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윤은 이를 악물고 겉치레적인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사실 민 사장님이 민씨 저택에서 암살당하여 크게 다쳤을 때 저게 마침 발견하고 구해줬거든요.”“뭐?”할머니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물었다.“다쳤다고? 어디가 다쳤는데?”심지어 어르신마저 몸을 앞으로 기웃거렸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고 몰래 민도준을 힐끗거렸다.권하윤은 두 분이 민도준을 걱정한다는 걸 바로 보아내고 기회를 잡았다는 듯 위험천만했던 그날의 상황을 설명했다.뭐 손바닥만 한 상처가 났다느니, 피가 바닥에 흥건해졌다느니 하면서 말이다.그 시각 민도준은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로 열성을 다해 설명하는 권하윤의 모습을 재미나는 듯 바라봤다.‘바닥이 아니라 침대가 흥건해졌겠지.’그날의 상황 설명을 끝낸 권하윤은 한숨을 내쉬며 아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하지만 둘째네 식구는 민 사장님뿐이라서 혼자 모든 걸 버텨야 한다는 게 참 안됐죠. 민 사장님한테는 아무런 뒷배도 없으니까.”솔직히 불쌍한 척하려던 것뿐이었는데 이 모든 걸 말하고 나니 권하윤은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파 민도준을 돌아봤다.그 시각, 민도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로 권하윤을 빤히 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사람을 미혹했다.그 눈빛과 미소에 매료된 권하윤은 저도 모르게 민도준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어떻게 그런 일이. 도준아, 그걸 왜 우리한테 말하지 않았어?”할머니의 한마디에 권하윤은 잠에서 깨기라도 하듯 흠칫하며 동작을 멈췄다.‘나도 참, 사람들 이렇게 많은 데서 뭐 하는 거야!’잠깐 드는 생각에 마음이 심란해지자 권하윤은 아쉬운 듯 민도준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고 나지막하게 대답했다.“맞아요. 민 사장님은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민도준은 예민한 만큼 위험하다.현재는 물론 모든 사람이 민도준을 두려워한다지만, 갓 경성에 왔을 때는 어떠했을까?민용재가 민도준의 부모님께 그런 짓을 하고 그동안 민도준을 가만히 내버려 뒀을 리는 만무하다.그런데 민도준은 그렇게 위험천만한
권하윤은 어안이 벙벙해서 모르쇠로 일관했다.“네? 제 말 진짜예요.”권하윤의 표정을 보자 할머니는 빙그레 웃을뿐 계속해서 간파하지 않았다.“똑똑한 아가씨네. 두 사람이 그런…….”“하.”할머니가 말을 분명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권하윤은 한 순간에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어찌 됐든 자기가 민도준의 제수씨였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하윤 양이 참한 아가씨라는 건 나도 아네. 우리 도준이한테 진심이라는 것도.”할머니는 권하윤을 빤히 바라봤다.“그런데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 앞으로 사람들이 손가락질해 대고 뒤에서 말들이 많을 거네. 두 사람이 앞으로 아이를 가져도 그 아이마저 손가락질받을 수 있겠지. 두 사람이 보통 사람이면 모를까, 하필이면 민씨 가문과 얽힌 사람이니 누군가 일부러 안 좋게 여론을 만들 것도 뻔하고. 이런 것들은 생각해 봤나?”안 생각해 봤을 리 없다.사건의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권하윤을 동생과 몸을 섞고 또 그 형과도 섞은 가벼운 여자로 볼 거라는 것도 안다.심지어 민도준마저 인륜을 파괴하는 파렴치한이라고 말을 듣겠지.권하윤이 고개를 숙이자 할머니는 끝내 마음이 아팠는지 권하윤의 차가운 손을 꼭 쥐었다.“하윤 양, 내 말에 마음이 안 좋을 거란 거 아네. 그런데 나중에 후회하며 서로를 원망하기보다 지금 서로 놓아주는 게 더 좋지 않겠나? 만약 두 사람의 마음이 확고하다면 나도 더 말하지는 않겠다만.”할머니는 심한 말도, 꾸짖는 말도 하지 않았지만 권하윤이 가장 숨기고 싶고 가장 모른 체 하고 싶었던 문제를 앞에 내놓았다.하지만 이럴수록 권하윤의 마음은 답답하고 불안했다.민도준이 씻을 수 없는 오명을 쓰는 것도 싫었고, 자기 때문에 안 좋은 일에 휘말리는 것도 싫었으니까.그러던 그때, 숙였던 고개가 갑자기 들리며 자의 눈빛과 마주하게 되었다.민도준은 권하윤 눈가에 아직 가시지 않은 물기를 보자 눈썹을 들여 올렸다.“누가 이랬어? 아주 땅 파겠네.”말
민씨 저택에 도착했는데도 권하윤은 여전히 눈을 가린 채 울부짖었다.“어떡해, 너무 쪽팔려.”민도준은 권하윤의 칭얼거리는 소리에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권하윤의 손을 내렸다.하지만 진짜로 눈시울을 붉힌 권하윤을 보는 순간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권하윤의 턱을 들어 올렸다.“진짜 울었어?”권하윤은 그저 살짝 답답한 것뿐이었는데 민도준이 이렇게 묻자 눈시울이 더 붉어졌다.“도준 씨 외가 식구들이 제가 도준 씨 제수씨라고 마음에 안 들어 하는데 이제 이미지가 더 나빠졌잖아요.”하지만 그 말을 듣고 있던 민도준은 오히려 피식 웃었다.“내 외가 식구들이 하윤 씨를 어떻게 보든 그게 뭔 상관이야?”권하윤은 순간 말문이 막혀 물기 촉촉한 눈을 들어 민도준을 바라봤다. 그 순간 호박색 눈동자에 드리운 막연함과 서러움에 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다른 사람한테 잘 보일 시간에 오늘 밤을 어떻게 버틸지나 생각해 보는 게 어때?”권하윤의 얼굴을 잡고 있던 손은 아래로 쓱 내려와 권하윤의 가는 목덜미를 야릇하게 비벼댔다.“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한 거 하윤 씨가 말했던 거 맞지?”‘어, 맞는 것 같기는 한데…….’순간 권하윤은 등골이 오싹해 났다.하지만 권하윤이 잔뜩 긴장해서 오늘은 망했다고 울상을 지을 때 민도준의 전화가 울렸다.두 마디 옆에서 엿들어 보니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차에서 내린 권하윤은 민도준을 빤히 쳐다봤다.“어디 가게요?”“응.”이상하게도 방금 전까지 민도준이 너무 자기를 몰아붙이기라도 할까 봐 무서웠는데 이제 가봐야 한다고 하니 오히려 아쉬워졌다.“지금 가요?”팔짱을 끼고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린 채 권하윤은 민도준을 바라봤다.그 모습에 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권하윤을 자기와 차 사이에 가운 채로 입을 열었다.“왜? 아쉬워?”권하윤은 그 자세 그대로 민도준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나지막하게 “네”라고 속삭였다.그 순간 얼굴에는 남자의 손이 문지르는 촉감이 전해지더니 장난기 섞인 목소리
상세한 상황을 들어보니 오빠가 사용했던 신약의 효과가 좋아 의학적으로 획기적인 결과를 얻어냈다. 그걸 들은 누군가 비싼 돈을 드려 치료를 요구했는데 그게 알고 보니 민씨 가문 사람이었다는 소리를 듣자 권하윤은 곧바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 가늠이 갔다.“민용재가 그쪽에 도착했어요? 혹시 대면한 적 있어요?”“민용재?”양현숙은 그 이름에 대해 몰랐기에 어리둥절해했다.“시영이가 몰래 엿들었는데 웬 여자라고 하던데? 성이 원씨라고 하는 것 같았어.”‘원혜정이네.’그 생각이 드는 순간 권하윤은 당황함과 두려움을 감출 수 없었다.원혜정은 겉으로 보기에 부드럽고 다정한 사람 같지만 웃음 뒤에 칼을 숨긴 악독한 사람이다. 심지어 민용재와 똑같은 부류라고 할 수도 있다.그런 사람과 함께 있다는 건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더욱이 민용재가 해외로 가 수술을 받게 된다면 민씨 집안 사람과 맞닥뜨리게 될 지도 모른다.물론 정체를 들킬 가능성은 적지만 그래도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오빠가 아직 퇴원할 수도 없는 상황인데 어떡하지?’권하윤은 마음이 불안했지만 여전히 어머니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괜찮아요. 그 사람들 엄마네를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어요. 아니면 평소에 되도록이면 마주치지 말고, 집안일은 더더욱 입 밖에 내지 마요. 다른 건 저한테 맡겨주고요.”“그래.”답은 이렇게 했지만 양현숙은 그래도 여전히 걱정을 떨쳐낼 수 없었다.“너도 조심해. 네 쪽 상황이 안 좋은 것 같으면 오빠는 우선…….”“그런 말 하지 마요.”권하윤은 양현숙의 말을 끊어버렸다.“우리 가족 모두가 잘 지내야죠.”물론 말은 이렇게 했지만 권하윤은 속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방도도 생각나지 않았다.‘도준 씨한테 도움을 요청할까?’만약 USB를 보지 않았다면 그럴 배짱이 있겠지만 민도준이 공은채와 한번 또 한 번의 생일을 함께 보낸 걸 몇 년 간의 정을 생각하니 왠지 주눅이 들었다.예전에는 단지 가족과 자기의 안위만 걱정됐다면 지금은 민도준이
창밖에서 싸늘한 바람이 안으로 불어드는 데다 민도준의 눈을 마주 보고 있으니 권하윤은 순간 몸이 떨려왔다.낮의 따뜻함은 어느새 사라졌는지 밤이 되자 눈앞의 남자도 밖의 날씨와 함께 식어버렸다.그렇듯 덮쳐온 압박에 권하윤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지난날 민도준의 공포스러운 모습이 이미 머리에 박혀 있어 심장은 주인의 말을 듣지 않고 미친 듯이 뛰어댔다.가족에 관한 일은 절대로 모험할 수 없으니까. 그건 예나 지금이나 권하윤이 지키는 철칙과도 같다.이에 한참 동안 할 말을 생각하던 권하윤은 끝내 입을 열었다.“사실 무서워서 그래요. 오늘 할머님이 하신 말을 듣고 나니 도준 씨한테 폐가 될까 봐요.”불안한 목소리는 방문이 방 안에서 울려 퍼지더니 끝내 정적만 남겼다.권하윤은 감히 고개를 들지조차 못하고 눈을 오롯이 민도준의 가슴에 고정했다.머리카락 사이사이에 있던 손가락은 긴 머리카락을 따라 끝까지 쓸어내리더니 마침 엉켜 있는 뭉치에 걸렸는지 두피를 잡아당겨 고통을 전해주었다.저도 모르게 고개를 든 순간 시선 속에는 남자의 말아 올라간 입꼬리가 보였다. 정서를 알 수 없는 호를 그린 채로.권하윤은 더욱 당황해 민도준의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도준 씨, 혹시 화났어요?”물기 촉촉한 눈에는 남자의 인영이 비쳐 있었다.“내가 화내야 하나?”되돌아온 물음에 권하윤은 당황한 나머지 민도준의 손에 자기 얼굴을 비벼댔다.“화내지 마요. 저 무시하지 마요.”민도준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눈을 내리깔고 자기 손에 얼굴을 비벼대는 권하윤의 얼굴을 바라봤다.손의 온기는 권하윤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심지어 권하윤은 현재 자기의 심정을 어떻게 형용해야 할지도 몰랐다.눈앞의 남자가 좋으면서도 무서웠다.민도준이 가족을 대할 때의 태도에서 권하윤은 눈앞의 남자는 가족이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남자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가장 친한 가족한테도 그러는데 남남인 자기한테는 오죽할까?그러던 그때, 얼굴에 느껴지는 통증이 권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자 권하윤은 눈앞이 몽롱해졌다.지난 이틀 동안의 따뜻하고 아름다웠던 상황이 모두 꿈만 같았다.그 아름다움이 모두 민도준의 관용 덕에 유지될 수 있다는 걸 간과해 버린 탓일까?그 관용마저 사라지자 모든게 신기루처럼 한 순간 사라졌다.담배가 끝까지 타들어 가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담배를 눌러 끈 민도준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은 권하윤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올리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그 웃음 속에는 스스로에 대한 비난이 가득했다.그 순간, 이미 한번 잃어버렸다 다시 얻은 남자의 따뚯함을 또다시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권하윤은 다른 상황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비틀비틀 달려가 민도준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가지 마요. 제발 가지 마요. 저 도준 씨 좋아해요. 도준 씨가 제 곁에서 떠나는 거 싫어요.”권하윤은 민도준이 자기를 다시는 상대하지 않을까 봐, 또 자기한테 실망했을까 봐 무서웠다.그보다 사실 자기가 처음부터 욕서받지 못했을까 봐 더 무서웠다.소리 없이 흐느끼며 떠나지 말라고, 저를 무시하지 말라고 수도 없이 중얼거렸다.새하얀 두 팔이 남자의 손에 의해 풀어지는가 싶더니 민도준은 뒤돌아서서 권하윤이 넘어질세라 꼭 붙잡았다.속눈썹을 촉촉하게 적신 눈물이 볼을 타고 턱까지 흘러내렸다가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내가 가지 말았으면 좋겠어?”권하윤은 있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말해 봐. 오늘 이렇게 죽치고 앉아 밥도 안 먹은 게 무엇 때문인지.”가뜩이나 눈물을 흘려 퉁퉁 부은 두 눈이 따끔할 정도로 아파 났다.속이고 싶지 않았지만 속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자꾸만 권하윤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놨다.그리고 끝내 눈을 감고 내뱉은 한마디.“은우가 걱정돼서요…….”“하.”민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지, 그 개자식이 사고라도 나면 언제나 이렇게 걱정했었지. 전에 뭐라고 했던가? 나더러 그 자식을 이곳으로 데려와 달라고 했던가?”권하윤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약속할게.”권하
민도준은 권하윤이 이 시점에 이런 질문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지 잠깐 의외라는 눈빛을 하더니 두 팔로 침대 가장자리를 짚은 채 권하윤을 내려다보았다.“좋아하지, 그럼. 그런데 그것도 어제까지야.”순간 반짝이던 눈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민도준도 권하윤의 그런 변화를 눈치챘는지 악랄하게 웃더니 손가락으로 권하윤을 톡톡 건드렸다.“걱정하지 마. 하윤 씨를 안 좋아해도 이 몸뚱아리는 아직 좋아하니까.”권하윤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순간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심장이 텅 빈듯한 느낌은 확실히 느껴졌다.권하윤은 마치 생명줄이라도 잡고 있는 것처럼 민도준의 손가락을 꼭 자았다.“그럼 도준 씨는 다른 사람 좋아해 본 적 있어요?”민도준은 기대에 찬 권하윤의 두 눈을 빤히 보다가 달콤한 말을 내뱉던 권하윤의 입술로 시선을 옮기더니 입꼬리를 씩 올렸다.“있지.”순간 민도준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조금 풀리더니 마지막 힘을 끌어내는 듯 어렵사리 질문을 던졌다.“얼마나 좋아했어요?”“…….”민도준의 답을 듣는 순간 권하윤은 손을 스르르 풀며 멍하니 떠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그리고 그 순간부터 네 글자가 자꾸만 메아리치듯 귓가에 들려왔다.‘죽을 만큼.’순간 암흑 속으로 떨어진 것 같은 기분에 말라버린 것 같던 눈물이 또다시 흐르기 시작했다.‘죽을…… 만큼…….’끝없는 어둠에 악몽마저 뒤섞였다.공씨 저택에서 시련을 겪던 캄캄한 시절과 민도준이 목을 조르며 자기가 공은채를 해친 건가 하고 묻는 모습까지 머릿속에 자꾸만 흘러들어 권하윤을 괴롭혔다.심지어 귓가에 전화벨이 울릴 때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았다.밖은 어느새 어두워졌고 손목에는 벌건 흔적이 남아 힘조차 쓰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버둥거리며 애를 쓰고 나서야 권하윤은 핸드폰을 손에 넣었다.액정에 뜬 번호는 모르는 번호였다.“여보세요?”“저예요.”차분한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권하윤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었다.하지만 그 동작을 하려던 찰나
전화를 끊은 권하윤은 핸드폰에서 낯선 번호를 찾기 바쁘게 고민도 없이 전화했다.그리고 권하윤이 전화 올 거라는 걸 알기라도 한 것처럼 전화는 곧바로 연결되었다.“당신이야?”“그래요.”그 말을 들은 순간 권하윤은 화가 치밀어 올라 이불을 꽉 움켜쥐고 나서야 소리 지르는 걸 면할 수 있었다.살짝 흐트러진 권하윤의 숨소리를 알아차렸는지 공태준은 바로 설명했다.“미안해요. 미리 말하지 않아서.”언제나 변하지 않는 평온한 어조에 꾹꾹 눌러 뒀던 권하윤의 감정은 끝내 폭발했다.“공태준, 지금 나를 죽이려는 거야?”어렵사리 가족을 안전한 곳에 보내놓고 이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공태준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니.그런 기분은 마치 그물에 사지와 목이 칭칭 감긴 것처럼 도망갈 수도 살 수도 없을 것만 같았다.전화 건너편에서 공태준은 여전히 평온한 목소리로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그런 뜻 아니에요. 저도 하윤 씨 돕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그 병원은 저랑 아무런 관계도 없는 곳이니 떠나고 싶을 때 아무 때나 떠나도 돼요.”그 말을 들으니 솜에 주먹이라도 휘두른 것처럼 허무했다.“대체 뭐 하려는 거야?”“저랑 말 몇 마디 해줘요. 네?”저와 똑같이 애원하는 목소리에 아까는 거절할 권리라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자격마저 없었다.공태준은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사람의 모든 길을 막아버리니까.애써 냉정을 되찾은 권하윤은 끝내 다시 입을 열었다.“뭔 말이 듣고 싶은데?”“혹시 기억해요? 어느 하루 하윤 씨가 공씨 저택에 있을 때 서원에서 춤췄던 날?”권하윤은 기억한다.그날 성은우가 마침내 하모니카로 음악 한 소절을 불 수 있게 되자 권하윤은 그 멜로디에 맞춰 자유자재로 춤을 췄었다.그러다가 성은우가 분 하모니카 소리가 음 이탈이 나자 권하윤이 얼마나 놀려댔는지 모른다.고작 몇십초 될까말까한 장면이었을 텐데 그게 공태준의 눈에 든 거다.그때는 권하윤이 공씨 저택에 간 지 얼마 되지않는 때었다. 때문에 여전히 미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