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윤의 닭살 돋는 말투에 민용재의 미간은 움푹 파이더니 권하윤을 보는 눈빛에 경멸이 한층 더 뒤덮였다.그 눈빛은 권하윤을 권세에 아부하며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남자를 꼬시는 여자로 보는 게 틀림없었다.순식간에 고요해진 공기에 권하윤은 잔뜩 긴장한 채 폐가 쪼그라들 정도로 숨을 참았다.그렇게 한참이 흘러서야 전화 건너편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뭐야? 아침부터 발정 났어?”민도준의 말에 권하윤은 귀가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여상스러운 말투에서 도대체 자기의 뜻을 알아들었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때문에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느라 애를 썼다.“보고 싶어서 그랬죠. 여보는 나 안 보고 싶었어요?”“보고 싶었지. 당장 덮쳐버리고 싶을 만큼.”“…….”민도준의 노골적인 말에 권하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하지만 가장 말문이 막힌 건 아마 옆에서 두 사람의 닭살 돋는 멘트를 듣고 있던 민용재일 거다. 심지어 원래도 싸늘한 눈빛이 한층 더 차가워진 채 권하윤에게 본론으로 들어가라는 사인을 보냈다.그제야 권하윤은 숨을 들이켜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지금 밖이에요? 뭐 해요?”살짝 올라간 끝 음은 권하윤의 심장마저 목 끝까지 들어 올렸다.“박씨 일가를 방문하려던 참이야.”너무 진지한 대답에 권하윤은 순간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하지만 눈을 들어 민용재를 관찰하니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박씨 일가는 경성 재벌가 중 하나인데 크게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은 가문이다. 그건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집 사람들이 원체 소박하기 때문이다.게다가 일전에 박씨 일가 막내딸이 민도준을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끝내 인연이 닿지 않아 해외로 유학하러 갔다는 소문도 돈 적이 있다.‘설마 민도준이 박씨네 막내랑 결혼하려는 건가?’민용재는 순간 경각심이 생겨났다.한편 권하윤은 민용재가 더 이상 지령을 내리지 않자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알았어요. 그러면 일 봐요. 끊을게요.”전화를 끊자 권하윤은 온통 민도준에게 소식을
“필요 없다.”어르신의 안색은 어두울 대로 어두워졌다.“우리 진씨 저택은 너무 작아서 민 사장님 같은 분은 모실 수 없겠네.”“얘들아 손님 배웅해 드려라!”어르신의 말에 옆에 있던 노부인이 극구 말려댔다.“도준이도 어렵게 왔는데 왜 그렇게 쫓아내지 못해서 안달이래요?”“흥, 민씨 가문에서 도련님으로 있던 사람이 우리 같은 작은 가문이 어디 눈에 들겠나?”“영감, 말을 해도 어쩜 그렇게 해요? 도준은 우리 명주 아들이자 우리 외손자인데.”진명주라는 이름을 듣자 어르신의 표정에는 노기가 서렸다.“애초에 명주 그 애가 민씨 가문에 시집가는 걸 반대만 했어도, 명주 걔가 그렇게…… 그렇게…….”심지어 민도준의 두 외삼촌의 눈시울도 이내 붉어졌다.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한 민도준의 얼굴을 보자 어르신은 더욱 진노했다.“소혜가 어리석게 일을 찾아 한다면 난 안 말려. 하지만 우리 가문 전체가 민씨 가문의 권력 다툼에 끌어 들일 생각이걸랑 하지도 마! 꿈 깨!”“…….”어리석다고 한 소리 들은 진소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심지어 저택을 떠날 때마저 고개를 갸웃거리며 따가운 귀를 파댔다. 보아하니 민도준이 떠난 뒤에 또 한바탕 꾸중을 들은 모양이었다.그렇게 오전 내내 꾸중을 듣고 나서인지 차에 오른 진소혜의 눈은 이미 흐릿해 있었다.“내가 뭐랬어? 할아버지는 절대 칩 개발을 도와주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그러게 왜 욕을 사서 먹고 그래?”“네가 좀 쓸모 있으면 나도 아침부터 재수 없게 이러지 않았지.”담배를 피우며 한심하다는 듯 힐끗거리는 민도준의 눈빛에 진소혜는 억울했는지 자기를 가리키며 버럭 소리쳤다.“나 밤낮없이 소처럼 일했어. 게다가 나 혼자서 어떻게 생산팀을 이끌어? 내가 기계인 줄 알아?”진소혜의 말도 틀린 건 아니다.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혼자서 개발 프로젝트 하나를 통째로 책임지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 적어도 팀 하나 정도 있어야 현실성이 있었다.그리고 그걸 실현하려면 제일 좋은 선택지는 바로 진씨 가
권하윤은 한참 동안 마음을 추스르고 난 뒤에야 진소혜가 보내온 문자를 확인했다.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간단한 물음표를 보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긴 문장 하나가 도착했다.간단히 말하면 민도준의 영웅담이었고 상세하게 말하자면 4년 전 민도준이 조 사장의 손에서 웬 부잣집 아가씨를 구했다는 내용이었다.진소혜의 말에 의하면,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아가씨가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실 때 조 사장이 약을 타는 바람에 하마터면 그의 손아귀에 놀아날 뻔했는데 마침 민도준이 나타나 구해준 덕에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한다.하지만 그때 민도준이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 그 부잣집 아가씨는 해외로 멀리 떠나버렸고…….진소혜의 생동한 설명에 권하윤은 당시 상황이 눈앞에 그려졌다.‘아하, 이랬다 이거지?’이윽고 진소혜가 보낸 문자를 찰칵찰칵 캡처하고 나서 [고마워요. 모자라면 소혜 씨한테서 빌릴게요]라는 문자를 보냈다.‘뭐 사람을 구해주는 건 좋은 일이라지만…… 이렇게 흘리고 다녀서야!’물론 조금 질투가 났지만 권하윤은 이일을 마음에 두지는 않았다.현재 가장 걱정되는 건 민도준의 안위뿐이었으니까.‘전화할 때 도준 씨가 내 암시를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모두 사실대로 말한 거잖아.’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어 권하윤은 밤에 제대로 캐물으려고 결심했다.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건 약속했던 저녁이 되기도 전에 민도준을 만나고 말았다.-“저더러 민 사장님과 박민주 씨가 만나는 걸 방해하라는 말씀인가요?”민용재의 긍정적인 답변에 권하윤은 핸드폰을 꽉 그러쥐며 미간을 찌푸렸다.상황을 보아하니 민용재는 이미 민도준이 박씨 가문과 협력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미리 알게 된 것 같았다.게다가 이렇게 중요한 협력 건으로 박민주를 내세웠다는 것에서 박씨 가문의 의도가 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보나 마나 두 사람에게 기회를 마련해 주려는 거겠지.’이런 상황에서 권하윤이 나서면 박씨 가문과 척지는 거나 다름없다.하지만 민용재가 이미 두 사람의 협력을 파괴
어안이 벙벙한 박민주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 시선 속에 웬 여자 하나가 들어왔다.분명 단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왠지 보면 볼수록 남자를 홀리는 듯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데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었다.하지만 박민주가 감탄할 새도 없이 권하윤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민도준과 아는체 했다.“어머,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민 사장님도 여기 차 마시러 오셨군요.”민도준의 시선은 치맛자락 아래로 드러난 권하윤의 새하얀 종아리에 떨어지더니 한참 맴돌다가 점차 잘록한 허리, 그다음으로 깜빡이는 눈에 멈췄다.노골적인 시선에 권하윤의 미소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지만 민도준은 오히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의자에 기대앉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참 공교롭긴 하네.”아직 나이가 어린 박민주는 감정을 숨기는 법을 몰라 곧바로 적대심을 얼굴에 훤히 드러냈다.“누구시죠?”권하윤은 협력 건이 틀어지기라도 할까 봐 얼른 자기 정체를 밝혔다.“안녕하세요, 저는 민승현의 약혼녀 권하윤이예요. 그쪽은 박씨 가문 막내딸 맞죠?”권하윤도 민씨 가문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자 박민주는 이내 경계를 늦추며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네, 박민주라고 해요.”하지만 적대감을 숨겼다고 해서 권하유을 반기는 건 아니었다. 심지어 옆에 서 있는 권하윤을 보면서 자리도 자리를 권하지 않았다.그도 그럴 게, 박민주는 어렵사리 차려진 기회에 민도준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건 원치 않았다.권하윤도 당연히 박민주의 생각을 눈치챘기에 민도준에게 슬그머니 눈빛을 보내며 뭐라고 말하라는 암시를 해댔다.“이미 파혼했으면서 약혼녀는 무슨.”어렵사리 입을 여는 민도준의 모습에 기뻐하려던 것도 잠시, 자기의 거짓말을 바로 까발리는 모습에 권하윤은 순간 욱했다.하지만 마음속에 차오른 화를 드러내지는 않고 민도준 옆의 빈자리에 앉으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에이, 그건 그저 싸우면서 한 얘긴데요 뭘. 커플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잖아요.”“오, 그래? 뭐 싸우고
권하윤이 아무리 세게 기침해도 박민주가 민도준의 말을 듣는 걸 막지는 못했다.심지어 테이블 위에 있는 휴지를 뽑아 거리낌 없이 권하윤의 가슴께를 닦아주는 동작은 그야말로 야하기 그지없었다.그 때문에 고개를 들지 않아도 박민주의 분노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어린 나이인지라 박민주는 이내 얼굴을 붉히며 끝내 참고 있던 한마디를 버럭 내뱉었다.“도준 씨, 남녀가 유별난데 어떻게 막 그렇게 행동할 수 있어요?”민도준은 그제야 종이를 테이블 위에 던지며 입을 열었다.“남녀가 유별나면 민주 씨는 어떻게 생겼는데요?”입을 열어 뭐라고 말하려던 권하윤은 민도준의 말에 또 한 번 사레가 들고 말았다.민도준의 시비 거는 말투와 행동에 아름다운 환상이 완전히 깨져버린 박민주는 부끄럽고 분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도준 씨, 설마 우리 가문과 협력하기 싫어요?”위협적인 한마디에 권하윤은 끝내 절망했다.그리고 그와 동시에 민도준의 표정도 그새 날카로워졌다.“하, 지금 나 협박하는 건가? 뭔가 오해하고 있나 본데, 내가 박씨 가문에 나랑 협력할 기회를 준 거지, 박씨 일가가 나를 선택한 거 아니에요. 알겠어요? 그리고, 민주 씨 아버지가 민주씨와 나를 만나게 하기 위해 1%의 이익을 내준 건 알아요?”민도준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박민주의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다.그도 그럴 게, 민도준이 그런 조건으로 자기를 만나줬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으니까.순간 사랑에 눈이 멀었던 소녀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았다.심지어 옆에서 지켜보는 권하윤마저 박민주가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박민주의 아버지가 딸을 위해 그렇게 희생했다는 걸 듣자 저도 모르게 아버지 생각이 났다.권하윤의 아버지는 언제나 자식들 앞에서는 엄격한 아버지였는데 권하윤이 애교만 부리면 이내 마음이 약해졌고 그걸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고 항상 엄숙한 표정으로 “다음은 없을 줄 알아”라는 경고를 하곤 했다.지난 기억을 떠올리자 권하윤은 괜히 코끝이 시큰거렸다.심지어 추억에 빠져 박
권하윤이 엉덩이를 들기 바쁘게 민도준의 손이 권하윤의 엉덩이를 찰싹 내리쳤다.“아주 끝이 없네. 연기에 맛 들였어?”민도준의 말에 원래도 가려는 마음이 없었던 권하윤은 이내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며 투덜거렸다.“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요? 도준 씨와 박씨 가문의 합작 건에 안 좋은 영향이라도 끼칠까 봐 그런 거잖아요. 제가 한 발 뒤로 물러나기까지 했는데도 불만이세요? 참 비위 맞추기 어렵네요.”“아주 점점 기어오르지?”민도준은 권하윤의 삐진 모습을 흥미로운 듯 바라보더니 턱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이에 권하윤은 입을 삐죽거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말머리를 돌렸다.“그런데 박민주 씨가 저렇게 화난 상태로 떠나면 도준 씨와 박씨 가문의 합작 건이 무산되는 거 아니에요?”“누가 박씨 가문과 손잡겠다고 했어?”권하윤은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물론 무심코 벌어진 일이지만 간접적으로 민용재가 바라던 걸 또 이뤄준 셈이니 미안함과 죄책감이 한순간 마음속에 퍼졌다.“제가 또 도준 씨 일 망친 거 아니에요?”자기가 한 일을 떠올리자 고개를 저절로 숙여졌다.하지만 그때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그걸 알긴 아나 보네?”잇따른 민도준의 한마디에 괴로워하던 그때, 커다란 손이 권하윤의 목덜미를 잡더니 권하윤의 입가에 숨결을 불었다.“이리 와, 내가 만회할 방법 가르쳐 줄게.”“저…… 읍…….”난폭한 입맞춤에 목소리가 묻혀버리기도 잠시, 이내 사람의 상상을 자극하는 나지막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그 시각, 민도준은 당황한 듯 도망치는 그림자를 힐끗 보더니 권하윤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더 끈질기게 몰아붙였다.-한편 찻집에서 뛰쳐나온 박민주는 너무 급하게 달린 나머지 계단에서 발이 접질려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솔직히 박민주는 방금 자리를 박차고 나오자마자 바로 후회했다.너무 감정적으로 대응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민도준이 자기를 성숙하지 못한 사람으로 볼까 봐 걱정되는 마음이 앞서 돌아가 사과하려고까지 결심했다.방
방금까지 의연한 얼굴로 자기 생각을 어필하던 권하윤은 순간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그러다 한참 뒤, 자신감이 없는 말투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정말 그럴 거예요?”아까까지만 해도 부추기더니 이내 태도를 바꾸는 권하윤의 모습에 민도준은 흥미로운 듯 말을 이었다.“내가 뭘 하겠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질투하는 거야? 내가 만약 앞으로 합작건 때문에 박민주를 매일 만난다면 어쩌려고 그래?”“제가 설마 그런 것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권하윤은 영 내키지 않았지만 여전히 대인배인 척 쿨한 모습을 보였다.하지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민도준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윽고 피식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민도준의 말소리가 잇따라 들렸다.“계속 그렇게 연기 해봐 어디.”권하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민도준이 다른 여자와 가까이 지내는 걸 원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기 때문에 기회를 놓치는 건 더 견딜 수 없었다.민용재는 민상철 곁에서 수십 년 동안 일을 해온 사람인지라 회사 내부에서의 세력도 절대 무시할 수 없다.게다가 회사에서 가장 알짜배기인 인수팀은 민시영과 민승현이 관리하고 있고 대외무역팀은 민용재 손에 있는데 만약 과학기술 단지마저 빼앗기면 민성철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는 날에 회사와 가문은 고스란히 민용재한테로 넘어갈 거다.이런저런 가능성을 고려하느라 권하윤은 한참 동안 눈알을 굴렸다.그 모습을 옆에서 재미있게 지켜보고 있던 민도준은 권하윤의 코를 잡은 채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또 무슨 궁리를 하는 거야?”권하윤은 갑자기 민도준의 손을 잡으며 눈을 반짝였다.“도준 씨, 아니면 저를 도준 씨 외갓집으로 데려가 줘요.”민도준은 그 말에 눈썹을 치켜떴다.“음? 부모를 만나려고?”그 말에 담긴 의미를 바로 이해한 권하윤은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도준 씨와 외갓집 식구들의 관계를 회복해 주려고 그러는 거잖아요.”“정말이야? 미리 말해두는데 하윤 씨가 내 제수씨라는 사실을 외갓
옛날 가옥으로 된 진씨 저택은 운치가 넘치고 심지어 문 앞에 세워둔 자전거 두 대마저 따뜻한 생활 분위기를 더해주었다.갓 마당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어디선가 의아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도준? 네가 왜 또…….”하지만 민도준의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보는 순간 그 목소리는 그대로 뚝 끊기더니 권하윤과 민도준을 번갈아 보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이 아가씨는 누구야?”“아, 우리 제수씨. 제가 지난번에 한 번 보여주겠다고 했잖아요.”민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그 말에 진명제는 어색한 듯 손을 비볐다.“아, 이렇게 빨리 잡아…… 아니, 이렇게 빨리 데려왔구나. 얼른 들어와.”거실에 들어서자 권하윤은 슬며시 주위를 둘러봤다.진씨 저택은 민씨 저택처럼 화려하기보다는 심플하고 소박했다.간단한 테이블과 의자, 벽에 붙어 있는 세계지도,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사과.한참을 보고 있을 때, 허리에 손이 둘리더니 귓가에 희롱하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서워?”권하윤은 너무 놀란 나머지 흠칫하더니 다급하게 민도준의 손길을 피했다.“이러지 마요. 누가 보면 어떡해요!”하지만 권하윤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면 볼수록 민도준은 상황이 더 재미있어 권하윤한테 입을 맞출 것처럼 굴었다.이에 화가 나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한 나머지 권하윤은 손을 퍼덕거리다가 민도준을 물려고 입을 벌렸다.그렇게 투덕거리는 사이, 갑자기 문소리가 들려왔다.권하윤은 얼른 민도준을 밀어버리고 허리를 곧게 세웠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씨 집안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더니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그 순간 분위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괴이해졌다.상석에 앉은 어르신은 돋보기를 끼고 있었는데 주름 하나하나마저 권하윤을 배척하고 있었다.다행히 민도준의 외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는 태도가 괜찮았지만 여전히 걱정 가득한 모습이었다.사람들의 눈빛이 한데 모여들었는데도 민도준은 여전히 장소 불문하고 권하윤을 품에 안고 있었다.“얼른 인사하지 않고 뭐해?”권하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