에게 다시 잡혔다.“자기야. 도박을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오늘 일은 오늘 끝을 봐야지. 자, 마셔.”곧이어 술잔이 입가에 닿는 바람에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었다.민도준도 당연하다는 듯 그녀가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권하윤이 갑자기 그의 목덜미를 팔로 감더니 술을 머금은 채 입술을 그의 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