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도준은 권하윤이 이 시점에 이런 질문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지 잠깐 의외라는 눈빛을 하더니 두 팔로 침대 가장자리를 짚은 채 권하윤을 내려다보았다.“좋아하지, 그럼. 그런데 그것도 어제까지야.”순간 반짝이던 눈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민도준도 권하윤의 그런 변화를 눈치챘는지 악랄하게 웃더니 손가락으로 권하윤을 톡톡 건드렸다.“걱정하지 마. 하윤 씨를 안 좋아해도 이 몸뚱아리는 아직 좋아하니까.”권하윤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순간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심장이 텅 빈듯한 느낌은 확실히 느껴졌다.권하윤은 마치 생명줄이라도 잡고 있는 것처럼 민도준의 손가락을 꼭 자았다.“그럼 도준 씨는 다른 사람 좋아해 본 적 있어요?”민도준은 기대에 찬 권하윤의 두 눈을 빤히 보다가 달콤한 말을 내뱉던 권하윤의 입술로 시선을 옮기더니 입꼬리를 씩 올렸다.“있지.”순간 민도준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조금 풀리더니 마지막 힘을 끌어내는 듯 어렵사리 질문을 던졌다.“얼마나 좋아했어요?”“…….”민도준의 답을 듣는 순간 권하윤은 손을 스르르 풀며 멍하니 떠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그리고 그 순간부터 네 글자가 자꾸만 메아리치듯 귓가에 들려왔다.‘죽을 만큼.’순간 암흑 속으로 떨어진 것 같은 기분에 말라버린 것 같던 눈물이 또다시 흐르기 시작했다.‘죽을…… 만큼…….’끝없는 어둠에 악몽마저 뒤섞였다.공씨 저택에서 시련을 겪던 캄캄한 시절과 민도준이 목을 조르며 자기가 공은채를 해친 건가 하고 묻는 모습까지 머릿속에 자꾸만 흘러들어 권하윤을 괴롭혔다.심지어 귓가에 전화벨이 울릴 때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았다.밖은 어느새 어두워졌고 손목에는 벌건 흔적이 남아 힘조차 쓰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버둥거리며 애를 쓰고 나서야 권하윤은 핸드폰을 손에 넣었다.액정에 뜬 번호는 모르는 번호였다.“여보세요?”“저예요.”차분한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권하윤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었다.하지만 그 동작을 하려던 찰나
전화를 끊은 권하윤은 핸드폰에서 낯선 번호를 찾기 바쁘게 고민도 없이 전화했다.그리고 권하윤이 전화 올 거라는 걸 알기라도 한 것처럼 전화는 곧바로 연결되었다.“당신이야?”“그래요.”그 말을 들은 순간 권하윤은 화가 치밀어 올라 이불을 꽉 움켜쥐고 나서야 소리 지르는 걸 면할 수 있었다.살짝 흐트러진 권하윤의 숨소리를 알아차렸는지 공태준은 바로 설명했다.“미안해요. 미리 말하지 않아서.”언제나 변하지 않는 평온한 어조에 꾹꾹 눌러 뒀던 권하윤의 감정은 끝내 폭발했다.“공태준, 지금 나를 죽이려는 거야?”어렵사리 가족을 안전한 곳에 보내놓고 이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공태준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니.그런 기분은 마치 그물에 사지와 목이 칭칭 감긴 것처럼 도망갈 수도 살 수도 없을 것만 같았다.전화 건너편에서 공태준은 여전히 평온한 목소리로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그런 뜻 아니에요. 저도 하윤 씨 돕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그 병원은 저랑 아무런 관계도 없는 곳이니 떠나고 싶을 때 아무 때나 떠나도 돼요.”그 말을 들으니 솜에 주먹이라도 휘두른 것처럼 허무했다.“대체 뭐 하려는 거야?”“저랑 말 몇 마디 해줘요. 네?”저와 똑같이 애원하는 목소리에 아까는 거절할 권리라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자격마저 없었다.공태준은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사람의 모든 길을 막아버리니까.애써 냉정을 되찾은 권하윤은 끝내 다시 입을 열었다.“뭔 말이 듣고 싶은데?”“혹시 기억해요? 어느 하루 하윤 씨가 공씨 저택에 있을 때 서원에서 춤췄던 날?”권하윤은 기억한다.그날 성은우가 마침내 하모니카로 음악 한 소절을 불 수 있게 되자 권하윤은 그 멜로디에 맞춰 자유자재로 춤을 췄었다.그러다가 성은우가 분 하모니카 소리가 음 이탈이 나자 권하윤이 얼마나 놀려댔는지 모른다.고작 몇십초 될까말까한 장면이었을 텐데 그게 공태준의 눈에 든 거다.그때는 권하윤이 공씨 저택에 간 지 얼마 되지않는 때었다. 때문에 여전히 미래에
전화를 끊은 순간 권하윤은 힘이 빠지기라도 한 듯 침대 머리맡에 힘없이 몸을 기댔다.낮에 하루 종일 자고 나니 오히려 저녁이 되자 졸음이 없어진 모양이다.공태준이 마침 이런 때에 오빠를 다른 병원으로 옮겨 갔다는 건 권하윤의 일거수일투족이 공태준의 감시를 받고 있다는 뜻이었다.그런 감시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걸 생각하니 권하윤은 등골이 오싹해 이불을 머리끝까지 끄집어 올렸다.‘괜찮아, 은우도 이제 곧 올 테니까. 소중한 사람들만 무사하면 나는 아무렴 괜찮아.’‘도준 씨는…….’민도준이 성은우를 정말로 데려왔다는 걸 생각하자 권하윤은 씁쓸한 느낌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그와 동시에 머릿속을 파고든 건 자꾸만 귓가에 맴돌던 네 글자였다.‘죽을 만큼.’‘도준 씨가 공은채를 그렇게 사랑하나? 그러면 나는?’‘아마 전에 마음이 조금 있었다 할지라도 이제는 완전히 소멸했겠지?’민도준과 오래 지내왔기에 권하윤은 민도준이 인내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심지어 그런 사람을 죽이려고까지 했으니 두 사람 사이에는 이제 완전한 균열이 생겨났다.맑게 갠 날에는 선명하지 않겠지만 비 오는 말이면 세찬 빗물이 그 속을 파고들어 두 사람의 거리를 갈라놓고 늦게 깨달은 권하윤의 진심을 잠가버릴 테고.이불 속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는 지금도 권하윤은 마치 물속에 점점 가라앉은 듯한 느낌이었다.권하윤은 무얼 잡아야 하고 무얼 내려놓아야 할지 막막했고 어디로 가야 할지 그 종점은 어디인지조차 몰랐다.‘어쩌다 이렇게 됐지?’밤새도록 멍하니 온갖 생각에 잠겨 잠을 자지 못한 권하윤은 이튿날 바닥에 발을 딛는 순간 마치 구름 위를 밟는 것만 같았다.어느새 준비했는지 권하윤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은찬은 이미 아침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그러고는 마치 좀비처럼 영혼 없이 걸어 다니는 권하윤을 보자 은찬은 수저를 반듯하게 놓고 일부러 활발한 말투로 권하윤을 달랬다.“오늘 제가 부엌에 다녀왔을 때 뭘 들었는지 아세요? 강민정이 무슨 냄새를 맡든 헛구
권하윤은 허둥지둥 옷소매를 내렸지만 성은우의 표정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렸다.“민 사장이겠네.”“네가 생각한 그런 거 아니야.”권하윤은 사고라도 날까 봐 얼른 소매를 내렸다.“민 사장이 너를 이렇게 대하는 데도 그 사람 편을 들어?”“내가 너무 많이 속여서 그래. 너도 나만 아니었다면 이렇게…….”“윤아.”성은우는 권하윤의 말을 끊었다.“너 누구한테도 잘못한 거 없어.”권하윤은 흠칫하더니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오롯이 자리를 바라보는 성은우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네 삶도 이렇지 않았어야 했어. 너를 괴롭히는 사람도 많은데 너 자신마저 자기를 편히 놔두지 않으면 어떡해?”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권하윤의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뚫러 버린 것만 같았다.애써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와 순간 권하윤을 잠식시키는 바람에 침대에 엎드린 채 서러움을 토해 내버릴 것처럼 서럽게 울어버렸다.끝없이 떨리는 권하윤의 등을 보자 성은우는 손을 들고 잠깐 머뭇거리다 끝내 아무 말도 없이 등을 토닥였다. 평생 여자 한번 달래본 적 없는 것처럼 뻣뻣한 동작이었지만 권하윤에 대한 걱정이 묻어있었다.병실에 있는 남자는 여자의 등을 한번 또 한 번 토닥였다.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힘으로.너무 가볍게 두드리면 위로가 안 될까 봐, 너무 힘을 주면 놀라기라도 할까 봐 힘 조절하는 모습은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다정해 보였다.“얼씨구, 하소연이라도 하는 건가?”비아냥 섞인 목소리가 병실 안에서 울려 퍼지는 순간 권하윤은 놀란 듯 고개를 돌렸다. 심지어 눈에는 아직 흘러내리지 못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전날의 기억이 눈앞에 또렷이 스쳐지나 권하윤은 민도준을 보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몸을 웅크렸다.두려움에 질린 얼굴과 표정은 성은우를 마주하고 있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가끔은 가까워졌다 멀리 도망가 버리는 눈앞의 여자를 두고 뭐라 해야 할지 몰랐다.하지만 민도준은 권하윤의 경계를 무시하고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가며 권하윤을 빤히 내려다보았다.“일어나.
성은우의 몇 마디 말은 마치 가시처럼 권하윤의 심장을 쿡쿡 찔러댔다.성은우는 스스로 멍에를 쓰더라도 권하윤을 속박하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다.하지만 권하윤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어렵사리 한마디를 꺼냈다.“싫어요.”“음?”민도준의 목소리는 정서를 분별할 수 없었다.“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경성을 떠나게 해요. 그러면 도준 씨가 말했던 것처럼…….”권하윤은 목구멍에서 자꾸만 올라오는 떫은맛을 삼키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앞으로 은우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게요.”민도준은 일전에 권하윤에게 이런 선택지를 준 적이 있다. 성은우가 살았든 죽었든 없는 사람처럼 생각하면 예전의 일은 모두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그때는 성은우가 죽었든 살았든 관계하지 않을 수 없어 동의하지 못했지만 성은우가 안전한 지금, 권하윤은 그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이렇게 얽매여 있는 것보다는 자유롭게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고.민도준은 권하윤과 성은우를 번갈아 보더니 갑자기 피식 웃어버렸다.“없는 사람이다 생각하겠다는 거 진심은 맞아? 혹시 내가 없는 곳에서 밀회라도 하려는 건 아니고? 우리 성은우 킬러님이 실력이 뛰어나다는 건 누구나 다 하는 사실인데 몰래 어디 숨어들어 만나고 갈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권하윤은 민도준이 믿지 않을 거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기에 갑자기 무슨 변명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마 권하윤의 약속은 민도준에게는 믿을만한 게 아닐 거다.하지만 권하윤이 어떻게 하면 민도준이 이 사실을 믿게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총성이 들려왔다.“탕, 탕, 탕.”연속 세 번 울리는 총성에 놀라 고개를 돌린 권하윤은 성은우 무릎에서 하염없이 흐르는 피를 보고야 말았다.순간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입만 뻐금거릴 뿐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성은우는 마치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처럼 침대를 짚은 채로 민도준을 바라봤다.“아직도 마음 놓이지 않으시다면 다른 한쪽도 부러트릴 수 있습니다.”
아무런 대답도 얻지 못하자 은찬은 조심스럽게 방으로 돌아갔다.은찬이 같은 하인은 그저 소식을 전해주기만 하면 그만이다. 어떻게 할지는 주인이 알아서 결정할 일이니까.민도준은 담배를 꺼버린 뒤 곧바로 차를 운전해 민씨 저택으로 향했다.본채에 들어서자 휠체어에 앉아 약을 먹고 있는 민상철이 보였다.민상철은 민도준이 안으로 들어섰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약을 먹을 먹는 데만 집중하더니 모두 먹고 난 뒤에는 장 집사를 불러와 입 주변을 닦았다.“여자 치맛자락에서 인제야 나왔어?”민도준은 다리를 꼰 채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더니 긴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를 툭툭 털며 입꼬리를 올렸다.“왜요? 질투라도 하시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여자를 만난다 해도 할아버지는 여전히 제 할아버지니까.”만약 예전 같았으면 민상철은 이런 말을 듣는 순간 바로 화부터 냈겠지만 지금은 그저 손에 든 염주를 내려놓을 뿐이었다.“도준아, 나는 너를 어릴 때부터 후계자로 생각하고 키웠다. 9년 전 네가 18살일 때 회사에 들어오자마자 재능을 보였잖니. 1년 만에 그룹 절반을 거의 공제했으니, 만약 둘째네 부부가…….”잠깐 뜸을 들이던 민상철은 이내 말머리를 틀었다.“네가 능력은 확실히 뛰어나지만 너무 오만하고 눈에 뵈는 게 없다는 게 제일 흠이야. 만약 그 성격 고치지 않으면 결국 모든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어.”민도준은 무심한 듯 손에 들려 있는 라이터를 빙빙 돌려대다가 민상철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서요? 지금 저더러 도나 닦고 착한 일을 해서 덕이나 쌓으라는 거예요? 이제 와서 너무 늦지 않았나?”민상철의 혼탁한 눈동자에는 잠깐 부끄러움이 스쳤지만 이내 숨겼다.“이번 주에 연회를 열어 네가 정식 후계자라는 걸 발표할 거다.”“오?”민도준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제가 민씨 가문을 물려받으면 식구들 남김없이 죽일까 봐 저랑 큰 숙부, 그리고 시영이까지 셋에게 똑같이 나눠줄 생각 아니셨어요? 아니면 황천길에 외로울까 봐 저더러 나머지
민도준의 명령에 한민혁은 성은우를 방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은찬이더러 안에서 지켜보라고 말한 뒤 다시 내려갔다.그 사이 민도준은 1층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워댔다.그 모습을 본 한민혁은 한숨을 내쉬면서 민도준 앞으로 걸어갔다.“도준 형, 사람은 위층으로 보냈어. 블랙썬에 진씨 가문 사람들이 도착했는데 어떡할래?”민도준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접은 채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런 민도준한테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읽어낼 수 없었다.그때 한민혁이 위층 쪽을 힐끗 바라보더니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민용재 쪽에서 움직임이 끊이질 않는 것 같은데 요즘 박씨 가문과도 가깝게 지내는 것 같더라고. 시영 아가씨도 민용재네랑 왕래하는 것 같고. 이런 때에 이렇게 손 놓고 있으면 안 돼.”눈빛 한 번에 한민혁은 바로 목소리를 낮춘 채로 작게 웅얼거렸다.“바람 피우는 현장을 덮치겠으면 위층에서 덮쳐야지 여기서 뭐가 보인다고.”“뭐라고?”순간 들려온 싸늘한 목소리에 한민혁은 스스로 입을 찰싹 때리더니 어색하게 웃었다.“아무 말도 안 했어. 아니면 내가 여기서 지키고 있을 테니 블랙썬 한번 갔다 오는 건 어때?”하지만 민도준이 뭐라 대답하려던 찰나, 위층에서 갑자기 하모니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갓 시작했을 때는 조금 더듬대는 것 같았지만 아주 열심히 불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연주 소리였다. 심지어 듣기에 그닥 좋은 것도 아니었지만 이상하리만치 편안해지는 매력이 있었다.그 시각, 위층에서는 점점 익숙해진 하모니카 소리가 활짝 열린 방에서 흘러나왔다.성은우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저 모퉁이에 기대 한번 또 한 번 의자에 앉은 여자를 위해 그녀가 가르쳐줬던 멜로디를 연주했다.바람이 불자 은찬은 담요를 가져다가 권하윤에게 덮어주려고 하다가 권하윤이 눈물을 글썽이며 성은우를 바라보는 모습을 보았다.순간 눈이 반짝 거렸지만 권하윤을 놀라게라도 할까 봐 은찬은 아무 말도 없이 물러갔다.성은우는 권하윤의 시선을 느꼈는지 하모니카
오후의 햇살은 마룻바닥을 밟으며 슬며시 방안으로 비춰들어 침대 끝자락을 닿을까 싶더니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남자 때문에 더 이상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심지어는 남자의 포악한 분위기에 놀랐는지 조금씩 뒤로 물러나다 조용히 창문으로 빠져나갔다.그와 동시에 하늘도 점점 어두워졌고 권하윤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컴컴한 밤이었다.정신을 차리고 몸을 살짝 움직이고 나서야 권하윤은 자기 손이 민도준의 팔을 감싸고 있고 몸 전체는 민도준의 품에 기대 있다는 걸 알아챘다.얼마나 잠잤는지 사지가 아파 났다.“이제야 깨났어?”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권하윤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하지만 다음 순간 방안 불이 켜지는 바람에 권하윤은 눈을 감았다 떴다를 여러 번 반복하고 나서야 시선이 점차 또렷해졌다.그와 동시에 실루엣만 흐릿하게 보이던 남자의 윤곽이 눈 안에 들어왔다.민도준은 어쩜 이런 사람이 있을까 할 정도로 잘생긴 데다 공격적이고 위험한 분위기를 띠고 있어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심지어 권하윤마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민도준을 빤히 바라봤다.하지만 이상했다.분명 가까운 데 있는데 두 사람의 거리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았으니.호박색 눈동자에 당혹함이 담겨 있었다.민도준은 권하윤의 이런 표정을 거의 본 적 없다.예전에는 그저 비위를 맞추려고 머리를 굴리거나 아니면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도움을 요청하는데 현재는 마치 큰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민도준의 눈부터 시작해 코 그리고 턱에 닿았다.그런 눈빛에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는지 민도준은 끝내 차가운 말투로 말을 꺼냈다.“왜? 설마 기억상실이라도 했다고 할 건가? 이제 나를 모르겠어?”자기가 또 미움을 샀다는 걸 인식한 권하윤은 눈을 내리깔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권하윤이 죽상이 된 모습을 보자 민도준의 눈빛은 더욱 어두워졌다.공기 속에 흐르는 고요함.이런 고요함은 사흘 동안 지속됐다.그리고 마침 나흘인 오늘 밤, 권하윤은 우렛소리에 놀라 깨어나더니 무의식적으로 옆에