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뭘 들었다고 그래요?”권하윤은 순간 뻣뻣하게 굳어 공태준한테서 USB를 받았다는 말을 감히 꺼내지는 못하고 모르는 척 연기했다.잇따라 민도준의 입에서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자 권하윤은 왠지 모르게 찔렸는지 이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저 이제 졸려요. 아 졸리다.”“일어나, 씻고 자.”민도준은 손을 들어 누에고치가 되어버린 권하윤을 툭툭 건드렸다.그 말에 엉기적거리며 몸을 일으킨 권하윤은 샤워하고 난 뒤 약을 챙겨 먹었다.그러고 나니 어느새 민도준이 떠날 시간이 되어버렸다.더 이상 민도준을 남겨둘 핑계를 찾을 수 없자 권하윤은 베개에 머리를 푹 파묻고 반짝거리는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민도준을 훔쳐봤다.웃옷을 챙겨 입은 민도준은 마침 그 모습을 발견했다.훔쳐보는 모습이 들키자 권하윤은 재빠르게 고개를 다시 파묻으며 자는 척 연기를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머리를 굴리는 새끼 여우가 따로 없었다.그렇게 한참 동안 자는 척을 하던 권하윤은 방안에 더 이상 인기척이 들리지 않자 침을 꼴깍 삼켰다.‘갔나?’의아한 마음에 눈을 슬쩍 뜬 순간, 권하윤은 눈앞에 있는 민도준의 모습에 놀라 “아”하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놀랐잖아요.”이윽고 놀란 가슴을 진정하며 권하윤은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렸다.그 모습에 민도준은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권하윤의 찡그러진 미간을 펴주었다.“요즘 일이 많으니 얌전하게 있어. 알았지?”권하윤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며 민도준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도준 씨도 조심해요.”“응, 갈게.”민도준이 떠나자 방 안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그 순간 꽉 차 있던 마음마저 텅 비어버렸다.그날 밤, 권하윤은 몸을 뒤척였지만 끝내 잠을 이루지 못했고 머릿속으로 민도준이 했던 말과 민용재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생각했다.그렇게 한참을 생각하고 있을 때, 문밖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들렸다.심지어 울고불고 난리 치는 소리였다.권하윤은 무의식적으로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생각을 하기 바쁘게 쾅 하는 문소리가
권하윤을 본 순간 민상철의 안색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민상철이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권하윤을 겨우 처리하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강민정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무너져 골치 아픈 거겠지.권하윤은 인사만 간단히 하고는 눈치껏 뒤로 슬쩍 물러나 강민정에게 무대를 넘겨주었다.하지만 웬걸? 강민정은 권하윤을 보자마자 이내 달려오더니 또다시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울기 시작했다.“언니, 정말 미안해요. 절대 승현 오빠를 탓하지 마세요. 언니가 오빠한테 마음이 없다는 걸 알고 속상해하는 걸 보고 제가 위로해 줬을 뿐이에요. 언니도 오빠 좋아하는 거 아니잖아요. 그러니 우리 사랑 축복해 줘요.”강민정이 모든 잘못을 자기한테 전가하는 걸 보자 권하윤은 담담하게 웃었다.“그렇게 말할 거 없어요. 두 사람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으니 승현이 민정 씨를 더 좋아하는 것도 당연하죠. 어찌 됐든, 약혼한 날 밤까지 두 사람이 만났잖아요. 그러니 저도 두 사람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해요.”권하윤의 말에 강민정은 표정이 굳더니 바로 반박하려 했지만 분노 섞인 호통 소리가 먼저 울려 퍼졌다.“다들 그만해!”“콜록콜록-”민상철은 버럭 소리 지르기 바쁘게 마치 당장 쓰러지기라도 할 듯 쉴 새 없이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아침에 본채에 찾아와 민상철과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민용재는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보자 얼른 메이드를 불러 차를 올리도록 했다.“아버지, 손주며느리는 누가 됐든 상관없지만 아버지 건강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그때 옆에 있던 강수연도 흐느끼며 끼어들었다.“아버님, 저도 이제 반백을 훨씬 넘은 나이인데 제발 불쌍히 여겨주세요. 우리 승현이 몸도 이제 성치 않은데 대는 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승현이도 아버님 손자잖아요. 이대로 저 아이 대가 끊기는 걸 지켜보실 건가요?”상황을 지켜보고 있자니 권하윤은 민용재의 방법에 다시 한번 혀를 내둘렀다.이 아이의 등장에 민용재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강수연과 민승현 스스로 파혼하게 한
본채를 나오기 바쁘게 아니나 다를까 권하윤은 남쪽 별채로 초대받았다.심지어 저택 안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권하윤은 민용재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나는 이미 약속을 지킨 것 같은데. 칩에 관한 소식은 알아냈나?”권하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민 사장님 손에 확실히 부모님이 남겨주신 칩이 있습니다.”말을 마친 권하윤은 눈에 띄지 않게 민용재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그러자 역시나 사람을 꿰뚫어 볼 것 같은 날카로운 시선이 그나마 조금 느슨해졌다.“칩이 어디 있는지는 아나?”또다시 직설적으로 던진 물음에 권하윤은 숨이 턱 막혔다.민도준이 설령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하라고 했지만 권하윤은 여전히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민용재는 조 사장과 달리 민도준을 진짜 위협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권하윤이 더 많은 사실을 흘릴수록 민도준이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되니 긴장될 수밖에.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흘러지났지만 권하윤은 끝내 민도준의 경고를 떠올리며 깊은숨을 들이켰다.“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블랙썬에 있는 것 같아요.”하지만 권하윤이 숨을 돌리기도 전에 또 다른 물음이 뒤를 이었다.“민도준을 도와 그 칩을 개발하는 사람이 누구지?”그 질문을 듣는 순간 천진난만한 얼굴이 떠오르면서 진소혜의 자기한테 환하게 웃던 모습이 스쳐 지나가 권하윤은 애가 끓었다.‘이걸 진짜 말해도 되나? 말하면 소혜 씨가 위험해지는 건 아닌가?’수많은 생각이 정신을 괴롭혀 육체적으로 느껴졌던 고통보다 백배 괴로웠다.특히 자기의 말 한마디가 가져올 풍파를 생각하니 불안하고 초조했고 민용재가 자기를 시험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소식을 알아보는지 모르다 보니 미칠 지경이었다.하지만 끝내 꽉 잡은 주먹을 스르르 펴면서 목구멍으로 어렵사리 한마디를 뱉어냈다.“블랙썬에서 민 사장님의 사촌 여동생을 본 적 있어요.”“진소혜?”민용재가 곧바로 진소혜의 이름을 뱉어내자 쪼그라들었던 폐에 겨우 공기가 흘러드는 느낌이었다.‘역시 알고 있었네.’하지만 이대로 긴장을
권하윤의 닭살 돋는 말투에 민용재의 미간은 움푹 파이더니 권하윤을 보는 눈빛에 경멸이 한층 더 뒤덮였다.그 눈빛은 권하윤을 권세에 아부하며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남자를 꼬시는 여자로 보는 게 틀림없었다.순식간에 고요해진 공기에 권하윤은 잔뜩 긴장한 채 폐가 쪼그라들 정도로 숨을 참았다.그렇게 한참이 흘러서야 전화 건너편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뭐야? 아침부터 발정 났어?”민도준의 말에 권하윤은 귀가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여상스러운 말투에서 도대체 자기의 뜻을 알아들었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때문에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느라 애를 썼다.“보고 싶어서 그랬죠. 여보는 나 안 보고 싶었어요?”“보고 싶었지. 당장 덮쳐버리고 싶을 만큼.”“…….”민도준의 노골적인 말에 권하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하지만 가장 말문이 막힌 건 아마 옆에서 두 사람의 닭살 돋는 멘트를 듣고 있던 민용재일 거다. 심지어 원래도 싸늘한 눈빛이 한층 더 차가워진 채 권하윤에게 본론으로 들어가라는 사인을 보냈다.그제야 권하윤은 숨을 들이켜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지금 밖이에요? 뭐 해요?”살짝 올라간 끝 음은 권하윤의 심장마저 목 끝까지 들어 올렸다.“박씨 일가를 방문하려던 참이야.”너무 진지한 대답에 권하윤은 순간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하지만 눈을 들어 민용재를 관찰하니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박씨 일가는 경성 재벌가 중 하나인데 크게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은 가문이다. 그건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집 사람들이 원체 소박하기 때문이다.게다가 일전에 박씨 일가 막내딸이 민도준을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끝내 인연이 닿지 않아 해외로 유학하러 갔다는 소문도 돈 적이 있다.‘설마 민도준이 박씨네 막내랑 결혼하려는 건가?’민용재는 순간 경각심이 생겨났다.한편 권하윤은 민용재가 더 이상 지령을 내리지 않자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알았어요. 그러면 일 봐요. 끊을게요.”전화를 끊자 권하윤은 온통 민도준에게 소식을
“필요 없다.”어르신의 안색은 어두울 대로 어두워졌다.“우리 진씨 저택은 너무 작아서 민 사장님 같은 분은 모실 수 없겠네.”“얘들아 손님 배웅해 드려라!”어르신의 말에 옆에 있던 노부인이 극구 말려댔다.“도준이도 어렵게 왔는데 왜 그렇게 쫓아내지 못해서 안달이래요?”“흥, 민씨 가문에서 도련님으로 있던 사람이 우리 같은 작은 가문이 어디 눈에 들겠나?”“영감, 말을 해도 어쩜 그렇게 해요? 도준은 우리 명주 아들이자 우리 외손자인데.”진명주라는 이름을 듣자 어르신의 표정에는 노기가 서렸다.“애초에 명주 그 애가 민씨 가문에 시집가는 걸 반대만 했어도, 명주 걔가 그렇게…… 그렇게…….”심지어 민도준의 두 외삼촌의 눈시울도 이내 붉어졌다.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한 민도준의 얼굴을 보자 어르신은 더욱 진노했다.“소혜가 어리석게 일을 찾아 한다면 난 안 말려. 하지만 우리 가문 전체가 민씨 가문의 권력 다툼에 끌어 들일 생각이걸랑 하지도 마! 꿈 깨!”“…….”어리석다고 한 소리 들은 진소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심지어 저택을 떠날 때마저 고개를 갸웃거리며 따가운 귀를 파댔다. 보아하니 민도준이 떠난 뒤에 또 한바탕 꾸중을 들은 모양이었다.그렇게 오전 내내 꾸중을 듣고 나서인지 차에 오른 진소혜의 눈은 이미 흐릿해 있었다.“내가 뭐랬어? 할아버지는 절대 칩 개발을 도와주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그러게 왜 욕을 사서 먹고 그래?”“네가 좀 쓸모 있으면 나도 아침부터 재수 없게 이러지 않았지.”담배를 피우며 한심하다는 듯 힐끗거리는 민도준의 눈빛에 진소혜는 억울했는지 자기를 가리키며 버럭 소리쳤다.“나 밤낮없이 소처럼 일했어. 게다가 나 혼자서 어떻게 생산팀을 이끌어? 내가 기계인 줄 알아?”진소혜의 말도 틀린 건 아니다.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혼자서 개발 프로젝트 하나를 통째로 책임지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 적어도 팀 하나 정도 있어야 현실성이 있었다.그리고 그걸 실현하려면 제일 좋은 선택지는 바로 진씨 가
권하윤은 한참 동안 마음을 추스르고 난 뒤에야 진소혜가 보내온 문자를 확인했다.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간단한 물음표를 보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긴 문장 하나가 도착했다.간단히 말하면 민도준의 영웅담이었고 상세하게 말하자면 4년 전 민도준이 조 사장의 손에서 웬 부잣집 아가씨를 구했다는 내용이었다.진소혜의 말에 의하면,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아가씨가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실 때 조 사장이 약을 타는 바람에 하마터면 그의 손아귀에 놀아날 뻔했는데 마침 민도준이 나타나 구해준 덕에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한다.하지만 그때 민도준이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 그 부잣집 아가씨는 해외로 멀리 떠나버렸고…….진소혜의 생동한 설명에 권하윤은 당시 상황이 눈앞에 그려졌다.‘아하, 이랬다 이거지?’이윽고 진소혜가 보낸 문자를 찰칵찰칵 캡처하고 나서 [고마워요. 모자라면 소혜 씨한테서 빌릴게요]라는 문자를 보냈다.‘뭐 사람을 구해주는 건 좋은 일이라지만…… 이렇게 흘리고 다녀서야!’물론 조금 질투가 났지만 권하윤은 이일을 마음에 두지는 않았다.현재 가장 걱정되는 건 민도준의 안위뿐이었으니까.‘전화할 때 도준 씨가 내 암시를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모두 사실대로 말한 거잖아.’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어 권하윤은 밤에 제대로 캐물으려고 결심했다.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건 약속했던 저녁이 되기도 전에 민도준을 만나고 말았다.-“저더러 민 사장님과 박민주 씨가 만나는 걸 방해하라는 말씀인가요?”민용재의 긍정적인 답변에 권하윤은 핸드폰을 꽉 그러쥐며 미간을 찌푸렸다.상황을 보아하니 민용재는 이미 민도준이 박씨 가문과 협력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미리 알게 된 것 같았다.게다가 이렇게 중요한 협력 건으로 박민주를 내세웠다는 것에서 박씨 가문의 의도가 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보나 마나 두 사람에게 기회를 마련해 주려는 거겠지.’이런 상황에서 권하윤이 나서면 박씨 가문과 척지는 거나 다름없다.하지만 민용재가 이미 두 사람의 협력을 파괴
어안이 벙벙한 박민주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 시선 속에 웬 여자 하나가 들어왔다.분명 단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왠지 보면 볼수록 남자를 홀리는 듯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데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었다.하지만 박민주가 감탄할 새도 없이 권하윤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민도준과 아는체 했다.“어머,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민 사장님도 여기 차 마시러 오셨군요.”민도준의 시선은 치맛자락 아래로 드러난 권하윤의 새하얀 종아리에 떨어지더니 한참 맴돌다가 점차 잘록한 허리, 그다음으로 깜빡이는 눈에 멈췄다.노골적인 시선에 권하윤의 미소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지만 민도준은 오히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의자에 기대앉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참 공교롭긴 하네.”아직 나이가 어린 박민주는 감정을 숨기는 법을 몰라 곧바로 적대심을 얼굴에 훤히 드러냈다.“누구시죠?”권하윤은 협력 건이 틀어지기라도 할까 봐 얼른 자기 정체를 밝혔다.“안녕하세요, 저는 민승현의 약혼녀 권하윤이예요. 그쪽은 박씨 가문 막내딸 맞죠?”권하윤도 민씨 가문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자 박민주는 이내 경계를 늦추며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네, 박민주라고 해요.”하지만 적대감을 숨겼다고 해서 권하유을 반기는 건 아니었다. 심지어 옆에 서 있는 권하윤을 보면서 자리도 자리를 권하지 않았다.그도 그럴 게, 박민주는 어렵사리 차려진 기회에 민도준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건 원치 않았다.권하윤도 당연히 박민주의 생각을 눈치챘기에 민도준에게 슬그머니 눈빛을 보내며 뭐라고 말하라는 암시를 해댔다.“이미 파혼했으면서 약혼녀는 무슨.”어렵사리 입을 여는 민도준의 모습에 기뻐하려던 것도 잠시, 자기의 거짓말을 바로 까발리는 모습에 권하윤은 순간 욱했다.하지만 마음속에 차오른 화를 드러내지는 않고 민도준 옆의 빈자리에 앉으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에이, 그건 그저 싸우면서 한 얘긴데요 뭘. 커플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잖아요.”“오, 그래? 뭐 싸우고
권하윤이 아무리 세게 기침해도 박민주가 민도준의 말을 듣는 걸 막지는 못했다.심지어 테이블 위에 있는 휴지를 뽑아 거리낌 없이 권하윤의 가슴께를 닦아주는 동작은 그야말로 야하기 그지없었다.그 때문에 고개를 들지 않아도 박민주의 분노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어린 나이인지라 박민주는 이내 얼굴을 붉히며 끝내 참고 있던 한마디를 버럭 내뱉었다.“도준 씨, 남녀가 유별난데 어떻게 막 그렇게 행동할 수 있어요?”민도준은 그제야 종이를 테이블 위에 던지며 입을 열었다.“남녀가 유별나면 민주 씨는 어떻게 생겼는데요?”입을 열어 뭐라고 말하려던 권하윤은 민도준의 말에 또 한 번 사레가 들고 말았다.민도준의 시비 거는 말투와 행동에 아름다운 환상이 완전히 깨져버린 박민주는 부끄럽고 분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도준 씨, 설마 우리 가문과 협력하기 싫어요?”위협적인 한마디에 권하윤은 끝내 절망했다.그리고 그와 동시에 민도준의 표정도 그새 날카로워졌다.“하, 지금 나 협박하는 건가? 뭔가 오해하고 있나 본데, 내가 박씨 가문에 나랑 협력할 기회를 준 거지, 박씨 일가가 나를 선택한 거 아니에요. 알겠어요? 그리고, 민주 씨 아버지가 민주씨와 나를 만나게 하기 위해 1%의 이익을 내준 건 알아요?”민도준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박민주의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다.그도 그럴 게, 민도준이 그런 조건으로 자기를 만나줬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으니까.순간 사랑에 눈이 멀었던 소녀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았다.심지어 옆에서 지켜보는 권하윤마저 박민주가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박민주의 아버지가 딸을 위해 그렇게 희생했다는 걸 듣자 저도 모르게 아버지 생각이 났다.권하윤의 아버지는 언제나 자식들 앞에서는 엄격한 아버지였는데 권하윤이 애교만 부리면 이내 마음이 약해졌고 그걸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고 항상 엄숙한 표정으로 “다음은 없을 줄 알아”라는 경고를 하곤 했다.지난 기억을 떠올리자 권하윤은 괜히 코끝이 시큰거렸다.심지어 추억에 빠져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