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연은 민도준의 포악한 눈빛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 시각, 권하윤 역시 민도준 눈에 드리운 살기와 목덜미에 툭 튀어나온 핏줄을 발견하고는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민도준의 가슴을 살살 긁었다.지금 같은 다사다난한 시기 강수연에게 뭔 짓을 했다간 강씨 가문을 상대하는 것도 골치아플게 뻔하기에 권하윤은 민도준이 말썽을 일으키는 걸 원치 않았다.미처 거두어들이지 못한 작은 손이 마침 눈에 들어온 순간 민도준은 눈을 살짝 들어 권하윤을 바라봤다. 이윽고 걱정 가득한 권하윤의 눈빛을 마주하자 그제야 들끓던 화가 조금이나마 사라졌다.품속의 여인을 살짝 주무르다가 눈꺼풀을 든 순간 다시 건들건들하는 원래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이만합시다. 저도 우리 제수씨 재워야 해서요. 만약 보고 싶다면 내일 아침 일찍 방에 들어오시던가요.”민도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강수연한테서 빠득빠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심지어 민도준이 어깨를 스치며 지나갈 때 너무 빠르게 몸을 피하는 바람에 평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하지만 민도준은 앞에 넘어진 사람을 무시한 채 가로 지나며 긴 다리로 문을 닫아버렸다.“쾅!” 하는 소리와 함께 강수연의 몸도 부르르 떨렸다.분노와 공포 그리고 울분의 감정이 뒤섞인 채 강수연은 주먹으로 바닥을 쾅 내리쳤다.그 시각, 복도 끝에서 지팡이를 짚고 있던 민승현이 벌겋게 핏발이 선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봤다.난장판이 된 밖과는 달리 방안은 조용하고 평온하기 그지없었다.민도준은 권하윤을 침대에 눕히자마자 작은 손이 그의 팔을 잡았다.“갈 거예요?”베개 위에 누운 자세로 애타게 바라보는 권하윤의 눈빛에 민도준은 나지막하게 웃으며 권하윤을 자기의 팔 사이에 가두었다.“그러면 뭘 더 원하는데?”광선이 민도준의 넓은 어깨에 가려져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지만 권하윤은 왠지 모르게 안전감이 들었다.이윽고 손을 뻗어 민도준의 팔을 끌어안으며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저 재워준다면서요?”민도준은 손목시계를 힐끗
“네? 뭘 들었다고 그래요?”권하윤은 순간 뻣뻣하게 굳어 공태준한테서 USB를 받았다는 말을 감히 꺼내지는 못하고 모르는 척 연기했다.잇따라 민도준의 입에서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자 권하윤은 왠지 모르게 찔렸는지 이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저 이제 졸려요. 아 졸리다.”“일어나, 씻고 자.”민도준은 손을 들어 누에고치가 되어버린 권하윤을 툭툭 건드렸다.그 말에 엉기적거리며 몸을 일으킨 권하윤은 샤워하고 난 뒤 약을 챙겨 먹었다.그러고 나니 어느새 민도준이 떠날 시간이 되어버렸다.더 이상 민도준을 남겨둘 핑계를 찾을 수 없자 권하윤은 베개에 머리를 푹 파묻고 반짝거리는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민도준을 훔쳐봤다.웃옷을 챙겨 입은 민도준은 마침 그 모습을 발견했다.훔쳐보는 모습이 들키자 권하윤은 재빠르게 고개를 다시 파묻으며 자는 척 연기를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머리를 굴리는 새끼 여우가 따로 없었다.그렇게 한참 동안 자는 척을 하던 권하윤은 방안에 더 이상 인기척이 들리지 않자 침을 꼴깍 삼켰다.‘갔나?’의아한 마음에 눈을 슬쩍 뜬 순간, 권하윤은 눈앞에 있는 민도준의 모습에 놀라 “아”하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놀랐잖아요.”이윽고 놀란 가슴을 진정하며 권하윤은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렸다.그 모습에 민도준은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권하윤의 찡그러진 미간을 펴주었다.“요즘 일이 많으니 얌전하게 있어. 알았지?”권하윤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며 민도준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도준 씨도 조심해요.”“응, 갈게.”민도준이 떠나자 방 안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그 순간 꽉 차 있던 마음마저 텅 비어버렸다.그날 밤, 권하윤은 몸을 뒤척였지만 끝내 잠을 이루지 못했고 머릿속으로 민도준이 했던 말과 민용재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생각했다.그렇게 한참을 생각하고 있을 때, 문밖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들렸다.심지어 울고불고 난리 치는 소리였다.권하윤은 무의식적으로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생각을 하기 바쁘게 쾅 하는 문소리가
권하윤을 본 순간 민상철의 안색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민상철이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권하윤을 겨우 처리하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강민정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무너져 골치 아픈 거겠지.권하윤은 인사만 간단히 하고는 눈치껏 뒤로 슬쩍 물러나 강민정에게 무대를 넘겨주었다.하지만 웬걸? 강민정은 권하윤을 보자마자 이내 달려오더니 또다시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울기 시작했다.“언니, 정말 미안해요. 절대 승현 오빠를 탓하지 마세요. 언니가 오빠한테 마음이 없다는 걸 알고 속상해하는 걸 보고 제가 위로해 줬을 뿐이에요. 언니도 오빠 좋아하는 거 아니잖아요. 그러니 우리 사랑 축복해 줘요.”강민정이 모든 잘못을 자기한테 전가하는 걸 보자 권하윤은 담담하게 웃었다.“그렇게 말할 거 없어요. 두 사람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으니 승현이 민정 씨를 더 좋아하는 것도 당연하죠. 어찌 됐든, 약혼한 날 밤까지 두 사람이 만났잖아요. 그러니 저도 두 사람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해요.”권하윤의 말에 강민정은 표정이 굳더니 바로 반박하려 했지만 분노 섞인 호통 소리가 먼저 울려 퍼졌다.“다들 그만해!”“콜록콜록-”민상철은 버럭 소리 지르기 바쁘게 마치 당장 쓰러지기라도 할 듯 쉴 새 없이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아침에 본채에 찾아와 민상철과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민용재는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보자 얼른 메이드를 불러 차를 올리도록 했다.“아버지, 손주며느리는 누가 됐든 상관없지만 아버지 건강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그때 옆에 있던 강수연도 흐느끼며 끼어들었다.“아버님, 저도 이제 반백을 훨씬 넘은 나이인데 제발 불쌍히 여겨주세요. 우리 승현이 몸도 이제 성치 않은데 대는 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승현이도 아버님 손자잖아요. 이대로 저 아이 대가 끊기는 걸 지켜보실 건가요?”상황을 지켜보고 있자니 권하윤은 민용재의 방법에 다시 한번 혀를 내둘렀다.이 아이의 등장에 민용재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강수연과 민승현 스스로 파혼하게 한
본채를 나오기 바쁘게 아니나 다를까 권하윤은 남쪽 별채로 초대받았다.심지어 저택 안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권하윤은 민용재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나는 이미 약속을 지킨 것 같은데. 칩에 관한 소식은 알아냈나?”권하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민 사장님 손에 확실히 부모님이 남겨주신 칩이 있습니다.”말을 마친 권하윤은 눈에 띄지 않게 민용재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그러자 역시나 사람을 꿰뚫어 볼 것 같은 날카로운 시선이 그나마 조금 느슨해졌다.“칩이 어디 있는지는 아나?”또다시 직설적으로 던진 물음에 권하윤은 숨이 턱 막혔다.민도준이 설령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하라고 했지만 권하윤은 여전히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민용재는 조 사장과 달리 민도준을 진짜 위협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권하윤이 더 많은 사실을 흘릴수록 민도준이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되니 긴장될 수밖에.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흘러지났지만 권하윤은 끝내 민도준의 경고를 떠올리며 깊은숨을 들이켰다.“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블랙썬에 있는 것 같아요.”하지만 권하윤이 숨을 돌리기도 전에 또 다른 물음이 뒤를 이었다.“민도준을 도와 그 칩을 개발하는 사람이 누구지?”그 질문을 듣는 순간 천진난만한 얼굴이 떠오르면서 진소혜의 자기한테 환하게 웃던 모습이 스쳐 지나가 권하윤은 애가 끓었다.‘이걸 진짜 말해도 되나? 말하면 소혜 씨가 위험해지는 건 아닌가?’수많은 생각이 정신을 괴롭혀 육체적으로 느껴졌던 고통보다 백배 괴로웠다.특히 자기의 말 한마디가 가져올 풍파를 생각하니 불안하고 초조했고 민용재가 자기를 시험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소식을 알아보는지 모르다 보니 미칠 지경이었다.하지만 끝내 꽉 잡은 주먹을 스르르 펴면서 목구멍으로 어렵사리 한마디를 뱉어냈다.“블랙썬에서 민 사장님의 사촌 여동생을 본 적 있어요.”“진소혜?”민용재가 곧바로 진소혜의 이름을 뱉어내자 쪼그라들었던 폐에 겨우 공기가 흘러드는 느낌이었다.‘역시 알고 있었네.’하지만 이대로 긴장을
권하윤의 닭살 돋는 말투에 민용재의 미간은 움푹 파이더니 권하윤을 보는 눈빛에 경멸이 한층 더 뒤덮였다.그 눈빛은 권하윤을 권세에 아부하며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남자를 꼬시는 여자로 보는 게 틀림없었다.순식간에 고요해진 공기에 권하윤은 잔뜩 긴장한 채 폐가 쪼그라들 정도로 숨을 참았다.그렇게 한참이 흘러서야 전화 건너편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뭐야? 아침부터 발정 났어?”민도준의 말에 권하윤은 귀가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여상스러운 말투에서 도대체 자기의 뜻을 알아들었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때문에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느라 애를 썼다.“보고 싶어서 그랬죠. 여보는 나 안 보고 싶었어요?”“보고 싶었지. 당장 덮쳐버리고 싶을 만큼.”“…….”민도준의 노골적인 말에 권하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하지만 가장 말문이 막힌 건 아마 옆에서 두 사람의 닭살 돋는 멘트를 듣고 있던 민용재일 거다. 심지어 원래도 싸늘한 눈빛이 한층 더 차가워진 채 권하윤에게 본론으로 들어가라는 사인을 보냈다.그제야 권하윤은 숨을 들이켜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지금 밖이에요? 뭐 해요?”살짝 올라간 끝 음은 권하윤의 심장마저 목 끝까지 들어 올렸다.“박씨 일가를 방문하려던 참이야.”너무 진지한 대답에 권하윤은 순간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하지만 눈을 들어 민용재를 관찰하니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박씨 일가는 경성 재벌가 중 하나인데 크게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은 가문이다. 그건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집 사람들이 원체 소박하기 때문이다.게다가 일전에 박씨 일가 막내딸이 민도준을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끝내 인연이 닿지 않아 해외로 유학하러 갔다는 소문도 돈 적이 있다.‘설마 민도준이 박씨네 막내랑 결혼하려는 건가?’민용재는 순간 경각심이 생겨났다.한편 권하윤은 민용재가 더 이상 지령을 내리지 않자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알았어요. 그러면 일 봐요. 끊을게요.”전화를 끊자 권하윤은 온통 민도준에게 소식을
“필요 없다.”어르신의 안색은 어두울 대로 어두워졌다.“우리 진씨 저택은 너무 작아서 민 사장님 같은 분은 모실 수 없겠네.”“얘들아 손님 배웅해 드려라!”어르신의 말에 옆에 있던 노부인이 극구 말려댔다.“도준이도 어렵게 왔는데 왜 그렇게 쫓아내지 못해서 안달이래요?”“흥, 민씨 가문에서 도련님으로 있던 사람이 우리 같은 작은 가문이 어디 눈에 들겠나?”“영감, 말을 해도 어쩜 그렇게 해요? 도준은 우리 명주 아들이자 우리 외손자인데.”진명주라는 이름을 듣자 어르신의 표정에는 노기가 서렸다.“애초에 명주 그 애가 민씨 가문에 시집가는 걸 반대만 했어도, 명주 걔가 그렇게…… 그렇게…….”심지어 민도준의 두 외삼촌의 눈시울도 이내 붉어졌다.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한 민도준의 얼굴을 보자 어르신은 더욱 진노했다.“소혜가 어리석게 일을 찾아 한다면 난 안 말려. 하지만 우리 가문 전체가 민씨 가문의 권력 다툼에 끌어 들일 생각이걸랑 하지도 마! 꿈 깨!”“…….”어리석다고 한 소리 들은 진소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심지어 저택을 떠날 때마저 고개를 갸웃거리며 따가운 귀를 파댔다. 보아하니 민도준이 떠난 뒤에 또 한바탕 꾸중을 들은 모양이었다.그렇게 오전 내내 꾸중을 듣고 나서인지 차에 오른 진소혜의 눈은 이미 흐릿해 있었다.“내가 뭐랬어? 할아버지는 절대 칩 개발을 도와주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그러게 왜 욕을 사서 먹고 그래?”“네가 좀 쓸모 있으면 나도 아침부터 재수 없게 이러지 않았지.”담배를 피우며 한심하다는 듯 힐끗거리는 민도준의 눈빛에 진소혜는 억울했는지 자기를 가리키며 버럭 소리쳤다.“나 밤낮없이 소처럼 일했어. 게다가 나 혼자서 어떻게 생산팀을 이끌어? 내가 기계인 줄 알아?”진소혜의 말도 틀린 건 아니다.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혼자서 개발 프로젝트 하나를 통째로 책임지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 적어도 팀 하나 정도 있어야 현실성이 있었다.그리고 그걸 실현하려면 제일 좋은 선택지는 바로 진씨 가
권하윤은 한참 동안 마음을 추스르고 난 뒤에야 진소혜가 보내온 문자를 확인했다.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간단한 물음표를 보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긴 문장 하나가 도착했다.간단히 말하면 민도준의 영웅담이었고 상세하게 말하자면 4년 전 민도준이 조 사장의 손에서 웬 부잣집 아가씨를 구했다는 내용이었다.진소혜의 말에 의하면,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아가씨가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실 때 조 사장이 약을 타는 바람에 하마터면 그의 손아귀에 놀아날 뻔했는데 마침 민도준이 나타나 구해준 덕에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한다.하지만 그때 민도준이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 그 부잣집 아가씨는 해외로 멀리 떠나버렸고…….진소혜의 생동한 설명에 권하윤은 당시 상황이 눈앞에 그려졌다.‘아하, 이랬다 이거지?’이윽고 진소혜가 보낸 문자를 찰칵찰칵 캡처하고 나서 [고마워요. 모자라면 소혜 씨한테서 빌릴게요]라는 문자를 보냈다.‘뭐 사람을 구해주는 건 좋은 일이라지만…… 이렇게 흘리고 다녀서야!’물론 조금 질투가 났지만 권하윤은 이일을 마음에 두지는 않았다.현재 가장 걱정되는 건 민도준의 안위뿐이었으니까.‘전화할 때 도준 씨가 내 암시를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모두 사실대로 말한 거잖아.’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어 권하윤은 밤에 제대로 캐물으려고 결심했다.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건 약속했던 저녁이 되기도 전에 민도준을 만나고 말았다.-“저더러 민 사장님과 박민주 씨가 만나는 걸 방해하라는 말씀인가요?”민용재의 긍정적인 답변에 권하윤은 핸드폰을 꽉 그러쥐며 미간을 찌푸렸다.상황을 보아하니 민용재는 이미 민도준이 박씨 가문과 협력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미리 알게 된 것 같았다.게다가 이렇게 중요한 협력 건으로 박민주를 내세웠다는 것에서 박씨 가문의 의도가 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보나 마나 두 사람에게 기회를 마련해 주려는 거겠지.’이런 상황에서 권하윤이 나서면 박씨 가문과 척지는 거나 다름없다.하지만 민용재가 이미 두 사람의 협력을 파괴
어안이 벙벙한 박민주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 시선 속에 웬 여자 하나가 들어왔다.분명 단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왠지 보면 볼수록 남자를 홀리는 듯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데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었다.하지만 박민주가 감탄할 새도 없이 권하윤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민도준과 아는체 했다.“어머,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민 사장님도 여기 차 마시러 오셨군요.”민도준의 시선은 치맛자락 아래로 드러난 권하윤의 새하얀 종아리에 떨어지더니 한참 맴돌다가 점차 잘록한 허리, 그다음으로 깜빡이는 눈에 멈췄다.노골적인 시선에 권하윤의 미소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지만 민도준은 오히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의자에 기대앉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참 공교롭긴 하네.”아직 나이가 어린 박민주는 감정을 숨기는 법을 몰라 곧바로 적대심을 얼굴에 훤히 드러냈다.“누구시죠?”권하윤은 협력 건이 틀어지기라도 할까 봐 얼른 자기 정체를 밝혔다.“안녕하세요, 저는 민승현의 약혼녀 권하윤이예요. 그쪽은 박씨 가문 막내딸 맞죠?”권하윤도 민씨 가문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자 박민주는 이내 경계를 늦추며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네, 박민주라고 해요.”하지만 적대감을 숨겼다고 해서 권하유을 반기는 건 아니었다. 심지어 옆에 서 있는 권하윤을 보면서 자리도 자리를 권하지 않았다.그도 그럴 게, 박민주는 어렵사리 차려진 기회에 민도준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건 원치 않았다.권하윤도 당연히 박민주의 생각을 눈치챘기에 민도준에게 슬그머니 눈빛을 보내며 뭐라고 말하라는 암시를 해댔다.“이미 파혼했으면서 약혼녀는 무슨.”어렵사리 입을 여는 민도준의 모습에 기뻐하려던 것도 잠시, 자기의 거짓말을 바로 까발리는 모습에 권하윤은 순간 욱했다.하지만 마음속에 차오른 화를 드러내지는 않고 민도준 옆의 빈자리에 앉으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에이, 그건 그저 싸우면서 한 얘긴데요 뭘. 커플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잖아요.”“오, 그래? 뭐 싸우고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